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후감 김완《죽은 자의 집 청소 ③ 숨겨진 것》
아파트 엘리베이터에서 함께 내린 남자가 앞서 모퉁이를 도는 우리를 황급하게 불러 세운다. 엘리베이터가 상승하는 동안에 그는 몇 번이나 마른기침을 해서 앞에 서 있던 중년 여인이 슬쩍 돌아보기도 했다.
― 잠깐만요. 두 분만 보고 오시면 안 돼요? 아니, 그냥 두 분만 보고 오세요,
저는 여기에서 기다리겠습니다.
우리가 가야 할 710호는 비상계단 앞에 있는 복도 끝 마지막 집으로, 개방형 복도를 따라 아홉 가구를 지나쳐야 한다. 현관문 앞은커녕 칠 층의 첫 세대가 시작되는 이 모퉁이조차 넘어서지 못하겠다는 것인가? 집주인인 누나는 집안의 유일한 남자랍시고 동생을 대리자로 보냈지만, 그는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고 일찌감치 백기를 들고 말았다. 노년의 나이에 접어든 남자라고 무섭고 꺼림칙하긴 매한가지. 생각해보면 나이와 성별이 무슨 방패가 될 수 있을까? 사람이 자살하고 오랫동안 발견되지 않고 방치된 집, 게다가 죽은 이가 한 사람이 아니고 두 사람이다. 세입자들이 동반 자살한 집을 살펴보는 것은 누구라도 주저할 일이다. 내게 익숙해진 일이라고 누구나 할 수 있길 기대해선 안 된다.
― 그럼 내려가서 기다리세요. 제가 집 전체 사진을 찍어서 함께 보며 의논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살펴보고 일 층으로 내려가는 대로 전화를 드리겠습니다.
현관문 손잡이 위로는 오백 원 동전보다 약간 큰 구멍이 나 있다. 안에서 감긴 문을 여느라 전동 드릴에 홀 커터를 달아서 자물쇠 장치를 도려낸 것이리라. 문 앞엔 미납금으로 인해 도시가스 공급을 중단하겠다는 안내문이 여러 장 붙어있다. 그보다 약간 위쪽에는 마치 불운을 불러오는 부적처럼 노란 종이에 붉은 글씨로 “예고한 대로 도시가스 공급을 중단했다”라고 인쇄된 ‘도시가스 공급 중지 완료 통보장’이 바람에 파르르 떤다. 그 주변엔 등기 우편물의 도착을 알리는 또 다른 안내장이 무질서하게 붙어있다.
부적이 붙은 곳은 현관문이 전부가 아니었다. 집 안으로 들어서자 냉장고와 티브이, 컴퓨터, 세탁기 같은 가전제품에 흔히 ‘빨간 딱지’ 혹은 ‘차압 딱지’라고 불리는 빨간색 압류물 표목에 제호와 날짜가 기재되어 여러 군데 붙어있다. 숫자를 세어 보니 일곱 장이다. 행운의 숫자만큼의 압류품. 이 딱지는 값을 치르고 이것을 사용하던 사람에게 무슨 일이 닥치든 말든 주인 행세할 자가 따로 있다는 뜻이다. 이 조그만 종이들을 허락 없이 떼는 것만으로도 법률을 어기는 것이다. 실로 무시무시한 효력을 지닌 현실 세계의 부적이다.
집주인의 동생은 집 안의 사진을 보겠냐는 질문에 처음엔 고개를 가로저었다가 차압 딱지가 여럿 붙어있다는 말을 건네자 그제야 정색하며 사진을 보여달라고 했다.
― 이 압류물 표목이 붙어있는 한 누구라도 살림을 함부로 처분할 수 없습니다. 임자가 따로 있는 셈입니다. 먼저 이 딱지를 붙인 법원 집행관에게 연락해서 상황을 알리고 압류를 신청한 자가 누구인지 알아야 합니다. 법률적인 조언이 필요하시면 이런 일에 밝은 법무 대리인을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조언을 받아들인 집주인의 동생은 그날 이후로 수시로 진척 상황을 알려왔다. 압류를 신청한 채권자는 신용카드 회사로, 채무자인 중년 부부가 자살했다는 소식을 접한 즉시 채권 회수를 포기했다고 한다. 사람이 죽고 오래 방치된 집에 있던 가전제품들이 재산이 되기는커녕 도리어 돈을 지불하고 처리해야 할 골치 아픈 쓰레기라는 사실을 숱한 경험을 통해 파악한 것이다. 신용카드 회사가 압류 해제를 신청하고 법원이 접수하여 그 해제 절차를 완료하기까지 한 달 정도 걸렸다.
