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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자는 안식일의 주인(1-5)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시대를 열기 위해 오셨습니다. 새로운 시대는 현 시대에서 소망을 찾지 못한 자들에게만 의미가 있습니다. 이 시대가 하나님을 잘 경배하는 시대라면 몰라도, 하나님을 떠난 시대라면, 그 시대를 저항해서 피해자일수록 새로운 시대를 꿈꿀 것입니다. 역설적으로 상에서 성공한 사람들은 정말 하나님께서 주시고 싶은 그런 것은 소망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기대하는 사람인 남을 섬기는 사람은 될 수 없고, 그들은 점점 하나님 나라에서 멀어진 모습을 갔습니다.
1안식일에 예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실새 제자들이 이삭을 잘라 손으로 비비어 먹으니 2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느냐 3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다윗이 자기 및 자기와 함께 한 자들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4그가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다만 제사장 외에는 먹어서는 안 되는 진설병을 먹고 함께 한 자들에게도 주지 아니하였느냐 5또 이르시되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더라(1-5)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제자들이 밀 이삭을 잘라 먹는 것을 본 바리새인들이 율법을 어겼다고 비난하자, 예수님은 다윗이 성전에 들어가 제사장의 떡을 먹었던 사례를 언급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의 주인이 자신임을 선포하셨습니다. 이는 안식일의 참된 의미와 주님의 권위를 강조합니다.
(1) 제자들을 비난하는 바리새인들(1-2)
앞에서 예수님께서는 세리 레위를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그가 데려온 다는 죄인들과도 식탁 교제를 나누었습니다. 예수님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다면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당시는 죄인으로 간주되기 쉬웠던 행동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죄인을 구원하려 오신 분이십니다. 환자를 살리려 오신 영혼의 의사이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시대를 열기 위해 오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의 권세와 능력에 대한 소식이 주변으로 점점 퍼져나갔습니다. 시기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의 사역에 트집 잡기가 시작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진 열심 있는 사람들이었지만, 하나님의 사역을 반대하는 일을 합니다.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실 때, 제자들이 배가 고파서 밀 이삭을 잘라 손으로 비벼 먹었습니다(1). 누가는 사건이 ‘안식일에’(엔 사바토 έν σαββάῳ) 일어난 것을 강조합니다. 제자들의 행위를 본 어떤 바리새인들은 제자들의 행동을 ‘너희들’이 안식일에 금지된 일을 행한다고 예수님께 항의합니다(2).
(2)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님(3-5)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의 질문에 대답하시고 다윗의 이야기(삼상 21:1-6)를 근거로 제자들을 변호하십니다(3-4). ‘다윗이 자기와 및 자기와 함께 한 자들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라고 질문하십니다(3). ‘읽지 못했느냐?’는 바리새인들의 오해를 지적하는 표현입니다. 본문의 초점은 해석의 권위를 가진 예수님께서 안식일의 의미를 제대로 드러내는데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이 다윗의 이야기를 당연히 알고 있겠지만, 정작 그 사건의 정확한 의미는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고 판단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다윗의 사건을 통해 하나님께서 무엇을 알려주셨는지 드러내십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만 먹을 수 있는 진설병(레 24:5-9)을 먹고 자신과 함께한 사람들에게도 주었습니다(4). 다윗이 먹을 것을 찾으러간 곳은 하나님의 집, 곧 성막이었습니다. 성막에는 안식일에 제사장들을 위해 준비해둔 열두 개의 빵이 있었습니다(출 40:23; 레 24:5-9). 다윗과 일행은 제사장들에게만 허용된 규례를 ‘안식일’에 침범했습니다. 다윗과 일행이 안식일에 진설병을 먹은 사건이 어떤 점에서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 이삭을 잘라 먹은 행위를 정당화하는 근거가 되겠습니까? 대답은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5)에 나옵니다. 바리새인들은 안식일 규례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사람들을 규례로 구속하고 심지어 생명을 악용하기도 합니다(6-7). 그러나 예수님은 안식일의 주(퀴리오스 κύριος)로서 안식일 규례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을 정확히 대변하십니다.
