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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의 반지성주의>> 리처드 호프스테터 지음. 유강은 옮김. 교유서가
“마국의 반지성주의는 오늘의 한국을 비추는 거울이다” 김경집(인문학자. 전 교수)
2022년 3월 9일 대통령 당선자로 윤석열이 확정되자 그동안 미루고 미뤄왔던 이 책을 꺼내 읽기로 하였다. 내 마음 한편에는 윤석열의 당선이 ‘반지성주의“와 밀접한 연관성이 있다고 생각했지 않았나 싶다. 이 사건은 단지 정책이나 공약이나 비젼의 문제가 아니라 더 깊은 층위의 원인이 아닐까 싶었다. 하지만 대통령은 취임사에서”진실이 왜곡되고 , 각자가 보고 싶은 사실만을 선택하거나 다수의 힘으로 상대의 의견을 억압하는 반지성주의가 민주주의를 위기에 빠드리고 있다“을 토로했다. 서로가 서로를 ’반지성주의자‘라고 하고 있다. 반지성의 ’진실‘을 찾기 이전에 반지성주의가 만연해 있긴 있구나 하는 생각이다. 여기에서 ’반지성주의‘는 비지성 즉 무지와 무식과는 다른 의미이다. ’지성‘에 대한 반감과 ’지성‘에 대한 적의다. 이 책은 ’반지성주의‘에 대한 최초의 연구인지는 모르겠지만 ’반지성주의‘에 대한 가장 탁월한 연구서이자 원조라고 하니 반지성주의에 대해 궁금한 자는 먼저 읽어 볼 가치가 있다. 물론 반지성이든 비지성이든 그 따위가 무엇이 중요한걸까? 하는 생각이라면 아무런 가치가 없는 종이뭉치일 뿐이다. 호프스테더는 이 책의 저술 배경으로 두 가지를 내세우고 있다. 1950년대 미국의 반공주의(매카시 현상)와 거기에 열광하는 대중과, 1952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지성을 대표하는 스티븐슨이 속물근성을 대표하는 아이젠하워 대결에서 아이젠하워의 압승을 지켜보면서라고 한다. 나는 한 사람의 독자로서 이 책을 1950년대 미국에서 발생한 어떤 사건으로 읽지만은 않았다. 지금의 한국 사회를 읽는 중요한 개념으로 이 책을 읽었고 저자의 관점과 주장을 현재에 대입해 보면서 읽었다. 물론 반지성주의라는 개념으로 현실을 우격다짐으로 재단할 수는 없지만, 이 개념이 없다면 또한 현실을 이해할 수 있는 실마리 하나를 버리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저자는 ’반지성주의‘에 대해 학문적 정의를 내리지도 않고 엄격한 논리적인 개념을 제시하지도 않는다. ’반지성주의‘는 개념화하거나 정의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기도 가장 일반적인 정의를 내린다. 나는 이 분야에 지식은 없지만 읽어 본 느낌에 의지하여 감히 말해본다면 한국 사회도 상당한 ’반지성주의‘적 태도와 경향이 있음을 부인할 수 없지 않을까 싶다. 이 책도 마찬가지고 나 또한 그렇지만 나는 ‘반지성주의’를 나쁜 태도나 극복해야할 문제라거나 ‘악’으로 결코 생각지 않는다. 하나의 사회 현상으로서 들여다 볼 뿐이다. ‘지성’에 열광한다면 그런 이유가 있는 것처럼, ‘반지성’이 유행한다면 또한 그런 이유가 분명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이렇게 결정 할 수도 있다. 우리 시대에 필요한 삶의 태도와 자세는 ‘지성’이 아니라 ‘반지성’이다.
