미국은 지난 60년간 한국과 군사동맹을 맺고, 원조와 차관, 각종투자로 한국경제를 미국의 대륙진출 교두보에 손색이 없도록 꾸준히 다져왔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한국경제는 불행히도 우리 국민들을 위한 “자립경제”가 아니라 미국의 군사적 교두보로 기능하는 한미동맹에 복무하는 사육경제였습니다. 미국과 보수세력은 한국경제가 우직한 소의 어깨처럼 튼튼하게 성장하였다고 하지만 이는 찬바람을 맞으며 야생에서 성장한 들소의 강인한 어깨가 아닙니다. 철창에 갇혀 미국의 철저한 관리와 통제하에, 배합사료와 성장촉진 주사를 맞으며 급속히 “사육된” 식용 육우의 살찐 어깨에 가깝습니다.
1. 원조로 시작된 대외의존의 뿌리
미국은 해방 후 미군정 시기부터 원조를 앞세워 한국경제의 첫 걸음마를 농락하였습니다.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빌미로 38선 이남에 주둔한 미군은 일본의 생산시설과 재산도 강제몰수해 미군정에 귀속시켰습니다. 박세길의 <다시 쓰는 한국현대사>에 따르면 당시 일본인들은 조선의 모든 공장, 기업의 94%를 소유했다고 합니다. 38선 이남의 경제명맥이 순식간에 미군정에게 넘어간 것입니다.
문제는 몰수 이후였습니다. 미국은 몰수한 일본의 경제시설(적산)을 미국에 충성을 맹세한 친일파들에게 넘겨주며 친미정권에 힘을 실어주었습니다. 이내영의 <한국경제의 관점>에서는, 이와 관련된 하나의 사례를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습니다.
1947년 당시 30여억원으로 평가받던 이 공장은 7억원으로 결정되어 3억 6000만원에 불하되었다. 불하가격은 시가의 1/10에 불과하였다. 게다가 3억 6000만원이라는 대금도 앞으로 15년간 나누어 납부하게 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 거대한 공장의 가격은 사실상 공짜나 마찬가지였던 셈이다.
이처럼 한국의 초기자본은 시장경쟁이 아니라 미국의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인위적으로 선정되었습니다. 한국의 초기자본이 시장경쟁 없이 미군정의 입맛에 따라 구성되었다는 사실은 대미의존으로 시작되었던 한국경제의 뿌리를 집약적으로 보여줍니다.
미국은 일제의 경제시설을 친일파들에게 나눠 준 후에도 1945년 이후 20여 년간 한국에 원조를 통해 한국경제에 개입하였습니다. <표 1>에 따르면 1960년까지 미국이 한국에 제공한 원조총액은 109억 6700만 달러였습니다. 1961년의 한국 GDP가 약 23억 5천만 달러였으니, 당시 미국원조는 한국 GDP의 31%나 되는 절대적 비중이었습니다.
<표 1>에 의하면 전체 원조의 70%가 군사원조였습니다. 미국이 남아도는 농산물을 한국에 본격적으로 투하한 것은 군사원조가 시작된 지 10년도 더 지난 1956년이었습니다. 미국의 잉여농산물 투하는 한국 곡물 생산량의 40%에 달해 한국농업을 무너뜨렸습니다. 원조의 70%는 밀가루였고, 당연히도 한국의 밀농사는 절멸하고 말았습니다.
이승만 정부는 미국에게 받은 원조물자를 삼성 이병철을 비롯한 초기 재벌에게 되팔아서 국가재정을 마련하였습니다. 이렇게 마련된 정부자금을 ‘대충자금(對充資金, counterpart fund)’이라고 합니다. <표 2>를 보면 알 수 있듯이, 미국의 원조가 계속된 1960년대까지 ‘대충자금’은 정부 예산 중 32-52%를 차지하여 그 비중이 절대적이었습니다.
