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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1장 17-27절. 믿음의 두 가지 형태
1.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이 죽이려고 하니까, 요단강 동편 지역으로 도피하셔서,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그러던 중, 요단강 서편 베다니마을로부터 전갈이 오기를, 나사로가 죽어 가고 있다고 어서 와주시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가지 않으시고, 요단강 동편에서 그대로 계셨습니다.
그래서, 나사로가 죽어버렸습니다.
그러자, 나사로의 누이동생들인 마르다와 마리아는 심한 슬픔과 낙심에 빠져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가정의 살림을 꾸려나갈 오빠가 죽은 것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자기들의 믿음과 기대를 배신하고, 죽어 가는 나사로에게 와주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제, 나사로가 죽어서 시신은 무덤에 장사지내고, 조문객들이 찾아와 위로하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나사로가 죽은 지 사흘이 지나도록 예수님은 오시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날이 거듭할수록, 예수님께 대한 마르다와 마리아의 배신감과 불신감은 더욱 깊어만 갔습니다.
그런데,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째 되는 날에 예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그러자, 마르다는 예의상 예수님을 맞이하러 나갔으나, 마리아는 낙심하여 주저앉아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예의상 맞이하러 나온 마르다에게 “네 오라비가 살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마르다는 “마지막 날 부활 때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라고 냉담하게 대답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다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 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마르다가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인 줄 내가 믿나이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이후에, 마르다는 예수님의 분부를 듣고, 마리아를 데리고 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보자 울면서 발아래 엎드려 “주님이 이곳에 계셨더라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 하였겠나이다”라고 원망 섞인 말을 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무덤에 가셔서, 기도하시고 나사로의 시신을 향해 “나사로야 나오라!”고 큰소리로 외치셨습니다.
그러자, 죽은 지 나흘이 되어 썩은 송장이 되었던 나사로가 다시 살아나왔습니다.
2. 오늘 본문에는 마르다와 마리아가 등장합니다.
그런데, 마르다의 믿음과 마리아의 믿음은 차이가 납니다.
오늘은 이 두 사람의 믿음의 형태를 살펴봄으로써,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3. <믿음의 두 가지 형태>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먼저 마르다의 신앙 형태입니다.
17절. 예수께서 와서 보시니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 지 이미 나흘이라.
New American Standard Bible: 예수께서 도착하셨을 때, 나사로는 이미 무덤에 있은 지 나흘째가 되었음을 아셨습니다. (So when Jesus came, He found that he had already been in the tomb four days)
예수께서 와서 보시니
Ἐλθὼν οὖν ὁ Ἰησοῦς εὗρεν αὐτὸν
Having come therefore the Jesus found him
직역하면 ‘그러므로 예수께서 오셔서 그를 보셨다’란 뜻입니다.
‘와서’(Ἐλθὼν)는 부정과거 분사이고(Having come), ‘보시니’(εὗρεν)는 부정과거로서(found) 예수께서 단호히 나사로에게 가셔서 보신 과거의 역사적인 사건을 가리킵니다.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 지 이미 나흘이라.
τέσσαρας ἤδη ἡμέρας ἔχοντα ἐν τῷ μνημείῳ.
four already days having been in the tomb
직역하면 ‘이미 무덤 속에서 나흘이 지났다’는 뜻입니다.
‘있은지’(ἔχοντα)는 현재분사로서(having been) 지금 나흘이 지나가고 있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1. 유대 나라에서는 장례가 나면, 날씨가 더운 지방이라 시신이 빨리 부패하기 때문에, 당일에 시신을 무덤에 장사지냅니다.
그리고, 일주일에 걸쳐서 조문객들을 받습니다.
대부분 나흘째 되는 날이 가장 조문객이 많았습니다.
예수님은 일부러 가장 조문객이 많은 나흘째 되는 날에 이 초상집에 찾아가셨습니다.
18절.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가깝기가 한 오 리쯤 되매
New American Standard Bible: Now Bethany was near Jerusalem, about two miles off;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가깝기가 한 오 리쯤 되매
ἦν δὲ Βηθανία ἐγγὺς τῶν Ἱεροσολύμων, ὡς ἀπὸ σταδίων δεκαπέντε.
was being now Bethany near of the Jerusalem, about away stadia fifteen
‘되매’(ἦν)는 미완료과거로서(was being) 언제나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는 뜻입니다
19절. 많은 유대인이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그 오라비의 일로 위문하러 왔더니
New American Standard Bible: 많은 유대인들이 마르다와 마리아의 오라비에 대해서 위로하려고 와 있더라. (and many of the Jews had come to Martha and Mary, to console them concerning their brother.)
