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밭 언덕 위 아녜스 경당(Chapelle Notre-Dame Des Anges) 안에 들어가 감사 기도를 바치고 나왔습니다. 정갈하고 경건한 분위기였습니다. 내리막으로 마을을 빠져 나와 가파른 언덕길을 올라 갔습니다. 오른쪽 허벅지 감각이 없어지며 종아리까지 이상했습니다. 서둘러 무리해서 올라왔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길가에 60대 후반으로 보이는 영국인 부부가 앉아 아침을 먹고 있었습니다. 런던에서 온 린지와 맬콤 부부. 베장송을 출발해서 로마까지 가는 순례자들이었습니다. 어제 저녁 호텔 식당에서 봤다고 했습니다. 그 호텔에서 오늘 새벽 어두울 때 출발했을 것입니다. 아침 먹다가 남은 피자 한조각을 주어 감사히 받아먹었습니다. 영국인 부부가 출발하고 한참을 더 쉬면서 다리를 주물렀습니다. 육체적 한계 상황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눈을 들면 숲과 풀밭과 마을이 펼쳐진 곳이었습니다. 이 일대 스위스 국경까지 주하 산맥 언저리를 오두 (Haut-Doubs) 지방으로 부릅니다. 해발 800m 이상의 고원지대입니다. 가장 높은 곳은 1460m의 르 몽도(le Mont d'Or) 산입니다. 해발 945m의 두(Doubs)강 발원지 등 여러 강 발원지가 이곳에 있습니다. 축산 낙농업이 발달한 곳입니다. 치즈, 햄, 소시지 등 가공식품이 유명합니다. 몽도(Mont d'Or) 또는 바슈헝 뒤 오두(Vacherin du Haut-Doubs) 라는 소프트 치즈가 대표적인 특산품입니다. 소 젖이 원료입니다. 계절 상품으로 숙성 후 두 달 내에 팔아야 합니다.
몽도는 수분 함양이 많은 치즈여서 흘러내리기 때문에 가문비 나무 통에 담아 출하합니다. 이 치즈를 담는 나무 통을 만드는 것도 전문기술자들이 맡습니다. 가문비 나무의 변재(sapwood)를 얇게 깎아내어 씁니다. 변재는 심재(heartwood)와는 달리 나무의 물과 영양분이 지나다니는 색깔이 밝고 촉촉한 부분입니다. 치즈 맛이 이 나무 향으로 달라지기 때문일 것입니다. 요즘은 대량 생산체제여서 동 유럽 산을 쓴다는 얘기였습니다. 아직 중국제는 없는 모양입니다.
마을 농가에는 오두(Haut Doubs) 스타일의 구조들이 보존되어 있습니다. 오두 스타일 중에 뚜예(tuyé)라는 것이 있습니다. 고대 켈트어로 지붕이라는 뜻입니다. 길쭉한 피라미드 형 굴뚝인데, 샬레 같은 건물 지붕 위로 툭 튀어나왔습니다. 꼭대기에 줄로 바람 방향에 따라 열고 닫을 수 있는 환기창이 있습니다. 이 환기창 아래에 벽난로 굴뚝으로 연결된 훈제 공간이 있습니다. 샬레의 벽난로 굴뚝에서 나오는 장작 연기를 훈제공간으로 지나가게 해서 같은 훈제 육류를 만드는 곳입니다. 굴뚝 중간에 수평으로 긴 나무를 걸쳐 놓고 거기에 훈제용 고기를 매다는 것입니다. 소시지, 햄, 베이컨, 훈제 생선, 육포(brési) 등을 몇 주에서 몇 달 동안 매달아 놓고 연기를 쏘이는 것입니다. 삼나무, 전나무, 향나무 등으로 불을 땝니다. 이 지역 특산 모흐토 소시지(saucisse de Morteau)는 48시간이상 전나무 톱밥 연기를 쏘여야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뚜예는 이 지역 산골 생활의 심장이고 중심이고 영혼이기조차 합니다.
https://i0.wp.com/www.dijonbeaunemag.fr/wp-content/uploads/2016/04/schema-tuye-copie.gif?ssl=1
이 쥬하 고원지대는 스위스 경제권에 속한다고 보아도 무리가 아닙니다. 서남쪽으로 프랑스 땅은 농촌지역이고 도시는 멀지만 동북 쪽 스위스는 도시 공업지역이 있습니다. 스위스 국경너머에서 일하고 받아온 스위스 프랑화 임금은 유로화로 바꿀 때 환율 차로 높은 수익을 냈습니다. 물가가 싼 프랑스 쪽에서 장을 봅니다. 이 고원지대에 갈탄 광산도 있어 오랜 옛날부터 캤습니다. 목재 가공 등의 전통산업의 연장 선상에서 정밀기계공업의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스위스와 기술교류가 활발했던 곳이었습니다. 나무를 깎아 맞추다 보니 쇳조각도 비슷하게 다루었을 것입니다. 스위스 시계는 원조가 나무로 만든 뻐꾸기 시계였을 것입니다.
