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조:
https://m.cafe.daum.net/enlightenment-k/dcM5/219?svc=cafeapp
오늘 어느 유명 종교 학자가 귀신을 조물주 혹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대상,
즉 타파해야 될 것으로 설명하면서 어느 종교를 대변하면서 교육하고 있는 강의 동영상을 보게 되었다.
그래서 오늘은 별로 달갑지 않은 귀신 이야기를 본의 아니게 해보게 된다.
건강한 삶과 귀신과 함께 하는 삶!?
사실 본 제목은 구도자의 삶과 금욕주의로 하려고 했으나,
말이 다소 딱딱한 느낌이 들어 좀 더 눈에 들어오는 말로 해 보려니
그렇게 한 번 해 보았다.
물론 누차 하는 이야기이지만 본인의 생각을 나타냄으로써 읽는 이로 하여금
또 다른 관점으로 바라볼 수 있는 시각을 보여주는 것이지, 꼭 내 말이 맞다는 것을 고집하지 않는다.
함께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그럼, 본론으로 가보자.
구도자(求道者)로서 살아가는 사람,
즉 건강한 몸과 마음을 가지도록 노력하는 사람이며,
각자의 삶 속에서
삶의 실체를 찾아가는 사람이며
자연의 사랑과 빛을 알아차리면서 믿음을 키우며 살아가는 사람이며
자연의 이치와 법, 진리에 따라 살아가려고 공부하는 사람이며
주어진 본성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이며
일상을 항상 양심에 비추어 바른 생활을 추구하는 사람을 말한다.
종교적으로는,
하느님 혹은 부처님의 뜻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이며
신의 빛에 머물면서 영성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이며
하나 뿐일 수밖에 없는 신의 사랑을 알아가면서 살아가는 사람이며
결국 그것의 실체(신의 사랑)를 몸과 마음으로 알아차리고,
몸으로 체득하여, 그것이 인생의 등불, 혹은 반려자가 되어
스스로 이끌어 가게 한다.
그게 인간 삶, 즉 도라는 것이며,
그것을 한마음으로 평생 추구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이다.
결국
구도자(求道者)란 인간 자체의 덜 된 부분을 조금씩 알아차리면서 마지막까지 그것을 바로잡아가는 것이
인간 삶의 궁극적 목표에 도달하게 한다. 즉 사찰이나 수도원이나 외딴 곳에서 나홀로의 수행은
전체를 알아간다는 것은 결코 충분하지 못하며,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왜냐면, 삶의 실체와 궁극적 목표가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내가 지금 고민하고 생각하는 그 순간 순간, 그때그때, 즉시즉시 나타나는
내 안에 있기때문이다. 지금은 21세기다. 일반사람들의 의식은 과거와 비교할 바 못된다.
스스로 알아차릴 수 있는 수준과 정도가 된다는 말이다.
그래서 생각을 바꿔야, 내가 산다는 말을 수없이 하게 된다.
다른 표현으로,
절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는 마음으로
베풀어가는 마음으로
이쁘게 낮추어가는 마음으로
이해하고 배려하는 마음으로
세상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공정한 마음으로
터득하고자 하는 진실한 마음으로
이루고자 하는 간절하고 절박한 마음으로
배우고자 하는 진실한 열망과 열려있는 마음으로
일상생활을 여유롭고 풍요롭게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사람,
그게 구도자(求道者) 삶의 사실과 진실이어야 한다.
고상하고 신비적이고 비현실적이고 기복적이며,
추상적이고 미신적이며 비상식적이고 진부한 그 어떤 고차원적인 것도 거기에는 있을 이유가 없다.
왜냐면, 그것들은 인간의 무지와 욕심에서 나오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모두 다 옛부터 수많은 경전에서
현재까지 회자되는 쉬운 말들이다.
그럼,
귀신과 함께 하는 삶이란,
상기 언급한 구도자의 삶과 반대가 되는 말이 된다.
