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광역시 주요명소
금정산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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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백산 줄기가 내려오다 머문 금정산에 자리한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산성.
선열들의 호국의 숨결이 스며 있는 곳.
[지정일 : 1972년 2월 16일] [위치 : 금정구 금성동 금정산 일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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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정산성은 사적 제215호(‘71. 2. 9 지정)로 금정구 금성동 금정산 일대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규모가 큰 산성으로 성벽과 문 등 많은 유적이 남아 있으며, 성의 길이가 17,337m, 성벽 높이는 1.5m~3m가량이다. 성내의 총면적은 약 2,512,000평(약 8,213㎢)이다. 금정산에 언제 처음으로 성을 수축하였는지는 문헌상으로는 알 길이 없다. 고대부터 남해 연안에 왜구의 침입이 심하였다는 사실로 보아 신라시대에는 이미 축성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현존하는 산성은 1703년(숙종 29)에 축성한 것으로 그 이전에 성이 있었음은 1667년(현종 8) 현종이 통제사 이지형을 불러 왜구방수계책을 논의하는 가운데 언급된 기사에서 확인된다.
즉 1703년(숙종 29) 이전에 이미 성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데 그 성이 위에서 언급한 신라시대의 성인지 언제 축조된 것인지 분명하지 않다. 지금의 산성은 임진왜란 이후 국방의 중요성이 대두되어 여러차례 축성 건의가 있었으나, 1702년(숙종 28) 11월 경상감사 조태동이 재차 산성의 축조를 청하여 이루어졌으며, 1703년(숙종 29)에 준공을 보았다.
그때 완공된 성은 둘레 9,011보 높이 15척에 동.서남북의 네 성문을 둔 방대한 산성이었다. 그 이후에도 여러 차례 성의 수축과 성문의 중건이 있었다. 지금은 남아있지 않으나 기록에 있는 건물은 좌기청 6간, 좌우행랑 각 5간, 군기고 4간, 화약고 1간, 내동헌 3간, 별전청 4간과 그 외에 장대, 중군소, 교련청, 승장소, 산성창 등이 있으며, 축성에는 동래부민과 경상감영 각군에서 차역한 민정으로 이룩된 것으로 보인다.
산성의 수비는 동래독진의 수성장을 겸하고 있는 동래부사가 맡았으며, 중군 승병장.군기감.도훈도 군뇌.문직 등의 직책을 가진 사람과 군병 등의 상비군이 파수하고 또 인근 사찰의 승려가 지켰던 것이다. 그리고 전쟁이나 변란이 발생하면 동래.양산.기장의 세읍 소속군과 세읍 사찰의 승려들이 승군(僧軍) 차출되어 방어토록 되어있다.
일제시기 시가지계획의 이름 아래 서문에서 남문에 이르는 평지의 성축은 철거되었으며 남문에서 동문에 이르는 성축도 민가가 점유하여 훼손당하고 해월사지를 중심으로 성곽의 모습을 남기고 있다. 1972년부터 성곽과 성문 등을 연차적으로 복원과 보수를 계속하여 국방유적으로 길이 남겨야할 산성은 이로써 어느 정도의 면목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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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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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역에서 지하철로 40분 거리(온천장역 하차) |
동래야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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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여년의 전통을 지닌 가면무용극의 하나.
익살과 재담이 한마당 어우러지는 선인들의
정신적 문화유산.
[위치 : 동래구 온천1동 산13-3번지] [지정일 : 1967년 12월 21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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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야류는 중요무형문화재 제18호(‘67. 12. 21 지정)로 동래구 온천1동 산13-3번 부산민속보존협회에서 보존, 전승하고 있다. 동래지방에서는 옛부터 들놀음 또는 야류˙야루하고 부른다. ‘野遊'는 토속어의 한자 차음에 불과하다. 동래들놀음은 수영들놀음을 본따와 형성 되었다고 보는 것이 동래나 수영 사람들의 견해이며, 그 역사는 약 120여년 쯤 될 것이라는 추측이다.
이에 관한 최초의 문헌은 1933년 1월에 발행한『조선민속』제1호에 실린 송석하의〈오광대소고〉인데, 이에 의하면 그 전파 과정을 합천군 초계에 가 있던 수영 사람이 보고 와서 시작한 것을 동래에서 다시 본받았다고 하였으며, 그 시기는 약 60여년 전이라 했으니 현재 동래인들이 120여년 전이라고 구전하는 유래설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한편, 이 방면의 전문가들의 견해에 의하면, 가면에 있어서도 수영과 동래는 각기 특색을 가지고 있으며, 동래보다는 수영 것이 고형(古形)이라고 함을 보아도 수영에서 동래로 전파되었으리라는 의견을 굳히게 해준다. 동래야류는 120여년의 전통을 가지고 있으며, 이 고장 관리 출신이 주가 된 친목단체인 기영회의 후원이 컸다고 한다.
동래들놀음은 대동놀이인 동래줄다리기와 밀착되어 있을 뿐 아니라, 동민을 비롯한 지역민의 자발적인 참여로 단결하고 애향심을 함양하는 사회성이 강한 집단 연희라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고 하겠다. 기영회에 뒤이어 발족한 신흥계에서 담당하다가 망순계로 바뀌어져 계승되었으나 1935년경 일제의 탄압으로 줄다리기와 함께 중단되었다.
