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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43-45
크신 일을 이루신 하나님
우리 민족의 고유의 명절인 한가위(추석)은 본래 추수감사제의 의미가 있었습니다. 한 해 농사를 잘 마치게 된 것이 조상들의 은덕이라고 여겨 제를 지내고 성묘를 했던 것이지요. 이 때쯤 되면 가끔씩 제사문제로 작은 소란들이 발생합니다. 그래서 우리 기독교인들을 보고 조상도 모르는 배은망덕한 놈들이라고 오해하고 욕을 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절대 부모와 조상을 공경하지 않는 잘못된 종교가 아닙니다. 오히려 기독교는 부모를 공경하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귀중히 여기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감사의 대상, 신앙의 대상에 대한 인식의 차이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풍요와 축복이 조상들의 덕이라고 여기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풍년 농사를 이루게 한 분은 천지를 창조하신 만유의 주재, 하나님께 있다고 고백하며 감사하는 것입니다. 아직까지 추수를 끝내지 않았지만 앞으로 성도들의 가정마다 풍성한 수확을 거두게 하실 하나님을 기대하며 감사하시는 추석 명절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의 말씀은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에게 주리라고 하신 하나님의 약속이 온전히 성취된 사실에 대한 짧은 회고입니다. 7년간의 가나안 정복 전쟁(1-12장)과 12지파에 대한 땅 분배 과정(13-19)을 무사히 마치고 도피성과 제사장의 성읍까지 모두 결정되었습니다. 이제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에서 안식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3절밖에 안 되는 짧은 말씀 속에는 몇 가지 중요한 가르침들이 있는데, 오늘은 이 말씀을 중심으로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1. 여호와께서
오늘 우리는 세 절의 말씀을 읽었습니다. 그 말씀의 첫머리에 "여호와께서"라는 단어를 써 놓았습니다. 43절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열조에게 맹세하신 약속을 이루셨다는 것을, 44절은 여호와께서 그 약속을 성취하시기 위해서 그 대적들과 싸우시고 안식을 주셨다는 것을, 45절은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모든 일을 남김없이 이루셨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오늘 본문의 말씀 이 짧은 세 절에, 아브라함과 그 후손들에게 약속하신 그 모든 일을 이루신 분은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기록함으로 이스라엘의 역사는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음을 선포하였던 것입니다. 그 오랜 기간 내내 혹독한 전투가 있었지만, 이제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을 얻었고, 평화와 안식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적들은 이제 반기를 들 수 없게 되었고, 하나님의 약속 중에 하나도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큰일을 이루신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그렇습니다. 이 모든 일을 하나님께서 이루신 것입니다. 맞습니다. 세상의 역사는 하나님의 주권에 있습니다. 이 세상은 우연히 저절로 자연적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역사를 다스리시고 섭리하시는 분이 계십니다.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우주와 만물을 창조하시고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장하시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손길에 의해서 오늘도 이 세상의 역사는 진행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을 살면서 하나님의 손길에 붙잡힘을 당하고, 하나님의 은총 속에 살아갈 수 있다면 그 인생은 가장 복되고 행복한 존재가 될 것임은 자명한 일일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 한 주간 동안 9월 집중 기도회를 가졌습니다.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매일새벽에 하나님을 구하기 위해 모였습니다. 그리고 9월의 축복을 마귀에게 빼앗기지 않기 위해 우리는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역대하 26장에는 유다의 10대 왕인 웃시야에 대한 역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웃시야 왕은 보기 드물게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며 지도력도 있어서 온 나라를 강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웃시야의 이러한 형통함의 배경에는 하나님을 구하며 살도록 가르쳐준 "스가랴"라고 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5절에 "하나님의 묵시를 밝히 아는 스가랴의 사는 날에 하나님을 구하였고 저가 여호와를 구할 동안에는 하나님이 형통케 하셨더라"고 했던 것입니다.
이 말씀에는 두 가지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 말씀 그대로 여호와 하나님을 구하며 사는 삶에는 형통함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여호와 하나님을 구하지 않는 삶은 실패요 절망이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웃시야 왕은 나라와 왕권이 강성해지면서 교만하여 져서 제사장들만이 할 수 있는 향단에 분향하는 일을 하려다가 이마에 문둥병이 발하여 죽는 날까지 성전에 들어가지 못하고 별궁에서 쓸쓸하게 살아야 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구하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구한다는 것은 단순히 기도하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우리의 인생을 온전히 하나님께서 주관하시도록 내어드리는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삶에 하나님의 은총이 임하도록 겸손히 엎드릴 줄 아는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문학평론가이시며 서울대학 교수를 지내신 박동규 장로님이 어느 책에 이러한 글을 기고했습니다. [고향의 할머니 댁에 가면 할머니는 나를 꼭 옆자리에 이불을 펴고 눕게 하셨다. 겨울이면 장작불을 펴서 방을 데우던 때라서 새벽이면 온돌이 식어 으시시해지기 마련이었는데, 이때쯤이면 할머니는 추운 새벽 공기를 가르고 교회에 나가셨다. 밤에도 잠자리에 들기 전에 언제나 내 손을 잡고 기도를 하셨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할머니에게 왜 새벽이면 교회에 가고 밤이면 꼭 기도를 하고 주무시는지를 물었다. 할머니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시면서 '아침에는 오늘도 하나님이 지켜 주시기를 기도하게 위해 교회에 나가고, 밤에 기도를 드리는 것은 오늘 하루도 지켜 주심을 감사드리기 위해서"라고 일러 주셨다. 그때야 비로소 나는 할머니의 하루가 온전히 하나님의 품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할머니의 하루는 하나님의 은총이 베푸는 향기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도 그 향기를 느끼며 산다] 매일 같이 진행되는 평범한 일상들이지만 그 속에 하나님께서 임재하고 계신다면 그는 분명 비범한 삶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얼마전 타계한 일본의 여류 작가 [미우라 아야꼬]는 13년간의 투병생활에 '임마누엘 아멘'기도가 큰 힘이 되었다고 간증을 했다고 합니다.