많은 사람들이 악의 신과 선의 신을 구분하기도 하며, 악신 혹은 귀신들이 창조주를 대항해서 싸움을 벌인다, 혹은 아마게돈과 같은 혼돈의 세상을 언급하기도 한다.
신은 오직 하나이며, 누구 편을 들어주시는 분이 아니다.
죽은 자나 산 자나 다 신의 손바닥에 들어있다.
좋고 나쁨, 선과 악 등 모두 다 신의 영역 안에 존재한다는 말이다.
즉 우주 삼라만상의 존재 원천이 된다는 말이기도 하다.
즉 모든 것들은 신, 즉 조물주의 창조물이다.
그래서 선과 악, 좋고 나쁨은 공평하게 만들어 놓은 조물주의 작품이다.
왜, 신께서는 전쟁을 막지 않으시고 수많은 사람들을 죽게 내버려두십니까라는 말을 하게 되면
이 세상 최고의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 되는 것이다.
왜냐면, 인간 삶 속 공부 하기위해 책 한 페이지도 못 넘겨본 사람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무한대에서 무한소에 이르기까지 우주 삼라만상이 돌고 도는 원리가
바로 그 두 가지의 상호작용으로 돌아가기에 그런 것이다.
가령 각자 하나의 육체 속에서도 좋고 나쁨과 선과 악이, 육체라는 기계의 수명이 다할 때까지, 함께 작동되고 있다.
따라서 공부한다는 것은 각자의 몸 속에서 작동되는 나쁨과 악이라는 작동을 잘 알아차리며 좋은 작동을 유도하도록 하는 것이
진실한 삶을 영위하게 되는 것이다.
아무리 뛰어난 성인군자라해도 인간 몸을 가지고 있는 이상,
나쁨과 악이 작동하는 그 부품을 없앨 수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일반 사람들과 비교하여 단지 조금 덜 할 뿐이다.
내가 믿는 신, 부처님 혹은 하느님을 아무리 목숨을 다 받쳐서 믿는다해도
내가 저질러 놓은 죄를 사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이 세상 하직할 때까지 다 갚을 건 갚고 가야된다는 말이기도 하다.
내가 왜 불편하고, 왜 어렵고, 왜 아픈지, 무슨 죄를 지었는지 속히 알아차리며
무엇을 하든 육체가 살아있는 한 다시 시작해서 새 포대에 담는 방법 외에는 없다.
아래 내용은 수행의 바른길 제4권 - "일상의 깨달음을 통한 삶의 창조" 에서 발췌한 내용이다.
귀신에 대한 개념을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 보았다.
136p
2)깨우침의 기본과 귀신 과업
‘자기세계의 구축’이란 전체와 함께 공유되지 못하고 나 홀로 황홀하고, 나 홀로 최고가 되며, 나 홀로 희열에 차 있다면 결국 내가 최고가 되고 신으로 착각하게 되어 반드시 ‘나를 따르라, 믿으라.’ 로 발전하게 된다. 모두 다 귀신 씌워진 허황된 것이며, 인간의 무지와 욕심에서 나온다. 그게 귀신의 역할이며,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과업이다.
산 자나 죽은 자나 공히 부처님하느님의 것이며, 자연의 이치가 그렇게 돌아간다는 말이다.
그래서 사는 동안 줄을 잘 서는 것도 참 중요하기에 매순간 일상생활을 통해 인연의 복을 잘 쌓아가야 하는 이유다.
140p
신은 인간이 살 수 있도록 자리를 깔아 놓으면,
(신의 사랑)
인간은 각자 스스로 선택해서 가야하며,
(일체유심조)
사는 동안 신의 사랑에 부합된 믿음에 따라 원하는 바를 이룬다.
(견성성불, 기적)
157p
귀신 놀음이란 인간의식 속의 표현이며, 귀신의 입장에서는 해야 할 일을 하는 것뿐이다.
