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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黨당: 鄕黨州閭(향당주려)의 鄕里 즉 고향을 말한다. * 狂광: 『說文解字』에 狂은 折犬(절견)이며, 아주 용맹하여 잘 뛰쳐나가서 사냥하는 개를 말하는데,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아주 放恣하고 스스로 크다고 여기는 것을 狂이라고 한다. |
(5—21-1) 子在陈 曰 “归与!归与!吾党之小子狂简,斐然成章,不知所以裁之。” 자재진. 왈. 귀여.귀여. 오당지소자광간. 비연성장. 不知所以裁之. |
韓譯: 孔子께서 陳나라에 계실 때에 말씀하셨다. “돌아 갈 것이다. 돌아 갈 것이다. 우리 마을(吾黨)의 弟子들이 뜻은 크나 일처리에 엉성하여, 아름답게 文章을 이루었고, 그것을 裁斷할 方法을 모른다.” |
英譯: When the Master was in Chen, he said, "Let me return! Let me return! The little children of my school are ambitious and too hasty. They are accomplished and complete so far, but they do not know how to restrict and shape themselves." |
中译: 孔子在陈国时说, “回去吧!回去吧!我家乡的学生们,志向高远,而行为粗率,辞采富丽,文笔可观,但我不知道怎样指导他们。” |
* 孔子(공자, BC. 551~479年): Confucius, 姓은 孔(공)이고, 名은 丘(구), 字는 중니(仲尼)이다, 春秋時期의 魯나라 昌平縣 陬邑人으로 儒學學派를 創始함. 思想家이자 政治家, 敎育家이였다, 50歲 때 暫時 官職에 있었다. (周靈王 21年인 BC 551~周敬王 41年인 BC 479年) 73歲로 世上을 떠났다. 天下를 周遊하다 고향에 돌아와 後學 養成과 古典 整理 作業에 힘썼으며, 私學을 처음 만들었고, 傳統的인 貴族敎育을 打破하였다. 叔梁紇(숙량흘)의 子이며, 現在 山東省 曲阜(곡부, 취푸)에서 出生했고, 그의 墓가 있다. |
그의 말을 모아 弟子들이 수많은 著書를 남겼으며, 그 중 有明한 것으로는 『論語』, 『詩經』, 『書經』, 『周易주역』, 『十翼십익』, 『春秋춘추』 等이 있고, 五經을 修訂하였다고 한다. |
p.399
此孔子周流四方道不行而思歸之歎也吾黨小子指門人之在魯者狂簡志大而畧於事也斐文貎成章言其文理成就有可觀者裁割正也夫子初心欲行其道於天下至是而知其終不用也於是始欲成就後學以傳道於來世又不得中行之士而思其次(本孟子不得中行而與之一章説)以為狂士志意高逺猶或可與進於道也但恐其過中失正而或䧟於異端耳(如曾㸃之狂易流於老莊)故欲歸而裁之也
↳此孔子周流四方이나 道不行而思歸之歎也라 吾黨小子는 指門人之在魯者라 狂簡은 志大而略於事也라 斐는 文貌요 成章은 言其文理成就하야 有可觀者라 裁는 割正也라 夫子初心은 欲行其道於天下나 至是而知其終不用也라 於是始欲成就後學하여 以傳道於來世요 又不得中行之士하야 而思其次하시니 以爲狂士志意高遠하야 猶或可與進於道也로되 但恐其過中失正하야 而或陷於異端耳라 故欲歸而裁之也시니라
-此는 孔子께서 周流四方함에 道가 不行하니 歸할 것에 思하신 歎인 것이다. 吾黨小子는 門人之在魯者를 指한 것이다. 狂簡은 志는 大이나 事에 畧인 것이다. 斐는 文貎이고, 成章은 그 文理가 成就하여 可觀함이 有임을 言한 것이고, 裁는 割正이다. 夫子의 初心은 天下에 欲行其道이었으나, 是에 至하여서 그 終토록 不用일 것에 知하셨다. 於是에 비로소 成就後學으로서 來世에 傳道코자 하셨고, 또 中行之士를 不得하심에 그 次를 思하신 것이다(『孟子』의 不得中行而與之 一章에 本하여 説한 것이다.). 狂士는 志意가 高逺하여 오히려 或 可히 더불어 道에 進할 수 있을 것으로 여기셨으나, 다만 그 過中과 失正으로 因하여 或 異端에 䧟할 것에 恐하셨을 뿐인 것이다(마치 曾㸃之狂易가 老莊에 流하고 마는 것과 같은 것이다.). 故로 欲歸하여 裁之하고자 하신 것이다.
