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캄비세스의 뒤를 이어 왕이 된 사람은 다리우스(주전522-486)였다.
가우마타가 왕위를 찬탈하자 페르샤의 일곱 귀족이 연합하여 다리우스의 지휘하에 가우마타를 제거. 일곱 귀족은 태양이 떴을 때 제일 처음으로 우는 말을 가진 사람을 왕으로 세우기로 결의했으나, 다리우스의 마부가 다리우스의 말을 제일 먼저 울게 만들어 다리우스에게 왕위가 주어졌다.
일찍이 캄비세스 밑에서 원정경험을 쌓은 다리우스는 전국적으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고 두달만에 왕위를 굳혔다.
다리우스는 반역자들에 대하여 코와 귀와 혀를 자르고 눈알을 파내고 족쇄를 채워 왕실법정에 두는 잔인한 형벌을 내림으로써 반역에 대하여 경고했다.
다리우스는 거대한 규모의 베히스툰 비문을 세운 것으로 유명하다.
바그다드와 테헤란 사이에 있는 약대로에 세워진 이 비문은 한 개의 길이가 18미터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규모이며, 고대 페르샤어, 바벨론어, 엘람어로 쓰여 있다.
이 비문은 설형문자 해독에 열쇠를 제공하는 중요한 유적이다.
다리우스 제2년에 중단되었던 예루살렘 성전이 학개와 스가랴의 지도하에 재개되었다.
“유대와 벤냐민의 대적들”은 페르샤 총독 닷드내에게 유대인들이 반역을 꾀한다고 고발했다.
닷드내는 반역의 기미만 있으면 처벌하려고 현장을 방문하여 질문했다(스5:3).
“누가 너희를 명하여 이 전을 건축하고 이 성곽을 마치게 하였느냐?”
이 질문에 대하여 유대인들은 고레스의 명령에 따라 진행된 것이므로 서적 곳간을 조사해 보라고 답변했다(스5:13-17).
조사를 진행한 다리우스는 고레스의 조서를 발견하고 그 조서의 유효성을 확인한 후에 성전재건을 막지 말고 오히려 왕의 재산 중에서 경비지원을 하도록 지시했다(스5:7,8).
다리우스 왕은 절대적인 권한을 행사했으나 일곱 귀족에 의하여 제약받기도 했다.
다른 여섯 귀족은 거대한 땅을 하사받았고, 왕비를 제공할 권리도 있었다.
왕이 왕가출신이 아닌 여자와 결혼하려 할 시에는 여섯 귀족의 딸들과만 결혼이 허락되었다.
중대사가 생기면 반드시 이 귀족들과 의논해야 했다.
법에 관한 문제는 일곱명의 재판장과 반드시 협의해야 했고, 왕 자신이 내린 명령을 왕 자신도 어길 수 없었다.
예를 들어서 다리우스의 신하들은 다니엘을 잡기 위하여 신상에 절하라는 명령을 다리우스의 입으로 말하고 어인을 찍어서 “변개치 아니하는 규례”로 만들었다(단6:8,14,15).
관할구역은 총독을 세워 통치하게 했는데, 총독은 민사행정만을 담당하고 군사행정은 군사장관을 따로 두고 왕께 직접 보고하게 함으로써 총독의 권한을 견제했다.
도로와 우편제도를 발달시킴. 도로를 따라 규칙적인 파발꾼들이 대기하도록 하는 우편로는 당시 모든 나라들 가운데 가장 뛰어난 것이었다.
다리우스의 상비군은 놀랍게도 소규모였다.
기병 2000명으로 구성된 친위대, 귀족출신 보병2,000명, 메데와 페르샤에서 징병된 정예병 10,000명으로 구성. 유사시에는 메데나 페르샤의 귀족들로부터 보충병을 소집하는 것이 가능했다.
주전512년 다리우스는 스키토족(Scythians)을 공략하기로 결정. 스키토족은 러시아의 초원지대엣 남쪽과 서쪽으로 이주하여 흑해 북변과 다뉴브강에 근접한 서편과 남편에 정착. 이 지역에는 금광이 풍부. 금광을 차지하고자 함.
다리우스는 70만대군을 일으켜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다뉴브강까지 진군. 스키토족은 싸우지 않고 후퇴하면서 페르샤군을 내부로 끌어 들였다.
통상적으로 점령지에서 군비공급을 하는 것이 관례였던 페르샤군은 끌려 들어가는 과정에서 군비공급이 제대로 되지 않아 추격을 포기하고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보스포러스강을 다시 건너 트라키아를 정복함으로써 그리스와 국경을 맛대게 되었다.
그리스 본토를 제외한 소아시아지방이 모두 다리우스의 수중에 떨어졌다.
다리우스가 트라티아와 마케도니아를 얻은 사건은 오히려 그리스의 도시국가들의 결속력을 강화시켰다.
그리스의 후원을 받는 이오니아 동맹이 결성되어 페르샤군과 결전이 진행되었다.
