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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素女 소박한 여인) 2
P국은 성적 모럴이 엄격히 적용되는 나라였다. 미혼일 경우 성에 대하여 관대하지만 기혼의 성에 대하여는 무척 엄한 풍습을 가진 나라였다. 그런 나라에서 어떻게 자신의 아내가 외간남자와 호텔에 든 것을 안심하고 있단 말인가? 지금까지 마신 술이 확깨는 것 같았다. 나는 위스키와 맥주를 섞은 혼합주를 만들어 모두 마셔 버렸다.
그레실은 내가 걱정이 되는지 자꾸만 오렌지 주스를 마시라고 했다.
“정말로, 정말로 내가 당신과 함께 이곳에 있다는 사실을 당신 남편이 알고 있단 말이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T는 이곳에서 유명한 신문 기자에요. 남편이나 부모님은 내가 T의 집에서 당신과 밤새 파티를 즐길 거라고 생각하고 계실 거예요. 우리는 파티를 한번 시작하면 밤을 새우는 습관이 있어요. 물론 이곳에 사는 사람들 모두가 다 그런 것은 아니에요. 나는 매일 아침 6시까지 병원으로 가야한다는 것을 가족들은 잘 알고 있어요. 내일 아침에도 나는 병원에 있을 거라고 믿을 거고요.”
‘아, 그러면 그렇지. 이국의 사내와 자신의 성숙한 아내가 호텔에 함께 투숙한 사실을 알고도 안심할 수 있는 남자라면 분명 정신 치료를 해봐야 할 거야.’
혼합주를 마신 그레실도 어느 정도 술이 오르는지 약간 발음이 잘 안 되는 것 같았다.
“나, 나 당신하고 아침까지 있으면 안 돼요?”
“아니? 당신 아침 6시까지 출근해야한다면서요?”
“나, 이틀간 특별휴가 냈어요.”
“이틀간요?”
“네에, 휴가 낸 이유는 30년 만에 나를 찾아온 당신을 위한 배려에요.”
“나를 위한 배려라고요?”
“Please, don't question anything. shall we dance?”
나는 그녀의 제의를 뿌리치지 못하고 그녀가 이끄는 대로 몸을 움직였다. 그녀가 내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한국의 아내가 만약 이런 장면을 목격 한다면 무어라고 할지 궁금해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레실은 다시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레실, 울지말아요. 내가 당신이 보고 싶어 왔잖아요. 당신을 찾기 위해 이곳의 유력 신문사와 방송국 홈페이지를 수천 번도 더 들락거렸어요. 그러다가 우연히 T를 알게 되었고 다행히 한국에 대하여 호감을 가지고 있는 T는 나의 부탁을 들어 주었어요. 그가 당신을 찾기 시작한지 일주일 만에 당신의 소식을 전해왔을 때 나는 그만 너무 기뻐서 울 뻔 했어요.”
“Really?”
“그럼요?”
그레실이 흐느끼다가 나를 올려다보더니 하얀 치아를 드러내고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내가 팔에 힘을 주자 그녀가 깊게 안겨 왔다.
“그레실.”
“네에?”
“그때 나 좋아했었어요? 30년 전에?”
“......”
“안 좋아했나보군요.”
“바보, 당신은 바보에요.”
“응, 바보?”
“내가 그대를 좋아하지 않는다면 이 순간 당신 품에 안겨 춤을 추겠어요?”
“그런가?”
더 이상 말이 필요하지 않았다. 향긋한 살 내음이 코를 찔렀다. 점점 나는 자제력을 잃어가고 있다고 판단했다. 그렇다고 30년 만에 찾아와서 마치 맡겨 두었던 물건을 찾으러 온 사람처럼 손을 내밀 수 없었다. 나는 이국의 여인에게 큰 빚을 진 빚쟁이였다. 그 빚을 갚아야 하는데 어떻게 어떤 방법으로 갚아야 할지 금방 해답이 떠오를 것처럼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빙빙 돌기만 할 뿐이었다.
그녀는 다시 나를 놓치면 영영 볼 수 없는 불행이라도 닥칠 것 같은 눈빛으로 자꾸만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레실의 볼룩한 육감이 술기운에 팽창된 나의 욕망을 자꾸 시험하기 시작했다.
‘아아, 어찌해야하나?’
혈기 왕성한 남녀의 30년만의 해후가 만든 열망은 비록 내일 지구가 멸망한다고 해도 거칠 것이 없을 듯싶었다. 분명히 내 몸은 대취하여 흔들거리는데 정신은 맑았다.
‘이 대로 이 여인과 함께 무너져야 하나? 안 돼, 절대로 그럴 수 없어. 그건 너무 파렴치한 짓이야. 나는 끝까지 동방예의지국의 자존심을 지켜야 해. 절대로 무너지면 안 돼. 30년을 기다려 왔는데 까짓것 저승에 가서도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다고.’
“My honey, Hug me and kiss me. Please.”
“......”
“그레실, 나 머리가 아파 죽겠어. 우리 잠시 앉아서 쉬면 안 될까?”
“오우? 많이 아파요?”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그런 걸 거야. 잠시 쉬면 될 것 같은데......”
그레실 역시 대취하여 제대로 몸을 가누지 못할 지경이었다. 나는 얼른 화장실로 들어가 그냥 변기 뚜껑을 깔고 앉아 있었다. 하늘과 땅이 요동을 치고 있었다.
“여보, 지금 거기서 무얼하시는 거에요?” “아빠, 아빠, 정신 차리세요. 거긴 여우굴이에요. 빨리 나오세요. 아빠.”
“얘야, 너 거기서 무얼 하는 거니? 너는 아내가 있고 자식이 있는 몸이야. 그런데 너는 지금 무엇을 하는 거니? 응? 어서 정신 차려 이것아.”
아내의 환영과 두 딸들 그리고 팔순의 노모의 얼굴이 차례로 보이다가 사라졌다.
‘아아, 안 돼. 안 돼.’
거울 속에서 생전 처음 보는 이승의 욕망에 찌든 웬 중년이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생전 처음 보는 얼굴이 분명했다. 내가 삿대질을 하면 그도 나에게 삿대질을 하며 나에게 욕을 하고 있었다. 다시 고개를 푹 숙이고 오늘 일을 떠올려 보았다. 활동사진처럼 하루의 기억들이 빠른 속도로 나타났다 사라졌다. 속이 울렁거렸다. 속의 내용물을 모두 쏟아내고 나니 한결 속이 가벼웠다. 잠이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잠은 침대에서 자야했다. 그러나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아무리 일어서려고 했지만 일어 설 수 없었다. 눈꺼풀이 천근이었다.