〓이것은 孔子께서 四方을 두루 돌아다니셨으나 道가 行해지지 않아 (魯나라로) 돌아가기를 생각하신 歎息하신 것이다. 吾黨小子는 魯나라에 있는 門人을 가리킨다. 狂簡은 뜻은 크지만 處事에 疏略함이다. 斐는 文彩가 나는 모양이다. 成章은 그 文理가 이루어져서 볼만한 점이 있음을 말한다. 裁는 잘라서 바르게 함이다. 夫子의 初心은 당신의 道를 天下에 行하고자 한 것이었으나, 이때에 이르러 당신이 끝내 登用되지 못할 것을 아셨다. 이에 비로소 後學을 成就시켜 後世에 道를 傳하고자 하신 것이다. 또 中行의 人士를 얻을 수 없어서 그 다음을 생각하셨다.(『孟子』「盡心下」14篇 37章의 ‘不得中行而與之(法度에 맞게 行하는 者를 얻지 못해 함께한다면)’ 이라고 한 章의 說에 根據한 것이다.) ‘狂士는 高遠하여 오히려 或 함께 道에 나아갈 수 있으나 그들이 中道를 벗어나고 正道를 읽어 或 異端에 빠질까 두렵다.‘(假令 曾㸃의 狂(뜻이 높고 遠大함)은 老莊으로 흐르기 쉽다.) 그러므로 돌아가서 그들을 바르게 자르고자 하셨다.
* 本孟子不得中行而與之一章説: 『孟子』「盡心下」에 |
14-37-2 孟子曰 孔子 不得中道而與之 必也狂獧乎 狂者進取 獧者有所不爲也 孔子豈不欲中道哉 不可必得故 思其次也 |
(孟子께서 이르시기를 ‘孔子께서 「道에 맞게 하는 者를 얻지 못할 바엔, 반드시 狂者와 獧者와 함께 할 것이다. 狂者란 道에 나아가 取하려는 者이고, 獧者는 하지 않는 바가 있는 者이다.」라 하셨으니(「子路」篇), 孔子께서 어찌 道에 맞게 하는 者와 하고자 하지 않겠는가? 可히 반드시 얻기를 期約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 다음을 생각하신 것이다.)”하였다. |
[集註]不得中道 至有所不爲 據論語 亦孔子之言 然則孔子字下 當有曰字 論語道作行 獧作狷 有所不爲者 知恥自好不爲不善之人也 孔子豈不欲中道以下 孟子言也 |
不得中道에서 有所不爲에 이르기까지는 『論語』「子路」篇 21章에 있는 것을 든 것이니, 또한 孔子의 말씀이시다. 그렇다면 孔子란 글자 밑에 마땅히 ‘曰‘字가 있어야 하며, 『論語』에서는 ’道’字를 ‘行‘字로 썼고 ’獧‘字를 ’狷‘字로 썼다. 有所不爲라는 것은 부끄러운 바를 알아서 스스로 善하지 않는 사람이 되지 않기를 좋아하는 것이다. ’孔子豈不欲中道‘ 以下는 孟子께서 말씀하신 것이다. |
p.399~400
(問何故只思狂士不及狷者朱子曰狂底却有軀殻可以驅策狷者只是自守得些便道是了所謂言必信行必果者是也)
(↳問 何故只思狂士 不及狷者 朱子曰 狂底 却有軀殻可以驅策 狷者只是自守得些便道是了 所謂言必信行必果者 是也)
(-問컨대, 何故로 다만 狂士에 思하시고 狷(狷介하다. 剛直하다.)者에는 不及하신 것입니까? 朱子曰: 狂底는 도리어 軀殻(구각)=肉體에 可히 驅策(督勵하고 재촉함)으로서 할 수 있는 것이다. 狷者는 다만 自守인지라 得些(적을 사)함에 문득 이렇게 了일뿐이라 道할 수 있으니, 所謂 ‘言必信 行必果’가 是인 것이다.)