많은 유대인이 마르다와 마리아에게—-왔더니
πολλοὶ δὲ ἐκ τῶν Ἰουδαίων ἐληλύθεισαν πρὸς τὴν Μάρθαν καὶ Μαριὰμ,
many now of the Jews had come to the Martha and Mary
‘왔더니’(ἐληλύθεισαν)는 대과거(pluperfect)로서(had come),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이미 많은 유대인들이 조문하러 왔다 간 사실을 가리킵니다.
그 오라비의 일로 위문하러
ἵνα παραμυθήσωνται αὐτὰς περὶ τοῦ ἀδελφοῦ.
that they might console them concerning the brother
직역하면 ‘그들은 그 오라비에 관해서 그들을 위로하려고 했다’는 뜻입니다.
‘위문하러’(παραμυθήσωνται)는 부정과거 가정법 동사로서(they might console) 위문하고자 하는 확실한 의도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1. 우리 인간들은 장례가 나면, 조문하고 위로하러 갑니다.
목사들도 장례가 나면, 위문을 갑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위문하러 가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지금도 목사들은 마르다처럼 “마지막 부활 때에는 다시 살 것이니, 부활 신앙을 가지고 위로를 받으십시오”라고 위로 예배를 드립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위로 예배를 드린 적이 없으시고, 회당장 야이로의 딸도 살리셨고, 나인성 과부의 아들도 살리셨고, 나사로도 살리셨습니다.
그러므로, 겉으로 보기에는 예수님도 예의상 조문하러 온 사람과 같았습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예수님 오신다는 말을 듣고도 실망이 커서, 예수님을 맞으러 나가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언니 되는 마르다는 그래도 조문객에 대한 예의로 나가서 예수님을 맞이했습니다.
20절. 마르다는 예수 오신다는 말을 듣고 곧 나가 맞되 마리아는 집에 앉았더라.
New American Standard Bible: 그러므로 마르다는 예수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 맞으러 나갔으나, 마리아는 집에 있더라. (Martha therefore, when she heard that Jesus was coming, went to meet Him, but Mary stayed at the house.)
마르다는 예수 오신다는 말을 듣고 곧 나가 맞되
ἡ οὖν Μάρθα, ὡς ἤκουσεν ὅτι Ἰησοῦς ἔρχεται, ὑπήντησεν αὐτῷ·
the therefore Martha, when she heard that Jesus is coming, met Him
직역하면 ‘그러므로 마르다는 예수께서 오고 계시다는 것을 듣고 그를 맞이했다’는 뜻입니다.
‘오신다는’(ἔρχεται)는 현재형이고(is coming), ‘듣고’(ἤκουσεν)는 부정과거로서(she heard) 과거의 확실한 사실을 가리킵니다.
‘맞이했다’(ὑπήντησεν)는 부정과거로서(met) 의도적으로 확실하게 맞이한 과거의 사실을 가리킵니다.
마리아는 집에 앉았더라
Μαριὰμ δὲ ἐν τῷ οἴκῳ ἐκαθέζετο.
Mary but at the house was sitting
직역하면 ‘그러나 마리아는 집에 계속 앉아 있었다’는 뜻입니다.
‘앉았더라’(ἐκαθέζετο)는 미완료과거로서(was sitting) ‘계속 앉아있었다’는 뜻입니다.
1. 그러나, 마르다는 곧바로 예수님께 와달라고 사람을 보냈어도 오시지 않은 데 대해서 원망 섞인 말을 했습니다.
21절.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 하였겠나이다.
New American Standard Bible: 그 때 마르다가 예수께 말하기를 “주여, 당신이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라고 했다. (Martha then said to Jesus, "Lord, if You had been here, my brother would not have died.)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εἶπεν οὖν ἡ Μάρθα πρὸς Ἰησοῦν
said then the Martha to Jesus,
직역하면 ‘그러자 마르다가 예수께 말했다’는 뜻입니다.
‘말했다’(said)는 확실한 의도를 가지고 말한 과거의 역사적인 사실을 가리킵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 하였겠나이다.
Κύριε, εἰ ἦς ὧδε, οὐκ ἂν ἀπέθανεν ὁ ἀδελφός μου.
Lord, if You had been here, not would have died brother of me
직역하면 ‘주여, 만일 당신이 여기에 계속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확실히 죽지 않았을 텐데요’라는 뜻입니다.
‘계셨더면’(ἦς)는 미완료과거로서(You had been) 과거에 계속 계신 상태를 가리킵니다.
‘죽지 아니 하였겠나이다’(οὐκ ἂν ἀπέθανεν)에서 동사(ἀπέθανεν)는 부정과거로서(died) 과거에 확실히 죽지 않은 분명한 사실을 가리킵니다.
1. 이런 상황이면 누구든지 원망할 만하지요.
