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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나무왕의 최후 / 삿 9:46-57
‘명심보감’ 천명 편에 보면 맹자의 “순천자 흥하고 역천자 망한다.”라는 말을 인용하였습니다. 이 말은 ‘하늘의 뜻을 거스르는 자는 망하고 하늘의 뜻에 순종하는 자는 흥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하늘은 ‘하나님’이나 ‘하늘의 원리’를 뜻하는 것만 아니라, 시냇물이 높은데서 낮은 데로 흐르는 것과 같은 ‘자연의 순리’일 수도 있고, ‘일반적인 삶의 길’일 수도 있으며, ‘민심’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김대중 전 대통령은 “국민은 항상 옳다고는 말할 수 없다. 잘못 판단하기도 하고 흑색선전에 현혹되기도 한다. 엉뚱한 오해를 하기도 하고, 집단 심리에 이끌려 이성적이지 않은 행동을 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는 국민 이외의 믿을 대상이 없다. 하늘을 따르는 자는 흥하고 하늘을 거역하는 자는 망한다고 했는데, 하늘이 바로 국민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처럼 ‘하늘의 뜻’이든, ‘자연의 흐름’이든, ‘사람들이 살아가는 순리’든 그대로 따르는 것이 평범하지만 가장 현명한 삶일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순천자흥하고 역천자망한다”라는 이 말은 만약 누군가 자연의 법칙이든, 사람들의 일반적인 삶의 방식이든, 그대로 살지 않고 역행할 때, 그것은 재앙이나 불행을 부르는 것이 될 수 있다고 경고합니다. 예전에 만들어진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시간을 거슬러 과거로 돌아가 자신이나 다른 사람이 당한 사고나 불행을 막는다는 내용이 종종 나옵니다. 그런데 그럴 경우, 심각한 부작용도 함께 따른다는 것도 같이 나옵니다. 예를 들면, 과거로 돌아가 내가 당할 사고를 막는 것은 좋은데, 그것 때문에 다른 사고가 나고, 다른 사람이 다치거나 죽는 경우가 생긴다는 것이죠. 그런 점에서 작가는 ‘시간을 거스르는 것이 과연 옳은가?’를 되묻습니다. 아무튼 여러분, 다시 말씀드리지만, ‘하늘의 뜻’이든, ‘자연의 순리’든, ‘사람들이 살아가는 일반적인 삶의 방식’이든 그대로 따르는 것이 가장 안전하고 현명한 삶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어떤 불행한 결과를 만날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오늘 본문이 그 순리를 거슬렀다가 불행하게 된 사람들의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사는 데에는 언제나 폭력이 있습니다. 태초에 아담과 하와의 아들 가인과 아벨사이에도 별 것 아닌 것 같은 일에 형이 동생에게 폭력을 휘둘러 동생이 죽고, 자기도 결국은 평화를 누리지 못해 도망 다니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공생애 끝에 고난을 앞두고 감람산에 올라가 기도하게 되었는데, 그곳에서도 여러 형태의 폭력이 등장했습니다. 우선 권력에 의한 폭력이 등장합니다. 밤에 대제사장들과 로마에서 보낸 육백 명의 군인들이 감람산을 에워쌌습니다. 그들은 칼과 창으로 무장하고 그곳에서 기도하시는 예수에게 폭력을 행했습니다. 국가가 국가질서와 사회 안정이라는 이름으로 폭력을 휘두르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오늘 본문의 배경을 보면 아비멜렉이라는 기드온의 서자출신의 아들이 있는데, 정상적인 방법으론 권력을 가질 수 없으니까 돈과 폭력을 이용해서, 경쟁상대가 될 만한 자기 형제 칠십 명을 죽이고 권력을 갖게 됩니다. 권력을 가지는 과정에는 언제든지 폭력이 개입합니다. 또한 돈을 통한 폭력도 있습니다. 돈을 가지고 사람의 목숨을 노리는 것입니다. 가룟 유다는 이의 대표적인 인물로 자기를 불러주시고 택하시고 사랑한 자기의 스승을 많지 않은 돈을 받고 팔아 넘겼습니다. 이것이 돈의 폭력입니다. 가룟 유다가 감람산에 나타나서 예수에게 입 맞추는 순간 정부의 권력이 달려들어 예수를 체포한 것입니다. 정당방위를 위한 폭력도 있습니다. 베드로가 자다보니 불이 비추고 칼이 부딪치는 소리, 사람들의 떠드는 소리가 나서 달려가니 예수께서 붙잡혀 계셨습니다. 이에 베드로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칼을 가지고, 예수를 체포하러 온 대제사장의 종을 찔렀습니다. 정당방위를 위한 폭력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둘을 다 비판하셨습니다. 우선 너희들이 "칼과 창과 몽둥이로 나를 잡으려 하느냐" 하시며 그 폭력의 세력을 주님께서 규탄하셨고, 또 폭력을 가지고 나오는 사람에게 폭력으로 대하는 제자 베드로를 꾸중하셨습니다.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폭력으로 나오는 사람에 대해서 힘으로 대결하는 것이 당연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칼로 치는 자는 칼로 망한다고 하셨습니다.
