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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사구팽(兎死狗烹)
사냥하러 가서 토끼를 잡으면 사냥하던 개는 쓸모가 없게 되어 삶아 먹는다는 뜻으로, 필요할 때 요긴하게 써 먹고 쓸모가 없어지면 가혹하게 버린다는 말이다.
兎 : 토끼 토(儿/5)
死 : 죽을 사(歹/2)
狗 : 개 구(犭/5)
烹 : 삶을 팽(灬/7)
(유의어)
교토구팽(狡兔狗烹)
교토사주구팽(狡兔死走狗烹)
구팽(狗烹)
적국파모신망(敵國破謀臣亡)
주구팽(走狗烹)
출전 : 사기(史記) 월왕구천세가(越王句踐世家)
원래는 교토사양구팽(狡兔死良狗烹)의 준말이며 교토사주구팽(狡兔死走狗烹)이라고도 한다.
사냥개로 토끼를 잡고 나면 토끼를 잡아온 사냥개도 삶아먹는다는 뜻으로, 필요할 땐 이용할 만큼 이용해먹고 난 뒤 필요가 없어지면 야박하게 버린다는 뜻이다.
한마디로 단물만 빨고 버리는 것으로, 간단하게 뒷글자 팽만 따서 '팽하다. 팽당하다' 라고 사용하기도 한다. 토사구팽의 처지에 이르게 하다를 '팽시키다' 라고도 한다.
범려(范蠡)는 중국 춘추시대(春秋時代) 월(越)나라가 패권(霸權)을 차지할 수 있도록 구천(句踐)을 보좌(補佐)한 명신(名臣)이다.
월나라 왕 구천은 가장 큰 공을 세운 범려와 문종(文種)을 각각 상장군(上將軍)과 승상(丞相)으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범려는 구천을 믿을 수는 없는 인물이라 판단하여 월나라를 탈출하였다.
제(齊)나라에 은거한 범려는 문종을 염려하여 '새 사냥이 끝나면 좋은 활도 감추어지고, 교활한 토끼를 다 잡고 나면 사냥개를 삶아 먹는다'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 피신하도록 충고하였다.
문종은 월나라를 떠나기를 주저하다가 구천에게 반역의 의심을 받은 끝에 자결하고 말았다. 이 고사에서 토사구팽(兔死狗烹)이 유래되었다.
신명을 바쳐 우두머리에게 충성을 다했지만 목적을 달성한 뒤에는 버림을 받게 되는 일을 빗대 오늘날 많이 쓰이는 성어이다.
원래는 교토사 양구팽(狡兔死 良狗烹)이라 하여 교활한 토끼가 죽으면 날쌘 사냥개는 삶긴다는 뜻인데 줄여서 교토구팽(狡兔狗烹)이지만 토사구팽(兎死狗烹)이라 더 많이 쓴다.
중국 삼국시대(三國時代) 때 한고조(漢高祖)가 되는 유방(劉邦)에게는 항우(項羽)를 물리치는데 큰 공을 세운 한신(韓信)이라는 명장이 있었다. 전쟁이 끝난 뒤 공을 인정하여 한신은 초왕(楚王)에 봉해졌다.
그에게는 종리매(鍾離昧)라는 절친한 친구가 의탁하고 있었다. 종리매는 원래 항우의 부하로 전쟁 중에 여러 차례 유방을 괴롭혔다. 그 소식을 들은 유방이 한신에게 종리매를 체포해 압송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아주 난감한 처지에 빠진 친구를 위해 종리매는 자결을 택하고 한신은 그의 목을 들고 가 유방에 바쳤다. 초왕으로 세력을 키울까봐 두려워했던 유방은 제 발로 들어 온 한신을 체포해 회음후(淮陰侯)로 강등시켜 버렸다.
한신은 자탄했다. “과연 사람들의 말이 맞구나. 날랜 토끼가 죽으면 훌륭한 사냥개를 삶아먹고, 높이 나는 새가 없어지면 좋은 활도 거두어 치우고 적국이 패망하면 모신도 죽는다더니 이제 천하가 평정되었으니 내가 삶기는 것도 당연하구나.”
果若人言. 狡兎死走狗烹 高鳥盡良弓藏 敵國破謀臣亡 天下已定 我固當烹.
사기(史記)의 회음후열전(淮陰侯列傳)에 자세히 나와 있는 내용이다.
토사구팽(兎死狗烹)
🔘 개요
원래는 교토사양구팽(狡兎死良狗烹)의 준말이며 교토사주구팽(狡兎死走狗烹)이라고도 한다.
사냥개로 토끼를 잡고 나면 토끼를 잡아온 사냥개도 삶아먹는다는 뜻으로, 필요할 땐 이용할 만큼 이용해먹고 난 뒤 필요가 없어지면 야박하게 버린다는 뜻이다.
한마디로 단물만 빨고 버리는 것으로, 간단하게 뒷글자 팽만 따서 '팽하다. 팽당하다'라고 사용하기도 한다. 토사구팽의 처지에 이르게 하다를 '팽시키다' 라고도 한다.
🔘 유래
果若人言. 狡兎死良狗烹 飛鳥盡良弓藏 敵國破謀臣亡. 天下已定 我固當烹.
과연 사람(들) 말대로다. 교활한 토끼가 죽으니 좋은 사냥개를 삶고, (높이) 나는 새가 다하면(다 잡히면) 좋은 활도 (광에) 들어가며, 적국을 깨부수니 (계책을) 꾸미던 신하가 망하네. 천하가 이제 평정됐는데, 그런고로 나도 마땅히 삶(아 죽이)겠군.
(사기 회음후열전)
유방이 한신을 죽인 데에서 유래한 걸로 잘못 알고 있는 사람이 많은데, 사실 그보다 훨씬 이전에 춘추시대 월나라의 군사인 범려의 말에서 유래한 것이다.
(사기 월왕구천세가)
위의 교토사량구팽 비조진양궁장(狡兎死良狗烹 飛鳥盡良弓藏)에서 앞부분을 4자로 줄였는데, 뒷부분을 줄인 조진궁장(鳥盡弓藏; 새를 잡으면 활을 창고에 넣음)도 같은 뜻이지만 토사구팽에 밀려 잘 쓰이지는 않는다.
이 말이 전해져 '토끼를 다 잡으면 사냥개를 삶는다'는 한국 속담도 만들어졌다.
당시 오나라를 멸망시킨 월왕 구천은 고생할 때는 함께 고락을 나누지만 자신이 부귀해질 때면 교만해져 모든 것을 자신의 공으로 돌리는 성격이기 때문에, 구천이 범려 자신을 포함한 공신들을 죽일 것이라 미리 예측한 범려가 문종에게 관직에서 물러나자고 권한 것에서 나온 말이다.
