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작고하셨지만 부산 영주동엔 사주 밑의 부주 장로인 이종면, 부인은 다비다 장로 부부가 살고 있었다. 장로님은 젊은 시절엔 석탄공사를 다니면서 월급의 전부를 헌금으로 바쳤던 전설적인 분이셨다. 장로님은 성품이 온화하고 말씀도 없으신 분이었는데, 나는 자식도 없이 사는 두 분의 모습이 적적하게 보여서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영주동의 좁은 아파트를 종종 방문하곤 하였는데. 두 분은 우리 가족을 자식 대하듯 반갑게 맞아주곤 하셨다. 장로님은 청년시절에 일본군에 강제징용 되어서 남양군도에서 근무하였고, 미군의 포로로 잡혀서 살아나셨다고 말씀하셨는데, 거기서 몇 달 동안 아무 반찬도 없이 밥만 먹고 살았던 경험 덕택에 평생 반찬투정을 안 하신다고 말씀하셨다.
이 분들이 동방교에 월급 전액을 헌금한 비결은 참으로 철두철미한 믿음의 결과였다. 장로님은 석탄공사 재직 시 동료들의 모든 숙직을 도맡아 하셨다고 하였다. 그 덕에 숙식은 회사에서 해결하면서 동료들에게 숙직비를 받았으며 부인인 다비다 장로님은 석탄공사 직원들의 석탄으로 쩌들은 새까만 작업복들을 가져다가 강에서 빨래를 해주고 수고비를 받으면서 그 돈으로 생활을 하셌기에 자신들의 월급을 동방교에 몽땅 바칠 수 있었던 것이었다.
이 장로님이 동방교의 경전이라는 '경화록'에 등장하는 대목이 있다. 장로님이 대구 수도원에서 혼자 집을 지키고 있는데, 웬 스님이 시주하러 왔다고 한다. 장로님은 비록 기독교인이지만 빈 손으로 돌려보내기가 그래서 수중에 있던 전 재산인 5원을 시주했었다고 하였다. 그런데 외출에서 돌아 온 노광공이 그동안 무슨 일이 없었느냐고 물어서 그대로 대답을 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이 일은 결과적으로 엄청난 사건으로 포장 및 조작되고 말았던 것이다.
경화록에 따르면 '당시 부를 주관하는 천사가 거지의 모습으로 왔는데 장로님이 한 푼도 두지 않고 박대했고, 그 거지가 통일교에 가서 환대를 받았기에 통일교가 세계적인 엄청난 부를 이루었다.' 대충 이런 내용이었다. 장로님은 이 대목에서 눈물을 흘리며 무척 억울해 하셨다. 자기에게 찾아온 사람은 거지가 아니라 스님이었으며, 빈 손으로 보낸 게 아니라 당시 자신이 가진 돈의 전부인 5원을 주었는데 이걸 누군가 왜곡해서 동방교 최고의 경전인 경화록에 자신의 행적이 수치스럽게 기록되었으니 동방교에 충성된 일꾼인 장로님의 마음은 얼마나 억울하고 아팠겠는가!
당시 장로님의 눈물은 동방교에 대한 나의 신뢰에 금을 가게 하는 중대한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나중에 내가 동방교를 떠난 후에, 남편을 여의고 홀로 외롭게 살고 있는 부인인 다비다 장로님께 안부 전화 한 통도 안 드리고 인연을 정리해 버렸다. 통화를 하면 반드시 내게 왜 참길인 좁은길을 버렸느냐고 반문하실텐데.... 평생을 동방교에 충성하며 살았던 분에게 그 곳은 사이비단체라고 말 함으로써 얼마 남지 않은 여생을 충격과 혼란에 빠뜨리기 싫었기때문이었다.
70이 넘는 연세에도 아침마다 냉수마찰로 건강을 지키시고, 묵묵히 예배를 드리며 동방교 교인 중에서 그나마 인격적으로 흠모할 면이 많았던 장로님 부부가 가끔씩 생각이 난다. 참으로 순박하고 진실하게 살던 분을 동방교 최고의 경전인 경화록에 비정한 사람으로 왜곡한 동방교의 행태는 지금도 이해되지 않는 일이며 세인들의 지탄과 비웃음을 당해도 마땅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아직도 그 곳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에겐 내 글이 거짓이라고 둘러대며 씨알도 안 먹히는 일이라고 말하겠지만. .....
첫댓글
영주동 2교회, 세월이 많이 흘렀지만 눈에 서~언 합니다.
대신동으로 넘어가는 터널입구의 우측에 있었던 왜식 건물...
반지하 공실에는 가발 만드는 무단가출 집 나온 여신도들을 수용해서 흐릿한 형광등 불빛아래 하루종일 작업해서 돈벌이를 시켰는데 세칭 동방교에서는 그들을 [수도사]라고 불렀고...
참으로 어이없는 동방교,
아는 사람만 알고 모르는 사람은 전혀 모르는 눈감고 아웅하는 이단사이비 종교집단.