/내가 ‘반지성적’이라고 일컫는 태도나 사고에 공통되는 감정은 정신적 삶과 그것을 대표한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에 대한 분노와 의심이며, 또한 그러한 삶의 가치를 언제나 얕보려는 경향이다. /
저자는 이런 일반적인 정식화는 과감한 정의만큼 유용할 것이라고도 한다. 연구 과제의 방대함에 비하면 ‘반지성적“에 대한 정식화는 소박하고 일반적인 정의를 벗어나지 못하지만, 어떻게 보면 가장 바람직한 정리일 수도 있겠다 싶다. 지성과 반지성을 나누는 기준이나 준거를 세운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대신 저자는 엄밀한 역사적 방법이나 논리적 접근이 아니라 인상주의적 방법을 통해 ’반지성주의‘를 포착하고자 한다. 반지성주의는 무지나 무식이 아니라 지성에 대한 집단적 분노나 의심이며, 사회학적 연구 주제로 삼을만큼 하나의 흐름을 형성하고 있다고 본다. 상대가 자신들의 생각이나 자세나 태도를 반지성주라고 공격하면 화를 낼거라고 생각하지만, 이런 태도는 ’반지성‘을 모욕으로 받아들일 때만이 그렇다. 이런 반응은 최소한 지성의 가치를 믿고 있다는 반증이다. 반대로 ’반지성주의‘는 ’지성‘을 조롱하고 공격 대상으로 삼는 태도나 자세를 이르는 용어로 이해해야 맞아 보인다. 뭐 일종의 ’너 잘났다‘ ’아는 게 많아서 좋겠다‘같은 조롱이 해당되지 않을까도 싶다. 한국 사회에서는 늘 표면적으로는 ’지성‘을 높이 평가하는 것 같은 사회 분위기가 있으니, ’지성‘을 조롱하고 분노하는 태도나 자세가 조금 낯설어 보일 수도 있으나, 겉으로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닐 수도 있다. 어찌되었든 지성과 반지성을 구획 짓거나 명확하게 나누는 일은 불가능해 보인다. 그래서 저자는 인상주의 방법을 선택할 수밖에 없어 보인다. 이 책을 읽을 때 ’반지성주의‘가 도대체 무엇인가라고 묻기 보다는 /중요한 것은 특정한 태도와 운동과 이념의 역사적 경향을 파악/하는 것이며, 구체적인 사례와 경향을 따라가야 하지 않을까 싶다. 나야 이 책의 가치를 평가할 수는 없을지라도 ’반지성주의‘에 대한 탁월한 지성의 분석이나 연구서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고 한다.
/반지성주의가 우리의 사고방식에 큰 영향을 끼칠 수 있었던 것은 많은 인간적이고 민주적인 감정을 사람들에게 불어넣은 복음주의 신앙에서 힘을 얻었기 때문이다. 반지성주의가 정치의 세계로 진입할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이 평등을 향한 우리의 열정과 결합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반지성주의가 교육계에서 막강한 세력이 된 것은 교육에 관한 우리의 신념이 복음주의에 입각한 평등주의였다는 사실과 어느정도 관련이 있다/
저자는 이 세 분야에서 일어난 반지성주의의 태도나 자세와 역사적 맥락을 사건을 해결하는 탐정처럼 파고든다. 이외에도 기업의 실용주의와 실리주의 문화의 우위, 원시주의 사상의 영향을 다루고 있고, 미국의 초기 개척의 역사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미국의 실용주의 철학자로 일컬어지고 미국 교육 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듀이의 사상에서도 반지성주의의 영향을 읽어낸다. 나는 개인적으로 미국의 복음주의 신앙과 반지성주의의 관계와 듀이의 교육철학에서의 반지성주의적 사유에 대한 분석을 흥미롭게 읽었다. 저자에 의하면 미국의 정신은 근대 초기의 프로테스탄트의 틀 안에서 형성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미국의 프로테스탄트는 복음주의 신앙이 주류를 이루었다고 한다. 이 복음주의는 ‘미국의 반지성주의를 이해하는데 아주 중요한 요소라고 한다. 복음주의의 특징 중 하나는 종교의 대중화이자 개인화가 아닐까 싶다.
종교를 대중화하고 개인화하기 위해서 ‘반지성주의’전략이 필요하였다고 하는 듯하다.