평상시에 그렇게도 사랑한다고 하시던 예수님, 그리고, 잠자리가 없을 때나 식사할 자리가 없을 때면 언제든지 오셔서 잡수시고 주무시던 예수님이, 막상 나사로가 죽어간다는 말을 듣고도, 한나절이면 올 수 있는 거리에 있으면서도, 모른 체하셨으니, 어찌 원망이 나오지 않겠습니까?
보통 사람 같으면, 원수가 되어버렸을 것입니다.
그래서, 동생 마리아는 심각하게 시험이 들어버려서, 예수님이 오신다고 해도, 나와 보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마르다는 예의상 언니답게 예수님을 맞이하였습니다.
그렇지만, 마르다는 예수님께 나사로가 죽어 간다고 해도 와주지 않은 데 대해서 원망 섞인 말을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이라도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면, 하나님이 들어주실 것이라고, 예의상 형식적인 신앙을 표현했습니다.
22절.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New American Standard Bible: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당신이 하나님께 구하는 것을 무엇이든지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주실 것을 알고 있습니다.” ("Even now I know that whatever You ask of God, God will give You.")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καὶ νῦν οἶδα ὅτι ὅσα ἂν αἰτήσῃ τὸν Θεὸν, δώσει σοι ὁ Θεός.
Even now I have known that whatever You might ask the God, will give You the God
직역하면 ‘비록 지금이라도 당신이 하나님께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주실 것을 내가 아나이다’는 뜻입니다.
‘구하면’(αἰτήσῃ)는 부정과거 가정법 동사로서(You might ask) 분명한 의도를 가지고 확실하게 구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주실 줄을’(δώσει)은 미래형입니다(will give).
‘내가 아나이다’(οἶδα)는 현재완료로서(I have known) 지금 내가 알고 있다는 뜻입니다.
1. 그러나 마르다의 이 말은 나사로의 부활을 믿는 말이 아님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39절에서, 마르다는 예수님이 나사로를 살려주시려고 할 때, “주여 죽은 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이 말을 보면, 마르다는 예수님의 기도로 나사로가 살 것을 믿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마르다가 예수님의 기도 응답을 안다는 것은, 가나안 혼인 잔치에서 예수님이 포도주를 기적적으로 만들어주신 것처럼, 혹시 손님 대접하는 데 필요한 것을 기도로 만들어주실 것을 안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다시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23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
New American Standard Bible: 예수께서 마르다에게 말씀하시기를 “네 오라비가 다시 살 것이다”고 하셨다. (Jesus said to her, "Your brother will rise again.")
예수께서 가라사대
λέγει αὐτῇ ὁ Ἰησοῦς
says to her the Jesus
직역하면 ‘예수께서 그녀에게 말씀하시기를’이란 뜻입니다.
‘가라사대’(λέγει)는 현재형입니다(says).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
Ἀναστήσεται ὁ ἀδελφός σου.
Will rise again the brother of you
‘다시 살리라’(Ἀναστήσεται)는 미래형입니다(Will rise again).
1. 그러자, 마르다는 마지막 부활 때는 다시 살 줄을 안다고 말했습니다.
24절. 마르다가 가로되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
New American Standard Bible: 마르다가 예수께 대답하기를 “마지막 날 부활 시에는 그가 다시 살 줄을 내가 알고 있습니다”라고 했다. (Martha said to Him, "I know that he will rise again in the resurrection on the last day.")
마르다가 가로되
λέγει αὐτῷ ἡ Μάρθα
says to Him the Martha
직역하면 ‘마르다가 그에게 말하기를’이란 뜻입니다.
‘가로되’(λέγει)는 현재형입니다(says).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
Οἶδα ὅτι ἀναστήσεται ἐν τῇ ἀναστάσει ἐν τῇ ἐσχάτῃ ἡμέρᾳ.
I have known that he will rise again in the resurrection in the last day
직역하면 ‘그가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란 뜻입니다.
‘다시 살 줄을’(ἀναστήσεται)는 미래형이고(he will rise again), ‘내가 아나이다’(Οἶδα)는 현재분사로서( I have known) ‘지금 이미 내가 알고 있습니다’라는 뜻입니다.
참 마르다는 마지막 날 부활 신앙에 대한 신앙적 지식을 잘 갖추고 있는 훌륭한 성도였습니다.
그러나 아직 현 세상에서 주님이 죽은 자를 살리시는 신앙은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1. 참 마르다는 마지막 날 부활 신앙에 대한 신앙적 지식을 잘 갖추고 있는 훌륭한 성도였습니다.
그러나 아직 현 세상에서 주님이 죽은 자를 살리시는 신앙은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2. 이처럼 마르다는 반복해서 <아나이다>라고 했고, <믿나이다>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마르다가 <마지막 부활시에 다시 살 줄을 안다>고 하자, 예수님께서는 “지금 살 것을 믿느냐?”고 촉구하셨습니다.