과연 그 말이 맞아서 문종은 자결해야 하는 위기에 몰렸지만 그 때 가서 깨달은들 소용없었다.
초한지에서 마침내 한신과 동맹을 맺으려고 항우가 무섭을 한신에게 보냈을 때 그가 한신에게 한 말이라는 일화가 있는 걸 감안하면 확실히 오래 전에 있었던 우화이다.
🔘 중국에서의 토사구팽
월왕 구천의 라이벌이었던 오왕 부차가 유명한 예시다. 오왕 합려의 뒤를 이을 후계자들 사이에서 부차는 큰 세력이 없었으나 오의 최고 실력자던 오자서의 지지 아래 오왕의 자리에 올랐다.
와신상담으로 알려진 부차의 복수에 오자서는 큰 힘을 보탰고 부차는 구천에게 복수하는데 성공한다.
하지만 부차는 구천을 죽여 후환을 없애야 한다는 오자서의 말을 듣지 않고, 구천의 계략에 넘어가 구천을 놓아주는걸로 모자라 월나라로 돌려 보내주게 된다.
이때부터 부차와 오자서는 사사건건 의견충돌을 일으켰고, 최후엔 중원의 패자가 되려는 부차의 목표에 오자서가 반대하는 것으로 완전히 틀어지게 된다. 나중에는 부차가 오자서에게 자살하라며 검을 보낸다.
부차의 뜻에 따라 오자서는 자결하기 직전 '내가 죽으면 무덤에다 가래나무를 심어 그 나무로 부차의 관짝을 짜도록 하라. 또 내 눈을 뽑아 동쪽 성문에 걸어두면 월이 오를 멸망시키는 것을 지켜보겠다'는 유언을 남겼고, 이를 들은 부차는 분노해 오자서의 시체를 형체도 못알아볼 정도로 매질한 뒤 장강에 던져버렸다.
결국 오자서의 말을 듣지 않은 부차는 원정으로 국력을 크게 낭비했으며, 이로 인해 와신상담의 세월을 거쳐 힘을 회복한 구천의 맹공을 버티지 못하고 패배하고, 오는 멸망한다.
부차는 구천의 자비로 목숨만은 건졌지만 저승에서 오자서의 얼굴을 볼 낯이 없다며 얼굴을 천으로 가리고 자결한다.
한고제는 토사구팽의 대명사로 알려져 있으나 지위를 깎은 적은 있어도 의외로 그냥 토사구팽 목적으로 직접 죽인 사람은 없다.
영포는 숙청이 두려웠다는 당위성이야 있었지만 어쨋든 반란을 일으켰으니 죽인 것이고, 한신도 사실 진작부터 사망플래그를 쌓으며 어그로를 끌고 있었다.
유방이 아니라 어떤 군주라도 '임금님 죽도록 고생하시는 건 알겠는데, 아무래도 저도 바빠서 병력은 못 보내 드리겠네요. 그건 그렇고 저 이번에 제나라 땅 먹었는데, 아무래도 민심을 수습하려면 제가 여기서 왕노릇 해야 할 것 같은데 괜찮죠?'(…)
따위의 소리나 하는 천재 전술가를 의심없이 놔둘 순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유방은 결국 한신을 죽이지는 않고 회음후로 내린 뒤 견제만 했다.
한신이 죽기까지의 상황을 보면 사실 낙하산 인사에, 아군살해 전적에다, 가장 중요한 때 딜을 시도하는 행동으로 부하들이 이미 입을 모아 트집거리만 잡히면 바로 한신을 죽이자고 벼르는 마당에 오히려 유방이 미적지근하게 굴며 그나마 목숨이라도 보호해주려 한 것에 가까우며, 결국 기회를 엿보던 여후가 유방이 자리를 비운 사이 소하와 모의해 한신을 멋대로 살해했다.
장량까지 이 결정에 동의해 버리니 할말이 없어진 유방은 우환거리가 사라진 것에 기뻐하는 한편으로 상당히 씁쓸해했다고 한다.
마지막에 여후를 견제하려고 번쾌도 숙청하려 했으나, 숙청전에 유방이 세상을 떠난지라 번쾌는 죽지 않았다.
즉 숙청이 없었다고까지는 하기 힘들지만, 적어도 이용가치가 없다는 이유로 다짜고짜 죽이거나 그러지는 않았다. 실제 진짜 이용 가치가 없던 옹치, 항량은 유방 평생동안 잘먹고 잘산다
조조와 순욱 또한 토사구팽의 예다. 조조는 둘 사이가 틀어지기 전에는 순욱을 나의 자방이라며 높이 평가하고, 정치뿐만 아니라 전투에 나가서도 큰 흐름을 모두 순욱과 의논했다.
희지재와 곽가는 시시각각 변하는 전황을 본진의 순욱이 모두 알 수는 없기에 등용된 인물들이었으며, 정욱 등도 그가 추천하여 임관을 한 인물이다.
전략과 내정에서 크게 공헌하였으며, 그가 추천하여 임관한 명사들이 조조에게 큰 힘이 되었다. 이처럼 조조에게 충성하고 헌신한 바가 많은 그였으나...
그의 최후는 위씨춘추와 그를 따른 배송지 및 후한서에서의 기록과 진수의 삼국지 본전의 기록이 충돌하는데. 위씨춘추의 기록에 따르면 명백한 토사구팽이고, 진수의 삼국지 본전에 따라도 읽기에 따라서 좌천(토사구팽)이라고 해석할 여지가 남아 있다.
이렇듯 두개의 역사서의 내용이 충돌하는데 어느쪽의 기록이 맞는지는 입증할 근거가 없기에 순욱의 죽음에 조조가 개입했다는 것은 사실상 오리무중이다.
그러나 대중적으로 유명하며 학계에서도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내용은 위진남북조시기에 씌여진 역사서인 위씨춘추의 내용인데 이에 따르면 순욱은 위공의 지위를 욕심낸 조조와 대립하면서 끝내 토사구팽 선언을 듣고 자결 혹은 화병으로 죽었다고 한다. 이 때 나오는 것이 그 유명한 빈 도시락, 공찬합고사다.
순욱 사후 조조는 장례식에서 눈물을 흘렸다고 전해지는데, 전형적인 보여주기용 악어의 눈물인지, 필요에 따라 내치기는 했어도 긴 세월을 같이한 부하의 정도 남아있었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명 태조 주원장은 말 그대로 피비린내 나는 토사구팽의 진수를 보여주었다. 그냥 실무자 말고는 말 그대로 싹쓸이를 했는데 심지어 1년에 3만명의 권신들과 그 일가족까지 죽여버리기도 했다. 그 덕택에 넷째아들 주체가 쉽게 황위를 계승하여 전성기를 열 수 있었다.