8.15광복이 되자 젊은층을 중심으로 조직된 남우회의 약 30명 회원은 1946년 음력 정월 초순에서 중순까지에 걸쳐서 지신밟기를 하여 희사받은 금품을 기금으로 3.1절 경축 들놀음을 벌려 양반과장과 할미과장을 복원하였으니, 10년만에 동래야류의 전통이 이어진 셈이다. 그러나, 정국의 혼란과 한국전쟁으로 중단되었다가 1960년대에 접어들면서 민속예능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자 동래야류는 뜻 있는 학자들과 유지들의 노력으로 조사˙정리˙재현되었다.
1965년에는 길놀이와 양반과장, 할미과장, 영감과장이 재정비되었으며, 이어 문둥이과장이 복원되었다. 1967년에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동래들놀음은 오늘날의 연극과 닮은 데가 많다. 연극이야기가 전개되는 순서에 따라 1막 2막으로 나누듯이 들놀음도 모두 4과장으로 나누어서 각기 다른 내용의 이야기를 익살스러운 재담과 동작을 주고받으며 진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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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야류의 구성 |
탈놀음에 앞서 길놀이가 중요한 구실을 가짐은 부산가면극의 특징이다. |
길놀이와 군무 등 |
길놀이의 순서는 풍악대 -> 중군 -> 길군악대 -> 팔선녀 -> 야류패 -> 할미광대 -> 한량 -> 5개동 풍물패 -> 일반군중으로 1시간쯤 행진을 하며 즐긴다.
길놀이패가 놀이판에 당도하면 인근 동민들이 어울려 군무에 도취한다. 각자의 장기에 따라 학춤, 문둥춤, 배춤, 궁둥이춤, 구불춤, 요동춤, 곱추춤 등을 추므로 장관일 뿐 아니라 동민들 이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계기가 되었으나 지금은 이 과정을 생략하거나 약식으로 그 잔형만 남기고 있다. |
탈놀음 |
몇시간 동안 즐기던 군무패가 물러나고 들놀음의 배역들이 모두 등장하여 악에 맞춰 한바탕 놀다가 퇴장하면 탈놀음이 시작된다.
제 1 과장 - 문둥이 과장
큰 문둥이가 왼손에는 소고를, 오른손에는 소고채를 든 채, 얼굴을 가리고 굿거리장단에 맞춰 등장하여, 자빠지기도 하고 누워서 뒹굴기도 하는 등 문둥병신춤을 춘다. 이때 작은 문둥이가 들어와 서로 어울어져 문둥이춤을 추는데 대사는 없다.
제 2 과장 - 양반과장
하인 말뚝이가 상전인 원양반을 비롯한 5양반을 익살스런 재담으로 야유, 조롱, 협박하 던 끝에 대부인마누라와 간통하였다고 호언한다. 양반계급의 무능과 형식주의적 허세에 대한 풍자와 반항의 내용이다.
제 3 과장 - 영노과장
양반을 극도로 모독한 양반과장에 이어 다시 양반을 괴롭히는 내용이다. 영노가 비비양반을 잡아먹으려 하자, 비비양반은 자기가 양반이 아니라 똥, 개, 돼지, 소, 풀새기라 하 여 간신히 위기를 모면한다.
제 4 과장 - 할미, 영감과장
영감과 본처인 할미, 첩인 제대각시의 삼각관계를 표현한 내용으로, 딴 지방의 할미과장 과 유사하다. 오랜만에 만난 할미에게 두고 떠난 세 아들이 모두 죽었다는 할미의 말에 화가 치민 영감이 발길로 할미를 차니 할미는 죽는다. 무당이 나와 천도하고 운구한다. |
뒷놀이 |
4과장의 탈놀음을 마치면, 뒷놀이라 하여 오돌독이타령, 고사리꺾자타령, 요동춤놀이를 할 때도 있었으나 요즈음은 하지 않는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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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어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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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찰 삼대 본산 중의 하나로 통일신라
문무왕때 창건된 호국의 대가람.
[위치 : 금정구 청룡동 564번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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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어사는 금정구 청룡동 546번지 일대의 금정산 기슭에 자리잡은 대사찰로서 오랜 역사와 많은 인재를 배출한 한국의 명찰이다. 대웅전을 중심으로 불전(佛殿)7, 누(樓)2, 문(門)3, 영각(影閣)1, 암자(庵子)9, 요사(寮舍) 등 대소 160여동의 건물이 있고 범어사 3층석탑 등 많은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다.
범어사의 유래에 대하여는『경상도지리지』『세종실록지리지』등
조선초기의 각종 지리지에 빠짐없이 기록되어 있다. 그 내용은 대동소이한데 “금정산 산마루에 우물이 있어 그 물빛이 금색이고 그 속에 금색 물고기가 오색구름을 타고 범천에서 내려와 놀았다하여 산 이름을 금정산이라 하고 그 아래에 절을 지어 범어사라 하였다”라고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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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어사의 연혁에 관한 문헌으로는『범어사창건사적』과『고적』이 한 권으로 된 목판본이 있는데, 이 책은 숙종 39년(1700)에 간행한 것으로 오래전부터 전해온 자료나 기록을 근거로 엮은 책이다. 범어사는 신라 흥덕왕 때, 왜구를 퇴치하기 위하여 의상대사가 범어사를 창건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 창건연대에 대하여『창건사적』은 신라 흥덕대왕대라고만 하였고,『고적』에서는 당 문종 태화 19년 을묘, 신라 흥덕왕 때라고 명시하였다. 그러나 당 태화 연호는 9년까지이며, 그 9년이 바로 을묘년이므로 이는 당 태화 9년(신라 흥덕왕 10년(835))의 와전일 것으로 짐작된다.