5절의 다니엘 7:13(‘인자 같은 이’)에 근거하는 ‘인자’라는 예수님의 자기 호칭은 죄 용서의 권위를 주장할 때 이미 등장한 바 있으며 (5:24), 여기서도 안식일에 대한 주권을 명시하기 위해 사용되고 있습니다. 다윗과 일행은 목숨을 잃을 정도로 배가 고팠고, 다윗은 안식일 규례가 배고픔의 문제에는 탄력성 있게 적용되는 것으로 해석했습니다. 다윗은 율법의 해석자로 배고픔과 안식일의 관계를 해석했습니다(참조. 행 13:22).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의 주로서 다윗보다 훨씬 높은 권위로 안식일을 해석하십니다. 제자들은 다윗 일행처럼 허기진 상태였을 것입니다.
안식일은 선(6:9)과 자유(13:16)와 치유(14:3)의 날이므로, 안식일에 배고픔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안식의 의미에 부합합니다. 이미 구약에서 배고픔과 같은 인간의 필요를 위해 안식일 규례도 유연성을 보였습니다. 예수님의 나사렛 선언처럼 가난한 자들에게 기쁜 소식이 전해지는 하나님 나라가 도래했고 희년의 복음이 안식일에도 실행되고 있습니다(4:18). 안식일은 하나님 나라의 일꾼들이 굶으면서 고통 가운데 보내는 날이 아닙니다. 희년의 복음이 실현되는 날이라는 관점에서 안식일은 인간을 속박하는 날이 아니라 인간을 위한 날입니다(4:18-19, 21). 이와 같이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무엇을 하는 것이 옳고 그른지 판단할 수 있는 안식일의 주로서 제자들의 행위가 안식일 규례를 어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조금이나마 맛본 것으로 변호하십니다.
교회의 역사에서 규정되고 추가되는 규례와 전통은 안식일의 주가 되시는 예수님의 시각에서 항상 해석돼야 하고 복음의 관점에서 점검받아야 합니다. 인생의 어려움과 눈물보다 규례를 더 중요한 가치로 여긴다면, 그것은 희년의 복음에서 멀리 이탈한 판단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궁핍을 긍휼의 마음으로 이해하셨고 가난한 자들에게 전해지는 기쁜 소식을 유대교의 전통이 막을 수 없다고 해석하셨습니다.
안식일에 회복하시는 예수님(6-11)
예수님을 거부하는 만족이라면 그 만족은 거짓 만족입니다. 불안한 마음이 있는 참 만족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는 세상은 끊임없이 올라가려고 하고, 더 소유하려고 합니다. 정작 원하는 것을 가졌을 때는 그것을 누리려고 하지 않습니다. 더 나가서 다른 것을 원하고 가지려고만 합니다. 이것을 위해서는 남이야 어떻게 되든지 상관하지 않습니다. 타인의 안식을 빼앗아서 자신의 안식을 확보하려고 하지만 결국 자기 욕망의 노예가 되어서 편안 잠을 자지 못할 것입니다.
6또 다른 안식일에 예수께서 회당에 들어가사 가르치실새 거기 오른손 마른 사람이 있는지라 7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고발할 증거를 찾으려 하여 안식일에 병을 고치시는가 엿보니 8예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손 마른 사람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한가운데 서라 하시니 그가 일어나 서거늘 9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묻노니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며 10무리를 둘러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그가 그리하매 그 손이 회복된지라 11그들은 노기가 가득하여 예수를 어떻게 할까 하고 서로 의논하니라(6-11)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손 마른 사람을 고치시자, 바리새인들이 이를 지켜보고 비난했습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합당함을 강조하시며, 그 사람을 고쳐주셨습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해치려는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습니다.