(〓質問하기를 “무엇 때문에 다만 狂士를 생각하시고 狷者는 言及하지 않으신 것입니까?”하자, 朱子께서 말씀하였다. “狂은 도리어 軀殻을 驅策할 수 있는 者이다. 狷者는 다만 스스로 지키는지라 조금 攄得함에 문득 곧 옳게 여겨버릴 뿐이라 말하니, 이른바 말하면 반드시 信賴할 수 있으며, 行動은 果敢한 者가 바로 이러한 者이기 때문이다.”)
* 驅策구책: 1.휘몰다 2.혹사하다 3.부리다 4.지휘하다. 5.使役하다. |
p.400
(○成章是有首有尾雖狂簡非中然却做得這箇道理成箇物事不是半上落下故聖人雖謂其狂簡不知所裁然亦取其成一箇道理大率孔門弟子随其資質各能成就如子路之勇真箇成一箇勇冉求之藝真箇成一箇藝言語徳行之科一齊被他做得成了)
(↳○成章 是有首有尾 雖狂簡非中 然却做得這箇道理成箇物事 不是半上落下 故聖人雖謂其狂簡不知所裁 然亦取其成一箇道理 大率孔門弟子 随其資質 各能成就 如子路之勇 真箇成一箇勇 冉求之藝 真箇成一箇藝 言語徳行之科 一齊被他做得成了)
(-○成章은 有首有尾인 것이다. 비록 狂簡이 中함은 아니지만, 그러나 도리어 這 箇의 道理를 做得하여 箇의 物事를 成인 것이니 半上落下는 아닌 것이다. 故로 聖人께서 비록 그 ‘狂簡不知所裁’라 謂하시었어도, 그러나 또한 그 一箇의 道理를 成하였음에 取하신 것이다. 大率로 孔門의 弟子는 그 資質로 随하여 各으로 能히 成就하였으니, 마치 子路之勇과 같은 것은 真箇(진개)=眞實로 一 箇(=個)의 勇을 成한 것이고, 冉求之藝는 真箇로 一箇의 藝를 成한 것이니, 言語徳行之科에서도 一齊히 他에 被하여 成了를 做得하였던 것이다.)
(〓○成章은 始作과 끝이 있는 것이다. 비록 狂簡이 中함은 아니지만, 그러나 도리어 한 道理를 攄得하여 한 物事를 이룬 것이니 中途 落下함은 아니다. 그러므로 聖人께서 비록 ‘狂簡하나 마름질 할 줄을 모른다.’하시었으나 또한 그 하나의 道理를 이루었음을 取하신 것이다. 大槪 孔門의 弟子는 그 資質에 따라 各其 成就함이 있었으니, 假令 子路의 勇은 참으로 한 勇을 이룬 것이요, 冉求의 藝는 참으로 한 藝를 이룬 것이니, 言語·徳行의 科에서도 一齊히 그 이룸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이다.)
* 做得주득: 해내다, 이루다, 成就하다. * 狂簡광간: 뜻은 크나 실천이 없이 疏忽하고 거칠다. * 片段편단; 토막, 段落(fragment), 斷片, 部分, (文章, 生活의) 一段落. |
p.400
(○成章是做得成片段有文理可觀盖他狂也是做得箇狂人成)
(↳○成章 是做得成片段 有文理可觀 盖他狂也 是做得箇狂人成)
(-○成章은 이렇게 片段=斷片을 成함으로 做得하여 文理에 可觀함이 有인 것이다. 大槪 他 狂은 또한 이렇게 箇의 狂人이 成함을 做得인 것이다(主體가 狂人).)