다시 그 집을 방문했다. 처음 연락을 받고 왔을 때 그들이 사망한 지 이미 오 개월쯤 지났을 무렵이니 결국 내가 집을 비우러 나서기까지 반년이 훌쩍 지나버렸다.
자식 없이 두 사람만 살았다고 하기엔 너무나 많은 세간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 덕분에 사람이 머물고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은 협소했다. 작은방의 서랍엔 소위 명품이라 불리는 고가 브랜드의 종이 가방과 주머니, 보증서로 가득했다. 정작 알맹이인 명품은 간데없고 그것이 있었다는 증거만 남은 셈이다. 먼 지방에 거주하는 유족들이 몇 번이나 드나들었다고 하더니 돈이 될 만한 것은 모두 가져갔을까? 생전에 이들이 누리던 사치와 고급스러운 취향이 가족들과 친척들의 부러움과 질시를 샀는지도 모른다.
그 밖에도 집 안에는 장식적인 소품들이 유난히 많다. 자식 없는 부부라 서로 더 애틋했는지 이십 대 신혼부부 못지않게 사랑을 모티브로 한 낯간지러운 장식물과 인형, 액자 여럿이 곳곳을 채우고 있다. 이 많은 사랑의 상징물과 경구 앞에서 착화탄에 불을 붙이고, 로만셰이드가 전장에 드리워진 침대에 누워 죽음을 기다렸을 이들을 생각하니 가슴이 아프다. 누구보다 화려하게 살고 싶었고 누구보다 서로에게 사랑을 갈구하고 그것을 확인하며 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 누구라도 자기만의 절실함 속에서 이 세계를 맞닥뜨린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사치의 이면에는 어릴 때부터 뼈에 사무친 경제적 결핍감이, 사랑의 소품으로 집 안 곳곳을 장식하려는 마음 밑동에는 사랑받지 못하고 버림받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뿌리를 내린 체 복잡하게 얽히고설켰는지도 모른다.
두 사람이 함께 누워 운명을 맞이했을 침대는 흑갈색 얼룩으로 물들어 있다. 어쩌면 이 죽음의 얼룩이야말로 함께 생업을 꾸려온 부부의 마지막 협업일지도 모르겠다. 참담하게 부패한 이 침대를 밝은 지상 세계로 옮기기 위해선 매트리스를 해체하고 프레임을 분해해야 한다. 피와 분비물로 오염된 매트리스를 해체하는 일은 성가시고 까다롭다. 이런 고급 매트리스일수록 구조가 더욱 복잡하다. 게다가 두 구의 시신에서 나온 피를 비롯한 분비액을 모두 흡수한 상황이니 평소보다 더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먼저 피 묻은 이불과 담요를 비닐에 담고 매트리스의 삼면을 에워싼 지퍼를 열어 첫 번째 커버를 벗겨낸다. 이어서 모서리를 따라 촘촘히 박힌 대형 스테이플러 핀을 니퍼로 끊어낸다. 핀을 제거해도 또 다른 박음질이 안쪽에 있는지 표피층의 직물은 여간해서 벗겨지지 않는다. 매트리스에 올라타 피가 묻지 않은 부분에 발을 붙이고, 투우사가 소뿔을 붙잡고 한바탕 사투를 벌이듯 직물의 끝을 붙자고 위로 뜯어낸다. 힘겹고 사나운 작업이다. 방독마스크의 안쪽 호흡구에는 일회용 종이컵에 마저 지우지 못하고 남은 물처럼 땀이 고인다.
이어서 고급 매트리스에만 내장되는 두꺼운 라텍스 폼을 벗겨낸다. 매트리스의 단층을 하나하나 제거할 때마다 피의 얼룩은 조금씩 작아진다. 라텍스 폼을 뜯어내고 면 재질로 만들어진 또 다른 단층을 뜯어내자 비로소 한 덩어리였던 피의 얼룩이 두 개의 길쭉한 타원으로 나뉜다. 이윽고 스프링을 감싼 흰색 부직포 커버가 드러나자 비로소 두 육체가 만들어낸 각각의 피 얼룩으로 또렷이 나누어진다. 동그란 얼룩 두 개가 이곳에 두 사람이 있었다는 증거이자 한자리에 누어 함께 죽었다는 증거일 것이다. 한날 한자리에서 죽음을 맞이한 두 존재의 명백한 증거.
이제 앙상한 강철 뼈대만 남겨진 매트리스를 벽에 세워두고 전동 드릴로 나무 프레임을 분해한다. 무거운 원목 널판은 사람이 썩어가며 뿜어낸 기름기가 잔뜩 묻어 고무장갑으로 붙잡아도 자꾸만 미끈거린다. 넓적한 머리 판을 붙잡아 놓치지 않도록 주의하며 벽 쪽으로 돌리는데 뜻밖에 “찰카당”하며 금속이 맞부딪히는 소리가 들린다. 동작을 멈추고 이래를 내려다보니 서슬이 새파랗게 벼려진 식칼 두 자루가 놓여 있다.