한참 시간이 흐른 것 같았다. 간신히 눈을 떴을 때 나는 변기에 앉은 상태로 옆으로 기대어 코를 골고 있었다. 깜빡 잠이, 잠이 든 상태였다. 희미한 화장실 전등이 나의 존재를 알려 주었다. 찬물로 세수를 하고 다시 변기 뚜껑에 앉았다.
‘아, 그렇지. 그녀와 함께 왔었지.’
내가 화장실을 나왔을 때 나는 숨이 멎을 뻔 했다.
분명히 T는 집으로 돌아갔다고 들었는데 그가 어느새 19세기 프랑스 화가인 ‘앵그르(Ingres)’로 변신하여 화려한 누드 한 폭을 그려 놓은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나의 복잡한 두뇌는 금방 1814년 앵그르의 출세작인 '그랑 오달리스크‘를 떠올렸다. 터키황제 슐탄의 여인이 전라(全裸)의 모습으로 더 번을 쓴 채 요염한 모습으로 쏘아보는 모습은 충격이었다. 청년기 순진했던 나에게 오달리스크는 늘 머릿속에 맴돌았다.
그렇게 오랜 세월 뇌리에 각인된 채 떠나지 못하고 있는 황제의 여인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늘씬한 허리선과 풍만한 뒤태는 나의 이성을 흐려 놓기에 충분했다. 은은하게 쏟아지는 불빛에 노출된 그레실의 실체는 육욕에 물든 할렘(harem)의 황제의 여인에 비할 바가 못 되었다. 나도 모르게 그녀가 베개를 베고 옆으로 비스듬히 누워있는 침대 곁으로 다가갔다. 눈이 시리다 못해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나는 한 폭의 명화를 감상하는 기분으로 길게 호흡을 하고 천천히 아주 천천히 전체에서 부분으로 옮겨가며 명화를 감상하였다.
그레실의 할아버지는 스페인계통의 남자로 이곳 원주민 여자와 결혼한 탓에 그레실의 가족들은 모두 피부가 백인의 피부와 거의 같았다. 이곳 원주민들이 약간 진한 갈색의 피부인데 반해 그레실은 마치 서유럽에서 이민 온 사람 같았다. 나는 그레실의 사진을 처음 보았을 때 내가 알고 있는 P국의 상식에서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이 나라 사람들 대부분이 까무잡잡한 피부였기 때문이다. 나중에 그레실은 자신의 뿌리에 대하여 고백하면서 나의 의문은 풀렸다. 철저한 캐톨릭 신자인 그레실은 편지 끝 부분에 늘 하나님에게 나의 건강과 가족의 평안을 기원하는 내용을 덧붙이곤 했다.
명화를 앞에 두고 외설이니 음란이니 하는 말은 어불성설이었다. 따뜻한 방안 온기에 스스로 그린 명화는 신기루가 아니었다. 나는 숨 쉬는 것조차 잊고 명화감상에 도취했다. 비록 전라(全裸)의 모습은 아니지만 오히려 반라(半裸)의 혼란스러운 모습이 더욱 감칠맛 있는 것 아닌가? 나는 잠시 눈을 감고 기로에 서서 방황하는 내 모습을 바라보았다. 비료 한 줌도 주지 않고 잘 익은 남의 과실을 따는 행위는 분명 범죄이고 양심을 속이는 행위이며 두고두고 자신에게 큰 상처로 남을 것이고 생각했다.
여인에게 술을 권하고 술을 못 이겨 잠든 여인을 어찌해본다는 것은 사내로서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행동이다. 내 피부의 한 부위로 그레실의 실체를 직접 느끼기보다 단지 눈으로 명화를 즐기는 것이 좋다고 나는 결심하였다. 디지털시계가 새벽 5시를 알리고 있었다. 보면 볼수록 숨이 멎을 것 같았다. 살며시 그레실의 육덕을 만져보려고 손을 들다가 나 스스로 흠칫 놀라며 얼른 손을 내렸다. 내 육신의 아래 부위에서 계속 강한 신호를 보내왔다. 그러나 위에서는 전혀 반대의 의견을 보내오고 있었다.
눈이 부시도록 하얀 반투명의 실크 속에 아름다운 육신이 용광로처럼 불타고 있었다.
그 불타고 있는 육신의 활화산을 나의 가슴으로 덮어 꺼주고 싶었다. 그러나 자칫 불을 끄다가 두 영혼이 모두 타버릴 것 같았다. 잔잔하게 들려오는 그레실의 숨소리는 일정했다. 나를 기다리다 지쳐 홀로 잠든 것이 분명했다. 아니, 내가 화장실에서 나온 것을 알고 잠든 척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살며시 그레실의 뺨에 키스를 했다. 그러나 그녀는 석고상이 된 것 처럼 전혀 반응이 없었다. 더 이상의 진전은 곧 전면전을 예고하거나 최소한 국지적이며 일방적인 승리를 쟁취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깊은 상처로 얼룩이 질 것 같았다. 메모지를 꺼내 간단하게 메시지를 적고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I'll be back in 10 o'clock am. I love you !
호텔 안내 팸플릿을 보니 새벽 5시부터 지하에 있는 사우나 실이 문을 연다고 되어있다. 객실을 나와 엘리베이터를 탔다. 10시면 T가 다시 호텔로 찾아 올 시간이다.
프런트에 2312호에 정확히 9시쯤 콜서비스를 부탁하고 지하 사우나로 향했다. 사우나에는 이미 여러 명의 젊은 남자들이 내려와 있었다. 얼굴이 피곤에 지친 것으로 보아 밤새도록 연인과 끈끈한 밤을 보냈거나 아니면 술과의 전쟁을 벌인 한심한 부류들 같았다.
매혹적인 그레실의 뒤태가 계속해서 내 시야를 흐리게 했다. 앞에 있는 남자 손님도 그레실로 보였고, 왔다 갔다 하는 남자들의 뒷모습도 모두 그레실의 미끈한 뒷모습으로 보였다. 사우나를 나가서 다시 2312호로 돌아가 그레실을 안고 본능적인 행위를 하고 싶은 충동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그러나 남자가 한번 결심한 것은 어떠한 일이 있어도 지켜야 한다는 나의 철칙이 더욱 강했다. 찬물과 뜨거운 물을 차례로 끼얹어 보아도 아무 감각이 없었다. 오로지 투명하고 얇은 천에 감춰진 그레실의 살인적인 뒤태만이 머릿속에 꽉 차 있었다.
