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부터는 요한일서 말씀을 가지고 좀 묵상하려고 합니다.
신약의 대부분의 성경은 서신서예요. 그러니까 편지의 형태로 기록되었다는 겁니다. 보통 이 서신서에서 그래서 첫머리에 나오는 것이 인사예요. 인사 사랑하는 아들 뭐 이렇게 해서 어쨌든 인사가 보통 서신의 첫 머리에 나와요.
근데 요한일서에는 우리가 읽었던 것처럼 인사가 없어요. 아예 인사가 없이 본론으로 들어가요. 바로 본론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말하기 시작합니다. 1절 전반절을 표준새번역으로 보면 이 글은 생명의 말씀에 관한 것입니다.
여기서 생명의 말씀이란 곧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요한이 이제 에베소 지역에 있는 교회입니다. 요한은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을 쓰고 또 이렇게 요한일서와 이서를 쓴 이제 장본인이죠. 사도 요한은 이 에베소 교회와 그 주변에 있는 교회들에게 이렇게 편지를 쓰려고 이렇게 딱 잡으면서 인사가 없이 이렇게 바로 본론에 들어가요.
그러니까 아마 추측컨대 좀 시급한 문제가 있었지 않을까라고 추측은 해요. 그러니까 아예 인사를 빼고 이제 본론으로 들어간 거죠.
나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바울로부터 막 이렇게 들어가잖아요. 대부분의 이제 서신서들은 처음에 인사가 나오는데 요한은 인사가 없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언급이 바로 시작이 됩니다. 정확하게는 알 수는 없지만 어떤 예수님을 바로 언급해야 될 상황이 아마 이 편지를 받는 수신하는 교회에 있었던 것으로 추측이 돼요. 그러니까 요한이 어떻게 인사가 없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기록하게 하기 시작했냐 하면 그러니까 이 예수 그리스도가 지금 문제가 있는 교회 공동체의 해답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에 인사가 없이 바로 본론으로 들어간 거예요.
그 문제가 시급해서도 본론으로 들어간 거기도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가 그 문제의 해결체라고 확실하게 믿었기 때문에 곁가지를 다 떼고 그냥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언급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와 어떤 관계인지에 대해서도 말합니다. 1절입니다. 태초 붙어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사도 바울이 사도 요한이 편지의 서두에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언급하기 시작해요. 그러면서 그러니까 이렇게 담대하게 서론도 거치지 않고 본론으로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은 이 사도 요한이 예수교에 대한 경험이 정확했기 때문인 거예요. 그러니까 자기가 만난 예수 그리스도, 자기가 경험한 예수 그리스도는 이 편지를 받는 공동체의 문제 해결을 하기에 합당하신 분이었던 거예요. 충분히 남음이 있었어요. 그래서 거두절미하고 본론을 바로 언급하기 시작한 겁니다.
이렇게 확신이 있었던 것은 사도 요한이 예수를 경험했기 때문인 거예요. 대개 구체적으로 나와요. 1절 하반절을 표준 새번역으로 보면 우리가 들은 것이오 우리가 눈으로 본 것이오 우리가 지켜본 것이요. 우리가 손으로 만져본 것이다.
요한은 그리스도에 대해서 들었고, 그리고 눈으로 봤고 그리고 만졌고 그리고 가까이에서 봤다고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확신이 있었던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가 이 공통체의 문제 해결자이시라고 확신했기 때문에 보통 일반적인 형식의 편지를 거치지 않고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거론하기 시작했던 겁니다.
예수님에 대한 확신이 없으면 예수라는 이름이 예수가 먼저 언급되거나 거론되기 어려워요. 우리가 예수님에 대한 경험이 없으니까 예수님이 교회의 문제 해결자라는 확신이 없어요. 확신이 없어서 제시를 못하는 거예요. 우리 교회의 문제는 문제 해결자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당신의 가정의 문제 해결자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당신 자녀의 문제 해결자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라고 확실하게 우리가 제시하지 못하는 건 우리가 예수님에 대한 경험이 선명하고 분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예수에 대한 경험이 너무 분명했어요. 그래서 바로 예수님을 언급하기 시작하는 거예요. 확신이 없었으면 이래저래 말을 미루거나 또 말을 막 미사 글을 쓰거나 막 이랬을 거예요.
