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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대 비극 작가와 독자 : 이지아, 『오트 쿠튀르』 읽기
---양순모
1.
일 년 전, 2020년은 여느 해보다도 시인들의 첫 시집이 많이 발간된 해였다. 정확한 이유는 알기 어렵겠지만, 그 이유 중 하나로 문학장 전반에 흐르는 어떤 욕망을 무시하긴 어려울 것 같다. 00년대의 황병승과 10년대의 황인찬을 뒤로하며 그것들과 구별되는 새로운 보편과 취향을 마련코자 하는 그 욕망 말이다.
각각 ‘독자’와 ‘여성’이라는 키워드와 문제의식을 전달해준 15년(신경숙 표절사태)과 16년(문단 내 미투 운동)의 사건들 이후 문학장은 대대적인 개혁을 단행하였고, 이는 오늘날 동시대성을 구성하며 여전히 현재 진행 중이다. 소위 ‘문학적인 것’이라고 일컬어지던 것들에 대한 우리의 상식과 믿음들은 ‘여성-독자’를 중심으로 탈구축되는 가운데, 특히 ‘남성적인 것’과 ‘작가적인 것’에 의해 지지되던 문학성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 가장 활발하다.
우리는 저 욕망의 실체가 위와 같은 비판적 성찰의 과정과 긴밀한 관계 속에 놓여 있음을 어렵잖게 알 수 있다. 황병승으로 대표되는 00년대 스타일은 오늘날 ‘여성-독자’의 입장에서 너무도 남성적이고, 작가적인 까닭이다. 난해한 작가주의적 작품들도 문제적이었지만, 무엇보다 이러한 스타일을 보여주었던 상당수의 시인들이 실제 여러 성추문 및 성폭력 가해자로서 지목된 것이 결정적이었다.
반면, ‘포스트 미래파’라고 불리기도 한 10년대의 스타일은 00년대와는 확연히 다른 모습을 보여주며 하나의 대안으로 잡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포스트’라는 접두어가 말해주는 것처럼 그들은 00년대 스타일에 대한 영향에의 불안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가운데, 오랜 시간 00년대 스타일에 길들여 있던 독자들의 취향을 대체하거나 포용할 만큼 보편적인 미적 취향을 마련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동의 여부를 떠나, 목욕물을 버리려다 아기까지 버린 것은 아닌가 하는 비판들은, 지면에서는 찾긴 어렵더라도, 이런저런 질펀한 문단의 술자리에서 빠지지 않는 레퍼토리다.
2020년이라는 분기점은 그러므로 더욱 보편적인 새로운 문학성을 마련하고자 하는 욕망이 본격적으로 촉발된 해로 규정해볼 법하다. ‘남성적인 것’과 ‘작가적인 것’이라는 속성을 비판적으로 극복하고, 이를 대체할 새로운 문학성을 기획하는 문학장의 욕망은 ‘00년대적인 것’과 ‘10년대적인 것’ 사이의 단절과 구별을 종합하는 새로운 보편을 모색한다. 까닭에 우리는 2020년 무수히 출간된 시인들의 첫 시집들을 통해, 적어도 앞으로의 10년간을 구성해나갈 욕망과 그 기획을 구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을 단초를 얻을 수 있을 것이며, 본고는 이와 같은 맥락에서 2020년에 출간된 이지아 시인의 첫 시집 『오트 쿠튀르』를 살펴보고자 한다.
2.
“급격한 비약과 상호이질적인 것들의 충돌로 점철”되어 있는 시집, 그렇기에 너무도 난해하지만 “감각들을 스스로 베어 내, 그것들이 분방하게 날뛰며 포착하는 세계의 균열상들을 재조립”해내고 마는 시집. 그런데 시집은 “추한 현실”을 재조립해 보여주는 것에 그치지 않고, 기어이 “안으로 끌어들여 그것을 내부로부터 형질 변화시킬 가능성을 (지독하게) 탐색”하며, 혹자로부터 “2020년의 최대의 발견”이라는 평가를 받아내고야 만다.