‘아아, 바보. 나는 정말로 바보다. 바보야. 혹시 그녀가 잠들지 않은 상태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아니야, 그녀는 분명히 잠들어 있었어. 바보가 아니라 용기 있는 사내야. 어머니께서 분명히 나를 보시고 잘했다고 하실 거야. 가만, 공짜로 주는 떡도 먹지 못하는 나는 정말 바보가 맞을 거야. 뭐가 뭔지 나도 모르겠어. 내가 제대로 세상을 살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또 한 번 그녀의 가슴에 대못을 친 것은 아닌지. 나도 모르겠다고......’
냉온탕을 번갈아 다니며 몸을 괴롭혔다. 술이 깨기 시작하면서 뒷머리가 띵했다. 속이 메스껍고 구역질이 다시 날 것 같았다. 억지로 다시 속내의 덜 삭여진 내용물들을 빼내고 나니 속이 뒤집힐 것처럼 통증이 전해졌다. 차가운 물로 입안을 헹구고 온탕에 몸을 담그고 어제 하루 동안 나에게 펼쳐졌던 한편의 드라마를 다시 그려 보았다. 생각할수록 짜릿했다. 드라마를 몇 번이고 자꾸만 돌리다가 잠이 들었다.
“헬로, 헬로, 워이컵 웨이컵”
누가 나를 흔들어 대는 바람에 간신히 눈을 떴다. 어린 종업원이 속으로 중얼거리면서 나를 깨웠다. 사우나 벽에 기대어 코를 고는 나를 종업원은 보다 못해 깨운 것 같았다. 잠간 잠이 든 것 같은데 두 시간을 넘게 잠이 들었다.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려고 했지만 만사가 귀찮았다. 이대로 쓰러져 하루 종일 잠을 자고 싶었지만 다시 사우나에서 잠 잘 수 없었다. 그때 번개처럼 좋은 생각이 스쳤다.
‘그렇지, 내가 잘 방이 또 있지. 그래 아침이지만 다시 들어가 보는 거야.’
한국 여행사에서 남자 2인당 1객실로 배정한 방 생각이 났다. 오전 10시까지 앞으로 3시간이 남아있으니 최소한 2시간 정도 잠을 잘 수 있다. 얼른 사우나에서 나와 13층의 내 방으로 향했다. 문을 노크하자 룸메이트가 얼른 문을 열어주었다.
“아니, 어디서 밤을 샌 거요? 난 형씨가 한국으로 돌아가 버린 줄 알았다오.”
“밤새 이곳 친구들과 술을 퍼마셨습니다. 이제 막 술자리가 끝났는데 잠이 쏟아지네요. 나, 지금부터 잠시 눈 좀 붙일 테니 깨우지 마세요. 10시 쯤 일어 날 겁니다. 그리고 가이드에게 나는 한국에서 온 일행들에게서 이탈해 홀로 이 도시를 여행할 거라고 이야기 했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알겠소. 1층 레스토랑에서 식사마치고 아침 9시까지 버스에 타라고 했소. 난 그럼 아침 좀 먹고 오겠수다.”
룸메이트는 시큰둥한 얼굴로 방을 나갔다.
막상 침대에 누었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몇 번 뒤척이다 간신히 잠이 들긴 했지만 선잠이었다. 금방 눈을 뜨고 멀거니 천정을 올려다보았다. 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왜 이 곳에 왔는지 그리고 오늘 하루는 또 어떻게 보내야 할지 천천히 고민해 보았다. 시계는 9시를 알려주었다. 지금쯤 그레실에게 콜(Call) 서비스가 전달되었을 것이고, 홀로 침대에서 일어난 그녀는 허탈해 하면서 나를 원망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레실이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까? 나의 사내답지 못한 행동을 두고 적대감을 품거나 주는 감도 못 따먹는 멍청이쯤으로 판단하고 피식 웃고 있지는 않을까? 아니지 나의 신사다운 행동에 감격해 하고 있을지도 몰라.’
나는 일어나 면도를 하고 부수수한 얼굴에 로션을 바르며 마치 어젯밤에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가면을 썼다. 눈이 충혈 되어 있었다. 한 시간 후면 T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나에게 아침인사를 건넬 것이고 나는 어젯밤에 그레실 하고 아무 일도 없었다고 변명을 해야 할 것이다.
‘그 여우같은 T를 어떻게 이해를 구해야하나?’
10시 이전에 미리 그레실이 있는 2312호로 가야한다. 만약 내가 그 방에 있거나 없거나 T는 요상한 상상을 하면서 시간 맞춰 올 것이고 혹시 콜 서비스를 받고 난 후에도 술기운을 이기지 못한 그레실이 잠들어 있다면 큰일이 아닐 수 없다. 행여 거의 전라(全裸)나 마찬가지인 그레실을 보고 T가 억제되어 있던 본성을 드러낸다면 나로 인하여 큰 일이 벌어 질 수 있기 때문이다.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마음이 급해지기 시작했다. 대충 준비를 마치고 객실을 나섰다. 이곳 M시에 머무는 동안 나는 이 호텔에 계속 묵을 예정이므로 짐을 챙길 필요가 없었다. 엘리베이터가 너무 느리다고 생각했다. 2312호를 노크 했다. 노크 하자마자 그레실이 환하게 웃으며 나를 맞아 주었다.
“Good morning, Honey?"
"Good morning, My Lady?"
그녀의 환하게 웃는 모습에 나는 한숨을 쉬었다. 만약 술기운을 이기지 못하여 지금까지 침대에서 헤매고 있다면 어쩌나하고 걱정했었다.
침대는 깨끗하게 정리정돈 된 상태였고 그레실은 막 화장을 끝낸 듯 화장품 케이스가 경대 위에 놓여 있었다. 내가 써 놓고 나간 메모 덕에 그녀는 안심하였을 것이다. 메모지 한 장 남기지 않고 나갔더라면 그녀는 굉장히 기분이 우울해 있거나 나에게 심한 모욕감을 느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어젯밤, 어디 있었어요?”
