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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강
설교의 목적과 경건
(Purpose and Piety in his Preaching)
Dr Guy M. Richard/ 서창원 역
‘나의 주님은 천만인의 대장이시다. 하늘이나 땅에서 그와 견줄 자는 아무도 없다.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모든 것을 그를 위해 하라, 그리스도를 위해 기도하라, 그리스도를 위해 설교하라. 그리스도를 위해 여러분들에게 위임된 양무리를 먹이라, 이 모든 일을 그리스도를 위해 하라.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을 주의하라. 우리 가운데 그러한 일들이 너무나 많이 있도다.’
- 1661년 2월 죽음이 임박한 때, 루터포드 목사
지금까지 우리는 루터포드의 설교가 당시대 설교자들의 설교보다 더 감동적인 것이 되게 한 것에 대해 논의하지 않았다. 대부분의 청교도 목사들은 윌리암 퍼킨즈의 설교학 교과서를 따랐으며 회중들 앞에서 겉치레로 과시하기 위함이 없이 설교의 기술을 익히려고 애를 썼다. 그러므로 대다수의 청교도 목사들은 그들의 양무리들에게 말하는 일반적인 방식을 받아들였다. 강한 은유적인 언어를 사용하였고 생동감이 넘치는 문체를 사용했다. 어떤 분들은 감각적인 언어도 강하게 사용하기를 마다하지 않았으며 아가서의 그림들을 사용했다. 루터포드 목사가 행한 것에까지 확대되지는 않았을지라도 말이다. 루터포드 목사의 이 같은 설교 스타일은 그만의 독특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그의 설교가 그토록 효과가 크게 나타난 이유가 무엇인가? 그렇게 감동적이게 한 원인이 무엇인가? 루터포드의 삶과 목회를 그 당대의 다른 설교자들보다 그토록 두드러지게 한 핵심적인 요소들은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설교의 목적에 대한 그의 견해이며 둘째는 그의 경건성이다. 이 요소들은 그 자체가 독특한 것들이 아님이 분명하지만 루터포드는 그것들을 강하게 붙들었다는 것 역시 사실이다. 이번 강의에서 우리는 루터포드의 신앙 경험의 이 두 영역을 탐구하고자 한다.
1. 그리스도의 사랑스러움을 보이다
스코틀랜드를 방문한 적이 있는 한 잉글랜드 상인에 대한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그는 집에 돌아가 북쪽 지방을 여행하면서 그가 들었던 설교에 대해서 말했다. 예를 들면 로버트 블레어 목사의 설교에 대해서 그 상인은 ‘달콤하고 근엄한 인상을 풍기는 그 분은 내게 하나님의 엄위하심을 보여주었다.’ 데이빗 딕슨 목사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사람이요, 긴 수염을 지닌 나이든 분인데 그는 내게 내 마음의 모든 것을 보여주었다.’ 그런데 사무엘 루터포드 목사는 다른 분들과는 아주 달랐어. 키가 작고 깔끔하게 생기셨는데 내게 ‘그리스도의 사랑스러움’을 보여주었다. 이 잉글랜드 상인의 말보다 설교와 인생에 있어서 루터포드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더 잘 설명하고 있는 것은 없을 것 같다. 루터포드의 목회 사역은 그 어떤 것보다 이 목적에 의해서 더욱 두드러진 것이 되었다. 그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사랑스러움을 보고 경험하게 되기를 갈망하였다.
휴 올드(Hughes Old)는 하나님께서 그의 사역자들에게 다양하게 은사들을 수여해 주심을 상기시켜주고 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모든 목사들에게 맞는 단벌옷만 있는 것이 아니다. 감사하게도 다양한 옷들이 있다. 목사 개개인은 자신만의 독특한 개성과 강단사역을 감당하는 경험들이 있다. 16세기에서는 윌리암 파렐보다 백배 이상으로 더 크게 말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피에르 비레(Viret)보다 더 달콤하게 울리는 말을 한 사람은 아무도 없고, 칼빈보다 더 잘 배워 가르친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말한다. 17세기에서는 복음의 비밀들을 아름답고 감미롭게 흘러넘치게 말하는 리차드 십스의 독특한 은사와 같이 그는 훗날 그의 회중들에 의해서 ‘the Sweet Dropper’(꿀을 떨어뜨리는 사람)로 불리게 되었다. 마찬가지로 루터포드 역시 그를 사로잡고 있는 독특한 은사는 그의 청중들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스러움을 확정시킨다는 것이다.
루터포드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천만인의 대장이시오, 꿀통이며, 달콤하고 아름다운 주인이시며, 가장 뛰어나게 아름다운 분이시오, 모든 꽃들 중의 꽃이시며 샤론의 장미요, 성도들의 낙원이며 에덴동산이며, 정말 사랑스러운 신랑이시다. 그리고 그의 전부가 다 사랑스럽기 그지없는 값진 진주이다.’ 이것이 그가 그의 성도들과 교통하기를 추구했던 것이었다. 이것을 사람들이 굳게 부여잡게 되기를 소원했다. 그의 탄식은 사람들이 마땅히 존귀하게 여겨야 할 그리스도를 그렇게 여기지 않는 것이었다. 그는 그리스도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가 높아지기를 원했다.
오, 만일 내가 그리스도를 위한 장터를 흥행케 할 수만 있다면, 일원짜리를 만원짜리로 여기는 장터로 높일 수만 있다면,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생각하는 것보다 사람들의 생각 속에서 만 배나 더 높이도록 외칠 수만 있다면 좋겠노라! 그러나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값싸게 하고 있고, 끌어내리려고 아우성치고 있으며, 반 푼어치도 없는 존재로 전락시키고 있다. 또 그리스도를 헛된 이 세상의 황량한 낡은 집과 바꾸거나 교환하고 있다.
루터포드는 그의 회중이 이 세상의 것들을 그리스도 위에 두기를 멈출 그 날을 연모하였다.
이제 여러분에게 묻는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어디에 두고 있는가? 그리스도께서 앉으실 보좌를 어디에 두었는가? 그는 만일 만 배나 높은 만개의 하늘들이 있을지라도 그 자리가 그리스도에게는 결코 높을 수 없다. 매번 그리스도는 그 위에 계셔야하며 그들 중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있어야 한다. 그렇게 해도 그에게는 낮은 곳에 불과하다. 아, 그리스도를 너무나 적게 여기고 있도다! 그는 진주가 널려 있는 들판처럼 사람들이 그 위를 달리고 있고 그 위에서 자라는 풀들을 짓밟듯 밟고 다닌다. 그럼에도 그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한다. 사람들은 이 진주를 짓뭉개고 있으면서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저런! 저런! 땅에 속한 인간들이여! 여러분의 구원문제보다 소나 양에 애정을 쏟겠는가? 인간들이 그리스도보다 욕망을 더 추종하는 것이 참으로 애석하다! 오, 부끄러워라! 여러분이 여러분의 새로운 주인인 고의적인 의지를 영원하신 옛 주님, 옛 선조들의 주 예수 그리스도 위에 두고 있다니! 오! 어떻게 그리스도를 그 자리에서 밀어낸단 말인가? 오, 우리가 그 분의 이름을 분명하게 읽을 수 있는 그 장소의 영광을 구하자. 그리스도를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볼 그 장소의 영광을 구하자. 정말 이상하도다! 우리가 하늘에 있고자 하지 않다니 말이다. 그의 다가올 영광스러운 분을 보고자 하지 않다니! 실로 우리의 사랑하는 주님을 보고자 하지 않다니! 하늘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뛰노는 그 영광스러운 곳을 보고자 하지 않다니!
그러나 이것은 루터포드의 설교의 목적만이 아니라 그의 인생의 목적이기도 하였다. 그는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에 반했다. 그는 다른 성도들도 자기처럼 그리스도에게 매혹되기를 원했다. 루터포드는 그리스도께서 ‘모든 영적인 감각들을’ 즐거워하심을 알았다. 그러므로 그것은 그에게 있어서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을 고백하는 측면에서 그리스도의 모든 것이 다 사랑스럽다고 믿지 않는 것은 하나의 모순이었다. 이것이 루터포드가 알미니안들이 실제로 회심하지 않은 자들로 의혹을 한 가장 주된 이유였다. 루터포드가 그것을 이해했던 것과 같이 참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와 더불어 사랑에 빠지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을 대적하여 말하는 것을 다 싫어하는 것이다. 그러나 알미니안 체계 전부가 이것과는 반대로 움직이기 때문에 그는 알미니안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것이 하나도 없다고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설교에 있어서 루터포드의 목적은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탁월한 아름다움을 보이는 것만이 아니었다. 그는 이것을 그가 최선을 다해 사람들에게 감명(impress)을 주고자 했다. 이점에 있어서 루터포드는 설교의 주된 업무를 회중들에게 감동을 주는 것으로 보았던 그 당시의 사람들과 별 다른 점이 없었다. 이것은 회중에게 단지 정보만 제공하는 것보다 훨씬 중요한 것이었다. 존 프레스톤이 이 부분에 대해서 보다 생동감 있게 묘사하고 있다.
