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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목회자를 원한다
지은이 이종범 (원광대 공대 전기공학과 교수)
오늘날의 목회자들은 성도들의 숨은 의도와 생각들을 바르게 알아야 하고, 성도들과 일체감을 가져야 할 것이며, 성경적으로 하나라는 것에 실질적이며 현실적인 동의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의 목회 세계를 보면 겉으로는 전혀 안 그렇게 보이지만 성도들과는 다른 세계, 특별한 지위에 있는 자들로 스스로 인식하는 분위기가 만여되어 있습니다.성도들의 목회자를 향한 조용한 소리와 바람은 시비를 떠나 별관심이 없습니다. 듣는 것보다는 말하기를 좋아하며 변화와 수정을 싫어합니다. 자신의 잘못을 진정 속으로 받아들이기를 꺼려합니다. 이러한 체질로서는 다가오는 후세대를 이끌기 힘들 것입니다. 사실 기독교회 희망은 목회자에게 달려 있습니다. 따라서 본인은 시비를 떠나 목회자를 향한 평소의 느낌과 바람을 성도의 입장에서 솔직히 표현하고 싶었고, 성도 중의 한 사람인 본인의 이러한 글이 목회자의 굳은 사고에 깊은 고민을 던져 주는 계기가 되기를 바래서 이 책을 펴내게 되었습니다.
차례1. 자신의 검증을 기꺼이 받으려는 목회자2. 세상적 직업경험을 가진 후 지원하는 목회자3. 가정을 중요하게 여기는 목회자4. 헌금을 강요하지 않는 목회자5. 고급 승용차를 거부하는 목회자6. 예배당 건축문제를 진지하게 보는 목회자7. 외국 박사 학위에 민감하지 않는 목회자8. 교회 인쇄물에 이름 안 쓰는 목회자9. 자질있는 자만이 지원하는 목회자10. 전문 목회영역을 개발하는 목회자11. 축복 성회를 구별해서 개최하는 목회자12. 감투에 민감하지 않는 목회자13. 성도수의 많고 적음에 초조해 하지 않는 목회자14. 이성 문제에 연루되지 않는 목회자15. 가운과 복장을 너무 의식하지 않는 목회자16. 당회장이라는 단어를 강조하지 않는 목회자17. 하나님의 뜻이라고 함부로 말하지 않는 목회자18. 교회를 갑자기 떠나지 않는 목회자(Ⅰ)19. 교회를 갑자기 떠나지 않는 목회자(Ⅱ)20. 성도들의 심방을 직접하는 목회자21. 농어촌 교회나 선교사를 확실히 책임 지원하는 목회자22. 대접이나 선물을 공개적으로 교육시키는 목회자(Ⅰ)23. 대접이나 선물을 공개적으로 교육시키는 목회자(Ⅱ)24. 목회직을 포기할 수도 있는 목회자(Ⅰ)25. 목회직을 포기할 수도 있는 목회자(Ⅱ)26. 목회자끼리 교회내에서 화합할 수 있는 목회자(Ⅰ)27. 목회자끼리 교회내에서 화합할 수 있는 목회자(Ⅱ)28. 목회 세계를 세상의 또다른 분야로 보지 않는 목회자(Ⅰ)29. 목회 세계를 세상의 또다른 분야로 보지 않는 목회자(Ⅱ)30. 호텔 출입을 멀리하는 목회자31. 훈련받기를 자청하는 목회자32. 질서 교육도 교회내에서 과감히 시키는 목회자33. 신앙의 명예나 욕심에 이끌려 사역하지 않는 목회자34. 성도 사역자를 세우는 목회자35. 최고의 사역은 생활임을 강조하는 목회자36. 졸부에게 접근하지 않는 목회자37. 타인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는 목회자38. 설교에 자기 감정을 넣지 않는 목회자39. 돈으로 해결하지 않는 목회자40. 인간관계를 중시 여기는 목회자41. 직분 임명에 인색한 목회자42. 세상을 정확히 보는 목회자43. 고민하는 목회자44. 당회장을 겨냥하지 않는 목회자
1. 자신의 검증을 기꺼이 받으려는 목회자
목회자들은 성도들로부터 정확한 자기 평가나 검증을 받거나 들을 기회가 사실 없다. 왜냐 하면 우리 나라의 문화 특히 신앙 문화로 볼 때 목회자에 대한 요구나 개선적 제안 등을 말하기보다는 그저 순종이 최고라는 묵시적 인정하게 모든 것이 옳고 최고라고 하면서 건너뛰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좋은 이야기나 은혜 받았다는 이야기는 많이 하고 있지만 진정한 발전을 위한 과감하고도 솔직한 표현은 계속 침묵 속에서 맴돌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성도 모두는 목회자가 어떠 어떠하다고 이미 다 알고 있으며, 성도들끼리는 은밀하고 솔직하게 이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때로는 성도들이 목회자 앞에서 하는 말이 정말일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마음 속에서는 다른 다른 생각을 갖고 있더라도 입에서는 칭찬의 말을 하는 사뭇 과장된 표현도 많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한편 목회자에게 가장 신경을 쓰게 하는 설교의 내용이나 방법 등도 보면 설교 시간 중에 성도들이 질문을 할 수도 없는 것이고, 어느 어느 점을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고 정중하게라도 물어 볼 수 없는 것이 강의와의 차이점이다.왜냐 하면 예배라는 속성이 그렇고 또 예배 후에라도 분위기 자체가 이를 수용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렇게 됨으로써 점점 한 교회의 목회자는 올바르건 틀렸건 간에 자기를 향한 성도들의 시각을 바르고도 정확하게 진단하거나 눈치채지 못할 수밖에 없으며, 계속 이렇게 되다 보니 타성이 붙어 이에 대해 노력을 게을리 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이제는 목회자와 성도들과의 일체성에 대한 끊임없는 접근 노력으로 답답하게 막힌 담을 해소시켜야만 하고 목회자의 진정한 발전에도 기여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자기를 향한 성도들의 소리를 과감히 들을 수 있는 열린 마음을 소유해 어느 방법을 동원하든지 스스로 자기 검증과 평가를 이룩하려는 데 게을리 하지 않는 목회자가 되어야 한다. 아울러 영적인 면을 포함해 모든 면에서 자존심을 갖고 있는 목회자이기에 조금은 거북스러울지라도 자기에 대한 솔직한 표현은 신앙의 과점에서 오히려 귀담아 듣고 검증해 볼 수 있어야 한다. 또 ‘감히 성도들이 목회자에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느냐’가 아니라 자신의 궤도 수정에 호기라고 생각하며, 그런 기회를 제공해 준 성도들을 높이 평가할 줄 아는 폭넓은 열린 목회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2. 세상적 직업 경험을 가진 후 지원하는 목회자
우리 나라에서 목회자가 되는 길은 교단마다 약간 씩은 다르지만 보편적으로 신학교나 신학대학을 나오고 수년의 목회 경험을 거친 후에 목사나 강도사 고시 등을 합격한 다음 적절한 기간 후에 목사직을 안수 받는다. 물론 이러한 과정만큼은 참으로 어렵고도 힘든 시간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제가 많이 있는 것은 목회자의 지원 연령이 너무 낮은데 있지 않나 생각된다. 대학을 들어가거나 대학을 졸업할 정도의 나이인 아직 어리다고 볼 수 있는 이들은 일정한 과정을 거치면 언젠가는 목회자가 될 것이고 또는 신학교에 입학하는 순간부터 대부분의 교회에서 ‘전도사님’으로 호칭을 받아 실제적인 목회자가 되어 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현상이 수십 년간 우리 나라 교계에서 자연스럽게 정착되어 있으므로 적지 않은 문제점을 낳고 있는데 크게 두 가지를 보고자 한다.
첫째로, 이렇게 된다면 성도들의 실제적인 신앙 교육이나 말씀 적용 면을 지도하는데 있어서 자신감과 대안을 갖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 목회자는 영적인 지도자라고 하지만 실제로 교회에서의 역할을 살펴보면 영적인 것은 물론 성도들의 사사로운 일까지 관여하고 상담하는 경우가 많다.많은 성도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이야기를 빌리자면 자주 목회자의 설교나 교제 가운데에 성도들의 직장이나 삶의 터전에서 받는 갈등들을 너무도 모르는 것 같아 답답하다는 것이다. 안다고 해도 추상적일 뿐이고 세상과 동떨어진 이야기를 너무 많이 한다는 것이다. 성도들이 어떤 상태에서 사는 지 체감하지 못하면서 성경 말씀만 전하면 모든 것이 이루어지고 성도들은 은혜 받은 대로 알아서 적용할 것으로 아는 것 같다. 이 모두 세상적 경험이 없기 때문이라는 지적이다.이러다 보니 사회의 변화도 없고 그리스도인들의 역량도 사회에서 너무 연약할 수밖에 없다. 교회 따로 세상 따로이다. 왜냐 하면 지도자도 전혀 그런 경험을 가진 적도 없고 또 모르기 때문이다.일찍 목회자가 된 사람들을 보면 일반 대학 출신은 기껏해야 대학 생활이나 군 생활 정도가 고작 세상 경험일 뿐이다. 신학교가 연령의 제한을 안 두면 목회 지원자가 스스로 세상 직업을 경험한 후 선택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목회자라는 세상의 직업이 펼쳐지는 직장과 같고 그래서 먼저 입사하여 빨리 자리잡고 빨리 승진하는 것이 최고라는 착각에서 깨어나야만 한다.둘째로 대접받는 것을 너무 일찍부터 접해 온다는 것에 따른 부작용이다. 신학대학 입학생의 나이를 보면 대체로 20세 정도가 되며 신대원에 곧바로 들어가면 27세 정도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들은 학생 신분보다는 신진 목회자로서 교회에서 사역하고 있다. 그래서 이에 따른 부작용을 보면 대접받는 것을 너무 어린 나이부터 접해 온다는 것이다.실제 교회의 현실을 보면 목회자들은 스스로를 섬기는 자들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누구든지 자연스럽게 상석에 앉게 되고 대접을 받는 것이 솔직한 현실이다. 유교적 성향이 혼합된 목회자 분위기로 볼 수 있다.또한 그들이 심방하고 예배 중 설교 할 때에 얼마나 현실과 동떨어진 내용들을 외치고 있는가? 하나님의 말씀은 말씀 자체이지만 그것이 땅에 섬겨지기 위해서는 정확히 땅을 진단할 수 있는 경험적 눈이 필요한 것이다. 이렇게 자란 목회자들이 후에 담임 목회자가 된 다음 성도들을 어떻게 바라보면서 양육할까? 물론 마음은 섬기고 싶어도 이미 굳어진 뼈는 하루아침에 부러뜨리기는 어려운 것이다.이런 것을 해결할 수 있는 성경적 방법 중의 하나가 자비량 사역과 성도들의 사역화를 예로 들을 수 있다.목회자가 되고 싶은 꿈이 마음속에 가득 찬 젊은이라면 복잡하고도 다양한 사회, 영적으로 애환이 숨쉬고 있는 살아 있는 일터를 부분적이나마 충분히 경험한 후에 목회의 길을 걷겠다는 과감한 선택이 있는 목회 지원자가 있거나 그런 분위기가 되어져야 하며, 또한 그렇게 되기를 간곡히 권유하는 신앙의 선배들이 많아야 할 것이다.
3. 가정을 중요하게 여기는 목회자요즈음의 목회자 생활을 보면 성도들이 너무나 목회자의 사적인 가정 생활을 침해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목회자들은 통상 주 중에 휴일을 월요일로 택하고 있다. 그래서 월요일에는 잠시 목회의 일을 떠나 개인적인 일이나 가정적인 일을 도모하는데 보내고 있다. 하지만 이 시간도 목회자의 개발을 위해 쓰여져 가정을 위한 시간은 점점 없어져 간다.제발 이제는 성도들이 자기 가정을 아끼듯이 목회자의 가정을 아끼고 보호할 줄 아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목회자나 성도 모두 가정에 대한 사랑과 관심의 시각들이 서로 다르지도 않고 다를 수도 없는 것이다. 그들도 자녀들이 좋은 교육을 받기 원하며 정상적인 가정 생활을 하기 원한다. 성도들이 따스한 배려와 보호가 사랑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그러나 이에 대한 목회자의 책임은 전혀 없는 것일까?목회자라는 위치 이전에 한 가정의 가장이라는 사실을 명심하여야만 한다. 다시 말해 성도들에게 가정의 본도 보여 주어야 한다.어느 목회 세미나에서 발표한 내용을 보면 설문 대상 목회 자 중 37.5%가 이혼을 생각하고 있으며, 8.1%는 이혼을 심각히 고려하고 있다는 응답을 하였다. 이러한 충격적인 사실은 얼마나 목회자의 가정이 뒤틀려 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으로써 실로 한국 교회의 위기가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이유는 대부분의 목회자들이 교회의 일로 과중한 부담을 받고 있어 가정에 소홀하고 있기 때문이다.그러나 실제로 교회 일의 과중함은 솔직히 목회자의 욕심 때문도 상당수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오히려 그것을 성도들에게 나누어줌으로써 실제적인 동역의 교회도 되고 가정도 회복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아내와 자녀는 교회 일로 말미암은 희생양이 결코 아니다. 교회 일에 지나치게 매달리다 보니 자기 가정을 소홀해 지고, 그러다 보니 성도의 가정도 중요하게 보일리 만무하다. 전혀 덕스럽지 못한 일이다. 그렇게 되면 가정의 달에 강단에서 선포되는 가정 설교는 아무 의미가 없게 된다.이제는 목회자들이 교회와 사역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가정은 안중에도 없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가정을 소중히 여기고 가꾸어 그곳에 임하는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고, 또 기쁨을 누리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요구와 바람에 지대한 관심과 노력이 이루어져야만 할 것이다. 작은 천국인 가정의 대표적 모델을 스스로 성도들에게 보여준다는 집념이 절실히 필요한 때이다.
4. 헌금을 강요하지 않는 목회자성도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 가운데 하나가 있다. 헌금을 강요하는 목회자들은 정말로 짜증난다는 것이다. 올바른 신앙을 세워 주는 데 오히려 노력한다면 헌금은 강요하지 않아도 자연히 드리게 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어떤 목회자는 헌금도 말씀 중의 하나이기에 말씀으로 생각하여 성도들을 가르쳐야 한다는 논리를 갖고 설교 시간을 통하여 은근히 강조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우리의 관심은 늘 이럴 때마다 성경에서는 과연 어떻게 말씀하고 있는가 일 것이다.최근의 한국 교회들을 보아도 목회자 자신이 물질에 연연하지 않고 자유롭게 초월하는 목회자가 있는 교회는 의외로 말씀과 영력이 강해 성도들의 영적 상태들도 오히려 건강하다. 그래서 헌금 이야기나 헌금 봉투가 없이도 오히려 재정이 넘친다는 사실을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목회자는 물질의 빈곤이 마치 성도들의 물질관이 잘못되어 있는 줄로 착각하고 이에 대한 언급을 자주 하여 오히려 성도들의 심령만 더욱 곪거나 상처 나게 만들고 있다. 또한 솔직하게 말하여 볼 때 헌금을 강조하는 목회자는 순수하게 성도들이 하나님 앞에서의 물질 자체에 대한 인식을 바로 세우기 위함 때문이 아니라 빈번한 예배당 건축, 기도원 건축, 교회 묘지, 자동차 등 하나님 보시기에 가슴 아파 하는 것들에 쓰기 위해 강조한다고 과연 고백하지 않을 수 있을까?지금 교회를 보면 대부분의 경우 교회마다 수많은 헌금 봉투들로 장식되어 있다.그러나 과연 목회자가 헌금 봉투와 헌금에 대해 그렇게 관심과 강요를 기울이는 것만큼 성도들의 바른 직업관과 물질관에 의거해 살아가도록 하는 데 구체적인 제시를 끊임없이 해주는 목회자는 과연 얼마나 될까?헌금 자체보다 중요한 것은 이 물질이 어떻게 생겨났나 일 것이다. 이 사회의 문제는 한마디로 물질의 비정상적 흐름 때문에 발생한다고 볼 수 있다. 언론에 늘 오르내리는 비리의 뿌리는 함축하면 물질 문제이다. 살인도, 강도도, 공무원 부정도, 권력 비리도 모두 뒤에는 물질 때문이다. 교회의 지도자인 목회자가 이 문제를 바로 보지 않는 한, 이 욕심에서 자유로워지지 않는 한 교회의 생명력은 파괴되고 말 것이다.이제는 다양한 종류의 헌금 봉투, 헌금의 강요적 설교보다도 우선적이 되어야 할 것은 바른 성경적 물질관, 성경적 직업관을 성도들이 철저히 갖도록 다양하게 선포하여야 할 것이며, 이에 대해 끊임없이 애쓰는 목회자들이 많아져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적더라도 하나님의 방법에 의해 얻어진 물질을 하나님은 기뻐하시기 때문이다.