(〓○成章은 곧 斷片을 이룸으로서 文理에 볼 만함이 있는 것이다. 大槪 저 狂은 또한 곧 한 狂人이 이룸을 이룬 것이다.)
p.400
(○問孔子欲歸而裁之後來曾晳之徒弔喪而歌全似老荘聖人既裁之後何故如此曰裁之在聖人聽不聽在他)
(↳○問 孔子欲歸而裁之 後來曾晳之徒 弔喪而歌 全似老荘 聖人既裁之後 何故如此 曰裁之在聖人 聽不聽在他)
(-○問컨대, 孔子께서 欲歸而裁之한 後來에도 曾晳之徒들이 弔喪而歌하였으니(檀弓下第四), 全으로 恰似 老荘과 같으니, 聖人께서 이윽고 裁之인 後에도 何故로 如此인 것입니까? 曰: 裁之함은 在聖人인 것이나, 聽과 不聽은 在他인 것이로다.)
(〓○質問하기를 “孔子께서 돌아가 마름질하고자 하신 뒤에도 曾晳의 무리들이 喪에 弔問하며 노래를 부르며 完全히 老荘과 같았으니, 聖人께서 마름질하신 뒤에도 어째서 이와 같았던 것입니까?”하자, 對答하기를“마름질함은 聖人에 있는 것이나, 듣고 듣지 않음은 다른데 있는 것이다.”)
p.400
(○慶源輔氏曰大凡學者易得有狂簡之病非篤志為己者不能免也雖琴張曾㸃猶或墮於此失志意高逺即所謂志大也過中失正即其畧於事者也大凡人之志意高逺則勢利拘絆他不住故或可與進於道然溺於高逺又有脱畧世故之弊故過中失正而或陷於異端是以不可不有以裁之而使歸於中正也)
(↳○慶源輔氏曰 大凡學者易得有狂簡之病 非篤志為己者 不能免也 雖琴張曾㸃猶或墮於此失 志意高逺 即所謂志大也 過中失正 即其畧於事者也 大凡人之志意高逺 則勢利拘絆 他不住 故或可與進於道 然溺於高逺 又有脱畧世故之弊 故過中失正而或陷於異端 是以 不可不有以裁之而使歸於中正也)
(-○慶源輔氏曰: 大凡으로 學者는 易로 有狂簡之病을 得하니, 篤志의 為己者가 아닐지면 能히 免할 수 없는 것이다. 비록 琴張과 曾㸃과 같은 사람이라도 오히려 或 此失에 墮이고 마는 것이다. 志意高逺은 即 所謂 ‘志大’인 것이고, 過中失正이 即 그 ‘畧於事’인 것이다. 大凡으로 人의 志意가 高逺일지면 則 勢利의 拘絆에 他는 不住인 것이니, 故로 或 可히 더불어 進於道인 것이다. 그러나 高逺에 溺일지면 또 世故(世上事)에 脱畧하려는 弊가 有이기도 하니, 故로 過中失正하여 或 陷於異端인 것이다. 是以로 裁之하여서 中正으로 歸하게 함이 有하지 않으면 不可인 것이다.)
(〓○慶源輔氏가 말하였다. “大槪 배우는 者들은 쉽게 狂簡함이 있는 病通을 얻게 되니, 篤志한 為己者가 아니면 免할 수 없는 것이다. 비록 琴張과 曾㸃과 같은 사람이라도 오히려 이렇게 失墜하고 마는 것이다. 志意가 高逺함은 즉 이른바 志大요, 過中·失正함은 즉 일에 疏略함이다. 大槪 사람의 志意가 高逺하면 勢利의 拘絆에 머물지 않게 되는 것이므로 或 더불어 道에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高逺함에 빠지게 되면 또 世故에 脱畧하려는 弊端이 있기도 하므로 過中·失正하여 或 異端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이 때문에 裁之하여서 中正으로 돌아가게 함이 있지 않으면 아니 되는 것이다.”)