대충자금은 명목상 이승만 정부의 재정이었지만, 사실은 ‘주한미군 경제고문단’이 실권을 장악하고 있는 ‘한미합동경제위원회’에서 운용하였습니다. 이에 더해 당시 미국 원조물자는 주한미대사의 감찰 하에 운용되었으니 당시 한국경제는 미국의 손에 완전히 장악되었던 셈입니다.
2. 차관으로 강요된 하청경제
1950년대 후반, 미국은 제조업 실적에서 서유럽과 일본의 추격을 받자 지정학적 요충지의 여러 친미정권들을 원조로 관리하는 방식에 경제적 부담을 느꼈습니다. 게다가 1960년, “못살겠다 갈아보자”라는 구호 아래 4.19 혁명이 한국사회를 뒤흔들자, 미국은 원조정책을 더 이상 한국에 지속할 수 없었습니다.
미국은 경제개입방식을 미국과 일본의 낡은 생산설비를 한국에 떠넘기는 차관정책으로 전환하였습니다. 차관은 정부, 은행 또는 회사가 상대국의 정부 또는 공적기관으로부터 조건부로 빌리는 자본입니다. 개별 회사가 돈을 빌리고 빌려주면 이는 직접투자가 되지만, 차관은 정부가 관여한다는 점이 다릅니다. 미국과 일본정부가 낡은 설비를 빌려주면, 한국정부는 이를 운영해 할부로 갚는 식이었습니다. 한국은 1960년대부터 무려 1980년대까지 국가경제를 원천적으로 미, 일 차관에 의존했습니다.
차관경제는 본질적으로 미, 일이 노동력이 저렴한 한국시장에 보다 저렴한 “대리생산체제”를 구축한 것입니다. 1992년까지 한국에 도입된 차관은 공공차관 194억 1700만 달러, 상업차관 210억 2200만 달러, 은행차관 174억 2200만 달러로 도합 578억 6100만 달러에 달했습니다. 차관은 당시 한국에 유입된 전체 외국자본의 72.1%를 차지하였습니다.
미국이 빌려주는 차관은 박정희 군사정권의 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62-1966)과 맞아 떨어지면서 이른바 ‘산업화’가 시작되었습니다. 충격적이게도, 박정희 군사정권이 발표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조차 1957년부터 미국에서 입안되기 시작한 미국의 계획이었습니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내용은 미 국방부 연구소인 ‘랜드 코퍼레이션(Rand Corporation)’의 찰스 울프 박사와 미 오리건대학교 경제자문단의 의견을 반영하여 작성되었습니다. 이완범은 논문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입안과 미국의 역할, 1960-1965’에서 미국의 한국 경제개발 계획 입안 개입 과정을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습니다.
미국은 1957년 중반 한국정부의 정책당국자인 김현철 부흥부 장관에게 장기적인 경제개발계획을 내놓아야 원조를 계속하겠다고 통보했다. …… 산업개발위원회(Economic Development Council: EDC)가 부흥부 산하 자문기관으로 1958년 봄에 대통령령에 의거해 설립되었으며, 미국 오레건대학 교수 5명이 자문역으로 초청되었다. …… ‘랜드 코퍼레이션(Rand Corporation)’의 찰스 울프(Charles Wolf, Jr.) 박사는, 1961년은 준비기간으로 잡고 착수년도를 1962년으로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결과적으로 이러한 주장은 민주당 정권이 무너졌음에도 불구하고 채택되었다.
미국은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수립한 이후에도 한미합동경제협력위원회 등 협의기구를 통해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지속적으로 수정, 보완하는데 개입하는 등 박정희 정권의 경제개발계획을 주도하였습니다.
1960-70년대에 한국에 들어온 정유, 섬유, 화학, 제철, 조선 설비는 모두 당시 미국의 차관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섬유기업으로는 제일합섬, 선경, 코오롱, 흥한(현 원진레이온) 등이 설립되었고, 화학기업으로는 삼성석유화학, 호남석유화학, 럭키석유화학(현 LG석유화학) 등이 만들어졌습니다. 정유기업으로는 경인에너지(현 SK에너지), 극동정유(현 현대오일뱅크) 등이 있었습니다.