침대 옆에 칼이 있다니, 경찰도 미처 발견하지 못한 것이다. 이 구석에 칼이 숨겨져 있던 이유는 무엇인가? 부부가 함께 준비한 것일까, 아니면 한 사람이 비밀리에 준비한 것일까? 착화탄 자살이 뜻대로 되지 않았을 때를 대비해 한 번 더 완전한 자살을 결행하려고 마련해둔 것일까, 아니면 동반 자살하려던 둘 중 한 사람이 마지막 순간에 마음을 돌리고 혼자라도 살려는 의지를 보이면 그것을 막고 같이 죽을 것을 강제하기 위해 준비한 것일까? 후자의 목적이라면 굳이 칼이 두 자루 준비되어야 할 이유가 있는가?
그런 생각이 잇따르자 안타까운 심정으로 가라앉았던 마음에 소용돌이가 인다. 방호복 안쪽에 뜨겁던 체온마저 뚝 떨어진 기분이다.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땀방울이 차갑다. 이 숨겨진 칼 두 자루는 함께 죽는 것으로나마 관계가 이어지길 바라는 사랑의 상징인가, 아니면 배신과 원망의 상징인가? 내가 믿고 싶은 쪽은 어떤 결말일까? 오늘 나는 고통이 깊게 드리운 이 공간에 혹시나 남겨져 있을지 모를 한 줌의 온기라도 찾으러 온 것인가, 아니면 우리가 직면한 이 세계가 차갑고 비정하기 짝이 없음을 증명할 흔들림 없는 근거를 발견하러 온 것인가?
집을 계속 정리하면서 두 사람의 관계가 온전하지 않았음을 암시하는 증거들을 연이어 발견했다. 함께 찍은 대형사진 한 조각이 칼로 도려진 채 거실 바닥에 떨어져 있고 침대가 있던 안방 문 안쪽 면에 연분홍색 립스틱으로 ‘개새끼’라고 쓴 흔적도 발견했다. 서로에 대한 분노가 얼마나 극에 달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사랑의 결말을 보고 싶어 한다. 비록 사진 조각은 떨어져 나왔지만, 그 조각의 나머지 사진들로 채워진 액자는 거실 구석에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다. 사진을 칼로 도려낸 것이 끝이 아니라 그 뒤에 액자를 벽에서 떼내고 정리해둔 것이다. 개새끼라고 써진 문도 한참을 바라보고 있자니, 쓰고 나서 물티슈 같은 것으로 글자를 지우느라 두루뭉술하고 희미하게 번졌다는 사실도 알아챘다. 개새끼라고 쓴 순간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지우는 행동이 뒤따른 것이다.
숨겨진 칼이 사랑의 상징일 거라는 생각은 너무나 감상적인지도 모르겠다. 칼이 그 자리에 있는 진짜 이유는 사실 전혀 알 수 없다. 하지만 그 칼이 사랑에 이르지는 못할지라도 최소한 사랑을 지향했다고 믿고 싶다. 관계를 절단하고 소멸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죽음을 통해서라도 억지로 연을 이어가려는 숨겨진 증거라고 믿고 싶다. 같은 날 태어나지는 못했더라도 세상의 작별만은 한날한시로 하고 싶은 소망. 부부가 생애 기억 가운데 단 하나만이라도 온전히 간직하려는, 그들만의 조그만 훈장 같은 것이라고 믿고 싶다.
자기가 보고 싶고 희망하는 세계만 만나려는, 편견 가득한 청소부의 근거 없는 믿음이라고 해도 딱히 부정할 재간은 없다. 하지만 그 믿음을 마음 한 켠에 고이 묻어두고 이따금 생각나면 보러 갈 작정이다. 그런 믿음이 싹도 틔우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시들어버리면 나는 이 세계에서 단 하루도 온전히 버틸 자신이 없다.
바람에 꽃씨 날리는 봄이 그립다.
요지경 생각
정상이 무엇이고 비정상은 무엇인가?
‘어떻게 살아야 하나?’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죽는다는 것은 단지 현실도피인가?’
‘알 수 없는 것이 우리의 삶인가?’
이 글을 쓰면서도 자꾸만 반복하게 된다.
그러면서, 좋은 일도 많이 있다.
‘부부 사랑의 기쁨!’
‘자식에게 주고픈 끝없는 사랑’
‘부모와 자식 간의 끊을 수 없는 인연’
‘사회와 국가에서의 존재감’
‘자연과 사람의 어울림’
모든 것에 감사하며 살아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