5. 고급 승용차를 거부하는 목회자도시 교회의 일부 목회자들은 농어촌 교회 목회자의 현실은 전혀 외면한 채 자기들만 일반 자동차도 아니고 고급 자동차나 외제 특급 자동차를 은근히 요구하기도 하며, 어떤 경우에는 아예 차종을 제시하여 강력히 요구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면서도 교회는 하나요, 농어촌 교회를 생각해야 한다고 하고는 그 일환으로 겨우 수만 원의 보조비를 보내는 것으로 할 일을 다했다고 만족하고 있다.물론 자동차를 능력에 버거운 사람이 구비하는 경우도 많지만 보다 분명한 것은 이 시대 상황으로 볼 때 자동차는 결코 사치품은 아니다. 따라서 일의 효율화를 위해 자동차의 구입은 형편이 된다면 당연하거나 자연스러울 수밖에 없다.그러나 문제는 목회자는 신분으로서 굳이 고급 승용차나 외제 자동차를 사거나 사기 위해 교회 앞에 요구해야만 하는 가이다. 사람은 동일하지만 그 신분에 따라서 그가 해야 하거나 외부로부터 요구받고 있는 수준들이 다르게 마련이다. 이러한 입장에서 볼 때 세상 사람들은 물론 그 교회 성도들로부터 설득력을 과연 받을 수 있을까? 그 상황에서 주일의 메시지가 성도들의 골수를 과연 쪼갤 수 있을까?교회가 외적으로 사랑의 손을 내민다는 것은 우리의 고통을 감수하고 스스로의 포기가 뒤따르지 않으면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 그렇지 않고서는 교묘한 거짓말에 해당될 분이다.목회자도 일반 성도들과 같은 문화적, 재정적 혜택을 받아야 한다고 말하는데, 나는 이 말에 대해 전적으로 찬성한다. 그러한 관점에서 볼 때 자동차도 아파트도 성도들이 좋은 것을 소유하고 있듯이 목회자도 좋은 것을 소유할 수 있다. 그러나 과연 목회자의 신분도 일반 성도와 같은 수준의 신분에 불과한 것일까? 만일 어떤 목회자가 그렇게만 요구하고 성도보다도 절제의 최고봉을 달리지 않는다면 주님의 종이고 영적 지도자라고 하면서도 목회직도 일반 성도가 갖고 있는 세상 직업 중 하나에 불과하다고 스스로 인정하는 것밖에 안된다.다해 말해 영적 지도자로 있으려면 두 가지를 다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지켜야 하며 이를 뛰어 넘을 수 있는 용기와 자질이 필요한 것이다. 아무리 설교를 잘해도 이런 자질이 없는 사람은 목회자가 되면 안되고 설사 되었더라도 포기해야만 한다.한편 교회에서 동역하는 소위 부목사에 해당하는 교역자들을 보면 사례비가 태부족한 경우가 많다. 그래서 자동차를 교회에서 제공해 주는 경우도 많은데 이제는 부목사들 층에 해당되는 목회자들에게 사례비를 현실화시켜야 한다. 왜냐하면 사역의 야이나 학력 등으로 비교해 볼 때 너무 적으며 따라서 물질의 시험을 쉽게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사례비를 올리는 대신 교회로부터는 일에 자동차의 혜택을 주지 말고 그들의 개인 소유를 위해 할부를 하든지 적금으로 하든지 스스로 구입할 수 있게 하는 것도 진정 성도들의 고충도 같이 나눌 수 있는 분위기가 될 것이다.아마 이렇게 된다면 최소한 하나님 말씀과는 관계도 없는 엉뚱한 문제로 괜히 교회에서 갈등을 일으키지는 않을 것이다.이제는 고급 승용차를 거부하고 자동차가 있어도 기사 없이 스스로 운전할 수 있는 목회자가 되어야 하는 시대가 다가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6. 예배당 건축 문제를 진지하게 보는 목회자
불신자들의 눈에 비치는 가장 큰 부정적인 요소들 가운데 하나는 아마도 예배당 건물일 것이다. 예배당을 너무 크게 건축하거나 너무 자주 헐고 새로이 짓기 때문이다. 물론 불신자들의 생각이 어떠냐에 우리가 그렇게 신경을 쓸 이유는 없다. 다만 하나님 앞에서 바른 자세이냐 아니냐를 진지하게 살펴보는 것만이 중요할 따름이다. 사실 예배당을 신축이나 증축해야 할 절박한 단계에 와 있는 교회가 적지 않게 있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에 모든 교회를 같은 문제 의식 속에서만 바라 봐야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교회가 예배당 건축 문제를 교회의 가장 큰 목표로 두고 있고 여기에 재정과 기도등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래서 이에 대해 불신자들은 물론 성도들조차도 심한 갈등 속에서 그냥 바라보고만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과연 건축 헌금은 반드시 해야 하며 또 그렇게 함으로써 받은 주님의 은혜는 무엇일까? 그리고 과연 그렇게 해서 건축한 교회는 준공 이후에 교회의 기본적 역할을 재정적 입장에서 충실히 감당하고 있을까?성경에서는 누누이 언급하지만 성전은 우리의 몸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시며, 또 하나님은 구약 시대의 성전과 법궤만이 아니고 어느 곳에서 계시고 어디에서나 예배를 받으실 수 있는 분이시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자녀들이 함께 모여 예배드릴 공간이 필요하기에 어떤 건물이 필수적으로 등장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교회의 머리는 바로 예수님이시다. 따라서 엄밀히 말해 교회는 예배당을 의미하는 것이다. 믿음의 공동체인 것이다. 교회는 예배당과는 다른 영역의 개념이다. 만일 교회당이 구약에 있는 성전의 개념이었다면 초대 교회 성도들은 왜 그렇게도 뜨거웠는데 교회당 짓는 것부터 초미의 관심을 두지 않았을까?나는 이 문제에 대해 이제는 목회자들이 고질적인 아집을 버리고 더 이상 신앙에 백해무익한 소모전을 벌이지 말기를 바란다. 제발 목회자들의 잘못된 생각에 성도들은 그들의 생각을 우둔하게 만들고 자유를 빼앗기지 않았으면 좋겠다. 예배당을 건축하는 출발과 과정 그리고 준공하기까지 펼쳐지는 무리한 추진으로 얼마나 많은 시험들이 전국 곳곳에서 속출하고 있는가? 얼마든지 예배 횟수를 늘려 예배를 드리면 되는 것을 굳이 어려움을 무릅쓰고 건축을 시작하게 된다.가슴을 열고 하나님 앞에 고백할 때 과연 예배당의 건축이 절대 절명의 필요성 때문일까? 아니면 목회자 자신이 상대적인 경쟁으로부터 출발한 자신의 욕심 때문일까?앞으로 큰 문제이지만 신학교 졸업생은 쏟아져 나오며, 그들은 당연히 교회를 개척하고 싶을 것이고, 또 도시에 집중할 것이 분명하니 보통 문제가 아닐 수 없다. 평생 여럿이 비전문 분야를 서로 채우고 동역 하면서 같은 교회에서 목회 하겠다는 목회자도 많이 나와야만 되는데 그러고 싶은 목회자는 아마도 없는 것 같다. 단 10명의 성도라도 개척하고 싶을 것이다. 그래서 개척 교회는 언젠가는 예배당을 건축할 것인데 개신교 신자 수는 이미 마이너스 성장에 접어들었으니 누가 이 문제를 풀 수 있을까?
다른 이야기이지만 신학생을 많이 배출하는 것만이 과연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볼 수 있는지 모르겠다.먼 훗날 후세들에게 관광 상품을 만들 계획이 아닌데도 작은 교회는 건축을 위해, 큰 교회는 건축 후 얼마 안 있어 재건축을 위해 총력을 기울여 온 나라의 교회가 이 문제로 시달리고 있으니 제한된 예산으로 언제 주님의 지상 명령 성취와 하나님의 질서 회복 및 사랑의 실천을 감당 할 수 있을까 요원하기만 하다.이러다가 예수님이 오시면 목회자들은 무어라고 대답할까? 우리 나라에도 몇 군데 있지만 콘센트 건물로 예배당을 건축한 후에는 모든 예산을 외부나 교육에 집중적으로 지출하고 있는 교회가 있다. 얼마나 신선하고 생명력이 있는 교회인가? 목회자의 생각 여하에 따라 이 문제는 쉽게 해결될 수도 있고 은혜로울 수도 있다. 진정 비교와 경쟁이 뒤범벅된 욕심과 아집의 굴레를 벗어나 목회를 하는 새시대의 훌륭한 신선한 목회자들이 많이 있기를 기대할 뿐이다.
7. 외국 박사 학위에 민감하지 않는 목회자
언제부터인가 교회에서 담임 목회자를 청빙할 때 보면 당회나 청빙 위원회에서는 이력서나 목회자의 학력에 외국 학위자를 선호하기 시작하더니만 이제는 아예 그런 사람을 요구하는 사례가 서서히 일반화되고 있다. 아마 이 문제도 우리 나라의 오랜 문화가 되어 버린 학벌 위주가 교계에까지 만연되어 있고 성도들도 몸에 배어 그 관념을 버리지 못하는데 있다고 볼 수 있다.신학을 공부하고 목사가 된 사람들이 하는 일은 대부분 교회의 사역들이며, 그 이외에 일부 신학교의 교수로서 있거나 특수 사역을 하는 경우가 있을 뿐이다. 학문성이라든가 특수 전문성에 있는 자들은 학위를 취득하기까지의 연구 내용이 상당한 도움이 되며 끊임없이 계속 전문적인 연구들을 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학위를 위해서라기 보다 연구를 하다 보니 학위를 받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일반 교회를 사역하는 목회자들을 보면 어떨까? 어떻게 하든지 기회만 주어지면 외국, 그것도 미국에 있는 정규, 비정규 학위 과정에 등록해 보려고 교회 재정을 동원하며 무던히도 시도하고 있다. 어느 글에서 프린스턴 신학교의 30%가 그리고 웨스터민스터 신학교의 20%가 한국 유학생이란 내용을 보았다.자기의 의지보다 군중심리에 의해 선택하게 되며 안하면 주변 목회 사회에서 처지는 것 같은 인상을 받는 모양이다. 마치 목사라는 소중한 직분 한가지로서는 이미 퇴색된지 오래인 것처럼 인식하고 있다. 과연 그렇게 공부한 것이 일반 교회에서 얼마나 유용하게 쓰여지고 있을까? 내가 알기로는 교회는 학문 연구 기관도 아니라 실천 사역 분야이다. 그러기에 솔직히 말해 목사 직분 이외에 곁들어 써져 있는 목회학 박사라는 부분에는 그렇게 중요성이라든가 신뢰가 가지 않는지도 모른다.만일 어떤 목사가 교회와 성도들의 보다 성숙한 신앙 성장을 위하여 외국 박사 학위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면 생각을 바꾸어야 할 것이다. 그들을 위하여 그들이 몸담고 일하고 있는 삶의 현장과 그 특성이 구조적으로 어떻게 되어 있는지 체감할 수 있기 위해 보다 많이 그곳에 시간을 투자해 보아야 한다. 그 뿐만이 아니라 수많은 책들을 읽고 성도들에게 권하여 균형 잡힌 신앙 성숙을 도모하는데 시간을 투자해 보아야 할 것이다.성도들은 학력에 따라 목사를 따르고 안 따르고 하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 이미 그 시대는 지났다. 최근의 변화 현상 중의 하나가 가격 파괴라는 말이 있는데, 이에 더불어 학력 파괴, 학력 철폐라는 말이 있다. 다시 말해 신문에서도 될 수 있는 대로 특정인의 프로필에 학력을 쓰지 않는 분위기이며, 입사 원서 및 면접에 전혀 학력을 기재하지 않는 시대가 대기업부터 시작되었다.이제는 능력의 시대가 되었다. 그렇다면 목회자의 능력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성도에게 영적인 양식을 실제적이고도 모든 면에서 설득력과 균형 있게 공급해 주는 능력일 것이다. 이점을 목회자들은 알아야 할 때이다.
