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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은 정몽주 선생 묘소를 찾다
2014.11.7
지난 봄 어느 모임을 이끌고 포은 정몽주 묘소를 탐방한 일이 있었다. 논어반 가을 야외수업 장소로 선생님과 일찌감치 점찍어 두었었다. 11월7일 만추의 단풍이 어우러진 정몽주선생의 묘소를 찾게 되었다. 교통이 전철이나 승용차로 찾기가 어려워 대중교통 버스편을 조사하여 사전에 공지하고 능원초등학교 입구 버스정류장에 11시 집결토록 하였다. 마침 날씨도 화창하여 가을 야유회를 겸하는 분위기였다. 다 모이고 보니 예상인원이 적중하였다. 학생수 49명이다.
용인시 문화관광과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두명의 해설사가 나왔다. 인원이 많으면 한사람이 감당하기에 어려울 것으로 생각,부탁한 것인데 처음엔 안된다더니 부탁을 들어주었다. 단지 충렬서원은 늘 문을 닫아두는데 특별한 경우만 열어보인다고 한다. 열쇄를 가진 담당자를 수배하여 겨우 허가를 얻었다. 지난 봄에도 충렬서원은 보질 못했기에 나 자신도 이번 기회에 꼭 보고 싶었다.
두팀으로 나누어 해설사의 설명으로 선생의 묘소를 찾아 참배도 하고 궁금했던 점들에 관해 알게 되었다.
포은 정몽주(圃恩 鄭夢周)는 ? 정몽주 선생은 고려말(1337~1392) 충,효,인,의로 일관되게 생활한 대학자시며 과거에 세차례나 장원급제할만큼 천재로 당시 어지러운 국정을 바로 잡으려한 정치가,왜,원,명나라에 사신으로 나가서 명성을 떨친 외교관이시며 성리학의 태두로 불리신 이색 선생 으로부터 "東邦理學之祖"라는 찬사를 받을만큼 성리학의 으뜸가는 학자이셨다. 또한 포은은 효자 가운데서도 처음으로 되는 생려효자였다.고려 공민왕이 <정몽주가 사는 집에 효자정려를 세워서 그 효성을 밝게 하여라>고 한 것이다. 그의 관향은 경북 포항의 영일(迎日)이고 출생지는 경북 영천(永川)이다. 1337년 영천 우항리에서 부친 정운관의 아들로 태어났고 몽란,몽룡을 거쳐 청년기에 몽주로 이름이 바뀌었다. 네분의 임금을 모시면서 성균관 박사,성균관 대사성 예문관 대제학 문하찬성사를 거쳐 이성계와 같이 공양왕을 옹립하고 예조정량,예문관 대제학, 문하찬성사,수문하시중 등 많은 벼슬을 하였다. 이성계가 역성혁명을 하자 단심가로 그의 충절을 지키다 이방원에 의해 1392년 4월 4일 개성 선죽교에서 순절하셨다. 시신은 우탁의 가문 양호당 우현보과 송악산 스님들에 의해 수습되었다. 올해가 그의 사거 622년째이다.