각설하고 저자의 반지성주의의 근원에는 복음주의와 평등주의와 실용주의와 대중민주주의 사상이 그 기저에 흐르는 듯하다. 언뜻 이해하기 의아해할 수 있다. 인간적이고 민주적인 감정을 사람들에게 불어넣은 복음주의, 정치에서의 평등주의와 민주주의, 특히 교육이라 하면 지성과 연결하기 쉬운데 오히려 교육이 반지성주의를 길러낸 산실이라는 주장도 납득하기 힘들 수도 있어 보인다. 저자의 반지성주의를 정의로 돌아가 보면 조금은 이해되지 않을까 싶다. /정신적 삶과 그것을 대표한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에 대한 분노와 의심이며, 그러한 삶의 가치를 언제나 얕보려는 경향이다/ 정신적 삶은 귀족적이며 혜택받은 자들의 분야이며, 미국은 자유주의적이고 민주적이며 평등한 국가이다. ‘지성’에 대한 거부는 평등과 민주주의를 위한 당연한 귀결이 된 것은 아닐까? 글자를 모르고 유럽에서 추방당한 자들의 국가인 미국인들을 상대로 신앙을 전파하기 위해서는 지성과 유럽에 기반을 둔 종교적 의례를 이용할 수는 없었을 수도 있다. 지식이 아니라 마음을 의례가 아니라 신과의 직접교섭을 내세울 수밖에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이 과정에서 지성에 대한 공격은 부산물이 아니라, 필연적 귀결이 아니었을까? 개인의 성장에 방점을 찍고, 소수의 정신적 재능이 아니라 다수의 보통사람을 위한 교육이념은 민주주의나 평등이라는 이름으로 ‘지성’을 회피하고 ‘반지성’을 옹호하지는 않았을까?
모든 개인이나 어린아이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고, 그 자체로 완전한 존재이기에 그들을 따로 교육할 필요가 없고 그 잠재력을 발휘하게끔 환경만을 만들어주면 된다는 교육관이 ‘반지성주의’을 양산하는 온실이 될 수도 있다는 의미다. 여기에 생활 실용주의가 더해지면 물리학과 자전거 타기는 같은 가치를 가지게 된다.
때론 ‘반지성주의’가 득세하고 때론 ‘지성’이 주류 문화를 형성하기도 하지, ‘반지성주의가’ 고착하는 것은 아니다. 시대적 상황이나 조건에 따라 그 영향은 유동적이다. 그리고 누가 반지성주의인지는 섣불리 단정지을수가 없다. 나는 이 저자의 관점을 지금의 한국사회에 적용해 보고자 한다. 엄밀한 적용이 아니라 엉성한 추론을 해보고자 한다. 한국은 기독교 신앙의 ‘메카’가 아닐까? 기독교가 유례없는 성공을 거둔 지역이라 한다. 한국의 기독교 신앙에 대해 문외한이지만 주위에서 읽고 들은 바에 의하면 미국의 복음주의가 주류이며, 한국 기독교는 역사적으로도 미국의 복음주의를 그대로 수입하여 쓰고 있는 듯하다. 혹시나 한국이 ‘반지성주의’라면 이런 영향이 많지 않을까 싶다. 지금 한국은 정치에서 역사상 가장 여론이 중시되며, ‘민주주의와 평등주의’에 대한 열망이 가장 고조된 시기가 아닐까 싶다. 어떠한 권위도 제도도 인물도 인정하고 있지 않는 것 같다. 모든 개인이 정치인이며 각 개인이 하나의 정치적 이념이나 신조를 대변하고 있는 듯하다. 그러니까 인구수만큼 그만큼의 민주주의가 존재하고 있어 보인다. 