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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오백년!
초롱초롱 박철홍의 역사는 흐른다! 74
숙종과 여인들 그리고 당쟁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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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남자! 숙종
숙종은 주로 사극의 인기 소재인 장희빈, 인현왕후, 숙빈최씨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드라마에서 주인공이 아닌 조연으로만 등장하여 우유부단하고 부드러운 남자 이미지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하지만 숙종의 실제 성격은 다혈질에 얼음같이 싸늘하고 냉철한 고단수 정치가였습니다.
결코 여인들의 치맛바람에 휘둘리는 나약한 왕이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조선왕조에서는 드물게 완벽한 정통성을 갖추고 강력한 왕관을 휘둘었습니다.
숙종은 냉철과 다혈질까지 합쳐지고 어느 정도 전략적 머리도 갖춘 왕으로서 신하들을 갈구는 강력한 왕권의 임금이었습니다.
이처럼 왕으로서 숙종은 정치에는 귀재였지만,
하지만
숙종이 남자로서는
'왕을 향하고 있었지만 그 여인들의 절실하고 진실된 사랑을 왕은 그 사랑을 권력쟁투의 대상으로 삼았다!'
지금까지 제가 쓴 '숙종과 여인들, 3편 중 오늘 마지막 편인 아랫 글을 자세히 읽어 보면 숙종이 얼마나 '나쁜남자!'의 전형인 줄 알게 될 것입니다.
숙종때문에 요즈음도 나쁜남자가 여자들에게 인기 있는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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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희빈과 숙빈최씨
숙종은 사랑에 빠져있을 때는 한 여자만 사랑하는 타입이었다. 나이 서른에 건강한 남성이었던 숙종은 장희빈과 사랑에 빠져있을 때 두 명의 왕후와 두 명의 후궁을 제외 하고는 궁녀를 가까이 했다는 기록이 없다.
장옥정이 왕자를 생산하자 숙종은 장옥정을 희빈으로 승급시킨다. 또 곧 바로 왕후에 까지 앉힌다. 그러나 장희빈에 대한 숙종의 사랑은 거기까지였다.
장희빈을 왕후로 간택한 이후 숙종은 장희빈의 행태에 염증을 느꼈는지 장희빈을 더 이상 찿지 않았다. 그리고 날마다 얼굴이 반반한 궁녀들을 찾아 다니면서 성은을 입혔다.
이때 숙종의 후궁으로 등장하는 여인들이 바로 영조를 낳은 최숙빈과 연령군을 낳은 박명빈, 그리고 유소의이다.
이들 중 가장 먼저 후궁 첩지를 받은 것은 TV드라마로 방영 된 바 있는 '동이'의 숙빈 최씨였다. 최씨는 24세의 나이로 처음 내명부 종 4품 숙원을 받았다. 최씨가 가장 먼저 후궁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숙빈최씨가 잉태를 했기 때문이었다.
숙빈 최씨에 대한 기록은 다른 후궁들 보다는 많은 편이다. 그녀가 왕(영조)의 친모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 기록들은 대부분 풍문이나 설화성격이 강했다.
숙빈최씨에 관한 설화는 내가 살고 있는 담양에서도 전해져 내려 오는 설화가 있다.
숙빈최씨는 담양 창평 출신이며 담양 월산면에 지금도 상당히 큰 용흥사라는 절이 있는 데 최씨가 아주 어렸을 적 고아가 되어 그 절에 맡겨 졌다 한다. 그 절 들어가는 입구 큰 길가는 예전에는 한양으로 가는 중요한 길목이었다. 지금도 백양사를 거쳐 서울로 가는 지름길이다.
이 이야기는 '영조 친모 최복순' 편에서 자세히 다루겠다
숙빈최씨에 관한 설화는 이외에도 다른 이야기들도 전해져 오고 있다.
최씨는 궁중에 들어가 무수리로 일했다고 알려져 있다.
무수리는 궁녀중에서도 최하층 궁녀 노비를 말하는데 주로 물을 길어 나르는 것을 주업으로 해 수사라고도 했다. 한편으로는 인현왕후 소속 나인으로 일했다고도 전해진다.
