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此身死了死了 一百番更死了(차신사료사료 일백번갱사료)
白骨爲塵土 魂魄有也無(백골위진토 혼백유야무)
向主一片丹心 寧有改理與之(향주일편단심 영유개리여지)
눈치 빠른 벗님들은 아셨겠지만, 포은 정몽주(圃隱 鄭夢周, 1337~1392)선생이 지었다는 '단심가(丹心歌)'의 한문본입니다. 여기에 님들의 옛 기억을 되돌리기 위해 원문 시조를 붙입니다.
이 몸이 죽어 죽어 一百番 곳쳐 죽어
白骨이 塵土되여 넉시라도 잇고 업고
님 향한 一片丹心이야 가실 줄이 이시라
이 단심가(丹心歌)에 반드시 따라다니는 시조가 이방원(李芳遠, 1367~1422)의 '하여가(何如歌)'지요.
如此亦如何 如彼亦如何(여차역여하 여피역여하)
城隍堂後苑 頹圮亦何如(성황당후원 퇴비역하여)*
吾輩若此爲 不死亦何如(오배역차위 불사역하여)
이런들 엇더리 뎌런들 엇더리
萬壽山 드렁츩이 얽어진 긔 엇더리*
우리도 이티 얽어져서 百年까지 누리리라
*시조의 2번째 줄의 경우 한문본에는 '성황당 뒷뜰(城隍堂後苑)이 무너진(頹圮)들 어떠리'로 되어 있음.
역사는 이렇게 말하지만
조선이 건국되던 바로 그 해(1392년) 봄, 명나라에서 돌아오는 세자를 마중 나갔던 이성계(李成桂, 1335~1408)가 사냥하다 말에서 떨어져 위독하다는 소식이 전해옵니다. 당시 정적이었던 정몽주는 이 기회에 '역성(易姓)혁명파'를 제거하려고 언관들을 시켜 정도전∙조준∙남은 등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립니다. 결국 당시 유배중이던 정도전을 감금시키고, 조준∙남은∙윤소종 등은 귀양을 보냅니다.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방원은 아버지가 머물고 있는 해주로 달려가 급히 귀경시깁니다. 한 때 동지였던 정몽주는 정황을 살피기 위해 병문안을 핑계로 이성계를 방문하면서 일이 터집니다. 방원은 술자리를 마련하여 정몽주를 맞으며 '하여가'로 의중을 떠보고, 포은은 '단심가'로 단호히 거절합니다. 그날 밤 포은는 선죽교에서 방원이 보낸 자객(조영규)에 의해 척살되고..
역사란 사실과 야화(野話)의 중간쯤에
사실 그대로 기록하는 역사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직접 보았든지 남의 이야기를 들었든지, 결국 기억에 의존하여 재구성하는 게 역사일 수 밖에 없지요. 기억이란 건 100% 믿을 게 못되기에 재판 과정에서도 증거 우선 아닙니까. 사실에 가까운 건 고고학이지 결코 역사는 아니니까요. 후세에 첨삭되고 변질되게 마련인데, 특히 힘을 가진 자들에게는 자기합리화나 조상을 칭송하려는 의도로 몰래 교묘히 바꾸는 일이 비일비재 했지요. 대부분 이방인들의 역사를 중국의 역사인양 리모델링(?)하려고 동북공정이다 뭐다하는 일이 벌건 백주 대낮에도 버젓이 일어나고 있지 않습니까 -_-;;
李씨 왕가와 성리학 추종자들의 합작품?
역사가들이나 전주 이씨 가문, 영일 정씨(포은의 본관) 문중에서는 촛불(?)들고 아우성 칠지는 몰라도, 두 문중의 암묵적 동조가 만든 합작품이 바로 '하여가와 단심가 사건' 일지도 모른다는 혐의를 떨칠 수 없습니다(필자는 개인적으로 두 가문에 아무런 원한도 없음^^). 조선 5백년을 통하여 왕홀은 방원의 후손들이 쥐고 있었고 정신적 지주는 이색(李穡, 1328~1396), 정몽주로 이어지는 성리학자와 그 추종자들이 떠받치고 있었으니까요.
'도당(徒黨)을 만들어 나라를 어지럽혔다' 고 죽은 뒤 다시 끄집어 내어 효수시킨 정몽주를 서둘러 복권시킨 건 다름 아닌 방원 자신. 포은이 죽은지 13년이 지난 뒤(1405년), 태종은 정몽주를 영의정에 추증하고 익양부원군에 추봉했으며, 문충(文忠)이라는 시호까지 내립니다. 조선 건국에 결정적인 공을 세운 정도전(鄭道傳, 1342~1398)은 조선 후기에나 겨우 복권되는데..
후세에 덧씌여진 스토리?
1) '하여가 단심가' 는 역사적 박진감은 넘치지만 어딘지 어색하다
우선 한 쪽 정파의 우두머리인 정몽주가 상대 진영의 하급자(?)이면서 나이도 30살이나 어린 방원과 술대작하는 장면은 좀 어색해 보입니다. 대작이 아니고 술 한잔 올렸다 치더라도, 절체절명의 순간에 시조 한 수 읊조리며 상대의 의중을 떠보는 건 멋있어 뵈기는 하지만 사실일까요? 이에 윗사람에게나 올릴 법한 내용의 '단심가'로 답하는 게 과연 실제상황이었을까요.