26절을 보면 가알이라는 새로운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는 세겜 사람들을 모아놓고 이렇게 말합니다. 28절을 보겠습니다. “에벳의 아들 가알이 가로되 아비멜렉은 누구며 세겜은 누구기에 우리가 아비멜렉을 섬기리요, 그가 여룹바알의 아들이 아니냐? 그 장관은 스불이 아니냐? 차라리 세겜의 아비 하몰의 후손을 섬길 것이라. 우리가 어찌 아비멜렉을 섬기리요.” 어디에서 들었던 말 아닙니까? 가알은 전에 아비멜렉이 했던 것과 똑같은 말로 세겜 사람들을 충동질 하고 있습니다. ‘본래 세겜은 하몰의 땅이었기 때문에 세겜 사람들은 하몰의 후손을 섬겨야 하는데, 왜 이스라엘 출신인 아비멜렉을 섬기느냐’는 것입니다. 결국 그동안 아비멜렉을 추종했던 사람들이 아비멜렉을 배반하고, 이번에는 가알을 따르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정보를 입수한 아비멜렉의 부하 스불은 자기 상관인 아비멜렉에게 보고했습니다. 그러자 가시나무 왕 아비멜렉은 군대를 이끌고 와서, 세겜 성을 공략하여 가알을 죽이고 거기에 있는 세겜 성 사람들을 죽였습니다. 그리고 세겜 성을 헐고 소금을 뿌렸습니다. 소금을 뿌렸다는 것은 영원히 황폐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상징적인 행위입니다.
가시나무 왕 아비멜렉은 이것으로 멈추지 아니하고 망대로 올라간 세겜 사람들을 불로 태워 죽였는데, 그 수가 무려 천 명이나 되었습니다. 그는 데베스라는 곳에 가서 진을 치고 그 성을 무너뜨리기 위해 망대의 문에 가까이 나아가서 망대를 불사르려 하다가 비참하게 죽습니다. 53절을 보겠습니다. “한 여인이 맷돌 위짝을 아비멜렉의 머리 위에 내려던져 그의 두개골을 깨뜨리니” 망대에 위에 있던 여인이 던진 맷돌에 맞아 그의 두개골이 깨어져 버렸습니다. 아비멜렉의 죽음은 아버지를 배반하여 쿠데타를 일으켰다가 자기의 머리털이 상수리나무에 걸려 꼼짝 못하고 있다가 다윗의 군대장관 요압의 창에 찔려 죽임을 당한 압살롬의 죽음과, 헤벨의 아내 야엘이 내리친 말뚝에 죽은 시스라의 죽음과 더불어 비참한 죽음에 속합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그가 죽어가면서 보여준 마지막 행동입니다. 54절을 보겠습니다. “아비멜렉이 자기의 무기를 든 청년을 급히 불러 그에게 이르되 너는 칼을 빼어 나를 죽이라. 사람들이 나를 가리켜 이르기를 여자가 그를 죽였다 할까 하노라 하니 그 청년이 그를 찌르매 그가 죽은지라.” 이것은 웃지 못 할 장면입니다. 가시나무 왕 아비멜렉은 여인이 던진 맷돌에 맞아 죽는 것이 창피하여 두개골이 깨어져 죽어가면서도, 자기 옆에 있던 부하에게 칼로 찔러 죽여 달라고 요청한 것입니다. 여자가 던진 맷돌에 맞아 죽었다는 부끄러운 사실을 후세에 남길까봐 두려워 한 것입니다. 가시나무 왕 아비멜렉은 이렇게 비참하게 죽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인 사사기 9장은 이와 같이 가시나무 왕 아비멜렉의 비극적인 종말을 기록하며 끝내고 있지만, 우리에게 몇 가지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첫째로 자기의 자리를 지키라는 것입니다. 요담이 비유로 들은 네 가지 나무 중 감람나무를 보십시오. 감람나무는 기름을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기름으로 어둠을 환하게 밝힐 수 있습니다. 무화과나무는 아름다운 열매를 맺어 사람들의 입을 즐겁게 해줄 수 있습니다. 포도나무는 포도열매를 맺고 그것으로 포도주를 만들어 사람들의 기분을 즐겁게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대부분의 나무는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주는 나무들입니다. 그러나 가시나무는 다릅니다. 가시나무는 건물을 짓는 건축 자재로도 사용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벽난로에 집어넣어 집안을 따뜻하게 하는 화목으로도 사용할 수 없습니다. 굳이 가시나무에게 자랑할 것이 있다면 남을 찌르는 일입니다. 찔러서 피 흘리게 하는 일을 할 뿐입니다. 그런데도 자기가 숲 속의 모든 나무들을 다스리겠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왕이 되겠다는 것입니다. 가시나무는 자기의 분수를 몰라도 한참 모르고 있습니다. 