현재 범어사에 남아있는 석탑.석등 등 석조 유물의 양식도 대체로 이 연대와 부합된다.
그러나 문제는 흥덕왕보다 1세기 반이나 앞 시대의 인물인 의상대사를 범어사 창건에 결부시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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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상대사는 신라 문무왕 11년(671) 당나라 유학에서 귀국하여 문무왕 16년(676) 52세 때 태백산 부석사를 창건하여 화엄의 중심도량으로 삼고 전국의 10대 사찰에 전교 하였다.
이것이 소위 화엄십찰인데 그 중에「金井之梵魚(寺)」라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의상과 범어사 창건설화와 결부시킨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범어사의 창건시기가 의상이 화엄의 전교에 활약하던 문무왕대까지 소급한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범어사에서는 그 시기를 문무왕 18년(678)에 의상조사가 창건하고 흥덕왕 때 가람을 크게 개창하였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범어사는 신라 문무왕 때 창건하고 흥덕왕 10년(835년) 현 위치에 크게 개창하여 대가람의 면목을 갖추게 되었다고 보는 것이 무난할 것 같다.
조선 선조 25년(1592년) 임진왜란의 병화로 일시에 회진된 뒤 10년이 지난 1602년 관선사가 재건하였으나 다시 화재로 전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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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3년 묘전대화상이 대웅전.용하전.관음전.나한전.일주문.심검당(현 영각)을 건립하였다. 또한 1684년에는 해민화상이 비로전을, 1700년에는 명학화상이 팔상전.종루.불이문.보제루.천왕문을 건립하였고, 1700년 자수장로가 보제루를 건립하였다.
이후에도 사세의 확장에 따라 크고 작은 개수 및 중수를 통한 수축공사를 거듭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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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불시간 |
새벽 03 : 30
오전 10 : 00
오후 13 : 30
저녁 18 : 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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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 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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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부고속도로가 끝나는 구서동 종점에서 울산 쪽으로 3km가면 지하철 범어사역이 있는
삼거리가 나오는데 여기가 범어사 진입로의 시작이다. 깔끔하게 정비된 이 길을 따라 다시 3km정도 오르면 범어사 입구에 도착할 수 있다.
범어사역에서 범어사 입구까지 시내버스가 다니기 때문에 대중교통을 이용해도 편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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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있는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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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 밑에는 인근 구서동 남산동 등의 대규모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생겨난 각종 음식점이 성업 중이다. 가볍게 먹을 수 있는 된장찌개에서부터 격식을 갖추어야 하는 자리에 어울리는 한정식집, 모임에 적합한 닭백숙집과 갈비집까지 다양하다.
휴일이면 범어사 참배와 금정산 등산을 마치고 이곳에 들러 동동주 한 사발에 피로를 푸는
모습에서 『건강한 정겨움』을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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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처 가볼만한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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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운 거리에 유명한 동래 온천장, 동래허심청이 있다. 조선 숙종 17년(1691년)에 개발된 알칼리성 온천수로 수온이 55도 안팎. 신경통과 위장병, 피부병 등에 좋다고 알려져 있다.
온천장 조금 못가서 부산대학교가 있다. 부산 젊은이들의 해방구로 몇 해전부터 유명 의류
아울렛 매장이 들어서기 시작, 현재는 웬만한 브랜드는 모두 입점해 있는 쇼핑천국이다.
휴일 한나절 가족과 함께 범어사를 거쳐 외식을 마치고 지하철을 이용, 부산대 앞에서 한결
가벼워진 가격의 쇼핑을 즐기는 것도 색다른 재미가 될 수 있다.
이밖에 지하철로 한 정류장 거리인 지하철 1호선 종점인 노포동에는 화훼단지가 조성되어 있다. 시내 일반화원에서는 볼 수 없는 다양한 종류의 관엽류와 난초류를 저렴한 가격에 구입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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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륙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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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의 상징 오륙도. 부산항의 문턱을 굳게
지키고 있는 파수꾼.
[지정일 : 1972년 6월 26일] [위치 : 부산광역시 남구 용호동 936-94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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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륙도(五六島)는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22호(‘72. 6. 26 지정)로 부산만 북쪽 해안, 승두말로부터 남남동 방향으로 가지런하게 뻗어 있는 우삭도(32m), 수리섬(33m), 송곳섬(37m), 굴섬(68m), 등대섬(28m)으로 불리는 5개 섬으로 이루져 있다. 유인도인 등대섬을 제외하면 모두 무인도이다.
오륙도는 거의가 직각에 가까운 해식애와 소규모 파식대로 구성된 섬으로 전형적인 암석해안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오륙도의 형성과정은 12만년전까지만 해도 하나의 조그마한 반도에 지나지 않았었지만, 오랜 세월 동안 침식작용에 의해 대여섯 개의 섬으로 분리된 것이다.
우삭도는 지금도 파도의 침식을 받아 너비 1m정도의 해식동굴이 형성되어 방패섬과 솔섬으로 분리되어 가고 있다. 즉 썰물 때는 2개의 섬을 하나의 섬으로, 밀물 때는 2개의 섬으로 분리되어 대여섯개의 섬으로 이름 붙게 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동래부지(1740)』산천조에는, “오륙도를 절영도 동쪽에 있다고만 하고 봉만(峰巒)이
기고(奇古)히여 바다 위에 나란히 섰는데 동쪽에서 보면 여섯 봉우리가 되고, 서쪽에서 보면 다섯 봉우리가 된다”고 하여 이름하였다.
