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목대 : 전북 전주시 완산구 기린대로 55 (교동 산 1-3)
무료 관람
전주향교에서 오목대로 질러서 가는 길을 선택하니 둘러 가는 것보다 거리는 가까운 것 같은데 대신 가파른 고개를 넘는다.
어디든 올라가면 내려다 보이는 곳이 있기 마련이다.
그래도 중간에 쉬어갈 정자도 있고...
가는 길도 비교적 잘 다듬어져 있다.
도로가로 나와 다시 계단을 올라가야 한다.
계단을 올라가 오른쪽 육교로 가면 이목대이고 왼쪽은 오목대로 가는 길이다.
이목대는 이성계의 5대 할아버지인 목조(穆祖) 이안사(李安社)의 출생지라고 전해지는 곳이다.
전주 이씨들은 이안사 때까지 줄곧 이곳에서 살다가, 함경도로 이사했다고 한다.
고종 광무 4년(1900)에, 이곳이 목조가 살았던 터임을 밝힌
<목조대왕구거유지(穆祖大王舊居遺址)>라는 고종의 친필을 새긴 비석을 세웠다.
이 비각은 당초 오목대의 동쪽 높은 대지 위에 있었는데, 도로 확장공사로 현재의 곳으로 옮겨 세웠다.
드디어 오목대(梧木臺)에 도착했다.
한벽당과 전주향교의 북쪽 4차선 노변, 벼랑같이 솟은 언덕에 세워진 오목대는 고려 말 우왕 6년(1380년)에 이성계가
운봉 황산에서 왜군을 무찌르고 돌아가던 중 조상인 목조(穆祖) 이안사가 살았던 이 곳에 들러 승전을 자축한 곳으로,
그 후 고종 황제가 대한제국 광무(光武) 4년(1900)에 친필로 쓴 태조고황제주필유지(太祖高皇帝駐蹕遺址)비를 세웠다.
그리고 발견한 후백제 도성벽 추정지... 의문이 풀렸다.
이성계가 왜군을 무찌르고 전국적 스타로 발돋움하는 상황에서 엄청 유명하고 근사한 곳에서 잔치를 했을텐데...
그럼 오목대는 도대체 그 전에 어떤 곳이었을까 궁금했다.
이성계가 잔치하고 나서 유명해 졌을 리는 없고...
아~ 후백제의 도성이었구나~
천년 전주의 시작은 도성벽을 복원하고 전주의 후백제를 바로 세우는 것으로 시작되는 것 아닐까?
목조(穆祖) 이안사(李安社)는 조선조를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5대조로,
목조 이안사가 어릴 때 이 곳에서 진법놀이를 하면서 살았던 유적지로 알려져 있으며,
그러한 내용이 용비어천가에도 나타나 있다.
목조 이안사가 당시의 전주부사와의 불화로 이곳에서 함경도로 옮겨간 것이
태조 이성계로 하여금 조선조를 건국할 수 있었던 계기가 되었으므로,
이를 하늘의 뜻이라고 여겼다 한다.
[대한민국 구석구석]
이성계는 전주 이씨 종친이 있는 이 곳 전주에서 승전 축하 연회를 베풀면서,
중국 한고조 유방이 불렀다는 '대풍가'를 부르면서 역성혁명을 통한 천하제패의 흉중을 드러내기도 하였다.
조선 후기에 편찬된 <여지도서>에는 "발산 아래에 오목대가 평평하게 펼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1700년대 초에 편찬된 것으로 추정되며,
전주와 완산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집대성한 <완산지>에는
"발산 아래에 있는 돈대이다. 평탄하게 펼쳐져 위에서 전주성을 아래로 굽어 보고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오목대누각 옆에 오목대비각이 있다.
언덕 정상에는 1900년 (고종 37년) 고종의 친필인 "태조고황제주필유지(太祖高皇帝駐畢遺址)"라는 비문이 있는데,
'태조가 머무른 장소'라는 뜻으로서,
조선왕조의 몰락을 거부하고 전통 왕조를 재건하고자 했던 고종이
자신의 정체성을 다잡기 위해 이러한 비문을 새긴 것으로 해석된다.
[위키백과]
잔치에서 이성계는 한고조 유방이 불렀다는 '대풍가'를 읊어 나라를 세우겠다는 야심을 보였고,
이를 눈치 챈 포은 정몽주가 남고산성의 만경대에서 고려를 걱정하는 우국시를 읊었다고 한다.
여기 오목대에는 태조가 잠시 머물렀던 곳이라는 "태조고황제주필유지(太祖高皇帝駐畢遺址)"비가 있고
기린대교 육교너머 이목대에는 목조대왕이 전에 살았던 터라는 "목조대왕구거유지(穆祖大王舊居遺址)"비가 있다.