설교자가 여러분들에게 전달하는 말씀은 못과 같아야 하고, 머리로 들어가 … 영혼 안에 박히고 거주해야 한다. 그리하여 쉽게 망각하지 않게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말씀을 설교하는 일에 있어서 우리가 해야만 하는 주된 업무는 이 말씀을 더 단호하게 죄어 여러분의 심령에 매이게 하는 것이다.
설교는 주된 업무가 정보전달인 강의가 아니다. 조나단 에드워드에게와 마찬가지로 루터포드에게도 설교는 설교를 듣는 순간 청중들의 심령에 감동을 미치게 하는 것이다. 이 감동은 회중이 후에 기억하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이것에 대하여 조나단 에드워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설교에 의해서 얻어지는 주된 유익은 그 시간에 사람의 마음에 진한 인상을 심어주는 것이다. 이것은 무엇이 선포되었는지를 기억함으로 말미암아 나중에 발생하는 효과에 의한 것이 아니다. 비록 설교 후에 무엇이 선포되었는지를 기억하는 것 역시 많은 유익이 있을지라도 그러나 대부분 그 기억은 설교 시간에 심령에 박히는 감동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기억하는 것은 그 감동을 새롭게 하고 증폭시키는 유익함이 있다.
루터포드가 설교가 청중들에게 깊은 감동을 심어주는 그 유익함에 대하여 에드워드처럼 분명하게 언급하지는 않았을지라도 그는 그 개념을 충분히 품고 있었다. 그 사실은 다음에서 볼 수 있다. 첫째, 루터포드의 설교들은 사실적 정보를 전달하기 위한 것보다 다른 목적을 위해 계획된 것이었다. 그의 청중들에게 복잡한 신학적 개념들을 신학적 용어대신에 비유적인 언어를 반복해서 사용한 것이 이를 충분히 뒷받침한다. 루터포드가 복음에 대해서 설교한 다음의 예를 보라.
복음은 그리스도의 시간이요 여름날의 태양이다. 모든 사람들은 여름날의 태양이 우리 머리 위에 놓으신 하나님의 모래시계이다. 이것으로 하나님은 농부가 겨울이 다가오기 때문에 땅을 기경하고, 씨를 심고 열매를 수확해야 할 시기를 명령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복음은 우리가 달려가야 할 시간에 대해서 말해주는 모래시계와 같다. 영원한 생명을 얻는 양식을 위하여 수고할 때를 알게 한다. 겨울을 준비하게 한다. 최후의 나팔소리가 세상에 있는 죽은 죄인들과 귀먹은 죄인들을 깨우게 될 것이다. 깊은 잠에 빠져 있는 자들을 깨울 것이다. 그러나 촛불이 타고 있고 태양이 그들의 머리와 침대를 비추이고 있을 때 잠자고 있던 자들은 가장 씁쓸한 깨움을 얻게 될 것이다. -이들이 복음의 날에 잠을 자고 있는 자들이다.
이런 표현방식의 말은 회화적인(conversational) 어투이다. 이것은 복음에 대하여 냉담한 자세를 취하고 있는 교회 한 성도와 커피 한 잔 마시면서 그런 말을 할 우리가 기대하는 루터포드는 아니다. 또 그 당시 가장 유명한 신학교에서 신학을 가르치는 교수의 입에서 나올법한 것도 아니다. 루터포드가 여기서 사용하고 있는 언어는 생생한 언어이다. 그는 청중들의 마음과 머리에 감동을 주기 위해서 그의 설교를 정교히 다듬었다는 데 이의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둘째로 17세기 스코틀랜드 강단은 ‘사람들을 끌고, 관심을 갖게 하고, 강한 인상을 심어주고, 성품을 형성케 하는 능력에 있어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곳으로 여겼다. 만일 이 평가가 맞는다면 루터포드의 설교는 그것으로부터 이탈될 가능성은 거의 없는 것이다. 더욱이 로버트 길모어가 말하고 있듯이 루터포드는 ‘17세기 첫 전반기에서 가장 특출한 대표적인 스코틀랜드 사람이었다.’
셋째, 루터포드의 설교들은 감각적인 언어와 형상언어들로 가득 차있다. 그 언어들은 그리스도를 영원히 매력적인 결혼 상대자로 그려주기 위한 것이었으며 믿음을 통하여 그리스도와 연합해야 할 필요성을 청중들에게 깊이 새겨주기 위한 것이었다. 이것은 뒤에서 더 명확하게 다룰 것이다. 특히 루터포드가 그의 청중들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스러움을 어떻게 깊이 감동을 주게 되었는지에 대한 질문에 답하며 살펴 볼 것이다. 그러나 그 질문에 답하기 전에 우리는 루터포드의 인간 심리학에 대한 견해에 필요한 배경을 탐구할 필요가 있다.
2. 정서적 신학
루터포드는 개별적인 인간의 심리학은 서로 연결되어 있는 삼층 구조로 되어 있다고 믿었다. 지성과 의지와 정서이다. 지성은 지적 기능을 말하면 의지는 선택이나 거부의 기능을 말한다. 이것은 아담의 타락 이후에도 선택여부를 자유롭게 행사한다. 이것은 필요하다면 ‘내적 원리’에 따라 이루어지는 불과 같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것은 자연적으로 행동을 하거나 하지 않을 자유를 가지고 있다.
적어도 칼빈 이후로 종교개혁과 후기 종교개혁 사상의 흐름을 따라서 루터포도는 지성과 의지 사이의 관계를 아담의 타락 이전의 지적 측면에서 그리고 아담의 타락 이후의 자발적인 측면으로부터 이해했다. 다시 말하면 그는 타락 이전의 지성은 선에 대한 지식에 따라 의지를 지시하는 주도권을 가졌었지만, 타락 이후에는 지성이 악으로부터 선을 구별하는 식별력을 상실했을 뿐 아니라 의지를 이끌 수 없게 되었고 의지 자체가 도리어 지성을 지배하는 것이 되었다고 믿었다.
의지는 지성을 뒤로 잡아끈다. 빛과 악의, 생각과 의지는 다른 것을 통해서 서로 얽혀 있다. 의지적 악의는 마치 썩은 것이 좋은 술과 섞이면 그 좋은 술을 완전히 못쓰게 하듯이 생각의 빛을 못쓰게 부패시킨다. 그로부터 맛과 색깔이 드러난다.
한편 정서는 기본적으로 감정이다. 비록 루터포드가 정서가 전적으로 미친 짓에 걸맞은 비이성적이라거나 합리성이 없는 것으로 규정하는 것은 꺼려했을지라도 그 자체는 불을 지니고 있다고 믿었다. 정서는 동물적 열정이 아니라 지성에 의해서 제공되고 의지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사람이 은혜와 믿음을 더 많이 소유하면 할수록 덜 열정적이 되고 더 이성적인 감성을 소유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신자가 세상에서 가장 이성적인 사람이기 때문이다. ‘가장 죄 죽임이 강한 사람(즉 가장 성결케 된 사람)은 가장 예리한 이성과 강력한 빛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신자의 정서는 자기의 믿음이 자라면 자랄수록 더욱더 의지에 지시를 받는다. 반면에 비신자의 정서는 ‘흐리고 침침한 이성이요 그리고 하나님을 신앙하는 것과 섬기며 순종하는 행위를 다 망가뜨린’ 동물적 감정뿐이다.
그러나 정서와 의지 사이의 관계를 우리가 본 강의에서 주목하고자 한다. 이 관계를 설명하는 것은 의지에 대한 루터포드의 이해가 뭔지를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1) 의지의 기능
이미 언급했듯이 의지는 루터포드에게 있어서 선택 기능이다. 이것은 외적 강압이나 자연적인 필요에 영향 받음이 없이 자유롭게 활동한다. 개인으로 하여금 행동하게 할 외압적인 요소가 없다. 의지 하여금 이러 저러한 길로 나아가게 할 자연적 필요성도 없다. 의지는 타버려야 할 자연적인 필요성에 매이는 불과 같지 않다. 이것은 행동하거나 행동할 것을 거부하는 것을 자유롭게 행사한다. 이 자유가 인간 본성의 모든 네 가지 상태에 -타락 전, 타락 후, 회심 후 및 사후- 남아있는 것에 비해 의지의 기능성의 다른 측면은 동일하게 남아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이 네 가지 상태에서 의지가 각각 어떤 기능을 하는가?
