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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걸리가 “숙취 심한 술”이 된 이유
막걸리
우리나라 고유한 술의 하나. 맑은술을 떠내지 아니하고 그대로 걸러 짠 술로 빛깔이 흐리고 맛이 텁텁하다.≒탁료, 탁주
시작하기 전에
· 대학교 신입생 때 사발식으로 막걸리를 마시고 다음 날 숙취로 진짜 죽을 뻔했던 추억(?)이 있습니다. 그 뒤로 막걸리는 숙취가 심한 술이라는 인식을 가지게 되어 근 10년간은 마시지 않았었는데요. 최근에 들어서야 막걸리도 막걸리 나름이구나, 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사실 어떤 술이라도 그때처럼 마셨으면 숙취가 없기 쉽지 않았을 것 같긴 합니다. (오늘 뉴스레터에도 관련된 내용이 나옵니다)
· 한 달여 전 ‘소주의 역사’를 조사했을 때부터 막걸리의 역사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읽었던 참고문헌이 소주뿐만 아니라 전통주 전반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었거든요. 혹시 전통주의 역사에 관한 책을 찾는다면 『우리술 익스프레스』라는 책을 강추합니다. 다른 참고문헌이 필요 없을 만큼 내용이 풍부하고 깊습니다.
· 본격적으로 막걸리의 역사를 알아보기 전에 막걸리가 무엇인지 알아보고 가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쌀을 발효시켜 술을 만들면 건더기들이 가라앉으며 아래쪽은 탁하고 윗쪽은 맑게 되는데요. 윗쪽만 건져내면 청주, 청주를 걸러내고 남은 술지게미에 물을 타서 다시 한번 걸러내면 막걸리입니다.
물론 오늘날 대형 양조장에서 생산되는 막걸리는 청주를 떠내고 남은 술을 판매하는 것이 아니라, 그 술과 비슷한 상태의 술을 밀가루나 쌀을 원료로 해서 만들어 낸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1. 목걸리, 막걸니, 막걸리
막걸리는 곡류가 자연스럽게 발효되면서 탄생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즉, 농경사회가 시작되면서 막걸리도 등장하게 되는 거죠. 문헌상으로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미온’ ‘지주’ ‘료예’ 등 막걸리로 보이는 내용을 볼 수 있고요. 고려시대의 『동국이상국집』 등 당대 문인들의 문집에도 막걸리로 추측되는 ‘백주’(白酒) 등의 용어가 나옵니다.
『고려도경』에서는 ‘왕이 마시는 술은 맑은 법주이고, 서민의 집에서 마시는 것은 맛이 박하고 색이 짙다’라는 내용이 있어 막걸리는 주로 서민의 술임을 확인할 수도 있죠.
조선시대에는 『조선왕조실록』에 탁주라는 이름으로 자주 등장하고요. 『춘향전』 『광재물보』 등에서 ‘목걸리’ ‘막걸니’ 등의 한글 이름이 등장합니다.
온전히 ‘막걸리’라는 이름이 처음 등장한 문헌은 1899년 <독립신문>입니다. 건강을 위해 술을 피해야 하지만 불가피하다면 ‘찰쌉막걸리’를 마셔야 한다는 내용이 적혀있죠.
2. 갈수록 고급스러워지는 술
사실 술은 주로 상류층에서 소비했기 때문에 메인스트림 주류는 조선시대까지 청주였습니다. 하지만 청주를 떠내고 나면 막걸리도 나오니까, 대충 퉁쳐서 살펴보겠습니다:)
고려 시대에는 술을 주로 사찰에서 빚었습니다. 겨울철에 좌선을 행할 때 몸을 덥히기 위해, 혹은 찾아오는 손님을 대접하기 위해 ‘곡차’라는 이름으로 술을 담갔죠. 게다가 당시에는 사원이 중국 사신이 묵어가는 숙소의 역할도 했기에 필요하기도 했고요.
조선으로 넘어오면서 사대부 집안에서는 제사 때 필요한 술을 직접 빚곤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상류층 중심의 고급스러운 술 문화가 발달하게 되는데요.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멥쌀에서 찹쌀로의 변화와 여러 번 덧술하는 중양주의 발전이었습니다.
찹쌀은 멥쌀보다 귀한 쌀이었고, 찹쌀로 술을 빚으면 더 진한 단맛과 진득한 바디감을 낼 수 있었는데요. 단맛을 내기 어려운 과거에는 단맛 자체가 고급스러움의 상징이었죠.
중양주는 덧술한 횟수에 따라 이양주, 삼양주, 사양주, 오양주 등으로 나뉩니다. 덧술 횟수가 많아질수록 도수도 높아지고 향도 더 풍부해지죠. 심지어는 술에 넣지도 않은 꽃이나 과일의 향이 났다고 하는데요. 이를 아름다울 방자를 써서 ‘방향’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이처럼 집집마다 사치스러운 술을 빚으며 다양한 술이 등장하게 되죠.