용인에 있는 정몽주 묘소와 서원에 관해 궁금한 것이 많았다. 왜 고향인 영천이 아닌 용인으로 천묘하였는가? 그를 죽인 이방원에 의해 영의정으로 추증되고 천묘를 하게 되었는가? 영천의 임고서원,영일의 오천서원,용인의 충렬서원에서 경쟁적인 배향을 하는가? 유림에 의해 11개서원에 배향되고, 중종 때 사패지로 700정보(210만평)나 영구 세습지로 받은 극진한 대우는 ? 증손녀 사위였던 이석형의 묘소와 비각이 왜 이곳에 있는가 등등--
정몽주 묘소 개성 인근 풍덕군(개풍)에 모셨던 묘소를 1406(태종6)년 3월 태종의 명에 의해 영천으로 천묘하게 되었는데 전하는 바에 의하면 면례행렬이 지금의 수지 풍덕천 근처를 지나며 잠시 쉬는 사이에 명정이 휘몰아친 돌풍에 날려 떨어진 곳이 문수산 중턱 145m인 지금의 용인 능원리이며 명당으로 판명되어 이곳에 안치하게 되었다는 설이 지배적이다. 부인 경주 이씨와 합장되어 있다. 15세기 초반 영일 정씨 동족촌이 이곳으로 이거하여 장남 중추원사 정종성,손자 정보 등 많은 정씨 묘소가 산재해 있다. 정몽주 비각을 지나 묘역에 들어서면 홍살문이 먼저 경계를 한다. 사악한 기운을 막아 내기 위한 풍수적 무기이다. 좌측으로 경모사,모현당 그리고 제를 지내기 위한 재실인 영모재(永慕齋)가 있다. 이 글씨는 송시렬의 글씨로 유명하다. 우측에는 유명한 포은의 단심가(丹心歌)와 그의 어머니가 지었다는 백로가(白鷺歌) 시비가 서 있다.
묘소로 오르는 언덕 아래 증손녀사위 저헌 이석형의 가문 연안이씨가 만든 연지(연못)가 있다. 가운데 자리에 포은의 묘소가 마치 왕릉의 규모로 크게 자리하고 있다. 일행은 그의 묘소 앞에서 머리를 숙여 재배를 하였다. 절을 하면서 600년 전의 그의 나라에 대한 기개와 충절을 생각하면서 경건한 마음으로 --- 특이한 것은 상석이 둘이었다. 왕릉과는 달리 무인석은 없고 문인석이 양쪽에 그리고 행사 때 차양 줄을 매기 위한 둥근 돌이 있는데 이게 무어냐고 묻는 이가 많다고 한다.
포은 묘소 좌측 약간 위쪽에 손자 정보(鄭保)의 묘가 있고 포은의 묘소 우측에 저헌 이석형(樗軒 李石亨)의 묘가 있다. 이석형(1415~1477)은 포은의 증손녀사위이다. 그러니 포은의 손자 정보(鄭保)의 사위이다. 1441년(세종23) 사마시에 합격 문과 장원 급제후 14년간 집현전에서 여러 관직을 거쳤다.사헌부 대사헌 등 요직을 거쳤으며 저서로 대학연의,저헌집 등이 유명하다. 그의 선대로 올라가면 연안이씨의 시조 되는 사람은 통일 신라 시대 당나라 소정방을 따라온 이무(李茂)장군이다. 신라와 당이 백제를 칠 때 중랑장으로 공이 컸다. 백제가 망한 뒤 당나라가 백제를 차지하려는 것을 막고 신라에 귀화하여 공신이 되었다. 나라로부터 연안백(延安伯)을 하사받았다. 연안이씨 가문은 이석형을 필두로 많은 인재를 배출하여 8명의 정승,6명의 대제학이 42명의 판서가 나와 그 명성을 떨쳤다. 포은 묘역 입구에 연안이씨비각공원이 있고 거기에 저헌 이석형의 신도비가 있다.
충렬서원(忠烈書院) 묘소탐방을 마치고 미리 점심장소로 예약한 "고기향기"집을 찾아갔다. 50명 인원이 들어닥치니 정신이 없는 모양이다. 각자 식성이 다른 점을 감안 미리 메뉴를 정하지 않았더니 사달이 났다. 메뉴를 가장 선호할 듯한 하나로 통일하려고 했더니 다른 메뉴를 원하는 사람도 있어 두가지로 나누었는데 또 안된다하여 결국 하나로 통일되는 과정에 배식이 늦어 불만이 터졌다. 식사가 끝날무렵 미안한 마음으로 가장 늦은 분들께로 사과를 하러 갔더니 심한 불만이 나왔다. 웃으면서 사과했지만 곰곰히 생각하니 모든게 나의 잘못으로 자인되고 고생한 아무 보람도 없이 욕만 먹은 것 같아 앞으로는 절대 나서지 않기로 했다. 다만 선생님을 도운다는 생각으로 장소 결정에 의견만 주는 것으로- 식사문제는 각자 해결함이 가장 현명할 것 같다. 능력부족을 절실히 깨달았다.