25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New American Standard Bible: 예수께서 마르다에게 말씀하시기를 “나는 그 부활이요 그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그가 죽어 있을지라도 살아날 것이다”라고 하셨다. (Jesus said to her, "I am the resurrection and the life; he who believes in Me will live even if he dies,)
예수께서 가라사대
εἶπεν αὐτῇ ὁ Ἰησοῦς
said to her the Jesus
직역하면 ‘예수께서 그녀에게 말씀하셨다’는 뜻입니다.
‘가라사대’(εἶπεν)는 부정과거로서(said) 확실하고 분명하게 말씀한 사실을 가리킵니다.
Ἐγώ εἰμι ἡ ἀνάστασις καὶ ἡ ζωή·
I I am the resurrection and the life
또 유명한 예수님의 자증언(自證言: 에고 에이미, Ἐγώ εἰμι, I am saying)입니다.
여기서 ‘나는’(Ἐγώ: I)이 강조되어 있어서 ‘바로 나는’이란 뜻입니다.
즉 ‘바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출애굽기 3장 14절에 ‘나는 스스로 있는자’(Ἐγώ εἰμι ὁ ὤν· I am who I am)란 말씀이나, 출애굽기 6장 2절에서 ‘나는 여호와라’(I am the LORD: אֲנִ֥י יְהוָֽ)고 말씀하신 것처럼, 예수님이 하나님으로서 자기 계시를 가리키는 말씀(I am saying: 자증언)이기도 합니다.
요한복음에는 이런 하나님으로서 예수님의 자증언이 많이 나와 있습니다.
요한복음 6:51. 나는 산 떡이니
요한복음 8:12. 나는 세상의 빛이니
요한복음 10:7. 나는 양의 문이니
요한복음 10:11. 나는 선한 목자라
요한복음 14:6.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요한복음 15:5. 나는 포도나무요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ὁ πιστεύων εἰς ἐμὲ, κἂν ἀποθάνῃ, ζήσεται,
the (one) believing in Me, even if he should die, he will live
‘믿는’(πιστεύων)은 현재분사로서(believing), 현재 예수님을 ‘믿고 살아가는’이란 뜻이고, ‘죽어도’(ἀποθάνῃ)는 부정과거 가정법 동사로서(he should die) ‘그가 반드시 죽는다고 할지라도’란 뜻이고, ‘살겠고’(ζήσεται)는 미래형입니다(he will live ).
26절.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New American Standard Bible: “그리고 살아 있으면서 나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결코 죽지 않을 것이다. 이것을 네가 믿느냐?” (and everyone who lives and believes in Me will never die. Do you believe this?")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καὶ πᾶς ὁ ζῶν καὶ πιστεύων εἰς ἐμὲ, οὐ μὴ ἀποθάνῃ εἰς τὸν αἰῶνα·
and everyone who living and believing in Me, never not shall die to the age
직역하면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자는 영원히 결코 죽지 않을 것이다’란 뜻입니다.
‘살아서’(ζῶν)와 ‘믿는’(πιστεύων)은 둘 다 현재분사로서(living, believing) 현재 계속 살아있으면서 계속 주님을 믿고 살아가는 것을 가리킵니다.
‘죽지’(ἀποθάνῃ)는 부정과거 가정법 동사로서(shall die) 단연코 확실히 죽지 않는 것을 강조하신 말씀입니다.
이것을 네가 믿느냐?
πιστεύεις τοῦτο;
believe you this?
‘믿느냐’(πιστεύεις)는 현재형으로서 현재 믿고 있느냐는 뜻입니다.
1. 그러자, 이제는 마르다가 <믿는다>고 대답을 합니다.
27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New American Standard Bible: 마르다가 예수께 말하기를 “그렇습니다, 주여. 내가 당신은 그리스도시고,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세상에 오시리라는 바로 그분임을 믿습니다”라고 했다. (She said to Him, "Yes, Lord; I have believed that You are the Christ, the Son of God, even He who comes into the world.")
가로되
λέγει αὐτῷ
she says to Him
직역하면 ‘그 여자가 그에게 말하기를’이란 뜻입니다.
‘가로되’(λέγει)는 현재형입니다(she says).
주여 그러하외다
Ναί, Κύριε·
Yes, Lord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ἐγὼ πεπίστευκα ὅτι σὺ εἶ ὁ Χριστὸς ὁ Υἱὸς τοῦ Θεοῦ, ὁ εἰς τὸν κόσμον ἐρχόμενος.
I I have believed that You You are the Christ, the Son of God, the (One) into the world coming
직역하면 ‘당신은 그리스도시오,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을 내가 믿나이다’란 뜻입니다.