창조이후 타락 이전 상태에 대해서 루터포드는 자유의지가 두 가지로 구성되어 있다고 보았다. 하나는 외압이나 내적 필요성을 떠나 자연스러운 선택권이요, 다른 하나는 선을 택하는 자유를 사용하고자 하는 경향(inclinatio)이다. 이것을 염두에 두고 자유의지는 의지의 경향에 따라 가장 훌륭한 선을 선택하거나 거부할 능력이다. 루터포드나 그를 따르는 당대 개혁주의자들이 이같이 말하는 개념에 대하여 뒤집어엎고자 하는 자들은 의지가 선택함에 있어서는 무관심하다고 주장하는 알미니안들이나 루터란 사람들이다. 종교개혁 이후의 흐름에 있어서 자유의 본질은 선과 악에 무관심한 것으로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만일 그 같은 무관심이 자유의지의 결정적 요소라면, 에드워드 레이에 의하면, ‘하나님과 천사들은 자유로운 존재들이 아니다. 선한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점에 있어서 루터포드와 칼빈 사이에 약간의 차이점이 발견된다. 자유의지 또는 liberum arbitrium(판단의 자유)을 루터포드는 의지의 경향에 따라 가장 훌륭한 선을 선택하거나 거부할 능력으로 본 것에 비해, 칼빈은 그 이상의 것으로 보았다. 즉 그것은 실지로 선을 선택할 능력이다. 이 차이점으로부터 파생되는 유일한 결과는 루터포드가 옳게 말했는데 후택설주의자(Postlapsarian, 아담의 타락 후에 구원받을 자를 택하였다는 주장, 역자 주)에게는 여전히 liberum arbiterium을 가지고 있고 칼빈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칼빈에게 있어서 아담의 타락 이후에 개인은 더 이상 liberum arbiterium을 가지고 있지 않고 오직 arbiterium(판단 혹은 결단)만 가질 뿐이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이 두 사람에게는 어떤 차이도 존재하지 않는다. 칼빈은 후자를 판단의 자유로 정의한 루터포드에 대해 동의할 것이다. 루터포드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것만이 아니라 이것을 타락전택설(prelapsarian) 상태에 적용할 때 전적으로 사라지고 마는 미미한 차이일 뿐이다. 루터포드나 칼빈에게 타락전 의지는 선과 악에 무관심한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죄에 기울어지는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 것이었다(inclinabatur ad Dei legem praestandam). 그리고 아담이 가진 본래 자유는 두 사람 다 동일한 성질을 가지고 순종하거나 불순종하는 자유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지 않고 하나님을 완전하게 순종하는 자유로 여겼다.
그러나 아담의 의지가 하나님의 의지처럼 선한 것 외엔 다른 것을 선택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아담은 변하기 쉬운 의지(a mutable will)로 지음 받았다. 그는 계속해서 선을 행하도록 지원해 주는 하나님의 은혜에 의존되어 있는 존재였다. 다시 말해서, 아담이 타락전 상태에서 악을 행한 의지가 전혀 없는 동안(inclinatio ad malum) 그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지원을 항거하고 거부할 자연스러운 능력(potentia naturalis)을 가지고 있었다. 어거스틴의 신학을 빌리면, 아담은 선을 택하는 경향을 지닌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죄를 지을 능력과 죄 짓지 않을 능력’(posse pecarre ad posse non pecarre)을 가진 사람이었다. 개혁주의자들 사이에 흐르고는 있는 일반적 경향을(칼빈, 폴라누스, 코케이우스 및 퍼킨즈와 같은 사람들을 포함하여) 따라 루터포드 역시 죄 지은 아담의 타락은 그의 자유의지 혹은 판단의 자유(liberum arbitrium)의 특성으로 말미암았다기보다는 그의 변하기 쉬운 의지력의 결과로 말한다. 아담이 죄를 범한 것은 선과 악에 무관심한 그의 의지 때문이 아니라 그의 의지력이 하나님과 그의 은혜스러운 지원을 거절하는데 동의한 것 때문이다. 윌리암 퍼킨즈는 이 부분에 대해서 아주 도움이 되는 말을 했다. ‘그의 의지의 선함 이외에 아담은 원하기만 하면 선함을 계속적으로 간수할 수 있는 능력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았다.’ 그러나 하나님 자신은 아담을 본래 모습대로 보존하시지 않았다. 오히려 ‘보존의 행위는 아담 자신의 변하기 쉬운 의지의 선택과 자유에 맡기셨다.’ 그 결과 아담은 타락했다. 그리고 그의 모든 후손들은 선을 택할 기질을 상실했고 그것과 더불어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연적인 능력도 상실했다.
우리가 인간의 타락 후 상태를 눈여겨볼 때 우리는 다시 한번 위에서 언급한 루터포드와 칼빈의 차이를 접하게 된다. 루터포드에게 있어서 후택설자들의 의지는 자유이다. 어떤 외압이나 내적 필요에 의해서 행동하게 되는 것이 아닌 자유이다. 비록 칼빈은 이 정의에 대해서 동의할지라도 그런 방식으로는 말하지 않았다. 칼빈에게 있어서 후택설자의 의지는 더 이상 자유가 아니다. 타락의 결과는 자유스럽게 선을 택할 수 없다는 측면에서 그러하다. 타락후 인간의 의지는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자의적 결정’(self-determined)으로 남아 있고 강압으로부터 자유이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의 내적 사악함에 매여 있게’(bound by man's innate wickedness)된다. 루터포드가 후택설자들의 의지가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없다는 것에 동의하면서 그는 이것을 본질적으로 자유의지의 상실로 보지 않고 아담이 가졌었던 원래의 경향, 즉 선을 행할 경향의 상실과 새롭게 죄악된 경향을 얻게 됨을 말한다.
비록 이러한 차이를 말하지만 루터포드에게나 칼빈 모두에게 타락 후 개개인은 자유이며 자유가 아니다. 인간은 적어도 강압에 의한 것이나 결정을 강요하는 내적 필요성(칼빈은 판단, 루터포드에게는 판단의 자유)이 없이 가장 가치 있는 선을 택하거나 거절할 자연적인 자유를 보유하고 있는 한 자유인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선을 향한 경향을 잃게 된 후로는 자유가 아닌 것이다. 선을 택할 타락전의 의지는 아담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이제는 죄성으로 대체되었고 루터포드는 칼빈과 루터를 연상케 하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즉 ‘죄에 종속되게 하고 오염되게 하는 것이 인간 안에 있다’(servitus quidem et vitiosa ad peccandum inclinatio inest homini)고 말하였다. 인간은 그에 관하여 어떤 일도 할 수 없는 존재이다.
따라서 루터포드에 의하면 후택설의 인간은 외압이나 내적인 자연스러운 필요성으로부터 자유이지만 그것은 인간의 죄성의 필요성으로부터 자유는 아니다. 의지는 자의적 결정이다. 그것이 자신의 의지에 따라 자발적으로 행동한 것인 한 말이다. 그러나 그 의지는 필연적으로 죄와 사망에 속박되어 있다. 칼빈이나 루터 및 버미글리(Vermigli)와 같은 종교개혁자들이나 퍼킨즈, 레이 및 루터포드와 같은 그 후 신학자들은 인간의 자유를 배제하지 않는 차원에서 어거스틴의 입장을 추종하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미 살펴본 것처럼 하나님 자신은 자유스럽게 일하시지만 그것이 악을 위한 것이 아니라 당연히 선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칼빈에게 있어서 타락후의 인간의 자유는 강압이 배제된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 루터포드에게는 외압과 내적 필요성이 다 배제된 것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우리의 죄성이나 경향의 필요성이 배제된 것은 아니다. 성경적 용어를 사용하면 후택설에서 인간은 죄와 허물로 죽은 자요 전적으로 어떤 선도 할 수 없는 존재이다. 어거스틴의 용어를 빌리면 인간은 죄를 짓지 않을 능력이 없다(non posse non peccare). 심지어 최고로 잘한 행위도 죄의 빛을 반사할 뿐이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죄성을 지닌 동기들로부터(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으로서가 아니라) 솟아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죄악된 목적들 때문이다. 우리의 유일한 소망은 우리에게 새로운 능력(nova potencia)을 수여해 주시는 Deus in nobis(높으신 하나님)뿐이다. 그러나 루터포드의 생각에서는 성결케 된 경향을(은혜의 습성) 우리에게 심어주는 것으로 말미암는 새로운 자유(nova libertas)가 아니다. 그리고 우리에게서 죄 짓는 경향(죄의 습성)을 제거함으로 말미암는 새 자유가 아니다. 우리가 양심적으로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존하는 삶을 다시 살 수 있게 하는 그런 새 자유가 아니다.