박정희 정부는 차관으로 들여올 공장설비도 스스로 정하지 못하고 미국과 일본정부의 결정을 따라야 했습니다. 1973년 재정경제부에서 발간한 ‘경제백서’에는 “양국의 경제협력은 해를 거듭함에 따라 그 긴밀도를 더해가고 …… 하지만 그 협력의 양상은 근본적으로 이윤동기에 입각한 상업차관이 중심이 되면서 대상사업의 능동적인 선정은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하여 박정희 정부도 차관을 주도하지 못하고 미, 일이 시키는대로 움직였음을 인정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한국의 경제관료, 기업인들의 대미의존성은 머리 속 깊숙이 뿌리박혀 한국경제가 지금도 대미의존을 극복하지 못하는 중요한 원인이 되고 있습니다.
한국의 재벌들은 차관으로 불하받은 미, 일의 낡은 공장설비에 노동력을 투입해 제품을 싼 값에 수출하였습니다. 일본은 한국생산성본부와 일본경제조사협회의 공동보고서 ‘한일경제협력의 방향과 그 배경’을 발간하면서, “일본과 후진국인 한국과의 사이에 수직적인 국제 분업관계를 설정하여 저생산성, 대외의존성을 특징으로 하고 있는 한국의 경제구조 및 노동력시장구조를 이것과는 대조적인 일본경제에 결부시키고, 그렇게 함으로써 일본경제가 당면하고 있는 구조적인 제 모순을 처리하는데 이바지 한다.”고 하였습니다. 일본은 한국의 저임금 노동을 일본의 제조업과 결합시켜 한국경제를 일본의 하청기지로 만들려 하였습니다. 일본의 생산품을 소비하는 최종소비국인 미국도 일본의 의도를 용인해주어 미국 주도로 입안된 경제개발계획이 진행될수록 한국은 더욱 미, 일의 하청경제로 끌려들어갔습니다. 한국경제가 미국과 일본의 하청기지로 고착화된 시기가 바로 ‘산업화’라고 칭송하는 1970-80년대입니다. 수출 주도 “성장”의 본질은 사실상 미-일 하청 무역이었던 셈입니다.
차관으로 들여온 공장설비를 운영하려면 관련 원료와 중간부품도 수입해야 했습니다. 1960-70년대에 한국의 수입 중 원자재와 중간부품의 비중은 전체수입의 60-70%에 달했습니다. 이 때 고착된 원자재와 부품의 해외의존은 아직까지도 전혀 개선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2009년 기준, 원자재 부품의 수입은 전체 수입품 중 최대 74.6%에 이르고 있습니다.
당시 생산된 완성품은 미국으로 향했습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한국의 대미 수출 비중은 1962년 총수출량의 21.9%에서 1970년에는 총수출량의 42.8%까지 상승하였다고 합니다. 반면 일본과의 무역적자는 계속 커져서, 1990년까지 대일무역 누적적자가 무려 575억 6190만 8000달러에 달하였습니다.
한국은 1980년대에 이르기까지 전체 자본의 30-40%를 외국의 빚(외채)으로 조달했습니다. 미국이 차관제공으로 경제개입 방식을 바꾸자, 한국경제의 대외채무가 끊임없이 불어나 경제종속이 더 심해졌습니다.
3. 미국의 시장개방 요구와 IMF 외환위기
1980년대 이후 미국은 막대한 군비 지출과 농업공황, 제조업 쇠퇴로 인해 무역수지 적자와 재정수지 적자가 동시에 늘어나는 이른바 “쌍둥이 적자”에 직면하였습니다. 미국 기업들은 이윤을 찾아 제조업에서 금융과 서비스업으로 옮기는 한편, 주변국들에게 시장개방을 강요하였습니다. 미국자본이 투자를 다국화하면서 미국자본과 해외자본의 구분은 무의미해졌습니다. 미국이 우루과이 라운드(UR)를 비롯한 새로운 다자간 무역협정을 추진하고,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를 추진하기 시작한 것도 바로 이 때입니다.