이 문장에서 ‘내가’(ἐγὼ: I)와 ‘당신’(σὺ: you)이 강조되어 있어서 ‘바로 제가 믿습니다’란 뜻이고, ‘바로 당신은 그리스도요’란 뜻입니다.
‘믿나이다’(πεπίστευκα)는 현재완료로서(I have believed) 이미 믿었고 지금도 믿는다는 뜻입니다.
‘오시는’(ἐρχόμενος)은 현재분사입니다(coming).
‘이신 줄’(εἶ)는 현재형입니다(You are).
1. 여기서 우리는 마르다의 신앙 형태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1) 먼저 마르다가 어떤 위치에 있는 사람이었는지 알아야 하겠습니다.
마르다의 집은 성령강림 이전에, 예수님께서 가장 많이 들리신 곳입니다.
즉, 예수님이 부활하신 이후로는 예루살렘의 마리아 집이 교회로 사용되었지만, 예수님 생전에는 마르다의 집이 예수님을 가장 많이 모신 교회였습니다.
누가복음 10장에는, 예수님이 갑자기 장정 12명을 데리고, 마르다의 집에 들이닥쳐서, 마르다가 음식 장만하는데, 분주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또, 마태복음 21장 17절에는, 예수님과 제자들이 명절에 예루살렘에 가셔서 전도하시고 밤에는 베다니 마르다의 집에서 주무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2) 이처럼, 마르다는 예수님 생전에 교회의 큰 지도자였고, 신앙과 봉사와 말씀으로 잘 무장된 최고 여성 지도자였습니다.
22절에서는 예수님이 전능하셔서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기도하시면, 하나님이 다 이루어주실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24절에서는, 성도가 예수님의 재림 시에 부활할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또한, 27절에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베드로가 마태복음 16장에서 고백한 것과 똑같은 신앙 고백을 한 사람입니다.
(3) 이처럼, 마르다는 훌륭한 신앙을 갖고 있는 당시 여성 지도자였음에도 불구하고, 막상 자신의 집에 죽음의 위협이 닥쳤을 때는, <지식>만 있었지, <믿음>은 없었습니다.
22절에서도 <아나이다>고 했고, 24절에서도 <아나이다>고 했습니다.
(4) 그러나 드디어 27절에서 마리아는 “내가 믿나이다”라고 올바른 신앙고백을 했습니다.
27절.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정말 훌륭한 신앙 고백이 아닐 수 없습니다.
(5) 그런데 ‘아나이다’라는 지식적인 신앙을 가지고는 실제 삶의 현장에서 힘을 발휘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즉, 내가 지식적 신앙을 가지고, 다른 성도가 어려움에 처해서 신앙이 흔들릴 때, <성경 말씀이 이러하니, 굳게 믿으십시오>라고 가르치는 것과, 막상 내가 그 문제에 부딪혀서 <성경 지식>이 살아있는 말씀으로 내게 체험되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마치 학교에서 아기 낳고 기르는 것을 공부하는 것과, 실제로 직접 아기를 낳아보고 길러보는 것과는 큰 차이가 나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 마르다는 예상치 않는 오빠의 죽음이라는 큰 문제를 당하여, 그 동안 교회의 여성 지도자였지만, <신앙>이 여지없이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이것은 지식적인 말씀이 믿음의 뿌리를 내리지 못한 모습입니다.
(6) 이 시간 우리들도 <지식적인 말씀>을 가지고, 역경에 처한 다른 성도를 지도하여야 하지만, 나 자신이 결정적 문제에 봉착했을 때, <믿음의 뿌리>가 흔들리는 성도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3장 16-19절에서 이렇게 기도합니다.
① 성령으로 속사람이 강건해지고,
②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마음에 계시게 하시고,
③ 사랑 안에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④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⑤ 하나님의 충만으로 충만케 되기를 원한다고 기도했습니다.
(7) 마르다가 처음에는 예수님이 죽은 나사로의 문제를 지금 당장 해결해줄 수 없고, 장래 부활 때 다시 살 것으로만 믿은 <지식적인 신앙>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계속적인 말씀을 듣고 27절에서는 참된 신앙 고백을 했습니다.
27절.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마르다가 22절에서 “이제라도 하나님께서 이루어주실 줄 아나이다”라고 고백했는데, 한 걸음 나아가서 <주님 내가 주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사오니, 지금 죽은 나사로를 살려주옵소서>라고 기도했더라면 참 좋았을 것입니다.
이처럼 마르다가 자신의 고백대로 기도하였더라면, 예수님께서 <심령에 통분히 여기시지 않고> 당장 가자고 하시면서 살려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39절에서 마르다는 예수님께서 <돌을 옮겨놓으라>고 말씀하셨을 때, 마르다는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고 불신앙적인 말로 예수님의 말씀을 거역했습니다.