8. 교회 인쇄물에 이름 안 쓰는 목회자
교회에서 나오는 인쇄물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대부분 쓰여져 있지만 특히 주보나 달력 등에 쓰여져 있는 커다란 문자를 볼 수 있다. 바로 그 교회의 담임 목사 이름이다. 아울러 차례로 그보다 작은 글씨로 부목사, 장로, 권사, 여전도사, 교육 전도사, 지휘, 반주에 해당하는 사람의 이름들이 마치 하나의 계급이나 서열의 순서 인양 어느 교회나 거의 동일하게 쓰여져 있다. 교회가 반드시 지켜야 할 무슨 전통이나 규례인 것처럼 하고 있다.그러나 깊이 한 번 생각해 보자. 과연 현재와 같은 순서로 이름이 쓰여져 내려가는 것 등이 바람직한 모습일까? 최소한의 바람직한 믿음의 공동체로서 가기 위해서 권할 만한 것일까? 왜냐하면 사실 이것은 보잘 것 없는 것 중에 보잘 것 없는 고정관념일 뿐이기 때문이다.그래서 어느 뜻있는 목회자는 글씨 크기를 다른 이들과 동일하게 쓰거나 또는 다른 사람보다 늦게 나오게 하는 경우도 있다. 그런가 하면 ‘섬기는 사람들’이란 부제를 붙인다. 참 노력하고 애쓴 흔적이 있어서 존경스럽기도 하다.그러나 문제는 피상적인 조정 작업보다 근본적인 고정관념을 버려야 한다고 본다.교회 주보나 인쇄물에 담임 목사 이름 안 쓰면 정말 문제가 있는가? 그래도 그 이름만큼은 써야 하는가? 자신의 소중한 이름을 안 쓰는 입장으로 한 번 포기하여 보자. 그러면 교회를 새로운 시각으로, 진정한 주인을 예수님으로 더욱 인정하고 있다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9. 자질 있는 자만이 지원하는 목회자
어떤 일이건 그것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일정한 자격이 필수적인 요소로 등장한 세상이 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시대적으로 볼 때 선택적이 아니라 필수적으로 되어 버린지 이미 오래다. 항상 무자격자들이 모여 있는 곳에는 사고가 터지게 마련이다. 그런데 기독교가 바르게 성장하기 위해서는 목회자의 자질이 어떻냐에 따라 90% 이상 좌우된다고 본다. 그렇다면 과연 ‘자질’이라는 뜻은 무엇일까? 이것은 자격과는 근본적으로 그 뜻을 달리 한다. 자격이란 외형적이며, 형식적이라고 한다면 자질은 내면적이며, 정신적인 동시에 어떤 이념을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자격이 없어도 자질은 있을 수 있고, 자질은 없어도 자격은 화려히 가질 수 있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서 목회자가 되기 위한 외형적 자격은 기피할 수 없는 기본적인 요소이다. 만일 사회에서도 실력이 없어 선택의 최후 수단으로 목회의 세계를 두드리는 자는 이미 자격 단계에서부터 탈락자이다. 목회 세계는 훌륭한 세상적 학력을 소유한 자도 있지만 교회가 아니고서는 사회에서 이렇다 하게 설 수조차 없는 자도 수없이 있다. 어찌 보면 이러한 자격 부분은 일차적인 요건이다. 그래서 여기서는 말하고 싶지 않다. 요사이 너무도 난립하는 생각만 해도 가슴 아픈 신학교들로 인해 목회의 세계가 먹물로 물들어지고 있는데 그들이야말로 이러한 최소한의 자격을 스스로 기피하는 자들임에 틀림이 없다.그러나 훌륭한 자격, 여러 개의 신학 분야에 박사 학위를 가지고 세상적으로 화려하고도 최고의 자격을 가진 목회자라 할지라도 그가 자질 면에서도 동일한 수준을 가졌다고는 볼 수 없다. 왜냐하면 목회자의 세계는 자질을 무엇보다도 중요시 여기는 영역이기 때문이다.목회자가 될 수 있는 자질은 자신을 드러내고 싶은 영적 욕심이 없고, 하나님이 이 일을 원하신다는 확신과 소명감에 불타야 한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의 바른 관계는 물론 그리스도인으로부터 전적인 인정을 받는 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 뿐만 아니라 남다르게 다른 이에 대한 깊은 관심과 사랑이 솟아나고 구원의 메시지를 전해 주고 싶은 강렬한 욕구가 있어야 하며, 엘리트 의식이 있고 자기 주장이 성격적으로 강하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특히 열린 마음이 있어야 한다.그러나 무엇보다도 그가 이 목회 길을 가기 위해 얼마나 많이 하나님으로부터 경건한 인도함을 받았냐 하는 것이다. 분위기가 영적으로 갈등이 없고, 갑자기 은혜 받았다고, 중병이 갑자기 완쾌되었다고 할 때 선택하는 길이 결코 목회자의 길은 아니다.목회자도 성도와 같이 주의 일을 하는 동역자이면서 영적으로 지도자일 것이다. 지도자란 오랜 기간동안 지도자가 되기 위한 과정이 있어야 하고 그 과정을 통해 훈련, 고민, 반성 등으로 다져져야 하는 것이 기본이다. 예를 들면 과거의 경력이 부정적이면 현재 회개하고 깨끗이 정리했어도 대통령으로서는 부적절하듯이 과거부터 바람직한 자질과 과정을 거친 자만이 목회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회개해서 어제의 내가 전혀 아니라고 아무나 목회자가 되면 안된다.만일 현재 그런 자질이 없는 사람이 버젓이 목회의 길을 가고 있다면 포기해야 한다. 목회의 길은 포기해서는 안되는 것으로 착각하는 목회자가 있다. 주님의 일, 즉 부르심의 일은 목회의 일만이 아니고 우리가 하는 세상의 모든 일상적인 일도 그분이 선하게 하심으로 거룩한 주의 일이 되기 때문이다.이렇게 된다면 우리 나라의 목회자 수는 적정 선으로 줄어들게 될 것이고, 그들의 자부심과 기독교의 앞날은 밝게 될 것이다.
10. 전문 목회 영역을 개발하는 목회자
최근의 세상을 전문가 시대라고 한다. 과거 같이 깊이도 없고 조금만 알면 누구나 할 수 있는 분야는 거의 없어졌다. 구멍 가게도 그 분야의 전문가가 장사하면 잘된다.그래서 전문가를 가려내기 위한 차원에서 부득불 자격증 시대가 열리게 된 것이다. 더 나아가 이제는 기본이 자기 분야는 누구나 전문가가 되어야 하며 최소한 다른 분야에도 하나 이상은 전문가가 되어야 한다는 요구를 받기까지 되었다.교회의 교육 분야를 특히 살펴보자. 목회란 일종의 신앙 교육 분야이다. 그런데 이러한 큰 분야를 단순한 목회 분야로 취급하거나 담임 목회자는 말씀에만 신경 쓰고 나머지는 다른 교역자들이나 여전도사들이 성도들을 관리하는 조직으로 교회를 사역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목회가 앞에서도 말했듯이 두리 둥실한 것이 아니고 전문적이며 그 종류도 살펴보면 다양하다고 할 수 있다. 대부분의 목회자는 이 모든 것을 혼자 하려고 하거나 또 혼자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목회란 성도들과 함께 지내며 설교에만 신경 쓰면 되는 것으로 잘못 생각하고 있다. 과연 이렇게 많은 분야 중 자기의 능력 개발은 어느 분야에 주력하고 어느 것을 전문 분야로 삼을 것인가에 고민하는 목회자는 얼마나 될까?신학을 전공하는 시절부터 자기의 목표는 담임 목사가 아니라 한가지 이상은 완전한 전문가가 되기 위해 자기의 전문 영역을 평생 확보하고 개발해 나가야 한다.그리고 성도건 교역자건 간에 진정한 동역자의 개념에서 서로의 부족한 사역 분야를 채워서 주님의 뜻을 성취해야 할 것이다. 젊은 목회자들에게 이런 기대를 걸어 본다.
11. 축복 성회를 구별해서 개최하는 목회자
교회에서 가장 시험에 들고 상처를 입는 부분은 뭐니뭐니 해도 돈 문제다. 그런데 교회에 재정이 궁핍하면 반드시 나타나는 현상이 있는데 바로 축복 대성회이다. 약 4박 5일간 개최되는 이 부흥회에는 전문 부흥 강사가 오기도 하지만 담임 목사의 추천으로 다양한 강사들이 오게 된다.그런가 하면 강사들마다 반드시 부담을 갖고 있는 것이 있다. 헌금 액수가 많음이 부흥회 성공의 지표라는 부담이 있어 무리수를 놓게 되는 유치한 방법이 동원되게 된다.지금 와서 생각하면 부흥회를 통해서 얻는 것도 있지만 잃은 것이 더 많다. 그리고 그 얻은 것은 다른 기회로도 단 시간에 얼마든지 얻을 수 있는 것들이다. 거기에 참석하지 않는 사람은 교만하고 신앙적으로 유세떠는 자로만 매도하는 분위기이다.그렇다면 부흥회 자체에는 문제가 없을까? 부흥회 동기의 대부분은 건축 문제로 말미암은 재정의 해결책으로 일어나는 경우가 많이 있다. 하나님 앞에서 책망 받아 마땅할 일임을 목회자들이 자진해서 시행하고 있다. 그래서 복음과 진리에서 자연히 벗어나게 되고 헌금을 의식한 이야기를 초점으로 하게 된다.오히려 신앙 세미나를 하거나 강사도 목회자가 아닌 신실한 성도를 선택하면 성도들이 피부에 뜨겁게 와 닿으면서 같이 동감하는 내용들을 접할 수도 있다. 그리고 1박 2일이 되더라도 질적으로 풍성한 내용과 함께 좋은 강사가 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장기간 하는 것만이 능사는 결코 아니다.어느 목회자는 성도들을 다른 생각 못하게 교회에 시마다 때마다 자주 나오게 해야 한다고 하는데 이로 말미암은 가정의 파괴는 누가 변상할 것인가? 그리고 그렇게 교회에만 관여시키는 것을 강조한 나머지 세상과는 담을 쌓아 세상에 미치는 성도들의 영향력은 나약하게 되는 것을 목회자는 알고 있는지 모르겠다. 하나님은 교회 안에서의 미소와 교회적 열심만을 원하지 않으신다. 세상을 향해 주님의 능력의 손을 과감히 내밀기를 원하신다.올바른 부흥회, 즉 성도들의 신앙적 모순 발견, 궤도 수정, 이원론의 파괴, 교회 안팎의 조화, 능력 있는 신앙고백, 소명 의식 제공, 성령의 인도함 등을 위한 부흥회라면 마다할 이유가 전혀 없다. 교회의 담임 목회자들은 이제 축복 성회를 전혀 물질이 동기가 되어 계획하는 일이 추호도 없게 해야 할 것이다.부흥회라고 하면 생각나는 것은 추잡하고 부정적인 생각밖에 안 든다. 강사가 올라와 마이크를 잡고 웃기기도 하고 욕도 가끔 섞어 말하며, 헌금 강요 위해 장로 세워 무안 주고, 헌금 제안하여 성도를 공개적으로 일어나게 하여 맹세시키고, 담임 고사 자동차, 양복 이야기들이 등장하는 유치한 생각밖에 안 든다. 설교도 계산해 보면 20분 할 것을 2시간씩하고 있다. 하나님 앞에서 시간의 낭비요, 죄를 짓는 것이다. 너무나 유치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데 이것이 60년대 이야기가 아니고 지금도 버젓이 대도시 한복판에서 벌어지고 있다. 모든 부흥회의 선택은 담임 교역자에게 전적으로 달려 있다. 과연 그의 자질이 어떻냐에 따라 부흥회의 성격도 달라질 것이다. 이제는 강사든 개최시키든 간에 정말 진지한 입장에서 구별하여 실시하여야 할 때가 왔다.
12. 감투에 민감하지 않는 목회자한국 교회에 뿌리라고 할 수 있는 장로교가 100년만에 140여 개의 교단으로 나누어져 있고 대한 예수교 장로회 총회장만도 135명이나 있다는 것만 보더라도 교리의 문제보다는 감투 차원 때문임을 삼척동자도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 이외의 교파도 대동소이하다. 그래서 교단마다 신학교를 갖겠다고 야단이었고, 통제도 없어 무려 184개의 신학교가 난립되어 있는데 이것은 당연할 뿐이다. 참으로 유치하다 못해 신물이 날 정도이다. 그런 것만 생각하면 교회에 발을 들여놓고 싶지 않을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어떤 기독교 계통의 신문 하단에 어느 단체의 임원을 소개하는 광고가 실렸다. 30여 명의 목사들 사진과 함께 밑에는 나름대로의 감투들이 즐비하게 쓰여 있었다. 마치 서로 경쟁이라도 하는 것처럼 써 내려갔다. 그 내용을 다 읽지도 않을 뿐더러 존경스럽고 대단하다고 느끼기보다는 오히려 식상한 생각이 먼저 든다.그래서 노회장, 총회장을 뽑을 때 선거 운동과 이 과정에서 참아 입에 담을 수 없는 통탄한 사건들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선거 자금은 우리들이 땀흘려 일한 후 드렸던 헌금이요, 그들이 먹는 고급 요리는 우리들의 십일조였고, 그들이 뇌물로 선거권자 호주머니 속에 집어넣은 봉투는 우리들의 감사헌금이였다.목회, 그것도 교회 목회를 하는데 과연 그 많은 감투가 필요할까? 감투는 그에게 어떠한 심리적 이득을 가져다줄까? 감투가 사진 밑에 쓰여져 있지 않고 단순히 어느 교회 목사라는 소개만이 쓰여져 있어 목사 자체로서 신뢰를 주겠다는 그런 목회자가 더 훌륭하고 신선해 보이는 때가 되었다.
13. 성도 수의 많고 적음에 초조해 하지 않는 목회자
전도하는 것과 교회의 성도수 늘리는 것과는 분명히 구별되어야 한다. 그러나 전도하는 것처럼 보이는 데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성도 수 늘리기에 혈안이 되어 있는 교회를 볼 수가 있다.어느 통계를 보니 우리 나라의 복음 전파 율이 무려 90%를 넘어섰다고 한다. 그래서 교회에 오는 성도는 초신 자보다는 전입 성도가 대부분이다. 대부분 수평 이동에 그친다는 이야기가 된다. 어느 교회는 전도 특공대를 조직하여 전도에 노력을 경주하고 있지만 별 실효를 거두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고 보니 [제자입니까]의 저자인 후안 카를로스 목사가 자기의 지난날을 향해 고백한 말처럼 ‘나는 교회를 코카콜라 장사하듯이 목회 하였다’라는 말이 생각난다. 즉 세일즈맨처럼 전도하였다는 얘기이다.목회자로서 초신자를 원하고 그들을 처음부터 제대로 신앙 교육시키고 싶은 뜻은 없을까? 기성 성도보다 초신자를 월등히 기뻐할 수는 없을까? 더 나아가 신앙 좋은 기성 성도는 연약한 교회에 가서 그 교회를 일으키도록 오히려 격려하고 흩어지도록 권유할 용기는 없을까?실제로 어느 교회 목회자는 설교 도중 오래 출석한 성도를 향해 연약한 교회로 옮겨 그 교회를 섬기라고 권유한다고 한다. 하지만 어려운 일일 것이다. 왜냐하면 개교회주의 다시 말해 솔직한 표현으로 ‘교회 이기주의’가 만연되어 있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 있기 때문이다. 이제 웬만한 성도들은 교회가 교회다우면 그 교회의 목회자와 성도들을 인정한다. 그러나 어떤 이는 비록 인간적인 관계상 어쩔 수 없이 자기 교회에 다니더라도 새신자를 데려와 교회에 등록시키고 싶은 용기가 안 나는 성도들도 많을 것이다.왜냐하면 담임 목사의 설교가 부족하고, 행동이 부도덕하거나 모자라는 인격을 가지고 있어 그렇게 행동하고 있을 것이다. 성도들은 물론 이런 경우일지라도 쉬쉬함, 만족스러운 영적 희열과 성장은 맛보지 못한다. 그래서 목회자는 겉으로 웬만하면 눈치를 못 챈다. 다라서 목회자는 깊숙이 박혀 있는 원인을 해소하기 위해 노력을 해야지 표면적으로 전도의 열정이 부족하다고 성도들만 다그치는 것은 빨리 탈피하여야 할 것이다. 원인도 모른 채 우리 교회를 자랑하고 목회자를 자랑하지 않냐고 성도들에게 핀잔만 준다.인근 교회와 특정 교회와의 표면적 경쟁뿐만 아니라 성도 수를 기준으로한 성장 제일주의에 빠져 성도수의 적음에 초조해 하며 다급해 하는 목회자가 없는 시대가 되기를 기대해 본다.