우왕(Ouhan) 마을을 벗어나 몽 펠레(Le Mont Pelé) 산 줄기를 탔습니다. 목장과 숲이 혼재한 길을 가파르게 올라가 해발 900m의 능선을 탔습니다. 약 2 km 짙은 숲 길은 호젓했습니다. 베어낸 통나무가 임도 곳곳에 쌓여 있었습니다. 산 줄기를 가로 지르는 D48 도로를 만나 동으로 방향을 바꾸었습니다. 찻길에서 영국인 부부가 사고를 당해 지나는 차를 세우고 있었습니다. 부인이 길가 도랑을 헛디뎌 넘어져 다리에서 피가 났습니다. 인근 의원과 연락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크게 다치지 않았기를 바랐습니다.
숲을 빠져 나와 D48 도로에서 남쪽으로 난 샛길 농로를 걸었습니다. 구 레 위지에(Goux-lès-Usiers) 마을 변두리의 해발 860m의 고원지대. 그늘도 없는 초록빛 평원은 단조로움 그 자체였습니다. 소 떼가 군데군데 풀을 뜯는 목장뿐입니다. 몇 m의 오르내림이 있는 농장지역을 2-3km 걸었습니다. 시야에 들어오는 농가 건물 한두채는 저 멀리 있었습니다. 이 일대는 석회암지대여서 빗물이 땅속으로 스며들어 버립니다. 밭 농사가 안 되는 곳입니다. 초지를 만들어 가축을 기르는 수밖에 없습니다. 이 평원에 나무가 자라지 못하는 이유가 이런 토질 때문입니다.
들이 끝나고 다시 숲으로 들어 갔습니다. 한참을 걸었습니다. 사람들이 좀 다닌 듯 숲은 약간 허전해 보였습니다. 말 탄 여성은 손을 흔들며 뚜벅뚜벅 지나갔습니다. 일종의 레크리에이션 지역입니다. 숲이 끝나면서 들판 건너 멀리 밀집한 건물들이 보였습니다. 4 km 떨어진 뽕따흘리에 마을이었습니다. 어린 아이를 앞세운 할매가 마을로 들어 가고 있었습니다.
뷔예쌍 (Vuillecin) 마을 인구 640명. 조용하고 한적했습니다. 가게나 카페가 없었습니다. 공사장에만 사람들이 보였습니다. 생 클로드 성당에 들어가 기도를 바쳤습니다. 생 클로드는 7세기 베장송 주교였습니다. 군인이었다가 베장송 수도원의 수도자였습니다. 수도원장에 이어 주교가 되었습니다. 목각 공예사들의 주보 성인이기도 합니다.
넓은 평원에는 작은 공장들이 드문드문 있어 도시 변두리 분위기였습니다. D130E 도로를 2 km정도 걸어 N57도로를 건넜습니다. 드넓은 마켓 주차장은 대량 소비시대의 광장이며 배급소였습니다. 스포츠 용품 매장에 들어가 중등산화를 골랐습니다. 이것을 신고 매장을 돌며 문제없는지 확인하고 99유로를 지불하고 나왔습니다. 주차장에서 갈아 신고 헌 신발을 버리면서 물건에 대한 서운한 마음이 없지 않았습니다. 도시 안 길을 2 km 걸어 뽕따흘리에 성문에 도착했습니다. 성문 앞 호텔 바에서 누군가 부르는 소리가 있어 보니 영국인 부부였습니다. 병원에서 일곱 바늘 꿰매고 택시 타고 왔다고 했습니다. 그만하기 다행이다 싶었습니다. 하루 밤 지내보고 여행을 계속할 지 결정하겠다고 했습니다. 쾌유를 빌었습니다.
뽕따흘리에(Pontarlier) 인구 17,500명. 이 지역의 비교적 큰 도시여서 유스호스텔을 비롯하여 숙박시설이 많습니다. 해발 800m 여서 4월부터 10월까지는 얼지 않습니다. 이상 기후가 아니면 한 여름에도 최고 온도 20-25도 사이입니다. 겨울에는 눈이 제법 쌓이고 여름철에도 사흘이 멀다 하고 비가 꾸준히 내리는 곳입니다.
