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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물 안 개구리
함석헌
씨알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세상이 참 시끄럽습니다. 이 가운데서 거기 같이 미쳐버리지도 말고, 몸을 내맡겨 거기 휘말려버리지도 말아야 하는 것이 씨알의 할 일입니다.
이 시끄러움은 지배주의(支配主義)에서 어쩔수 없이 필연적으로 나오는 공해물입니다. 사람은 그 본바탕이 생각하고 창작으로 제 자아를 드러내자는 것이기 때문에 선천적으로 고요하고 조용한 것을 좋아하고 여유있는 평화 속에서 보람을 느끼며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정치주의가 시작되면서부터 시끄러움이 일어나게 됐습니다. 사람은 사회적인 살림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거기 어느 정도의 질서가 있어야 하는 것은 물론입니다. 그러므로 정치는 한 옛적부터 있었습니다. 그러나 정치주의는 있지 않았습니다.
마을에 무슨 일이 생겨 너나 나나 꼭 같이 순박한 씨알들이 느티나무 밑 너럭바위 위에 앉아서 나이 많은이의 일러주는 말을 들었을 때 거기 별로 떠듦이 있었을 리가 없습니다. 떠듦은 마을과 옆에 마을이 싸움을 하게 되면서부터 시작됐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마을과 마을 사이의 싸움은 어디서 일어났느냐 하면 어느 힘이나 꾀 있는 놈이 사람들을 추겨 이끌고 옆엣 마을에 도둑질을 들어간데서 밖에 될 데가 없습니다.
한번 그런 일이 일어나면 그놈의 속에는 자연 ‘잘났다’는 의식이 생기고, 그러면 거기 특권이 붙어 남보다 좀더 맛있고 아름다운 것을 좀 더 많이 먹고 입고 가지고 놀고 하게 될 것은 정한 일입니다. 또 그렇게 되면 꾀 있고 비겁한 몇 놈이 그 주위에 붙어 떠받들고 아첨하고 앞장서고 할 것은 오직 한 걸음의 거려뿐입니다. 이렇게 되면 필요에 응해 일을 풀고 바로잡자는 정치가 아니라 첨부터 지배에 맛을 들이고 하는 정치주의입니다.
정치는 첨부터 도둑질로 시작됐을 것입니다.
본래가 그와 같이 부자연한 싸움이란 것에서 시작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언제나 시끄럽습니다. 싸움하면 자연 요란한 소리가 나고 쫓기고 죽고 불이 일어나고 아우성을 치게 마련이고, 또 싸움을 하려면 평지에 풍파를 일으키지 않고는 되지 않습니다. 정치는 생트집 없이는 되지 않습니다. 도리에 어그러진 주장을 해서 저쪽을 격분시키고 격분해 항의를 하면 그때는 정의의 이름으로 토벌을 하여 나라 땅을 넓히고 남의 민족을 잡아 종으로 부려 나라를 발전시키고, 그것을 꾸미고 칭찬하기 위해 시를 쓰고 그림을 그리고 음악을 하면 문화가 올라간다는 것이 정치철학의 기본적인 형태입니다.
옛날에도 정치는 시끄러운 것이었지만 지금은 그전 어느 때보다도 더합니다. 이 앞으로는 더욱더 할 것이요, 그러다가 그 시끄럼에 몸과 마음이 지쳐 멸망하고 말 것입니다. 세계의 유명한 학자들은 다 목소리를 같이 하여 인류의 위기를 부르짖지만 그 위기를 가져오게 한 원흉은 정치주의입니다. 사람들의 정치에 대한 생각이 근본적으로 달라지지 않는 한 인간과 그 쌓아올렸다는 문화는 바벨탑의 운명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인류는 그전에도 벌써 그런 위기의 경험을 하고 하마터면 멸망해버릴 데서 살아났기 때문에 그 설화가 있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바벨탑만 아니라, 전문적인 학문이나 공식적인 기록을 내놓고는 씨알과 씨알이 속을 떨어내놓고 하는 민간설화에서는 옛날의 대조화속에서 살았던 시절을 그리워하며, 실제에서는 이용은 하면서도 소위 문명이란 것을 부정해서 앞에 어떤 운명의 날을 내다보는 것이 그 일관해서 공통된 주장입니다. 이것을 결코 ‘무지’ 때문이라고 쉽게 쓸어버려서는 아니됩니다. 그렇게 한 결과가 오늘같이 심한 위기입니다.