근데 너무 확신이 있었어요. 자기의 경험으로 봐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이 공동체의 문제 해결자시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만 전하면 된다 이렇게 생각했던 거예요. 그래서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기 시작했던 겁니다.
대부분의 서신서는 목회적인 관점에서 쓰여졌어요. 그러니까 교회와 성도의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서 써진 거예요. 그래서 편지의 서두에 예수 그리스도가 언급됐다는 것은 문제 해결자가 그리스도라고 확실하게 믿었던 거예요. 그래서 인사를 빼고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기 시작했어요. 그러니까 본론으로 들어간 거죠. 서두가 없이 서론이 없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요한이 예수 그리스도를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 시대에 가장 필요한 게 뭘까요? 그리스도에 대한 경험이에요. 우리가 교회를 다니지만 그리스도에 대한 경험이 없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우리 교회나 우리 가정이나 내 삶에 해결자라는 확신이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님을 믿는데 예수님에 대한 확신이 없어요. 예수님에 대한 경험이 적거나 아니면 없기 때문인 겁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이고 만난 예수 그리스도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난 인생과 만나지 않는 인생, 예수님을 많이 경험한 인생과 경험하지 못한 인생은 엄청난 차이가 나요. 따지고 보면 교회의 차이는 그리스도에 대한 경험의 차이예요. 어떤 교회가 참 행복하고 재미있고 하나님의 기쁨이 되고라고 한다면 그 차이를 만든 것은 성도들이 얼마나 그리스도를 경험했느냐 그리스도를 만나고 경험했느냐가 좌우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많은 사람이 동원된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예수님을 만난 사람이 필요한 거죠.
교회는 여러분의 가정 안의 문제도 아버지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면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경험하면 해결될 문제가 많아요. 우리가 만나고 경험하지 못했으니까 해결되지 못하는 거예요. 확신도 없고 자신도 없어요. 그래서 다른 방법을 계속 찾는 거예요.
이미 답은 정해졌어요. 우리 가정의 답은 예수 그리스도다. 근데 문제는 가족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거나 예수 그리스도는 경험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가 해결자가 되지 못하니까 그 문제가 그 과정에서 떠나지 않는 거죠. 교회에서도 떠나지 않고 개인의 삶에서도 떠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인생, 만나지 않는 인생도 많은 차이가 나고, 예수님을 경험한 인생, 경험하지 않는 인생도 엄청난 차이가 많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왜 못 느낄까? 왜 예수를 만난 인생과 만나지 못한 인생 경험한 것 경험하지 않은 인생의 차이를 왜 못 느낄까? 굳이 좀 신랄하게 이야기를 말씀을 드리면 우리 주변에 그런 사람들이 많지 않기 때문인 거예요. 만약에 가정이라고 생각 치고 아버지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어머니가 못 만났어요. 그러면 선명하게 비교가 될 거 아니에요 그럼 자녀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인생이 어떤 인생인지 알게 돼요.
교회에도 교회에도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성도들이 많고 예수를 경험하고 있는 성도들이 많으면 이게 분명히 차이가 나요. 예수를 만났느냐 만나지 않느냐가 어떤 차이를 가져오는지를 분명히 알게 돼요.
근데 우리가 그 차이를 잘 몰라요. 모르는 건 생각보다 우리 주변에 예수를 만나고 만났지만 또 예수님과 동행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은 거죠. 아마 여러분과 저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는 만났을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과 함께하지 못하는 거예요. 나중에 계속 언급하겠죠. 예수님과 함께하지 못하는 거예요. 예수님에 대한 경험이 없는 거죠. 예수 그리스와 동행함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사람들이 보기에 차이점이 없는 거예요.
무슨 차이가 있지? 만약에 이게 선명한 차이를 만약에 우리가 안다면 자녀들이 아버지가 믿는 그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을까요? 왜 너무 차이가 나는데 만약에 여러분과 제 안에서 이런 차이를 느낀다면 우리의 다음 세대들이 어떻게 해서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려고 하지 않을까요?