셋째 봉우리에 당나라 장수 만세덕(萬世德)의 비가 있다고 했다. 육지에서 가장 가까운 방패섬은 방패처럼 생겨 세찬 비바람을 방패처럼 막아준다고 해서 생긴 이름이고, 솔섬은 그 섬에 소나무가 자생하고 있어서 생긴 이름이다.
송곳섬은 송곳처럼 뽀족하게 생겨서 붙여진 이름이고, 수리섬은 지난날 갈매기를 포획하기 위해 독수리가 모여들어 붙여졌다 하고, 만세덕의 비가 있었다
하여 수리섬을 비석섬이라고도 했다. 굴섬은 가장 큰 섬으로 섬안에 굴이 있어 천장에서 방울방울 흐르는 물이 한 사람 몫의 음료수가 될만하고, 육지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등대섬은 위가 평평하여 밭섬이라 했다가 등대가 세워진 뒤부터는 등대섬이라 하게 되었다.
오륙도 근처는 좁은 목이 되어 조류의 흐름이 빨라 뱃길로서는 위험한 곳으로, 옛날 이곳을
지나는 뱃사람들은 무사를 빌기 위해 공양미를 던져 해신을 달랬다고 한다.
옛부터 시인 묵객들의 발자취가 끓이지 않았으며, 오륙도를 소재로 한 한시(漢詩)가 많이
남아 있다.
예나 지금이나 앞으로도 변함 없이 오륙도는 우리나라의 관문이며, 부산 시민의 마음속에 새겨진 부산의 상징이요. 부산만의 자연 조각품으로 우아한 자태를 드러내는 빼어난 바다의 명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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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륙도 다섯섬이 다시 보면 여섯섬이 흐리면 한 두섬이 맑으신 날 오륙도라 흐리락 마르락하매 몇 섬인 줄 몰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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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은상의「오륙도」중에서 | |
유엔기념공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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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와 평화의 수호신이 고이 잠든 지구상의
유일한 유엔공원은 "세계는 하나"라는 인류애를
일깨워 주는 곳.
[위치 : 남구 대연동]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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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공원은 남구 대연동 779번지 일대의 면적 144,146㎡로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도발에
의해 한반도에 전쟁이 일어나자 한국을 돕기위해 참전한 16개국의 전투지원국과 5개국의
의료지원국의 유엔군 장병의 전사한 영령을 안치한 곳이다.
1951년 1월 18일에 묘지를 조성 설치하고, 1955년 11월 15일 유엔총회에서 채택된 세계에서 오직 하나 뿐인 유엔관리의 묘지로, 1959년 유엔과 우리정부 사이에 묘지의 영구적인 관리 및 사용을 위한 협정이 성립되었으며, 1974년에는 관리권이 영령을 안치한 참전국 11개국으로
구성된 국제연합기념관리위원회에 이관되었다.
현재 이곳에 안치된 영령은 영국 885, 터어키 462, 캐나다 378, 오스트레일리아 281, 네델란드 117, 프랑스 44, 뉴우질랜드 34, 미국 36, 남아프리카공화국 11, 노르웨이 1, 한국 36, 무명용사 4, 비전투원 11기로서 총 2,300기가 안치되어 있다.
처음 이곳에 묘지가 설치될 때 묘의 수는 미국 등 16개국 11,000기이었으나 이디오피아˙태국˙그리이스˙룩셈부르크˙콜롬비아 등 5개국 전몰장병묘를 이곳에서 본국으로 이장해갔기 때문에 현재의 기수(基數)로 줄었다. 이 묘지는 20개의 묘소로 구획되어 있으며 각 묘소는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회원국에 봉납되어 해당국가의 국기를 게양하고 각 나라의 국명이 청동비로서 표시되어 있다.
다만 벨기에와 룩셈부르크는 동일 구획의 묘소를 사용하고 있다. 각 묘소는 그들
나라의 종교 의식에 따라 적절히 표기되어 있으며, 전몰장병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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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해마다 많은 참배객과 관광객이 끊이지 않고 있으며 1965~1972년까지 연평균 8만 6천명(외국인 6천명), 1971~1981년까지는 연평균 24만 5천명(외국인 364명) 정도의 참배객이 다녀갔으며 관광명소로도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곳이다.
최근에는 일반시민들은 물론 학생들이 많이 찾고있으며, 지구상에 하나밖에 없는 유일한 유엔공원을 통해 전쟁이 얼마나 무서운 재앙인가를 보여주고 있다. 또한 참전용사들의 자유수호 의지를 선양하고, 민족적 비극과 참전실상을 통한 반공안보 의식을 일깨우는 역사의 산교육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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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군 참전기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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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이 12.05M, 참전국 16개국을 뜻하는 16개의 기둥으로 탑신을 이루고, 기둥의 중간부분에 각국의 특색을 살린 군인상을 청동으로 조각해 붙였으며, 기둥끝에 각국의 국기를 게양토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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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 가볼 만한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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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근에 있는 광안리해수욕장은 물론 해운대해수욕장이 멀지 않은 거리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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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벼운 산책을 하고 싶다면 금련산 일주로로 가도 좋다. |
정상에서면 광안리 바다가 들어오고, 옛날 해운포를 감시했던 봉수대의 석축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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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쪽으로는 산 전체가 울창한 산림으로 덮여있는청소년 수련소가 있다. |
수련소까지는 남천동에서 마을버스가 운행되고, 택시를 이용해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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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옆에는 시립 박물관과 부산최고의 문화예술의 전당인 문화회관이 있다.
