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봉사 눈 뜨는 날 / 양선례
광양 오일장에 다녀왔다. 서울 사는 미는 지금이 제철인 취나물과 두릅, 광주 영이는 서대와 취나물, 순천 남이는 깐 마늘과 바지락을 샀다. 나도 제사에 쓸 생선과 얇게 포를 뜬 명태 전감, 그리고 나물을 바구니에 담았다. 당초 여행 계획에는 시장 구경이 없었다. 그런데 내가 쓴 <와글와글 광양 오일장> 그림책을 읽고는 친구들이 만장일치로 장소를 바꿨다.
작년에 그림책 작가가 되었다. 몇 년 전부터 시에서는 지역의 인물이나 특산물, 자연환경, 지역의 지명에 얽힌 이야기를 책으로 만들었다. 지금껏 열 권쯤이 나왔는데 내가 활동하는 단체의 회원들이 주로 작업에 참여했다. 그러다가 작년에 내게도 차례가 왔다. 그림책을 읽거나, 읽어 주는 일은 자주 했으나 작가는 처음이라 어려웠다. 함께 작업하는 동료 세 명, 그리고 이 사업을 추진하는 문화도시사업단 관계자와 여러 차례 만나서 의견을 나눴다.
글감을 고르는 일부터 시작되었다. 서너 개의 글감 중 시장을 골랐다. 어려서부터 5일에 한 번씩 장이 열리는 곳과 가까이에서 살았다. 광양읍 오일장은 백운산과 섬진강, 그리고 남해를 끼고 있어서 산과 강, 바다에서 나는 산물이 풍부하다. 최근에는 비가 와도 거뜬히 장을 볼 수 있게 지붕을 씌우고 주차장을 넓혀서 편리하다. 전과 국수, 팥죽, 족발 등을 먹을 수 있는 먹거리 시장도 잘 형성되어 있다. 다른 곳이 도시의 쇠락으로 그 규모가 줄어든 데 반해 광양은 여전히 손님과 상인으로 붐빈다. 나는 그곳을 터전으로 살아가는 사람들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어느 토요일, 취재에 나섰다. 요즘처럼 개인 정보가 강화되는 시절에 불쑥 찾아가서 질문을 하는 게 쉽지는 않았다. 아는 사람을 먼저 공략했다. 친정 동네서 생선 가게를 오래 했던 분을 찾았다. 단골인 데다 돌아가신 엄마와도 잘 알기에 금방 마음을 열었다. 선애 엄마가 주인이라서 가게 이름도 ‘선애 수산’이다. 스물세 살 때부터 생선 장수였던 친정엄마를 따라 일하기 시작한 게 벌써 40년이 되었다고 했다. 지금은 아들과 며느리까지 함께 가게를 꾸린다. 아들은 멀리 통영이나 부산까지 가서 싱싱한 생선을 받아온다. 서대, 양태, 병어, 민어, 조기 등의 말린 생선을 주로 판다.
그분의 소개로 ‘장터 국수’ 주인과도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스물여덟 살 때부터 친정엄마를 도와 시장에 나오기 시작했단다. 새벽 3시 50분에 집에서 나와 육수를 끓이고, 팥죽 재료를 손질하여 여섯 시부터 장사를 시작한다. 불 옆에서 하루 종일 일하기에 여름에는 땀이 비 오듯 흐른단다. 또 죽이 쉬어 버려 속상할 때도 있다고 했다.
두 사람을 인터뷰하고 나니 조금 자신이 생겼다. 동의를 구하고 녹음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세 번째 들른 곳은 뻥튀기 가게였다. 이름으로만 기억하는 중학교 동창 이름을 팔았더니 쉽게 말문을 열었다. 동창의 오빠가 가게 주인이었다. 그는 텔레비전에도 여러 번 소개되어선지 대답도 막힘이 없었다. 열두 살 때부터 아버지한테 기술을 배워 무려 47년이나 일했단다. 떡국, 옥수수, 결명자, 율무, 돼지감자, 작두콩 등 우리가 흔히 아는 식품 외에 머윗대 뿌리, 도꼬마리, 토복령, 겨우살이 등의 약초도 가능하단다. “사람만 안 되고 다 튀깁니다.”는 말을 웃지도 않고 말했다.
‘일성 방앗간’에 갔다. 그곳은 여고 선배이자, 오래전 옆 반 학부모가 주인이라서 목적 달성이 쉬우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하필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몸이 안 좋아서 두 달간 타지역으로 요양을 갔단다. 사정을 설명하고, 선배의 친정엄마에게서 가게에 얽힌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오일장의 방앗간 중 가장 오래된 곳으로, 48년 전에 바로 그 자리에서 가게를 열었단다. 잠시 다른 사람에게 세를 내준 적도 있었으나 지금은 3대가 함께 일하고 있다고 했다.