14. 이성 문제에 연루되지 않는 목회자
어른들이 간혹 이성적인 문제로 성도들 사이에 화제로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보면 교회가 은혜스럽지 못함은 물론 자라나는 세대들에게 신앙 교육상 어려움을 많이 주게 된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목회자가 이성에 연루되어 있다는 소문을 접하면 예배 시간의 설교는 다 거짓말같이 들린다. 또 과거에 그랬다는 소문을 들어도 선입견 때문에 왠지 그 교회를 선택하기 싫거나 모르고 선택한 경우는 설교 시간이 은혜가 안되어 애써 잊으려는 노력을 하게 된다. 실제로 과거 우리 나라 대형 교회 목회자의 이성 문제 연루 사건은 그 사실 여부를 떠나 그 교회는 물론이고 우리 나라 성도 전체에게 미치는 영향이 실로 엄청나게 컷음을 다 알고 있다.또한 크고 작은 다른 교회에서도 이와 같은 일은 종종 일어나고 있다. 소위 연예가에서나 있을 수 있는 스캔들과 같은 사건이다. 여성과의 만남에 대해 감정의 차이가 목회자라도 있는 것은 아니다. 목회자라는 것은 그가 신학을 했느냐에 의한 표면적 문제일 뿐이다. 그래서 이성을 보거나 대하는 태도는 자신의 인격과 정신 자세에 따라 좌우되는 것이지 목회자다 아니다 에 따라 좌우되는 문제가 아니다.어떤 경우는 목회자의 유혹보다 여성도가 유혹해 오는 경우도 많을 것이다. 특히 여성도 들을 보면 목회자들을 인격과 신체적으로 완전무결한 사람으로 착각하는 것 같은 인상을 자주 받는다. 맹종을 하는 여성도도 의외로 많다. 그래서 사이비 집단이 가능할 수 있다고 본다. 뜻있는 목회자라면 목회자라는 신분이지만 갖고 있는 신체적 요소와 정신적 요소가 성도들과 전혀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을 분명히 인식할 필요가 있다.이 모든 이성 문제에 대한 확고한 방어 비결은 그 자체의 해결 방안을 찾기보다도 목회자 부부가 같이 바른 목회관을 갖고 있느냐에 달려 있을 것이다. 만일 사모와 차이를 갖고 있다면 가정의 분열은 시작될 것이며, 이것은 스캔들의 도화선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 그런가 하면 목회관이 같더라도 교회 일에만 매달리고 가정은 뒷전으로 하는 목회자들도 문제일 수밖에 없다. 교회 사역은 동역이지 홀로 하는 것이 아니다. 다분히 욕심과 명예심으로부터 출발되는 프로그램들은 줄이거나 없앤 다음 성도들과 동역 하도록 일을 나누고 나머지는 가정에 충실하는 아버지와 남편의 모습이 될 때, 여성의 문제는 목회자에게 관련 없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이성 문제를 비롯하여 다른 이야기도 부정적인 요소가 들리면 목회자의 입에서 나오는 설교는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 한다고 기도하고 외친다 할지라도 거짓과 위선의 목소리로 들릴 뿐임을 목회자들은 알아야만 한다.
15. 가운과 복장을 너무 의식하지 않는 목회자자세히 보니 교파마다 가운도 입는 종류가 다르지만 설령 입는 교파의 담임 목사를 보아도 처음 개척 당시는 안 입었다가 점점 교회 규모가 커짐에 따라 입는 경우를 볼 수 있다. 목에 거는 후드도 형형색색 여러 가지이다. 어떤 사람은 박사 가운에다 후드를 걸치고 강단에 선 목회자도 여럿 보았다. 과연 목회자에게 가운이 주는 의미는 무엇일까? 그리고 가운이 예배와 목회자 스스로에게 그렇게도 중요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만일 중요한 것이라면 왜 개척 교회 창립 예배 순간부터 입지를 않았을까?시대 최고의 예의를 보여주는 복장인 신사복을 정중히 입고 설교에 임하면 된다고 본다. 너무 교회가 가운에 파묻혀 있는 느낌을 받아 자칫 형식에 치우치는 인상을 짙게 받는다. 자고로 형식은 내용이 내용다워지기 위해 존재하는 최소 조건일 분이다. 내용과 형식은 동반자이되 내용이 형식을 위해 존재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따라서 지나친 형식은 바로 우리가 필요로 하는 내용의 무게를 삭감시키는 일만 할 뿐이다.흔히 교회에서 야외 예배나 야외 행사 할 때를 보면 산이나 바다 어느 곳을 가든지 반드시 신사복에 넥타이를 매고 오는 목회자를 볼 수 있다. 아무리 이해를 하려고 해도 이해하기가 어렵다. 야외 예배 설교 때문인지 신종 권위주의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날의 목적에 맞는 복장을 캐주얼 하게 갖추어 성도들과 흉금 없이 어울릴 수 있도록 하면 안될까? 만일 야외에서도 신사복을 굳이 입는다고 하면 이것이야말로 또다른 가운을 입는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다.예배 시간의 가운이든 야외에서의 신사복이든 복장 자체에 의미가 있는 것이 분명히 아니다. 지나친 형식이 신종 외식 주의임을 안다면 과감히 멀리하는 목회자들이 되어야 한다고 본다.
16. 당회장이라는 단어를 강조하지 않는 목회자목사, 장로, 권사, 집사라는 제도는 직분의 개념이지 계급의 개념, 다시 말해 사회에서 보직의 개념이 아님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런데도 교회의 실제 공간에서는 그렇게 되어 있지 않다는 것에 대해 부정할 사람은 아마도 없다. 그 이유는 담임 목사가 계급보다 직분의 개념이 팽배되어 있도록 분위기를 만드는데 인색하거나 무관심하기 때문이며 성도들도 이러한 인식을 안하거나 무관심하기 때문이다.그런 가운데 너무나도 세상 적인 느낌을 강하게 받는 단어가 있다. 바로 ‘당회장’이라는 단어이다. 교회가 세상이 있는 여러 종류의 조직 가운데 한 종류에 불과 한 것이 아니라 세상과는 비교의 성격이 전혀 아닌 차원 다른 영역임에도 불구하고 ‘당회장’이라는 단어를 받아들이는 느낌은 왠지 권위의 대표적 이미지로 부각된다.장로들로 이루어져 있는 당회는 교파의 성격상 존재할 수밖에 없는 것이기에 따라서 당회장이라는 직함도 당연히 존재하지만 왜 당회 시간 이외에도 당회장이라는 단어가 마치 그림자 같이 따라 다녀야만 할까? 출입문에도 ‘당회장실’, 부흥회나 기타 세미나 현수막에도 ‘OO교회 당회장 OOO 목사’, 기도 중에도 성도가 하건 부교역자가 하건 간에 ‘우리 당회장 OOO목사님의 건강을 위해’등과 같이 일종의 접두사로 자리잡았는지 모르겠다.어떤 유명한 사람이 말하기를 목사가 ‘주의 종’이라면 종이지 종님은 또 뭐냐고 하면서 특히 ‘당회종실’로 쓰는 자는 왜 없느냐고 꼬집은 적이 있었다.당회장이 필요하면 그 단어는 당회를 열 때 필요한 직함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무엇보다도 안수 받은 목사의 직분이 더 숭고하게 느껴져야 되는 것이 아닐까? 또 성도들도 그렇게 호칭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더 무서운 것은 목회자가 그것을 피부로 실감나게 느껴 성도나 교회 안에 권유하여서 계급 의식이 철저히 배제 되도록 노력한다면 순식간에 없어질 수 있는데 전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다. 현존하는 교회의 권위적, 계급적 모습의 철폐를 위해 전혀 노력을 안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17. 하나님의 뜻이라고 함부로 말하지 않는 목회자지금까지 신앙 생활을 하면서 모호하지만 그렇다고 해결할 수도 없는 말이 하나 있는데 다름 아닌 ‘하나님의 뜻’이라는 문장이다. 아마도 신앙 생활을 바로 해 보려고 애쓰는 성도들이라면 이 점이 가장 민감한 요소일 것임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성도의 생활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을 걸어가는 삶이 되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그러나 문제는 분별하고 찾아야만 할 하나님의 뜻을 쉽게 찾을 수 없다는데 있다.교회의 모습을 보면 목회자는 설교 도중이나 여러 기회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이다’라는 언급을 자주 하게 된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느끼며 생각이 다른데 홀로 밀어붙이기씩 추진을 하는 경우가 많다. 어떤 것을 할 때마다 ‘하나님의 뜻이다’고 하는 접두사를 붙인다. 그리고 성도들은 믿음 없는 자라고 무시해 버리고 더 나아가 방해 자라고 하면서 자기의 뜻을 펼친다. 성도들이 기도도 안하고 무관심하며 세상 적인 방법으로 일색하고 있다면 몰라도 그들도 나름대로 최선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뜻을 찾으려고 하는데도 그렇다. 그래서 평강과 희락이 넘쳐야 할 예배는 은혜스러운 것 같이 통성기도하며 잘 드렸어도 성도에게서 그런 얼굴빛은 찾아볼 수가 없다.과연 목회자가 말하거나 결정한 것은 무조건 하나님의 뜻일까? 당연히 아닌 경우도 많다. 따라서 너무 자주 하나님의 뜻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으면 좋겠다.‘하나님의 뜻이다’라는 말은 너무나 가볍게 쓸 수 없는 단어이다. 좀더 진지하게 말해야 할 부분이다. 목회자 자신의 뜻이나 더 나아가 개인적 욕심을 위해 사용되어서는 더욱 안될 신앙 생활에서의 가장 결정적이며, 핵심적인 단어이기 때문이다.
18. 교회를 갑자기 떠나지 않는 목회자(Ⅰ)교회 생활을 하다 보면 갑작스럽게 놀라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 중에서도 오늘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진지하게 선포하며 외쳤던 강단의 목사님이 다음 주일 교회에 나가 보니 다른 교회로 주중에 갑자기 갔다는 말을 들으면 이만 저만 놀라는 것이 아니다. 목사뿐만 아니라 강도사나 전도사들은 더욱 그런 모습을 많이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저들은 떠날 때 왜 온 교인들의 석별의 정을 나누거나 광고 시간에 인사 한 번 하지 못할까? 그가 갈 새로운 부임지에서 목회 활동을 충실히 감당하도록 왜 온 성도들과 합심하여 기도라도 드린 후 떠나지는 못할까? 교회는 떠나도 교회라는 의미는 전 우주적인 한 교회의 의미라는 것을 의식하면서 왜 같이 악수하며 떠날 수는 없을까?답은 간단하다. 교회와 성도들 앞에 떳떳하지 못한 일이 생겼기 때문이거나 담임 고사를 비롯한 목회자들 사이나 성도와의 관계에서 갈등이 빚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몰래 떠나는 편이 오히려 속편하고 좋은 방법이라 생각되어 성도들이 없는 평일에 갑자기 이임한다.그렇게 떠났던 목회자들도 언젠가는 담임 목사가 되면 오히려 강단에서는 성도들이 교회를 옮기는 경우를 향해 온 성도들 앞에서 그러면 못쓴다는 식으로 비난하곤 한다. 어떤 경우는 이사간 성도인데도 그러는 경우가 있다. 어찌보면 성도들의 교회 옮기는 동기가 오히려 목회자들 보다 더 순수할 때가 많다.부목회자들은 포부를 크게 세운다. 언제라도 현재 사역하고 있는 교회를 떠날 수가 있으며 언젠가는 담임 목사가 되겠다는 계획을 세워 놓고 있다. 개척 교회라는 중대한 목적과 의의 때문에 개척 교회를 설립하여 담임 목사가 되겠다는 것도 있지만 누구한테 싫은 소리 안 듣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으며 간섭하고 눈치 주는 사람 없어 담임 목사가 빨리 되어야 겠다는 생각이 지배적이다. 그래서 그 순간까지 교육과 경험보다는 이리 저리 옮기는데 이것을 그들은 하나님의 뜻 가운데 인도하심으로 말한다. 사실은 목회자간의 갈등과 다툼, 못마땅함, 자기의 이기적 계획 등이 원이 원인이 되어 움직인 경우도 많으면서도 겉으로는 그렇게 말한다.
19. 교회를 갑자기 떠나지 않는 목회자(Ⅱ)
그렇다면 과연 목회자들은 교회를 그렇게 전격적으로 떠나도 될까? 그들은 현재의 교회의 부임할 때 쉽지 않게 결정했을 것이다. 사역 도중 여러 가지 사정으로 떠날 수는 있다. 그것 자체를 부인하면 그것은 잘못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렇게 떠나는 사람들의 생각이 교회도 하나의 직장이나 세상과 전혀 다름없는 일터로 착각하고 있는 것 같기 때문이다. 아니 그러한 생각은 안할는지 몰라도 결과가 그렇게 보임은 부인할 수 없다.세상에 있는 여러 직장에서 사원을 모집할 때 첫째로 거부 반응을 받는 자는 직장을 여러 번 옮겼거나 한 직장에서의 근무 기간이 짧았던 사람들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어느 곳에 가든지 만족하지 못하며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동료들과 융화가 어렵고 협력이 어려운 사람이다. 사람 있는 곳은 어느 곳이나 동일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다. 협력과 융화를 하려면 이해와 포용은 물론 자기 손해가 동반될 수밖에 없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목회자들도 더욱 그러한 자세로 임해야 한다고 본다. 특히 젊은 목회자들은 더욱 그렇다. 여러 성도들, 목회자들과 더불어 사역을 감당하는데 있어서 갈등적인 사건이 일어날 수도 있다. 물론 목회자들이니 그러한 갈등이 일어나지 않으면 좋겠지만 만일 일어난다면 포용하고 참아야 한다. 돌출구가 결코 교회를 옮기는 것이 되어서는 안된다.어느 중형 교회의 담임 목사는 그분이 개척한 후 그 교회에서 십여 년 간 계속 헌신적인 사역을 통해 교회가 급성장 했으나 또 다른 목적으로 이임하셨다. 그러나 그 목회자는 그저 말없이 떠난 것이 아니었다. 그는 현재의 담임 목사로서 자기가 갖고 있는 모든 특권을 포기하면서까지 사역의 어려움이 기다리고 있는 새로운 교회로 부임하였던 것이다. 온 성도들은 그 목사님을 또 다른 사역 지에 파송한다는 의미와 자세로 임했고 진지한 분위기에서 인간적인 정을 못내 아쉬워하면서 이임 예배를 드렸다. 이 얼마나 신선하면서도 우리 나라 교회의 하나의 모델이 된 모습이었는가? 우리 나라 교회의 목회자의 이임 관례와 이에 대해 목회자 심층부에서 벌어지거나 갖고 있는 현실적인 인식에 이제 목회자 스스로가 해결해야만 한다.
20. 성도들의 심방을 직접 하는 목회자
목회자가 개척 초기에는 온 시간을 다 내어 성도들을 심방하고 관심을 기울였지만 성도 수가 늘어나고, 예배당도 건축하고, 감투에도 신경 쓰고 함에 따라 진작 신경 쓰고 관심을 기울여야 할 성도들은 뒷전이 되는 경우가 많다.그래서 부목 회자를 청빈하고 여전 도사를 세우는 일을 서두르게 된다. 어찌 보면 이것은 떠맡기씩 모습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목회자가 생각하는 우선 순위 중에서 성도들의 관련 사를 가장 우선으로 둔다면 훨씬 성도들을 만나고 교제할 수 있는 공간과 시간은 많아질 수밖에 없다.목회자의 언어는 ‘목양’이라는 개념을 내포하는 말이며, 목양이라는 뜻은 언제나 성도들과 함께 피부를 맞대고 있어야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면서도 우선되어야 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목숨이 다 할 때까지 변치 말아야 한다는 말이다. 교회의 규모가 점점 커져 교구를 나누게 되면 각 교구의 심방과 목양을 부교역자에게 맡길 것이 아니라 그 중 한 교구는 아무리 다른 일로 분주하더라도 직접 담임 목사가 계속 책임을 계속 져야 한다. 그리고 성도들의 형평성을 생각하여 6개월이나 1년에 한 번씩 교구를 차례로 돌아가면서 맡아야 한다. 그러면서 전체를 목양 하는 것이 담임 목사의 의무와 길이라고 생각된다.유능한 교회 매니저가 유능한 목회자일까? 교회는 경영의 합리화를 위한 조직이요, 목회자는 그 조직의 관리자가 될 수는 없다.이것은 중고등부, 대학부도 마찬가지이다. 교회 각 부서의 부장은 행정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부서 학생들의 신앙 교육을 일선에서 직접하면서도 다른 교사와는 달리 부장으로서의 기타 행정적인 일도 동시에 감당해야 한다. 그러나 이런 경우는 쉽게 발견하기 어렵다.또한 담임 목사의 심방은 좀 더 새로워져야 한다. 통상 심방을 할 경우에는 직장 생활을 하고 있는 남성도들은 참여하기 힘들기 때문에 새로운 모색을 할 필요가 있다. 이 시대를 정보 통신 시대라고 한다. 성도들의 직장에 잠시라고 평일을 기해 전화 심방을 할 수도 있다. 이것은 집에 오는 것과는 또다른 영적 의미를 남성도들에게 부여해 줄 것이다. 지치고 힘들어 찌들려져 있는 성도들, 분주하기 그지없는 성도들, 예배 후 악수 한 번으로 고작 인사 나누었던 성도들이다. 여러 계층의 성도들이 느끼는 감정은 서로 다르겠지만 공통적인 것은 감사하고 영적인 힘을 공급받는 것이다. 이것은 곧바로 직장에 하나님의 질서를 회복시키는데 유익한 영적 파워도 작용할 수 있음을 또한 부인할 수 없다.개척 교회 시절을 뒤로하고 교회 밖의 일이 중요한 줄 알거나 또는 그 일이 좋아 성도들을 만날 시간 없다고 부교역자들에게나 맡겨 버린다면 세상의 회사 조직체와 별로 다를 바가 없다. 정작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성도의 목양을 뒷전으로 두지 않는 목회자들이 많기를 바란다.