그러나 이 글을 읽는 상당수의 독자는 이런 시집이 언제 나왔었는지 알지 못하거나, 알고 있다 하더라도 눈을 끔뻑이며 “최대의 발견”과 같은 표현에 고개를 갸우뚱거릴 것이다. 시집이 입소문 식의 인정을 받기란 극히 드문 일로, 대체로 평단의 안목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바, 그러나 『오트 쿠튀르』는 소위 메이저 출판사에서 출판된 시집임에도 관련 리뷰를 찾기가 어렵고, 또한 여타 시 문학 잡지에서 시인의 이름을 발견하는 일 역시 쉽지가 않다. 누군가에겐 ‘최대의 발견’이지만 평단과 독서 대중 다수에겐 『오트 쿠튀르』는 여전히 충분히 발견되지 않은 시집인 셈이다.
『오트 쿠튀르』를 읽어본 독자라면, 위와 같은 인정의 격차와 관련해 그 이유를 추론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요컨대 이 시집은 너무도 ‘남성적’이고 ‘작가주의적’인 까닭이다. 성적이고 폭력적인 이미지들이 난무하고, 독자에게 결코 쉽사리 파악되지 않을 작가 고유의 수수께끼와 감춤의 이미지들로 가득하다. 『오트 쿠튀르』를 적극적으로 지지한 위의 두 인용자(강정, 정과리)가 소위 전통적인 문학성을 구성하는 데에 크게 일조했던 작가들인 사실이 그저 우연의 일치는 아닌 것이다.
물론 『오트 쿠튀르』는 2020년에 출간된 시집이고, 그렇기에 결코 00년대적인 것으로 환원될 수 없는 새로움이 있다. 정과리는 앞서 00년대 시인들의 주무기인 ‘환유’의 시 쓰기를 넘어 『오트 쿠튀르』가 다시금 ‘은유’로 되돌아와 이를 내파하는 방식으로 그간에 각축하던 비유의 세계관들을 넘어서고 있음을 밝힌 바 있다.그러니까 『오트 쿠튀르』는 쉽사리 납득하기 어려운 환유적인 이미지들로 가득해 보이지만, 실상은 은유적인 것(10년대적인 것)과 환유적인 것(00년대적인 것) 모두를 비판적으로 성찰하며 돌연변이와 같은 ‘비유의 상전이’로서 독특한 세계관을 구축해나가고 있는 시집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시집 『오트 쿠튀르』에 대한 긍정적 평가들과 관련하여 쉽사리 동의하기 어려운 불편함을 느낀다. 그것은 여전히 ‘남성적’이고 ‘작가주의적’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상전이’라는 표현이 말해주듯, 시인의 비유는 ‘타자적인 것’에 활짝 개방되어 있고, 따라서 이와 같은 개방은 억압된 것들의 폭력적 발현을 동반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그것이 궁극적으로 시적 승화의 절차를 밟는다 하더라도, 우리는 어떤 거부감과 불편함으로 인해, 이를 끝까지 추수하지 못하고 독서를 중단하게 된다.
그런데 이와 같은 어떤 거부감과 불편함이야말로 2020년대의 새로운 미적 보편을 향한 동시대 문학장의 욕망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발현되고 있는지, 이를 반성적으로 규정할 수 있게끔 한다. 그러니까 명시적으로 오늘날 문학장의 욕망이 00년대와 10년대 양자 모두의 극복이자 종합을 추구한 무엇이라 말할 수 있겠으나, 사실상 그 지양(Aufhaben)과 종합을 실천하는 욕망의 주체는 ‘10년대적인 것’이 그 중심을 이루고 있는 셈이다. 헤겔의 변증법이 많은 경우 좀처럼 동일성의 철학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비판들을 참고하자면, 2020년대적인 것을 구성해나가는 오늘날의 욕망은 혹자의 비판대로 ‘공백(단절)과 (자기)혐오’(이현승)를 여전히 반복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3.