하지만 일제강점기가 되면서 위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일본은 1916년 주세령을 공표하고, 세금을 효율적으로 걷을 수 있도록 제조장을 집약시킨 뒤 조선의 술을 없애는 주류 개량을 추진하죠. 이로 인해 많은 조선의 술들이 사라지게 됩니다.
3. 막걸리 = 머리 아픈 술?
술은 주식인 쌀을 이용하기 때문에 민생 안정을 위해서 제조가 통제되곤 했습니다. 실제로 일제 강점기에도 쌀이 부족해 막걸리를 제대로 생산하기 어려웠죠. 사실 1910년대 이후 국내의 쌀 생산량은 많이 증가했는데요. 하지만 그 쌀들은 일본에 헐값으로 팔려나갔기에 오히려 쌀이 부족했죠.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부터는 쌀이 모두 착취되고, 한국전쟁으로 농업 인프라가 모두 파괴되기에 이르죠. 물론 쌀이 주재료인 막걸리의 생산은 꿈도 꾸기 어려웠고요.
박정희 군사정권 시절인 1966년에는 약·탁주 제조에 있어 쌀 사용 금지안이 의결되면서 쌀로 막걸리를 제조하는 것이 완전히 금지됩니다. 대신 미국의 원조를 받던 밀로 막걸리를 만들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막걸리는 다음 날 머리 아픈 술’의 인식을 갖게 만든 시작이라고 보는 시선이 있죠.
당시 만들어진 밀 막걸리는 쌀 막걸리와 비교했을 때 단백질 함량이 더 높아 발효과정에서 숙취의 원인 물질이 더 많이 생성되는 특성이 있고요. 게다가 생산 마진이 높지 않은 막걸리의 원가를 낮추고 제조 기간을 줄이기 위해 술을 넣지 말아야 할 첨가물을 넣다가 적발된 업자들도 많았어요. 잡균 증식을 막기 위해 살균제를 넣는다거나 밀가루가 발효될 때 생기는 신맛을 중화하려고 양잿물(!)을 타기도 했죠.
1964년 동아일보 기사에 밀조 막걸리에 카바이드를 사용하다 붙잡힌 일당에 대한 내용이 담겨있고, 1976년 조선일보 기사에는 항생제가 든 누룩을 제조해 유통하다 붙잡힌 일당에 대한 기사도 있었죠.
밀 막걸리의 시대가 막이 내리게 된 것은 통일벼가 도입되면서부터인데요. 통일벼로 쌀생산량이 증가하고 쌀이 남아돌게 되자 정부는 1977년 쌀막걸리의 생산을 다시 허가합니다. 하지만 이미 막걸리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이 쌓인 데다, 막걸리를 좋아하던 사람들도 밀 막걸리의 묵직하고 텁텁한 맛에 길들여져 있었죠. 때문에 상대적으로 가볍고 담백한 쌀막걸리는 싱겁다, 밍밍하다는 등의 평가를 받으며 환영받지 못합니다.
한때 술 소비량의 70% 이상을 차지하던 막걸리는, 그 점유율을 희석식 소주와 맥주에 내어주게 된 것이었죠.
4. 양조장에서 술 좀 받아와라!
1970년대 후반까지 막걸리는 정해진 용기 없이 판매되었었습니다. 양조장에서 술이 완성되면 바로 삼륜차의 탱크로리에 싣거나, 말통에 담아 자전거로 실어 판매점으로 옮겨졌죠. 판매점에서는 말통째로 보관하거나 땅을 파고 항아리를 묻어 술을 저장하곤 했었죠. 일반인들도 주전자를 들고 양조장에 가서 술을 받곤 했죠.
1978년이 되어서야 정부에서 막걸리 단위 포장을 의무화하고 PE 재질의 1리터 병을 보급합니다. 처음 도입된 용기는 병의 어깨 부위에 있는 돌기를 가위로 오려내서 따르는 형태였는데요. PE 재질이 워낙 얇다 보니 왈칵 쏟아지는 경우가 많았어요. 이를 해결하고자 용기 윗부분에 돌려 따는 뚜껑을 추가하고 막걸리 병을 장착할 수 있는 손잡이가 달린 케이스를 보급하죠.
하지만 케이스를 항상 들고 다닐 수도 없는 노릇이고, 심지어 유통기간이 길어지면 술에 플라스틱 냄새가 배는 문제가 있었는데요. 2000년대에 이르러 물렁하던 PE 재질의 병이 단단하고 깔끔한 PET 재질로 바뀌게 됩니다.
5. 맛코리 마시쏘요
2000년대 중반 웰빙 열풍이 불면서 유산균과 효모가 살아있는 생막걸리가 주목받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한류열풍과 함께 유산균과 효모가 피부미용에 좋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2011년 일본에서 ‘맛코리マッコリ’라는 이름으로 막걸리가 유행합니다. 한 일본 잡지에서 선정한 2011년 일본 30대 히트 상품에 ‘서울 막걸리’가 7위에 오르기도 했죠.