어찌 보면 가장 이상적인 토사구팽을 보여준 인물은 북송 태조 조광윤과 후한 세조 광무제다.
조광윤은 황제의 위에 오른 후 개국공신들을 불러서 술판을 벌이던 도중 술 한잔 하다가 갑자기 한숨을 쉬면서 '나는 술먹고 뻗어 있는거 너희들이 황제 옷을 입혀줘서 이렇게 황제도 됐다만, 너희들은 또 너희 부하한테 어디서 용포 하나 구해서 걸칠 수도 있겠구나. 너희들을 의심하는 건 아니지만 네 부하들까지 사고 치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지 않냐'는 드립을 쳤다.
공신들이 술이 확깨서 '아니 폐하 어째서 그런 무서운 말씀을 하십니까.'라며 바싹 엎드리니까 조광윤은 계속 술을 마시면서 '인생 뭐 있어? 어차피 황제 할 생각 없으면 고향 내려가서 명예직이나 하며 부유하게 살다가 애들이나 키우면서 편안하게 죽으면 되는거지. 니들도 그렇게 할래?'라고 결정타를 날렸다.
그 자리에서 누가 뭐라고 하겠는가. 물론 그건 문서상 약속이 아니었지만 다음 날, 조광윤 앞에 나온 공신들은 자발적으로 모든 실권을 내놓고 정말로 고향 내려가서 명예직이나 하며 부유하게 살다가 애들이나 키우면서 편안하게 살다가 갔다(…).
정확히는 사표낸 게 아니라 보직변경 요청한거지만. 당 말기부터 오대십국시대 내내 중국대륙을 혼돈으로 몰아넣은 절도사들의 병권을 너무나 간단하게 수거한 사건이라서 과장이 섞인 것 아니냐는 의견도 있지만 어쨌든 북송의 개국공신들을 살해하지 않고, 아무 조건도 없이 조용히 집에 보내준 것은 분명 사실이다.
숙청은 맞지만 피를 보지 않은 숙청이라고 할까? 물론 그 과정에서 당연히 보상을 해야 하므로 공신들에게 막대한 부를 나눠줘 초반에 경제가 좀 흔들리긴 했지만, 반란을 일으켜서 진압하려 할 때 쓸 군자금과 비교해 보면 싸게 먹힌거다.
이 조광윤의 일화를 가리켜 명예퇴직 배주석병권(杯酒釋兵權)이라고 한다. '술자리에서 병권을 놓게 하다'는 뜻으로, 사실 토사구팽과 정반대의 의미로 쓰인다.
광무제의 경우에는 광무제는 공손술을 토벌한 뒤 왕망이 망쳐놓은 주변국들과의 관계를 정리하는 과정에서의 일부 전쟁을 제외하면 거의 전쟁을 벌이지 않으려 했고, 군비도 꽤 줄였다.
이 과정에서 광무제 휘하의 명장들인 운태 28장들은 문관으로서의 능력도 출중하던 등우 등을 비롯한 몇 명만 빼고는 다들 자진해서 은퇴했고, 광무제도 이들에게 국가 원로로서의 대우는 해줬지만 조광윤처럼 크게 파격적인 대우는 하지 않았다.
심지어 이 시기에는 광무제의 숙부뻘 되는 이까지 왕에서 공으로 대우가 낮춰졌는데, 대단한 건 아무도 반항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물론 통일 전에 일부 반항하던 자들은 다 죽었지만…
후한 2대 황제인 한명제 때에는 간접적인 토사구팽이 있었는데, 개국공신을 기리는 영정을 만드는 과정에서 장인을 일부러 빼버렸다.
공을 세운 정도에서 절대 꿀리지 않을만큼 큰 공신이었으며 황제의 장인이었음에도 마황후 본인이 스스로 앞장서 외척을 막고자 일부러 빼버린 것이다.
황제의 장인까지 찬밥 신세가 되어 버리니 다른 공신들도 알아서 길 수 밖에 없었고 남은 자들 중에서도 낙향한 자들이 많았다고 한다.
사실 광무제 때 별 다른 일 없이 자진 사퇴한 자들이 많았던 것은 광무제 본인의 재능이 너무 출중해서라고 한다.
중국에서도 토사구팽으로 여겨지는 경우들이 있었는데, 군사적으로 제일 유능했던 린뱌오와 펑더화이는 마오쩌둥에 의해 불행한 최후를 맞았다.
린뱌오는 권력문제로 마오쩌둥과 반목하여 앙심을 품고 쿠데타를 일으키려다 실패하여 비행기를 타고 도망가던 중 비행기가 추락해서 일가와 함께 몰살당했고, 펑더화이는 마오쩌둥을 비판했다가 그의 분노를 사 권력을 모두 빼앗긴 뒤 홍위병에게 구타당하고 차디찬 감방에서 피투성이가 되어 옥사했다.
하지만 마오는 자신의 아내를 비롯한 4인방은 그대로 놔두었고, 결국 4인방은 문화대혁명을 통해 권력을 쥐게 되면서 중국을 말아먹었다.
다만 단순 숙청이 아니라 조리돌림까지 당하는 굴욕을 받은 평더화이(팽덕회)의 경우엔 한국전쟁 당시 참전했던 마오쩌둥의 아들을 지키지 못했다는 이유로 당했다는 뒷이야기도 있다.
🔘 한국사에서의 토사구팽
한국사에서도 난세 끝에 혼란을 정리하고 평화기를 이룩한 경우, 으레 그 직후에는 공신들을 잔혹하게 숙청하는 사례가 여럿 있었다.
삼국통일전쟁 끝에 삼국시대를 종식시킨 문무왕 사후 신문왕 김정명은 교과서적인 숙청왕으로, 즉위 원년부터 백전노장 공신들에게 잔혹한 피바람이 불었고, 그리 길다고 보기 힘든 12년의 집권기간 동안 귀족 세력의 약화와 왕권 강화를 끊임없이 시도했다.
비록 녹읍 부활 등으로 먼 훗날 신문왕의 정책은 다시 뒤집혀 버리긴 하지만, 난세 종결 이후 신문왕이 판을 깔아둔 덕에 통일신라가 몇백년은 갈 수 있었던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려의 경우 이례적으로 왕건은 공신 정리를 하지 않았고 상당히 포용적인 태도를 보였는데, 결국 2대 혜종부터 4대 광종에 이르기까지 호족 파벌별로 피터지는 내분을 겪었다.
결국 4대 광종이 심지어 자신의 아들까지 의심하는 공포 정치를 시행하면서 무자비한 숙청을 했는데 이때 개국 초 수백명에 이르던 호족들이 불과 수십여명 밖에 남지 않았다고 한다.