(1) 고발할 기회를 엿보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6-7)
또 다른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 오른손 마른 사람이 있었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한 손 마른 장애인을 예수님을 고발할 증거 확보를 위해 이용합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밀 이삭을 잘라먹은 제자들을 변호한 행위와 더불어 안식일에 금지한 치유를 증거로 삼으려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의도를 알고 계셨습니다(2:35; 5:22; 9:47; 24:38).
(2) 안식일의 의미를 가르키신 예수님(8-11)
예수님께서는 손 마른 사람을 한가운데 세우셨습니다. 사람들의 초점이이 장애인에게 집중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라고 물으십니다(9). 당시 유대교 전통에서 안식일에는 응급 처치만 가능했고, 실제적인 치료는 안식일이 지나야 가능했습니다. 이런 전통에서 한 손 마른 장애는 안식일에 당장 해결해야 하는 응급 처치가 아닙니다. 그러나 안식일의 주가 되시는 예수님의 시각에서 치유는 안식일에도 일어나야 하고 생명이 살아나는 것은 안식일의 본래 의미입니다. 생명을 살리는 것이 선이며, 선을 행해야 하는데도 행하지 않는 것은 악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안식일에 악한 행위를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타인에게 의존해 살 수밖에 없는 장애인의 인격을 존중하고 회복하지 않고 도구로 악용했습니다. 사회에서 약한 사람을 도구로 사용하는 행위자체가 악입니다. 또한 염탐꾼처럼 덫을 설치하고 엿보는 모습은 선생의 자세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손 마른 사람에게 장애가 있는 손을 내밀라고 하십니다. 일반적으로는 손을 숨기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종교지도자들 사이의 논쟁을 보면서 손 마른 사람에게는 예수님에 대한 신뢰가 생겼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 치부를 드러내는 것은 치유의 출발입니다. 그가 말씀에 순종해 손을 내밀자 회복됩니다(10).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생명을 위협하는 문제가 아닌 경우 안식일이 지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해석했습니다. 그들의 판단에는 손 마른 사람의 치유가 안식일 법보다 우선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는 신체의 문제를 해결 받는 날에서 안식일이 제외되지 않습니다. 가난한 자들에게 기쁜 소식이 전해지고 갇히고 눌린 자들에게 자유가 주어지는 것이 복음입니다. 빈궁한 인생에게 치유로 안식을 선사하는 것이 안식일의 진정한 의미입니다. 오늘이 안식일이라고 해서 생명을 살리고 회복하는 일을 내일로 미룰 이유가 없습니다. 복음의 혜택을 누리는 ‘오늘’(4:21)에서 안식일이 예외가 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의 치유는 나사렛 회당에서 선언한 희년의 복음이 실현된 사건이다 (4:18-19). 현장을 목격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분노하면서 예수님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의논하기 시작합니다(11절). 안식일을 만드신 하나님의 뜻을 공동체에 실현해야 할 신앙의 선생들이 하나님의 마음을 가로막는 도구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뜻을 잘못 해석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뜻이 실현되는 상황을 보고 분노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대한 오해가 유발하는 자기도취적 분노는 선의의 피해자를 만드는 비극으로 귀결됩니다. 예수님의 긍휼은 손 마른 사람을 회복시켰으나 이제 위험을 감수해야 합니다. 긍휼은 반드시 희생을 동반합니다. 희생 없는 긍휼은 진정한 회복을 일으킬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아픔과 슬픔, 고통에 귀 기울이셨습니다. 사망과 사탄에 매인 인류에게 오늘 여기서 안식을 누릴 수 있도록 오셨습니다. 주님의 몸인 교회는 안식의 공동체입니다. 안식을 누리는 공동체입니다. 안식을 누리는 공동체며, 안식을 나누는 공동체입니다. 사랑의 선교는 안식을 나누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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