우리 생각과 말의 자유, 마음과 이웃의 평화, 생존과 발전의 평등을 근본에서부터 깨트리는 이 시끄러움은 정치에서 필연적으로 오는 결과일 뿐 아니라, 이제는 계획적으로 만들어내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거짓말을 한 놈은 제 한 말이 거짓인 줄을 알기 때문에, 그것을 유지해 나가기 위해 점점 더 거짓으로 버텨야 합니다. 예수가 세계악의 근원인 사탄을 ‘첨부터 거짓말쟁이’라고 한 것은 과연 옳은 말입니다. 정치와 전쟁은 첨부터 부조리였기 때문에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늘 거짓 선전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갈수록 더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교묘에 교묘를 더하고 선전에 선전을 더하며 강제에 강제를 더해서 오늘에 왔습니다. 그러나 부조리는 변할 수 없는 원리를 무시한 것이기 때문에 언젠가는 그 끝이 올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의 세계를 휩쓰는 불안은 거기서 옵니다.
일부러 시끄럽게 하는 것은 그러고서야 사람에게서 생각하는 여유를 뺏을 수 있고 생각을 못하여야 지배할 수 있고, 지배하여야 제 받을 심판을 연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문명이란 발달이나 진보가 아니고 연기입니다. 마땅히 죽을 줄 알면서도 그것을 좀 미루어보자는 것입니다. 문명이 정치의 종이 되지 않았을 땐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때에 사람은 죽음을 인정해놓고 미루어보려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뛰어넘은 새 생명을 붙잡음으로 그것을 이기려 했습니다. 정치는 죽음을 인정하고 드는 것이기 때문에 그들의 믿는 것은 죽음이요, 믿는 것이 죽음이기 때문에 모든 정책 모든 전략의 최후의 겨눔은 지배받는 자의 죽음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있어 도덕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고 어느 정도에서 이용하는 중간적인 것입니다.
이리해서 오늘의 정치는 시끄러운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공업을 하기 위해 큰소리를 내는 기계, 그리고 그것을 가지고 산천을 흔들고 인심을 마비시키는 전쟁의 아우성, 복잡한 교통, 정책의 선전 소리, 민중을 시켜 외치는 구호, 음악이랍시고 떠들어대는 소리, 관광이랍시고 미쳐돌아가게 하는 풍조, 국민의 체력을 올린다, 국위를 드러낸다 하면서 하는 스포츠, 어느 것 하나도 씨알의 속알을 떼먹기를 목적하지 아니하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여기 정신의 위대한 것이 있습니다. 정신은 연약합니다. 연약하기 때문에 정신입니다. 그렇지만 연약하기 때문에 어떤 폭력, 강제, 조직, 수단, 꾀임에도 넘어가지 않을 수 있습니다. 눈에 뵈고 귀에 들리는 것에 맘을 뺏기지 말고 멀리 앞과 뒤를 보십시오. 생명은 이날껏 그러한 모든 위협 속에서도 단지 연약하기 때문에 참음으로 지킴으로 이겨왔습니다. 모든 영웅들은 바위처럼 나무통처럼 떠내려갔고, 남은 것은 오직 씨알의 물방울의 합창으로 되는 구원(久遠)한 역사의 흐름뿐입니다.
그 역사가 이제 막다른 골목에 들었습니다. 이번엔 정말 죽고 말것 같습니다. 그러나 생명은 그 스스로 가지는 지혜와 능력으로 이것도 이기고 말 것입니다. 이제 역사상 어느 때보다도 더 큰 약진(躍進)을 한 단계에 이르렀습니다. 그것을 믿어야 합니다.