해라고 하는 공부는 하지 않고 엉뚱하고 허황된 짓을 하게 되면 즉시 들어온다. 자동이다.
그 사람을 최고로 만들어 최후에는 구렁텅이에 빠지도록 만든다.
그것은 사람이 깨달아 가도록 하는 프로그램으로 보면 틀림이 없을 것이다.
그들의 목적은 사람이 사람답게 속히 깨우치도록 하는 것이다.
귀신 놀음이란 귀신의 역할이라는 것이며,
귀신도, 자연이 순리이기에 거기에 따를 수밖에 없다.
산 자나 죽은 자 모두 부처님하느님 것이기에 귀신역시 자연의 이치 속 프로그램에 따라 작동되고 있다.
귀신놀음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한 가지가 있다.
반드시 내가 해 내어야 하며, 남이 해 줄 수 없다.
나의 믿음 즉 빛을 만들어야 하는데, 그것의 시작은 나타내는 말과 생각과 행동이며,
그 속에서 반성과 다짐, 그리고 감사로 다져가야 한다.
자아성찰이란 곧 믿음을 키우기 위한 바탕이 된다.
다시 말해서 귀신은 빛(나의 진실한 믿음)을 보면 바로 사라진다는 말은
자연의 이치에 따라 그렇게 돌아간다, 혹은 작동된다는 말이다.
밤에만 귀신이 나타난다는 말은 새빨간 거짓이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다.
진리는 항상 간단, 명료하며, 복잡하지 않다.
금욕주의(禁慾主義, asceticism)를 왜 건강한 삶과 연계해 설명을 하는지 이야기 해 보고자 한다.
일반적으로 말하는 금욕주의는 종교적 성향이 강하며, 육체와 물질보다 영적인 것을 중시하는데, 그것은 인간 삶의 반이상을 부정하는 것이 되기 쉽다. 여기서 본인이 말하는 금욕주의는 육체가 원하는 대로 부질없고 허망할 수 있는 욕망이나 욕심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마음을 가지고 나의 무지와 욕심에서 벗어나 육체를 바르게 이끌어 가는 것을 금욕주의로 정의하고자 한다.
즉 인간다운 삶을 산다는 것이며,
그것은 덜 힘들고, 덜 어렵고, 덜 아프게 간다는 것이다.
금욕주의의 삶이 아니라면,
대부분이 자연의 이치와 법, 진리를 벗어나게 되니
자신도 모르게 귀신놀음에 빠져 살게 된다는 말이기도 하다.
본인 정의 대로의 금욕주의를 잘 실천하여 가는 사람이라면
각자의 발길이 머무는 대로 만나는 사람과 대상들을 편하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되어,
상대와 편하게 소통이 되고 이해할 수도 있게 되어
상대를 편하게 만든다.
가령, 농사를 하려면 농사꾼이 되고, 장사가 필요하면 장사치가 되어야 하기에 그때그때 즉시즉시 순간순간 능숙한 카멜레온이 되어 나와 상대를 편하게 할 수도 있게 된다는 말이다.
아니라면,
좀 배웠다는 자기 존재의 엘리트 의식과 좀 산다는 노블레스 의식, 그리고
사회적 체면이 자신을 반드시 불편하고 마음을 아프게 할 수도 있게 된다.
모두 다 자신을 위해서이며, 무엇을 하던지 "사랑"이 시작점이자 종착역이며,
그게 알파요 오메가라는 것을 가능한 빨리 깨달아갈 수 있다면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물질적으로,
여유롭고 풍요롭게 살다 되돌아가게 된다.
"구도자의 삶"이란 건강하게 몸과 마음을 가꾸어 가는 삶을 말하는 것이며,
"귀신과 함께 하는 삶"이란 그와 반대되는 인생의 길을 가는 사람이며,
육체의 욕망과 이기심, 무지와 욕심을 따르는 것과 달리,
올바른 마음으로 육체를 이끌 수 있는
금욕주의의 삶이 바람직한 것임을 이야기 해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