비록 중생후의 상태는 루터포드도 언급한 것처럼 성결케 된 경향 혹은 칼빈이 말하는 회복된 판단의 자유(liberum arbitrium)를 받았을지라도 이것은 인간이 타락 이전의 아담의 상태로 되돌아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한 가지 때문에, 즉 새로운 경향(루터포드) 혹은 자유(칼빈)가 아담에게 있었던 것처럼 완전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오로지 씨앗 상태로 존재할 뿐이다. 그리고 성화의 과정에서 자랄 것이다. 그리고 신자의 인생 전 과정에서 마치게 될 것이다. 또 다른 이유 한 가지는 죄를 향한 성향이 제거됨에 있어서 죄의 뿌리가 파괴되었다는 것은 맞지만 가지들은 여전히 남아 있고 살아 있으며 인간 심리학적 기능 전반에서 활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다루는 죄의 가지문제는 점진적인 성화의 과정이요 한 부분이다. 주입된 은혜의 습관은 구원에 효과적이다. 그것은 개인의 의지가 자유롭게 작동하여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도록 하고 그 믿음 안에서 필연적으로 보존됨을 보장한다. 또한 그것은 신자가 하나님을 순종할 수 있도록 보장한다. 비록 죄와 불순종이 남아있을지라도 이 새로운 성향은 성도로 하여금 어거스틴의 말처럼 죄짓지 않는 능력(posse non peccare) 안에 있음을 부정한다. 그러나 성화의 과정이 완전하기에 개인의 의지는 최종적인 상태에서는 -사후의 상태- 완전을 즐기게 된다. 그 상태에서는 죄 짓는 것이 불가능한 것이다(non posse peccare). 인간이 전적으로 성화되었기 때문만이 아니라(아담이 그랬던 것처럼) 개인의 의지가 더 이상 변화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2) 종합과 분석
인간의 사중상태에 대한 우리의 점검으로부터 자유의지란 루터포드에게 있어서 의지의 성향에 따라 한 가지 중요한 경고와 더불어 최고로 가치 있는 선을 택할 능력이다. 세 번째 상태에 있는 성향은(회심 후) 다른 모든 측면에서는 완전한 것임에 비해 여전히 불완전하며 씨앗 형태로 존재할 뿐이다. 타락 전의 상태에서 기질은 완전한 것이다. 아담의 타락을 이끌 수 있는 의지의 변동성이다. 타락 후의 상태에 있어서는 그 기질은 여전히 완전하다. 후택설 인간은 그의 죄성에 반하는 것을 선택할 수 없고 오직 매번 죄짓는 것뿐이다(non posse non peccare). 신자가 죽은 후의 최후의 상태에서는 그 기질은 다시 완전하다. 개인은 그의 전적으로 성결케 된 성향과 어긋나는 것을 택할 수 없다. 따라서 죄를 지을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회심 후와 죽음 이전에 있는 오로지 이 세 번째 상태에서 개인의 기질은 완전한 것이 아니다. 따라서 세 번째 상태를 특별히 주목하고자 한다.
3) 기독교인의 종교적 정서들
중생후의 생태에서 의지의 성향은 씨 형태로 존재하고 신자의 신앙생활 가운데서 자란다. 그 기간 내내 인간 심리적 기능에 남아 있는 타락한 것과 항상 싸운다. 이것은 이 상태에서 의지가 그 성향을 따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때로 그렇게 한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중생할 때 신자가 받은 기질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함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장한다. 그러나 다른 때는 의지가 아직 완전히 성결케 되지 못한 성향과 모순되는 것을 선택한다. 성도가 그렇게 할 때 그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 대신에 죄를 택한 것이다. 의지가 성령에 따라 선택하든지 남아 있는 부패성을 따라 선택하든지를 무엇이 결정하는가? 이 질문에 대답함에 있어서 감성들이 그 중심 역할을 감당하는 것이다.
조나단 에드워드의 유명한 논문 종교적 정서들(Religious Affections, 1746)을 안내해준 측면에서 루터포드는 성도의 생활에 있어서 감성에 대하여 핵심적인 가르침을 주었다. ‘믿음은 마음과 정서의 작품이지 지성의 작품이 아니다’라고 말하기까지 했다.
감성은 성도에게 있어서 중요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의 일에 있어서 미지근함과 냉랭함을 몹시 혐오하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일할 것을 명령하시기 때문이다.’ 심지어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함에 있어서 경건의 위대한 행동들을 가지고 있으면서 그 일들을 행함에 있어서 그리스도를 향한 온전한 사랑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헛된 것이다:
만일 당신이 하나님을 위하여 일만 마디를 말하고 그를 위하여 수백 번 싸우고, 그를 위하여 생명을 잃었다고 하더라도 주님을 섬김에 있어서 마음과 사랑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히도벨의 지혜를 사용한 것이라면 주님을 위해서 당신이 한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주님을 섬김에 있어서 단지 정서만 지녀서는 충분하지 않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에게 전적으로 고정되어 있는 우리의 모든 열정을 다 요구하시는 것이다. 왕을 향한 의무들, 부모들과 남편 아내, 자녀 및 의회를 향한 의무들은 대부분 절반 정도의 열정만 요구될 뿐이다.
그렇다면 눈에 띨 정도의 정서를 소유하고 있고 그리스도의 목을 껴안는 사람이 성도이다. 그리스도를 기뻐한다고 고백은 하면서도 열정은 다른 곳에 쏟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에 비해 성도란 자신을 그리스도를 위한 사랑으로 충만한 사람이요 하나님 한분 외에 다른 무엇을 구하지도 않으며 오로지 하나님만 경외하고 섬기며 그 분만을 사랑하기를 갈망하며 그 영혼은 오로지 그리스도 때문에 병에 걸리며 그리스도만 신뢰하는 사람이다.
이 세 번째 상태에서 선택함에 있어서 의지를 안내하는 것이 곧 정서이다. 영적 기질을 따라 선택할 것인지 남아 있는 타락의 경향에 따라 선택할 것인지는 정서가 결정하는 것이다.
정서는 바늘과 같다. 바느질과 같은 영혼의 안식이다. 바늘이 바느질을 하게하고 실을 잡아당기듯이 거룩한 정서들 역시 우리를 앞으로 밀고 예수께로 이끈다. 정서는 영혼의 기조요 낮은 부분이다. 정서들이 채워지면 모든 영혼들이 일에 착수한다. 정서에 사랑이 있을 때 영혼의 나머지 기능들이 임무수행에 착수한다. 정서에 부패가 있으면 그것은 영혼과 의지와 마음과 양심을 썩게 한다. 정서는 영혼의 발이다. 양심이 굴러가게 하는 바퀴이다. 사람의 발에 이상이 생기면 달리거나 걸을 수 없듯이 정서가 절름발이가 되면 영혼은 목발로 다녀야 한다.
세 번째 상태에서 선택문제에 있어서 의지를 안내하는 중요한 것이 정서들만은 아니다. 그것은 정서의 ‘의향’(disposition)이다. 의향이란 루터포드에 의하면 영혼의 움직일 수 있는 질량들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이것은 죄스러운 것이거나 아니면 은혜스러운 것이다. 따라서 정서가 그리스도를 위한 뜨거운 사랑으로 달아올랐을 때 은혜스럽게 혹은 하늘나라적인 기질을 따라 작동하는 것이다. 그러나 정서들이 그리스도를 향해서 냉랭하고 죽은 것이라면 그것은 죄악스러운 것 또는 나쁜 기질을 따라 작동한다. 모든 정서가 다 영혼을 끌어당기는 바늘과 같기에 거룩한 정서들만이 영혼을 예수께로 끌어당기며 나아가게 한다. 거룩하지 않고 죄 된 정서들은 정반대로 작동하는 것이다. 그것들은 영혼을 그리스도에게서 멀어지게 한다. 나쁜 기질아래서도 은혜의 습관적인 움직임이나 새로운 피조물의 작동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에서 인용한 루터포드의 말을 빌리면 그러한 상황에서 영혼은 목발을 짚고 다니는 것이다. 루터포드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인의 삶의 열쇠는 그 이후의 조나단 에드워드의 경우에서도 마찬가지로 거룩한 정서들을 얻고 지속시키는 것이다. 거룩한 정서들은 정서에 있어서 하늘나라적인 기질들 소유하고 간직하는 것으로 말미암는다. 루터포드는 다섯 가지 길을 열거하였다.
하늘나라적인 기질을 습득하는 길은
1. 첫째로,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들을 많이 음미하는 것이다. 다윗의 묵상을 음미하라. 둘째, 배우라. 셋째, 하나님의 사랑스러운 증거들을 관찰하라. 다윗은 하늘의 기질을 소유한 사람임을 입증하라. 시편 119.
2. 기도와 공부와 읽기와 논의를 통해서 하나님과 교통함을 지속하라. 약제들의 향내 가운데서 날마다 많은 시간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그에게 달싹 달라붙어 있게 될 것이다. 누가복음 24:34, 요한복음 7:45,46 아가서 2:4-7.
3. 위엣 것을 많이 생각하고 많이 구하라. 골로새서 3:1-3.
4. 성령을 귀히 여기고 그에게 순종하라. 그와 함께 일하라. 그의 감동하심을 받은 도구가 되라. 그의 이끄심에 즐겁고 기쁜 마음으로 따르라. 에베소서 4:29-30. 데살로니가전서 5:19,20. 아가서 5:8-12.
5. 부드러운 신적 빛을 종종 자각하라. 그 빛으로 자연적인 양심을 조심스럽게 다루라. 책망들과 경고에 주의하라. 그리하면 당신은 신적 기질들과 적합한 영향들의 결핍을 거의 느끼지 못할 것이다. 이사야 2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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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종합과 분석
루터포드는 거룩한 정서들이 중생 후의 상태에서 살아가는 열쇠로 간주했다. 그것들은 그리스도에게로 영혼을 이끄는 바늘이다. 그것들은 영혼을 굴러가게 하는 발이요 바퀴이다. 거룩한 정서들이 나타나지 않을 때 영혼은 목발을 짚고 다녀야 하듯 영혼이 절뚝거린다.