* 拘絆구반: 잡히어 묶임. 세상일에 얽매임. 속박하다. |
* 慶源輔氏(경원보씨, 寧宗 1,195〜1,203年): 姓은 輔이고, 名은 廣(광)이다. 字는 漢卿(한경), 號는 잠암(潛菴), 潜齋이다. 南宋 性理學者이다. 慶源은 朱子의 門人인 輔廣의 本貫이다. 輔逵(보규)의 아들. |
傳貽書院(전이서원)을 짓고 講學하였기에 當時에 世上사람들은 傳貽先生이라고도 불렀다. 하지만 그의 原籍(원적)이 趙州(조주) 慶源出身이기 때문에 慶源 輔氏로 더 잘 알려져 있다. 南渡(남도)한 뒤 秀州(수주) 崇德縣(숭덕현)에 살았다. 父恩으로 保義郞(보의랑)이 되고, 네 次例가 科擧試驗을 보았지만 번번이 떨어졌다. 忠訓郞(충훈랑)에 任命되었다. |
輔廣은 처음에는 呂祖謙에게 修學했으며, 뒤에 朱子(朱熹)에게 배웠음(師事). 朱熹가 그를 매우 아꼈다. 南宋寧宗 元年(1,195年) 61歲에 ‘慶元僞學之禁’을 當하자 學生들이 다들 달아났지만 그는 動搖하지 않고 朱子를 홀로 侍奉하였다. 程朱가 主張한 持敬(지경)을 德에 나아가는 바탕으로 여겨 强調했다. 가정(嘉定) 初에 朝廷에 글을 올려 是非成敗의 狀況에 대해 거듭 强調했다. 黃幹(황간)과 輔廣 두 사람을 아울러 “黃輔(황보)”라고 稱하였다. |
著書로는 『語盟學庸答問』, 『四書纂疏사서찬소』, 『六經集解』, 『常變通攷』, 『通鑑集義』, 『潛菴日誌錄』, 『師訓篇』, 『潛庵日新錄』 等이 있었으나 傳하지 않고, 『詩童子問』 하나만이 『通志堂經解』에 收錄. |
p.400~401
(○徽庵程氏曰狂簡者志大而畧於事宜其梗槩䟽率乃能斐然成章者盖其禀氣英明賦質堅勁雖致廣大而不屑於精㣲然其規模之廣大實非卑下者所能攀雖極高明而不屑於中庸然其志趣之高明實非平凡者所能企也其立心制行豈不斐然可觀但各矜所自得非得聖人以裁之則廣大雖可觀而精㣲有未究高明雖可喜而中庸有未協且有琴張曾晳牧皮之夷考其行而不掩焉者矣)
(↳○徽庵程氏曰 狂簡者 志大而畧於事 宜其梗槩䟽率乃能斐然成章者 盖其禀氣 英明賦質堅勁 雖致廣大而不屑於精㣲 然其規模之廣大實 非卑下者所能攀 雖極高明而不屑於中庸 然其志趣之高明 實非平凡者 所能企也 其立心制行 豈不斐然可觀 但各矜所自得 非得聖人以裁之 則廣大 雖可觀而精㣲有未究 高明雖可喜而中庸有未協 且有琴張曾晳牧皮之 夷考其行 而不掩焉者矣)
(-○徽庵(휘암)程氏曰: 狂簡者는 志는 大이나 事에는 畧인 것이니, 宜當 그 梗槩가 䟽率이나 이내 能히 斐然히 成章할 수 있는 것은, 大槪 그 禀氣가 英明하고 賦質이 堅勁이기 때문이다. 비록 致廣大하여 精㣲에는 屑치 않으나, 그러나 그 規模之廣大는 實로 卑下者가 能히 攀(더위잡을 반)할 수 있는 바가 아닌 것이다. 비록 高明에 極하여 中庸에는 屑치 않으나, 그러나 그 志趣之高明은 實로 平凡者가 能히 企할 수 있는 바가 아닌 것이다. 그 立心制行에 어찌 斐然히 可觀치 않으리오? 다만 各으로 自得한 바에 矜일 뿐인지라, 聖人께서 裁之로서 得치 않을지면, 則 廣大함에 비록 可觀일지라도 精㣲에 未究함이 有인 것이고, 高明함에 비록 可히 喜일지라도 中庸에 未協함이 有인 것이다. 또한 琴張, 曾晳, 牧皮의 그 行을 夷考하여보면 그것을 掩하지 못함이 有인 것이다.)
