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간 눈길이 얽혔다
잘못하다 들킨 아이처럼 어색한 미소를 하는 그녀를 향해 마주 웃었다.
“당당히 피우지, 난 그게 좋더라.”
그녀는 뒤로 숨기던 담배를 도로 꺼내어 불을 붙인다. ‘휴’하고 뱉어내는 한숨 속에는 지나간 고단함이 오래 묵은 익숙한 냄새로 날린다.
허름한 주점의 화장실 구석에 서서 어렴풋이 들리는 유행가 가사를 읊으며 그녀는 취한 듯 희미하게 웃었다. 그 웃음은 마른 꽃처럼 부서질 듯 위태로웠고 안타까웠다.
동창회 모임에서 그녀는 언제나 있는 듯 없는 듯, 알 듯 말 듯 한 미소로 스미듯이 앉아 있었다. 그렇다고 특별히 잘난 척을 했다든지 고상을 떨었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냥 해마다 빠지지 않고 나왔지만, 존재감을 느낄만한 의상이나 행동을 한 적이 없다. 더군다나 그녀와 나는 애틋한 추억 하나 공유한 적이 없는 사이였다. 1박 2일의 일정으로 짜여진 고향에서의 동창회 밤이 깊었다. 왁자한 분위기는 끝날 줄을 몰랐다. 피곤이 몰려와 혼자서 화장실에 갔다 나오는 순간 그녀와 마주친 거다. 아직도 만남의 기쁨을 해소하지 못하고 음주 가무에 취한 무리를 두고 둘은 밖으로 나왔다.
“담배 좀 피워도 괜찮지?”
아까와는 달리 자연스레 담배에 불을 붙인다. 속옷만 입은 채 창문에 서서 피우는 담배의 맛이 달아 보인다.
“신랑이 술을 좋아하더니 간암으로 죽었어. 그때부터야 담배를 배운 게”
“담배란 놈, 참 좋은 것이구나. 친구의 속 얘기도 들을 수 있고, 마음도 풀어주고”
“세월 탓인지도 모르지. 삼십 대에는 못한 얘기, 마흔이 훌쩍 넘으니 가능하네.” 음력 삼월 열하룻날, 봄바람에 달빛 낭자한 숲이 파도처럼 출렁였다.
한때 나도 담배를 피워본 적이 있다. 아니 도둑 담배를 했다. 집 앞 밭에서 아버지가 담배 가져오느라, 하는 소리가 들리면 청자 담배 한 개비를 꺼냈다. 그리고 반들거리는 지포 라이터를 켜서 한 모금 빨았다. 불이 붙은 담배를 들고 행여 꺼질세라 마당을 달렸다. 시원한 그늘아래서 노동 뒤에 피우는 한 모금의 담배는 참 맛있고 달아 보였다. 난 한 모금의 매운 담배 맛보다 지포라이터 궁둥이에 넣던 야릇한 휘발유 냄새를 더 좋아한 아홉 살 어린애였다. 술을 한 잔도 마시지 못하는 아버지는 하루에 한 갑이 넘는 싸구려 담배를 피웠다. 시름이 깊거나 삶의 파고가 깊을 때 담배의 개수는 빗살처럼 늘어났다. 당신 속에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분노나 열정들을 이기지 못해 신경질적으로 짧게 빨아대던 자욱한 연기는 그림자를 낮게 드리웠다.
시어머니도 그랬다. 스무 살이 넘는 큰아들이 어느 날 종적도 없이 사라졌다. 갖은 방법을 동원해 아들을 찾았지만, 생사조차 확인되지 않았다. 교통사고가 나서 죽은 모습을 확인한 것도 아니고 어디가 아파서 시름시름 앓다가 돌아가신 것도 아니었다. 어려운 집안 형편에 도움이 되겠다며 일찍 사회에 몸담은, 착했던 맏아들이 감쪽같이 사라져버린 것이니 어머니의 심정을 어떻게 말로 담을 수 있을까. 그 후 시어머니는 화병을 앓았다. 윗동서의 말에 의하면 잘 참고 계시다가도 한번씩 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지면 온 방을 손톱으로 할퀴며 돌아다녔다고 한다. 누군가의 조언으로 가슴앓이 병을 가라앉히려 배웠다는 홧담배는 돌아가시는 순간까지 애끓는 마음을 삭히는 친구였다.
열어젖힌 창으로 봄이 냉큼 앉는다. 달빛에 말갛게 씻은 신록이 생기로 빛난다. 낯익은 냄새 탓인가 고향에서의 하룻밤 때문인가 유년의 잔영으로 나 또한 쉽게 잠들지 못했다. 어젯밤 아픈 속을 보인 그녀가 화장을 시작한다. 한 손에 화장수를 묻힌 뒤 가볍게 톡톡 쳐 내린다. 기초화장을 마치고 파운데이션을 하는 그녀가 잡티를 숨기려 애를 쓴다. 하지만 쉬이 먹히지 않는다. 눈 밑 짙은 음영이 걷어지면 더 고울 얼굴이다. 봄빛 샤도우를 눈두덩에 칠하고 진달래 빛 립스틱을 바른다. 마지막으로 눈썹을 활짝 날아오르듯 명랑하게 그린다.
함부로 들키고 싶지 않은 게 화장하는 여자의 모습이다. 누구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은 자신의 바탕을 내게만은 자연스레 보인다. 그 모습이 왠지 고맙고 쓸쓸해져 마주치는 눈빛에 빙긋 웃어 보인다.
경건한 아침 의식을 치룬 뒤 향을 태우듯 그녀가 담배를 깊이 빨아들인다. 순간 빨갛게 숨이 살아난다. 그것은 분명 숨구멍에 숨을 틔우는 뜨거운 제의였다. 하늘을 향해 타오르는 희끄무레한 연기들 속에 복닥질 치던 기억의 조각들, 애잔한 삶의 파편들이 엉켜 멍울을 보이더니 멈칫멈칫 사라진다. 일회용 라이터처럼 내팽개치듯 살지 않으려 잠든 아이를 내려다보며 살아내자고 다짐했을 친구. 가슴을 쓸어내는 마법 탓인지 고요한 낯빛이다. 저 침묵의 평안함이 한 모금의 담배 때문이라면 담배는 뒤척이는 사람을 위무하는 간곡한 손길이고 내밀한 대화이지 않은가.
그래. 살다 보면 도둑 담배 한 개비 필요한 날이 어디 하루뿐일까.
첫댓글 남 선생님의 글에 공감이 갑니다. 내 어머니 께서도 아들 넷을 잃으신 후 담배를 피웠지요.
가슴 알이 를 가라않히는 데 좀은 도움이 될 거라는 의사 선생님의 넌즈시 일러주는 말씀에 따라.......
어릴 때 듣기로는 담뱃잎에 마약 성분이 아주 미약하게 들어있다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