미국의 시장개방 요구에서 1순위 대상국은 바로 한국이었습니다. 미국의 통상 개방 압력은 계속 높아져 1985년에는 금융, 보험, 광고, 음료, 농산물, 택배 서비스 등의 광범위한 부문에서 한-미간 시장개방 협상이 이어졌습니다. 전두환 정부는 1986년, 보험업을 개방하였고, 미국영화사의 한국지사 설립을 받아들였으며, 102개 미국상품에 대한 수입 제한을 철폐하였습니다.
1994년 쌀시장 개방으로 시작된 세계화는 시장개방과 더불어 적극적인 외국자본 유입으로 귀결되었습니다. 한국은 1996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하면서 시장개방속도를 더 다그쳤습니다. 당시 김영삼 정부는 “개방으로 인해 수입이 늘어나지만 주력상품의 수출이 수입보다 더 늘어날 것이므로 우리 경제에 도움이 된다.”는 논리로 시장개방을 강행하였습니다.
1990년대를 계기로 한국정부와 중앙은행(한국은행)에 제공되던 외국자본의 장기 차입금은 이제 완전히 자취를 감췄습니다. 차관 도입이 주를 이루었던 과거와 달리 외국자본의 직접투자가 1990년 7억 8900만 달러 규모에서 1996년 23억 2500만 달러 규모로 3배나 증가하였습니다.
이러한 자본 유입의 변화는 1997년 IMF 외환위기를 계기로 한국경제에 전면화되었습니다. 1996년, 한국이 237억 달러의 경상수지 적자를 기록했음에도 불구하고 233억 달러를 빌려주었던 “친절했던” 외국자본은 1997년이 되자 경쟁적으로 자금을 회수했습니다. 1997년 6월, 106.4%에 달하던 외국금융자본의 만기연장률은 7월에 89.1%로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1997년 12월에는 32.2%로 급락하였습니다. 그리하여 1996년에는 126억 달러의 외국자본이 국내에 들어왔지만, 1997년에는 148억 달러가 빠져나갔습니다. 1997년 12월 21일, 미국의 신용평가기관인 무디스 사는 불과 3달 전만 하더라도 “투자적격” 등급이었던 한국의 국가신용등급을 “투기등급”으로 강등시켜 한국의 자금난을 더욱 가중시켰습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1997년 1월 한보철강의 부도는 대기업 연쇄도산사태로 번졌습니다. 이른바 IMF 외환위기가 발생한 것입니다.
IMF는 “구제금융 종식”을 선언한 2001년 8월까지, 외국자본이 한국금융시장에 무제한으로 진출할 수 있게 하였고 금융구조조정이란 이름으로 긴축재정을 내세워 한국의 은행들을 재편하였습니다.
IMF 외환위기 당시 외국자본들은 폭락한 한국주식을 사들여 막대한 수익을 올렸습니다. IMF 이후 서튼 NTS 코리아라는 펀드는 한국 주식시장에서 98.13%의 수익을 올렸으며 버클레이스 ASF 펀드는 90.67%, S&P 코리아 펀드는 70.91%에 달하는 수익을 올리는 등 한국의 자금난을 이용하여 돈을 쓸어 담았습니다. 또한 외국자본은 부동산 부문에서도 돈을 쓸어 담았습니다. 1998년 9월 17일 삼성경제연구소가 발표한 <IMF 충격에 따른 자산 디플레이션 현상과 대책>에 의하면 IMF 이후 실제 땅값은 20%, 업무용 부동산 값은 최고 40% 이상 하락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미국의 피치 IBCA 사는 1998년 8월 3일, 한국은 IMF 외환위기로 인하여 GDP의 20-25% 가량의 손실을 볼 것으로 예측하였습니다. 대외의존의 취약점으로 인해 한국경제가 완전히 망가진 것입니다.
