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믿음의 목표설정” 信仰の目標設定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과거에는 여러 가지 기계를 써야지만 되었던 것이 요즘은 하나의 기계로 해결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스마트폰이지요. 1990년대 중반에는 휴대폰, 그러니까 전화기를 가지고 다닌다는 것만으로도 신기하고 대단히 편리했습니다. 춥거나 더운
날에 공중전화 앞에 줄을 서지 않고, 언제 어디서든지 전화를 걸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신기했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제는 전화가 뭐예요. 스마트폰 하나만 있으면 전화나 카메라는 물론이고 인터넷까지도 되는 게 이제는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
되었습니다. 인터넷만 연결되어 있다면 국제전화까지도 무료로 할 수 있으니 참 편리해졌지요.
녹음기 하나만 보더라도 성능이 참 좋습니다. 어렸을 때보면 카세트 테이프에 마이크를 연결해서 막 복잡한 절차를 했어야 했지만, 이제는
역시 이 폰 하나만으로 해결이 가능합니다. 몇 년 전에 새벽예배를 할 당시 녹음기를 써봤는데 참 깨끗하게 녹음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전에 이런 글을 읽어본 적이 있습니다. 그 글은 녹음을 하는 기계와 사람의 귀를 비교한 글이었습니다만, 조금 소란스러운
지하철이나 번화가에 있을 때 옆 사람과의 대화 내용을 녹음할 수가 있냐 하는 것이죠. 그와 같은 환경에서 녹음기를 사용해보면 아무리
성능이 좋은 녹음기를 사용해도 여러 소리가 한꺼번에 녹음이 되기 때문에 옆 사람이 웬만큼 큰 소리로 말하지 않는 이상 무슨 내용인지
제대로 녹음이 되기는 어렵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사람의 귀는 아무리 소란스러운 지하철이나 번화가 같은 곳에서도 내 옆에 있는 사람과 이야기를 할 때에는 작은 소리로 말을 해도
알아 들을 수가 있다는 것이에요.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사람의 귀는 똑같은 크기의 소리라고 하더라도 자신이 듣고자 하는 소리만을
들을 수 있는 기능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사람의 귀는 단순한 소리의 크기를 넘어서, 소리의 취사선택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에, 아무리 옆 사람의 목소리가
주변 소음에 비해 작다 하더라도, 내가 그 목소리를 들으려고 한다면 들린다고 하는 놀라운 능력이 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얼마 전에 이 내용이 떠올라서 잠시 생각을 해보았습니다만, 아, 정말 그런 것 같아요. 그런데 이는 비단 사람의 귀에 국한된 능력은
아닌 것 같았습니다. 어쩌면 사람의 눈도 그런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린 모나리자나 마지막 만찬 같은 그림을 보면, 이른바 원근법이라고 하지요? 평평한 곳에 그림을 그리지만 이를 먼
곳과 가까운 곳을 나타내서 입체적으로 보이게 하는 기법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와 같은 그림을 보면 실제와는 조금 다르다는 점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멀리 있는 것과 가까이 있는 것, 모두가 아주 자세하게 보입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어때요? 가까이 있는 것은 자세히 보이고, 멀리 있는 것은 자세히 안 보여요? 아니요. 꼭 그렇게 말할 수는
없습니다. 눈앞에 손바닥을 펼쳐보시면 아실 수 있겠지요. 손바닥을 펴서 본다면 자신의 손바닥은 자세히 보이지만 먼 곳에 있는 것은
자세히 안 보입니다. 하지만 손바닥을 편 채로 먼 곳을 한 번 보십시오, 그러면 오히려 가까이 있는 손바닥이 흐릿하게 보입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면 귀로 들리는 청각만이 아니라 눈으로 보는 시각적이 부분에 있어서도 역시 사람은 취사선택을 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여기서 오늘 제가 한 가지 고백을 하려고 합니다. 이는 아직 제 아내에게도 말을 하지 않은 부분입니다만, 아, 그렇다고 뭐 대단한
것은 아닙니다. 긴장하실 것까지는 없습니다.
사실 지난 주 주말쯤, 그러니까 이제 1주일 이상이 지났지요. 그날 밤에 제가 꿈을 하나 꾸었습니다. 그런데 뭐, 무슨 꿈이라고까지
자세히 말씀 드리기는 좀 뭐합니다만, 그 꿈은 세상적으로 보면 완전히 그런 꿈이에요. 어떤 꿈이냐 하면, 이건 의심할 여지가 없어요.
뭔가 큰 재물을 얻을 수 있는 꿈이었습니다.
그날 아침부터 제 심정은 어땠을까요. 이제 뭔가 좋은 일이 일어나겠구나 하는 기대에 부풀었습니다. 그런데 하루가 지나도 이틀이 지나도
별로 그런 기미가 안 보여요.
자, 분명 저는 어떤 큰 재물을 얻을 만한 꿈을 꾸었습니다. 그런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요. 그렇다면 저는 어떻게 해야 하지요?