어쩌든 숙빈 최씨의 출생에 대한 정식 기록이 없는 것을 봐서 당시로서도 최하층 출신 이었을 것이다. 또 궁에 들어 와서 하는 행적으로 봐서는 장희빈 보다는 인현왕후와 관계가 깊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숙빈최씨가 숙종의 성은을 입은 계기도 궁궐에서 쫒겨난 인현왕후의 생일 날 상을 차려 놓고 인현왕후 안녕을 기원드리다 숙종에게 발견되어서 였다고 전해지는 것만 봐도 그렇다.
이런 이야기들과 영조를 낳고 장희빈과의 많은 악연 등은 드라마로 너무 많이 방영 되었음으로 여기서는 생략한다.
최씨는 초반부터 장희빈과 아주 좋지 않은 관계로 시작 했다.
숙빈최씨가 모시던 인현왕후가 장희빈으로 인해 쫓겨 났고, 천우신조의 기회로 숙종의 성은을 입어 회임까지 한 자신을 죽이려고 했던 것도 장희빈이었으니 숙빈최씨는 장희빈과 같은 하늘을 이고 살 수 없음을 절감 했을 것이다.
숙빈최씨는 인현왕후와 관계로 보아 서인세력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을 것이다.
장희빈은 남인의 세력을 등에 업고 인현왕후가 폐출된 틈을 타 희빈에서 왕비로 올랐다. 그러다 숙빈최씨의 활약으로 인현왕후가 복위 된 이후 다시 희빈으로 강등된다.
인현왕후가 죽자 장희빈이 신당을 차려 놓고 인현왕후를 저주한 것 때문이라는 사실이 밝혀진다. 이에 장희빈은 숙종으로부터 자결을 명령받지만 장희빈은 숙종의 어명을 듣지 않는다. 장희빈이 자결을 거부하자 숙종은 장희빈에게 사약을 내린다.
장희빈의 일생이 이와 같이 드라마틱했기에 소설, 영화, 티브드라마에서 장희빈의 비극적인 생을 소재로 많이 썼다.
숙빈최씨는 조선 역사상 처음으로 궁중 최하층 무수리 신분에서 내명부 최고의 품계에 오른다. 또 숙빈최씨는 상대적으로 정치적인 뒷 배경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숙빈최씨는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살벌한 조선붕당정치 사이에서 속내를 숨기고 슬기롭게 처신했다. 마침내 숙빈최씨는 자신과 아들의 목숨을 보존하고 결국 아들을 조선 제 21대 왕 영조로 만들었다.
결과적으로 숙빈최씨, 장희빈 이 두 여인 모두 왕의 어머니가 되긴 한다. 그러나 이 두 여인의 최후는 너무도 달랐다.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동안 드라마나 소설에서 장희빈은 끝없는 욕심 때문에 파멸하는 악녀로 많이 나왔다. 이에 비해 숙빈최씨는 속내를 숨기고 슬기롭게 처신하여 끝까지 살아남는 것으로 그려지고 있다.
그러나 그 이면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그 두 여인의 이야기 속에서 조선의 당쟁 역사와 왕권과 신권의 갈등도 볼 수 있다.
당시 정권을 빼앗기고 있었던 서인은 아무런 정치적 연고도 없는 숙빈 최씨를 최대한 이용했다. 숙빈 최씨는 서인들의 요구대로 인현왕후가 죄 없이 장희빈에 의해 억울한 누명을 쓰고 쫒겨나갔음을 끊임없이 숙종에게 고했다. 그리고 노골적으로 인현왕후가 복위 돼야 함을 주장했다. 그 당시는 숙종도 장희빈에게서 마음이 떠난 직후였다. 그래서 숙종도 그런 최씨의 주장을 충정으로 받아 들인다.
그러던 중 1694년(숙종20년) 최씨가 두 번째 회임을 했음이 알려 졌을 때, 장옥정이 최씨를 독살하려 했다는 의혹이 일었다. 남인은 서인이 인현왕후를 복위시키려 한다고 비난하였고, 서인들은 남인이 최씨를 독살하려 했다고 비난했다.