“이 호텔 지하에 있는 사우나에 있었어요. 당신이 나 때문에 단잠을 자지 못할 것 같아서요.”
“......”
“그레실, 미안해요.”
“아니에요. 난, 지난밤 진정한 흑기사를 보았어요. 그 흑기사는 나를 영원히 지켜 줄 거라 믿고 싶어요. 고마워요. 혹시, 내가 술에 취해 당신에게 무슨 실수라도 하지 않았어요?”
“오, 노노. 전혀 없었어요.”
“정말이에요?”
“정말이고말고.”
“고마워요.”
나는 답변은 그렇게 하면서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간밤에 그레실 뺨에 살짝 키스를 하였고 긴 시간 음흉한 시선으로 그녀의 풍만한 육신을 모두 훔쳐 본 것이 마음에 찔렸다. 활짝 웃는 그녀를 살며시 안아 주었다.
“허니, 나 간밤에 꿈을 꾸었어요.”
“오오, 그래요. 무슨 꿈인데요?”
“내가 어느 먼 섬에 신혼여행을 갔었어요.”
“그래요? 코라손 하고 또 간거에요?”
“아뇨.”
“아니라면?”
“분명히 남자는 남자인데 얼굴이 생각이 잘 안나요.”
“응? 얼굴이 생각나지 않는다니? 세상에 그런 일도 있나? 신랑 얼굴도 몰라? 하하하하......”
“호호호호. 나 바보 맞죠? 신랑 얼굴도 모르다니요?”
그레실은 깔깔거리면서도 한편에는 짙은 우수(憂愁)가 드리워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자기와 결혼한 남자 얼굴을 모르다니.”
“그런데, 이제 생각났어요.”
“이제?”
“네에.”
“그게 누군데? 그 남자가?”
“바로 당신이에요. 아침에 콜서비스 받고 잠에서 깨었을 때부터 그 남자가 누군가 골몰히 생각했어요. 생각이 날 듯 하다가도 안 나고, 날 듯하다가 또 사라지곤 했어요. 그런데, 그런데 이제 보니 바로 그 남자가 바로 당신이었어요.”
“그 남자가 나라고? 하하하하하. 기분 좋은데 그레실. 내가 당신하고 신혼 여행을 갔었다니까?”
“미워요. 하니. 어쩜 나만 홀로 남겨두고......”
나는 그녀의 아쉬워하는 얼굴빛에서 나에 대한 원망이 서려있다는 것을 알았다. 콧등이 찡했다. 울컥 속에서 무언가가 금방 올라올 것만 같았다. 간밤에 내가 자신의 곁에 없었다는 것에 대하여 그레실은 굉장히 섭섭해 하는 눈치였다
“Gresil, I'm sorry. I'm sorry.”
“Honey, I love you. I love you."
“Sorry."
그녀의 볼에 살짝 눈물이 비쳤지만 못 본체 했다. 나와 그레실은 포옹을 한 채 마치 정물화 속의 물체가 된 것처럼 잠시 시간을 잊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T가 방문을 노크할 것 같았다. 10시간 넘었지만 T는 나타나지 않았다. 내가 그레실과 마주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을 때 그레실의 휴대전화에서 노래가 흘러 나왔다.
“헬로? 오우, 미스터 T. 어디세요? 지금 10시가 훨씬 넘었는데. 호텔로 못 온다고요? 회사에 급한 일이 생겨서요?”
"허니, T에게 급한 일이 생겼다고 하네요.“
“그래요?”
나는 다시 한 번 T에게 뒤통수를 맞은 듯 머리가 띵했다. 나는 T를 심술꾸러기라고 생각했다. 철저하게 나와 그레실에게 오붓한 시간을 제공하기 위하여 일부러 핑계를 대고 있는 것이 확실했다.
“저런, 어쩌나 그럼?”
“허니, 우리 짐을 꾸리고 나가요. 먼저 아침식사 하셔야하고요.”
“그레실, 오늘 하루 어떻게 보내야 하죠?”
내가 곤란한 표정을 짓자 그레실은 웃으며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걱정하지 말아요. 내가 이곳 M시의 유명한 관광지와 맛있는 레스토랑으로 안내 할게요. 무조건 나만 따라오시면 되요.”
“오오, 그래요? 역시 내가 그대를 찾아오기 정말 잘 한 것 같아요.”
"우리 레스토랑에서 간단히 식사하고 나가요. 내가 당신을 데리고 갈 데가 있어요.“
“어딘데요?”
“미리 알려주면 안돼요.”
“무척 걱정되는데. 무엇을 어떻게 준비해야 할지.”
새벽부터 내리던 비가 그치고 파란 햇살이 세상을 비추기 시작했다. 긴 생머리에 선글라스를 낀 그레실의 뒷모습은 영락없는 20초반의 아름다운 미시의 모습이었다. 거의 완벽에 가까운 S라인이 나의 시선을 유혹했다. 약간 까무잡잡한 이곳 사람들은 내가 거의 백인에 가까운 그레실과 손을 잡고 시내를 걸어가는 모습을 보고 질투와 시기어린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들의 눈에는 상당히 어색하게 보였을 것이다. 자국의 아름다운 여인이 동양 남자와 백주(白晝)에 손을 잡고 걷는 모습에 약간은 기분이 언짢을지도 모른다. 나는 날아갈 듯 기분이 좋았다. 마치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날씨는 건기 철이라 매우 더웠다.
조금 걸어도 땀이 비 오듯 했다. 내가 자꾸만 땀을 닦아내자 그레실은 택시를 세웠다.
“산 아구스틴.”
“오케이.”
택시기사는 나를 흘끔 한번 처다 보더니 야릇한 미소를 지었다.
“산 아구스틴?”
금방 카톨릭 냄새가 풍겼다. 분명히 동양의 나라인데 국민들의 의식은 전혀 동양인의 사상과는 거리가 먼 것처럼 보였다.
택시가 시원스럽게 도심을 미끄러지듯 달렸다. 전 국민의 90%가 카톨릭 신자의 나라답게 도심에는 고딕식의 유럽풍의 성당이 자주 눈에 띄었다. 아마도 에스파냐와 미국의 식민 지배를 받은 탓이리라. 300년 넘게 스페인의 지배체제에 있다 보니 국민의 대부분이 강제로 개종되거나 자연 동화되어 카톨릭 신자가 되었을 것이다. 내가 깊은 명상에 빠져있는 사이 목적지에 도착하였다.