그러자, 40절에서, 예수님은 책망조로 마르다에게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않았느냐?>고 꾸짖으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마르다를 책망하신 이유는, 마르다의 신앙고백이 실제 삶의 현장에서 적용되지 않는 <진실성 없는 믿음>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8) 그런데, 이런 <진실성 없는 믿음>은 비단 마르다만이 아니라, 오늘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도신경을 통해, 전능하신 하나님과 하늘에 계신 예수님과 성령님과 죄 용서와 부활을 믿는다고 고백하면서도, 죄 문제 하나만 갖고도 얼마나 많이 자신을 정죄하고, 죄책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사는지 모릅니다.
디모데후서 1장 5절에서, 바울 사도는 디모데에게 <거짓이 없는 믿음>이 있다고 칭찬했습니다.
그리고, 디모데전서 1장 5절에는, 교훈의 목적이 청결한 마음과 거짓이 없는 믿음에서 우러나는 사랑을 가지라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2. 누가 참된 믿음의 소유자입니까?
(1) 술집과 교회의 재판
술집과 교회가 재판을 하게 되었습니다.
재판의 사유는 교회가 술집 망하게 해달라고 기도해서, 술집이 망해버렸다는 것이었습니다.
고발인인 술집 주인이 교회가 기도해서 술집이 망했다고 고소했습니다.
그러자, 교회 장로님들이 그렇지 않다고 변호를 했습니다.
그러자, 재판관이 판결을 내렸습니다.
<술집 주인은 기도가 응답 되었다고 믿는 믿음이 있는 참된 신자이고, 교회 장로님들은 기도가 응답 되지 않았다고 불신하는 믿음 없는 불신자임!>
(2) 목사와 심방대원들이 환자 심방을 갔습니다.
예배를 드리고, 환자의 병을 낫게 해달라고 기도드렸습니다.
그런데, 나오면서 권사님이 <아무래도 저 집사님 못 살겠지요?>
그러니까, 목사님이 <권사님, 기도해놓고 ‘못 살겠지요’가 무슨 말이요!>
우리는 이 시간 누가 참된 믿음의 소유자인가, 반성해보아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도님들은 거짓 믿음이 아닌, 참된 믿음의 소유자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3. 참된 믿음은 실천하는 것입니다.
(1) 깁슨(Gibson)이란 사람은 지독히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서,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러자, 한 청년이 부자가 된 비결을 물었습니다.
<어떻게 부자가 되셨습니까?>
그러자, 깁슨이 대답했습니다.
<십일조 드리고요, 손님을 주님처럼 잘 대접하세요.>
그러자, 청년은 <그것은 다 아는 말씀인데요>라고 했습니다.
그 , 깁슨은 <아셨으면, 믿고 실천하세요!>라고 했답니다.
(2) 유명한 <하드슨 테일러>(James Hudson Taylor. 1832-1905년) 선교사가 타고 가는 배가 바람이 안 불어서 더이상 나갈 수 없었습니다.
그때, 선원들이 테일러 선교사에게 기도해달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테일러 선교사는 <돛을 올리세요. 제가 기도하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선원들은 <바람이 안 부는데, 무슨 돛을 올려요?>라고 불평했습니다.
그때, 테일러는 <여러분이 제 기도를 믿고 돛을 올려야, 저도 기도하겠습니다>고 했습니다.
이 말을 듣고, 선원들이 돛을 올리자 테일러가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바람이 불어서 배가 항해를 계속할 수 있었습니다.
(3) 가뭄이 심하게 들어서, 온 교회 성도들이 하나님께 비를 달라고 기도회를 갖기로 했습니다.
장로님, 권사님, 집사님들이 모두 교회로 나왔습니다.
그런데, 어린아이 둘이서 우산을 가지고 교회로 나왔습니다.
그러니까. 어른 성도님들이 아이들에게 <너희들 미쳤니? 멀쩡한 날씨에 왜 우산을 들고 나오니?>라고 책망했습니다.
그러나 기도하면, 하나님이 비를 주신다는 말을 이 두 아이들만 믿었던 것입니다.
(4) 1840년에 영국의 <윌리엄스>(George Williams, 1821~1905년)이는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가 고린도전서 15장 2절 “복음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면, 이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으리라”는 말씀에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가난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굳게 믿고 살았습니다.
마침내, YMCA의 창설자로 성공했습니다.
참된 믿음은 이처럼, 말씀대로 실천하는 믿음입니다.
이처럼, 성도님들은 말씀을 믿고, 실천하는 믿음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3. 참된 믿음은 열매를 맺습니다.
