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사회의 총체적 모순을 어느 중산층 가정에 투사시킨 영화 <아메리칸 뷰티American Beauty>는 21세기 첫 아카데미상을 휩쓴 작품이다. 2000년 제72회 아카데미영화상에서 <아메리칸 뷰티>는 작품상을 받은 것을 비롯해 케빈 스페이시에게 남자주연상을, 감독 샘 멘데스에게 감독상을 안겨주는 등 5개 부문 주요상을 거머쥐었다. 이미 시상식이 열리기 전부터 미국 언론 대부분이 이 작품의 아카데미 작품·감독상 수상을 점쳤다. <아메리칸 뷰티>는 블랙유머를 기반으로 미국사회를 들여다 볼 수 있는 요소들을 정교하게 배치해 복잡한 현대사회속에서 그물처럼 얽혀 살아가는 불안정하고 불완전한 인간을 잘 그려낸 수작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전년도인 1999년에 작품상과 감독상을 한 작품이 차지하던 관행이 깨졌으나 <아메리칸 뷰티>는 1년 만에 다시 그 관행을 되살려냈을 뿐만 아니라 제일제당이 투자한 스티븐 스필버그의 드림웍스에 첫 오스카 작품상을 안겨주었다.
노른자위 휩쓴 예상된 수상
새 천년을 맞은 오스카의 선택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아메리칸 뷰티>로 가득한 밤’이었다.
<아메리칸 뷰티>는 후보에 오른 8개 부문 가운데 작품상 등 주요 5개 부문을 휩쓸었다. 트로피 숫자로만 따지면 지난 1999년 <셰익스피어 인 러브>의 7개에 못 미치고 1998년 <타이타닉>의 11개에는 절반도 안 되지만 작품상과 감독상, 남우주연상, 각본상 그리고 촬영상에 이르기까지 노른자위를 휩쓸면서 아카데미의 하이라이트를 독식했다.
이런 전초전이 아니더라도 <아메리칸 뷰티>는 오스카의 구미에 맞는 작품이었다. 미국 교외 중산층 가족의 붕괴와 중년남자의 위기라는 익숙한 소재를 통해 겉으로는 정상적으로 보이지만 속은 곪아터진 미국사회의 균열을 깊숙이 파고들었다. 그러나 섬뜩한 냉소를 넘어 일상의 소박한 아름다움을 돌아보며 삶의 가치를 추인하는 <아메리칸 뷰티>의 여유는 파괴적인 냉소와 어두움 때문에 아카데미의 냉대를 받았던 <지옥의 묵시록>이나 <택시 드라이버>와는 달리 미국사회의 이상주의 즉 ‘미국적 아름다움’에 대한 한 가닥 온정을 보여줬다는 점에서 오스카의 구애를 받기에 충분했다.
벼랑 끝에서 비로소 찾은 삶의 아름다움
멘데스 감독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섹스와 마약, 동성애, 세대 간 격차, 지역사회의 붕괴 등을 그렸다”고 말했듯이 <아메리칸 뷰티>는 중산층 가족을 통해 미국사회의 고독과 단절을 부각시켰다. 영화는 딸의 친구인 10대 소녀를 향한 성적 환상을 통해 삶의 활력을 되찾는 중년남자의 이야기를 기둥 줄거리로 하고 있다. 누가 아빠를 죽여주었으면 좋겠다는 딸, 뒤늦게 사회적 성취를 좇고 외간 남자와 외도를 즐기는 아내, 사표를 종용하는 회사, 40대에 돌아본 자기 인생은 비참한 실패작이고, 돌아갈 수도 없다. 그럼에도 인생은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는가. ‘아메리칸 뷰티’에는 세 가지 뜻이 있다. ‘고급스런 장미’와 금발과 푸른 눈의 ‘미국 미인’ ‘일상의 소박한 아름다움’. 영화에는 이들 세 가지가 모두 나온다. 그러나 어느 것 하나 얻지 못하고 죽는 한 남자가 있다.