그런 관점에서 요한일서의 이 서론 부분은 우리에게 참 도전을 줘요. 그러니까 요한은 예수님을 만나고 경험했던 거예요. 눈으로 보고 만지고 지켜보고 다 했어요.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가 답이라는 사실을 명확하게 알았던 거예요. 그래서 서론 없이 바로 본론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언급해요.
2장 2장 이후에 보면 이제 어떤 이단이 등장하는데 영지주의라는 이단이에요. 이 시대에 가장 흔했던 영지주의 이단 우리나라로 말하면 구원파와 같은 이단에 아마 속할 거예요. 영지주의가 영주라 이단이 되게 많았어요. 그래서 교회들이 되게 혼란스러웠어요. 그러니까 이단의 혼란스러움을 막을 방법이 뭐냐 예수 그리스도라는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면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경험하면 교회 안에 이단의 문제도 해결된다는 거예요.
여러분 이단들이 청소를 되게 많이 하잖아요. 근데 그 사람들은 사람들이 안 보면 청소를 안 해요. 저는 사람들이 안 봐도 지금 15년째 여기 청소하잖아요. 여러분 확실히 차이가 나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느냐 믿지 않느냐 예수님과 동행하느냐 동행하지 않느냐는 확연한 차이가 나요.
근데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또 동행하는 사람이 많지 않다 보니까 이 차이를 우리가 잘 못 경험한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에 대한 자신이 없는 거죠. 근데 반면에 사도 요한은 자신이 있었어요. 그래서 마음껏 이제 예수 그리스도가 답이라고 아예 서론도 빼버리고 본론으로 예수를 언급하기 시작합니다.
여러분과 제가 1차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꼭 만나야 합니다. 할렐루야 아마 우리 중에 만나지 못한 분들 없을 거라고 믿어요. 만약에 만나지 못했다면 꼭 만나야 됩니다. 두 번째로는 그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요한처럼 구체적으로 경험해야 돼요. 눈으로 보고 듣고 만지고 가까이에서 보고 그래서 이 예수 그리스도가 내 인생의 답이라는 사실도 우리가 알아야 됩니다.
그럴 때 우리 인생의 문제들이 좀 정리가 돼요. 세상이 답이라고 믿으면 인생의 어려움들은 정리가 잘 안 되더라고요. 왜냐하면 답이 수시로 바뀌어요. 근데 예수 그리스도가 답이라고 우리가 결론을 얻으면 이 예수 그리스도가 답이라는 사실은 요동하지 않거든요. 변함이 없어요. 그래서 어떤 문제에도 적용해도 다 돼요. 부부 싸움에도 예수 그리스도를 적용해도 돼요. 경제적인 위기에도 삶의 어려움에도 예수를 적용하면 다 돼요.
그런데 여러분과 저에게 예수님을 그렇게 적용하려면 예수님에 대한 경험이 있어야 되죠. 이 경험이 있고 그래서 이 경험이 예수에 대한 확신으로 우리 안에 자리 잡아야 됩니다. 아무쪼록 요한처럼 여러분과 저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확신이 우리의 삶에 자리 잡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교회도 가정의 문제도 예수 그리스도가 유일한 해답입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것, 예수님을 경험하는 것이 해답이에요. 그래서 교회의 부흥도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사람이 교회 안에 많아지면 사람들이 우리를 볼 거 아니에요. 그럼 당연히 우리 교회로 오겠죠. 전도하지 않아도 와요. 오게 되어 있어요. 이런 그리스도에 대한 경험이 우리 재단에 많아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Messenger’s Note: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Proverbs 16:9)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Luke 22:42)
“And when the angel stretched out his hand toward Jerusalem to destroy it, the LORD relented from the calamity and said to the angel who was working destruction among the people, ”It is enough; now stay your hand.“ And the angel of the LORD was by the threshing floor of Araunah the Jebusite.
And David built there an altar to the LORD and offered burnt offerings and peace offerings. So the LORD responded to the plea for the land, and the plague was averted from Israel.” (2 Samuel 24:1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