바로크 양식의 건물이 한국에서 온 사내를 압도했다. 성 어거스틴 대성당이었다.
내부로 들어가자 크리스탈로 장식된 화려한 샹들리에가 이국의 손님을 맞고 있었다.
천정과 벽에는 두 사람의 이탈리아 화가가 그린 성화(聖畵)가 오랜 풍상을 견디면서도 전혀 손상되지 않은 채 고고하게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성당 내부도 바로크 양식으로 설계된 듯 했다. 2차 대전 당시 수많은 폭격에도 불구하고 건재를 과시하고 있는 성당에 대하여 경외심마저 들었다. 2년 전 바티칸의 베드로 대 성당에 갔을 때와 비슷한 경건함을 느꼈다.
“허니, 이곳은 이곳 사람들에게 가장 신성한 장소에요. 이 곳 사람들은 이 성당에서 결혼식 올리는 것을 지상의 가장 큰 행복으로 여기고 있기도 해요. 만약, 만약 내가 그대와 맺어 졌더라면 나는 이곳에서 성대한 결혼식을 올리고 싶었어요. 나의 아버지, 어머니 또 당신의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성모 마리아님의 축복 속에 당신과 결혼식을 올리고 싶었어요. 나는 당신으로부터 나를 사랑한다는 내용의 편지를 받았을 때 늘 성모 마리님에게 당신의 안전과 평화를 빌었어요. 그리고 당신을 나에게 데려다 달라고 기도 했고요.”
그레실은 잠시 고개를 숙이더니 손수건을 꺼내 눈가를 닦았다.
‘아아, 내가 심사숙고하지 못하고 함부로 한 말이 그레실에게 큰 희망인 동시에 깊은 상처로 남아 있었구나. 30년이 지난 이제 내가 어찌해야 이 여인의 가슴에 남은 상처를 치유할 수 있단 말인가?’
그레실은 좌석에 앉더니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영어와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자국어를 섞어 가며 올리는 그녀의 기도의 내용을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그녀의 감정이 혼합된 음성으로 보아 대충은 알 것 같았다. 나도 조용히 의자에 앉아 합장했다.
“성모님, 죄송합니다. 이 미련한 영혼으로 인하여 한 소녀가 미몽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나이다. 부디, 소녀를 밝은 길로 인도하시고, 이제는 길고 긴 눈물의 여정(旅程)에서 탈출 할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늘 꿈속에서 그리던 사랑했던 인연을 30년 만에 만났습니다. 인간의 방식으로 해결할 수 없기에 이렇게 성모님의 사랑과 자비를 구해 봅니다.
서로의 반려(伴侶)가 있어 옛 시간으로 돌아갈 수는 없지만 30년 전의 순정은 절대 변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이 땅을 떠나 한국으로 돌아간 후에도 불쌍한 여인을 굽어 살펴 주소서. 제가 본 여인은 세상에서 가장 순수하고 깨끗한 소녀(素女)였습니다. 성모님, 이 어리석은 영혼이 간절히 빌고 또 비옵나이다.”
내가 마치 독실한 카톨릭 신자의 신분으로 성모님께 기도를 드리는 것으로 착각한 그레실은 내 손을 슬며시 잡으며 기뻐하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내가 크리스천이면 어떻고 부디스트인들 어떠랴. 한때 너무도 보고 싶어 수많은 밤은 하얗게 밝혔던 그 여인이 곁에 있는데, 백년도 못 사는 중생들이 어떤 종교인들 무엇이 어떠랴. 내가 방성(放聲)을 끝내고 눈에 고인 액체를 손등으로 닦으려 하자 그레실은 얼른 향긋한 손수건을 건넸다. 성 어거스틴 성당을 나온 우리는 사진을 찍고 택시 편으로 다음 목적지를 향했다.
“다음에는 우리나라의 최고 영웅인 호세 리잘 공원에 가려고 해요.”
‘아아, 호세리잘. 스페인이 이 나라를 식민통치하던 시절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받친 영웅, 호세 리잘.’
순간 나는 일제 강점기 대한독립을 위해 목숨을 버린 투사들이 생각났다. 호세 리잘 공원에서는 큰 감명을 받지 못했지만 그가 사형장으로 끌려가던 당신의 발자국을 형상화 놓은 길에서는 나는 잠시 고인의 애국심을 생각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국력이 미미하면 외침을 받기 마련이다.
발바닥이 몹시 아팠다. 대충 10시간 정도 걸었다. 물론 중간 중간 택시나 대중교통을 이용하기도 했지만 상당한 거리를 도보로 이동했다. 점심때는 M시에서 유명하다는 이하우이하우(ihawihaw)에서 해산물 요리를 곁들여 한잔 술로 이국의 향취를 만끽했다. 유명세를 타는 식당답게 나는 그곳에서 여러 명의 동포들을 보았다.
다시 땅거미가 지고 있었다. 다시 근심거리가 생겼다. 오늘 밤은 또 어떻게 보내야 할지 막막했다. 지난밤 같은 악몽을 재현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환상 속에서 앵그르의 ‘그랑 오달리스크’를 다시 보고 싶지 않았다. 나는 자꾸만 그레실의 눈치를 보았다. 저녁 식사를 현지식으로 마치고 호텔로 돌아오는 택시 안에서 그녀는 내 손을 꼭 잡고 있었다.
오전에 한 차례 비가 온 뒤로 하루 종일 작열하는 태양을 피해 다녀야 했다. 후끈 달아오른 아스팔트의 열기로 남국의 불야성 도시는 더욱 뜨겁게 달궈지고 있었다.
온 종일 걸은 탓에 피로가 엄습해 왔지만 곁에 있는 여인을 집으로 보내고 혼자 휴식을 취할 수는 없었다. 호텔 현관까지 오면서 내 팔짱을 낀 채 조용히 걷던 그레실의 손에 살며시 힘이 들어가는 것을 감지할 수 있었다. 이후의 스케줄을 어떻게 짰으면 좋을지 머리를 회전시키면서 그녀 나름대로 묘안을 강구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다고 바로 객실로 들어 갈 수도 없었다. 내가 그레실을 데리고 내 방으로 들어간다면 룸메이트는 눈이 휘둥그레져서 내가 현지 아가씨를 낚아챘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레실을 아무 남자에게 몸을 내 맡기는 싸구려 창부(娼婦) 둔갑 시킨다는 것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레실과 함께 시간을 보낼 좋은 방안이 떠오르지 않았다. 내 동정을 살피던 그레실이 호텔 현관문에 들어서자 걸음을 멈추었다.