21. 농어촌 교회나 선교사를 확실히 책임 지원하는 목회자
이제는 선교의 중요성을 모르는 성도는 없다. 성도의 입에서 선교라는 단어를 안쓰면 마치 신앙이 없거나 열등적인 신앙인이라는 느낌을 받을 정도로 되어버린 지 이미 오래다. 그 만큼 선교의 집념은 우리 나라 성도들 가슴에 강하게 자리잡혔다.그러나 이 기회에 말하고 싶은 것은 성도들이 기도와 헌금에는 무척 열심이고, 선교와 구제라는 단어에는 애착을 갖는 반면 자신의 일터 위에서는 진지한 모습을 갖지 못하며, 일터의 삶, 가정의 일들을 예배로 승화시키지 못하고 있는 변질된 모습을 안고 있음 또한 사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선교보다는 우리가 처해 있는 곳도 땅끝이라고 하면서 신앙적 변화 노력에 신경을 쓰거나 강조하면 열등한 것으로 자리매김 함을 볼 수 있다. 이것은 선교를 지원하거나 관심을 둔 자들이 한 번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일이다.농어촌 교회를 개척하여 사역하는 목회자들이 무엇보다도 훌륭한 것은 현재의 것을 포기할 수 있다는 용기의 믿음을 소유했기 때문이다. 우리의 본능적 문화적 욕구, 자녀 교육에 대한 상대적 빈곤, 정보욕의 뒤짐 등 여러 가지 어려운 점이 있으나 스스로 포기할 수 있는 용기는 존경받아야 마땅하다. 사실 도시교회의 목회자들은 성도수가 증가하는 배경에는 농어촌 교회가 뿌리내려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리라 믿는다.그래서 교회에서는 적절한 재정을 떼어 내 선교사를 후원하거나 선교사를 파송하곤 한다. 그런가 하면 농어촌 교회에 재정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다. 참으로 협력하며 동역 하는 아름다운 모습이다.그러나 최소한 지원을 하려면 책임적인 지원을 하여야 할 것이다. 도시 교회의 주보를 보면 후원하는 교회는 많고, 후원하는 선교사들도 많아 교회 전체로 보면 후원 액수는 상당할지 몰라도 받는 입장에서 개인적으로 보면 얼 마되지 않는 경우를 많이 볼 수 있다. 적은 재정이면서 한사람밖에 후원하지 못하는 교회라면 할 수 없으나 재정이 있다면 여러 곳으로 나누어 후원하기보다는 선교사든 농어촌 교회든 한곳에 집중적이고도 책임적인 후원을 지속적으로 하여 장소는 다르나 같은 교회라는 실제적인 인식을 세워 주어야 한다.어찌 보면 농어촌 교회는 후원 받아야 할 권리가 있고 도시 교회는 후원해야 할 의무가 있다. 주는 측이나 받는 측이 모두 기가 죽거나 으슥해 할 필요가 전혀 없다. 모두다 당당해야만 할 입장이다. 그 중에서도 농어촌 교회 목회자는 고개 숙일 필요가 전혀 없다.사실 집중적으로 하면 위험할 수 있어 여러 기관에서 조금씩 하여 한 곳을 지원해야 한다는 말도 있으나 이렇게 되면 다른 기관도 내가 후원하는 곧을 하고 있다는 생각 때문에 성의가 줄어들고 사무적이거나 때로는 안하는 경우가 생겨 위험할 수가 있다.이러한 사역을 조정하고 정리해 줄 사람은 바로 목회자일 것이다. 농어촌 교회나 선 교지의 후원은 적더라도 확실한 보장성 후원을 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같이 이루고 교회의 머리는 예수임 한 분이라 동일하다는 증거를 보여주기 바랄 뿐이다.
22. 대접이나 선물을 공개적으로 교육시키는 목회자(Ⅰ)1995년 3월 20일자 조선 일보 사회면에는 ‘촌지 없는 학교’ 신교육 선언이라는 제목의 큰 기사가 실렸다. 서울 시내 어느 중고등학교에서 공식적으로 선언한 것이다. 나는 이것을 이야기하기 전에 이런 기사가 신문에 나온다는 자체가 참으로 불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교사들이 스스로 거부할 수 있는 용기 즉 그런 자질을 가졌으면 되는 것이지 도대체 공개 선언까지 해야 할 항목이었느냐는 것이다. 읽으면서도 아마 학부모들은 또다른 교묘한 방법을 동원하거나 상품권 등으로 자녀를 위해 선물 공세를 치열하게 할 것이 분명하겠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결코 틀린 예측이 아닐 것이다.그런데 교회에서도 이와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추석과 설날이 되면 목회자의 가정은 푸짐한 선물로 대문이 바삐 열려지고 있는가 하면 때로는 심방 오시면 성도들이 봉투를 건네는 경우도 볼 수 있다. 물론 이것은 학교 교육의 현장과는 달라서 촌지나 뇌물성의 개념은 아닐 것이다. 그저 감사하고 은혜를 주심에 대한 표현일 것이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목회자들의 사례비가 부족한 입장에서 보면 참으로 좋은 일임에는 틀림이 없다. 하지만 이렇게 좋은 점만 있을까?나는 대학에 있어서 그런지 촌지 받을 일이 없다. 그러나 5월의 스승의 날이 다가 오면 어떤 학생은 꽃 한 송이를, 어떤 이는 속내의를 한 벌주곤 한다. 우리 교회의 여자 중학교 교사는 30가지 이상을 받았다고 한다. 사실 받으면 기분이 좋다는 것을 솔직히 고백한다. 그러나 문제는 다른데 있다. 다음 해에는 스승의 날에 무슨 선물이 들어올까, 작년에는 누가 왔는데 올해에는 또 올까 하는 생각이 들곤 하였다. 그래서 들어오면 본전이었고 안 들어오면 마음에 착잡하고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왠지 서운한 경우도 있었다. 선물이라는 것 그것도 내의 하나가 이렇게 나의 마음을 자유롭게 만들지 못하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다.그런데 이러한 것은 나만의 생각에 그치는 일일까? 만일 그렇다면 나의 인격이 모자람을 증거 하는 순간일 것이다.
23. 대접이나 선물을 공개적으로 교육시키는 목회자(Ⅱ)
선물이라는 것은 참으로 묘한 것 같다. 처음에는 고맙고 순수함이 존재하지만 그 다음부터는 의례적이고 타성적인 생각으로 물들어져 있는 우리의 모습에 그저 놀랄 뿐이다. 과연 이러한 감정을 이겨낼 수 있을까? 물론 있을 수는 있겠으나 그것은 쉽게 되는 것이 아니다.목회자들이 선물을 받으면 성도들의 관심과 사랑에 대한 균형이 파괴된다. 그리고 선물의 규모에 따라 그 사람의 정신적인 노예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만 한다. 뿐만 아니라 그 성도들 위해 특별히 기도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의 문제로 떠들고 있는 기복의 출발점이 되는 것이다.그러다가 대접이 끊기면 뭔가 오해가 있나 하는 이상한 느낌도 들 수 있다. 목회자가 대접과 선물을 성도들로부터 수시로 받는 것을 성경적으로는 어떻게 바라봐야만 할까? 그렇다면 목회자와 성도들의 자세는 어떠해야 할까?무엇보다도 나는 목회자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 성도들에게 예배 시간에 공개적으로 목회자에게 대접하거나 선물을 주려면 대신 그것을 직접 이웃 성도나 같은 구역, 같은 교구 성도들에게 사랑의 표시를 하라고 강력히 권면해 주기를 바란다. 사실 성도들의 모습을 보면 매년 목회자 가정에는 선물하고 봉투를 보내도 이웃 성도에게는 관심조차 없거나 있어 봐야 얼마 안되는 것이 솔직한 현실이다.그런 부장욕의 하나로 목회자 가정의 자녀들이 남에게 대접하는 일에 비교적 소홀하다는 이야기를 목회자 자신의 자녀를 비롯하여 여러 곳에서 들은 바가 있다. 그래서 뜻있는 목회자라면 바로 이점을 교훈 하여 주어야 하리라 본다. 물론 받은 것을 또 다른 이에게 보내는 등 교통 정리 잘하는 목회자도 있다.우리 인간의 본성은 추잡함이요, 유혹의 성질을 많이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이것을 없애 버릴 수 있는 자기와의 싸움과 관리를 끊임없이 해야 한다. 자주 대접을 받고, 때마다 선물을 받는 것이 지속될 때 자신도 모르게 이미 버릴 수 없는 습관과 타성, 편애와 더 큰 기대로 굳어진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것을 막아 자신을 청결하게 유지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거부하는 것은 물론 공개적인 교육을 시킬 수 있는 용기가 요구된다. 이것이 범인과는 다르다고 자타가 말하는 성직자와 목회자의 길이라고 볼 수 있다.
24. 목회직을 포기할 수도 있는 목회자(Ⅰ)
모든 신학교의 졸업생들은 머지 않아 이루고 싶은 단독 목회 신드롬에 빠져 성공하고 싶은 것이 대체적인 꿈이다. 하지만 줄어드는 성도에 목회자는 많아질 때 여기에는 자연도태라든가 치열하고도 치졸한 교회 존립 방법들이 생기게 마련일 것이다. 신학교 졸업생들은 일정 기간동안 부목회자라는 신분으로 사역하다가 적절한 기회가 오면 대부분이 개척 교회를 창립하여 담임 목회자를 하고 있다. 그래서 영세한 많은 교회들이 세워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과거와 같이 곳곳에 교회의 세워짐이 우리 믿음의 식구들의 기쁨이요, 희망이라는 감정은 사라진 것 같다. 이렇게 개교회 주의는 개신교의 전형적인 특징인 이상 별도의 혁명적인 조치가 없고서는 앞으로도 교회는 늘어나면 늘어났지 줄어들거나 교회 통합은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어떤 비전과 소명 하에서든지 과연 목회자의 길을 걷겠다고 다짐하고 목회의 길을 걷고 있는 도중에 목회를 하고 있는 현 상태가 본인의 생각에 ‘이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 같다’라는 확신이 들 때에는 과감하게 세상의 한 직업인으로 바꿀 수는 없는 위치가 목회자의 길일까?왜냐하면 자격은 있어도 자질이 없는 목회자들이 많은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자질이란 영성과 인격적인 것은 물론 자기중심적이 아니고 목회적 기능에 적합한 요소들을 말한다. 아울러 메신저로서의 능력을 갖추지 못한 사람들이 매주 강단을 점유하고 있는 현실도 벌어지고 있다.
25. 목회직을 포기할 수도 있는 목회자(Ⅱ)
교회에서 성도들을 보면 때로는 목회자답지 않은 면을 많이 면을 많이 접해 갈등과 찌푸림 속에 있어도 목회자와의 인간적인 관계 때문에 그 말을 못하고 있는 경우가 많이 있다. 자질이 없는 목회자들이 목회의 길을 걷고 강단에 서서 외침으로써 성도들이 흠뻑 받아야 할 영적 희열을 느끼지 못하게 하는 것은 어찌 보면 하나님 앞에서 큰 범죄 행위일 수도 있다. 목회자는 하고 싶다고 아무나 하면 안 되는 영역이다.하지만 어떠한 동기와 과정을 통해 하나님의 부르심과 인도하심으로 현재와 같은 목회자가 되었다고 해도 그가 처해 있는 상황이 달라지면 고집스럽게도 그 길을 걸어가고 그것만이 하나님의 뜻과 방법이라고 하는 생각을 버리고 과감히 세상의 직업으로 전환하면 결코 안되는 것일까?목회자는 영원한 목회자라는 의식에 사로잡혀 있다. 즉 하나님이 선택했다는 영적 우월감에 사로잡혀 있다. 이러한 의식이 바로 기독교의 병폐요, 세상을 썩게 만드는 이원론의 의식인 것이다.세상적 직업이든 목회직이든 그가 어떤 자세로 임하느냐에 따라 그 자리와 그 직이 성스럽기도 하고 부정하기도 한 것이지 직업과 일 자체에 따라 달라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하나님의 나라 건설과 질서의 회복을 위해 필요한 여러 가지 영역이 있는 데 그 중의 하나가 바로 목회직일 뿐인 것이며 이 직을 수행할 수 있는 사람, 교회를 섬길 수 잇는 사람을 하나님이 부르셨을 뿐이다.다시 말해 거룩한 수준은 그가 맡은 일을 임하는 자세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지 일과 직업과 사역의 성격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결코 아니다. 목회직도 세상적 방법으로 하면 세상적이요, 세상 직업도 성경적으로 하면 성경적인 것이다.만일 성경적 직업관에 의거한 삶을 영위하는 세상적 직업인이라면 자기 욕심에 의해 교회를 경쟁적으로 운영하는 목회자보다 훨씬 거룩하다는 뜻이 된다. 그래서 만일 목회자 자신에 대한 냉정한 판단에 비추어 볼 때 자신이 목회자로서 보다 적절하지 못하다고 생각될 때에는 그 자리에 연연하지 말고 사역지를 바꾸어 또다른 거룩한 영역인 세상적 직업 전선에서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해야 할 것이다.세상의 직업 가운데서도 일하면서 사역하다가 목회직으로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아 바꿀 수 있듯이 그 반대로 목회직에서 세상의 직업 현장으로 인도함을 받을 수도 있는 것이다.
26. 목회자끼리 교회내에서 화합할 수 있는 목회자(Ⅰ)요즈음은 규모가 큰 교회는 물론이고 일반적인 교회를 봐도 목회자의 수가 교육 전도사, 여전도사를 포함하면 제법된다. 마치 대학의 한 학과에 있는 교수 정도의 숫자이다. 그러나 한시도 목회자의 분위기가 화평하지는 않은 것 같다. 목회자끼리 파가 나누이는가 하면 서로 공격적이면서 더 나아가 자기편이 되도록 치밀한 성도 설득전을 치르는 경우도 있다. 그러면서 자기 차례가 되면 어쩔 수 없이 설교를 위해 강단에는 올라간다. 미세하게는 설교 경쟁, 부서간의 이해타산적 갈등, 성도 편애, 여기에 한술 더 떠 사모들의 미묘한 서열 갈등까지 곁들이는 보이고 싶지 않은 일들이 벌어지곤 한다. 그러면서도 자신들은 전혀 신앙과 인격적으로 잘못이 없다고 느끼고 있다. 마치 대학교수들처럼 나는 인격적인 사람이라고만 한다.물론 한 조직 내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을 보면 가까이 지내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덜 가까이 지내는 사람들도 생길 수밖에 없다. 이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이런 것 때문에 갈등이 생겨 급기야 갈라지는 것은 자연적인 현상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욕심 때문임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그렇다면 왜 갈등이 생기고 급기야는 화합이 이루어질 수 없는 상태까지 될까?