(〓○徽庵程氏께서 말씀하였다. “狂簡者는 뜻은 크나 일에는 疏略한 것이니, 宜當 그 梗槩가 䟽率하나 以內 能히 斐然히 成章할 수 있는 것은 大槪 그 禀氣가 英明하고 賦質이 堅勁이기 때문이다. 비록 廣大함에 이르러 精㣲함에는 다다르지 않았으나 그 規模의 廣大함은 實로 鄙陋한 下級者가 올라갈 수 있는 바가 아니다. 비록 高明함에 至極하여 中庸에는 다다르지 않았으나 그 志趣의 高明함은 實로 平凡한 者가 能히 期待할 수 있는 바가 아니다. 그 立心·制行이 어찌 斐然히 볼만하지 않겠는가? 다만 各其 自得한 바를 肯定할 뿐이라, 聖人께서 마름질하여 되지 않으면 廣大함이 비록 볼만하더라도 精㣲함에 窮究하지 못함이 있는 것이며, 高明함에 비록 기뻐할 지라도 中庸에 洽協하지 못함이 있는 것이다. 또한 琴張·曾晳·牧皮의 行蹟을 夷考해보면 그것을 가리지 못함이 있는 것이다.”)
* 梗槩경개: 줄기경, 평미래 개로 大綱의 줄거리, 大略. * 䟽率소솔: 行動이 투박하고 가볍다. * 斐然비연: 文彩가 있는 모양, 優秀하다, 顯著하다. * 夷考이고: 어떤 것을 깊이 생각하고 硏究함. * 禀氣품기: 타고난 呼吸數. 生命은 呼吸에 달려 있다. * 英明영명: 뛰어나게 슬기롭고 聰明하다. * 賦質부질: 타고난 성질이나 바탕. * 堅勁견경: 굳세고 힘이 있다, 뜻이 굳다, 不撓不屈하다. |
* 徽庵程氏(휘암정씨, ): 姓은 程이고, 名은 若庸이며, 字는 道原, 逢原(봉원)이다. 號는 勿齋, 徽庵(휘암)으로, 南宋의 때 性理學者이다. 程若庸(정약용)을 가리킨다. 勿齋先生(물재선생)으로도 불린다. 武夷書院(무이서원)의 晝講을 지냈으며 朱熹의 學問을 宗主로 하였다. |
著書로는 『性理字訓講義성리자훈강의』, 『太極洪範圖說태극홍범도설』 等이 있다. |
p.401
(○新安陳氏曰狂者易過中失正得聖人裁之則得中正矣狂則必貴於裁裁則不終於狂也)
(↳○新安陳氏曰 狂者易過中失正 得聖人裁之 則得中正矣 狂則必貴於裁 裁則不終於狂也)
(-○新安陳氏曰: 狂者는 過中失正에 易이나, 聖人의 裁之를 得일지면 則 中正을 得할 수 있는 것이다. 狂은 則 반드시 裁에 貴인 것이니, 裁일지면 則 狂으로 終하지는 않는 것이다.)
(〓○新安陳氏가 말하였다. “狂者는 過中失正하기 쉬우나, 聖人의 마름질을 攄得하게 되면 中正을 얻을 수 있는 것이요, 狂은 반드시 마름질함을 貴하게 여기니, 마름질하게 되면 狂으로 끝나지는 않는 것이다.”)