1897년 고종황제가 대한제국을 선포한 후 황실의 뿌리를 성역화하는 사업을 펼치면서 1900년에 고종황제의 친필을 새겼다.
이목대비각은 길을 넓히는 공사를 하면서 지금 기린대교 육교너머의 자리로 옮겼다.
1974년 9월 24일 전북기념물 기념물 제16호로 지정되었다.
태조 이성계가 잔치를 했다는 누각으로 올라가 보기로 한다.
淸風明月用不竭(청풍명월용불갈) 맑은 바람과 밝은 달은 아무리 사용해도 닳지 않고
高山流水情相投(고산유수정상투) 높은 산과 흐르는 물은 마음이 서로 잘 맞다
水色山光皆畵本(수색산광개화본) 산 색깔과 물의 빛은 다 그림의 밑바탕이고
花香鳥語是詩情(화향조어시시정) 꽃향기와 새소리는 모두 시정(시적인 정취)에 알맞다.
山花水鳥皆知己(산화수조개지기) 산의 꽃과 물 그리고 새는 모두 나를 알아주는 벗이다
멋진 싯구들이긴 한데... 이곳에 왜 있는 것인지... 궁금하다.
신발을 벗고 누각에 발을 딛어본다.
이곳에서 이성계가 읊었다는 "대풍가"를 행서(行書)로 적어놓은 편액이 걸려있다.
대풍기혜운비양(大風起兮雲飛楊) "큰 바람 몰아쳐 구름 날아오른다"
위가해내혜귀고향(威加海內兮歸故鄕) "위엄을 해내(海內, 바다로 둘러싸인 육지, 나라안)에 더하여 고향에 돌아왔다"
안득맹사혜수사방(安得猛士兮守四方) "어찌 맹사(猛士, 힘이세고 용감한 병사)를 얻어 사방을 지킬까?"
중국 한나라 고조 유방이 경포(鯨布)의 반란을 진압하고 돌아오는 길에 패현(沛縣)에서 불렀다고 전해지는 시가인 대풍가가
이성계의 상황과 절묘하게 맞아 떨어지는 것 같아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더불어 포은의 심정도 이해가 되고...
오목대 누각에서 오목대 비각을 바라보는 모습도 액자구성으로 사진 찍어보고...
멋진 오목대 누각을 뒤로 하고 전주 한옥마을 쪽으로 내려가 보기로 한다.
돌계단으로 잘 정비되어 있어서 안전하게 내려갈 수 있다.
내려가는 길에 나름의 전망대도 있어서 전주 한옥마을을 조망해 볼 수 있다.
보기처럼 전주 한옥마을이 그리 넓지는 않아서 차를 한쪽에 주차해 놓고 걸어 다녀도 그리 부담스럽지 않은 거리다.
이곳에 서면 주변 전주 한옥마을의 모습이 잘 보여서 향후 일정을 짜기에도 도움이된다.
밑으로 다 내려가니... 전주한옥마을 표지석이 보이고...
멋진 사잇길이 나타난다.
길의 끝에 태조로쉼터 넓은 여러 개의 정자들이 줄지어 있다.
길 건너편에는 귀여운 인형들이 있다. 전주는 포돌이 포순이가 옛날 관복을 입고 있다.
왜 다모가 생각나지? 아프냐? 나도 아프다.
태조로쉼터의 규모는 엄청크다. 이른 아침이라 그런지... 이용객이 단 한명도 없다.
태조로는 여기서부터 풍남문 교차로를 만나기 전 전동성당까지를 이르는 전주 한옥마을을 가로지르는 도로명이다.
태조로를 중심으로 이동경로를 짜면 길치도 비교적 수월하게 돌아다닐 수 있다.
그리고 바로 오른편으로 예전 공예품전시관 노외주차장 부지에 2020년에 들어선 오목대 전통정원이 있다.
넓은 거울 같은 투영연못이 단아하게 꾸며져있다. 주변 것들의 그림자가 비친다고 해서 그림자 연못(영지, 影池)라고도 한다.
솟대가 높이 솟아있다. 솟대는 마을 입구에 세워두는 장대로 마을을 수호하는 역할을 한다.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은 아름다움을 담은 한국의 전통정원의 모습을 담았다.
다만 한국전통정원의 가장 중요한 특징인 자연과의 조화는 배제되어 있는듯하다.
네모 반듯하게 야외 공연을 위한 한류마당도 있는데... 코로나19 때문인지 예정된 공연의 시간과 내용에 대한 설명은 없었다.
아직 이른시간이라 그런지 정면으로 보이는 다목적관도 굳게 닫혀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