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16아침단상
어느 어머니의 편지 '세상 별거없다 속끓이지말고 살아라'
아들아 보아라.
나는 원체 배우지 못했다.호미 잡는 것보다글 쓰는 것이 천만 배 고되다.
그리 알고서툴게 썻더라도너는 새겨서 읽으면 된다.
내 유품을 뒤적여네가 이 편지를 수습할 때면나는 이미 다른 세상에가있을 것이다.
서러워할 일도가슴칠 일도 아니다.가을이 지나고 겨울이 왔을 뿐이다.
살아도 산 것이 아니고죽어도 죽은 것이 아닌 것도 있다.
살려서 간직하는 건산 사람의 몫이다.그러니 무엇을 슬퍼한단 말이냐.
나는 옛날 사람이라서주어진 대로 살았다.마음대로라는 게애당초 없는 줄 알고 살았다.
너희를 낳을 때는 힘들었지만낳고 보니 정답고 의지가 돼서 좋았고
들에 나가돌밭을 고를 때는 고단 했지만밭이랑에서 당근이며 무며
감자알이 통통하게 몰려나올 때내가 조물주인 것처럼 좋았다.
깨꽃은 얼마나 예쁘더냐. 양파꽃은 얼마나 환하더냐.
나는 도라지 씨를 일부러 넘치게 뿌렸다.
그 자태 고운 도라지꽃들이 무리지어 넘실거릴 때 내게는 그 곳이 극락이었다.
나는 뿌리고 기르고 거두었으니 이것으로 족하다.
나는 뜻이 없다. 그런 걸 내세울 지혜가 있을리 없다.나는 밥 지어 먹이는 것으로내 소임을 다했다.
봄이 오면 여린 쑥을 뜯어다 된장국을 끓였고
여름에는 강에 나가재첩 한 소쿠리 얻어다맑은 국을 끓였다.
가을에는 미꾸라지를 무쇠 솥에 삶아 추어탕을 끓였고
겨울에는 가을 무를 썰어 칼칼한 동태탕을 끓여냈다.
이것이 내 삶의 전부다.
너는 책줄이라도 읽었으니 나를 헤아릴 것이다.
너 어렸을 적 네가 나에게 맺힌듯이 물었었다.
이장집 잔치 마당에서 일 돕던 다른 여편네들은제 새끼들 불러 전 나부랭이며
유밀과 부스러기를 주섬주섬 챙겨 먹일 때
엄마는 왜 못 본 척 나를 외면했느냐고 내게 따져물었었다.
나는 여태 대답하지 않았다. 높은 사람들이 만든 지엄한 윤리와 법도를 나는 모른다.
그저 사람 사는 데는 인정과 도리가 있어야 한다는 것만 겨우 알 뿐이다.
남의 예식이지만 나는 그에 맞는 예의를 보이려고 했다.
그것은 가난과 상관없는 나의 인정이었고 도리였다.
그런데 네가 그 일을 서러워하며 물을 때마다 나도 가슴이 아팠다.
생각할수록 두고두고 잘못한 일이 되었다.
내 도리의 값어치보다 네 입에 들어가는 떡 한 점이 더 지엄하고 존귀하다는 걸
어미로서 너무 늦게 알았다.
내 가슴에 박힌 멍울이다. 이미 용서했더라도애미를 용서하거라.
부박(천박하고 경솔하다) 하기 그지없다.
네가 어미 사는 것을 보았듯이산다는 것은 종잡을 수가 없다.
요망하기가 한 여름 날씨 같아서 비 내리겠다 싶은 날은 해가 나고맑구나 싶은 날은느닷없이 소낙비가 들이 닥친다.
나는 새벽마다
물 한 그릇 올리고 촛불 한 자루 밝혀서 천지신명께 기댔다.
운수소관의 변덕을 어쩌진 못해도 아주 못 살게 하지는 않을 거라고 믿었다.
물살이 쎈 강을 건널 때는 물살을 따라 같이 흐르면서 건너야 한다.
너는 네가 세운 뜻으로 너를 가두지 말고 네가 정한 잣대로 남을 아프게 하지도 마라.
네가 아프면 남도 아프고 남이 힘들면 너도 힘들게 된다.
해롭고 이롭고는이것을 기준으로 삼으면아무 탈이 없을 것이다.
세상 사는 거 별거 없다. 속 끊이지 말고 살아라
너는 이 에미처럼 애태우고 참으며 제 속을 파먹고 살지 마라.
힘든 날이 있을 것이다. 힘든 날은 참지 말고 울음을 꺼내 울어라.
더없이 좋은 날도 있을 것이다. 그런 날은 참지 말고 기뻐하고 자랑하고 다녀라.
세상 사는 것은 욕심을 내면 호락호락 곁을 내주지 않지만 욕심을 덜면
봄볕에 담벼락 허물어지듯이 허술하고 다정한 구석을 내보여 줄 것이다.
별거 없다.체면 차리지 말고 살아라.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없고귀천이 따로없는 세상이니네가 너의 존엄을 세우면그만일 것이다.
아녀자들이알곡의 티끌을 고를 때키를 높이 들고 바람에 까분다.뉘를 고를 때는채를 가까이 끌어당겨 흔든다.
티끌은 가벼우니멀리 날려보내려고 그러는 것이고뉘는 자세히 보아야 하니 그런 것이다.
사는 이치가이와 다르지 않더구나.
부질없고쓸모없는 것들은 담아두지 말고바람 부는 언덕배기에 올라 날려보내라.
소중히 여기는 것이라면지극히 살피고몸을 가까이 기울이면 된다.
어려운 일이 없다.나는 네가 남보란 듯이잘 살기를 바라지 않는다.억척 떨며 살기를 바라지 않는다.
괴롭지 않게,마음 가는대로순수하고 수월하게 살기를 바란다.
혼곤하고 희미하구나.자주 눈비가 다녀갔지만 맑게 갠 날,
사이사이 살구꽃이 피고수수가 여물고 단풍물이 들어서 좋았다.
그런대로 괜찮았다.그러니 내 삶을가여워하지도 애닯아하지도 마라.
부질없이 길게 말했다.살아서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말을여기에 남긴다.
나는 너를사랑으로 낳아서사랑으로 길렀다.
내 자식으로 와주어서고맙고 염치없었다.너는 정성껏 살아라.
- 임태주 시인의 어머니가 아들에게 남긴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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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김선혁대장 그얼굴] [오전 11:42] 정독
이시속의어머니는
부처요,
예수요,
마호메드!!!
[박Min10] [오후 12:21] 네.
세상 별거없다
속끓이지말고
살아야지요'
[박Min10] [오후 12:21] (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