“Honey, Do you have a good idea?"
"……."
"I wanna go to night club located in this hotel for to kill time."
그레실이 내 허리를 안고 애원하는 눈길을 보냈다.
"Ok, that's a bright plan. Go there my darling."
나는 흔쾌히 그녀의 제안에 동의했다. 만일 내가 대답도 못하고 우물쭈물 대면 재미없는 남자로 비춰질까 두려웠다.
그녀의 즉석 제안에 내가 주저 없이 응하자 그녀도 기분이 좋은 듯 얼른 나에게 팔짱을 끼더니 지하로 안내했다. 나이트클럽은 벌써 많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웨이츄레스의 안내를 받아 중간 쯤 자리를 잡았다. 3인조 여성 보컬그룹이 나와서 브리트니 스피어스의 비트 뮤직을 울부짖듯 토해 내고 무대에는 다양한 인종들이 열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자리에 앉자마자 몸을 흔들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나의 조급성이 탄로 날까봐 꾹 참고 나이트클럽 안을 살펴보았다.
규모는 서울에서 물 좋은 나이트클럽보다 작아 보이긴 했지만 내부 인테리어나 음향기기의 음질은 더 뛰어 난 것처럼 보였다. 테이블의 반 이상이 손님들에게 점령되었고 중키의 토종 종업원들은 거의 날듯이 테이블 사이를 누비고 다녔다.
그레실이 대충 술과 안주를 시켰다. 차차 나이트클럽 내부가 시안에 포착되기 시작했다. 자세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상당수의 손님의 옷차림과 행동 그리고 크게 떠들어 대는 모습이 틀림없는 중년의 동포들이었다. 마치 자신들의 안방이라도 되는 줄로 착각하고 있었다.
‘염병, 나와서도 그 버릇은 남 못주는구먼.’
내가 혼자말로 중얼거리자 그레실이 묘안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네가 얼른 술을 따르며 씽끗 웃어보이자 그녀는 영문도 모르고 따라 웃었다. 브리트니 스피어스의 노래에 이어 고객들의 연령을 고려했는지 스모키의 ‘I'll meet you at midnight.'가 빠른 템포로 연주되기 시작하고 금발의 남자가수가 열기를 토해내기 시작하자 무대 위에 있던 각국의 인종들이 환호하면서 몸을 흔들어 댔다.
이미 술 두병이 바닥을 보였다. 저녁을 들면서 마신 토속주와 독한 술이 뱃속에서 섞이면서 속이 울렁거렸다. 그레실은 연거푸 잔을 들며 나에게 강요하다시피 했다.
‘아니, 오늘 밤 술독에 빠지려고 작정했나?’
남자 체면에 나는 그녀의 제의에 바로 바로 응해 주었다. 서서히 속이 뜨거워지면서몸도 뜨거워졌다.
“Honey, Shall we dance?"
"Good."
내가 그레실의 보드라운 손을 잡고 무대로 나가자 그녀는 무척 신이 났는지 나가면서도 음악에 맞춰 히프를 살짝살짝 흔들었다. 나는 그녀의 손을 잡고 백인들과 토종원주민들의 그룹을 피해 동양인들이 춤추는 그룹 옆에 자리 잡았다.
스모키의 크리스 노만 목소리를 거의 흡사하게 남자가수가 피를 토하듯 빨간 밤의 열기를 뿜어냈다. 백인들과 원주민들 보다 극동 아시안 들은 묘한 포즈를 잡아가면 신들린 듯 몸을 흔들어 댔다. 한민족 특유의 고고, 디스고, 막춤 등이 시끌벅쩍 하게 연출되면서 무대는 금방 활화산처럼 달궈졌다.
내가 그들과 합세하자 그레실도 내 뒤에 바싹 붙어 신들린 듯 몸을 흔들어 댔다.
상당한 미모의 이국 여인이 내 뒤에서 그림자처럼 몸을 흔들어 대자 춤을 추던 동포들은 우리를 주시하며 몸을 흔들어 댔다. ‘갑자기 어디서 나타난 연놈들이 무대를 휘젓고 다니나?‘하는 시선들이었다. 나는 동포들의 따가운 시선을 무시하고 그레실과 마주 서서 묘한 포즈까지 연출해 가면서 우리의 영혼까지 비틀거릴 정도로 흔들어 댔다.
천정의 비트 조명들이 모두 우리를 향해 달려드는 것 같았다.
거의 한 시간 이상 다양한 음악에 맞춰 몸을 흔들어 댔다. 이미 아래 위 속옷은 땀을 흡수해 축축했다. 그레실 역시 얼굴에서 김이 모락모락 날 정도로 얼굴이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나는 술 취한 상태에서 너무 격한 운동을 하면 자칫 혼절 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노래가 끝나가 얼른 그레실의 손을 잡고 테이블로 돌아왔다.
“Honey, excellent! very nice!"
얼굴이 빨갛게 상기된 그레실이 엄지손가락을 보이면서 나의 열정적인 춤 솜씨에 놀랐다면서 두 팔까지 벌리면서 오버액션을 취했다.
“But You are a best dancer and sexist lady in this night club."
"Honey, Thank you!"
나의 찬사에 고조된 그레실은 연신 술잔을 들어 건배를 제의했다. 잔을 비우자 그레실이 잠시 화장실을 다녀오겠다며 일어섰다. 여러 가지 술을 섞어 마신 탓인지 몸이 내 의지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금방 그레실이 테이블로 돌아왔다.
“허니, T가 이곳으로 오겠대요. 괜찮죠?”
“물론이지. 그 친구가 우리를 가만두지 않는군. 하하하......”
나는 백만 대군을 얻은 기분이었다. 그렇지 않다고 오늘밤 그레실을 어떻게 하나하고 걱정하고 있었다. T가 합석하면 나는 T에게 그레실을 그녀의 집까지바래다 주라고 부탁하고 싶었다.“
“하니, 우리 건배해요. 오늘 밤이 일 년이고 백년이고 아니, 영원히 지속되었으면 좋겠어요.‘
“그레실, 그건 나도 동감이에요. 그렇게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우리가 술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는 사이에 T가 나타났다.