기독교인의 삶 속에서 정서와 그 역할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적어도 두 가지 중요한 것이 내포되어 있다. 하나는 이것이 조나단 에드워드의 종교적 정서에 대한 우리의 이해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어떤 신학교 학생들이든지 종교적 정서라는 말을 언급하게 되면 우리는 금방 조나단 에드워드를 떠올릴 것이다. 그 이유는 에드워드의 이름이 그의 대작중 하나인 종교적 정서에 관한 논문이라는 책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책은 에드워드가 정서문제를 상세히 다루고 그 역할에 대해서 잘 연구한 글임은 사실이다. 그 일을 매우 호기심을 자극하는 방식으로 했다. 그리하여 종교적 정서하면 오랫동안 그의 이름을 연상케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그 사람 이전에 몇몇 사람들도 그 문제를 다루었다는 것도 사실이다. 따라서 에드워드의 정서에 대한 견해에 영향을 미친 것에 대해서는 그리 많이 연구된 것이 없다. 윌리암 스토버는 에드워드가 그의 견해를 토마스 쉐퍼드에 주목하며 발전시켰다고 주장했다. 그는 더 나아가서 ‘종교적 정서란 책에 있는 에드워드의 특징적인 용어들은 쉐퍼드의 17세기 논문인 열 처녀의 비유에 나타나고 있다’ 라고까지 말했다.
쉐퍼드와의 연결은 스토버가 인정하듯이 분명하고 잘 알려진 내용이다. 에드워드의 정서에 대한 견해는 놀랍게도 여러 측면에서 루터포드의 견해와 유사하다는 것도 주목할 만한 일이다. 루터포드처럼 에드워드도 정서를 지성과 연결시킴으로 말미암아 동물적 열정과는 구분하는 정서들로 정의한다.
정서와 열정은 종종 동일한 것으로 말해진다. 그러나 좀 더 흔한 사용에 있어서 한 가지 다른 것이 있다. 정서는 하나의 단어이다. 일반적인 의미에 있어서 정서는 열정보다는 조금 더 확대되어 사용하는 것 같다. 의지나 성향의 격렬하고도 왕성한 활동들을 말할 때 쓰인다. 그러나 열정은 돌출적인 것들, 동물적인 정신에 영향을 미쳐 더 격렬한 행동을 말할 때 사용한다. 지성은 더욱 압도되고 정서의 명령에 있어서 덜 힘을 쓴다.
루터포드와 같이 에드워드도 믿음 안에서 성도가 신앙적으로 자라면 자랄수록 그의 정서도 보다 더 이성적이 됨을 믿었다. 성도들이 이해력의 어떤 정보로부터 더 많이 얻으면 얻을수록 지성은 어떤 영적 교훈들은 받으며 어떤 빛과 지식을 얻는다. 루터포드와 같이 에드워드도 신앙생활에 있어서 정서는 핵심적인 것으로 믿었다. 단지 일반적인 정서들만이 아니라 거룩한 정서들이다. 그는 말하기를 ‘참 종교는 대부분 거룩한 정서로 구성된다’고 했다. 거룩한 정서들 중 제일은 사랑이다. 모든 참 종교의 본질은 거룩한 사랑에 놓여있다. 루터포드와 마찬가지로 에드워드 역시 선하고 은혜롭고 영적인 정서가 있음을 믿었다. 그리고 나쁘고 죄악 되고 영적이지 못한 정서들이 있음도 믿었다. 이 설명에 의하여 우리는 우리의 모든 정서들을 거부하거나 승인할 것이 아니다. 그러나 어떤 것은 인정되고 어떤 것은 거절할 것인지에 대한 구분이 있을 뿐이다. 알곡과 쭉정이를 구분할 뿐이다. 황금과 불순물과 고귀한 것과 악한 것을 구분할 뿐이다.
루터포드처럼 에드워드도 거룩한 정서의 목적이 그리스도의 아름다움과 달콤함을 더욱 사랑하는 자가 되게 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따라서 그는 말하기를 ‘거룩한 정서를 실행하는 거룩한 사람들은 그의 거룩함의 아름다움을 위해서 하나님을 제일 되게 사랑한다. 그리고 그의 거룩의 아름다움을 인하여 그들은 그의 모든 신적 완전성을 깊이 기뻐한다.’
더 나아가서 에드워드는 우리가 루터포드에게서 발견하는 언어들과 유사한 말들을 사용하여 정서 문제를 표현하고 있다. 어쩌면 이것이 명백하게 보여 질 수 있는 것은 에드웨드의 종교적 정서들과 지혜롭고 어리석은 열 처녀의 비유에 대한 설교 시리즈 안에 나타나고 있는 그리스도에 대한 초상화 안에서 그리스도를 무한히 매력적인 결혼 배우자로 묘사하는 것이다. 다른 곳에서는 함께 사용한 주목할 만한 용어들이 있다. 에드워드는 정서의 기질들에 대하여 말하면서 거룩한 정서들, 은혜롭고 영적인 정서들로 말미암아 영혼이 움직이는 정서들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거룩한 정서들을 양산해냄에 있어서 영적이거나 초자연적인 영향들의 중요성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다.
이것이 다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은 전에 결코 본적이 없는 에드워드와 루터포드 사이에 연결점들이 있다는 것을 뜻한다. 에드워드가 루터포드에게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았든지 아니 받았는지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분명 병행하고 있는 것은 놀랍다. 적어도 에드워드는 루터포드의 글들에 대하여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는 것을 제시할 수는 있다. 그리고 그 글들에 대하여 충분히 고마워했을 것이다. 이것은 에드워드의 종교적 정서라는 책을 만들어낸 지적인 연못이 전에 상상했던 많은 것들처럼 그림자에 불과한 것이 아님을 시사한다. 조나단 에드워드의 따뜻하고 감성적인 기독교는 그에게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청교도 시대의 여러 목사들의 글에도 표현되어 있는 것임을 시사한다고 말할 수 있다. 심지어 에드워드와 동일한 방식으로 정서를 사용한 사람들에 대한 명단을 특별히 언급한다면 루터포드와 쉐퍼드에게 한정된다. 이것은 여전히 중요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리차드 십스 역시 성도의 삶에 있어서 정서의 중요성을 강조한 사람이다. 예를 들면, 루터포드나 쉐퍼드 및 에드워드를 연상케 하는 글을 진술했다. ‘종교는 주로 정서로 이루어진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께서 정서적이지 않은 예배에 관심이 없다고 주장했다. 정서에 대한 십스의 강조는 성도의 삶에 있어서 모든 단계를 통하여 감성이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을 추적한 마크 데버(Mark Dever)가 십스 목사를 ‘정서적인 신학자’(Affectionate theologian)로 별명을 붙이기까지 했다.
청교도들의 이 같은 이해는 청교도주의를 인생에 있어서 모든 즐거움을 제거하고자 계획된 운동으로 보기를 원하는 H. L. Mencken과 같은 사람들이 주장한 것들과는 명백히 반대되는 입장이다(Mencken의 주장은 청교도들이 어떤 사람들이 어떤 장소에서 행복하게 되는 것을 종종 두려워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있어서 정서의 우선권을 강조하고 있는 루터포드나 에드워드, 쉐퍼드, 십스를 살펴보면 그 같은 주장들은 전적으로 무너지는 것들이다. 모든 행복과 즐거움을 억압하기는커녕 루터포드와 그의 친구들은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들에 대하여 가지는 사람들의 행복을 그리스도에게로 돌리도록 추구하였다. 그들은 즐거움을 제거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참 즐거움을 발견하는 것에 관심을 두도록 촉구한 것이다. 그들은 기쁨을 죽이는 까다로운 자들이 아니다. 그와는 정반대로 그들은 현대 기독교 저자들이 부각시키는 용어를 빌리자면 ‘기독교 쾌락주의자’들이었다.
둘째로 루터포드의 정서에 관한 견해와 성도들의 삶 속에서 작동하는 역할에 대한 입장은 그의 설교사역에 대하여도 깊이 영향을 주었다. 만일 감성이 바늘과 같고 실과 같이 영혼을 잡아끄는 것이라면 이것은 루터포드에게 있어서 모든 목사가 그와 같은 방식으로 설교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정서에 호소하고 특히 정서를 자극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지성에 정보전달에만 중점을 두는 설교는 정서들을 자극하는 일에는 실패한다. 따라서 그의 청중들을 성화를 추구해 감에 있어서 등한시하게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리는 반드시 정교히 다듬어져서 그리스도를 향한 정서 안에서 더 사랑하도록 격려하는 측면으로 잘 전달되어야 한다. 조나단 에드워드는 후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만일 그러하다면, 참 종교는 정서에 놓여 있다. 그런고로 우리는 그러한 수단들이 갈망되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정서를 움직이게 하는 경향을 잘 사용하도록 말이다. 그 같은 책들과 말씀을 그런 방식으로 설교하는 것, 그리고 예전 사용 및 기도와 찬양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은 더욱 갈망해야 하며 이러한 수단들을 사용하기 위해 참여한 사람들의 심령 속에 깊이 영향을 줄 수 있도록 갈망해야만 한다.