자갈치시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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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의 냄새와 맛 그리고 정취를 물씬 풍기는
"자갈치 아지매"의 동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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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갈치시장은 중구 충무동 보수천 하구 및 남포동 해안일대로, 원래 자갈치란 이름으로 불리우던 곳은 옛 부산어시장 제4구판장이 있던 주변을 일컫는다.
특히 부산의 성격을 가장 잘 보여주는 시장으로 외지로부터 관광객의 이용이 많은 가장 부산다운 시민의 생활의 터전이자, 상징의 대명사처럼 된 자갈치시장은 어느 시장과는 달리 어패류가 주류를 이루고 있는 시장으로 정식으로 “부산어패류처리장”이라 불렀다.
자갈치란 지명은 자갈해안에서 비롯되었다는 설과 활어만을 취급한다고 하여 활어로서만이 거래되는 자갈치란 어종의 명칭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있다. 개항(1876년) 당시의 이곳은
자갈해안으로 보수천 하구일대로 주먹만한 옥돌로 된 자갈해안이 있었다는데서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1925년 5월 부산남항의 실지 현장조사를 시작하여 1930년 2월 남항방파제, 남포동 해안 매축(1931년 1기 매축 준공), 1935년 2월 수면 34,000평 매축공사에 착수하여 1938년 2월 남항매축 준공(2기)를 하였다.
이 시장이 개설된 것은 1924년 8월 남빈시장(현 자갈치시장)으로 개설하게 되면서 시작되었다. 8.15광복 이후 이 해안은 연근해 어선들의 수산물 집산지로서의 어항기능, 노점상들의 활어판매 기능이 혼재하는 시장으로 이루어졌다.
특히 오늘날의 자갈치시장으로 불리고 있는 곳은 “자갈치어패류처리장”이 들어서 있는 남포동을 중심으로 하는 갯가 시장으로 본래 이 자리는 가건물로 들어서 있었던 곳이다.
즐비하게 늘어서 있던 판자집은 1961년부터 1968년까지 철거완료 되었다.
1974년 2월에는 말쑥한 “자갈치어패류처리장”으로 신장개업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1985년 큰 화재로 말미암아 점포 231개소가 소실되었고,
1986년 1월에 현대식 건물로 개축하여 다시 문을 열었다.
이것이 지금의 “부산어패류처리장”이다.
한편, “부산어패류종합시장”은 노점상 철거를 통하여 1970년 10월 신축되어 시장기능을 담당하다가 1986년 4월 화재로 인하여 시설을 신축하여 현재와 같이 개장되고 있다.
1층에는 활어, 전복, 선어, 잡어 등의 점포가 있고, 2층에는 식당, 식품,
건어부 등 수많은 점포가 영업하고 있다. 또한 어패류처리장 동쪽 도로의 노점에는 수조를 차려 놓고 싱싱한 활어를 전시하고 있어 이곳을 찾는
사람들의 입맛을 더하는 것은 물론 한꺼번에 손님을 받는 모습은 자갈치시장의 또 다른 모습이라 할 수 있다.
지금도 자갈치시장에 가면 해안가 도로변에는 “판대기장수” 아주머니들이 고등어, 멍게, 고래고기 등을 파는 진귀한 모습은 자갈치시장이 아니고서는 볼 수 없는 부산만이 가지는 바다 내음이 물씬 풍기는 곳이다. 1980년대에는 3층 규모의 대형 “신동아수산센터”가 들어서 자갈치 시장의 명성을 더하고 있다.
자갈치시장에서는 활어 판매와 싱싱하고 맛있는 회 맛을 볼 수 있고, 건어물 및 해산물판매로 새로운 명물로 떠오르고 있다. 이러한 자갈치 시장에는 어쩌다 한 두사람의 남정네가 끼어 있을 뿐이고 전을 벌이고 있는 사람들은 거의가 아낙네들이다.
더욱이 노점상의 경우에는 예외 없이 아낙네들인 것이다.
그래서 “자갈치 아지매” 또는 “자갈치 아줌마”라고 하면 억척스런 생활력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것이 자갈치 시장의 특징으로 섬세하고 부드러운 멋은 없으나, 오늘을 열심히 살아가는 다이나믹한 “자갈치아지매”들은 부산 사람의 특유한 기질을 상징하는 가장 부산다운 사람들인지도 모른다.
바로 이러한 점 때문에 자갈치 시장은 살아있는「부산의 縮圖요, 부산시민의 생활상을 대변해 주는 현장」이기도 한 부산의 대표적인 명소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 지금은 자갈치시장의 활성화를 위하여 갈매기 형상을 한 자갈치시장의 현대식 건물이 신축
되고 있어 새로운 부산의 명물로 거듭나게 된다.
충렬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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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때 죽음으로 조국을 지킨 충신,
열사의 위패를 모신 곳. 애국충절과 부산정신의 표상.
[위치 : 동래구 안락동 838]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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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렬사는 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7호(‘72. 6. 26 지정)로 동래구 안락동 38번지에 위치해 있다. 1605년(선조 38년)에 동래부사 윤훤이 임진왜란 때 순절한 동래부사 충렬공 송상현을 봉사하기 위하여 동래읍성의 남문안에 송공사를 세워 송공의 위패를 모시고 매년 제사를 지내게 한 것이 그 시초가 되었다.