믿고 그 시끄러움에 반항해야 합니다. 들려도 듣지 말고 보여도 보지 않아야 합니다. ‘심불재언’(心不在焉)이라고 했습니다. 씨의 힘은 오직 마음에 있습니다. 마음이 거기 있지 않으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먹어도 맛을 모른다 했습니다. 우리 귀에 누구를 죽인다, 위협해도 우리 마음이 죽음을 인정치 않으면 죽어도 살 것입니다. 우리 눈에 온 세상이 다 폭력의 지배에 넘어갔다 보여도 폭력이란 것을 믿지 않으면, 홍수가 휩쓸고 지나간 뒤에 새 푸름이 일어나듯이 폭력이 세상을 휩쓸어도 그 뒤에 또 일어나는 평화의 씨이 있을 것입니다. 생명의 씨는 흙속에 있는 것 아니고 공중에 있기 때문입니다.
‘무시 무청 포신이정’(無視 無聽 抱神以靜)이라고 했습니다. 반드시 눈알을 빼고 귀청을 찢어야 하는 것 아닙니다. 마음을 거기 두지 않는 것뿐입니다. 마음속에 신을 품어야 합니다. 그리고 고요히 해야 합니다. 세상 시끄럼에 동조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형장자정 (形將自正)이라, 몸이 저절로 바르게 될 것이요, 설혹 죽어도 살 것입니다.
생명은 근본이 부활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크고 작은 것을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무엇이 큰 것이고 무엇이 작은 것입니까?
덕(德)은 크고 재(才)는 작은 것입니다. 화(和)는 크고 쟁(爭)은 작은 것입니다. 떳떳은 크고 비상(非常)은 작은 것입니다. 하늘은 큰 것이고 모략은 소소(小小)한 것입니다.
폭풍이 나무를 뽑고 바위를 굴리지만 하루를 못 갑니다. 정말 크고 강한 것은 소리 없이 흐르는 맑은 시내입니다. 살진 들을 적셔 천하를 기르는 것도 그것이요, 모든 비바람 구름 물결을 일으키면서도 자기는 억만년 노함도 흔들림도 없는 대양(大洋)의 가슴을 채워주는 것도 그것입니다.
그리고 시내는 억억만만의 물방울이 음악 속에 하나 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자연의 시내보다도 더 무한히 큰 것은 역사의 흐름이요 그 흐름을 이루는 것은 씨알입니다.
스스로의 큼 속에 가만히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우물 속의 개구리의 이야기를 들으셨습니까? 그것은 2천 년 전 전국시대에 전쟁군주들이 씨들을 못살게 강제로 부리고 휘몰아 전쟁 속에서 무참히 짓밟아버리는 것을 차마 그냥 보고 있을 수 없어서 장자가 웃음 속에 추상같은 책망을 넣어서 한 말입니다. 그 우물 속의 개구리란 정치가와 거기 붙어먹는 학자, 종교가를 가리킨 것이요 동해의 자라란평범 속에 참을 사는 씨을 가리킨 것입니다.
정치가의 병은 첫째 그 식견이 작은 데 있습니다. 그들은 제가 사는 권력의 세계를 오직 하나의 참 세계로 알고 거기 집착해버립니다. 그러므로 그 생각이 고루합니다. 그들은 거기서 나서 거기서 자랐기 때문에 정치라는 것이 대자연의 한 모퉁이에 인간의 욕심의 힘으로 한 구멍을 파서 된 우물 같은 것임을 모릅니다. 그러기 때문에 동해의 이야기를 들어도 그것을 거짓말로 알고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그들에게는 인간성이니 하늘이니 평화니 하는 것은 공상으로만 생각이 됩니다. 그리고는 썩어져가는 나무로 된 우물 방틀을 그 만년의 옥좌로 알고, 그 우물 벽이 무너져서 생긴 틈서리를 자기의 안식처로 알고 있습니다.
다음의 병은 망자도대(妄自導大)입니다. 오늘날까지 정치가 치고는 극히 적은 수의 사람을 내놓고는 이 병에 걸리지 않은 자가 없습니다. 스스로 제가 가장 크고 강하고 잘났다는 것입니다. 우물 안에 있는 지렁이 잔 버러지들같이 뼈대도 신경도 없는 것들을 맘대로 잡아먹으면서 스스로 제가 역사를 바로잡고 창조하는 영웅이로라고 망상하고 있어 누가 자유를 말하고 평화를 가르치고 정의를 주장해도 제 편에게 동해의 나라를 비웃고 유혹하고 뽐내는 개구리같이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진시황도 망하고 시저도 망한 것을 우리는 들어 알건만 그들은 그 교만이 병이 되어 말이 들어가지 않습니다. 객관적으로 판단하여 모 든 우물 속의 개구리가 그 낡은 벽이 무너지는 날 다 거기서 죽었을 것이 분명하건만 우물 속인지라 남을 볼 수 없으니 그 도리의 설명이 통치 않습니다.