이때 최씨가 숙종에게 남인이 자신을 독살하려 했다고 주장했고, 숙종은 정황 확인도 없이 당시 총애하는 숙빈 최씨의 말을 듣고 서인 손을 들어 주고 남인 숙청에 들어 갔다.
겉으로 보기에는 숙빈최씨가 장희빈과의 사랑 싸움에서 일방적 승리로 보인다. 하지만 속내는 숙종의 치밀한 정치적 계산이 있었다. 장희빈을 기반으로 정권을 잡은 남인 정권에 환멸을 느낀 숙종이 신하들에게 겁도 줄 겸 여인들을 핑계로 또 한 번 환국을 일으킨 것이다.
별다른 조사없이 숙빈최씨 말만 듣고 남인 숙청을 시작했다는 것이 그 증거다.
갑술환국의 시작이었다.
‘최씨 독살 사건’을 계기로 4월 12일 장옥정이 폐비되어 희빈으로 강등되었다. 이어 6월 1일 폐비 된지 5년 만에 인현왕후가 복위 된다.
이 해(1694) 인현왕후의 나이 28세였고, 장옥정(당시 희빈)의 나이 36세, 최씨(당시 숙의)의 나이 25세였다.
장옥정이 22세로 궁에 입궐할 때 인현왕후가 훨씬 어렸어도 김태희급 미모로 숙종을 홀렸지만 이제 36세의 나이로 25세의 최씨를 상대하기엔 벅찼을 것이다.
숙종도 장희빈에게 여자로서 흥미가 떨어질만한 충분한 세월이 흘렀다. 이에 불안해진 장희빈이 독살 사건 등 무리수를 두었는지 모른다.
이 사건 이후 숙빈최씨는 연일 승승장구를 이어갔다.
인현왕후가 복위되고 왕자 금( 후에 영조 )을 출산한 다음해인 1695년(숙종21년) 6월 8일 종 1품 귀인이 되었다.
그로부터 3년 후인 1698년(숙종24년) 7월 7일, 세 번째 출산에서 숙빈으로 책봉된다. 이로서 최숙빈은 내명부 내에서 명실상부 인현왕후와 장희빈을 이은 서열 3위의 여인이 되었다.
그렇게 궁궐 내명부가 평온하게 세월이 흐르는 듯 했으나 인현왕후와 최숙빈 그리고 장희빈과의 악연은 그렇게 쉽게 끝나지 않았다.
인현왕후가 복위한지 7년 만인 1701년(숙종27년) 8월 14일 35세의 젊은 나이로 인현왕후가 사망한 것이다.
인현왕후가 사망하기 전부터 장옥정이 자신의 처소에서 왕후를 저주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 소문을 숙종에게 전달한 인물 역시 최숙빈이었다.
숙종은 인현왕후의 복위를 결심한 이후 장옥정에 대한 정을 완전히 떼었다. 어쩌면 그것은 장옥정을 대체 할 여인 최씨가 나타났던 그 순간부터였을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남인이 최숙빈을 독살하려 했다는 소문에 즉각 반응했다. 숙종은 장희빈이 인현왕후를 저주해 죽게했다는 주장에도 거칠게 반응했다.
숙종은 이번에도 사건의 정황을 전혀 조사하지 않았다.
그럼으로써 실제로 장희빈이 인현왕후를 저주했는지에 대한 사실 여부는 현재로선 알 수 없다.
숙종과 서인이 장희빈의 저주사건을 사실로 믿었는지도 알 수 없다.
숙종과 서인들은 단지 장희빈을 제거할 명분을 찾았다는 사실만으로 만족했다.
장희빈 제거 계획은 인현왕후가 죽고 한 달 만인 9월 23일 장옥정의 오빠로 그녀의 수족이 되어 더러운 일을 마다하지 않았던 장희재를 처형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이어 보름만인 10월 8일 드디어 장희빈에게 자진하라는 어명이 떨어졌다.
드라마나 영화에서는 장희빈이 숙종의 자진하라는 어명을 거부한다. 숙종이 보낸 사약도 마시지 않고 버틴다. 급기야 숙종이 직접 와서 장희빈 입을 벌려 사약을 떠 넘기고 문짝으로 눌러 죽였다고 표현 된다. 그러나 이 내용은 장희빈을 악녀로 표현한 인현왕후 전에서만 나오는 이야기 일 뿐이다.