그후 1624년(인조 2년)에 선위사 이민구의 청에 의하여 충렬사의 사액이 있게 됨과 동시에
충장공 정발을 배향하였다. 그후 1652년(효종 3년) 동래부사 윤문거는 당시의 사당을 창건한 다음 강당과 동서제를 지어 선비들을 수용할 수 있게 하여 안락서원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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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1709년(숙종 35년)에는 동래부사 권이진이 송상현과 정발이 순절할 때 함께 사절한
여러 사람을 봉사하기 위하여 읍성 남문의 충렬사 옛 자리(송공사 자리)에 별도의 사당을 건립하고 조정에 알린 후 양산군수 조영규, 동래교수 노개방, 유생 문덕겸, 비장 송봉수와 김희수, 겸인 신여로, 향리 송백, 동래부민 김상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냈다.
그러다가 1735년(영조 11년)에 동래부사 최명상이 충렬사 별사의 철폐를 조정에 올리고 이어 경상감사 민응수의 재청으로 그 이듬해 별사를 없애고 여기에 모신 여러 사람들을 안락서원의 충렬사에 합향하였으며 동시에 임진란 때 사절한 다대첨사 윤흥신을 추가 배향하고, 임진란에 송상현·정발을 따라 사절한 김성·애향은 충렬사 동문밖에 별도로 각을 지어 모셨다.
1766년(영조 42년) 강당인 소줄당의 대대적인 보수를 비롯하여 여러번의 중수 및 보수를 하여왔다. 고종 때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도 충렬사 안락서원은 임진왜란 때의 충신, 열사를 봉안하고 있는 사액서원이었기 때문에 철폐되지 않았으며, 선열의 얼을 추모하고 국난극복의 교육장으로서 명맥을 이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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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후에도 미처 보수치 못하던 차 나라의 관문을 지키다 순절하신 순국선열과 맨주먹으로 분연히 궐기하여 항쟁하신 의병들을 추모하고 얼을 선양토록 함으로써 우리와 후손에게 향토수호 정신과 자주국방 사상의 수련장으로 정화하기에 이르렀다.
부산시에서는 1976년부터 1978년까지 정화공사를 실시하여 현재의 규모로 정화한 후 부산지방에서 순절한 91위의 위패를 직책 또는 증직의 차순에 따라 봉안하였으며
매년 음력 2월과 8월 춘추 중정일(中丁日)에도 (재)충렬사안락서원에서 재향을 드리고 있으며, 5월 25일 온 시민의 정성으로 제향을 드리고 있으며 제향 절차는 홀기에 따라 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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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렬사 내 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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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렬사 내에는 본전과 의열각, 기념관, 소줄당, 군관청, 정화기념비, 송상현공 명언비, 임란 동래24공신 공적비, 충렬탑등 볼 유적들이 많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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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 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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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 록 화 |
부산분전순국도
동래보국충정도
내성수사결의도
동래민중분전도
다대진성결전도
수영유격전투도 |
유 품 |
동래부사의 갑옷 및 투구
부산첨사의 갑옷 및 투구
다대첨사의 갑옷 및 투구
동래부사의 전복(戰服)·전립(戰笠)·혁화(革靴)
교지(敎旨)
치제문(致祭文) |
순 절 도 |
동래부순절도 및 부산진순절도
송상현공종가동래부순절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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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개시간 및 입장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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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1 ~ 4.30 : 09:00~18:00 |
5. 1 ~ 8.31 : 09:00~19:00 |
9. 1 ~ 10.31 : 09:00~18:00 |
11.1 ~ 2월말 : 09:00~17: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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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렬사 참배 안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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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당시 수적으로나 장비면에서 절대적인 열세임을 알고 있으면서도 나라와 민족을 지키겠다는 일념만으로 초개와 같이 목숨을 던진 순국선열의 위국충절의 호국정신을 일깨우고 그 학행을 널리 전파하는 등 쾌적한 주위환경을 벗삼아 충과 효의 산교육장으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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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개시간 |
연중 09:00 ~ 18:00(동절기 17:00)이며 단, 5월 부터 8월 까지는 입장이 18:00까지 가능
하며 퇴장시간은 19:00 입니다. |
참배신청 |
별도신청 없이 누구나 가능합니다. 단, 헌화 하고자 하시는 분은 사전에 연락바랍니다. |
※ 문 의(☎ 051-523-42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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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장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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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 (초등학생과 7세 이상 13세 미만) 100원 |
청소년 (13세 이상 19세 미만인 자와·학생증을 소지한 중·고등학생, 대학생) 100원 |
어른 (19세 이상 65세 미만) 200원 |
군인 (하사이하의 군인과 전투경찰대원 - 경비교도 및 공익요원 포함) 100원 |
단체는 30명 이상이 동일한 목적으로 동시에 입장하는 일행 |
무료 : 7세 미만, 65세이상, 국가유공자(유족)증서소지자, 장애인 등록증소지자 및 보호자
1인, 참전군인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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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혼례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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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렬사는 임진란 당시 나라를 지키시다 순절하신 호국선열을 기리고자 건립한 사적지로서