번듯한 가게가 아니라 장날에만 오는 뜨내기 노점상 이야기도 듣고 싶었다. 싸전을 따라 가면 집에서 키우거나, 산에서 캔 채소를 파는 상인들이 줄줄이 앉아 있다. 대부분이 나이가 많은 할머니다. 취나물, 두릅, 죽순, 쑥, 고사리 등의 푸성귀를 소량으로 내놓은 곳이 많았다. 눈곱만큼의 인연이라도 있으면 말 붙이기가 쉬울 텐데, 아쉽게도 아는 얼굴이 없었다. 인상이 가장 좋은 사람을 찾았다. 손님인 줄 알고 반색하는 할머니의 기대를 배반할 수 없어서 취나물 한 소쿠리를 먼저 사고 말을 붙였다. 오전에는 교회 갔다 오느라고 이제야 나왔다는 할머니는 여든여덟이라고 했다. 연세는 많았지만 또랑또랑하게 대답했다. 쉰네 살에 남편이 돌아가시자, 그때부터 시장에 나와 장사했단다. 혼자서 5녀 1남을 훌륭하게 키워서 ‘장한 어머니 상’도 여러 번 받았으며, 자녀 중에 목사님이 두 명이나 된다고 자랑했다.
책이 나오자, 초등학교 2학년 딸이 있는 교무부장에게 한 권 주었다. 읽어 줬더니 딸아이가 오일장에 직접 가보고 싶다고 했단다. 장날이 든 휴일에 온 가족이 갔는데, 지나면서 볼 때와는 다르게 시장의 규모가 커서 놀랐다고 했다. 책을 쓴 의도와 맞아 떨어져서 기뻤다. 그런데 오늘 친구들도 똑같은 반응을 보인 것이다.
그림책은 관내 초등학교에 배부되어 수업 보조 자료로 활용된다. 아이들에게 친숙한 그림책으로 지역을 소개하니 교육의 효과가 더 높을 것이다. 오래전부터 글 쓰는 선배 몇이 학교에 있으니 글감 찾기가 유리하다며 그림책이나 동화책을 써 보라고 권했다. 그런데도 선뜻 시작할 용기가 없었다. 작년에 우연히 그 첫발을 뗐다. 올해는 그 여세를 몰아 동화 쓰는 법을 1주일에 두 시간씩 줌으로 배우고 있다. 수필과 또 다른 영역이라 아직은 고전 중이지만 첫술에 배부르랴. 여러 학기 이어지면 심봉사 눈뜨는 날이 오리라. 그때의 나를 미리 응원한다.
첫댓글 와! 수필뿐만 아니라 그림책도 내셨군요. 동화책도 잘 쓰실 것 같습니다. 저도 응원할게요.
교장 선생님 동화 작가 충분히 자격있습니다. 나와 함께 근무했던 도교육청 아무개 과장도 교장으로 재직할 때 동화 책을 내고 등단한 것으로 봐서 양교장님도 충분히 할 수 있습니다. 응원합니다.
이제 시작입니다.
응원, 고맙습니다.
@중산
네. 그 분이 누구인지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이번에 도에 들렀을 때도 한동안 이야기 나눴답니다.
응원, 고맙습니다.
우와!! 동화작가 부럽습니다.
도전하기에 늦은 나이는 없는 것 같습니다.
벌써 그림책을 내셨네요. 나 같으면 가정과 학교 일만해도 감당하기 어려울 것 같은데 동화책도 쓰시고
대단하십니다.
그러게요. 그래서 오늘 아파 버렸습니다.
조금 쉬어야겠지요?
양 작가님!
나 그림책 안 줬는데 한 권 받아야 겠어요. 그리고 심봉사 벌써 눈 떴는데 무슨 말씀을요.
네. 인터뷰해 준 시장 상인들한테 주다 보니 여유가 없었네요.
그래도 선배님께는 드려야죠.
광양읍 오일장이라고요? 거기에 우리 엄마가 생선 가게를 하고 있다니요? 기회가 되면 꼭 한번 가 봐야겠네요.
그림책은 사서 볼게요. 이 글로 보아 재미있겠어요.
양 선생님은 역량이 무한하십니다.
하하하.
문해력 좋은 박 선생님이 왜 이러실까요?
우리 엄마가 시장에서 생선 장수하고 계시면 얼마나 좋을까요?
돌아가신 지 벌써 3년이나 된 걸요.
@이팝나무 '선애 수산'의 선애 엄마.
제 이름이 선애라는 것을 잊으신 건 아니죠?하하
선생님, 어머님 이야기야 글에서 몇 번이나 본 걸요.
이 주 전 주말에 어머니께 가서 놀아 주지 않고 노트북을 놓고 글쓰기 숙제를 하려고 했지요. 우리 어머니 옆에서 이야기하다가 방해하지 않겠다고 해 놓고, 또 이야기하고 싶어하는 걸 보다가 선생님이 어머니와 보낸 주말 주택에서의 마지막 밤에 늦도록 스탠드 등 켜 놓고 책을 봤다는 말이 떠올라 노트북을 덮었답니다.
@박선애 맞다.
그러시구나.
그래서 엄마셨구나.
이제 보니 제가 문해력이 뒤졌네요.
제 동생도 양선애예요.
광주서 초등학교 교사지요.
이래저래 인연이 많습니다. 하하.
노트북 덮은 거 칭찬합니다!
우와! 동화작자 멋지시네요. 저도 캄캄한 세상에서 희망의 빛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 수필방 선생님들은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습니다.
도전!
<와글와글 광양 오일장> 그림책, 제목이 좋습니다.
오일장에는 사람 사는 풍경이 있죠.
수필가, 동화 작가로 독자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펼치는 양선생님의 행보에 박수를 보냅니다.
제목이 괜찮지요?
시장 조사 야무지게 했거든요.
칭찬, 고맙습니다.
수필 쓰는 선생님은 사서 고생하시는 분,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