바로 아비멜렉이 그러한 사람입니다. 그는 왕이 될 만한 위치에 있지 않았습니다. 또한 그는 왕위에 오를만한 인물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쿠데타를 일으켜서 대권을 잡았습니다만, 결국은 비참하게 죽임을 당했던 것입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첫 번째 비결은 과욕을 부리지 않고 자기 분수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자기 자리를 지키는 것입니다. 역사상 가장 탁월했던 지휘자 가운데 한 사람인 레오나르드 번스타인에게 어떤 사람이 질문을 했습니다.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면서 가장 다루기 어려운 파트나, 악기가 무엇입니까?” 그러자 그는 대뜸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것은 제2바이올린입니다. 왜냐하면 제 2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사람들은 제1바이올린과 같은 열정으로 연주하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저는 오케스트라에 대해서 잘 알지는 못하지만, 과거에 들은 바에 따르면, 우리가 오케스트라를 볼 때, 왼쪽 첫 부분에 제1바이올린, 그 다음에 제2바이올린, 비올라, 첼로, 더블 베이스, 등 작은 악기부터 큰 악기 순으로 앉습니다. 그리고 현악기 뒤에는 관악기가 앉습니다. 그런데 청중이 보는 방향에서 제일 왼쪽에 있는 제1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사람을 악장이라고 부릅니다. 악장은 오케스트라에서 바이올린을 가장 잘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연주를 잘하는 순서에 따라서 앉습니다. 그 다음에 제2바이올린이 앉는데, 이 자리가 언뜻 보아서는 매우 애매한 자리입니다. 제1바이올린이 멜로디를 주도하는데 반해, 제2바이올린은 제1바이올린을 받쳐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다보니 오케스트라 지휘자가 제2바이올린을 다루기가 어렵다고 합니다. 그러나 멜로디를 주도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제2바이올린이 없다고 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오케스트라가 구성될 수 없고 결국에는 화음이 이루어지지 않아서 멋있고 웅장한 음악을 만들어 낼 수 없을 것입니다. 제1바이올린만큼 중요한 것이 제2바이올린입니다. 소프라노가 멜로디를 주도합니다. 그렇다고 합창에서 소프라노만 중요하고 알토는 중요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소프라노 못지않게 알토도 중요합니다. 알토가 받쳐주지 않으면 아름다운 화음의 음악을 들을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 원리입니다. 우리 인생에 있어서 자기 자리를 지키는 일이 중요합니다. 가정의 가장은 가장으로서, 가정주부는 가정주부로서의 역할이 있습니다. 학생은 학생으로서의 역할이 있습니다. 직장인은 직장인으로서, 집사는 집사로서, 장로는 장로로서, 목사는 목사의 독특한 역할이 있습니다. 그런데 가장이 자신의 가정은 돌보지 않은 채 허구헛날 카지노나 출입하며, 있는 돈 없는 돈 날리고 다니고, 가정주부가 가정은 돌보지 않은 채, 춤바람이 나서 밤마다 나돌아 다닌다면 그 가정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가정 파탄이 나지 않겠습니까? 학생이 공부는 하지 않고 밤새도록 PC방에서 인터넷 게임에 빠져 있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학생의 인생 뻔한 것 아닙니까? 목사가 기도도 하지 않고, 말씀도 연구하지 않고, 목회는 하지 않고 놀러만 다닌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한 목사를 삯꾼 목사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들이 지금 어떤 자리에 있습니까? 여러분의 자리를 잘 지키시기 바랍니다. 