현실에서 실제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느냐 아닌가 하는 문제가 아니라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듯하다. 각자는 외부에서 뭔가를 배울 필요가 없으며, 외부의 영향을 받는다는 것은 개인의 대한 모욕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은 아닐까? 때론 이런 생각들이 ‘다양성’이란 이름으로 행해지기도 한다. 우리가 무엇을 ‘지성’이나 ‘정신’으로 정의할 때는 반드시 결정할 주체가 있어야 한다. 하지만 지금은 이걸 거부하고 지성과 정신을 각자가 정의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지성’과 ‘정신’의 범람이지만, 한편으론 이런 사태가 ‘반지성주의’를 징표가 아닐까? 한국은 세계에서 교육에 대한 열의가 가장 뜨거운 국가 중 하나라고 한다. 어쩌면 한국에서의 교육은 ‘애국자’를 만들고, ‘산업역군’을 양산하기 위한 목적이었지 결코 ‘지성’이나 ‘정신’을 함양하기 위함이 아니었을지 모른다. 지성과 정신은 부산물이 아니었을까? 현재 한국에서는 인문학은 사경을 헤매고 있고, 철학 따위의 학문을 대학에서 추방하기 위해 많은 노력하는 모양이더라. 이게 ‘반지성주의’가 아닐까? 저자는 ‘원시주의’라고 하였지만, 한국에서는 자연주의자나 생태주의자와 비슷해 보인다 이들은 마음의 교감이나 수련을 강조하고 모든 것이 개인의 ‘마음’ 자세에 있고, 개인의 마음이 깨끗해야 사회도 깨끗해진다는 마음결정론을 주장하며 자연적 순응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들이 의도하였던 아니던 일종의 ‘반지성주의’의 흐름이라고도 한다.
사실 ‘반지성주의’ 같은 논의는 지식인의 관심사이지 일반인들이 관심을 가질 이유는 없다. ‘지식’을 밥벌이 수단으로 하거나, 그것에 특별히 관심을 가진 부류가 아니라면 대부분 사람들의 일차적 관심은 ‘생존’과 ‘생계’에 있다. 또한 계속해서 언급하고 있지만, ‘반지성주의’를 섣불리 정의할 수도 분류할 수도 없다. 하지만 분명 ‘반지성주의’의 경향은 있다. 그리고 ‘반지성주의가’ 바람직하다거나 아니라거나 하기도 쉬운 일이 아니다. 그보다는 민주주의와 평등주의와 ‘반지성주의’와 어떤 연관이 있으며 이런 흐름을 막을 장치가 없을가를 고민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반지성주의’의 반대말은 ‘지성’이 아니다. 편리를 위해 사용하지만 사실 ‘반지성주의’ 못지 않게 ‘지성’에 대해서도 정식화하기는 불가능하지 싶다. 그보다는 먼저 ‘지식’이나 ‘지성’ 혹은 ‘정신적 삶’이 어떤 가치가 있고, 이 사회에 무슨 역할을 하기는 하는가를 질문해야 하지 않을까? 결코 ‘반지성주의‘의 반대말이 아닌 ’지성‘ 혹은 정신적 삶’이 왜 필요한가? 아무런 가치도 없다면 학교에서 인문학과 철학은 당연히 삭제되어야 하리.
이 책은 1950년대 미국이 대상이어서 그 후 미국에서도 기류가 바뀌어 지성은 좀더 새롭고 좀더 적극적인 의미를 띠게 되었고, 50년대보다 지성에 대한 대우도 훨씬 나아졌다고 한다.