이것은 왜 루터포드가 그가 행한 방식으로 설교를 했는지를 설명해 준다. 단순한 언어 사용과 생생한 언어 사용 및 감각적인 그림적 언어 사용은 의도적으로 선발되어서 그의 청중들의 정서에 미치게 한 것이다. 십스의 설교에서 그로 하여금 평범한 진리를 다채롭게 생생히 드러낼 수 있게 했던 매우 ‘효과적인’ 언어를 수용함으로서 그러한 방식으로 진리를 전달하는 것은 청중들의 관심과 의지와 정서를 종종 강력하게 자극하는 것이다.
그러나 루터포드의 목적은 단지 정서를 건드리는 것이 아니었다. 그 정서들의 기질들을 변화시키는 것이었다. 성공적인(successful) 설교는 정서를 건드린 설교만이 아니라 그들 속에서 하늘나라적인 의향들을 배양시키는 것이다. 그것은 개개인이 새로운 영적 성향이나 아직도 남아 있는 옛 사람의 기질을 따라 선택하고 행동하는 것을 정하는 정서와 기억력의 의향들이다.
그러나 효과적인 언어만으로 충분한 것이 아니다. 루터포드는 인간의 말들이 얼마나 실감 있고 감성적인 언어를 사용하든지 그 같은 말은 그리스도의 영광을 표출하는데 불가능한 것이라고 믿었다. 비록 그가 자신을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하나님의 대언자로 간주했을지라도 그는 여전히 그의 선포된 말들과 기록된 말들 자체는 그리스도에 대한 ‘추정’(guessings)에 불과하며 그리스도를 알게 하는 일에 먼 의견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인간의 말이나 능력은 그의 영광의 충만함에 있어서 그리스도를 부여잡게 하고 교통하게 하는 일에 역부족인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영광의 광채로 충만하심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신다면, 우리의 육체적 기관들을 깨시고 영혼의 기능들을 사로잡으소서. 영혼의 모든 저장고가 깨어진 담벼락과 같고 망가진 짚과 같으며 흙더미 수로에 불과하여 범람하고 무너져 내리는 것이다. 밑바닥으로부터 제거한다.
그리스도의 영광으로 영혼에 깊은 인상을 주기 위해서는 단순한 말들 그 이상이 필요하다.
3. 정서적인 신학자
루터포드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독특한 측면은 그의 경건성이었다. 루터포드는 그리스도의 아름다움과 영광으로 완전히 불탄 사람이었다(wholly consumed with the beauty and glory of Christ). 그리스도는 그에게 있어서 이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 더욱 가치 있는 분이었다. 루터포드의 다음의 설명을 생각해 보라.
피조물들의 모든 아름다움을 하나로 나타내보라. 그것들은 왕겨에 불과하며 아름다운 얼굴을 지니신 예수님께 모래알에 불과하다. 나는 세상의 모든 것을 가지는 것보다 곱상한 예수님의 얼굴 모습을 가지는 것을 더 원하였다. 열개의 세상이 가진 것보다 만 배나 더 아름다운 주님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을 원한다.
오, 얼마나 고상하시고, 유일하시며, 탁월하시고 사랑스러우시고 황홀하신 분은 예수님이시다! 에덴동산처럼 수천만 개의 낙원의 아름다움을 다 하나로 모아보라, 모든 나무들과 꽃들과 모든 향기들과, 모든 색깔들과, 모든 달콤한 맛과 모든 기쁨과 모든 아름다움과 사랑스러움을 다 하나로 모아라. 아 그 모든 것들이 얼마나 뛰어난 것들이란 말인가! 그러나 그 모든 것들도 최고로 곱고 최고로 사랑스러운 그리스도보다 낫지 못하도다. 한 방울의 빗물이 지구상의 전체의 바다와 강들과 호수들과 수만 개의 샘들에 떨어지는 것보다 그리스도가 더 아름다운 것이다.
나는 그리스도 예수님과 영광스러운 나라 10개하고도 바꾸지 않을 것이다 … 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마셨으며 만족한다. 이것이 포도주보다 낫다. 그것은 내 영혼에 있는 불이다. 지옥과 세상이 그 위에 불을 뿌리라고 하라. 그 물들이 그 불을 끌 수 없을 것이다.
나는 하늘 외에 살만한 가치 있는 것이 있는 줄 알지 못하노라. 내 자신의 마음은 그리스도와 천국사이에서 고르라고 한다면 나는 나의 축복과 더불어 천국을 팔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살 것이다.
나는 내가 당신을 보았을 때보다 (비록 그리스도가 무한히 위에 계시고 그에 관하여 말씀하신 그 모든 것들보다 더 뛰어나신 분일이지라도) 경험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더 많이 안다고 말할 수 있다. 나는 내 머리와 귀까지 다 그 분의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팔아라, 팔아라, 모든 것을 그리스도를 얻도록 팔아라! 만일 이 세상 모두가 다 균형을 잡지 못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의 무게를 잴 수 없는 것이다. 사람들과 천사들은 그 깊이를 재는데 팔이 다 짧구나! 여러분의 발을 파랗고 도금한 진흙 조각 위에 올려놓으라. 곱상한 혼합된 세상에 올려놓아라. 그리스도의 입에 입맞춤을 하는 시간이 세상의 것들에 입맞춤하는 것보다 가치 있는 것이다.
목사의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으로 사로잡혀 있으면 이것은 그 목사가 자신을 표현하는 것에 필요한 여파를 남길 것이다. 사무엘 클라크가 한번 말했듯이 ‘목사의 마음이 참으로 불붙어 있을 때 … 그것은 목사가 성도들에게 주는 말과 권면들이 생생하고 따스한 것으로 다가가게 할 뿐이다. 그것은 루터포드의 설교와 글들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흘러내리게 하고 있는 것은 하나도 이상하지 않은 것이다. 그는 그의 마음을 그의 청중들에게 전적으로 교통한 사람이었다. 그것이 그의 설교의 모든 효력과 정서의 본질이었다. 리차드 박스터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설교에는 영혼의 교통이 있다. 우리 자신들로부터 회중들로 나아가는 통신이 있다. 우리나 그들이 다 이해력과 의지와 정서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우리의 노력들이 우리의 이해력으로부터 성도들의 이해력에 이르도록 증거의 충만한 빛을 교통할 수 있는 것이라야 한다. 우리 자신의 것에서부터 나오는 교통으로 말미암아 그들 속에 있는 성도들의 거룩한 정서에 불을 붙임으로서 그들의 마음을 뜨겁게 해야 한다.
여기에 루터포드의 설교의 효력을 푸는 열쇠가 있다. 그것은 그 자신의 그리스도를 향한 불타오르는 열정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그가 설교했을 때 그것을 보았다. 그들은 그의 열정의 열기로 온 몸이 더워졌다. 그들의 정서는 그의 정서의 하늘의 기질로 인하여 타올랐던 것이다. 리차드 박스터 목사는 이점의 중요성에 대해서도 언급하였다:
형제들아! 하나님의 이름으로 여러분이 강단에 올라가기 전에 먼저 여러분의 마음을 깨우라. 그리할 때 죄인들의 심령을 깨우기에 적합한 것이 될 것이다. 그들이 깨어나든지 아니면 정죄 받든지 둘 중의 하나뿐임을 기억하라. 졸리게 하는 설교자는 조는 청중들을 거의 깨울 수 없다. 비록 당신이 하나님의 거룩한 것들을 준다고 할지라도 그리고 말로서 최고의 찬사를 올린다 할지라도 그 일을 냉랭하게 한다면 여러분은 문제에 있어서 당신이 말한 것을 취소하는 방식으로 전달되어질 것이다.
이것은 루터포드에게는 하등의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는 그리스도의 위엄에 매료되어 있었고 다른 사람들이 그가 행한 것처럼 그리스도를 알게 되기를 갈망했다.
오, 만일 내가 내 주 예수를 가장 달콤하고 사랑스럽고 갖고 싶은 분으로 만들 수만 있다면, 유대인들이나 이방인들 모두에게 제일 공평하신 분이심을 드러낼 수만 있다면! 오, 내 하늘의 부분이 그 일을 위해 달려가게 하라. 그리하여 주께서 내 입술을 그의 도구가 되어 사랑에 대한 주님의 모든 격려 안에서 그리스도를 제시하게 하소서. 그의 사랑과 덕과 달콤함과 견줄 수 없는 영광을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의 눈과 심령에 제시할 수 있게 하소서! 그러나 이 일에 누가 능히 할 수 있단 말인가? 오, 천사들의 혀로 나를 도와주시어 그리스도를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는 분으로, 수천수만의 사람들보다 더 흠모할만한 분으로 만들게 하소서! 오, 이 세상이 얼마나 그리스도의 작은 모습만 보는지 모른다! 그들이 그리스도의 사랑으로부터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 그리스도 안에는 피조된 눈으로 한 번도 보지 못한 사랑과 미와 달콤함이 있다. 나는 모든 사람들이 그의 영광을 알기를 원하며, 나는 신랑의 방에 많은 사람들을 그의 아름다움을 보도록 들여보내고 싶다. 그의 높고 깊고 넓고 한이 없는 사랑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고 싶다! 오, 온 세상으로 주께 나와 그리스도를 보게 하라. 그리하면 그들은 내가 그리스도에 대해서 말한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오, 만일 내가 바다와 같이 넓은 그의 사랑을 위하여 잡힐 전당물이 있었다면 나는 그리스도를 더 많이 얻기 위해서 달려왔을 것이다. 그를 갈망하며 사모한 것에 만족을 주시며 내가 온전히 그를 소유하기까지 그것을 더욱 증폭시켜나갔을 것이다!