예, 복권을 사야 하지요. 그렇잖아요? 제 생각이 이상해요? 아니요. 지극히 자연스러운 생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경제적으로 어려움이 있는 것은 맞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놀라운 꿈을 꾸었습니다. 그래서 복권을 샀는데, 아이구, 이게 1등을
맞아서 정말 꿈을 꾼 대로 큰 재물을 얻게 되었다고 칩니다.
그러면 좋은 거예요? 안 좋은 거예요? 예, 어렵게 생각할 것 없습니다. 좋은 것이죠. 지금 우리 교회에서 해야 할 일들이 얼마나
많은데요. 제가 매주 설교말씀을 따로 한국어와 일본어로 촬영을 하고 전세계에 메일을 보내드리고 있는데, 이 때 선교후원에 대한
당부말씀을 매번 드립니다만, 큰 재물을 얻을 수 있어서 생활이 안정된다면 무엇보다 이 돈 이야기를 좀 안 하고 싶어요. 정말 그야말로
순수하게 복음만 전하게 된다면 참 얼마나 거룩해 보이고 은혜롭게 보일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자, 그런데 말입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무슨 생각이겠어요? 예, 간단합니다. 내가 복권을 사는 게 옳은 것일까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내가 재물을 얻을 만한 놀라운 꿈을 꿨어요. 복권을 사야 할까요? 말아야 할까요? 제가 어떤 사람한테 이와 같은
의논을 했다면, 많은 사람들은 어떻게 대답했을까요? 아니, 뭐 복권이 비싼 것도 아니고, 몇 백 엔이면 살 수 있는데, 그냥 한 번
사봐……라고 하지 않겠어요?
그랬더니 제가 뭐, 1등이 아니더라도 그래도 꽤 괜찮은 돈을 얻을 수 있었다고 생각해보았습니다. 뭐, 생각은 자유니까요. 하지만
말입니다. 우리 일생 중에서 대표적인 어려움 중 하나가 이 경제적인 어려움 아니겠습니까. 이는 어찌 보면 돈이 많은 사람도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까 합니다. 대기업 사장님이라고 돈 걱정을 안 하시겠어요? 예를 들어서 매출 100억원을 달성했던 회사가 올해는 매출
50억원 밖에 달성하지 못했다면, 아무리 50억원이 큰 돈이라고는 하지만, 이게 보통 심각한 문제겠습니까. 역시 돈 걱정은 다들 하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 인생에 있어서도 이번에 복권을 사서 재물을 얻었다고 하더라도, 그 이후에 또 경제적인 어려움이 없으리란 법은 없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또다시 경제적인 어려움이 닥쳤을 때, 저는 어떤 생각을 할까요. 1번. 하나님 생각. 2번 복권 생각.
그리고 제가 이렇게 간증을 합니다. 여러분, 제가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꿈을 보여주셨는데, 그게 정말 큰 재물이
들어올만한 꿈이었습니다. 그래서 복권을 샀더니 정말로 큰 재물을 얻을 수가 있었습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라고 간증을
했을 때, 이를 듣는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할까요. 1번 하나님 생각. 2번 복권 생각.
여러분, 이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겠느냐 하는 것이죠. 그럴 리가 없습니다. 이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게 아니라 복권한테 영광을
돌리는 꼴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되면 복권이 무엇이 되냐 하면, 그렇습니다. 우상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이사야 42장 8절
“나는 여호와이니 이는 내 이름이라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내 찬송을 우상에게 주지 아니하리라”
わたしは主、これがわたしの名。わたしは、わたしの栄光をほかの者に、わたしの栄誉を、刻んだ像どもに与えはしない。
이사야 48장 11절
“나는 나를 위하며 나를 위하여 이를 이룰 것이라 어찌 내 이름을 욕되게 하리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주지 아니하리라”
わたしのため、わたしのために、わたしはこれを行う。どうしてわたしの名が汚されてよかろうか。わたしの栄光を、ほかの者に与えはしない。
여러분, 우상들이 가장 원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로 향하는 우리의 마음을 도중에 가로채서 자신들이 가져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을 통해서 영광을 받기 원하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마귀 사탄에 굴복해서 그 영광을 우상들에게
빼앗기게 된다면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이겠습니까.
그렇다고 오해하지 마십시오. 복권을 산다는 것이 죄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전에는 저도 가끔 사본 적이 있었어요. 재미 삼아서
가끔 한 두 장 사는 게 무슨 죄를 짓는 것도 아니지요. 그것도 무슨 불법도 아닌 합법적인 것인데요.
다만 제가 말씀 드리고자 하는 것은, 단순히 복권 몇 장 산다 안 산다는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주님을 의지할
것인가, 아니면 세상을 의지할 것인가 하는 선택을 해야 할 때가 대단히 많습니다만, 그런데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이, 믿음이 있다고
하는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의지하지 않고 세상적인 방법을 의지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만약에 목사라고 하는 제가 복권을 사서 1등이 맞았어요. 그래서 간증을 하게 됩니다. 목사라고 하는 사람이 간증을 했더니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많아져야 정상인데, 목사가 설교를 하고 났더니 복음이 아닌 복권을 사러 가는 사람들이 많아졌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이를 어떻게 주님께서 기뻐하시겠습니까.