저자에 의하면 그 덕분에 지식인들은 난처한 짐을 지게 되었다고 한다. /지식인들은 거부당하는 데 익숙해져 있다.----- 이 때문에 많은 지식인들은 이제 소외야말로 자신들에게 걸맞는 명예로운 지위라고 느끼게 되었다고 한다/ 지식의 속성은 창의성과 비판 정신이고 지식인의 당연한 책무는 체제에 대한 비판성과 당연한 것에 대한 회의와 의심을 품는 자들인데 이들이 사회에 편입되고 체제 속에 받아들여지기 시작하자 곤혹스런 처지에 놓여졌다고 한다. 지식인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비판적이어야 하지만 그 자신은 자신이 비판해야 하는 체제에 순응할 수밖에 없는 딜레마가 생겻고, 그 때문에 지식인은 소외를 지식인만의 숙명이자 특권으로 받아들였다고 한다. 체제에서는 불평분자나 비판자로 소외되고, 자신에게서도 소외되었다는 것이다. 늘 주변인이나 경계인으로서의 지위를 기꺼이 감수하고 때론 즐기기까지 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지식인은 늘 소외 받는 자라는 운명을 받아들이게 되었다는 것이다. 지식인은 자신의 사상을 세상에 내어놓고 싶지만, 그렇게 되면 자신의 독창성과 비판 정신을 훼손당하지 않을지 걱정하며. /이제 소외는 인생에서의 하나의 사실이 아니라 지적생활을 위한 처방전이라는 성격을 띠게 되었다/ 한다. 호프스테터는 분명 미국사회의 /반지성주의/에 대한 개탄으로 이 연구를 시작했다. 그리고 지성과 지식인이 조롱받는 세계는 바람직한 방향이 아니라고 한다. 대중 민주주의와 평등주의와 귀족적이고 엘리트적 정신적 지성이 연결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를 바라고 있다. 우리는 모두 ‘지성’을 지향하고 있는 듯하지만, 사실은 반지성주의‘에 나도 모르게 빠져 있는 것은 아닐까? 질문해 볼 일이다. 물론 지성이고 뭐고 무조건 ’생존‘이라고 한다면야 더 이상 할말이 없지만, 그 ’생존‘이 ’지성‘에 어느정도 영향을 받고 있다면 사정은 달라져야 하지 않을까? 때때로 교육이 ’반지성주의‘를 낳듯이 책이, 독서가 때론 ’반지성주의‘를 낳지 않으리라 장담할 수도 없지 싶다.
하여간 뭔가를 쓰고는 있지만, 문법이나 맥락이나 제대로 맞는지, 책의 1%라도 제대로 소개하고 있는지도 나도 모르겠다. 그냥 무턱대고 쓰고 있을 뿐이다. 거의 3개월을 가늘지만 끈질기게 띄엄띠엄 2번을 나름 정성스럽게 읽었지만, 늘 이 모양 이 꼴이다.
첫댓글 /한국에서는 자연주의자나 생태주의자와 비슷해 보인다 이들은 마음의 교감이나 수련을 강조하고 모든 것이 개인의 ‘마음’ 자세에 있고. . . 모든 개인이나 어린아이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고, 그 자체로 완전한 존재이기에 그들을 따로 교육할 필요가 없고 그 잠재력을 발휘하게끔 환경만을 만들어주면 된다는 교육관이 ‘반지성주의’을 양산하는 온실이 될 수도 있다. 물론 지성이고 뭐고 무조건 ’생존‘이라고 한다면야 더 이상 할말이 없지만, 그 ’생존‘이 ’지성‘에 어느 정도 영향을 받고 있다면 사정은 달라져야 하지 않을까?/반지성주의...자신의 이익에 도움이 되니까 알면서 모르는 체 눈감거나 공동체 가치(지성)를 헌신짝버리듯 무시하는 건가봐요.
마음이 생존같기도하고 지성이 생존같기도하고 지성이라는 질서가 없으면 생존이 불가할것도 같고... 생존과 지성이 혼제한 걸 보면 분명 마음도, 지성도 둘 다 필수과목인 듯 합니다. 접근하기 어려운 책을 이렇게라도 읽을 수 있어서 다행입니다.
호호님의 지성을 따라갈 수 없네요. 지성과 반지성으로 구분하는 것이 우리 삶에 왜 필요한 지 한 말씀 부탁드려요.
/호호님의 지성을 따라갈 수 없네요/ 이런 멘트는 저를 여러시간 동안 내가 나를 미워하고 부끄럽게 만든답니다.
어제는 서울? 사람을 우연히 만났는데, 지역?에 사는 내가 너무 궁색하고 지질하게 느껴져서 도망치듯 자리를 피해 집으로 피해 버렸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선과 악이 분명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지만, 나는 선과 악이 분명한 경계선이 있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지성과 반지성도 그렇지 않을까요. 지성에 대하 직접적으로 언급한 책은 보지 못한듯합니다. 그러나 반지성주의에 대한 이 책은 꽤나 흥미롭더군요. 세상은 복잡하고 그 세상을 조금이나마 이해하려는 시도 또한 복잡하지요.