전세는 이오니아동맹쪽이 불리했다. 이오니아 동맹의 배후에 그리스가 있는 것을 알아차린 페르샤는 그리스 본토에 대한 원정을 계획했다.
첫 번째 시도는 함대 6백척을 거느리고 소아시아에서 출전했으나, 아토스 산에서 불어오는 풍랑 때문에 함선 절반과 20,000명의 군사를 잃고 후퇴해야만 했다.
두 번째 시도는 메데출신 제독인 다티스제독이 에레트리아를 포위공격하여 신전을 불태우고 주민을 수사에 노예로 팔아 넘겼다. 이 소식은 오히려 그리스 본토의 도시들을 자극하여 더 공고하게 연합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다리우스는 마라톤 전투에서 아테네군과 접전을 벌여 대패했다.
마라톤전투에서 패배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애굽은 노골적으로 다리우스에게 반기를 들었다.
애굽의 반란이 진압되기 전에 다리우스는 사망했다. 다리우스가 건축한 페르세폴리스의 왕궁은 위대한 고대 건축물들 가운데 하나다.
8. 성경에 아하수에로로 알려진 크세르크세스(Xerxes)가 35세의 나이로 다리우스를 이어서 왕이 되었다(주전486-465).
크세르크세스는 애굽의 반란을 진압한 뒤에 아우 아케메네스(Achemenes)를 책임자로 임명했다.
바벨론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크세르크세스는 조피로스를 총독으로 임명했으나 살해당했고, 그 후임으로 메가비소스(Megabysos)가 임명되었다.
화가 난 크세르크세스는 바벨론의 성벽을 무너뜨리고, 신전을 파괴했다.
유명한 에사길라 신전이 부서지고 벨-마르둑 신의 황금상은 녹아 버렸다.
이런 잔인한 정복을 통해 영원한 바벨론제국이라는 개념을 의도적으로 종식시켰다.
크세르크세스는 3년간의 준비를 거쳐서 그리스정벌을 다시 시작했다.
46개 속국들로부터 병력을 모으고, 29명의 페르샤 장군들, 1207척의 함대와 50개의 대형선박으로 구성된 대병력을 출정시켰다. 사데에서 겨울을 보낸 후에 주전480년 5-6월에 전투가 시작되었다.
아르테미시움에서 폭풍우를 만난 페르샤해군은 전함 400척과 수많은 수송선을 잃었다.
폭풍우에 밀려 피난처를 찾던 페르샤 함선 15척은 그리스에 포로가 되었다.
지상전투에서는 스파르타의 레오니다스가 이끄는 군대가 저항했지만 내부의 밀고자 때문에 패배했고 마침내 크세르크세스는 아테네에 입성하여 아크로폴리스 위에 있는 신전들을 불태웠다.
크세르크세스는 전쟁을 위대한 승리로 끝내기 위하여 살라미스에서 그리스해군과 마지막 결투를 벌이게 되었다.
그리스 해군은 페르샤 해군의 절반의 병력밖에는 가지고 있지 않았으나 페르샤군에 의하여 그리스의 도시들이 처참하게 불타고 파괴되는 광경을 목격한 그리스군은 사생결단을 하고 싸워서 페르샤군에 대승을 거두었다.
지상에는 페르샤군이 대군을 거느리고 있었는데, 크세르크세스는 마르도이누스(Mardonius)에게 그리스원정의 임무를 위임했다.
마르도니우스는 몇차례에 걸친 아테네-스파르타 연합군과의 전투에서 치명적인 패배를 당했고 전사했다.
페르샤군은 뿔뿔이 흩어졌다. 패전후 크세르크세스는 14년간 더 통치하다가 아르타바누스에 의하여 살해당했다.
아르타바누스는 크세르크세스의 셋째 아들 아르타크세르크세스에 의하여 죽임을 당했다.
성경에는 에스라서4장6절에 고레스 때와 다리우스 때 성전건축을 방해했던 유대의 대적들이 크세르크세스에게도 유대인을 고발한 기록이 등장한다.
포로귀환시에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지 않고 페르샤 본토에 남아 있던 유대인들의 운명이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
크세르크세스는 정숙한 왕비 와스디를 폐위시키고 유대인이라는 사실이 알려져 있지 않은 에스더를 왕후로 간택. 왕의 총애를 받는 하만이 모르드개와 온 유대인을 멸하려고 했을 때 에스더가 왕에게 나아가 간청하여 유대인을 구한 일이 이때 일어났다.
종교적으로는 조로아스타교도였던 크세르크세스는 허식에 빠져서 과시하기를 좋아했고 아첨하는 신하들의 발림말과 밀고에 민감했다.
크세르크세스는 즉위한 지 20년만에 아르타바누스에게 암살당했다.
9. 크세르크세스를 뒤를 이어 아르타크세르크세스가 왕이 되었다(주전464-424).