사실 얼마만큼의 호족이 죽었는지는 기록의 부실로 확실하게 확인되지 않지만, 고려 성종 때 최승로가 '태조를 모시던 구신이 40여명밖에 남지 않았다'는 발언을 한 대목을 보면(자연사한 이들도 있을 테지만) 많은 호족들이 광종에게 처형당했고 숙청 과정에서 호족들이 상당히 큰 타격을 입었던 것으로 보인다. 시기가 좀 늦은 만큼 이걸 토사구팽으로 봐야할지는 조금 미묘하긴 하다.
비록 이후에 경종과 성종을 거치며 도로아미타불이 되지만 이미 호족은 타격을 입은 뒤였고, 이후로는 중앙의 귀족인 문벌귀족으로 대체된다.
조선의 3대 임금 이방원은 피도 눈물도 없는 토사구팽으로 유명하다. 다만, 주원장처럼 공신이라고 모조리 죽인건 아니며 최측근이었던 이숙번도 안하무인으로 횡포를 부리기까지 했지만 귀양 수준으로 끝냈다.
태종 이방원의 토사구팽이 유명한 이유는, 자기가 왕이 되고 나니깐 가장 가까운 정치적 동지였던 마누라마저 내치다시피 하면서 잠저 시절부터 오랫동안 자신의 정치적 활동과 집권을 도와온 처남들을 자기손으로 직접 처리했다는 것 때문일 것이다.
게다가 이 숙청은 최소한 1차 왕자의 난 때부터 이미 예정되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는게 더 무서운 점이다.
어찌보면 대단히 반인륜적인 행보로 보일 수도 있지만, 결과적으로 후계자인 세종에게는 매우 바람직한 통치 여건이 마련되었고 그 세종이 엄청난 명군이었으니…
참고로 태종은 그러고도 안심하지 못했는지 세종이 즉위하자 세종의 처가까지 박살낸다.
대한민국에서 정계에서도 비일비재한 일이다. 가장 유명한 경우라면 역시 박정희이다. 집권 후에 중앙정보부장을 하면서 무소부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김종필, 김형욱, 이후락 등을 내쳤다.
초대 중앙정보부장이자 박정희의 조카사위인 김종필은 사실상 유배를 당하며 '자의 반 타의 반'이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그래도 김종필과 이후락은 국회의원하면서 은퇴후에 그럭저럭 살았지만, 김형욱은 배반감을 느끼고 해외로 도피해서 코리아 게이트에서 반정권적 활동을 하다가 파리에서 실종되었다.
국정원 진실위의 조사에 따르면 중앙정보부가 살해했다고 추정된다고. 나중에 김재규가 박정희를 배신하고 살해한 이유 중에도 전임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의 최후를 보고 회의를 느껴서 그랬다는 추측이 있다.
전두환 또한 통칭 '쓰리허'라 불리며 세를 떨치던 허문도 허삼수 허화평 가운데 조선일보 기자 출신이었던 허문도는 곁에 두었지만, 같은 육사 출신인 허삼수와 허화평은 내쳤다. 이는 당시 김재익 경제수석비서관과 두 사람이 갈등을 빚자 김재익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김영삼도 토사구팽으로 유명했다. 김영삼이 대통령하던 시절에 국회의장까지 역임한 7선 의원인 김재순이 그 대상이다.
김재순 의원은 3공화국 시절 유정회 출신으로 이후 전두환, 노태우 시절에도 민정당 소속으로 정치 경력을 이어왔으나, 특유의 친화력으로 김영삼을 비롯한 많은 야당 인사들과도 교분이 있었고 이후 3당 합당을 통해 여당으로 들어온 김영삼을 지원하여 그가 대통령이 되는데 크게 공헌했다.
그러나 이후 김영삼이 자신을 비롯한 구 민정계를 숙청하자 '토사구팽'이라는 말을 남기고 정계 은퇴 후 하와이로 이민했다. 김재순 덕분에 토사구팽은 한 시대를 풍미하는 경구가 되었다.
2018년 시행된 삼성그룹 GSAT에서 토사구팽이 출제되었다. 덕분에 시험 직후 실시간 인기검색어에 등장했다. 뜻을 모르는 수험생들이 토끼와 뱀인 것으로 혼동하기도 했다.
🔘 그 밖의 토사구팽
야구계에서는 보스턴 레드삭스를 비꼬는 말로 '보사구팽'으로 바뀌어 쓰인다.
더 지니어스룰 브레이커에서는 조유영이 이은결을, 임윤선이 임요환을 상대로 토사구팽의 진수를 보여 주었다.
이은결의 결정적인 도움을 폄하하며 대찬 배신을 때린 조유영은 당당히 혐라인의 수장이 되었고, 자기가 반강제로 끌어들여 놓고 끝까지 부려먹은 임요환을 데스매치 상대로 지명하는 임윤선의 행태는 많은 시청자들의 반감을 샀다.
게임업계에서 가장 유명한 케이스로는 한때 부사장까지 갔던 코지마 히데오가 코나미에게 토사구팽을 당한 사건이 있다.
영어권에서 토사구팽과 가장 비슷한 단어는 Plutoed이다. 행성 직위를 박탈당한 비운의 왜행성인 명왕성에서 따온 단어다.
미국 학계의 자존심을 세우기 위해 억지로 행성 직위를 주었다가 결국 퇴출되었다는 점에서 비슷하다. 다만 이 쪽은 배신 뿐 아니라 명성을 갑작스레 잃은 경우까지 포함하는 좀 더 광범위한 단어다.
🔘 토사구팽을 피하는 법
공훈 많이 세우고 겸손하게 행동을 한다고 해서 토사구팽을 피할 수 있다는 건 아니다. 때로는 겸손하게 행동하면 그건 그거대로 의심을 받는다. 반란 전의 기초공사로 백성에게 미리 잘보이려 드는 것으로 여겨질 수 있기 때문이다.
춘추전국시대 진나라의 명장 왕전은 초나라를 공격하면서 일부러 전쟁에 이기고 돌아오면 넓은 논밭과 화려한 저택을 달라고 계속 졸라댔는데, 의심이 많은 진시황의 성격을 간파하여 '그저 재물과 노후의 편안한 생활에만 욕심을 부리고 정치에 큰 뜻은 없는 늙은이'로 보이려는 의도였다고 한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게 이 당시 왕전의 작전은 장기전이었는데, 소모하는 시간도 길고 요구되는 병력도 많은 터라 위화도 회군 마냥 쿠데타가 일어날까봐 정작 자기 군주인 진시황이 견제할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일부러 그런 것으로, 실제로 성공하여 작전을 그대로 수행할 수 있었고 초나라를 멸망시켰다. 그리고 진짜 노후에 편안하게 생활한 건 덤이다.