4. 자본투자 증대로 심화되는 종속
미국이 주도하는 IMF는 1989년 워싱턴에서 남미국가들에게 강요했던 10가지 신자유주의 정책, 이른바 ‘워싱턴 컨센서스’를 한국에 그대로 강요했던 것이었습니다.
‘워싱턴 컨센서스’는 미국 정부가 자기 영향아래 있는 IMF, 세계은행 등 국제 금융기관을 동원하여 만든 ‘개방 강요 정책’으로, 그 주요 내용은 정부 공공 예산 삭감, 공공 산업 민영화, 주식과 외환 등 자본시장 완전 개방, 관세 인하로 무역 개방, 비정규직 확대로 노동시장 유연화, 정부 규제 축소, 재산권 보호 강화 등입니다. IMF의 구조조정 정책을 받아들인 80년대 남미, 90년대 아시아의 많은 국가들은 경제주권을 미국 자본에게 빼앗긴 채 수탈당하는 처지로 전락했습니다.
한국경제도 IMF의 구조조정 결과 자본시장이 완전 개방되면서 순식간에 외국자본에 잠식되었습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IMF 외환위기 직전인 1996년 1911억3000만 달러였던 국내 외국자본은 2012년 9451억5000만 달러로 5배 가량 무섭게 확대되었다고 합니다. 그 중 외국인이 보유한 주식은 25배, 직접투자는 5.72배, 채권은 4.9배나 늘었습니다. 구조조정 결과 많은 공기업이 민영화되는 동시에 외국자본에 팔려나갔고, 기아, 대우, 한보 등 대형재벌이 사라졌습니다.
먼저 <표3>, <표4>를 보면, 외국자본은 한국경제의 노른자위인 ① 이른바 수출 대기업, ② 국내에서 독점적으로 서비스를 공급하는 SK텔레콤 등 대기업, ③ KT, 한국전력, 한국담배인삼공사(KT&G) 등 민영화된 공기업 등에 자본을 들이밀었습니다. 게다가 이들은 금융 산업을 완전히 움켜쥠으로써 금융기관을 통한 자본 조달까지 독점하였고 롯데쇼핑 등 도소매업에 투자하여 상품 유통망까지 장악하였습니다.
외국인 직접투자의 분포도 위와 같습니다. 산업통상자원부에 따르면 1997년부터 2012년까지 외국인 직접투자는 제조업중 반도체 등 전기전자에 33.56%, 석유화학에 17.21%, 자동차, 차량부품 등 운송용 기계에 14.87% 순으로 분포되어 있습니다. 이는<표3>의 기업 분포와 거의 유사합니다.
외국자본이 늘어나자 주요 대기업들의 경영권이 외국자본의 강한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되었습니다.
공정거래위원회가 발표한 ‘2013년 대기업집단 주식소유현황 정보공개’ 자료에 따르면 국내에서 총수가 있는 10개 기업집단의 총수가 보유한 주식 지분율은 0.99%에 불과했지만 총수일가 외에 특수관계인과 계열회사 보유 지분을 모두 합친 내부지분율의 경우 무려 52.92%에 달했습니다. 재벌 일가가 1%도 안 되는 주식으로 절반이 넘는 경영권을 행사하였던 것입니다.
재벌 총수 일가는 순환출자구조로 인하여 외국자본에게 경영권을 위협받는 처지로 전락했습니다. 외국자본이 순환출자구조의 취약한 고리를 공략할 경우 재벌 지배구조 전반이 허물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외국자본은 한국에서 재벌들의 경영권을 충분히 위협할 수 있는 지위에 있습니다. 실제로 2003년 외국계 펀드 소버린은 SK그룹의 경영권을 통째로 장악하려 시도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환위기 당시 IMF는 한국 경제 전반을 미국식으로 구조변경하면서도 유독 기형적인 순환출자구조만큼은 유지 온존시켰으며, 외국자본은 지금도 이에 대해 크게 문제 삼지 않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들은 현재 재벌들이 외국자본의 이익을 충실하게 보장해주고 있음을 시사합니다.