형 히스타스페스가 반란을 일으켰으나 곧 진압되었다. 애굽에서는 크삼메티쿠스의 아들 이나로스가 델타 지역 동부 애굽인들의 추대를 받아 왕이 되었다.
크세르크세스의 형인 아케메네스가 이 지역을 관장하고 있었는데, 본국정부의 증원을 받아 이나로스와 대결. 일차 전투에서는 아케메네스가 우세했다.
페이니카 함대까지 동원하여 계속된 전투에서 부상을 입은 이나로스는 그리스의 동맹군과 함께 밀리다가 프로소피티스에 바리케이트를 치고 저항했지만 패배했다.
이 무렵 에스라가 유대인을 다시 유다로 귀환시켜 줄 것을 아르타크세르크세스에게 청원했다.
에스라는 유대인 1500명을 모아서 일곱달에 걸친 긴 여행 끝에 예루살렘에 도착. 예루살렘에 귀환한 에스라가 가장 중점을 두었던 문제는 두가지였다.
하나는 유대인들의 잡혼문제였다. 에스라는 유대인들의 총회를 소집하여 이방인 아내와의 이혼을 요청하기로 방침을 정했다.
또 하나는 예루살렘 성 보수문제였다. 유대의 대적들이 예루살렘 성 재건작업을 왕에 대한 반역음모로 아르타크세르크세스에게 고발하자 아르타크세르크세스는 재건사업을 중지시키는 명령을 내렸다(스4:7-21).
유대의 대적들은 강제로 성전재건사업을 중단시켰다(스4:23). 이 조치가 느혜미야의 마음을 불붙게 함.
느혜미야는 수산의 왕궁에서 술맡은 관원장을 맡고 있었다.
아르타크세르크세스왕은 느혜미야에게 휴가를 주어서 성전보수작업을 하게 했다.
유대의 대적들이 집요하게 방해공작을 했으나 느혜미야는 마침내 성전보수작업을 끝냈다.
준공식을 잘 끝내고 느혜미야가 수산으로 돌아 온 이후에 옛날의 문제들이 다시 대두되었다.
유대의 대적들이 다시 방해했고, 레위인들에게는 댓가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으며, 안식일에 대한 율법이 망각되었고, 잡혼이 다시 성행했다.
그 결과 자녀들이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 어머니의 방언을 말했다(느13:23-24).
이 때문에 느혜미야는 재차 예루살렘을 방문하여 신앙과 생활의 개혁을 완수했다. 이 이야기와 함께 구약의 역사는 저물어 간다.
당시 애굽과 구브로는 여전히 페르샤의 지배를 받고 있었으나 서방의 대부분은 그리스에게 빼앗겼다.
10. 아르타크세르크세스 사후에 등장한 다리우스2세는 페르샤의 황금을 이용하여 펠로폰네수스전쟁을 통하여 아테네와 스파르타 연합군을 패퇴시켜 소아시아의 도시들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시키는 성공을 거두기는 했으나 국운을 돌이킬 수는 없었다.
메데와 애굽이 끊임없이 반란을 일으켰다.
애굽은 아르타크세르크세스 때에 독립을 선언했으나 페르샤는 이를 막을 수 없었다.
애굽은 스파르타와 배반한 페르샤 총독들과 함께 진군해 들어 왔으나 애굽의 바로 타크호스(Takhos)에 대한 반란이 일어나 철군하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아르타크세르크세스3세는 왕위를 계승하자 모든 형제자매들을 살해하고, 애굽반란에 동조했던 시돈을 불태웠으며, 애굽을 재차 정복하고 그리스와 일전을 별렀다.
아테네는 데모스테네스의 연설에 자극받아 페르샤와 동맹을 체결했는데, 마테도니아의 왕 필립과 그의 아들 알렉산더는 이를 적대행위로 해석하고 전투를 벌여 승리를 거두었다(주전338).
아르타크세르크세스3세는 환관인 바고아스(Bagoas)에게 살해당했다.
바고아스는 아르타크세르크세스3세의 막내 아들 아르세스(Arses)를 꼭두각시로 이용하려는 의도로 살려 주었다가 말을 듣지 않자 그도 살해했다.
바고아스는 다시 아르타크세르크세스3세의 사촌을 왕으로 세워 조종을 시도했으나 그는 다리우스3세라는 이름을 취하고(주전336, 느12:22의 다리오와 동일인물) 바고아스를 독살해 버렸다.
같은 해 알렉산더가 왕위에 올라 아버지로부터 페르샤를 정벌하라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주전333년 다리우스3세는 잇수스(Is년)전투에서 대파당하고 2년 뒤에는 페르샤 중심부가 알렉산더에게 넘어갔다.
다리우스는 에크바타나로 피신했다가 그곳에서 사촌 벳수스(Besus)에게 살해당했다(주전330).
다리우스3세의 죽음과 함께 페르샤제국은 멸망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