루터포드의 서한집이 모든 시대의 성도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이유는 그것이 그의 마음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그 서신들은 그리스도와 사랑에 빠진 한 사람의 마음을 드러낸다.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에 타버린 한 사람의 마음을 보여준다. 그 서신들은 다윗의 말에 있듯이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나음을 안 사람의 마음을 드러낸다(시 63:3). 이것이 바로 그의 설교 역사에 많은 사랑을 받은 이유임에 의심의 여지가 없는 이유이다.
4. 설교한 것을 실천한 사람
루터포드는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서 그 어떤 것보다 나은 분임을 믿었다. 실로 수천 개의 세상을 다 준다 해도 그리스도와 바꿀 수 없는 분임을 알았다. 이것은 희생이나 헌신, 핍박과 고난이 무엇이든 그가 그리스도를 얻는 것에 비해 너무나 보잘것없는 것들을 의미했다. 그러나 이것은 또한 이 세상에는 그리스도를 찬양하며 그리스도에게 감사할 수 없게 할 만큼 그의 마음을 끄는 것이 아무 것도 없음을 의미하였다.
분명히 그것은 오, 가장 달콤한 주 예수여,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쩌다가 내가 5천개의 조각으로 분할되고 부서져버린 진흙 덩어리가 되었단 말인가! 그 모든 파편이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졌었더라면, 그 모든 조각이 하늘에서 주님을 노래하는 많은 혀였었더라면, 사람들과 천사들 앞에서 영원히 찬송하는 혀들이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므로 만일 내 고난이 선과 찬양과 그리스도의 영예를 부르짖는다면 나는 기꺼이 값을 치르리라!
이런 방식으로 루터포드의 삶은 그의 설교가 행한 동일한 메시지를 설교했다. 혹은 본장의 제목처럼 그가 설교한 대로 그는 실천한 사람이었다.
이것은 루터포드의 서한집이 수세기를 걸쳐 읽혀지고 있는 또 다른 이유이다. 그 서신들은 그가 당한 엄청난 고난과 오랜 시련 차원에서 그리스도의 영광과 위엄을 지극히 높여드린 것들이다. 한 성도로서 나는 루터포드야말로 내가 한창 고난을 당하고 있을 때 내 영혼에게 그리스도의 탁월한 가치에 관하여 말하기에 가장 적합한 사람임을 발견한다. 한 목사로서 나는 동일하게 그야말로 내 자신의 시련의 불 가운데 있을 때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사역을 할 것인지를 잘 말해줄 수 있는 자격자임을 발견하다. 만일 J. C. Ryle이 마음은 기독교에 있어서 ‘주된 것’이라고 말한 것이 옳다면 성도의 주된 업무는 그들의 마음을 잘 돌보는 것이다. 목사의 주된 업무는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잘 돌보는 것이다. 성도들과 목사의 주된 일은 마음을 다루는 것이다(heart-work).
루터포드가 그의 마음이 깨어졌을 때, 마음을 다룸에 있어서 간수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알았었기 때문에 그는 오늘날에도 우리에게 말하는 유일한 발판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간단히 말해서 우리 자신을 그리스도에게 쏟는 것이다. 사람들에게 삶이 창창할 때 그들의 구원을 위해 전심으로 간청하는 것이다. 그러나 삶이 다 쇠하여 갈 때 그같이 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다. 여러분의 마음이 깨어지고 있을 때 여러분의 마음을 어떻게 그리스도에게 고정할 것인가? 여러분의 마음이 깨어지고 있을 때 여러분은 어떻게 사람들을 온 마음을 다하여 그들의 구원을 위해 힘쓰라고 설교하고 간청할 것인가? 암에 걸렸을 때 여러분은 어떻게 할 것인가? 아이가 집을 나갔을 때. 혹은 자식이 죽었을 때 어떻게 할 것인가? 당회에서 장로들이 여러분의 안건을 거부했을 때 어떻게 할 것인가? 교회가 여러분이 기대한 것만큼 성장하지 않았을 때 어떻게 할 것인가? 침체가 찾아왔을 때는? 여러분의 수고에 별로 열매가 보이지 않을 때는? 여러분이 귀하게 여기는 것들이 빼앗겨져 버렸을 때는? 어떻게 여러분들이 매 주일마다 생명을 위하여 간청할 것인가? 루터포드는 대적들에 관하여 우리에게 말할 자격이 충분하다. 그는 우리 구세주처럼 슬픔과 탄식으로 가득한 사람이었다. 그는 고난당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았다. 그리고 그는 그 자신을 교회를 위하여 온전히 쏟아 부었다. 그의 조언 몇 가지를 들어보라.
나는 우리의 모든 고난이 다 주님의 손으로부터 나오는 것임을 찬양하노라. 그는 그 문제들 속에 설탕을 섞어 보내신다. 하늘의 무게 있는 것을 포함시켜 보내신다. 고난당하는 성도들 위에 임하는 영광의 영을 지옥의 맛이 결코 없는 한 잔 속에 넣으신다.
가시는 땅이 배출하는 가장 저주스럽고 속상하고 짓궂은 것 중 하나이다. 그러나 그로부터 땅이 가지고 있는 가장 향기로운 꽃 중의 하나요 눈에 가장 기쁨을 주는 꽃 중의 하나인 장미가 자란다. 여러분의 주님은 여러분의 고난으로부터 기쁨과 낙을 만들 것이다. 그의 모든 장미는 향기를 푹푹 풍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의 거룩한 손이 여러분의 코에 갖다 댈 때까지 기다려라. 만일 여러분이 십자가 밑에서 지금 위로를 받기를 원한다면 많이 기도하라. 왜냐하면 그 시간에 여러분의 믿음은 그리스도에게 키스하며 그는 여러분의 영혼에 키스할 것이다.
우리같이 어리석은 자들은 우리 자신의 선택의 십자가를 가지고 있다. 우리의 몹시 지겨운 것에 설탕을 친다든지, 우리의 불을 식힐 수 있다. 우리의 죽음과 무덤을 생명의 열기로 덥게 할 수 있다. 그러나 수많은 자녀들을 영광으로 인도하시고 한명도 잃지 않으신 그 분은 우리의 최고의 스승이시다. 내가 아플 때 그는 나를 지키시는 자요 위로하시는 분이기를 소망한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나의 부드러움과 연약함인 것을 안다. 뱃멀미가 날 때 누가 나를 항구로 인도해 줄 수 있는가? 비록 내가 그토록 사모하는 나라에 곧 도달할 것을 알지라도 그리고 결코 제거되지 않음을 알지라도 말이다.
여러분의 고난들은 영원한 것이 아니다. 시간은 그것들을 끝내고 말 것이다. 고로 여러분은 여호와의 구원함을 얼마 안가서 보게 될 것이다. 그의 사랑은 주무시는 법이 없다. 여러분을 위하여 여전히 작동하신다. 그의 구원은 멈추는 법도 없고 오래 머무는 법도 없다. 주님을 위한 고난은 하늘로부터 나온 가장 고귀한 십자가이다. … 하늘을 향하라. 하나님이 구하시는 물의 다른 쪽을 바라라. 이것이 여러분의 십자가에서 피어나는 열매요 꽃이요 활짝 핀 꽃들이다. 여러분은 한 때 죽은 사람과 같을 수 있다. 흙에, 조국에, 재물에, 친구들에게, 아내에게 자녀들에게 피조된 모든 것들에게 죽은 자가 되라. 왜냐하면 그것들은 영혼의 사랑이 거처할 의자도 바닥도 없기 때문이다. … 주께서 여러분의 악함과 문제들을 철저하게 두르게 하라. 여러분의 십자가를 천거함으로 그 모든 것들을 떨어버려라. 여러분의 용광로를 그에게 드려라. 그는 그 자신의 철을 다 녹이실 수 있는 분이시다. 그의 용광로를 가지고 무엇을 해야 할지를 잘 아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의 불이 여러분의 깡통, 놋쇠 및 찌꺼기를 가지도록 기꺼이 여러분의 마음을 주님께 맡겨라. 여러분이 물위를 통과할 때는 이것은 여러분이 태어나기 전 수 백 년 전에 지나간 어제의 것이 될 것이다. 영광의 잔은 이 모든 기억력을 제거할 것이다. 그것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 것이다. 여호와는 마침내 여러분에게 선한 것을 행하시려고 일어서신다. 그의 구원의 믿음을 쓰라. 여러분에게 다가오시는 주님을 보라.