충렬서원은 맞은편 산 중턱에 있었다. 충렬서원은 동방성리학의 조종(祖宗)으로 받들어지는 포은 정몽주 선생을 배향하는 서원이다. 처음에는 지금의 죽전동에 있었고 이름도 죽전서원(竹田書院)이었는데 임진왜란으로 불타고 1605년(선조) 경기도 관찰사 이정구가 정몽주 후손인 현감 정종선 그리고 이시윤 등과 함께 묘소 인근에 중건하였다. 1608년(광해1)에 사액서원이 되어 국가공인을 받았으나 대원군의 사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 90년전인 1924년 여기에 복원되어 오늘에 이르러고 있는데 전통적인 전학후묘(前學後廟) 양식을 따라 앞쪽에 강당이 뒤쪽에 사당이 있다. 선생을 배향할때 헌관,집사 등 담당직무의 위치를 알려주는 팻말이 있어 색달랐다. 안으로 들어가 영정문을 열고 포은 선생의 영정을 볼수 있었다. 평소에는 열쇄로 잠궈놓고 있었다. 원본은 도난당하고 사본이라고 한다. 서원을 나와 한창 공사중인 포은종택을 견학했다. 중국 태항산에서 가져왔다는 어머어마하게 큰 대리석이 세워지고 圃隱宗宅 文忠世家라는 큼직한 현판이 걸리고 있었다. 규모가 크고 비용이 많이 들것처럼 보여 이 돈이 어디서 나오느냐?며 궁금해한다. 늦가을 단풍이 아름답게 어우러져 포은 선생의 서원도 더욱 멋있어 보인다. 공사가 끝나면 제대로 선생을 찾는 후손이나 공부하는 면학도들의 참배가 많아질 것으로 생각된다.
식당을 제외하고는 오늘 야외수업은 예정대로 잘 진행되었고 개별적으로 좋은 곳으로 안내해줘서 고맙다는 인사도 받았다. 이럴때 보람을 느낀다. 돌아오는 길은 가던 길과 반대로 오면 된다. 의외로 교통편이 많았다. 갈때 60번을 탔는데 57-1번을 탔더니 갈때 보다 더 빨리 죽전역까지 올 수 있었다. 은근히 행사 진행에 차질이 있을까 걱정이 있었 는데 대과없이 잘 치루게 되어 안심이 되었다. 야외수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주신 여러 동지들께 감사를 드린다.
버스정류장에 서 있는 단심가 입구 안내석 포은선생 신도비각 해설사를 따라 입장 재실 영모재
경모사와 모현당 단심가 포은선생 어머니가 지은 백로가 이석형 가문이 만든 연못
이석형묘소부터
처가가 연안이씨 가문이라고 이석형 묘소에 참배하는 우당 서영교동지 포은 정몽주 묘소 해설사의 설명
정몽주 선생 묘비석 묘소에서 내려다 보이는 묘역 출석부를 대신하여 건너편 산중턱에 충렬서원이 보인다. 손자 정보의 묘소도 손자 정보 묘소 연안이씨 비각공원 충렬서원 안내도 강당 모친이 지었다는 백로가가 돌에 새겨져- 서원 사당 구경 위패 뒤로 영정이 있는 문짝에 열쇄가 잠겨 있다. 문을 열고 본 포은 선생 영정
여러 직위가 서는 장소를 지정
서원과 종택에 공적이 많은 분의 공덕비 포은의 시 포은종택 마당에 서 있는 명구 종택의 현판
중국에서 들여왔다는 대리석 정원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사무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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