필자는 다른 지면을 통해 비극 개념을 중심으로 『오트 쿠튀르』를 관통하는 화자의 독특함을 간단하게나마 밝혀본 바 있다.요컨대, 비참한 세계에 대한 (자기) 연민의 태도와 이를 비아냥대고 조롱하는 태도 사이에서 세계의 비참과 폭력은 여과 없이 등장하고 말지만, 『오트 쿠튀르』는 00년대 식으로 ‘나’를 격렬히 파괴하는 것과 구별되게 ‘나’를 비극 작가로 자리매김 함으로써 00년대 적인 것을 메타적으로 대상화하고 형상화한다는 것이었다. 00년대 적인 스타일이 시인들을 비극의 ‘주인공’으로 유혹하여 시인 스스로를 파괴 시키고 말았다면, 이지아 시인은 비극의 작가로서 위치를 확실히 함으로써 (자기) 연민과 (자기) 조롱의 악무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다만 시인은 ‘타자적인 것’에 대한 동경과 열림을 시 창작의 핵심으로 삼으며, 즉 세계의 폭력과 비참을 주요한 소재로 채택하며 그들을 당당히 오트 쿠튀르의 무대에 행진시킨다. 이는 00년대적인 것과 10년대 적인 것의 한 종합으로, 10년대적인 것에 길들어진 오늘날 독자들은 자기 파괴적인 ‘나’가 아니라 신뢰할 수 있을 시인 ‘나’를 경유해 세계의 비참과 폭력이 비극의 영웅으로 등장하는 것을 바라볼 수 있고, 이로써 어느덧 ‘비극’의 한 구성으로서 ‘관객’의 위치를 떠맡게 된다.
그러나 좀처럼 비극을 보고 싶어 하지 않는 오늘날 독자들을 상대로 그들을 그 관객석에 앉히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더불어 위와 같은 시인의 위치 선정이 과연 충분히 새롭고 유의미할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한 논의 역시 보충되어야 한다. 요컨대 비극 작가로서 ‘시인’이라는 위치는 00년대 이전으로의 회귀 혹은 퇴보는 아닌지 질문해야 하며, 위와 같은 비극의 단순 상영을 넘어, 어떻게 하면 독자들을 저 비극의 극장 안으로 끌어들일 수 있을지와 관련해 그 구체적 매력의 지점들이 추가로 밝혀져야만 한다.
홍학 : 그 여자는 왜 죽은 건가?
모직 코트 : 마지막으로 하늘을 걷고 싶다고 했습니다. 모델이었어요. 아름다웠죠.
클립 : 왜.
모직 코트 : 자신이 가장 사랑했던 걸 잃었다고 했어요.
홍학 : 그건 죄책감인가.
모직 코트 : 수치스럽다고 했어요. 죄책감보다 수치심이 더 높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그런 것보다 더 높은 게 있다고 했어요.
홍학 : 자네도 힘들 텐데. 궁금해서 미치겠군.
클립 : 나도 그렇네.
모직 코트 : 그건, 말할 수 없습니다.
홍학 : 아니, 그게 아니라.
클립 : 혹시, 인간을 사랑하는지?
홍학 : 인간은 인간만 사랑하나?
모직 코트 : 모릅니다. 그건 저도 잘. 그렇지만, 인간의 몸을 안을 때. 그 몸은 미세한 떨림과 울림과 시림을 갖고 있습니다.
클립 : 나는 그런 걸 모두 알지 못해. 여기는 저 바다와 언덕과 숲보다 높군.
홍학 : 하지만 하늘보단 낮아.
모직 코트 : (밝은 표정을 지으며) 인간들은 저 아래에 있습니다.
모직 코트, 바닥으로 뛰어내린다.
클립 : 아니, 이……보게.
홍학 : 저 친구는 인간들에 중독됐어.
클립 : 인간 없인 안 되겠지.
홍학 : 하지만 이제 그만 인간의 자리는 끝났으면 좋겠어.
클립 : 절대 권력이네. 오랫동안.
홍학 : 이 자연계에서.
클립 : 물러나야지.
홍학 : (모직 코트에서 떨어진 단추를 보여주며) 어, 이게 여기.
클립 : 나도 한번 만져볼 수 있나?
홍학 : 참 예쁘군.
클립 : 빛나네.
홍학 : 구멍은
클립 : 고백인가?
홍학 : 여백이네.
-「반인류를 향한 태양과 파동과 극시」 부분
『오트 쿠튀르』가 가진 가장 독특한 지점 중 하나는 ‘극시’라는 양식을 채택한 점일 것이다. 실제로 시극/극시 연구자이기도 한 이지아 시인은 시집의 가장 마지막에 극시를 배치함으로써 독특한 시쓰기의 한 양상을 제시한다. 위 시를 함께 읽어보자.