27. 목회자끼리 교회내에서 화합할 수 있는 목회자(Ⅱ)
화합은 어려운 것이지만 어떻게 보면 정말로 쉬운 것 중에 쉬울 수도 있다. 목회자들의 성도들과 교회를 향한 의식과 이 시대를 바라보는 시대정신, 세상을 바라보는 인식의 틀인 세계관, 그리고 이것들이 종합적으로 빚어져 생기는 교회관과 목회관이 목회자들 사이에 점점 근접된다면 갈등은 생길 수도 없고 생겨지지도 않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것이 쉽게 되겠는가?목회자들도 고민하지 않으면 답들이 제각각 이며 생각도 제각각 이어서 걸어가는 길도 제각각인 것이다. 그러다 보니 사소한 일을 갖고도 인식의 차이가 생기고 거기에 유치스런 인격적인 면까지 섞여 화합이 이루어질 수 없는 경우가 생기게 되는 것이다.화합이 안되는 이유를 보면 인격과 도덕적인 면도 원인으로 볼 수 있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고민하지 않으므로 문제를 제대로 보지 못하고, 따라서 답도 다 틀리는 제각각의 모습들이 섞여 교회를 이끌고 있기에 생기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규정할 수 있다.거룩한 고민의 과정을 거쳐 화합으로 이루어진 목회자들에 의해 신선한 양식을 먹는 그 교회의 성도들은 참으로 행복한 사람들이 아닐 수 없다.
28. 목회 세계를 세상의 또다른 분야로 보지 않는 목회자(Ⅰ)
어떤 목회자들을 보고 우리는 흔히 정치 목사라는 말을 하는 경우가 있다. 그들은 자기의 전문 분야가 목회이고 그러다 보니 기독교계가 자기의 터요, 거기서 한번 성공해 보겠다는 집념을 갖고 있는 사람을 가리킨다. 그 사람의 성공의 잣대는 교단의 총회장이나 기타 감투 자리일 것이다. 그들의 관념 속에는 목회의 세계도 세상의 어느 계와 다를 바 없는 곳으로 착각하는 모양이다.그래서 세상의 모든 영역과 같이 출세를 위해 정치가 판치고 뒤에서 펼쳐지는 물밑 조정 작업과 이에 따른 바람직하지 못한 일들이 벌어지는 것을 볼 때에 성도로서는 마음이 아프기만 하다.그들은 이 목회 세계 내에서 반드시 출세하겠다는 야망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다. 세상 영역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의 승고함을 보이기 위해 하나님의 방법대로 정직하고 공의와 부조리를 결부시키지 않고 살아가라고 목소리 높게 강단에서 외치는 사람들이지만 오히려 성도들이 모르는 목회의 세계에서는 하나님의 방법을 엉뚱하게 펼치고 있는 것이다.
29. 목회 세계를 세상의 또다른 분야로 보지 않는 목회자(Ⅱ)처절한 영적 투쟁과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신앙을 펼치며 실전 속에 매일 살아가는 성도들은 목회 세계를 세상의 또 하나의 다른 분야로만 보는 목회자들을 향해 어떻게 생각할까? 그들을 향해 새벽기도 안 나왔고 교회 예배 등한히 했다고 외치기는 했지만 오히려 그러한 내용을 들은 성도들의 눈에는 한심하고 수준 낮아 자질이 없는 목회자로 못 박을 것이다.숭고한 결단을 하여 생긴 영적 파워보다는 세상적인 유혹에 의해 나오는 파워가 더 강해 오히려 자신 속에 영적 역류 현상이 생기고 있는 목회자들은 없을까? 사람의 속성은 누구나 같다. 남보다 잘되고 싶고 남보다 우수하다는 평가를 받고 싶다. 그러나 목회 세계는 이 부분을 진지하게 보아야만 할 영역이다. 따라서 목회의 세계에 들어오기 전에는 반드시 이 부분을 진지하게 바라보아 검증한 후 합격의 통과를 할 수 있는 사람들만이 선택할 수 있는 세계인 것이다.목회와 교회가 세상적이 되어 간다는 말이 많이 나오는데 이 말은 성도들도 문제이지만-그들은 여러 계층의 사람들로 이루어져서 그렇다고 치고-최소한 그들을 양육할 목회자들은 세상적이 되지 말아야 한다. 유형적 무형적인 세상적 요소를 긴장하며 발견하여 차단시켜야만 교회는 세상적 요소가 덜 침투할 것이다. 마귀는 우선 목회자에게 세상적 주사를 교묘히 놓아 공격할 것이다. 그리고 이에 감염되면 목회 세계를 세상의 또다른 세계로 보도록 할 것이며, 그렇게 되면 그의 영성은 혼탁한 물이 될 것이다. 그리고 성도들은 그곳에서 헤엄치게 된다.다윗이 전투에서 이겼어도 밧세바를 보았을 때 자기와의 싸움에서 패했듯이 아무리 자질이 있어도 어느 순간에는 패배할 수도 있기 때문에 끊임없이 자기 관리가 요구되는 사람들이다. 물론 이러한 부분들은 성도들도 마찬가지이지만 목회의 세계에 있는 사람들은 누구보다도 더욱 긴장 속에 바라보아야 할 부분들이라 본다.
30. 호텔 출입을 멀리하는 목회자목회자들이 호텔 출입을 예사로 하는 것을 이해가 가지 않는다. 일반인들은 감히 일 년에 한번 아니 평생에 한번 갈까 말까하는 부담 가는 호텔 커피솝과 뷔페를 그들은 어떻게 쉽게 갈 수 있을까? 그것은 분명히 자기 돈이 아니기 때문에 가능할 것이다.주변의 고급 식당들이 잘 되고 고급 카페가 잘 되는 이유는 찾아오는 손님이 자기 돈을 쓰지 않고 회사 돈이나 커미션으로 쓰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잘된다는 증거는 사회가 썩었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이다. 과연 목회자들이 그들의 사례비로 호텔 출입을 마음대로 할 수 있을까? 그것은 분명히 그들이 속해 있는 어느 교계 조직의 공금이거나 어느 성도의 대접으로 온 것일 것이다. 분명히 본인이 지불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 공금은 성도의 헌금이라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목회자들을 대접하는 그 성도는 오히려 목회자의 영적 상태를 결국은 좀먹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이다.총회나 노회가 호화스런 호텔에서 열리는가 하면 한 여름 피서지에서 열린다는 것쯤은 웬만한 성도들은 잘 알고 있는 어제 오늘의 사실이 아니다. 그리고 교회에서 얼마만큼의 헌금을 지불하고 있다는 것도 다 알고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해 아무말 안하고 있는 것도 또한 성도들이다. 그런 소식을 접하면 교회에 헌금하고 싶은 생각이 떨어진다. 과연 잘못된 성도로서의 생각일까? 그들은 성도들의 헌금으로 이루어진 재정들이 마치 회사의 공돈 같이 보이는 모양이다. 그렇다면 뜻잇는 목회자나, 총회나 노회의 하는 모습들을 못마땅하게 보는 목회자라면 그들도 같은 부류가 되지 않기 위해 교회적으로나 개인적으로 또는 여럿이라도 호텔 출입은 삼가하는 것이 좋으리라 여겨진다. 대접하여 자신을 즐겁게 하는 사장 성도, 이사 성도보다 그리고 의사·변호사·성도보다 배추가게 성도, 김밥 할머니 성도, 일반 직장의 봉급쟁이 성도를 생각하면 쉽게 호텔 문을 열지 못할 것이다.대우 그룹 김우중 회장과 김용옥 씨가 쓴 [대화]라는 책을 보니 김우중 회장도 전 세계를 비행기로 누비면서도 일등석이 아니고 이등석을 타며 바닥에 누워서 자고 간다는 것을 보고 김용옥 씨가 놀랬는데 나역시 놀랬다. 그가 돈이 없어 그런 것이 아니다. 무엇인가 자기 소신이 있기에 그런 것이다. 이 시대는 목회자의 소신이 필요할 때이다. 이런 것에 남다르게 신경을 쓰고 앞뒤를 재 보며 살아가는 분야가 바로 목회의 세계가 아닌가 생각한다.
31. 훈련받기를 자청하는 목회자
평상시 영성도 좋으시고 헌신적이신 목사님 한 분이 계셨다. 그러나 그 분은 느닷없이 온 교회 성도들을 향해 광고하기를 앞으로 주일 빼고 가족과 떨어져 6개월간 어느 선교 기관에서 훈련을 받으시겠다는 것이었다. 온 성도들은 무슨 훈련인가 하여 궁금하던 차에 알고 보니 바로 선교 단체에서 대학을 갓 졸업한 젊은 간사들로부터 여러 가지 신앙적 훈련을 받으신다는 것이다.그 후 훈련에 임하고 계시는 동안은 역시 이전보다 강단에서의 말씀이 더욱 은혜스러웠다. 목사님의 영성도 그렇고 성도들이 목사님의 현재의 고생을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강단에서의 목사님 설교 중 솔직한 고백을 하시는 것이었다.“월요일 아침이면 가정을 떠나고 싶지 않았다. 그날이 가장 힘들었다. 내가 왜 이런 힘든 훈련을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피교육자로 자청하면서 받아야 하는지 모르겠다. 도중에 여러번 포기하고 싶었다. 훈련을 안 받아도 성도들은 아무 소리 안할 것이고 목사 행세에 전혀 지장이 없으며 성도들로부터 목사 대접 받는데에 하나도 어려움이 없는데 왜 받아야만 하는가의 유혹이 나에게 가득 찼었다”라는 것이었다.그 말씀을 강단에서 하는 순간 대부분의 열정 있는 성도들은 가슴 뜨거운 은혜와 도전을 오히려 흠뻑 받았다. 프로그램을 살펴보니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젊은 간사의 지시대로 훈련에 임함은 물론 매주 목요일은 서울 시내 아무 곳이나 가서 전도한 결과를 돌아와 보고하여야만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목사님은 매주 목요일이면 고속 터미널, 여의 광장 등 여러곳을 다녔으며 전도 받는 사람으로부터 많은 욕지거리도 들었다고 한다.담임 목회자가 스스로 훈련에 임한 후에는 성도들 스스로가 자청하여 훈련에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이것만이 아니라 무관심한 인근 교회의 목회자들도 자극 받아 이 훈련에 임하는 것을 본적이 있다.과연 우리 나라의 수많은 목회자들이 얼마나 많은 훈련을 목사가 된 이후에 받고 있을까? 특별히 목회학을 위한 해외 유학이나 선교에 헌신하여 특수 해외 선교 훈련 센터에서 어학이며 선교에 필요한 여러 가지의 것들을 훈련받고 있는 사람들은 있어도 국내 목회를 위해 장기간 훈련에 임하는 사람들은 드물 것이다.그렇지 못하는 이유는 많이 있다. 재정의 어려움, 시간의 제약, 개인적인 비젼, 설교, 제자 훈련, 심방, 결혼식, 장례식, 백일 돌 등 여러 가지 일들 때문이다. 그러나 매사가 그렇지만 본인이 극도로 원하고 훈련의 필요성을 절감한다면 이러한 장애물은 쉽게 무너지게 마련이다.목회자들의 훈련이라는 게 한여름에 며칠간 있는 강습회나 세미나에서의 정보 습득 정도가 고작이다. 그것은 거역하는 육신을 쳐가며 받는 훈련이 아니다. 그런가 하면 국외의 신학교에 가서 학위 받으려는 생각에 온 신경을 쓰고 있다. 틈만 있으면 해외에 수개월 또는 1년이라도 다녀와 학위 취득에 접근하려는 생각으로 머리에 꽉 차 있다.해외에 안 나가 학위 없는 목회자의 똑같은 시간을 공들여도 성도들에게 크게 도움 안 되는 정보와 지식의 습득보다는 그 시간에 성도의 영적 상태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고 있는 자신의 영성 제고를 위해 훈련에 임하는 목회자가 더 신선해 보이는 것 같다. 분명히 학위 없고 해외 안 나갔어도 영성이 가득한 목회자들을 성도들은 선호할 것이고 또 그래야만 한다.목회자들은 성도들이 스스로 채우기 어려운 영성에 결정적인 공급을 해 주는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누구로부터 받을 수 있을까? 사실 스스로 받기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기에 목회자들도 타인에 의한 훈련을 받아 성도들에게 베풀 수 있도록 더 높은 영성을 간직할 책무가 있는 것이다.
32. 질서 교육도 교회 내에서 과감히 시키는 목회자
성경에서 보여주고 있는 계명 중에 하나인 이웃사랑의 개념은 질서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이라고 본다. 질서란 나보다 다른 사람 중심이어야만 가능하게 된다. 나부터 출발하되 서서히 남에 대한 조그마한 배려와 더 나아가 적극적이고 세심한 배려로 확산되는 것이다. 그리고 질서를 지키는 시간에 남의 고통과 답답함도 아울러 체험할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성령의 열매인 오래참음을 의미한다고 본다.
여느 교회나 다름없이 예배 후 퇴장 시에는 혼잡스럽기 이루 말할 수 없으며 그 틈바구니에서 담임 목사는 성도들과 인사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것은 인사인지 인사를 때우는 것인지 모를 정도였다. 때마침 심방을 오셨기에 나의 경험과 이것을 교회에서 실시하면 어떻겠냐고 진지한 제안을 한 적이 있었다.앞줄의 성도들부터 나간다면 성도들끼리 얼굴도 서로 보고 피차 눈인사를 일차적으로 할 수 있으니 좋고 목사님의 인사도 훨씬 여유 있을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먼저 온 성도는 앞에 앉고 또한 앞에 앉았던 성도는 먼저 나가야 한다는 질서를 강조하여야 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훌륭하신 목사님이라고 평상시 생각하였던 차였는데 역시 좋은 제안이라 여기셨는지 곧바로 시행하였다. 성도들의 적응 시간도 필요 없이 교회는 한 순간 다른 모습으로 변하였다.
교회의 목회자는 세상적 질서나 기타 교육을 가르쳐야 한다. 그리고 과감한 실천을 위해 실시하여야 한다. 그렇게 되면 사소한 것도 다른 영역까지 파급되어 그 확산 효과는 매우 큼을 알 수 있다.