있는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있는 자리가 별로 빛이 나지 않아도, 내가 맡은 일이 탐탐치 않게 보여도 있는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이 있는 자리에서 최선을 다할 때, 가장 좋은 때에 여러분들을 더 귀한 자리로 이끌어 주실 줄로 믿습니다. 둘째로 분명한 원칙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아비멜렉이 왕위에 오르게 된 것은, 혈연과 지역감정과 검은 돈을 이용한 그의 계략 때문인 것이 사실이지만, 세겜 사람들의 협조도 일조했습니다. 만약 백성들이 협조를 하지 않았다면 그의 거사는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아비멜렉의 잘못도 문제지만, 백성들의 잘못도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같은 세겜 출신이라는 하나의 이유만으로 아비멜렉을 지지 했습니다. 더구나 돈으로 조폭들을 매수하여 70명이나 되는 많은 사람을 때려죽인 사람을 왕으로 떠받든 잘못을 저지른 것입니다. 백성들에게는 정의에 대한 분명한 기준이 없었습니다. 자기들을 다스릴 지도자에 대한 분명한 기준이 없었습니다. 세겜 사람들은 주위 사람들의 여론에 따라 이리저리 흔들렸습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오래전 일입니다. 20년도 더 되었습니다. 97년도 12월의 대통령 선거에 한나라당 후보로 출마했던 이회창씨의 인기는 대통령 선거 수개월 전까지만 해도 하늘을 찌를듯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은 그 분이 대통령에 당선될 것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한나라당으로 엄청나게 많은 정치자금이 몰렸습니다. 그 분 스스로 대통령이 된 것처럼 생각을 하고, 대통령처럼 행동을 한 적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분은 대통령선거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분의 아들의 병역문제 때문에 대통령 선거에 떨어졌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분은 감사원장 시절과 국무총리 시절에 보여준 ‘원칙주의자’라는 고유의 장점을 잃어버렸습니다. 대권을 손에 넣기 위해서는 누구와도 손을 잡겠다는 구세대 정치인들의 모습을 보인 것이 그의 인기가 폭락한 또 다른 이유였습니다. 그 동안 ‘법대로’를 외치면서 하늘을 찌를 듯 했던 그분의 인기가, 표 좀 얻겠다고 전직 대통령 사면론을 들고 나오면서 인기가 떨어지기 시작하다가, 급기야는 아들의 병역문제 때문에 결정타를 맞은 것입니다. 무엇을 교훈하고 있습니까? 원칙의 중요성입니다. 환경과 상황에 이끌리어 변하는 것이 아니라, 변하지 않고 굳건하게 원칙을 지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세겜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원칙이 없었습니다. 그저 같은 고향출신이라는 아비멜렉의 말에 현혹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들에게 원칙이 있습니까? 누가 뭐라고 해도 흔들리지 않는 원칙이 있습니까? 세상은 흔들리고 사람은 변하여도, 전혀 요동하지 않는 원칙이 여러분들에게 있습니까? 저에게는 목숨 걸고 붙잡을 원칙이 있습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포기할 수 없는 원칙이 있습니다. 바로 말씀의 원칙입니다. 여러분들도 말씀의 원칙을 세우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말씀의 원칙을 고수하시기 바랍니다.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진리의 말씀인 이 성경을 삶에서 가장 우선적인 원칙으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마지막을 기억하라는 교훈입니다. 아비멜렉은 잔인한 방법을 동원하여 왕위에 올랐지만, 그의 대권은 그리 길지 않았습니다. 