2) '단심가'는 포은의 詩답지 않다
포은은 대학자이면서 詩에도 능해 엄청난 한시를 남기는데, '단심가'는 그답지 않다는 느낌을 떨칠 수 없습니다. 만일 성삼문의 경우처럼 처형되기 직전에 지은 '絶命詩' 라면 몰라도, 그런 상황까지는 아니지요. 낮에 이성계를 병문안하고 울적하여 술 한잔 걸치고 밤이 이슥하여 혼자 집으로 돌아가는 도중에 당했다고 하니까요. 사실 정몽주는 정도전과 함께 '혁명론'를 주창한 孟子를 돌려가며 읽고 심취한 개혁론자입니다. 그가 이성계와 합작하여 고려 창왕을 폐하고 공양왕을 옹립한 것만 봐도 '백골이 진토될' 정도로 임금에게 충성을 바치는 타입은 아니지 않습니까. 성리학자로 곧은 선비의 표상이라 할 조식(曺植, 1501~1572) 선생도 포은의 고려에 대한 우국충절에 의심의 눈길을 보냈으니까요.
3) 태조실록이나 태종실록은 물론 조선 초기 다른 문헌에도 등장하지 않는다.
임진왜란 직후인 광해군 때 심광세가 편찬한 시집 '해동악부(海東樂府)'에 비로서 '단심가'라는 한역시가 그 배경과 함께 수록됩니다. 그 후 영조 때 편찬된 한글 시조집 '청구영언(靑丘永言)'에 올라 人口에 회자됩니다. 그런데 청구영언은 주로 고려나 조선 초에 민간에 불리던 시가를 모아 만든 책이랍니다. '단심가'는 효종, 숙종, 영조 대에는 궁인, 사대부, 민가 그리고 교방의 기녀들까지도 즐겨 불렀다고 전해집니다.
4) 근대 역사학자 신채호(申采浩) 선생도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에서 해상잡록(海上雜錄)을 인용하여, 이 시조는 정몽주가 지은 게 아니라 백제 여인 한주(韓珠) 작이라는 주장을 제기합니다. 고구려 안장왕이 태자로 있을 때, 백제에 잠입하여 개백현(皆伯縣, 현재의 경기도 고양)에서 정세를 살피다가 한주라는 여인을 만나 사랑에 빠집니다. 그가 임무를 마치고 후일을 기약하며 돌아간 뒤, 개백현의 태수가 한주의 미모를 탐하여 취하려고 하였으나 한주는 이 시조를 읊으며 안장왕에 대한 절개를 지켰다고 합니다. 안장왕과 한주의 러브스토리는 삼국사기(三國史記)에도 실려 있으며, 고양시 성석동과 일산동 일대에서 지금까지도 구전되고 있답니다.
그외에도 포은이 지은 게 아니라 조선조 이전에 이름 모를 여인이 지었다는 설이 상당하나, 그 전거가 의심되기에 여기에는 올리지 않았습니다.
누이 좋고 매부 좋고, 양쪽 진영 모두 이득이 되기에?
포은이 죽임을 당한 게 조선이 건국된 해(1392년)와 같으나 엄연히 몇 달 전의 일이니, 엄밀히 포은은 조선조에 역적이 아니고 고려조엔 충신일 뿐입니다. 그러니 충신으로 기려 후세에 표상으로 삼을 필요가 있어 복권시켜 준 게지요. 사실 성리학으로 무장하고 문을 연 조선조에서 처음부터 성리학자나 이를 추종하는 정치꾼들과 마찰을 일으키는 건 부담이었겠지요.
(蛇足 : 조선을 정도전이 설계한 대로 따라간다는 건 결국 왕권약화로 이어지기에, 그를 빨리 복권시키는데 부담이 컸음. 그리고 정도전은 이색→정몽주→김종직→김굉필로 이어지는 여말선초 성리학의 계보에서 좀 빗겨나 있기도 했고..).
성리학 추종자 측에서도 그들이 떠받드는 직계 적통인물을, 유학에서 금기시하는 불충한 역적도당으로 그냥 남겨둘 수는 없었는데, 왕이 직접 나서서 충신 반열에까지 올려 놓아 주니 감읍할 따름이었겠지요. 그 후 포은 띄우기에 열을 올렸음은 보지 않아도 눈앞에 훤합니다. 여러 정황 증거를 모아 짜깁기하다 보니 200년이 지난 후에야 '단심가'와 포은을 같이 엮을 수 있게 되었구요. '포은집'에 '단심가'가 오른 것도 후세의 일이라고 하니..
멋드러진 포은의 진품(?) 한시 한 수 붙이면서 끝마칩니다.
春興(봄의 흥취) / 정몽주
春雨細不滴(춘우세부적) 봄비 가늘어 방울지지 않더니,
夜中微有聲(야중미유성) 밤 깊어 희미하게 빗소리 들리네.
雪盡南溪漲(설진남계창) 눈 녹아 남쪽 개울에 물 불어나니,
草芽多少生(초아다소생) 풀 새싹은 얼마나 돋았을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