33. 신앙의 명예나 욕심에 이끌려 사역하지 않는 목회자
실로 우리의 내부적인 삶을 솔직히 해부해 보면 명예, 권력, 돈 이 세 가지를 위해 산다고 함축하여 단언할 수 있다. 사실 우리는 어느 곳에 있든지 자신이 나름대로 상상하는 사실이든 아니든 나름대로의 자존심을 먹고산다. 그리고 이 자존심이란 일종의 명예이기에 명예를 먹고산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명예의 종류는 무엇이며 명예는 어떤 것인가를 나름대로 자신에 맞게 설정한 후 그것을 이룩하기 위해 매진하고 있다. 즉 명예가 결과물이 아니라 목표물이 되어 있는 것이다.그런데 명예 자체는 전혀 잘못된 것이 아니지만 그것을 보고 차지하기 위한 출발과 과정들이 어떻냐에 따라 그것은 추잡스럽게도 보이는 것이다.세상적 세계관에 입각한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삶의 방향이 그들의 입장에서 지극히 정상적이고 진리인 것이기에 이해가 간다. 그러나 신자 중에서도 목회자는 매우 다르다. 그 신분이 주는 의미와 무게가 너무나 다르기 때문이다. 목회 사역, 교회 건축, 특정 단체 및 기관의 수뇌부를 겨냥한 전략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국내외 사역 등에 솔직히 내부적 명예심의 동기는 없는 것일까?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나름대로 꾸며 만든 명분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명분은 의례적이요, 간판적이며, 요식적 외투에 불과할 뿐이다. 진정한 동기와 중심부의 출발선상이 어느 위치이냐가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다. 명분만 들으면 모두다 욕심 없는자요, 명예를 초월한 사도 바울 같다. 한 명도 이에 물들은 사람이 없는 것 같다. 그렇다면 정말 그러한가?이렇게 명예에 취하고 미치는 현상이 신앙 세계에는 없는 줄로 알았다. 그리고 목회 세계와 목회자 자신에게는 정말 없는 줄로 알았다. 그러나 어른이 된 후는 목회자도 타이틀이 목회자지 모두 같은 입장이라는 사실 앞에서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신도와는 구분되는 특별 영역에 계신 분들이라고 스스로들 느끼고 있지 않는가. 그렇다면 일반 성도와는 달리 이 문제를 심도 있게 취급하고 혼신의 노력으로 절제하여야만 할 것이다.
34. 성도 사역자를 세우는 목회자
과거의 우리 나라 교회를 보면 대부분이 목회자 중심의 교회였다. 그래서 목회자는 팔방미인이 되어야 했고 만능인이 되어야 했다.교회 성도들의 상황을 보면 과거와는 많이 변했다고 목회자들 스스로가 인정하고 있다. 일반 성도들의 사역 능력과 헌신의 수준이 매우 높은 사람들이 교회 내에 적지 않다고들 말한다.요사이 많은 목회자들에게 인기 있는 책이 ‘교회 성장에 관련된 것’이라고 한다. 어느 목회자는 이 부분에 관련된 책은 모조리 사보고 있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교회 성장은 책을 통해서라기보다도 일반 성도들을 얼마나 적절히 봉사자가 아니라 목회자와 동일 선상에서 그 교회에 사역자 개념으로 세우고 구비시켜 주는가에 달려 있다고 본다. 그리고 이것이 성장하면 교회의 성장은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수 있다고 본다. 내가 목회 하려고 목회자 되었지라는 생각보다는 목회자가 충분히 할 수 잇는 영역도 성도에게 그 사역권을 주는 것은 어떨까 생각한다.목회자와는 달리 일반 성도는 세상에 오래 머물면서 주님을 섬김으로 세상에서의 성결과 거룩함이 적으면 교회에서의 사역은 힘이 없어진다. 따라서 거꾸로 볼 때 사역자가 되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 다운 성결을 유지시켜 줄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교회의 목표이기도 하다. 이렇게 될 때 교회의 성도들은 모두가 동역자 의식을 갖게 될 것이며, 성도들은 청중 성도, 관중 성도가 되지 않고, 관람객이 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목회자들도 사역에 지치지 않아 시험에 들지 않을 것으로 본다.우리 나라 교회의 실태들을 보면 사실 얼마나 답답한가. 어느 교회는 훌륭한 사역 인재가 너무나도 풍부하게 있지만 그들은 계속 영적 양식을 먹기만 하여 비대해 지는가 하면, 또 다른 연약한 중소 교회는 성도 사역자가 없어서 너무나 빈곤스럽게 보이는 현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별한 이익과 눈에 보이는 실리가 없으면 협력은 꿈도 못 꾼다. 사역의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엄연히 존재하고 잇는 것이다.위와 같이 일정 기간이 지난 성도는 자기 교회에 성도 수와 재정이 줄더라도 다른 연약한 교회로 가라고 간절히 말할 수 있는 용기 있는 대형 교회 목회자들은 없을까?
35. 최고의 사역은 생활임을 강조하는 목회자언제부터 우리 나라 교회의 성도들이 눈을 떴는가는 몰라도 교회가 교회다워지고 성도가 성도다워지기 위해서는 어떤 사역을 해야 하며, 또한 그것이 무슨 사역이어야 하느냐에 서서히 성도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그래서 교회는 나름대로 사역의 방향을 잡아가고 성도들을 그쪽으로 몰아간다. 선교니 전도니 하면서 그 중에서도 전도회별로 선교사를 돕자는 매년의 사업 계획을 내놓기도 한다. 성도들도 뜻있는 자들이 중심이 되어 교회가 하지 못하는 사역들을 특정 단체를 결성하여 감당하고 있다. 사역의 종류가 많아지고 깊이가 더해지다 보니 어떤 사역을 하거나 관심을 갖지 않으면 신앙에 문제가 있거나 열정이 없고 비전이 없는 성도로 은연중에 평가받는 분위기가 되었다.그러나 이것보다 더욱 중요한 사역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생활 사역이다. 왜냐하면 이 생활 사역을 제대로 수행하지 않으면 다른 모든 사역이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회와 목회자들은 모든 사역보다 앞서 생활 사역에 집중시켜야만 하리라 본다.생활 사역이란 시간과 공간적으로 볼 때 총체적 사역이며, 이른바 'Full Time 사역'이다. 생활은 우리의 부분이 아니고 전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한된 특정 목적이나 비전을 향한 목적성 사역에 비해 그것이 막연하고 분명하지 않은 것 같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것이야말로 구체적인 비전이요, 목적인 것이다.이 시대에 이러한 생활 사역의 비전을 소유하지 않은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삶의 현장에서는 조용하나 분명한 그리스도인의 신앙고백이 보이질 않는다. 모든 일을 해도 기독교적으로 하고 이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하나님의 원리대로 살아가고 회복될 수 있도록 하는 생활의 삶이 그 어떤 것보다도 근본적인 사역이다.이제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삶 가운데서는 신앙인 이라 하면서 막연하고 주의 일과 세상일이 구별되며 주일과 평일이 구별되는 것이 아니라 매순간 공장이나 부엌에서 그리고 책상 위나 컴퓨터 앞에서 생활이 바로 예배가 되는 삶, 이러한 생활 사역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28:20)고 하신 예수님의 최후의 사역 방향이다.그래서 목회자들은 이 생활 사역을 다른 어떤 것보다도 최고의 사역으로 인정하며 성도들에게 강조하여야만 한다. 무엇을 하느냐의 이전에 어떤 모습이 되어야 하느냐에 진지한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36. 졸부에게 접근하지 않는 목회자
교회를 세우고 성장시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많은 재정이 필요하다. 그래서 기도하는 사람과 믿음을 갖고 삶을 예배로 생각하며 초지일관 사는 사람이 돋보이기 쉬운 것 같지만 자세히 보면 교회의 필요한 재정 때문에 헌금을 많이 하는 사람과 특별히 목회자에게 재정적인 면을 충족시켜 주는 사람이 훨씬 돋보이는 게 사실이다.그러나 교회에서 재정적으로 기여하는 사람들을 잘 들여다보면 문제가 있는 경우도 많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목회자는 헌금만을 강조하지 말고 반드시 헌금은 어떠한 물질이며 어떻게 생겨났는가부터 특별히 강조해야 될텐데 그러한 경우는 거의 듣기 힘든 사실이다.그러다 보니 많은 헌금으로 교회의 재정을 풍요롭게 한 사람들을 보면 그 중에는 졸부도 많이 끼어 있다. 여러 가지 투기나 기타 방법으로 갑자기 부자가 된 사람을 말한다. 그리고 유독 목회자에게 물질적으로 잘 해주는 사람을 보면 그 경우도 졸부가 많다. 그래서 졸부들이 잘 해주면 목회자는 거절하지 못하고 쉽게 받아들인다.그리고는 그에게 많은 관심과 사랑을 내 보인다. 시간이 지나 언젠가는 그가 교회의 고귀한 지위인 중책에 오르도록 목회자는 결정적인 기여를 해준다. 그래서 조용한 성도들은 말은 안하지만 한심한 생각으로 한숨만 쉰다. 마치 기업에서나 볼 수 있는 모습들이 교회에서 쉽게 보여지기도 한다. 사탄은 권력 있는 자나 사회적으로 영향력을 가진 자 뿐만 아니라 물질을 많이 가진 자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왜곡시키거나 무력하게 만들려고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목회자에게 있어서 최대의 적은 물질과 이성 문제, 그리고 명예일 것이다.그래서 목회자가 물질에 오염되었다는 것은 바로 돈 있는 자나 졸부에게 접근했다거나 또는 그들의 접근을 철저하게 제지하지 못하는데서 나왔다고 볼 수 있다.예수님이 가난한 자들을 돌아보시고 특히 고아와 과부를 관심의 대상으로 삼았다. 오늘날의 목회자들은 교회가 조금만 커지면 이 보다는 ‘사역이다. 교회 성장이다’하면서 바쁘다고 하니 언제 이 연약한 자들에게 관심을 기울일 시간이 있을까?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시간은 하루에 24시간일 뿐이다.현실의 물질적 풍요는 결코 축복이 될 수 없는 경우가 많은 반면 물질적 부족은 오히려 우리에게 은혜와 감사가 되는 경우도 수 없이 많다. 그리고 누구보다도 이 사실을 목회자들은 철저히 알고 있다.
37. 타인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는 목회자
기독교의 분위기를 창출하는 목회자들을 보면 동일한 주제를 갖고도 수많은 생각과 표현 및 주장을 보이고 있어 어떤 것이 바른 것이고 진리인지 분간을 하기 어렵다. 모든게 다양한 것이 있는 것만은 아닌데도 그렇다. 그래서 남의 말에도 진리가 있으므로 듣는 것으로 끝내지 말고 고집을 버리고 진정 마음의 귀를 열어 심도 있게 생각해 볼 줄 아는 목회자가 필요하다.
본인은 30회 이상 “이런 목회자라면”이라는 칼럼을 쓰고 있다. 한 성도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나름대로 고민하는 사람이면서 또 한편으로는 국민이 대통령과 정부를 향해 이랬으면 좋겠다고 하는 것 같은 순수한 입장에서 쓰고 있다. 그 동안 독자들로부터 많은 질타와 격려가 뒤섞인 의견이 본인에게 전달되곤 하였다. 솔직한 심정은 질타의 목소리, 다시 말해 ‘지가 뭔데, 목회자가 되보지 않았는데 이 속사정을 알기나 하나, 모르니까 별 수 없지’하는 소리 듣기 싫어 포기하고 싶을 뿐이었다. 그러면서도 더욱 목회자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 제발 남의 말좀 들어보라는 것이다. 유한 얼굴 모습과 부드러운 미소의 응답만 있고 내적으로는 헛소리 한다고 이미 마음 속에서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백지 상태에서 다시 한번 들어 볼 수는 없을까?
남의 말이 맞는가 틀리는 가도 중요하지만 그것은 이차적인 문제이다. 문제는 공인의 입장에 있다면 반드시 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국민의 제각각 소리를 듣기 싫어하거나 대통령이 안되봐서 몰라 하는 식으로 들어보지도 않는 대통령, 국민이 바라는 공무원이 무엇이다라고 말하는 시민에게 무감각한 공무원, 학생들이 보는 교수는 이랬으면 좋겠다고 하는 데에 전혀 민감하지 않고 자기 말만 강요한 대학교수들은 이제 설자리가 없다. 목회자 영역은 말하면 안되는 곳인가? 자신에 관계된 말에 더 귀를 기울이자. 그리고 최근의 가격 파괴 같이 자신을 파괴하자. 세상의 변화 양상은 세상적이라고만 하지 말자. 오히려 교회보다 훌륭한 모습이 많이 있다. 그래서 부끄럽기도 하다.
38. 설교에 자기감정을 넣지 않는 목회자요사이는 옛날과는 달리 설교를 들을 수 있는 기회가 많다. 교회에서는 물론이고 다른 교회 목회자들의 설교 카세트 테이프 그리고 방송을 틀면 즉시 나오는 설교들이 무척이나 많이 있다. 그래서 설교의 홍수, 말씀의 홍수 시대라고도 할 수 있다. 정말 말씀이 없어 기갈이 아니다. 이러다 보니 성도들은 말씀을 듣는 것은 잘하여 계속 듣기만 하고 스스로 말씀을 통해 자신이 직접 듣는 노력을 안하는 것 같다. 또 너무 많은 말씀이 있다 보니 말씀의 선별과 우열이 자연히 생기는 것 또한 현실적인 사실이다.그러나 이 가운데에서도 어떤 경우의 말씀이건 간에 설교 도중에 누구나 알 수 있는 사적인 내용을 포함시키는 경우가 있다. 개인적으로 특정인을 공격하는 말을 한다거나 자신의 의견을 설교 시간을 이용하여 감정적으로 표출하는 경우가 있다. 이러한 경우는 좀 곤란하지 않은가 보다.성도들이 설교를 들을 때는 말씀이 보여주는 중심 내용들을 구체적으로 듣고 싶어한다. 그러나 말씀을 가만히 듣다 보면 설교자의 감정을 때로는 진하게 포함시키거나 은근히 개입시키는 경우를 볼 수 있다. 그러면서도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지 못한 성도는 그의 심령에 오히려 문제가 있다고 그 탓을 듣는 이에게 돌린다. 목회자에게는 문제가 없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이 시대에는 분명 은혜스런 설교와 그렇지 않은 설교도 있게 마련이다.특별히 교회에서 목회자 자신과의 결부된 좋지 않은 문제가 발생하였을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이를 다른 방법으로 해결하려고 하기보다는 설교를 통해서 자신의 변명과 항변을 하는 경우가 있고 때로는 앉아 있는 성도들을 향해 질타와 고성으로 설교에 임하는 경우가 있다. 표현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라고 하지만 제시해 보면 실은 자기의 생각과 감정을 하나님이라는 틀에 맞추고 목회자라는 설교권을 갖고 훈시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예배가 역동적이고 살아 있으며 성령이 충만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높여 드리며 하나님과 성도가 모두 즐거운 예배가 되기에는 이런 분위기로 어려울 것이다.우리는 말씀에 비추어 반드시 점점 받아야 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 주로 이용되는 것이 설교 시간이다. 그래서 질타의 설교 시간도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지적 받고 있는 것이라고 한다면 할 말이 없다. 왜냐하면 두 가지가 모두 피상적인 면은 비숫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욱 문제인 것이다.