* 新安陳氏(신안진씨, 1,252~1,334年): 姓은 陳이고, 名은 櫟(력)이며, 字는 壽翁(수옹), 號는 新安 또는 定宇先生, 東阜老人(동부노인)이다. 元나라 徽州(휘주) 新安 休寧人(휴령인) 出身으로, 朱子를 宗主로 삼아 學問 活動을 하고, 南宋의 滅亡을 經驗하고, 隱居하여 著述하다가 83살에 죽었다. |
著書로는 『尙書集傳纂疏상서집전찬소』, 『易略역략』, 『歷代通略역대통략』, 『勤有堂隨錄근유당수록』, 『四書發明』, 『書傳纂疏서전찬소』, 『禮記集義예기집의』, 『定宇集』 等이다. |
* 曾晳之徒弔喪而歌(檀弓下第四) |
季武子寢疾,蟜固不說齊衰而入見,曰:「斯道也將亡矣,士唯公門說齊衰。」季武子,魯大夫季孫夙也。世為上卿,強且專政,國人事之如君,蟜固能守禮,不畏之,矯失俗也。道猶禮也。○蟜,居表反。蟜固,人姓名。說,他活反,本亦作稅,徐又音申銳反,下同。見,賢遍反。矯,居表反。武子曰:「不亦善乎!君子表微。」時無如之何,佯若善之。表猶明也。及其喪也,曾點倚其門而歌。明己不與也。點字晰,曾參父。○點,多忝反。倚,於綺反,徐其綺反。晰,星歷反。 |
[疏]「季武」至「而歌」。○正義曰:此一節論季武子無禮,蟜固正之事。武子,魯之執政上卿,時人畏之,事之如君,入其門皆說衰。唯蟜固不說齊衰而入見武子,謂武子曰:「我所以著齊衰而入者,以此著齊衰之道,將亡絕矣。以時人畏爾,入門者皆說齊衰,故此著齊衰入大夫之門,其道將絕。又語武子:「若依正禮,士唯入公門乃說齊衰,而入大夫之門不合說也。」言「將亡」者,其時鄉餘大夫之門,猶有著齊衰者,故云「將亡」將亡者,未絕之辭。武子既得蟜固之言,心雖恚恨(성낼에),身既寢疾,無奈之何,乃佯言(거짓말)若美之:「汝之所言,不亦善乎!所以善者,若失禮顯著 凡人皆知。若失禮微細,唯君子乃能表明之。今說齊衰失禮之微,汝能知之,是君子之人,故雲君子表微。」及武子之喪,曾點幕蟜固之直(장막막),乃倚武子之門而歌,明己不與武子,故無哀戚。 |
* 琴張: 『孟子』「盡心章句下」에 14-37-4 曰如琴張曾晳牧皮者 孔子之所謂狂矣 曰 “마치 琴張(금장)과 曾晳(증석)과 牧皮(목피)같은 者가 孔子께서 所謂 狂者라고 말씀하신 者이니라.” |
[集註]琴張名牢 字子張 子桑戶死 琴張臨其喪而歌 事見莊子 雖未必盡然 要必有近似者 曾晳 見前篇 季武子死 曾晳倚其門而歌 事見檀弓 又言志異乎三者者之撰 事見論語 牧皮未詳 琴張의 이름은 牢(뢰)이고 字는 子張이다. 子桑戶(자상호)가 죽었을 적에, 琴이 그 喪에 臨하여 노래를 불렀고, 그 일이 莊子란 책에서 보인다. 비록 반드시 그렇게 다하지는 못하지만, 要求했던 것은 반드시 道에 近似했던 것이다. 曾晳은 前篇에서도 보이며, 季武子(계무자)가 죽었을 적에, 曾晳이 그 門에 기대고서 노래를 불렀으니, 그 일이 『禮記』「檀弓」篇에서 보인다. 또 뜻을 말함이 세 사람의 選擇에 있어서는 달랐으니, 그 일이 『論語』에서 보인다. 牧皮(목피)는 未詳이다. |
* 莊子(장자, BC 369~289年): 姓은 莊이고, 名은 周(주)이며, 中國 戰國時代 宋의 蒙邑(몽읍: 現在 河南省 商邱縣 近處) 出生으로 思想家. 孟子와 거의 비슷한 時代에 活躍한 것으로 傳해진다. 道를 天地萬物의 根本原理라고 보았다. 道는 어떤 對象을 欲求하거나 私有하지 않으므로 無爲하고, 스스로 自己存在를 成立시키며 저절로 움직이므로 自然스럽다. 一種의 汎神論(범신론: 神과 全宇宙를 同一視하는 宗敎的·哲學的 或은 藝術的인 思想體系)이다. 諸子百家 中 道家의 代表者. 道家思想의 集大成이라 하는 <莊子>는 內篇(내편) 7, 外篇(외편) 15, 雜篇(잡편) 11, 合計 33篇 構成이다. ‘雜篇’을 除外하고는 大體로 莊子가 著述한 것으로 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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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參考 1. 