또 드라마에서는 장희빈이 아들 경종을 마지막으로 보고 싶다고 간청한다. 경종이 오자 숙종 같은 남자의 나쁜 씨를 가지면 안 된다면서 경종의 중요 부분을 훓어 버린다. 이 때문에 경종이 씨없는 남자가 되어 경종 후손이 없게 되었다고 하는데 이것 또한 당시 소문으로만 돌았던 야사에 불과하다.
실록에는 숙종이 장희빈에게 자진을 명 했다고만 써 있고 그 뒷 이야기는 없다.
아마 드라마나 영화에서 장희빈 이야기를 더 극적으로 만들기 위해서 야사에나 나오는 그런 이야기들을 자주 사용 했을 것이다.
어쩌든 파란만장한 인생을 남편이 내린 사약으로 마감한 장옥정의 나이 43세였다.
숙종이 장희빈을 죽인 것은 사실이다. 정말 대단한 나쁜남자의 본보기인 숙종은 숙종이었다.
자기가 한 때 불꽃같이 사랑한 여자를....
왕세자까지 낳아 준 자기 부인을....
아무리 정이 떨어 졌다고 해도 어떻게 죽일 수까지 있었을 까?
장희빈의 죽음을 본 당시 최숙빈의 기분은 어떠 했을까?
자기 연적이 사라진 다는 것에 좋기만 했을 까?
자기 등골도 싸늘하지 않았을까?
갑술환국으로 남인은 거의 몰락한다.
짧은 남인의 시대는 가고 이제 완전히 서인들의 세상이 되었다. 영,정조 시대 탕평책으로 남인들이 잠깐 등장하기는 하지만 구색 맞추기에 불과했다.
이제 조선이 망할 때까지 서인 세력이 득세한다. 서인들 끼리 분파되어 정권다툼이 벌어진다. 노론과 소론이었다.
또 노론 일부가 득세하여 권력을 잡으니 세도정치이다.
갑술횐국 이후 이렇게 서인 세상이 되었지만 숙빈최씨는 중전까지는 가지 못한다. 장희빈 제거로 내심 중전 자리를 바라고 있을 최숙빈에게 청천병력 같은 명령이 떨어 졌다.
장희빈이 자진하기 하루 전인 10월 7일, 숙종이 후궁은 왕비의 자리에 오를 수 없게 하라는 하교를 내린 것이다.
최숙빈을 염두하고 내린 하교였을까?
숙종으로서는 장희빈 아들인 왕세자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장희빈이 죄인이었으나 폐서인으로 삼지 않고 희빈으로서 자진하도록 명했다.
어미가 죄인으로 죽었으니 왕세자의 입지는 이미 곤란해 져 있었다. 그런 중에 건강한 아들을 둔 최숙빈을 왕후로 삼는다면 왕세자의 입지가 더욱 곤란해 질 것이라 숙종은 염려했다.
철저한 전략가인 숙종으로서는 당연한 조치였다.
혹시 꾸었을지 모를 왕후에 대한 최숙빈의 꿈은 그렇게 접혔다.
최숙빈에게는 그보다 더 암담한 현실이 기다리고 있었다. 다음해인 1702년(숙종28년) 10월 13일 인원왕후 경주 김씨가 왕비로 책봉되어 입궁하였다. 숙종의 나이 42세, 인원왕후의 나이 16세였고, 최숙빈의 나이 33세였다.
정말 대단한 숙종이었다.
숙빈최씨는 이미 숙종의 사랑을 받은 지 10년이었다. 그의 아들을 셋이나 낳었다. 그러나 숙종이 직접 왕비로 간택한 꽃 같은 나이 인원왕후에게는 밀렸다.
숙종은 더 이상 숙빈최씨를 찾지 않는다.
숙빈최씨는 장희빈 쪼 나깔 봐 무지 두려웠다.
이후 최숙빈에 대한 기록이 한 동안 보이지 않는다.