또한 유방을 도와 한나라를 창립한 일등공신 소하도 승상이 직위임에도 청렴결백하게 사치를 부리지 않는 생활을 했으나, 거대한 권한을 가졌던 소하를 유방이 수시로 의심하면서도 비위를 살살 맞춰주려 노력했다.
유방은 오히려 한신은 은근히 만만하게 본 반면 소하의 변절은 죽기 직전까지 두려워했다.
소하는 주위 사람들의 충고로 가족 중 젊은 남자를 죄다 전쟁터에 보내는 등 온갖 노력 끝에 유방을 안심시킬 수 있었고, 통일 후에도 어느 정도는 사치를 부려야 유방의 의심을 안 산다고 하자 그 말에 따른다.
나중에 유방이 죽기 직전에 소하를 의심하여 감옥에 잠깐 가두는데, 주변 사람이 간언하자 유방은 소하를 가둔 걸 후회하고 소하를 풀어준다.
한신의 경우 천하통일 후 찌질이 시절에 인상적이었던 사람들을 불러 자신을 모욕한 사람은 꾸짖은 뒤 풀어주고, 밥을 나누어 준 노파에겐 보답을 내렸는데, 유방과 여후가 '저놈이 갑자기 멋진 짓으로 인기를 끌려 하는 게 수상하다. 뭔가 꿍꿍이가 있어서 저러는 거 아냐?'하고 의심했다는 말이 있다.
니콜로 마키아벨리는 저서 '로마사 논고' 1권 제 29장과 30장에서 토사구팽의 구체적 사례와 원인, 대상자가 이를 피하는 방법을 다뤄 일종의 '토사구팽 가이드'를 썼다.
군주정의 경우 군주의 시기심과 역모에 대한 불안감, 공화정의 경우 쿠데타에 대한 우려가 토사구팽의 원인이라고 보았고 이런 토사구팽을 피하기 위해서는 어정쩡하게 굴지 말고 공을 세우자마자 권력을 내려놓고 군주에게 엎드리거나, 아니면 아예 군주가 손대지 못하도록 권신이 되는 것이 좋다고 권하고 있다.
하지만, 경우에 따라 재물욕을 보이는 게 오히려 꼬투리 잡힐수도 있다. 어설프게 왕전을 흉내내려 한 난릉왕이 좋은 예시이다.
결론은, 정답은 없다. 주군의 성격에 따라 처리법은 그때 그때 다른 것이며, 필요할 땐 외국으로 망명하거나, 아예 군주의 소원대로(?) 반란을 일으켜 주는 것이 답일 수도 있다. 성공하는 경우는 더 말할것 없고, 실패하더라도 반역하다가 죽임을 당한 것이니, 토사구팽은 아니다.
유능한 모습을 최대한 숨기고 공이 있어도 주군의 덕분이라며 위상을 살려주는 것도 토사구팽 자체를 피하는 좋은 방법이라 하겠지만 군주가 강직한 성품이라면 그게 오히려 거슬릴 수도 있고 다른 사람에게 무능한 신하, 아첨꾼, 간신 등으로 낙인 찍힐 수도 있다.
그리고 이렇게 처세한 신하들은 당대 군주들 생전에는 무사했지만 차기 군주들의 눈에 나서 뒷끝이 좋지 않은 경우도 있다. 후한의 등통, 청나라의 화신 등이 그 예시이다.
다만 토사구팽을 할 확률이 낮은 때가 있긴 하다. 세조처럼 탈법적으로 집권한 경우엔 그 기반이 불안정하다. 탈법적인 방식으로 집권했어도 태종처럼 나름의 명분과 기반이 있다면 모를까 세조같은 경우면 또 다르다.
이 경우에는 얼마나 튀는 행동을 하지 않느냐에 달렸다고 보면 된다. 단 이것도 그 지도자가 자신을 지도자로 만들어 준 공신들을 대체할 수 있는 기반이 없을떄를 전제한다.
🔘 토사구팽에 대한 다른 시각
토사구팽 하면 비정하고 권력욕에 찌든 군주가 충성스러운 부하들을 의심하고 무자비하게 제거한다는 이미지가 쉽게 떠오르지만, 실상은 다르다.
한신을 예시로, 해당 문서에서도 적혀있듯이, 한신은 따지고 보면 한고제의 어그로를 대놓고 여러 번이나 끌은지라 한고제 입장에선 한신은 충신이 아닌 언젠가 반란을 일으킬 위험분자일 뿐이었으며, 역사를 살펴보면 권력을 움켜쥔 개국공신이 나라를 도로 갈아엎은 경우도 많았다.
특히 세조는 공신들을 많이 봐줬는데, 수령의 부패와 백성들의 고통을 막는데 정말 신경 썼던 세조지만 정작 공신은 건드리지 않았다. 당연히 가장 큰 부패를 저지른 건 공신이었고 결과적으로 전부 도로아미타불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숙청은 자주 있었지만 실제 이들 모두가 토사구팽에 해당 된다고는 할 수 없다. 아니, 대부분의 경우 달리 보면 오히려 토사구팽에 해당되지 않는다.
일단 토사구팽이란 성어 자체를 보면 토사구팽은 이용가치 상실에 있다. 일단 토사구팽의 유래가 되는 일화를 봐도 문종은 병권도 없는 일개 책사에 불과했기 때문에 이용가치 상실이 맞다. 그런데 이를 다른 경우에 적용시키려면 의문점이 생긴다.
1. 대부분 경우, 왕조들은 천하를 얻었음에도 당분간은 전쟁이 끊기지 않았다. 북방 유목민족과의 전쟁도 있고 내부의 반란 같은 것도 비일비재. 즉 무장들이 이용가치를 잃지 않았다는 얘기다. 그러나 숙청작업은 나름대로 진행되고 있었다. 이용가치 상실이라는 전제가 객관적으로 적용되지 않는다.
2. 군주들이 과연 '얘는 이용가치가 없으니 버리자'란 생각으로 진행했을까? 그것도 아니라는 것. 크게 두 가지 경우인데, 공을 세운 부하들이 교만해져서 불법을 행사했거나, 또는 군주들이 부하들에게 위협을 느껴서이다. 즉 개가 집에서 기르는 닭을 물거나, 아니면 주인보고 으르렁거리며 심지어 덤비기까지 한 경우이다.
이건 사냥감이 없어서 개를 버린 것과는 분명 다른 경우다. 이를 제일 잘 설명하는 일례가 한신. 해당 문서 보면 이 놈이 무슨 짓으로 유방의 어그로를 끌었는지 알 수 있다. 게다가 충성심도 별로 없이 자기 이익만 챙기는 놈이 분봉왕으로 있으니.