결국 재벌 총수 일가는 외국자본의 이익을 최대한 보장함으로써 자신의 경영권을 유지하고 있는 셈입니다. 이는 앞서 살펴본 한국 주요 산업이 사실상 외국자본의 강력한 영향력 아래 놓여 있다는 의미입니다.
5. 기계, 부품소재 공급까지 독점한 외국자본
외국자본은 한국 주요 산업의 원천기술과 지식을 독점하고 통제하며 이를 기반으로 생산기계와 부품, 소재까지 독점 공급해 이익을 올리고 있습니다. 한국은 미국, 일본 등에 원천기술을 독점, 통제당해 ‘지적재산권 등 사용료 수지’에서 대규모 적자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한국은 지적재산권 등 사용료로 2012년에 약 9조 원에 가까운 돈을 외국에 지급하고, 약 5조5000억 원 이상 적자를 보고 있습니다.
원천기술의 독점은 생산기계와 부품, 소재의 독점을 고착화시켰습니다. 관세청의 2012년 수출입동향에 따르면, 수입 원자재와 자본재 품목 중 중간부품과 소재, 기계류 등의 수입총액은 전체 수입액의 45.77%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수출산업은 지금도 수출을 하려면 외국자본으로부터 원자재, 부품, 소재 그리고 생산기계를 수입해야만 합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한국의 주력 수출산업일수록 더욱 수입에 의존하는 구조를 갖고 있다고 합니다. 최종수요가 한 단위 증가할 때 각 산업부문에서 직·간접으로 수입이 유발되는 ‘수입유발계수’가 석유제품(0.720), 화학제품(0.503), 전기 및 전자기기(0.477)로 제조업 평균 (0.410)보다 훨씬 높습니다.
구체적인 산업별 사례를 살펴보자면, 한국 주력 수출 업종인 반도체는 생산 장비의 70%를 외국에서 수입하며, LCD디스플레이 핵심 부품인 액정과 편광판 보호용 TAC필름은 100%, 편광판은 64% 이상을 수입하고 있습니다. 자동차 산업에서도 전장 부품의 대부분을 해외 수입하며, 조선업에서도 정작 시추선의 핵심인 시추장비를 100% 수입하였습니다.
외국자본은 한국이 기계, 원료, 부품, 소재의 상당 부분을 외부에서 수입할 수밖에 없는 독점 구조를 만들어 놓고 비싸게 팔아, 앉아서 이익을 보고 있는 셈입니다.
반면 한국 기업은 생산한 제품을 외국에서 값싸게 팔아야 하는 구조에 놓여 있습니다. 이는 한국 제품이 기술적 제약으로 독점적 지위를 갖지 못하므로, 치열한 국제시장 내의 판매 경쟁 때문에 제 값을 받지 못하는 것이 주된 원인입니다.
결국 한국 수출품은 계속 저렴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한국은행에 의하면, 한국 수출품의 단가는 2005년을 100으로 보았을 때 1988년에 167.5로 상당히 높았습니다. 그러나 한국 수출품의 단가는 지속적으로 하락하여 1997년 137.9, 2012년 106.8까지 하락했습니다. 그나마 2009년 90.5에서 반등한 수치다. 반면 한국 수입품의 단가는 1997년 89.3에서 2012년 136.5까지 상승했습니다.
외국자본은 막대한 수익을 가두어가고 있습니다. 현대증권과 대신증권에 따르면 주식시장 개방 이후 20년간 외국인은 주식 매매차익으로 310조~320조 원을 챙겼을 것이라고 합니다. 또한 지적재산권 독점에 의해 외국으로 지급되는 돈은 2012년 기준으로 연간 9조 원에 달했습니다. 외국자본은 2012년 12월 결산법인 기준으로 4조 원 이상을 주식 배당액으로 가져갔습니다.