39. 돈으로 해결하지 않은 목회자
물질이라는 단어를 쓰니까 실감이 아나 돈이라고 하겠다. 돈 싫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뜻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돈이면 다 된다’는 세계관이 잘못되었다고 세상에서 외치고 떠들어 보지만 오히려 세상 사람들은 그것을 비웃기만 한다. 마치 저들이 이 세계의 기득권자인 것처럼 우리를 가소롭다는 듯이 내려다본다. 그런데 한가지 의문스러운 것이 있다. 교회조차도 이런 일에 딴 동네 사람이 하는 일처럼 무관심하고 지원사격이 없다. 교회에 물들어 있는 돈의 문제에서 성도들을 성경적인 입장에서 해방을 시켜 줄 수는 없을까? 그것은 목회자가 마땅히 할 일이다. 그런데 목회자 자신도 모르게 취해 있을 때는 어떻게 하나? 또 다른 거론의 대상이 될 수 있겠지만 정규 대학에서 선공한 사모들이 목회자 아내가 되었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직업을 가지면 문제가 된다. 왜 우리 교회의 정서가 그런지 모르겠다. 돈 문제를 해결한다기보다는 하나님이 공부시킨 전공을 일반적으로 볼 때 바르고 영광스럽게 사용해야 되지 않겠는가? 이렇게만 되더라도 목회자의 돈 때문에 생기는 오해는 많이 없어질 것으로 본다.교회에서 돈 문제를 거론할 때는 반드시 신앙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비상식적인 것도 신앙적 명분을 만든다. 유초등부의 헌금 봉투, 중고등부에서 특별헌금자를 공개하여 간접적인 시기심을 발동시키는 현상, 주보에 헌금 공개, 건축 헌금 자의 공개를 통한 성도들의 자극, 성가대 반주자와 지휘자에 사례하는 문제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지휘, 반주도 음악을 발전시키고 성경적이라는 명분을 내세우지만 진정 마음의 중심이 무엇인가가 중요하다. 이제는 솔로도 돈을 준다. 음대생은 교회 성가대를 아르바이트 자리로 보고 철새같이 조건 좋은 곳으로 떠다닌다. 종교음악과 졸업생들은 일반 직업을 왜 못 갖나? 성가대를 직업으로 보고 있는 안타까운 현실은 분명 목회자가 만들었다. 성도들 아파트는 넓히면서 교회는 관심을 안쓴다는 문구를 쓰며 교회 건축, 기도원, 묘지, 복지관 등의 순서로 사업화 되어 있다. 그래서 헌금을 쥐어짜는 것처럼 한다. 돈 있는 자는 장로가 쉽게 되고 목회자는 내심 그를 좋아한다. 정말 돈 문제에 솔직해 보았으면 좋겠다.현재 우리 나라 교회의 문제는 목회자의 의지에 달려 있는 데 그 중의 가장 큰 것이 돈 문제이다. 자본주의와 세속 주의의 스타일이 그대로 퍼져 있다. 교회만큼은 달라야 한다. 기준도 다르고 추구 방향도 달라야 한다. 말도 달라야 한다. 모든 것이 달아야 한다. 이 문제만 해결해도 목회자의 존경 순위는 상위권이 될 것이다. 성경적 세계관으로 돌아가자.
40. 인간관계를 중시 여기는 목회자
인간의 삶이란 결국 신자는 하나님과의 관계, 불신자는 자기가 생각하는 신과의 관계가 있으며, 또 한가지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라고 볼 수 있다. 특별히 가정에서 자녀와 부부간의 관계가 문제인 사람도 많기는 하지만 대부분은 직장처럼 같이 근무하는 자리에서 벌어지는 인간관계일 것이다.그런가 하면 목회자의 입장과 행동반경은 특별해서 그 교회의 다른 부목회자들과 성도들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부서장, 장로들과의 관계가 문제될 것이다.사람의 마음은 하고 깊어 아무도 모른다고 하지 않는가?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서 평가가 다르게 나오기 때문일 것이다. 이는 자기하고 이해관계가 없을 때는 천사인데 이해관계가 있을 때는 악마인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해관계가 없을 때는 인격자 같이 대해 준다. 화내고 치고 박고 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이해관계가 있을 때는 이득을 확보하기 위해 사력을 다하고 서로 싸운다. 특히 쌍방이 부서장일 때는 더욱 그렇다.이해관계가 있을 때 그리스도인이라면 손해를 보는 자세만이 유일한 돌파구의 전략이다. 자신 있게 말하기 어렵지만 경험에 의하면 이것만이 인간관계를 유지하는 길이라고 본다.또한 공동체에서는 반드시 갈등이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갈등 후에는 반드시 사이가 원만치 못하고 앙금이 항상 남아 있게 된다. 그래서 어떻게 하든지 갈등을 유발시키지 않으려고 애써야 한다. 사전 차단 형식이다. 청소년 시절과는 달리 갈등이 일어나기 전에 이것을 사전에 방지하는 길이 최고이다.인간관계가 복잡한 시대이다 보니 인격이라는 단어가 자주 튀어나온다. 어렵게 인격을 정의할 필요가 없다. 상식선에서 행동하면 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선에서 이해될 수 있는 자는 인격자이다.세상처럼 싸울 수도 없는 교회, 그 속에서 벌어지고 있는 갈등과 번민 가운데에 계신 목회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이것은 학문으로 풀 수도 없다. 영성과 신학적 지식도 좋은 것이지만 무엇보다도 인간관계가 더없이 좋은 교회를 만들고 싶다. 교회 내에서도 직분에 관계없이 세상적이건 신앙적이건 간에 상식선에서 이해되지 않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41. 직분 임명에 인색한 목회자
교회에서는 성도들의 신앙 상태를 주로 주일날의 모습과 교인들의 피상적인 평가, 그리고 예배의 출석과 십일조 등 헌금의 상황을 종합 평가하여 신앙의 상태를 구분 짖는다. 이러한 평가 기준은 어느 정도 정확히 근접해 갈 수는 있을지 몰라도 만족스럽지는 못하다. 하나님이 보시기 전까지는 정확하게 알 수가 없지만 사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 사회에서 그가 얼마나 강도 있는 신앙고백을 하면서 살고 그로 인하여 영적 고난을 받으면서 살고 있느냐 일 것이다. 오히려 최근의 사회를 보면 이것이 지금까지의 모든 평가 항목보다 더 무게 있고 분명할 수 있다.교회에서 연말이 되면 새로운 임직을 하며 투표나 기타 방법으로 안수 집사 및 장로를 선발한다.
집사는 너무 쉽게 임명하는 경향이 있고 장로는 정치와 사회적 신분이나 재정의 개념으로 임명하고 있는 것이 많다. 그리고 직분 임명을 이용하는 목회자도 있다. 목회자는 직분 임명에 분명하고 공적인 차원으로 바라보아야 하는데 협상과 인정에 의해 처리하고 노골적으로 유도한 다음 임명한다.“우리는 다른 많은 사람들과 같이 하나님 앞과 그리스도 안에서 진실하게 증거하고 있다”(현대인의 성경, 고후2:17)라고 하신 것 같이 직분도 장사꾼 같이 취급한 적은 정말 없을까?
42. 세상을 정확히 보는 목회자
로마서 12장 2절에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는 뜻은 무엇일까? 과연 수도원에 들어가라는 뜻일까? 이 말씀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일터를 포함한 사회 전 영역을 세대라고 한다면 이 사회에 적극적이되 그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여러 가지 하나님이 싫어하는 것들을 본받지 말라는 뜻으로 본다.또한 사도 바울이 자기가 갖고 있었던 명예, 혈통, 지식 등 모든 것들을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여 배설물로 여겼다고 했는데 과연 이 의미는 무엇일까? 이 구절을 근거로 하여 예수님을 아는 것이 가장 중요하며 따라서 세상의 모든 일터와 지식을 배설물로 여기고 버려야 한다고 하는가 하면, 더 나아가서는 신학교가 가장 중요하다고도 한다.또 어떤 목회자는 직장에 근무하는 이유를 그곳에서 선교하며, 전도하라고 보내신 것으로만 말한다. 일반 성도들이 직장 생활을 어떻게 펼쳐야 바른 것인가 하는 철학을 올바르게 유도하지 않는다. 이런 것이 발생하는 이유는 이원론 문제 때문으로 보아야 하는데 희랍 시대부터 내려온 이 이원론의 골이 의외로 성도들에게 깊이 자리잡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목회자도 마찬가지임으로 강단에서 그들의 입을 통해 직간접적으로 수없이 그렇게 교육시키고 있다. 세상의 경험이 없는 사람이 어떻게 세상에 있는 성도들을 향해 외치고 그들을 이해하며 이 세상은 썩었다고 만 할 수 있을까?요셉과 다니엘을 보면 그 사람들은 믿음을 소유한 채 그 나라의 이익과 안녕을 위해 최선을 다하며 기도로 살았지 그곳을 탈출하려고 애쓰지 않았다. 그리고 일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깊이 생각하였다. 일터로 보내져 있는 성도들의 생활은 바벨론과 애굽에서 그들 같은 분명한 신앙고백을 하면서 살되 그것만하는 것이 아니라 좀 더 본질적이라고 할 수 있는 일을 통해 생활로 하나님께 예배해야 하는데 이것이 그들 직장 생활의 일차적인 목적이다.직장에서 전도 열심히 하라고만 하기 이전에 본질적인 문제에 초점을 우선 맞추어야 한다. 하늘과 땅을 모두 선한 입장에서 바로 보고 균형 잡혀 있도록 가르쳐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런 것을 할 수 있을까?그것은 목회자들이 우선 세상을 정확하고도 균형 있게 볼 수 있는 시각을 갖는데 있다.
43. 고민하는 목회자
여러 가지 문제들이 사회에서 발생할 때마다 등장하는 문구는 교회나 성직자가 문제라고 하지 않고 교육이 문제라고 한다. 그런데 이 문구를 자세히 해석해 보면 가정 교육, 사회 교육도 있기만 하지만 학교 교육이 문제이고 교육자는 문제가 아닌 것 같이 보인다. 그러다 보니 제도를 개선하고 보완하는 작업에만 떠들썩하다. 그렇다면 교육자 중에는 유치원부터 대학에 이르기까지 여러 층이 있는데 과연 그들은 교육자라고 볼 수 있을까? 물론 상한선을 긋고 단정짓기란 어렵지만 그 중에서도 교수를 보면 그가 정말 교육자일까 하는 생각을 깊이 갖게 만든다.94년 지존파 살인 사건이 났을 때 모 대학의 총장은 그 대학의 교수들을 고향으로 보내 교육시켜야 된다고 했는가 하면 요사이 대학에서는 특별 정신교육 기관들을 만들기도 한다. 그러나 농어촌의 순수한 자연으로부터 배운 그들에게 오히려 교수들의 교육을 받아야 하지 않을까?교수는 과연 교육자인가에 대해 좀 더 솔직해 보자. 보통 유치원이나 초. 중. 고 교사가 되기 위해서는 모두는 아니지만 고등학교 때부터 교사의 길이 무엇이라는 것을 생각하고 고민하며 유아교육과나 사대에 입학하여 4년의 교육을 통해 나름대로의 정신적인 준비를 한 다음 교사의 길을 걷는다. 그래서 그들은 교육의 본질에 대해 어느 정도 훈련의 과정이 있었다.그러나 교수는 다르다. 고등학교 시절에 교수가 되려고 마음먹는 자도 거의 없고 있다 해도 교육자의 입장에서는 거의 아니다. 대학을 들어온 후 4년간 다니다가 공부를 더하면서 사회적인 대접도 나아지겠지 하고 국내외 대학원에 들어간다. 석사 학이 따니까 박사 학위가 욕심나고 이름도 좋고 하여 논문 쓰다 보니 학위를 받게 된다.그런데 박사 학위 소지자라 취직 자리는 매우 협소해 대부분이 연구소나 대학뿐이다. 그러다가 우리 나라 정서상 교수라는 직함이 괜찮기도 해 교수 채용에 도전해 보다가 안되면 강사나 연구소에 계속 있으면서 형편 봐서 여러 번 서류 넣다 보니 운 좋게 채용이 되기도 한다.그리고는 채용된 학기부터 갑자기 교수라는 직함을 얻고 강단에 서게 되며 그날부터 학생은 ‘교수님’하고 부르게 된다. 어제의 직장인이 갑자기 오늘에는 교육자로 탈바꿈한 것이다. 그 교수는 인생이 어떠니 하며 학생들을 교육시킨다. 초. 중. 고 교사와는 달리 한 번도 교육자의 길이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이 없었던 자다. 그렇다고 채용 후에도 있는 것은 아니다.그런데도 교수가 과연 교육자일까? 하지만 교사보다 훌륭한 수준의 교육자라고 사회에서 인정받고 교육대학원에서도 교사들을 가르친다. 그러다가 이삼십년 후에는 그 중에서 총장도 나온다. 최고의 교육자 칭호를 받는다. 교수는 연구에만 관심 있고 또 그렇게 정부는 몰아간다. 돈과 명예 때문에 연구한다고 보는 것이 옳다. 그러면서 공부에는 관심이 적고 사회 참여에 신경을 많이 쓴다. 내면세계는 온통 무질서 투성이일 뿐이다. 따라서 아는 것은 적어지는데 나이 먹을수록 권위 의식만 몸에 배고 교수에 대해 뭐라고 바른 소리 한 번 들으면 펄쩍 뛰며 소스라친다. 이미 대학과 교수는 교육기관이자 교육자라는 것을 거부하게 만들고 있다.대학교수와 목회자는 어떤 것이 차이 있을까? 솔직한 자기 진단을 해보자. 신학교 입학 전에는 어떤 고민이 있었고 현재는 어떤 고민에 사로잡혀 있는가? 이런 고민이 현재 시제에 있을 때만이 그는 교육자요, 목회자일 것이다.
44. 당회장을 겨냥하지 않는 목회자
최근에 저의 연구실에 어느 목사님이 방문을 하셨다. 말씀을 나누던 중 그분의 소망은 청소년 사역이라고 하면서 이 사역이야말로 우리 나라의 교회와 신앙을 회복시키고 희망을 줄 수 있는 부분이라고 굳게 믿고 계시기 때문이었다. 그러면서 저의 참여와 동역을 간절히 부탁하였다. 그렇게 말씀을 나누면서 우리 나라 신학교에는 그렇게 많은 목회자 후보생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나같이 당회장 후보감들만 있다는 것이었다. 모두다 장래의 계획은 어른 목회이고, 교회 개척이며, 담임 목사이지 이러한 청소년 사역에 헌신할 사람을 바라보기 어렵다고 하였다.
현재의 목회 분위기는 목회자 스스로가 풀어 가야 한다고 본다. 만일 그것이 안될 때는 저변에 깔려 있는 뜻있는 일반 성도들이 이 문제를 풀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성도들이 만일 그렇게 하면 목회자들은 잘 한다고 하기보다는 겉으로는 미소 짖지만 내면적으로는 비난과 가소로움의 웃음을 짓게 될 것이다.단독 목회보다 팀사역은 정말 어려울까? 만일 어려워서 못한다면 교회 성도들을 향해 융화하라고만 설교해도 될까? 나는 평생 당회장이 되지 않겠다는 신념을 가지기는 정말 어려울까? 이 의미는 당회장을 안하겠다는 뜻도 되지만 한편으로는 그러한 심정으로 당회장직을 한다는 의미가 된다.목회자들이 교인 알기를 정말 어떻게 아는가가 궁금하다. 사람이란 생활 영역에 따라 그 문화에 흡수되어 생활 습관과 행동 양식이 변화하게 마련이다. 한 예로 공무원이나 공공 회사 사람들은 목이 곧은 관료주의자가 되기 쉽고, 선생들은 학생에게 권위주의 자가 되기 쉬우며, 경찰은 국민을 우습게 보기 쉽다. 그들은 알면서도 고치기 힘들어한다. 그렇다면 목회자 세계는 그 속에 어떤 문화가 흐르며, 성도들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저는 신문에서 목사에게는 님이라는 호칭이 늘 붙었으나 집사에게는 끝까지 호칭을 안 붙였던 어느 목사님의 칼럼을 읽어보았다. 이것은 지금까지 목회 세계에서 굳어진 성도들을 향한 타성의 한 증거라고 볼 수 있다. 팀사역이란 목회자와 성도들끼리 같이 하는 것이다. 그래서 IVP의 [참으로 해방된 평신도], [평신도가 사라진 교회]라는 책에 최근의 관심이 기울여져 있는 이유는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