군주들이 위협을 느끼는 대상은 대부분이 강력한 권력을, 특히는 병권을 손에 쥐고 있어 위험한 존재가 맞다. 한신에게 반란을 부추긴 괴철을 유방이 굳이 죽이지 않았던 이유가 바로 상대는 병권도 없는 책사라는 점이 아닐까 싶다.
실제로 유방 시기에 경포 등 반란을 일으킨 왕들도 많았다. 쓸데없는 걱정이 아니란 얘기이다. 설사 당대에서 황제에게 충성한다 해도 2, 3대까지 가면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 그러니 중앙집권이 역사의 흐름이라는 것을 파악하면 분봉왕같은 불안정한 위치는 피해가는 게 현명한 처사다.
쉽게 설명하자면, 제 아무리 군신 관계라도 사람과 사람 사이인 이상 온전히 사냥꾼과 사냥개의 위치를 지킬 수 없으며 자신이 세운 나라에 위험이 된다면 일단 제거하는 것이 적어도 고대, 전근대 시절 군주로서는 올바른 판단이라는 것이다.
또한 토사구팽이 너무 강조되다 보니, 이것을 일종의 클리셰나 필연적인 결과 등으로 생각하기도 하는데, 이건 황제의 성정에 따라 다르다. 확실히 원조격인 구천, 그리고 끝판왕인 홍무제에는 해당될 수도 있지만, 모든 군주에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당장 한나라만 봐도, 한신에 맞먹는 군공을 세운 조참은 숙청당하거나 하는 일이 없었다. 한신, 팽월처럼 숙청 당한 공신들의 최후가 비극적인 것처럼 부각되어서 그렇지, 전한을 세운 대부분 공신들은 오히려 무난하게 보냈다.
이는 명을 제외한 다른 왕조들에도 거의 해당되는 케이스로, 당사자의 처신은 생각 안하고 군주들을 '공을 많이 세운 신하들을 꺼리고 무조건 숙청하는 냉혈한'으로 보는 것은 편협한 시각인 것이다.
역사에서도 토사구팽을 안했다가 망한 나라도 있다. 가령 진나라의 경우 진목공 사후 그의 즉위를 도왔던 공신들을 제어하는데 실패해 결국 그 공신들이 나중에 나라를 셋으로 갈라먹었다.
🔘 기타
보신탕의 야만성에 대한 논쟁이 뜨거운 감자였던 90년도에 나온 어린이 교육용 서적중에는 개를 '삶는다'라는 표현을 넣는게 껄끄러웠는지, 개를 '팔아 버린다'는 표현으로 순화시킨 책도 있었다.
이솝 우화에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있다. 말을 타고 싸우던 병사가 전쟁이 끝나니 말을 군마처럼 키우지 않고 밭을 갈고 나귀가 주는 먹이만 주면서 나귀처럼 키우다가, 다시 전쟁이 생겨 그 말을 타고 가다 나귀처럼 변해버린 말 때문에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죽는다는 내용이다.
🔘 토사구팽의 피해자와 가해자들
⚪ 니콜라이 예조프 - 이 작자가 어찌 보면 이 문서를 대표하는 인물인데, 이오시프 스탈린의 말대로 숙청을 시행했지만 정작 자기 자신도 스탈린의 의심을 받아 숙청당했다.
⚪ 당나라 -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그 사냥개 마저 잡으려다 결국 그 사냥개한테 제대로 물어 뜯기고 말았다. 애초에 동맹이 끝나면 서로 뒤통수를 칠 생각이었다.
⚪ 서달 명나라 건국 공신 - 사실 서달이 과연 토사구팽 당했는지는 아직도 의견이 분분하다. 홍무제가 서달이 등창을 앓고 있을 때 많은 양의 거위 고기와 술을 내려 그를 위로 했다고 하는데(거위는 등창과 상극). 우선 정사인 명사에는 서달이 고기를 먹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서달의 죽음과 관련한 기록이 처음 나타나는 것은 명나라 말의 한 소설에서 부터인데, 정사의 기록이 아니라서 다소 신빙성이 떨어진다. 그래도 서달의 가문은 그 이후에도 명 왕조 최고의 명문가로 이름을 날렸다.
⚪ 순욱 - 정사에서는 종군했다가 죽었다고 말했지만 위씨춘추에서는 확실하게 토사구팽임을 언급했고, 정사에서의 정황을 살펴봐도 본격적으로 황제에 맞먹는 특권을 노골적으로 손에 넣으려한 조조에게 순욱이 정면으로 반대하면서 틀어져 조조가 순욱을 숙청할 의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 영포, 팽월, 한신 외 한나라 건국 공신들 - 소하, 진평, 조참 등 유방에게 숙청당하지 않은 공신들도 있긴 하지만, 영포, 팽월, 한신 등은 단순한 공신이 아니라 독자적인 세력과 군사력을 보유한 인물들이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이들은 초한쟁패 과정에서 유방과 함께 행동한 것이 아니라, 유방 편을 들기는 했지만 독립적인 세력으로 항우와 싸웠었다. 따라서 유방의 집권 이후에도 수틀리면 자기 세력을 이끌고 반란을 도모할 역량이 있었으며, 천하통일에 걸림돌이 될 소지가 다분했었다. 다시 말하자면, 공신이 아니라 동맹세력에 더 가까왔던 것이다. 이에 반해 소하, 진평, 조참 등은 독자세력가가 아니라 유방의 참모 내지 가신들이었다. 유방은 독자 세력화가 가능한 동맹세력 급이었던 영포, 팽월, 한신 등은 모두 숙청했지만, 가신으로서 자신을 보필했던 공신들은 하나도 건드리지 않고 평생 잘 챙겨 주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영포와 한신은 자기들 탐욕 때문에 반기를 들며 사망플래그를 스스로 만들었다. 특히 한신은 이 분야의 대표적인 사례로 꼽히지만 실제로는 군공에 눈이 멀어 간접적 팀킬도 서슴치 않았고 유방이 항우와 싸우는 위급한 상황에서 제나라 통제 하겠답시고 가왕 분봉이나 요청하는 등 자기 잇속을 채우기에만 급급했다. 한신은 저지른 짓만 보면 출세는 이루어졌으니 항우의 손을 빌려서 유방을 토사구팽하려고 했다가 역으로 당한 것이다. 이중 팽월은 억울하게 죽은 게 맞고, 당초엔 유방도 유배로 끝내려고 했는데 초한전 내내 항우를 괴롭혔던 유격전 능력이 혹여 반란군에서 발휘되면 이만저만 위험한 게 아니었기 때문에 팽월의 위험성을 경고한 여후의 의견을 받아들여 결정을 번복하고 사형에 처했다.