6. 종속의 끝판왕 한-미 FTA와 TPP
2008년 미국발 경제위기로 총 4조 1000억 달러에 달하는 금융기관의 손실을 보았습니다. IMF는 이 가운데 약 3조 달러 가량이 미국금융독점자본의 손실이라 추정하였습니다. 미국은 이른바 양적완화조치로 달러를 풀어 경제위기를 타개해보려고 하였지만 도리어 재정지출이 늘어나 미 연방정부의 재정적자는 천문학적으로 증가하고 있습니다. 다급한 미국은 한-미 FTA를 요구하고 한국정부는 날치기 통과를 시키며 이에 화답하였습니다. 한미 FTA는 일반적인 자유무역협정과 다릅니다. 한미 FTA는 단순히 무역관세를 낮추는 것에 머무르지 않고 통상관련 제도와 관련 법규까지를 미국식으로 교체하는 것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최은배 인천지법 부장판사는 한미 FTA가 통과된 2011년 11월 22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뼛속까지 친미인 대통령과 통상 관료들이 서민과 나라살림을 팔아먹은 2011년 11월 22일, 난 이날을 잊지 않겠다”는 글을 올렸습니다. 김하늘 인천지법 부장판사는 12월 9일, 한미 FTA 재협상 연구를 위한 태스크포스(TF) 구성과 관련된 건의문을 판사 166명의 동의를 얻어 대법원에 제출했습니다. 166명의 판사가 동의한 건의문이 대법원장에게 직접 전달되는 일은 매우 이례적이라고 합니다.
한미 FTA는 한국의 법체계를 뒤흔들 소지가 있습니다. 김하늘 부장판사는 “한미 FTA는 미국 투자자가 우리 정부를 상대로 국제투자분쟁해결센터(ICSID)에 제소할 경우 우리 정부가 무조건 이에 동의한 것으로 간주하게 된다.”면서 “이 같은 일반적·포괄적 중재 동의는 (한국정부의) 사법 주권을 침해할 수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실제로 한미 FTA 11.17조와 한미FTA 11.22조 1항에 의하면 미국기업이 국제투자분쟁센터에 제소하면 한국정부는 자동으로 회부되며 우리 국내법이 아니라 한미 FTA 협정과 국제법에 따라 분쟁을 판정한다고 하였습니다. 한국의 국내법이 무시되는 심각한 상황이 초래되는 것입니다.
게다가 한미 FTA는 미래 최혜국 대우 항목도 있습니다. 차후에 한국이 FTA 협상을 체결할 때 한미 FTA보다 좋은 조건이 있으면 미국은 자동적으로 그 FTA 수준의 혜택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2008년 경제위기 이후 쇠약해진 미국경제는 한미 FTA에도 만족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미국은 일본, 호주, 캐나다, 멕시코, 말레이지아, 싱가포르, 뉴질랜드 등 환태평양 전략적 경제동반자협정(TPP : Trans-Pacific Partnership or Trans-Pacific Strategic Economic Partnership)을 묶어 광범위한 FTA를 체결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모두 미국의 정치군사적 영향력 내에 들어있는 나라, 미국의 입김이 잘 먹히는 국가들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제 한국정부는 TPP에 가입할 것을 검토하고 있습니다. 이미 타결된 TPP 협상에 끼여들려면 쌀시장을 개방하거나 쇠고기 시장을 전면 개방하는 등 상당한 입장료를 지불해야 한다는 관측이 파다합니다. 하지만 박근혜 정부는 입장료가 아무리 비싸더라도 TPP 가입을 강행할 것으로 보입니다. 2015년 10월 17일 한미정상회담에서 오바마 대통령과 TPP 가입을 긍정 검토하기로 합의하였기 때문입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