우리의 전통미풍양속을 살리고 우리 선열의 업적과 그 숭고한 뜻을 널리 알리고자 전통혼례를 야외 충렬사 경내에서 실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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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례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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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 : 초례 ▷충렬사내 광장(초례청 별도설치 → 우천시 가능), 폐백 ▷소의당 |
시간 : 10:00 ~ 16:00(10월 ∼ 익년 3월 : 10:00 ∼ 15:00, 1시간 간격으로 매시 정각에 시작) |
절차 : 전통혼례식 ( 전안례 →교배례 →근배례 , 30분 소요) →충렬사 참배 →폐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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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내 및 접수 |
신 청 접 수 |
신 청 서 준 비 사 항 |
- 시간: 매일 09:00 ~18:00(동절기 17:00) - 장소: 충렬사 관리사무소 (☎523-4223~4) - 신청자격: 결혼 예정자 또는 직계가족 - 신청서 : 사무실 비치 |
- 신청서 작성 : 신랑·신부 주소,
주민등록번호, 연락처 기재 - 신랑·신부 신분증
(주민등록증 또는 운전면허증) - 신청자 인장(서명도 가능) - 사용료 : 10만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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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혼례장 사용을 취소할 경우 혼례당사자 또는 직계가족이 관리사무소에 직접 방문 취소 신청하여야 하며 사용료는 사용예정일로부터 15일전까지 취소할 경우에만 10%의 위약금을 공제하고 그 나머지 금액을 환불하오니 이점 널리 양지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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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용료 감면대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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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청요령 : 감면증빙서류를 첨부하여 사용료감면신청서(사무실 비치)를 작성하여 제출 |
- 국민기초생활보장법에 의한 수급자 : 사용료 전액 감면(무료) - 장애인복지법시행령 제2조에 행당하는 자 : 50% 감면 - 국가유공자 예우 및 지원에 관한 법률시행령 제86조 제1항의 각호1에 해당하는 자 :
50% 감면 - 참전군인등지원에관한법률 제2조에 해당하는 자 : 50% 감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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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소의 지원사항 |
의자, 탁자, 앰프시설 등 혼례장 준비 및 폐백장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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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혼례 준비사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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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례복 대여, 사진촬영, 비디오촬영 등 혼례에 필요한 세부사항은 혼례당사자측에서 혼례
대행 업체를 선정하셔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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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랑·신부측 준수사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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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객 입장료 일괄 구입 - 구입후 잔량 매표소에서 당일에 한하여 반환 및 환불 |
충렬사 경내에 드레스(Dress)착용 금지 |
밴드, 축사, 축가 등 금지 |
양가측 화환은 각각2개이상 진열금지 |
음식 및 주류 등 일체 반입금지(인근 음식점에서 식사 가능) |
경내건물, 수목, 잔디 등 제반시설 출입금지(훼손시 변상조치) |
기타 충렬사에서 요구하는 사항의 이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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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 통 |
시 내 버 스 |
29, 29-1, 31, 43, 44, 48, 48-1, 52, 55, 57, 73, 78(일반&좌석) 89,99, 112, 129, 148, 183(좌석), 189, 305(좌석) |
지 하 철 |
지하철 연산동, 교대앞, 동래역에서 하차후 차량 이용(10분 소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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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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깎아지는 벼랑, 푸른 바다가 어우러진 한국 자연 100선의 하나.
[위치 : 영도구 동삼2동 산29-1번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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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대(太宗臺)는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28호(‘72. 6. 26 지정)로 영도구 동삼동 산 29-1번지 일대에 위치해 있으며, 오륙도와 함께 부산을 대표하는 암석해안의 명승지로 영도의 남동단에 위치한다. 파도의 침식으로 형성된 100m에 달하는 절벽과 울창한 난대림, 굽이치는 창파가
어울려 절경을 이룬다.
특히 영도등대 아래에 발달한 융기파식대인 신선암은 태종대를 대표하는 명소로 그 형성시기는 지금으로부터 약 12만년전인 제4기의 최종 간빙기에 해당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태종대는 세계 3대 미항의 하나인 이탈리아의 나폴리만에 있는 커프리섬을 연상케 할 정도로 빼어난 경관을 갖고 있어 예로부터 명승지로 알려져 왔다.
태종대에 대한『동래부지』고적조 기록을 보면, “태종대는 부의 남쪽 30리 절영도의 동쪽
바다물이 돌아가는데 서쪽에 돌다리가 하나 있어 놀이 오는 사람들이 겨우 통할 수 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신라 태종 무열왕이 활을 쏘아 후포를 맞힌 곳이므로 태종대라 했다고
전한다. 가뭄이 든 해에는 이곳에서 기우제(祈雨祭)를 지냈다고 한 것으로 보아, 태종 무열왕과의 관련에서 지어진 이름으로 추정된다.
태종대의 전망대에 서노라면 해안벽에 부딪치는 파도소리를 들으며 맑은 날이면 저 멀리
대마도까지 바라다 볼 수 있는 명소로 옛부터 시인 묵객들이 많이 찾았던 곳이다.
그리고 등대 오른편 아랫쪽에 있는 평평한 바위는 옛날 신선들이 내려와서 놀았다고 하여
신선바위라 한다.
신선바위 위에 외로이 서 있는 하나의 돌은 왜구에 끌려간 남편을 애타게 기다리던 여인이
돌로 변하였다고 하여 망부석이라 불리고 있다. 망부석 바로 뒤에 우뚝 솟은 태운암은 그 모양이 기묘하고 괴상하여 신선바위와 더불어 절경을 이루고 있다.