하지만 이 인기는 2012년 이명박 대통령의 독도 방문 이후 불거진 반한 감정과 엔저 현상 등의 현상으로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6. 국순당 일가
2003년부터는 알코올 도수 규제가 폐지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전까지는 6도 이상 8도 이하의 탁주만 제조할 수 있었던 것에서 18도에서 5도 이하의 가벼운 막걸리까지 다양한 막걸리가 등장하게 됩니다. 그중에서도 주목할 만한 곳으로는 국순당 일가가 있죠.
국순당의 창업주 배상면은 1950년대부터 대구에서 소주 주조장을 운영했는데요. 1967년 순천의 누룩 공장을 인수한 것을 계기로 전통 누룩과 옛 문헌 속의 전통주를 연구하기 시작합니다. 1982년에는 고문헌에 등장하는 백하주의 제조법을 통해 1992년 백세주를 출시하죠.
막걸리에서도 2000년대 출시한 유산균이 살아있으면서도 유통기한이 30일로 늘어난 국순당 생막걸리가 때마침 불어온 막걸리 열풍에 힘입어 성공하게 됩니다. 2018년 막걸리 고급화 추세에 맞춰 내놓은 프리미엄 막걸리, 1000억 유산균막걸리도 큰 성공을 거두게 되죠.
배상면 회장의 자녀들도 술을 빚고 있습니다. 장남은 국순당을 이어받고, 차남은 1996년 배상면주가를 창업한 뒤 산사춘과 느린마을 막걸리를 선보이죠. 장녀 배혜정은 1998년 배혜정도가를 창업해 2001년 국내 최초의 프리미엄 막걸리 부자 막걸리를 출시합니다.
마치며
막걸리의 역사를 살펴보면, 가격이나 통제 때문에 품질을 낮췄을 때 소비자들이 외면하게 된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또 어찌 보면 원가 절감을 위해 무리수를 두는 것마저 막걸리의 전통성(?)이라고 볼 수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애초에 술지게미에 물을 타서 만든 술이라는 것 자체가 남은 찌꺼기(?)를 이용한 술이니까요. 물론 현대에서는 지양해야 할 일이겠습니다.
막걸리를 접하게 되는 문화도 한몫합니다. 제가 막걸리를 처음 접했던 것은 대학교에 처음 들어갔을 때였습니다. 당시 대학교에는 ‘사발식’이라는 문화가 있었습니다. 사발에 막걸리를 부어 넣고 신입 기수가 사발을 비워야 하는 것이었죠. 당시 저는 풍물패에 들어갔기 때문에 징에 막걸리를 받아 먹었더랬죠.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 징을 과연 닦기나 했을까?’ 라는 의문이 들지만, 다행히도(?) 당시에는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사발식이 끝나고도 술자리는 계속되었습니다. 술자리의 끝은 기억나지 않습니다. 눈을 떴을 때는 낯선 선배의 자취방이었습니다. 몸에는 힘이 들어가지 않았고, 차라리 다시 잠드는 게 낫겠다 싶은 두통이 뒤이었죠. 그렇게 사발식으로 처음 접한 막걸리는 주사와 숙취라는 아픈 추억만 남겨주었기에, 여태 외면해 왔습니다. 모두가 막걸리를 마시는 술자리에서도 막걸리를 마시면 탈이 난다며 항상 손사래 쳐왔죠.
그랬던 제가 막걸리와 관련 있는 회사에 들어가 일을 하게 될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다행히도 이 회사에는 사발식은 없었고, 오히려 정말로 맛있는 막걸리들을 알아가게 되었습니다.
생각해 보면 참 씁쓸한 일입니다. 분명 저와 같은 이유로 막걸리를 안 먹는 사람이 있을 텐데, 알고 보면 막걸리가 꽤나 괜찮은 술이라는 것을 평생 모르고 살아가겠죠.
어떤 것에 대한 안 좋은 기억이 있다면, 그리고 그 경험이 강제된 일이었다면, 다시 한번 기회를 주어야겠다는 개인적 감상으로 마무리합니다.
원문: 사소한 것들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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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저는 어릴적부터 막걸리에 대한 인식이 좋았습니다
할아버지는 막걸리 마시며 사시는 분이셨고, 음식솜씨 좋은 할머니는 자주 단술이라 불리는 술을 만들어두고서 가끔 고모와 함께 마시며 회포를 풀곤 하시는 장면을 자주 보았고, 가끔 저도 마시면 꽤 맛있었거든요, 그래서 늘 막걸리에 대한 인상이 좋은데도
어른이 된 지금도 유일하게 먹지 못하는 술이 되었습니다, 먹기만 하면 숙취로 몸이 아작나곤 하니 말입니다.
먹는 순간은 맛있는데 먹고난 후의 공포감에 저에겐 절대로 못먹는 술이 되었습니다^^
탈반에도 징에 막걸리
두병 완샷
마시면 좀 시간이 지나면
시체됐던 기억이 나네요
글 잘봤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