論語集註大全1, 2. 五書五經讀本 論語集註 譯註(鄭太鉉) 冊은 第五 公冶長篇부터 參考함. * 위 10개의 blog를 編輯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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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子謂公冶長하시되可妻也로다雖在縲絏之中이나非其罪也라하시고以其子로妻之하시다子謂南容하시되邦有道에不廢하며邦無道에免於刑戮이라하시고以其兄之子로妻之하시다 2.子謂子賤하사되君子哉라若人이여魯無君子者면斯焉取斯리오 3.子貢問曰賜也는何如하나이까子曰女는器也니라曰何器也니이까曰瑚璉也니라 4.或이曰雍也는仁而不佞이로다子曰焉用佞이리오禦人以口給하여屢憎於人하나니不知其仁이어니와焉用佞이리오 5.子使漆彫開仕하신대對曰吾斯之未能信이로소이다子說하시다 6.子曰道不行이라乘桴浮于海하리니從我者는其由與인저子路聞之喜한대子曰由也는好勇이過我나無所取材로다 7.孟武伯이問하되子路仁乎잇가子曰不知也로이다又問한대子曰由也는千乘之國에可使治其賦也어니와不知其仁也케라求也는何如이꼬子曰求也는千室之邑과百乘之家에可使爲之宰也어니와不知其仁也로이다赤也는何如하니이까子曰赤也는束帶立於朝하여可使與賓客言也어니와不知其仁也로이다 8.子謂子貢曰女與回也로孰愈오對曰賜也何敢望回리이까回也는聞一以知十하고賜也는聞一以知二하나이다子曰弗如也니라吾與女로弗如也니라 9.宰予晝寢이어늘子曰朽木은不可雕也며糞土之墻은不可杇也니於予與에何誅리오子曰始吾於人也에聽其言而信其行이러니今吾於人也에聽其言而觀其行하노니於予與에改是와라 10 .子曰吾未見剛者케라或이對曰申棖이니이다子曰棖也는慾이어니焉得剛이리오 11.子貢이曰我不欲人之加諸我也를吾亦欲無加諸人하나이다子曰賜也아非爾所及也니라 12.子貢이曰夫子之文章은可得而聞也어니와夫子之言性與天道는不可得而聞也니라 13.子路는有聞이오未之能行하야唯恐有聞하도다 14.子貢이問曰孔文子를何以謂之文也니이까子曰敏而好學하며不恥下問이라是以로謂之文也니라 15.子謂子産하시되有君子之道四焉이니其行己也恭하며其事上也敬하며其養民也惠하며其使民也義니라 16.子曰晏平仲이善與人交로다久而敬之오녀 17.子曰臧文仲이居蔡하되山節藻梲하니何如其知也리오 18.子張이問曰令尹子文이三仕爲令尹하되無喜色하며三已之하되無慍色하여舊令尹之政을必以告新令尹하니何如하나이까子曰忠矣니라曰仁矣乎이까曰未知케라焉得仁이리오崔子弑齊君이어늘陳文子有馬十乘이러니棄而違之하고至於他邦하여則曰猶吾大夫崔子也라하고違之하며之一邦하여則又曰猶吾大夫崔子也라하고違之하니何如하나이까子曰淸矣니라曰仁矣乎이까曰未知케라焉得仁이리오 19.季文子三思而後에行하더니子聞之하시고曰再斯可矣니라 20.子曰甯武子는邦有道則知하고邦無道則愚하니其知는可及也어니와其愚는不可及也니라
22.子曰伯夷叔齊는不念舊惡이라怨是用希니라 23.子曰孰謂微生高直고或이乞醯焉이어늘乞諸其隣而與之오녀 24.子曰巧言令色足恭을左丘이明恥之러니丘亦恥之하노라匿怨而友其人을左丘明이恥之러니丘亦恥之하노라 (足:지나칠 주) 25.顔淵季路侍러니子曰盍各言爾志리오子路曰願車馬와衣輕裘를與朋友共하여敝之而無憾하나이다顔淵이曰願無伐善하며無施勞하나이다子路曰願聞子之志하나이다子曰老者安之하며朋友信之하며少者懷之니라 26.子曰已矣乎라吾未見能見其過하고而內自訟者也케라 27.子曰十室之邑에必有忠信이如丘者焉이어니와 不如丘之好學也니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