“hi, everyone."
"Hello, T."
우리는 마치 10년 지기(知己)라도 만난 것처럼 호들갑을 떨었다. 다시 술병과 안주가 배달되고 노래가 시작 되면서 우리들은 소풍 나온 초등학생처럼 마음이 들뜨기 시작했다. T는 야릇한 미소를 지으며 이야기 도중에도 나와 그레실의 얼굴을 번갈아 가며 슬쩍 슬쩍 훔쳐보았다. 아마도 T의 눈에 우리가 간밤에 만리장성이라도 쌓은 사이처럼 보였으리라. 음악소리에 고막이 터질 정도의 나이트클럽 안에서 그의 귀에 대고 ‘간밤에 우리는 아무 일도 없었다’고 할 수도 없었다.
이번에는 5명의 남녀 혼성 그룹이 나오더니 London Boys의 'Harlem Desire'를 빠른 창법으로 열창하기 시작하였다. T가 나와 그레실의 손을 잡아끌더니 무대로 나가자고 하였다. 무대는 이미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손님들로 꽉 찬 상태였다.
T는 어렵게 길을 열고 나와 그레실을 무대 한가운데로 인도했다. 세계 각국에서 모인 잡종들이 모여 거대한 군무(群舞)를 추고 있었다.
검둥이 흰둥이 누렁이 온갖 잡종들이 뒤 섞여 만들어내는 열광의 도가니는 보는 것 자체로도 감동을 주기에 충분했다. 강렬한 비트 음악 이 흥분의 세계로 우리 일행을 인도 하고 있었다. 마치 천국행 티켓을 거머쥔 이승의 재수 좋은 군상들 같아 보였다. 그 무리 중에 나와 그레실이 함께 동승했다는 사실이 꿈만 같았다. 내가 돌고 그녀가 돌고 T가 돌고 천정과 바닥이 빙빙 돌았다. 그렇게 정신없이 몸을 흔들기를 한 시간쯤 되자 비트음악이 끝이 났다. 그런데 나와 그레실이 막 자리도 돌아가려고 하자 T가 우리를 붙잡았다.
무대에는 음악에 취한 듯 서너 쌍만이 자리로 돌아가지 못하고 서로를 부둥켜안고 다음에 나올 음악을 기다리고 있었다. 음악이 멈추고 조명(照明)이 은은하게 바뀌면서 남자 사회자가 마이크를 잡더니 영어로 안내 방송을 했다.
Ladies and gentleman !
Tonight, I introduce an international couple to you. He is a korean, She
is a native. They meet after thirty years' absence. They were penpal before 30years. This is a big event since our club has be opened.
Please, give them a big hand.
사회자의 안내가 끝나자 강렬한 스포트라이트가 나와 그레실을 비췄다. 동시에 Congratulation 음악이 울려 퍼지면서 나이트클럽안의 손님들이 일제히 일어서서 박수와 환호를 보냈다. 나이트클럽은 열광의 도가니 그 자체였다. 나는 순간 기획력이 뛰어 난 T가 자신의 영향력을 이용해 나와 그레실에게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선물을 주었다고 판단했다. 조금 전까지 보이지 않던 T가 갑자기 꽃다발을 들고 나타났다.
“Gresil, Mr C, Congratulation."
"Thank You Very much. Mr, T."
나와 그레실은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T를 끌어안았다. 무대에서 세 사람이 포옹하자 손님들은 휘파람을 불며 미친 듯 박수를 쳐댔다. 여기저기서 한국말로 ‘파이팅!, 축하합니다.’라는 소리가 들렸다. 나와 그레실 그리고 T는 손님들을 향해 정중하게 허리를 굽혀 예를 표했다.
“미스터 T, 어찌 된 거요? 미리 이야기나 해주지 않고요?”
“하하하하, 여기 총지배인이 내 친구입니다. 내가 두 분을 위해서 깜짝쇼를 준비했어요. 기분이 나쁘셨다면 용서해주세요.”
“하하하하. 용서라니요. 내 생애 오늘은 최고의 날입니다. 고마워요. 당신은 정말로 개구장이에요.“
자리로 돌아 온 나는 너무 기쁜 나머지 날아갈 것 같았다. 우리는 서로의 국적을 잊고 일심동체가 되어 술을 마셔댔다. 이국의 도시는 점점 더 뜨거워졌다.
T는 자꾸만 나와 그레실의 잔에 술을 채웠다. 그는 30년 만에 만난 우리가 진정으로 커플이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연신 나와 그레실의 해후를 축하 한다며 우리보다 더 즐거워했다. 나는 점점 혼미한 상태로 접어들었다. 정신을 차리려고 허벅지를 꼬집어보았다. 비틀거리며 화장실로 달려가 입속으로 손가락을 넣고 억지로 뱃속의 내용물을 토해내려고 애썼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나는 지구를 떠나 은하수의 어느 별에 와서 별나라의 공주를 만나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별이 지금까지 내가 지구라는 별에서 살아오면서 쌓였던 온갖 번뇌를 말끔히 씻기고 늘 꿈꿔왔던 이상향을 보여주고 있었다. 30년 가까이 늘 내 뇌리에 자리 잡고 나를 원격 조정했던 별나라 공주를 만나서 그간의 서러운 눈물을 모두 쏟아내고 새로운 출발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거울 속에 술에 찌든 초췌해 보이는, 어디서 많이 보던 어수룩한 소년이 나를 보고 있었다.
간신히 테이블로 돌아오자 그레실과 T가 보이지 않았다. 술이 확 깨는 것 같았다.
그때 웨이츄레스가 다가오더니 나를 출구로 안내했다. T가 관광택시를 잡아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Mr, C."
T가 나를 보고 손을 흔들었다. T가 앞좌석에 타고 택시기사에게 뭐라고 하였다.
뒷좌석에 그레실이 눈을 감고 조용히 앉아 있었다. 택시가 미끄러지면서 도심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레실이 내 어깨에 살며시 기대어 왔다. 나는 택시가 하늘을 날고 있다고 생각했다. 도무지 여기가 택시 안 인지 호텔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나의 의식이 점점 흐려지면서 피곤이 엄습하고 있었다. 눈꺼풀이 천근 바위 같았다.
내가 눈을 떴을 때 객실에는 나 혼자 뿐이었다. 디지털시계가 오전 9시3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목이 몹씨 말랐다. 객실은 한국 여행사가 지정해 준 그 객실이 아니었다.