수도사 : 1960년대 말에서 1970년대 초에 생긴 명칭으로 주로 껌을 팔아 지성(헌금)을 바치는 연단선님외에 빈집초월(무단가출)한 일부 여자 신도들을 특정한 장소에 모아놓고 집단숙식을 시키면서 구슬빽이나 가발 같은것을 만들어 납품하도록 하고 그 대금은 본인들이 한푼 만져보지도 못한채 몽땅 세칭 동방교로 들어갔는데 부산지방에서는 지금의 부산터널 영주동측 입구 우측변에 소재했던 왜식 건물, 세칭 동방교 영주동 2교회의 5-6평정도 되던 반지하실이 그런 대표적인 장소였다. 어두컴컴한 반지하 좁은 공간에 서로 붙어 앉아 희끄므레한 형광등 불빛아래 하루종일 하염없이 작업을 했는데 아마도 그것을 수도하는 것으로 세뇌시키고 본인들도 그렇다고 굳게 믿었고 착각했었다. 착각은 얼마나 행복을 주었던가.(이단의 추억 # 2, 세칭 동방교의 주요용어 설명 중에서)
상기 본문에서 부주(副柱) 이야기가 나왔기로 잠시 소개하자면... 세칭 동방교의 부주(副柱)란?
자칭 좁은길, 세칭 동방교에는 사주(四柱)라고 부르는 네 사람이 있다. 둘은 남자이고 나머지 둘은 여자인데 남자 둘은 사주(四柱)목사라 부르고 여자 둘은 사주(四柱)장로라고 부른다. 교주 노광공을 제외하고는 동방교 조직내에서는 최고위직인데 이들은 말그대로 동방교의 사주(四柱), 즉 ‘네 기둥’이라는 뜻이다.
-- 남자 둘은 사주목사(요나단-정재덕, 베드로-양학식), 여자 둘은 사주장로(헤레나-오인숙, 사르멘-김숙자) 라고 부른다.--
이외에 사주(四柱)를 보좌한다는 뜻 정도로 보는 네명의 부주(副柱)가 더 있기는 한데 이에 대해서는 세칭 동방교 내에서 큰 비중을 두지 않았고 또 네명의 부주(副柱)들 대부분도 일찌감치 동방교를 떠났거나 동방교에 잘 출석하지 않았기 때문에 존재감이 희미하여 논외(論外)로 한다. 단, 부주(副柱)중의 한명인 김인경 입다목사는 끝까지 동방교에 충성하다 어느 절간에서 운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異端의 追憶 #125, 사주(四柱)들에 대한 小考 중에서)
영주동에 사는 두 분은 모두 부주 장로였어요. 노광공이 너희는 한 몸이고 모두 부주 장로라고 말했다나요?
이종면, 그의 부인 다비다...
1970년대 당시는 이분들이 자칭 좁은길, 세칭 동방교의 부산 영주동(2교회라고 불렀음)에 출석했더라면 필자가 모를리 없는데 아마 그 이후에 다시 동방교에 이끌려 나오기 시작한듯... 참으로 질긴 인연이다.
그런 사람중에 하나가 늙은 노모를 홀로두고 노광공의 곁에서 멸사봉공 충성하던 순회자 출신의 '아브라함 김중식'이라고 있다. 기구한 운명의 사내다.
(中略...)
수십 년의 세월이 흐른 다음 그가 다시 나타난 곳은 '초량12교회'가 문현동으로 이전하여 위장 개업한 세칭 동방교의 부산 문현동 한빛교회였다. 동방교의 내밀한 사연을 잘 알지 못한 채 아편 중독 같은 오랜 세뇌에 사로잡혀 그것을 벗어나지 못하던, 2대교주 노영구의 시대에 동방교안에서 짝을 맞춘 그의 부인이 계속 세칭 동방교를 출입하다가 고희를 넘겨 얼굴에 주름살 깊은 그를 다시 세칭 동방교로 데리고 나왔다고 한다. 참 질긴 인연이다.(이단의 추억 # 53, 파독 간호원 사건 중에서)
한빛교회 있을 때, 처녀 때 동방교에 다녔다는 중년부인을 만난 일이 있었습니다. 그 분은 처녀 시절에 대기처에 있다가 굶주림과 구타가 싫어서 집으로 도망쳤다고 합니다. 근데 동방교 간부가 집에까지 찾아와서 기절할 때까지 두들겨 맞은 기억이 있어서 아예 발길을 끊었다고 하더군요. 그러다가 구성민 중 한사람을 만났는데, 이제는 안 팬다고 해서 나왔노라고 말을 하더군요. 참고로 노광공의 수하엔 베드로 목사, 아브라함 전도사, 삼손 목사, 입다 목사 등 구타를 잘하는 제자들이 많아서 걸핏하면 성민들에게 폭력을 행사했다고 하더군요. 한빛교회 장로는 자신도 아브라함(?)에게 너무 맞아서 도망쳤다고 하면서 길에서 우연히 만나면 가만 안 두겠다고 별렀습니다. 근데 나중에 아브라함(김중식)이 한빛교회에 출석했다고 하던데.... 한은 풀었는지 궁금하군요. ㅎㅎ
세칭 동방교의 대기처(집단합숙소) 생활을 해 보지 않은 신도들은 전혀 알지 못하는 가공할 사건들이 참 많이 있지요. '이단의 추억' 기록은 그중의 아주 일부에 불과할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