태종대의 경관을 이루고 있는 식물로는 송림과 해변가를 따라 자생하는 난대계상록활엽수의 나무들이 약 120종이 분포하고 있다. 지금도 이 숲속에는 노루, 산토끼, 다람쥐 등 수종의 동물들이 살고 있다.
그리고 유람선의 운항, 순환열차 등 각종 위락시설을 갖추고 있어 이곳을 찾는 관광객의 편의를 도모하고 있으며, 또한 태종대는 암석해안의 아름다운 풍치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부산만의 자연사를 이해하는 데에도 가치가 아주 높은 곳으로 평가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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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방시간 및 입장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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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1 ~ 10.31(하절기) : 08:00~22:00 |
11.1 ~ 2월말(동절기) : 09:00~20: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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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원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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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보 : 광장입구 - 등대 - 전망대 - 태원 - 광장 (30분 소요) |
순환관광버스 : 광장 - 등대입구 - 전망대 - 광장 (10분 소요) |
유 람 선 : 등대(태원, 곤포의 집) 출발 - 해상관광 (40분 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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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 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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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면, 부산역, 부산데파트앞 : 88, 101번 |
남포동, 자갈치 시장앞 : 8, 13, 30번 |
남포동에서 버스로 30분 정도의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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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볼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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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랜드, 곤포가든 해수풀장, 곤포가든, 목장원 | |
해운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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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으로 이름난 해수욕장과 대한팔경의
하나인 달맞이로 유명한 최고의 명승, 휴양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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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운대(海雲臺)는 해운대구 중동일대의 소나무 숲과 수려한 사빈해안, 그리고 동백나무로 유명한 육계도인 동백섬 등이 조화를 이루는 절경지로, 옛부터 시인 묵객들이 많이 찾아드는 이름난 명승지이다. 해운대란 통일신라말기 대문호인 최치원 선생이 동백섬 일대를 거닐다가, 이곳의 절경에 심취하여 동백섬 남쪽 암벽에 자신의 자인 해운(海雲)을 따서 “해운대(海雲臺)”라는 세 글자를 새긴데서 비롯된 이름이다. 석각에 새겨진 ‘海雲臺'라는 각자(刻字)가 최치원 선생의 자필이라고 한 기록은 없다.
오늘날 관광지로 이름나 있는 해운대는,『동국여지승람』동래현 고적조에 의하면, “해운대는 현의 동쪽 18리인데 산이 가파르게 바다속으로 들어가 있어 마치 누에 머리와 같고 그 위는 모두 동백, 두충, 송삼 등의 나무가 사시사철 울창하다 또 겨울과 봄이 교차하는 시기에는 동백꽃이 땅에 쌓여 유인마제(遊人馬蹄)들이 삼사촌을 밟게 된다. 남쪽으로 대마도를 바라보면 심히 가깝다. 신라 최치원이 일찍이 축대 위에서 유상하여 그 유적이 아직 남아 있는데 최치원의 일자를 해운이라 한다”고 기록되어있다.
해운대는 옛부터 자연경관이 빼어난 해변의 명승지로 「해운대 팔경」이 유명한데 첫째는「해운대상(海雲臺上)」으로 해운대 위에서 바라보는 경치이고, 둘째는「오륙귀범(五六歸帆)」으로 오륙도 앞에서 고깃배들이 돌아오는 한적한 풍경, 셋째는「양운폭포(養雲瀑布)」로 해운대의 주산인 장산계곡에 있는 폭포로, 그 규모는 크지 않으나 물줄기가 마르지 않고
물 흐르는 소리가 아름다운 곳이다.
네번째는「구남온천(龜南溫泉)」으로 해운대 온천을 말하는데 신라말 진성여왕이 온천에
행차하여 휴양하고 약수를 사용했다는 전설이 있을 정도로 유명하였다. 다섯째는「봉대점화(烽臺點火)」로 간비오산의 봉수대에서 외적침입을 알리는 봉화가 해풍을 타고 불길이
하늘로 십여장이나 올라가 화산이 솟는 광경을 연상케 하였다 한다.
여섯째는「우산낙조(牛山落照)」로 현재 해운대의 달맞이 길에서 해지는 모양을 보는 것으로 “해뜨는 것은 영도에서 보고, 해지는 것은 해운대”에서 라고 할 정도로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일곱째는「장지유천(?旨流川)」으로 장지(현 해운대도서관 자리)에서 흐르는 물로 연못가에 버드나무가 우거져 제방전체가 휴식처가 되었던 곳이다.
여덟째는「춘천약어(春川躍漁)」로 해운대 춘천천의 물이 하도 맑아서 고기가 뛰어 노는 것이 보였는데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이러한 해운대의 경치는 그 옛날 해운대가 대한팔경으로 손색이 없었고, 오늘날에도 우리나라 최고의 관광 휴양지로 모자람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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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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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해운대구 중1동 1394-352번 |
교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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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역 또는 중앙동에서 약 17㎞로 40,139,140,240,239,302,302-1,2001번 |
동래방면에서 36, (터미널)307,100번 |
김해국제공항에서 약 25㎞로 307번 좌석버스를 이용 : 50분 소요. |
버스 정류소에서 해수욕장까지는 도보로 약 10분정도 소요. |
숙박 (호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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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어트 ☏ 051-743-1234 |
조선비치 ☏ 051-742-9247 |
파라다이스 ☏ 051-743-2828 |
그랜드 ☏ 051-784-9438 |
주변볼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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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맞이공원, 동백공원(부산시지정기념물 제46호), 요트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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