최숙빈은 인원왕후가 간택된 숙종 28년 10월 이후부터 연잉군(후에 영조)이 길례를 올린 숙종 30년 4월 사이에는 궁 밖에 처소를 두게 되었다. 자연히 여전히 궁 안에 거소하는 숙종과 아들 연잉군을 자주 보지 못했을 것이다.
숙종이 10세도 안된 어린 아들 연잉군과 어미를 떼어 놓은 것은 앞서 말 한 것처럼 숙종의 치밀한 정치적 계산의 일환 이었다.
최숙빈이 아들과 함께 사는 것이 허락 된 것은 1711년(숙종37년) 6월 22일 이다. 궁에서 나간 지 무려 7년이 흐른 뒤였다.
최숙빈은 마흔 둘이 된 이 해부터 죽는 순간까지 아들과 함께 며느리 효도를 받으며 여생을 보낼 수 있게 됐다.
아쉽게도 그 시간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숙빈최씨는 47세 되는 숙종 42년부터 병에 걸려
자리보전하게 되었다. 그리고 2년의 투병 끝에 숙종 44년(1718) 3월 9일 49세를 일기로 눈을 감았다.
연잉군의 나이 25세였다.
숙종은 평생에 걸쳐 세 명의 정궁과 여섯 명의 후궁을 두었다. 그 중 왕후 두 명과 후궁 두 명은 숙종 생전에 병으로 먼저 세상을 떠났다.
숙종의 여인들은 거의 모두 상대적으로 불행하게 생을 마감했다.
또 숙종은 8명의 자녀 중 6명을 생전에 잃었다.
숙종은 왕후와 후궁을 폐하고 복귀 시키기를 정치적 이유로 일삼았다.
총애하던 후궁 장희빈은 저주의 누명을 쓰고 사사 당했다. 또 총애하던 숙빈최씨는 알 수 없는 이유로 궁 밖으로 쫒겨 나 죽어야 했다.
숙종은 자기 여자들에게 한 때는 엄청난 열정으로 뜨거웠으면서도 사랑이 식으면 한 편으로는 한없이 비정한 남자가 되었다.
지금으로 보면 나쁜남자의 전형이었다.
숙종은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라 45년을 넘게 재위하면서 작심한 바가 있으면 반드시 이루었다. 자신의 일을 방해하는 것은 용납하지 않았다.
숙종은 세 번의 환국으로 수십, 수백의 사람이 죽여야 했으나 그로 인해 강력한 왕권을 누렸다.
숙종은 왕권을 위해 한 때 자기가 온 몸을 받쳐 사랑했던 여자를 이용하는 것도 서슴치 않았다.
숙종이 일당 독재에게 계속적으로 힘을 실어 주기 보다는 세 번의 환국으로 정권을 잡은 세력에게 긴장감을 주는 것은 잘한 일이었다.
그러나 당시 찬반이 크게 나누어져 있던 대동법 실시처럼 백성이나 나라를 위한 정책으로서가 아닌 여자들을 이용한 궁중 암투로서 그러한 일을 벌렸다는 것은 아주 잘못된 일이다.
조선 당쟁 역사도 이와 비슷하다.
당쟁은 나쁜 것이 아니다. 당쟁은 현재 정당 정치와 같다. 세계 역사상 조선 만큼 치열한 당쟁을 한 나라도 드물다. 조선이 당쟁을 궁중 암투나 상복 입는 기간 정도가 아닌 정책으로서 정권을 서로 바꿔갔다면 당쟁은 자랑스런 조선의 역사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숙종시대에서 보듯이 장희빈과 인현왕후, 최숙빈등의 왕을 향한 여인들의 사랑으로 만들어낸 암투의 장을 조선의 사대부와 숙종은 당쟁으로 이용했다.
왕을 향하고 있었지만 그 여인들의 절실하고 진실된 사랑을 그들은 권력쟁투의 대상으로 삼은 것이다
역사를 떠나 남자들로서 나쁜 일이었다. 참 부끄러운 일이었다!
숙종이 이런 이유로 정치는 잘했는 지 모르지만 이건 아니다는 생각이다.
이어서 영조 친모, 최복순!편이 이어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