평범한 40대 중산층 가장 레스터 버냄(케빈 스페이시). 깔끔한 정원이 딸린 전형적인 중산층 교외 주택에 살고 있는 그는 아내와 딸이 있지만 권위는 땅에 떨어지고, 회사에서도 외면당한다. 아내 캐롤린(아네트 베닝)은 최고급 장미를 키우며 걱정 없이 생활하다 뒤늦게 성취욕에 집착해 결국 외도까지 하고 딸 제인(도라 버치)은 엄마 아빠를 지독히 미워하면서도 가족이란 틀 때문에 억지로 살아간다. 어느 날 레스터는 딸의 친구인 안젤라(미나 수바리)에게 반해 삶에 대한 애착을 갖기 시작한다. 잃어버린 자기를 되찾기라도 하려는 듯 회사에 사표를 내고 멋진 스포츠카를 뽑고, 젊은 시절 피운 대마초에 빠져들며 안젤라를 위해 멋진 근육질의 몸매를 만들기 위해 운동에 몰두한다.
<아메리칸 뷰티>는 미국 도시 중산층 가족의 삶의 해체를 잘 그려내고 있다. 허무한 인생에 대한 성찰이 미국산 햄버거에 포장돼 갖가지 맛을 선사한다. 바스라진 꿈, 정신적 공황, 슬픔, 그리고 죽음. 시종일관 능청스럽게 깐 유머가 더욱 처연하다. 자위행위로 아침을 시작하고, 사춘기 소년처럼 딸의 친구에게 눈먼 아빠의 에피소드는 벼랑 끝에 매달린 한 남자의 슬픔을 극단적으로 증폭시킨다. 장미와 미녀, 소박한 일상은 있으나 아름다움은 빠진 빈껍데기. 그러나 감독 샘 멘데스는 당시 35살로는 놀라울 정도의 깊은 성찰로 ‘벼랑 끝에 핀 꽃’을 관객에게 제시했다.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리는 비닐봉지에서 아메리칸 뷰티를 발견한 것이다.
잘 짜인 각본, 완급이 절묘한 구성, 치밀한 연출 등 모든 면에서 <아메리칸 뷰티>는 수작의 틀을 갖추고 있다. 숨이 멎어버릴 듯한 블랙 유머에 가슴 졸이는 스릴까지 묻어난다. 케빈 스페이시를 비롯한 연기자들의 연기도 뛰어나다.
감독과 주인공
작품상도 작품상이지만 <아메리칸 뷰티>로 데뷔한 영국 출신 신예 샘 멘데스의 감독상 수상 여부도 관심을 모았다. 작품상과 감독상을 각각 <셰익스피어 인 러브>와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스티븐 스필버그에게 나눠준 1999년과 달리 2000년 첫 아카데미는 <아메리칸 뷰티>를 통해 다시 두 상을 한 작품에 몰아주는 전통으로 되돌아갔다. 애당초 이 영화의 감독으로는 스필버그가 적극 거론됐다. 그러나 극본을 본 스필버그 감독이 샘 멘데스 감독을 적극 추천했고 결국 메가폰을 잡은 멘데스 감독은 로버트 레드포드, 케빈 코스트너 등과 함께 데뷔작으로 오스카를 안은 영예의 주인공이 됐다.
영국 케임브리지대학을 졸업한 멘데스 감독은 1987년 치체스터 페스티벌 극장 단원으로 연극계에 첫발을 내딛었다. 뮤지컬 '카바레' 등을 연출해 영국의 올리버상, 미국의 토니상 등을 수상해 일찌감치 그 재능을 인정받았다. 멘데스 감독은 <아메리칸 뷰티>와 관련, “총기 소지, 나이 많은 남자와 젊은 여자의 불륜, 동성애, 그리고 삶을 살기보다는 삶을 기록함으로써 자신을 표현하는 것 등등…. 20세기 서구 문화권에서 살면서 자신의 삶을 정당화하기 위해 나름대로 분투하는 개인들을 이야기하기 위해 노력했다”고 밝혔다.
<아메리칸 뷰티>에서 딸의 친구와 사랑에 빠지는 중년의 사내를 열연한 케빈 스페이시는 현란하지 않지만 늘 고른 연기력을 뽐내는 연기파 배우다. 그의 탄탄한 연기력은 오랫동안 연극무대에서 단련됐다. 당시 마흔 넷의 재간덩어리 케빈 스페이시는 한창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표정이 풍부하고 변화가 많은 얼굴, 굵고 부드러운 음성에 정확한 발성으로 그가 얻은 타이틀은 '섹시한 연기파'.
미국 뉴저지 태생으로 줄리아드에서 드라마를 전공한 스페이시는 졸업 후 연극무대에 뛰어들어 리브 울먼의 상대역으로 공연한 입센의 ‘유령’을 통해 주목받기 시작했다. 인간의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광기와 사악함을 섬뜩하게 연기한 <유주얼 서스펙트>로 1995년 아카데미 남우조연상을 수상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