⚪ 이숙번, 민무구, 민무질 등 태종의 공신들 일부 - 그래도 하륜이나 권근, 조영무 등은 죽을 때까지 부귀영화를 누렸고, 이숙번도 평생 유배지에서 사는 걸로 퉁쳤다. 민무구를 비롯한 민씨 4형제가 죽은 건 외척이 되어 나라를 휘두를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었다.
⚪ 자유 폴란드군 & 폴란드 임시정부 - 폴란드 침공으로 국가를 잃어버린 채 영국으로 망명해 영국 본토 항공전과 몬테카시노 전투 등의 격전에서 연합군의 일원으로 참여했었으나, 전후 소련에 의해 폴란드 인민 공화국이 부정선거로 세워지나, 영국과 미국은 폴란드 임시정부를 외면해 버리고 인민 공화국을 인정해 버린다. 심지어 영국에 체류 중이던 자유 폴란드 군 병사들은 전후 영국의 승전식에도 초대되지 못한 채, 잉여 영웅들이라는 모욕을 영국의 시민들한테 들어야 했다. 1980년대까지 귀국하지 못한 채 영국에서 반공활동을 하다가 폴란드의 공산정권이 붕괴되면서 폴란드 본토로 돌아갈 수 있었고, 이후 늦게나마 명예를 회복했다.
⚪ 잔 다르크 - 프랑스가 처음부터 잔 다르크를 버린 건 아니다. 지금은 프랑스의 영토지만, 당시 합스부르크 왕조 밑에서 힘을 발휘했던 부르고뉴 지방이 잔 다르크를 영국에게 넘긴 것이다. 다만 영국에서 포로교환을 제안한 것을 프랑스에서 무시했다. 요약하면 부르고뉴가 잔 다르크를 영국으로 넘겼고, 프랑스는 잔 다르크를 구할 수 있는 기회를 무시했다. 허나, 그 이후에도 라 이르를 보내 구출을 시도하였지만, 실패하고 라 이르도 체포당했다. 적극 구하지 않긴 하였지만 토사구팽의 목적으로 일부러 버린 것은 아니었기에 취소선 처리.
⚪ 정도전 - 이방원으로 부터 잠재적인 역적으로 몰려 숙청당했다. 그럼에도 이방원은 정도전을 역적이 아닌 종친 모해죄로 죽였으며, 정도전의 둘째 아우 정도존이 난에 휘말려 같이 죽은 걸 빼면 그의 가족들은 몰살당하지 않았다. 덕분에 정도전의 후손인 봉화 정씨는 지금도 맥을 이어오고 있으며, 정도전의 정책 대부분은 이방원이 수용했다.
⚪ 최동원 - 롯데 자이언츠의 한국 시리즈 우승을 위해 선수 생명이 사실상 끝나는 등판을 강행했지만 이후 하락세를 타고, 선수협을 만들려고 하자 눈에 가시로 여겨 홀대하다가 사실상 내쫓는 트레이드를 하였다. 그럼에도 최동원은 롯데 자이언츠 팬들을 평생 그리워하다 대장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 조엘 슈마허 - 원래는 다크 나이트처럼 정극 스타일의 배트맨 시리즈 영화를 만들려 했으나 워너 브라더스 측에서 어린애들부터 어른들까지 온가족이 좋아하는 액션물로 만들라고 압력을 넣는 바람에 원치도 않는 망작 배트맨 영화를 만들게 되었고 그로 인해 실패하자 워너측에서 잘라버렸다. 그의 작품인 배트맨 포에버는 그럭저럭 흥행은 했으나 지독히도 나쁜 평을 들어야 했고 배트맨과 로빈은 완전 망작으로 떨어져 버렸다. 이 때문에 워너 브라더스는 자신들이 그렇게 만들라고 지시해 놓고선 나중가선 영화 말아 먹었다고 슈마허 감독을 해고시켰다. 이 때문에 슈마허 감독은 평론가와 DC코믹스 팬들에게도 배트맨 시리즈 빌런이라고 비난받고 자신이 원하던 작품도 못 만드는 신세가 되고 만다.
▶️ 兎(토끼 토)는 상형문자로 兔(토)는 본자(本字)이다. 그래서 兎(토)는 ①토끼 ②달(달 속에 토끼가 있다는 뜻에서 달의 별칭이 됨)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사냥하러 가서 토끼를 잡으면, 사냥하던 개는 쓸모가 없게 되어 삶아 먹는다는 뜻으로 필요할 때 요긴하게 써 먹고 쓸모가 없어지면 가혹하게 버린다는 뜻 또는 일이 있을 때는 실컷 부려먹다가 일이 끝나면 돌보지 않고 헌신짝처럼 버리는 세정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토사구팽(兎死狗烹), 그루터기를 지켜 토끼를 기다린다는 뜻으로 고지식하고 융통성이 없어 구습과 전례만 고집함을 일컫는 말을 수주대토(守株待兎), 개와 토끼의 다툼이라는 뜻으로 두 사람의 싸움에 제삼자가 이익을 봄을 이르는 말을 견토지쟁(犬兎之爭) 등에 쓰인다.