22절을 보겠습니다. “아비멜렉이 이스라엘을 다스린 지 삼 년에” 다시 말하면 그가 왕위에 올라 나라를 다스린 기간은 고작 3년이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나라의 왕에 오른 지 3년 만에 그는 왕위에서 내려왔을 뿐 아니라, 비참하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본문 23-24절은 그의 죽음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비멜렉과 세겜 사람들 사이에 악한 영을 보내시매 세겜 사람들이 아비멜렉을 배반하였으니, 이는 여룹바알의 아들 칠십 명에게 저지른 포학한 일을 갚되 그들을 죽여 피 흘린 죄를 아비멜렉과 아비멜렉의 손을 도와 그의 형제를 죽이게 한 세겜 사람들에게로 돌아가게 하심이라.” 누가 아비멜렉을 망하게 하셨습니까?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비멜렉이 형제들에게 행한 죄 값을 물으시고, 그가 형제들을 죽일 때 보았던 피 값을 그에게로 다시 돌아가게 하신 것입니다.
또 본문 마지막 56절과 57절을 보겠습니다. “아비멜렉이 그의 형제 칠십 명을 죽여 자기 아버지에게 행한 악행을 하나님이 이같이 갚으셨고, 또 세겜 사람들의 모든 악행을 하나님이 그들의 머리에 갚으셨으니 여룹바알의 아들 요담의 저주가 그들에게 응하니라.” 가시나무 왕 아비멜렉의 비참한 죽음은 무고한 70명을 악한 방법으로 죽인 행동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하나님에게는 두 가지 큰 속성이 있습니다. 꼭 동전 양면과 같이, 한 면에는 ‘사랑’이 있고, 다른 한 면에는 ‘공의’가 있습니다. 그래서 의로운 자에게는 의로움으로 상을 주시지만, 불의한 자에게는 불의함으로 심판하십니다. 찰스 베어드라는 유명한 기독교 역사학자에게 하루는 기자들이 물었습니다. “박사님, 박사님은 평생토록 역사를 연구해 오지 않으셨습니까? 박사님께서 평생 역사를 연구하시면서 깨달은 것을 요약하면 무엇입니까?” 그러자 찰스 베어드 박사는 네 가지를 요약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합니다. 첫째, 하나님이 어떤 나라나 사람들을 멸한 때를 보면, 반드시 그 사람이나 나라가 교만했을 때였다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교만에 빠질 때 망하더라는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심판의 맷돌은 아주 천천히 돌아간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잘 인식하지 못하지만, 50년, 100년, 200년이 흘러가는 것을 보면, 하나님이 어떻게 심판했는가를 볼 수 있다고 합니다. 셋째, 하나님의 계획과 의는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에 가면 의는 의로, 불의는 불의로, 선은 선으로, 악은 악으로 드러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넷째로 역사의 면면을 보면 하나님의 등불이 완전히 꺼진 경우는 없다고 합니다. 항상 남겨둔 자가 있고, 그루터기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맷돌은 천천히 돌아갈지 모르지만, 마지막에는 반드시 선과 악으로 구분되어집니다. 히브리서 9:27절에서도 이러한 사실을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하나님께서는 마지막에 반드시 계산하십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살아있는 동안 계산하기도 하지만, 우리가 죽어서 이 땅을 떠나고 나서도 계산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마지막에는 우리가 심은 대로 거두게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세상의 방법이 아닌, 주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자기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며 살았던 아비멜렉과 같은 삶이 아닌, 주님께서 원하시는 방법대로 사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에는 분명히 우리의 삶을 결산할 때가 있음을 기억하고, 주님을 믿는 성도답게 자리를 지키고, 말씀의 원칙을 가지고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