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문예대학 출신 작가 작품>
천년의 숲
막바지 가을, 노년의 머리숱처럼 듬성듬성해진 나뭇잎 사이로 내려온 햇살이 수천의 빛깔로 부서져 눈부시다. 천년의 숲을 걷는다. 낙엽이 풍성한 오색 융단을 펼쳐 발바닥으로 전해지는 감촉이 포근하다. 쪽찐 머리의 어머니가 걷던 길이다. 상림은 함양에서 우루묵으로 가는 외길, 외갓집 가는 중간지점에 있다. 나 어릴 때 외갓집 가던 숲길은 가도 가도 끝이 없던 먼 길이었다. 어머니는 숲길을 오리라 했다. 숲이 끝나고도 오리는 더 걸어야 외갓집이 있다. 한달음에 달려가고 싶은 친정 길을 어린 것을 걸렸다 업었다 챙기느라 어머니에게는 숨 가쁜 길이었겠다.
함양, 이름만 들어도 반갑고 가슴 뛰지만, 막상 마주하니 낯설고 물설다. 열 살에 떠나 이름만 고향인 함양, 강산이 여섯 번이나 변한 세월이 흐른 기억의 창고는 겨울나무처럼 앙상하다. 함화루 기둥에 기대서서 시간의 회로를 돌린다. 누각은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데 고희를 바라보는 나이가 되어 돌아본 심회는 햇살과 그늘이 교차하는 숲을 닮았다. 어머니의 손을 잡고 이 길을 걷던 계집아이는 다리가 아프다고 칭얼거렸을 게다. 숲 중간지점에 있는 함화루는 나그네가 숨을 돌리는 쉼터였다. 누각에 올라 다리를 까딱거리며 해찰 부리던 계집아이가 지금, 이별의 의미가 서리로 익는 가을이 깊어서야 여름이었을 중년 어머니의 행로를 돌아본다. 어머니는 이 숲을 빨리 벗어나려고 어린것의 발걸음을 재촉했을 것이다.
바람 하나 없는 숲에 낙엽이 진다. 팔랑거리며 떨어지는 낙엽이 날아오르는 오색나비의 몸짓처럼 찬연하다. 손을 잡고 천천히 걷는 연인들의 뒷모습이 단풍잎보다 곱다. 천년의 숲이 그들을 지켜주는 든든한 방풍림과 아름다운 경관림으로 기억되기를 고운 선생의 마음을 빌어 응원하고 싶다. 가랑잎 구르듯 천방지축 뛰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고요한 숲을 깨운다. 무덕무덕 쌓인 낙엽을 한 움큼씩 집어 하늘로 흩뿌리며 까르르 넘어가는 아이들이 동화 속의 삽화다.
그해 가을, 어머니의 신행길에도 오색 낙엽이 풍성한 융단을 펼쳤으리라. 신행길에 올랐던 열아홉 어머니는 낯선 곳으로 터전을 옮기는 것이 불안해 흔들리는 가마 속에서도 멀어져 가는 숲이 아쉬웠을까, 떨어지는 낙엽이 부모 형제를 떠나는 자신의 처지에 비견되어 서러웠을까. 한발 앞선 아버지는 숲이 끝나기 전에 중천의 해를 잡으리라며 걸음을 재촉했을까. 두 분 계실 때 관심 한 번 가져본 적 없던 부모님 신행길이 오늘에야 궁금하다.
한 생의 역할을 끝낸 고사목이 천년을 지킨 자리 밑동에서 새 생명을 밀어 올렸다. 아비 등에 의지해 자란 자식이 청년이 되고 장년이 되듯이 대를 이은 자손이 힘차게 뻗어 올라 무너져 뼈만 남아 하얗게 센 고사목을 에워싼다. 긴 풍상에 썩은 텅 빈 둥치와 벼락에 꺾인 가지, 상처투성이의 고목들도 아직 역할이 남은 듯 천년 숲을 꿋꿋이 지킨다. 세월에 쌓인 흔적을 훈장처럼 단 천년 묵은 느티나무도 성긴 잎을 단풍으로 물들인다. 고목 사이로 대를 이은 건장한 청년 나무가 하늘을 받친다. 상림에는 천년 고목에서 일년초까지 조손이 서로 바람을 막아주고 품을 내어주며 계절마다 번갈아 꽃이 피고 진다. 소멸에 대한 연민과 탄생의 희망이 공존하는 숲, 천년을 이어온 윤회가 숭고하다.
천연기념물 154호로 지정된 상림 숲은 함양읍의 서쪽을 흐르는 위천을 따라 인공으로 조성한 호안림이다. 신라 시대의 문장가, 고운 최치원 선생이 함양 태수로 있을 때 백성을 홍수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조성한 숲이다. 읍의 중앙을 관통하던 위천의 물길을 도심 밖으로 돌려 둑을 쌓고 제방을 따라 나무를 심어 마을과 농경지를 지킨 치수의 본보기다. 수만 평 넓은 땅에 수목 2만여 그루를 조성해서 대관림으로 지정하여 방풍림과 경관림으로 관리한 것이 천년에 이르렀다. 선생을 기리는 역사공원, 고운 기념관 뜰에 ‘다른 사람이 백 번 노력하면 나는 천 번 노력한다’라는 선생의 어록 <人百己千>이 자연석에 새겨져 있다. 당시로서는 엄청난 규모의 대 토목공사를 이룬 선생의 애민 정신과 노고를 상기한다.
상림은 함양군민의 휴식처에서 전 국민의 휴식처로 거듭나 함양의 얼굴이 되었다. 계절 따라 신록, 녹음, 단풍, 설경의 숲을 벗어나면 여름엔 연지에 각종 연꽃이 가섭의 미소를 수놓고 가을엔 산삼 축제와 더불어 광활한 꽃밭에 형형색색 꽃들의 향연이 펼쳐져 역사 문화만큼이나 볼거리 가득한 넓은 품으로 거듭났다.
세월 따라 어머니 걷던 길을 나 늘그막에 걷는다. 곱게 단장한 단풍잎이 허물어지듯 땅 위로 떨어진다. 성긴 단풍잎 사이로 해넘이의 저녁놀이 천년의 숲에 머물어 눈부시다,
(《수필문예》 제21집, 2022. 수필문예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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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프로필
《계간수필》 등단
수필문예회, 대구문인협회, 수필문우회
(현)대구수필가협회 이사,
2014년 대구수필가협회문학상 수상
수필집 《어릿광대》 《어머니의 꽃밭》
대구수필문예대학 1기 수료.
msk1127@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