모는 통치자들은 영원한 지옥 속에 있습니다.
셋째 병은 바라는 것이 비속한 것입니다. 노자는 “욕심이 많은 놈은 천기가 옅다”고 했습니다. 예수도 하나님과 재물을 아울러 섬기지는 못한다, “부자는 하늘나라에 들어가기가 약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했습니다. 어린아이 손에 있는 빵을 보고 그것을 뺏아먹으려 했을 때 벌써 더러운 것입니다. 그리고 어린아이 손에서 빵을 뺏지 않고 되는 정치가 어디 있겠습니까? 세금이다, 나라를 위해서다, 이름은 좋습니다. 마는 역사 있은 이래 제가 손수 피땀 흘려 일하고 제 자식을 희생시켜가며 정치했다는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 권력 쥐기 전에는 민중의 밑이라도 핥을 듯이 아름다운 말을 하지만 한번 자리에 앉으 면 천하의 젊은 남녀로 그 밑을 핥게 하는 것이 정치입니다.
사람이 나이 어렸을 때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이날껏 인류는 그 사나운 정치 밑에 훈련을 받아야 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제는 성인기에 든 인간입니다. 그런 낡은 것은 모두 벗어야 할 것입니다.
이날까지 씨알이 속아온 원인은 그 크고 작은 것에 대한 판단을 그릇한데 있습니다. 정치는 크다 했습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정치야말로 끄트머리요 작은 것입니다. 정말 큰 것은 동해같이 그 속에서 났으되 난 줄을 모르고 그 속에서 살되 사는 줄을 모르는 인간의 바탈, 그 바탈이 나오는 하늘 말씀에 있습니다.
그런데 장자의 비유의 재미있는 점은 그 바다에서 난 자라가 어찌 가다가 우물을 기웃해 보게 됐다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개구리가 뽐내는 것을 듣고 부인은 하면서도 어쩐지 끌려들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그 태서 ‘좌족미입(左足未入), 우슬기집(右膝己縶)’이라, 왼발은 아직 아니 들어갔지만 바른 무릎이 벌써 빠져들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겨우 물러섰다고 했습니다. 장자만한 사람이 생각없이 이 귀절을 썼을 리 없습니다. 그럼 뭣일까? 그것을 이해하려면 그 이야기 맨첨의 도정(搯井)이란 말에 주의해야 할 줄 압니다. 도정은 낡은 우물입니다. 무너져가는 우물, 그래서 그 개구리가 한 구석 무너진 벽 틈을 안식처로 알고 있다고 비웃었습니다. 자라가 그러자는 생각도 없이 개구리의 자가선전(自家宣傳)에 귀를 기울이다가 그만 하마터면 그 멸망의 구멍에 빠져들번 한 것입니다.
오늘의 종교인, 학자, 언론인도 그렇지 않을까? 그들은 근본이 씨알의 바다에서 자란 사람들이므로 정신의 세계야말로 정치에 비할 수 없이 크고 깊고 자유인 것을 잘 알 것입니다. 그러나 어쩌다 공연히 정치가의 그럴 듯한 선전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하면 좌족미입(左足未入)에 우슬기집(右膝己縶)으로 그만 건질 수 없는데 빠져드는 것 아닐까? 눈을 감고 생각해보면 지금 우리 앞에도 그런 가엾은 예가 수두룩합니다.
씨알 여러분 아예 낡은 우물 가까이 가지 마십시오. 그 안에서 나오는 고루한 망자존대(妄自尊大)의 비속한 선전과 시끄러운 유혹 위협에 마음을 팔지 마십시오.
인정으로 하면 개구리의 신세는 건져주고 싶으나 길이 없을 것입니다.
씨알의 소리 1974. 9 36호
전작집; 8- 201
전집; 8- 1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