(1) 교회 앞에 잡화상 가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가게 주인이 교인들에게 “이번 목사님은 참 설교를 잘하시는군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교인들이 “당신은 교회도 안 나오면서 어떻게 목사님 설교를 압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잡화상 주인이 “네, 전에는 교인들이 외상을 떼먹었었는데, 이번 목사님 오시고 나서는 외상 떼먹는 교인이 없어졌거든요!”라고 대답했습니다.
(2) 술집 주인도 그렇게 말했습니다.
이번 목사님 오시고 나서는 교인들이 통 술 먹으러 안 오는군요.
(3) 여성회관 사람들도 말합니다.
“이번 목사님 오시고 나서는 그 교회 교인들이 통 화투 치러 안 오네. 그리고, 회관에 오면, 싸움질하던데, 이제는 싸움도 안 하고. 참 목사가 잘 가르치나봐!”
이처럼, 참된 믿음은 열매를 맺습니다.
우리 성도님들도 참된 믿음으로 생활의 열매를 맺으시기 바랍니다!
4. 거짓 믿음은 영생을 잃게 합니다.
(1) 부자인 체하면, 가난해집니다.
왜냐하면, 가진 것보다 더욱 과소비하기 때문입니다.
(2) 아는 체하면, 더욱 무식해집니다.
왜냐하면, 배우려고 안 하기 때문입니다.
(3) 믿음이 있는 체하면, 영생 복락을 못 얻습니다.
왜냐하면, 은혜를 사모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5.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을 가진 사람이 있었습니다.
<스티븐>((Stephen)이라는 사람의 집 뒤에 산이 있었습니다.
이 산 때문에, 집으로 홍수가 몰아치고, 눈사태가 나곤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목사님이 마태복음 17장 20절 말씀을 가지고 설교를 하셨습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 할 것이 없으리라”
그러자 스티븐 청년은 그 말씀을 믿고, “하나님, 우리 집 뒷산을 옮겨주십시오”라고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루도 아니고, 열흘도 아니고, 계속 기도했습니다.
그러자, 목사님이 걱정이 되었습니다.
저 순수한 믿음을 가진 청년이 하나님 말씀을 액면 그대로 믿고 기도하다가, 시험에 들면 어쩔까?
그러나, 스티븐은 계속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저 산을 옮겨주십시오”
목사님은 “스티븐의 순수한 신앙에 시험이 들지 말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10일이 지나고, 20일이 지나고, 한 달이 지났습니다.
그래도, 스티븐은 순수하게 믿고 기도했습니다.
목사님도 계속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40일째 되는 날이었습니다.
스티븐 청년이 목사님에게로 왔습니다.
(어떻게 되었을까요?)
“목사님, 과거에는 기적적으로 산을 옮기셨는지 모르지만, 현대에는 불도저로 산을 옮겨버리시더군요”
목사님: “그게 무슨 말이야?”
스티븐: “네, 제가 목사님 설교 듣고, 산을 옮겨달라고 기도했잖아요? 그런데, 우리 집 뒷산에 도로가 난다고 불도저가 뒷산을 밀어버렸어요!”
요한복음 20:27.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마가복음 9:23.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히브리서 11:1-3.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히브리서 11:6.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거짓이 없는 믿음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날마다 영생 복락을 누리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둘째, 마리아의 신앙 형태입니다.
1. 마리아의 신앙 형태는 마르다와 달랐습니다.
언니 마르다는 예수님께 실망하고 낙심해도, 예수님께 대한 예의를 지켰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날 부활도 알았고, 예수님이 지금도 기도하시고 도와주실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일단 한 번 실망하니까, 완전히 낙심해버렸습니다.
즉, 예수님이 오신다고 해도, 주저앉아서 맞이할 힘조차도 없었습니다.
이처럼, 마리아는 신앙적 회의가 생기니까, 지금까지 믿어온 믿음이 뿌리째 흔들렸습니다.
2. 그러나, 마리아는 다시 한번 신앙을 회복하자, 높은 신앙의 경지에 올라가서, 값비싼 향유를 예수님께 갖다 부어드린 헌신적인 신앙이 생겼습니다.
이처럼, 마리아는 불신이 생겼을 때는 완전히 믿음이 뿌리째 흔들리고, 사랑도 완전히 식어버리고, 원망과 미움이 생겼습니다.
그러나, 한번 믿음이 회복되면, 모든 것을 쏟아부어서 사랑하고, 모든 것을 바쳐서 헌신하는 극단적인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3. 마리아는 아무리 생각해도, 요한복음 4장 45-54절에서 왕의 신하의 아들을 거리를 초월해서 살리신 것과 같이, 예수님이 나사로의 위급함을 들었을 때, 말씀만으로 다시 살릴 수도 있었을 텐데, 그렇지 않으신 이유를 알 수가 없었습니다.
당시 마리아의 신앙 수준으로서는, 도무지 예수님의 과거 행동과 지금 마리아가 당한 사건이 상호모순이 되는 것 같아서, 심각한 회의와 우울증에 빠져버렸습니다.