‘리프트’에 나란히 탄 ‘클립’과 ‘홍학’ 그리고 ‘모직 코트’는 ‘인간(의 죽음)’을 소재로 대화하고, “인간들에 중독”된 모직 코트의 자살로 끝을 맺는다. 이 대화는 “저 바다와 언덕과 숲보다 높”지만 “하늘보다 낮”은 어떤 높이에서 이루어지고, 모직 코트는 “인간들은 저 아래에” 있음을 말하며, 결국 ‘저 아래’로 향한다. 우리는 위 시에서 “이제 그만 인간의 자리는 끝났으면 좋겠어”라는 바람에도 불구하고, 모직 코트와 유사하게, 참 예쁘고 빛나는 인간의 흔적들에 매혹된, 영원한 여백에 사로잡힌 클립과 홍학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위와 같은 극시의 한 장면을 통해 앞서 제기한 질문들에 어느 정도의 대답을 마련해볼 수 있을 것 같다.
먼저 시인이 차용하는 ‘극’적 장치들은 감당하기 어려운 인간적인 것으로부터 ‘거리’를 확보하게끔 하는 안전장치이자, 이로써 어떤 조감도에 따라 인간적인 것을 살펴볼 수 있는 시야를 확보하게끔 기능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극의 양식에 의지해, 시인은 인물들을 주조하고 동시에 작가의 자리를 마련함으로써, 주관성에의 마력적인 함몰을 피하고 있는 셈이다. 다소 계몽적인 위치에서 이루어지는 시 창작일지 모르겠지만, 인간적인 것에 중독된 우리가 세계에의 비참과 폭력을 정면으로 상대하기 위해서는, 즉 이를 민중시들과 같이 낙관적인 것으로 신화화하거나 혹은 자살의 방식으로 자기 고발하는 수준에 머물지 않기 위해서는, 오디세우스적인 지혜가 반드시 요청되어야 한다.
다른 한편, 위 시의 ‘우화’적 장치들이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지점으로, 끔찍한 세계의 비참과 폭력 가운데 우리는 유아적이고 우화적인 이미지들을 『오트 쿠튀르』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위의 극시만 해도, 나란히 리프트에 타 대화를 나누는 ‘클립’과 ‘홍학’ ‘모직 코트’ 뿐 아니라 ‘청설모’와 ‘자전거’, ‘아버지는 구렁이’와 ‘아버지는 지렁이’같은 우화적 인물들이 등장하여 씁쓸하고 묘한 대화들을 이어 가는 바, 우리는 이와 같은 초현실적-우화적 이미지들과 더불어 역시 상대적인 ‘거리’를 확보하며 비극 작가로서 시인이 그려 보이는 세계의 비참과 폭력을 감히 엿볼 수 있게 된다.
요약하자면 『오트 쿠튀르』는 00년대식 시들이 보여주는 자기 파괴적 ‘비극’의 현장에 참여하되, 안전한 ‘거리’를 확보하며 참여함으로써 작가 스스로와 독자 모두를 보호하는 방식으로 시 쓰기-읽기의 공간을 마련한다. 특히 유아적이고 우화적인 인물들과 이미지들은 오늘날 독자들을 매혹하기에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환언컨대, 거리를 확보한 ‘사랑’은 부족한 사랑이 아니라, 비루한 인간이 그 스스로의 비루함을 인정한 상태에서 내딛는 지독히 인간적이면서 초인적인 한 걸음인 셈이다. 그렇게 우리는 시인의 한 걸음과 더불어 ‘죽음’이 아니라 ‘여백’의 공간에 도달한다.
그렇다면 『오트 쿠튀르』는 2020년대 적인 것이라는 새로운 미적 보편의 한 주요한 인자가 될 수 있는 것일까. 2010년대 적인 것의 연장으로서 오늘날 문학장의 욕망은, 아무래도 『오트 쿠튀르』가 낯설고 불편하겠지만, 그러한 욕망에 다소간 회의적이고 반성적인 이들이라 한다면, 미워도 다시 한 번 『오트 쿠튀르』를 펼쳐 보자. 다만 그 구성의 가장 마지막인 ‘극시’에서부터 거꾸로 시집을 읽어나간다면, 보다 안전하고 매혹되는 방식으로 시인이 그려 보이는 비극의 현장에 거듭 출석할 수 있을 것이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비극이라는 장르를 비극으로 만들어주는 주인공은 다름 아닌 ‘관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