그러나 구조가 비슷한 것으로 보아 내가 3일간 묵기로 예약된 호텔 같았다. 눈을 떴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누구에게 얻어맞은 듯 손발을 움직일 수 없었다. 가만히 누워 지난밤의 일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지만 나이트클럽에서 택시를 탄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간신히 몸을 돌려 옆을 보았다. 내가 누워있는 침대는 트윈베드가 분명했다. 그러나 침대에 누워 있는 것은 잠옷 차림의 나 혼자 뿐이었다.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젖 먹던 힘까지 동원해 간신히 일어나 냉수를 들이켰다. 창문 커튼을 걷자 방안의 사물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런데 탁자 위에 곱게 접힌 하얀 메모지가 눈에 띄었다.
Last night, I sew heaven and appreciated peace. I'll come here 10 o'clock am.
‘Oh, My darling.'
내 베개 옆에 놓여있는 베개를 가만히 살펴보았다. 긴 머리카락이 서너 개 베개와 하얀 시트에 떨어져 있었다. 그리고 베개에서 향긋한 체취를 맡을 수 있었다.
‘아아, 그레실......’
10시에 그녀가 온다고 했으니 빨리 일어나야 했다. 점점 기력을 회복하면서 몸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었다. 세수를 하고 면도를 하면서 그녀의 얼굴을 그려 보았다.
간밤에 그녀도 대취했었다. 남자도 아닌 여인이 술을 나와 비슷한 량을 마시고 아침 10시까지 올 수 있을지 의심이 들었다. 뒷머리가 띵했지만 견딜 수 있었다. 대충 단장을 마치고 커피를 마시고 있을 때 현관 벨이 울렸다.
얼른 문을 열자 하얀 물방울무늬가 점점이 박힌 파란색 원피스 차림의 그레실이 화사하게 웃고 있었다.
“Did you have a good sleeping?"
그레실이 객실 안으로 들어오면서 나를 껴안았다.
“Happy Morning, Darling!"
나는 그레실을 잠시 안으며 그녀의 머리칼에서 나는 향긋한 냄새를 맡아 보았다. 베개에서 맡았던 그 냄새였다.
호텔 레스토랑에서 늦은 아침을 들고 호텔을 나오자 그레실이 택시를 잡았다. 그녀는 나에게 아무 설명도 없이 택시기사에게 행선지를 말하면서 나를 힐끗 보고 미소를 지었다.
“그레실, 어디?”
“그냥 저를 따라가시면 돼요.”
“.....”
10분 후 택시가 도착한 곳은 큰 병원이었다.
“여기는 내가 일하는 병원이에요. M시에서도 꽤 큰 병원에 속해요.”
우리가 병원 현관에 내리자 경비원들이 얼른 달려와 그레실에게 거수 경례를 하면서 정중히 예의를 표했다. 나도 얼떨결에 그들의 경례를 받고 얼른 오른손을 올려 응수했다. 그녀는 10층에 있는 그녀의 방으로 나를 안내했다.
“Wonderful! good view."
"Thank you, Honey. Please sit down."
그레실은 커피를 타더니 내 앞에 내려놓았다. 진한 원두향이 후각을 자극했다.
“드세요. 슈가는 넣지 않았어요.”
그레실은 잔잔한 미소를 짓고 나에게 시선을 맞추었다.
“음-, 아주 맛이 좋아요.”
“고마워요. 허니, 그리고 부탁이 있어요.”
“부탁?”
“네. 들어 주실 거죠?”
그레실은 내 입에서 어떤 답이 나올지 몹시 궁금해 하는 눈치였다.
“그럼, 무엇이든지 말해 봐요.”
“허니, 고마워요. 정말로 고마워요.”
그녀는 작은 방으로 들어가더니 주사기 네 개를 가지고 나왔다.
‘아니? 무슨 독감주사나, 예방 주사라도 놓으려고 그러나?’
“허니, 혈액형이 어떻게 되나요?”
“나는 O형인데......”
“아하, 그렇죠? 30년 전 허니가 나에게 보낸 편지에도 허니가 O형이라고 한 적이 있어요. 잘되었어요.”
그녀는 내 피를 뽑아서 자신에게 수혈하고, 대신 자신의 피를 나에게 수혈하겠다고 했다. 나는 머리가 쭈뼛 섰다.
‘아니, 이게 무슨 해괴한 짓인가? 만약 그레실이 에이즈나 기타 성병 등에 감염되었다면 나도 꼼짝없이 감염되는 것 아닌가’
잠시 내가 주저하는 기색을 보이자 그레실은 빙그레 웃으면서 서류를 나에게 보여 주었다.
“이것은 며칠 전, 이 병원에서 질병 감염여부를 조사한 결과서 에요. 우리 의사들은 보통 일 년에 서너 번 검사를 받아야 해요.”
“아, 그래요. 참 다행이네요.”
“다행히 나의 피와 허니의 피가 섞여도 아무런 이상반응은 없어요.”
그녀가 보여준 확인서를 보고 나는 흔쾌히 채혈과 수혈을 허락하였다. 서로의 피를 수혈한 뒤 나는 그레실을 꼭 안아주었다.
병원을 나온 우리는 M시와 M시에서 가까운 관광지를 찾아 즐거운 한때를 보냈다.
하루의 해가 우리를 질투하는 것이 분명했다, 금방 M시는 불야성으로 변했고, 한국식으로 저녁을 들고 그레실을 택시를 태워 보낸 뒤 나는 한국 여행사가 지정해 준 객실에 들었다.
“허니, 언제 또 오실거에요?”
“......”
“곧 다시 오실거죠?”
“......”
다음 날 오후, 그레실은 공항 대합실에 나와 내 손을 꼭 잡고 계속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지난 3일간의 해후는 30년 보다 긴 것 같기도 했고, 짧은 것 같기도 했다.
이대로 이곳에 불법체류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다링, 걱정하지 말아요. 곧 다시 찾아올게요. 아니면 그대가 서울에 올 수도 있잖아요. 사람은 누구나 영원히 함께 할 수는 없어요. 만남에는 반드시 이별이 있는 거에요.
너무 슬퍼하지 말아요.”
“허니, 흐흐흐흐흐......”
백설보다 하얗고 청순한 그녀를 뒤로 하고 출국장으로 들어가면서도 나는 그녀에게 눈을 떼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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