군사용어에 보면 lock on이라는 용어가 있습니다. 미사일을 쏠 때 옛날에는 목표물한테 조준을 맞추고 쏘는 것이 끝이었습니다만,
이럴 때 문제가 되는 것은, 해당 목표물이 가만히 있는 경우라면 괜찮습니다만, 목표물이 움직이는 경우라면 참 맞추기가 어렵겠지요.
그런데 요즘은 이 목표물한테 한 번 조준을 맞추고 고정을 시켜 놓으면 목표물이 움직이더라도 이 조준이 자동적으로 움직이면서 조준을
맞춰주는 시스템입니다. 이를 이용하면 예를 들어서 전투기를 타고 가는데, 앞에 적기가 나타났어요. 그럴 때 이 lock on을
해놓으면 그 적기가 어디로 움직이든 간에 조준이 자동적으로 맞춰져서, 미사일 발사 스위치만 누르면 확실하게 맞출 수가 있는 것이지요.
제가 그런 꿈을 꾸고는 복권을 살까 말까 고민을 참 많이 했던 그때에, 정말 신기한 건 말이에요. 복권이 딱 이렇게 머리 속에
lock on이 되니까, 동네를 지나가는데, 그 때까지는 안 보이던 복권 판매소가 글쎄 눈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참 신기하지요? 뿐만
아니라 근처를 지나가니까, 작은 스피커로 복권 무슨 주제곡 같은 것이 들려오는데, 그게 그리 큰 소리는 아니었습니다만, 귀에 콕콕
꽂히는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한 번 복권에 조준이 맞춰지니까 이제 언제든지 어디서든지, 정말 세상과 나는 간 곳 없고 복권 판매점만 보이도다……
이렇게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지금 생각하면 참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모릅니다.
오늘 말씀을 다시 한 번 보실까요. 히브리서 12장 2절입니다.
히브리서 12장 2절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信仰の創始者であり完成者であるイエスから、目を離さないでいなさい。この方は、ご自分の前に置かれた喜びのために、辱めをものともせずに十字架を忍び、神の
御座の右に着座されたのです。
그렇습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는 복권이 아닙니다. 로또가 아닙니다. 세상적인 방법이나 사람이 아닙니다. 오로지
예수님이신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를 위해서 무참하게 십자가에 달리셔서 고통과 부끄러움과 죽음을 모두 감당하신 예수님이신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빌립보서 2장 6절~8절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빌립보서 2장 6절~8절
“6.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キリストは、神の御姿であられるのに、神としてのあり方を捨てられないとは考えず、
ご自分を空しくして、しもべの姿をとり、人間と同じようになられました。人としての姿をもって現れ、
自らを低くして、死にまで、それも十字架の死にまで従われました。
어떠한 어려움이 있을 때 우리는 반드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왜 십자가에 달리셨을까. 무엇 하나 부족함이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달리셨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아야 합니다.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요? 예, 틀린 답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유가 그것뿐입니까? 우리의 죄를 해결하시기 위해서요? 예, 맞습니다.
이 또한 틀린 답은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는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분명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우리의 죄를 해결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멈춰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 그와 같은 고통을 겪으심으로 인해서, 우리에게 크나큰 축복을 주시기 위해서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단순히 돈 몇 푼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서, 단순히 고급 차 몇 대, 큰 집 몇 채 정도의 축복을 주시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께서 그토록 무참하게 십자가에 달리셔서, 고통과 부끄러움과 죽음을 모두 감당하셔도 아깝지 않을 만큼 크나큰 축복을 주시기
위해서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로마서 8장 18절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今の時の苦難は、やがて私たちに啓示される栄光に比べれば、取るに足りないと私は考えます。
우리가 지금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하더라도 장차 우리가 얻을 영광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계십니다.
마지막으로 오늘 말씀을 다시 한 번 보시도록 하겠습니다.
히브리서 12장 2절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信仰の創始者であり完成者であるイエスから、目を離さないでいなさい。この方は、ご自分の前に置かれた喜びのために、辱めをものともせずに十字架を忍び、神の
御座の右に着座されたのです。
우리가 믿어야 할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를 온전하게 해주시는 분이 오로지 예수님 뿐이기 때문입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를 위해서 부끄러움도 고통도 참으시고 십자가에 달려주신 예수님 뿐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면 주님이 안 보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바라볼 때만 주님은 보이는 것입니다. 믿음에 있어서도 취사선택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주님을 제대로 바라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 모두, 언제 어디에서 어떤 상황에 있더라도, 세상이 아닌 오로지 믿음의 주요 온전하게 하시는 분인 예수님을 향해서만 로크온
목표설정을 하고, 낮이나 밤이나 추울 때나 더울 때나 주님만 바라보고 주님만 따라감으로써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예비해주신 놀라운
축복을 모두 받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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