그가 언젠가 누구에게 이런 질문을 받은 일이 있었습니다.
"기독교에는 불교에서와 같은 염불은 없습니까?
'나무아미타불' 같은 것 말입니다."
그래서 그녀는 이렇게 말했답니다.
"기독교에 염불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과 비슷한말은 있습니다. 그것은 '임마누엘 아멘'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다'를 뜻합니다.
'나무아미타불'은 '부처와 함께 있다'를 의미하는 듯한데, 그와 비슷합니다. 그리고 '아멘'이라는 것은 '참으로' '진실로'라고 동의하는 말로서, 이것은 세계 공통의 말입니다.
그러므로 '임마누엘 아멘'이라고 하면,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다. 실로 그렇습니다. 고마운 일입니다.'라는 뜻이 됩니다. 나는 오랜 요양생활 가운데 문득 쓸쓸해지면, 곧잘 이 '임마누엘 아멘'을 불렀습니다. 그러면 이상하게도 전능하신 주님께서 내 곁에 계셔서 온전히 지켜주시는 줄 알고 마음이 평안해지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어떤 좋지 않은 생각이 마음에 수치는 때에도'임마누엘 아멘'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해주시는데, 좋지 않은 생각에 잠겨있을 수는 없습니다. 이 짧은 기도를 드리면 가령 누가 오해하여도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나의 모든 것을 알아주신 다는 기쁨이 솟아납니다." 믿음으로 기도할 때, 우리는 이런 작고 짧은 기도에 의해서도 격려되고, 위로 받으며, 힘을 얻도록 인도함을 받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삶에도 여호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총이 삶의 향기가 되어 매일 매일의 삶 속에서 평안과 안식, 형통함의 축복이 넘치게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2. 말씀하신 선한 일
여호수아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하신 모든 것이 선한 일이라고 믿었습니다. 이 믿음이 오랜 세월을 문제덩어리인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전쟁에 이기고 가나안 땅을 차지할 수 있었던 비밀이었던 것입니다. 만약에 여호수아가 오합지졸과도 같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바라보고 절망하였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그러나 여호수아는 믿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신 모든 일은 선하며, 하나님은 반드시 모든 일을 선하게 이루실 것이다" 아멘. 사도 바울도 로마서 8:28에서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선한 일을 계획하시고, 그 역사를 선하게 진행하시고 선하게 이루신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입니다.
죽어도 다시 산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1장 25절에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예수님을 믿으면 영원히 죽지 않는다"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에게 절망이란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리스도인이란 선한 일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믿기 때문인 것입니다.
성서교재 간행사 대표인 김영진 장로는 이런 간증을 했습니다. "나는 어려운 일을 수없이 당했지만 그때마다 그 일이 잘못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쫓긴 적은 없다. 그것은 나의 아침 습관 때문이다. 매일 아침 출근해서 기도하고 찬송 부르고 성경 한 장을 읽고 나서 일과에 들어간다 나는 지금껏 성서백과 대사전, 칼빈 주석, 입체 낭독 성경, 그랜드 종합주석, 새벗 등 일 천 종이 넘는 기독교 문서를 만들어 보급해왔다. 나의 인간적인 능력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 모든 일은 내게 능력 주시는 하나님의 의해 이루어진 것이지 내가 한 것은 아니다" 그의 간증 속에는 믿음과 그에 따르는 희망이 있습니다. 무슨 일을 하던지 선한 일을 이루시는 그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 능력으로 그 일을 이룰 수 있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통나무집 가난 속에서도 큰 희망을 품고 살았던 링컨은 미국의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초등학교를 중퇴한 무디는 구둣방에 쭈그리고 앉아 남의 냄새나는 구두는 수선공이었지만 하늘 나라에 대한 소망과 희망으로 큰 뜻을 품었고, 결국에는 위대한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오 헨리의 [마지막 잎새]에서 소녀는 떨어지는 낙엽을 보면서 절망합니다. 마지막 잎사귀가 떨어지면 자신의 목숨도 다 할 것이라고 상상합니다. 이 소녀의 병은 육신의 병이 아니라 마음의 병이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환경을 보고 절망하면 안됩니다. 다음 해 봄이 되면 나무가 다시 싹을 틔우고 쫓을 피우고 열매를 맺을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눈에 보이는 요단강, 여리고, 아이 성, 그리고 가나안 땅에 사는 무장한 일곱 부족들은 절망을 가져다주기에 충분한 요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은 하나님이 그들의 조상들에게 하신 약속은 선하시며 또 반드시 선하게 이루어 주시리라는 기대를 잃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가나안 정복의 맨 앞자리에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는 지도자들이 될 수 있었습니다. 