4. 마리아는 신앙 문제를 삶의 핵심이요, 절대적인 요소로 생각하고 살아왔기 때문에, 신앙 문제가 풀리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이처럼, 마리아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생명과 같은 존재였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길이 기념될 만한 나드 향유를 붓는 헌신을 나타냈던 것입니다.
마태복음 26:13. 온 천하에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마리아의 행한 일도 말하여 기념하리라.(막14:9)
5. 이처럼, 마리아는 예수님을 마음 중심에 모시고, 살아가는 훌륭한 신앙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마리아처럼, 예수님을 마음 중심에 모시고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주님께 길이 칭찬받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성경에서, 예수님은 25-26절에서,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 여기서 <죽어도>라는 말(ἀποθάνῃ, he should die)은 <죽은 후에도>라는 뜻이 아니고, <반드시 죽는 존재일지라도>의 뜻입니다.
즉, 우리 인간은 현재 죄로 인해 반드시 <죽는 존재일지라도 예수님을 믿으면 살리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죄로 인해 반드시 죽는 존재일지라도 예수 믿으면 그 영혼이 살아나고 장차 육신도 살아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2. 또한,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 하리라>(whoever lives and believes in me shall never die)는 것은 두 가지 사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1) 첫째,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모시고 사는 사람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날마다 영생을 누리며 신령한 삶을 살고 결코 죽지 않습니다. (he who, being united to Christ by faith, lives a spiritual life by virtue of that union, shall never die)
이런 성령으로 인한 영생의 삶은 육신의 죽음으로도 결코 사라지지 않고, 영생 천국으로 완성됩니다( his spiritual life shall never be extinguished, but perfected in eternal life)
(2) 둘째로, <결코 죽지 않는다>는 말씀(shall never die)은 장차 육신이 천국에서 영원한 행복과 영생을 누린다는 약속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This promise ensures future life and happiness to it also)
3.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예수 믿는 사람에게 영생이 있다는 것을 표적으로 보여주기 위해서, 나사로를 살리셨습니다.
요한복음 6장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영생 주시는 분이심을 믿게 하려고, 5병 2어의 표적을 행하셨습니다.
이제, 11장에서도, 예수님은 영생 주시는 분이심을 믿게 하려고, 나사로를 살리는 표적을 행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원히 죽지 아니한다>는 말씀은 이 세상에서 영혼이 영생을 누리다가, 장차 천국에서 육신이 죽지 않고 영생을 누리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4. 영생교를 창설한 조희성씨는 이 성경 말씀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예수 믿으면, 이 세상에서 육신이 영원히 산다고 잘못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도 감옥살이 하다가 죽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우리 육신은 죽었다가 예수님의 재림 시에 다시 살 것입니다.
그래서 나사로는 다시 살았으나 다시 죽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우리 모든 사람은 다시 살아나서, 영원히 죽지 않는 몸을 입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분들은 영생 천국에 들어갈 것이고, 불신자는 영원 지옥에 들어갈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으면 영원히 살리라>는 말씀은 육신이 이 땅에서 영원히 산다는 말씀이 아니고, 영혼이 영원히 살고, 재림 후에 천국에서 육신도 영원히 산다는 말씀입니다.
5. 그런데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영혼이 영생을 누리며 사는 것입니다.
이 영혼의 영생은 예수님을 믿고 성령님이 충만하게 함께 하실 때, 항상 누리며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건강 문제나 돈 문제나 인간관계 문제 때문에, 마귀의 시험에 빠져 고민하고, 원망 불평하고, 악한 감정에 사로잡히면, 영혼이 영생을 누리지 못하고, 지옥 같은 죽을 맛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열심히 기도하여, 성령님의 충만하심을 받고, 성령님이 주시는 지혜와 능력을 받아서, 심령에 평안과 감사를 가지고 선한 열매 맺는 영생의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찬송가 436장에서 “나 이제 주님의 새 생명 얻은 몸 옛것은 지나고 세 사람이로다. 그 생명 내 맘에 강같이 흐르고 그 사람 내게서 해같이 빛난다. 영생을 누리며 주안에 살리라. 오늘도 내일도 주함께 살리라”고 했습니다.
즉 이 세상에서도 주님을 모시고 살면 영생을 누리며 살 수 있습니다.
<영생을 누리며 주안에 살리라. 오늘도 내일도 주함께 살리라>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마르다처럼 훌륭한 신앙 지도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마리아처럼, 예수님을 마음 중심에 모시고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날마다 주님 모시고 영생을 누리며 사시다가, 주님과 동행하므로 사망의 골짜기도 주님과 함께 잘 통과하시고, 천국에서 영생을 누리며 사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