▶️ 死(죽을 사)는 ❶회의문자로 죽을사변(歹=歺; 뼈, 죽음)部는 뼈가 산산이 흩어지는 일을 나타낸다. 즉 사람이 죽어 영혼과 육체의 생명력이 흩어져 목숨이 다하여 앙상한 뼈만 남은 상태로 변하니(匕) 죽음을 뜻한다. 死(사)의 오른쪽을 본디는 人(인)이라 썼는데 나중에 匕(비)라 쓴 것은 化(화)는 변하다로 뼈로 변화하다란 기분을 나타내기 위하여서다. ❷회의문자로 死자는 ‘죽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死자는 歹(뼈 알)자와 匕(비수 비)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匕자는 손을 모으고 있는 사람을 그린 것이다. 그런데 갑골문에 나온 死자를 보면 人(사람 인)자와 歹자가 그려져 있었다. 이것은 시신 앞에서 애도하고 있는 사람을 그린 것이다. 해서에서부터 人자가 匕자로 바뀌기는 했지만 死자는 누군가의 죽음을 애도하고 있는 모습에서 ‘죽음’을 표현한 글자이다. 그래서 死(사)는 죽는 일 또는 죽음의 뜻으로 ①죽다 ②생기(生氣)가 없다 ③활동력(活動力)이 없다 ④죽이다 ⑤다하다 ⑥목숨을 걸다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망할 망(亡)이고,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있을 존(存), 살 활(活), 있을 유(有), 날 생(生)이다. 용례로는 죽음을 사망(死亡), 활용하지 않고 쓸모없이 넣어 둠 또는 묵혀 둠을 사장(死藏), 죽음의 원인을 사인(死因), 죽는 것과 사는 것을 사활(死活), 사람이나 그밖의 동물의 죽은 몸뚱이를 사체(死體), 죽음을 무릅쓰고 지킴을 사수(死守), 죽어 멸망함이나 없어짐을 사멸(死滅), 죽어서 이별함을 사별(死別), 죽기를 무릅쓰고 쓰는 힘을 사력(死力), 죽는 한이 있더라도 서로 저버리지 않을 만큼 절친한 벗을 사우(死友), 죽을 힘을 다하여 싸우거나 목숨을 내어 걸고 싸움 또는 그 싸움을 사투(死鬪), 죽음과 부상을 사상(死傷), 수형자의 생명을 끊는 형벌을 사형(死刑), 태어남과 죽음이나 삶과 죽음을 생사(生死), 뜻밖의 재앙에 걸리어 죽음을 횡사(橫死), 참혹하게 죽음을 참사(慘事), 쓰러져 죽음을 폐사(斃死), 굶어 죽음을 아사(餓死), 물에 빠져 죽음을 익사(溺死), 나무나 풀이 시들어 죽음을 고사(枯死), 죽지 아니함을 불사(不死), 병으로 인한 죽음 병사(病死), 죽어도 한이 없다는 사무여한(死無餘恨), 죽을 때에도 눈을 감지 못한다는 사부전목(死不顚目), 죽을 고비에서 살길을 찾는다는 사중구활(死中求活), 죽는 한이 있어도 피할 수가 없다는 사차불피(死且不避), 죽더라도 썩지 않는다는 사차불후(死且不朽), 죽느냐 사느냐의 갈림길이라는 사생지지(死生之地), 다 탄 재가 다시 불이 붙었다는 사회부연(死灰復燃), 이미 때가 지난 후에 후회해도 소용없다는 사후약방문(死後藥方文), 죽고 사는 것을 가리지 않고 끝장을 내려고 덤벼든다는 사생결단(死生決斷), 죽어서나 살아서나 늘 함께 있다는 사생동거(死生同居), 죽어야 그친다로 후회해도 소용없다는 사이후이(死而後已) 등에 쓰인다.
▶️ 狗(개 구)는 ❶형성문자로 뜻을 나타내는 개사슴록변(犭=犬; 개)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句(구)로 이루어졌다. ❷형성문자로 狗자는 ‘개’나 ‘강아지’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狗자는 犬(개 견)자와 句(글귀 구)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句자는 말뚝에 줄이 엮여있는 모습을 그린 것이지만 여기에서는 발음역할만을 하고 있다. 개를 뜻하는 글자로는 이미 犬자가 있기 때문에 狗자가 따로 만들어진 것에 대해서는 여러 추측이 있다. 오경(五經)의 하나인 예기(禮記)에서는 이에 대해 큰 개는 犬으로 불렀고 작은 개는 狗라고 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의 狗자는 이와는 관계없이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개’나 ‘강아지’를 뜻하고 있다. 그래서 狗(구)는 ①개(작은 개) ②강아지 ③범의 새끼 ④곰의 새끼 ⑤개새끼(행동이 나쁜 사람 비유) ⑥별의 이름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개고기를 구육(狗肉), 개의 간을 구간(狗肝), 개장국을 구장(狗醬), 바닷 장어를 구어(狗魚), 너구리를 구환(狗獾), 개의 목에 다는 방울을 구황(狗鎤), 개의 가죽을 구피(狗皮), 개의 쓸개를 구담(狗膽), 개가 앓는 돌림병을 구역(狗疫), 개고기를 쪄서 만든 음식을 구증(狗蒸), 개와 돼지를 구체(狗彘), 개를 통째로 진하게 고아 낸 국물을 구고(狗膏), 개를 잡음을 구도(狗屠), 개가 짖음을 구폐(狗吠), 개와 말이라는 뜻으로 신하가 임금에게 자신을 낮추어 이르는 말을 구마(狗馬), 개와 쥐의 뜻으로 인격이 비천한 사람을 구서(狗鼠), 개나 말이 그 주인에게 다하는 충성심이라는 구마지심(狗馬之心), 개가 사나우면 술이 시어진다는 뜻으로 한 나라에 간신배가 있으면 어진 신하가 모이지 않음을 구맹주산(狗猛酒酸), 담비 꼬리가 모자라 개 꼬리로 잇는다는 뜻으로 쓸 만한 인격자가 없어 자질이 부족한 사람을 고관에 등용한다는 구미속초(狗尾續貂), 개밥의 도토리라는 속담의 한역으로 따돌림을 당하거나 외톨이가 되는 것을 구반상실(狗飯橡實) 등에 쓰인다.
▶️ 烹(삶을 팽)은 회의문자로 亨(형; 솥의 모양, 삶음)과 灬(화; 불)의 합자(合字)이다. 솥에 불을 가하여 삶다의 뜻을 나타낸다. 그래서 烹(팽)은 ①음식물을 삶다 ②삶아지다 ③삶아서 죽이다 ④쇠붙이를 불리다 ⑤요리, 익힌 음식 ⑥삶아서 죽이는 벌,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삶은 달걀을 팽란(烹卵), 음식을 삶고 지져서 만듦을 팽임(烹飪), 삶고 구움을 팽료(烹爒), 얼음처럼 미끄러운 순채蓴菜를 삶음을 팽빙(烹氷), 죽여 멸함을 팽멸(烹滅), 삶음을 외팽(煨烹), 쪄서 삶음을 증팽(蒸烹), 썰어 삶아서 음식을 조리함을 할팽(割烹), 형벌의 하나로 가마에 넣어서 삶아 죽임을 확팽(鑊烹), 굽거나 삶아서 음식을 만듦을 포팽(炮烹), 사냥하러 가서 토끼를 잡으면, 사냥하던 개는 쓸모가 없게 되어 삶아 먹는다는 토사구팽(兎死狗烹), 토끼가 죽으면 사냥개를 삶아 먹는다는 교토사주구팽(狡兔死走狗烹), 큰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작은 생선을 삶는 것과 같다는 약팽소선(若烹小鮮), 머리를 삶으면 귀까지 삶아진다는 팽두이숙(烹頭耳熟), 소를 삶을 수 있는 큰 가마솥에 닭을 삶는다는 우정팽계(牛鼎烹鷄), 배 부를 때에는 아무리 좋은 음식이라도 그 맛을 모른다는 포어팽재(飽飫烹宰), 설 같은 때에 양이나 염소 등을 잡아 잔치를 차려 베풂을 팽양포고(烹羊炮羔), 설 삶은 말 대가리로 고집이 세고 멋대가리 없는 모양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을 마두생팽(馬頭生烹)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