@호호 /내가 반지성주의라고 일컫는 태도나 사고에 공통되는 감정은 정신적 삶과 그것을 대표한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에 대한 분노와 의심이며, 또한 그러한 삶의 가치를 언제나 얕보려는 경향이다/ 인용문을 재차 제시할 수밖에 없음을 양해바랍니다. 지성과 반지성을 명확하게 구분하는 개념이나 방법은 없지 않을지요. 해서 호프스테터는 인상주의적 방법을 쓸 수 밖에 없다고 했고, 구체적인 사례를 통해서만, 그것도 인상적 방법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호호 지성과 반지성 이 우리 삶에 왜 필요한지 모릅니다. 그건 마치 신이나 혹은 백두산이 우리 삶에 왜 필요한지 하는 질문과 동일해 보입니다. 모릅니다. 그것들이 꼭 인간의 필요하고 상관이 있을런지 아닌지? 성직자가 신의 존재에 대해 고민하듯이, 스님이 깨닫기 위해 고행을 하듯이 종교인들이 신이나 깨달음에 대해 왜 그렇게 고뇌하는지 전 모릅니다. 저 하늘을 나는 새가 왜 저렇게 명량하게 때로는 처량하게 우는지 웃는지 전 모릅니다.
@호호 이딴식으로 대답을 하면 화를 내실 것 같아, 그냥 추론을 해볼까 합니다. 한국에서 박정희등 독재 시대에는 시대도 암흑이엇지만, 지성도 암울한 시대가 아니었을지요. 시 몇 줄 글 몇 자 책 몇 권 읽었다고 감옥에 가두는 시대였고. 반공주의 아니면 설 자리가 없엇지요. 독재에 반항하고 저항하기 위해 공부를 했고, 그런 힘들이 모여 한국의 지성은 점점 깊어지고 확장이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 당시 전국에 있는 대학에 인문학 독서모임이 일만개 이상이었다고 하더군요. 그런 힘들이 모여 독재를 밀어내고 이만큼 안락하고 평화롭고 자유로운 환경이 만들어지지 않았을지?꼰대 애기가 아니라 전 역사를 애기하고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5년 전 애기만 해도 꼰대라고 하니. 전 20세기 노래도 듣고 2500년전 책도 읽는데. 자유라고 해 봅시다. 자유라는 정신적 가치를 늘 생각하는 것과 자유 같은 정신적 가치에 대해 전혀 생각하지 않는 것이 우리들 삶을 어떻게 바꿀까요. 생각한다고 우리네 삶이 좋아질지 아닐지 그것은 알수 없지요.
@호호 음 이 책을 읽으면서 일명 /조국 사태/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잘 아시겠지만 조국 사태는 한국의 기득권층이 하는 작태에 비하면 조족지혈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데 왜 물론 여러 요인이 있겠지요, 언론들. 권력 문제 등등 하지만 여기에는 반지성주의도 한 몫 하지 않나 싶습니다. 그 잘난체 하고 설명하고 설득하려는 그 /지성// 이 꼴보기 싫었을수도 있어으리라 짐작해 봅니다. 유시민도 정치인으로 실패한 이유 중 유시민의 그 짜증나는 /지성/을 분노하고 의심하는 그런 기류가 있었지 싶습니다. 그러나 반지성을 무슨 악으로 보는 게 아니라 현상으로 보고 그 역사적 맥락에서 이해해야겠지요. 진중권의 그 천박한 말투는 늘 신문지면에 실리지만서도.
@호호 전 가능하면 말을 적게 하고 글을 많이 썼으면 좋겠는데, 워낙 천박한 성품을 지녀서 잘 안된답니다.왜냐하면 글은 내 자신을 장식할 수 있으니까요. 즉 내 본 얼굴을 대놓고 보여주지 않을 수 있어서요, 즉 거짓말을 할 수 있기에.
이만 넘 길어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