믿음은 놀라우신 주님께 입맞춤을 하도록 가르칠 것이다. 고로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인정하라. … 유한한 인간의 능력 밖에 계신 그 분을 인정하라. 그는 봉우리의 꽃망울을 뽑아버릴 수 있으시고 그 일에 대해서 결코 부끄러워하지 않으시는 주권자 하나님을 인정하라. 만일 우리의 주님께서 그의 사랑하는 장미를 하나 뽑으시고, 수확 전에 시큼하고 익지 않은 푸른 열매를 따버리신다면 누가 그에게 도전하겠는가?
그의 십자가는 달콤하다. 달콤하다, 가볍다, 가볍다. 그의 멍에는 쉽다. 오, 열 번의 죽음을 통해서 아버지의 집에 한 계단식 올라가는 것이 얼마나 신나는가? 진리를 위하여, 알려지지 않은 분 때문에, 온전히 사랑하는 그 분을 위하여, 유명한 나무요, 가지로 불린 사람이요, 만유의 대장이시며, 사람의 아들들 중에 가장 아름다우신 분이신 그 분을 위하여 한 발자국 한 발자국 가는 것이 얼마나 달콤한 일인가! 보이지 않은 즐거움과 마음에 숨겨진 타오르는 사랑의 열기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참여하는 자들 안에 얼마나 많이 있는지! 환영하노라, 환영하노라 달콤하고 달콤하고 영광스러운 그리스도의 십자가여! 환영합니다. 당신의 가벼운 십자가와 더불어 달콤한 예수님을 환영합니다. 당신은 내게로부터 나의 모든 사랑을 얻으셨나이다. 당신이 얻으신 것을 간직하여 주소서!
나는 전에 내가 잘 보지 못했던 하나를 발견했다. 성도들이 시련을 당하고 낮춰질 때 작은 죄악들이 큰 소리를 지르는 것이다. 양심 안에서 전쟁의 소리들이 외쳐지는 것이다. 유복한 양심 속에 하나의 교황이 있다. 분배하고 나가게 하고 들어오게 하는 하나의 교황이 있다. … 우리가 다스릴 때 그리스도의 손에서 죄 용서를 받는 일에 얼마나 소홀히 여기는지! And all is but child's play till a cross without begets a heavier cross within, and then we play no longer with our idols.
그의 백성들이 실크와 장미의 섭리를 가질 수 없을 때 그들은 주께서 그들을 위해 배어낸 것으로 만족하라. 동료 없이 천국에 가는 일은 없을 것이다. 여러분 앞서 간 사람들의 길에 대하여 주의하고 있을 것이다. 그들은 피와 고난과 많은 역경을 통과한 사람들이다. 아, 우리의 대장, 낙원의 문지방으로 들어가신 그리스도께서도 죽기까지 피를 흘리셨다. 나는 여러분이 몸을 구푸리는 것을 배웠다는 것 외엔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여러분이 십자가의 거친 나무 위에서 자라고 있는 사과들과 달콤한 열매들이 그 열매들이 달리기까지 많은 고초를 겪었던 만큼 달콤한 열매들이 되어 매달려 있음을 발견했을 것이다. 특히 그리스도께서 완전한 십자가를 지셨음을 생각하라. 그의 성도들의 십자가는 작고 값싼 십자가를 지는 것뿐이다. 사도가 말했듯이 그리스도의 “남은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루터포드가 그와 같은 말을 했을 때 그것들은 케케묵은 이야기들이나 또 어떤 어려움 따위에도 끄떡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힘든 진리들보다 더한 것들로 다가온다(이것들은 우리가 아이들에게 좋기 때문에 식사시간에 먹으라고 애들에게 주는 채소와 같은 것이다). 그것들은 그것들 자체로 전해지고 있다. 고난의 용광로에서 습득한 교훈들로 다가온다. 대적자들이 설치고 있는 가운데서 신앙의 산 간증들이다. 시련과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감동적인 모범으로 다가온 것들이다. 그가 설교한 것을 실천한 것들로 다가온 것이다.
5. 결 론
루터포드는 설교에 있어서 목사의 목적은 그의 청중들의 영혼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스러움을 심겨주는 것이다. 이것은 단지 강의에서 하는 것처럼 지성만을 건드리는 것을 뛰어넘는 설교를 통해서 달성된다. 전 영혼을 만지는 것이어야 한다. 지성과 의지와 정서를 아우르는 설교여야 한다. 루터포드의 평가에 있어서 이 기능들의 가장 중요한 것은 정서(affections)였다. 정서는 영혼을 이끄는 바늘이었다. 바늘과 실과 같은 것이었다. 정서는 그것이 거룩할 때 영혼을 그리스도에게 이끌든지 아니면 정서가 죄스러우면 영혼을 그리스도에게서부터 멀리 달아나게 한다. 어떤 길이든, 정서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열쇠이다. 정서가 열쇠이기 때문에 루터포드는 영혼들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스러움을 심어주기 위해서 설교하기를 추구했던 것이다. 이 일을 가장 잘 할 수 있는 길은 설교의 정서적인(affectionate) 스타일을 도입하는 것이다. 이 일을 루터포드는 설교의 기술을 배우고 실천함으로 말미암아 습득했다. 예를 들면 그는 평범하고 단순한 언어를 사용했다. 그리고 그림언어를 사용했다. 부부의 동침에 대한 감각적인 형상적 언어를 사용했다. 전달 방식에 생기를 불어넣는 언어를 사용했다. 그 자신의 영혼을 성도들의 영혼들과 교통하는 길을 추구하면서 그렇게 한 것이다. 루터포드의 설교는 단지 정보전달 그 이상의 것이 함축되었다. 비록 정보전달이 그의 설교의 명백한 한 부분이요 꾸러미였을지라도 그 이상이었다. 그의 설교는 그 자신의 경건을 전달했다. 그리스도의 가장 뛰어난 영광에 대한 그 자신의 압도적인 사랑을 전달했다.
루터포드의 설교의 두 가지 독특한 측면은 설교의 목적과 그의 경건성이었다. 이 두 가지는 루터포드를 루터포드로 만든 합성이었다. 로버트 워드로의 말을 빌리면 그것은 ‘그의 시대에 혹은 교회의 전 시대에 가장 감동적이고 열정적인 설교자중 한 사람이 되게’ 한 것이다.
이 모든 것으로부터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한 가지 우리가 배우는 것은 설교자의 설교와 교회의 영적 상태 사이에는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존 브라운은 이 개념을 그가 하나의 역사적인 사실로 말했을 다음과 같이 말했을 때 지적했다.
설교자의 메시지와 교회의 영적 상태는 함께 흥망을 가진다. 생명이 설교자에게서 나가고 없을 때 얼마 되지 않아서 교회에서도 생명이 나가게 된다. 다른 한편으로 설교자의 입술에 생명의 활기찬 메시지가 있게 될 때 그 결과로 교회 자체 안에도 활기찬 생명이 나타나는 것이다.
루터포드의 설교에 대하여 상고하면서 우리는 존 브라운의 주장을 조정하고 싶은 유혹에 빠지고 싶을지 모르겠다. 브라운의 주장에서 ‘생명’을 ‘거룩한 정서’로 대체하고자 하는 유혹말이다. 그러면 그 인용은 아마 이렇게 될 것이다.
설교자의 메시지와 교회의 영적 상태는 함께 흥왕한다. 설교자에게서 거룩한 정서가 메말랐을 때는 얼마안가 교회에서도 거룩한 정서가 사라지게 될 것이다. 거룩한 정서가 교회에서 사라지고 없을 때는 그것과 더불어 그리스도에 대한 가장 탁월한 영광을 위한 사랑도 사라지고 없고 그 자리에 냉담함이 차지하게 될 것이다. 심하면 그리스도를 경멸하기까지 할 것이다. 한편 설교자로부터 거룩한 정서의 교통함과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스러움이 흘러나왔을 때는 그 결과로 교회 자체 안에 생동감이 넘치는 상태가 찾아올 것이다.
우리는 -적어도 미국에서는- 설교들이 훈계적인 것들로 전락되고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다른 사람들의 필요를 느끼게 해 주는 것을 전달하려고 물을 주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비디오테이프와 드라마 같은 것들이 강단을 대체해 가고 있다. 오늘 교회가 왜 이 모양인지 놀랄 일이 아니잖은가? 그 너머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 당연하지 않겠는가? 아니면 단지 교회 주변에 둘러 있는 문화적인 것으로 치부하고 말 것인가? 우리는 복음 진리를 정서적으로 설교할 수 있는 설교자들이 필요하다. 설교의 기술을 아는 것만이 아니라 마치 샘물에서 솟아나듯 그들로부터 흘러넘치는 차원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에 온전히 타버린 설교자들이 필요하다. 그러면 우리 교회에 미치는 파문을 보게 될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교회 안에 생동감이 있는 상태를 보게 될 것이며 보다 나은 현 시대의 종교개혁을 보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기를 소망한다. 아멘!
- 젊은 개혁주의자들의 아지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