절망은 하나님의 능력을 거부하는 불신앙의 행위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하나님께서 반드시 선한 일을 이루어 주시리라는 희망은 하나님의 능력을 우리의 삶에 오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언제나 최선을 생각하며 사는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마귀는 언제나 최악의 시나리오를 제공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언제나 최선의 시나리오를 준비하고 계십니다. 어느 시나리오를 따라 움직이시겠습니까? 언제나 좋은 것으로 준비하시고 이루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3. 남음이 없이 다 응하였더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금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된 일과 그 땅을 차지하고 안식을 누리게 된 것은 몇 백년 전 아브라함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약속의 성취라는 사실은 우리 모두 주지하고 있는 사실입니다. 가나안 땅을 너와 네 후손에게 주리라고 약속하셨을 때, 과연 그것이 언제 이루어질 것인가? 오랜 세월을 지나면서 그 약속은 물거품처럼 여겨졌을지도 모를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은 그 약속을 잊지 않고 이루어 주셨습니다. 그것도 하나도 남김 없이 말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는 보이지 않는 무언의 약속들에 의해서 질서가 유지되고 잡혀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법이라는 강제성을 띤 규범일 수도 있고, 양심의 판단에 호소하는 윤리나 오래 이어온 전통적 규범이 될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 모든 것들이 약속이란 말입니다. 이 약속이 잘 지켜지는 사회가 안정되고 평화로운 사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은 약속이 잘 지켜지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문제들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경제 위기를 겪으면서 우리 사회는 약속을 믿지 않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보증서를 아무리 많이 작성해도, 믿을 만한 근거를 아무리 많은 서류로 제시를 해도 그것을 이제 더 이상 신뢰할 수 없는 세상이 된 것입니다. 이 불신의 세상, 그러나 우리가 믿을 수 있는 유일한 보증서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감히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성경의 본래 이름은 약속, 계약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향해서 주신 약속들을 기록한 것입니다. 우리들을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친히 그 백성들을 위해 필요한 것들을 일방적으로 약속하고 보증해 주신 것입니다. 붉은 인주로 도장을 찍지는 않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으로 하나님의 약속의 변치 않으심을 만 천하에 공포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약속은 한 가지도 변함없이 다 이루어질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어느 목사님이 약수터에 처음으로 물을 뜨러 갔습니다. 가서 보니 그 약수터에는 물이 나오는 샘이 세 곳이 있는데 그 가운데서도 물이 잘 나오는 윗샘 두 곳에는 물을 받으려는 사람들이 별로 없고 보기에도 신통치 않을 만큼 졸졸 흐르는 아랫샘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물통을 내려놓고 한 시간이든 두 시간이든 기다리는 것이었습니다. 어찌할까 망설이다가 옆에 계신 어르신께 여쭈었더니 윗샘 두 곳은 가물면 물이 끊어지기도 하고 물 속에 불순물이 섞여 있기도 하지만 아래의 샘은 물이 많이 나오지 않으나 아무리 가물어도 물이 끊어지지도 않으며 불순물도 섞여 있지 않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이 목사님은 순간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깨달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아무리 혹독한 가뭄 속에서도 끊어지지 않는 샘을 만드신 분이 하나님이시라면 그 하나님은 얼마나 더 신실하실까? 신실하신 하나님은 아무리 퍼 주어도 끊이지 않는 사랑과 자비와 용서와 긍휼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그 약수터의 작은 샘을 통하여 체험하였다는 것입니다. 비록 많은 물을 내는 샘은 아니지만 언제나 마르지 않고 신실하게 물을 내는 그 샘에만 사람들이 모이듯 영원토록 신실하신 하나님 앞에 머무를 때, 우리는 넉넉하신 하나님의 은혜의 샘물을 얻어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3:5 -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8절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아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하나님 한번도 나를 실망시킨 적 없으시고
언제나 공평과 은혜로 나를 지키셨네
지나온 모든 세월들 돌아보아도
그 어느 것 하나 주의 손길 안 미친 것 전혀 없네
오 신실하신 주 오 신실하신 주
내 너를 떠나지도 않으리라
내 너를 버리지도 않으리라
약속하셨던 주님 그 약속을 지키사
이 후로도 영원토록 나를 지키시리라 확신하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들은 변함없이 신실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백성들입니다. 우리에게 약속을 주신 분이 변치 않는데 약속을 받은 사람이 무엇이 걱정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크신 일을 이루어 주신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도 변함이 없으신 모습으로 함께 계심을 믿습니다. (133장)
출처: 성경 벌레들 글쓴이: 성경 벌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