뽕따흘리에(Pontarlier)하는 이름은 납작한 돌이나 절벽을 의미하는 원시 이름에서 기원했습니다. 비슷한 지명은 1255년 경의 문서에 Punerli 가 가장 오래 된 것입니다. 그 전에는 Ariolica 또는 시제릭 루트의 Abrolica로 나와 있습니다. 원시 이름에 접두사 pont(다리) 를 붙인 것 같다고 합니다.
이 지역 역사는 켈트 원주민 시절과 로마제국 시대를 거치고 나서 반달족의 침입과 정착이 이루어지는 시기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반달족은 스칸디나비아에서 발틱 지역으로 이동하였다가 게르만족 이동 시기에 알프스 서쪽 지역으로 들어왔습니다. 그 족속 일부는 이곳에 정착하여 부르고뉘 왕국을 세웠고 다른 일부는 이베리아 반도(스페인과 포르투갈)을 거쳐 북 아프리카를 휩쓸고 이탈리아에 상륙하여 파괴를 일삼았습니다. 지금도 반달리즘이라고 하면 로마 약탈을 염두에 두고 문명파괴를 의미합니다.
반달 족이 세운 브르고뉘 왕국은 마지막으로 처녀공주가 여왕이 되었는데 그녀가 합스부르크가의 막시밀리안 1 세와 결혼하면서 신성로마제국으로 바뀝니다. 그 공주의 손자가 카를 5세였고 프랑스와 갈등이 있었습니다. 1678년 네이매헌 조약으로 프랑스 영토가 되었습니다. 이런 정치적 혼란이 가라앉자 이곳은 스위스와 프랑스 간의 교역 중심지가 되어 번창했습니다.
국경도시 뽕따흘리에는 군사적 성격보다 상업적인 분위기가 강하게 보였습니다. 격식을 갖추어 만든 아름다운 생 삐에 성문 (Porte Saint-Pierre)을 지나면 시청 건물이 있었습니다. 18세기 오두 (Haut Doubs)지역 뽕딸흘리의 성문이면서 개선문이기도 했습니다. 고전양식의 성문 상임방은 화려한 문장으로 장식되었습니다. 원래는 도시 방어목적으로 성을 쌓고 성문을 설치했지만 이 성이 전투에 활용된 적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도시 성문은 차가 드나들 수 있는 가운데 큰 통로와 그 옆으로 사람만 다니는 작은 통로가 있었습니다. 성문을 통과하여 번잡한 시내를 지나갔습니다. 도시는 어디나 비슷했습니다. 누가 지나치건 말건 개의치 않는 것은 그만큼 사람들끼리 부딪치기 때문일 것입니다.
시청 앞을 지나 기차역까지 갔다가 생 베니뉘 (Saint-Bénigne) 성당에 들어갔습니다. 꽁뚜와 양식의 사각 종탑지붕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오지타일을 입힌 종탑 지붕 색깔이 짙은 회색이었습니다. 11세기 원건물에 개축과 증축을 반복하다 보니 시대별 건축양식 변화가 모두 겹쳐진 건물이 되었습니다. 로마네스크 바탕에 고딕 양식이 적용되고 꽁뚜와 양식까지 들어간 건물입니다. 생 베니뉘 성당 옆에는 옛날 성당 건물의 출입구 벽면만 보존되어 있었습니다. 성 베니뉘는 2세기에 순교한 디종(Dijon)의 성인입니다. 고딕 양식의 건물인데 안은 소박했습니다. 돌아가신 예수님의 눕혀진 나무 조각상을 성당 안에 모셔 놓았습니다. 장미창과 스테인드 글라스는 현대회화의 문양이 화려했습니다.
여행자 사무소에 가서 주늬 (Jougne)의 숙소를 알아봤습니다. 저렴한 호텔 방이 있어 예약하고 생 크화 알베르게 예약을 취소했습니다. 개인 전화로는 없는 방이 여행자 사무소 전화에는 나왔으니 공신력 차이가 있는 모양이었습니다. 비싼 스위스 체류기간을 하루 줄이는 효과를 기대했습니다. 오늘 묵을 호텔을 찾아가 주인 여자에게 전화 걸어 출입문 비밀 번호를 받았습니다. 씻고 좀 쉬었습니다. 저녁 식사는 케밥. 에어컨 없는 방은 밤 늦도록 더웠습니다. 이 동네에 모처럼 더위가 찾아온 모양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