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antiegoist.egloos.com/2896072
디자인과 일러스트레이션의 차이
'원화 디자이너란 게임에 들어가는 일러스트레이션을 그리는것 아니냐?' 라고 생각하는 분들을 가끔 접한다.
나는 이 관점에 대해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고 생각한다. 디자인과 일러스트레이션은 동일한 결과를 내 놓을수 있기에 분명 비슷해 보일수 있지만, 근본적으로 이 두가지는 서로 확연히 분리될수 있을 정도로 '장르 자체가 다르다' 라고 말할수 있다.
게임 그래픽 원화가라는 제한된 영역에서, 어디에서나 흔히 볼수 있는 다음과 같은 경우를 생각해 보자.
원화 자체는 분명 엄청나게 잘 그린 그림임에 분명한데 실제 구현된 결과물은 그저 그렇다던가 하는 등의 불일치가 생긴다. 이것의 원인은 여러가지가 지목된다. 원화가 입장에서는 원화에서 만들어져 있던 '느낌' 을 구현화시에 제대로 살려내지 못했다라던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고, 구현자 입장에서는 현실적인 제약 때문에 사실상 구현이 불가능한 부분이 원화에서 그려져 있었기에 어쩔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원화가는 이때, 구현화될때 망가지는 것이 자신의 힘으로 어찌할수 없는 문제라면 아예 손을 놔 버리게 된다.
결국 원화가는 자신이 제작에 참여한 게임임에도 크게 애착을 가지지 못한다. 자신의 그림과 최종 결과물은 별개라는 생각을 하며, 결과물이야 어떻게 나오든 자신은 자신의 그림을 그리는데에만 충실하게 된다. 나아가, 게임의 흥망과는 전혀 상관없이 자신은 자신 스스로만의 '작가적 성공' 을 위한 길을 걸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이런 문제를 근본적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디자인과 일러스트레이션의 차이라는 문제가 그 원인이라 말할수 있는 것이다. 게임이 요구하는 '디자인', 원화가가 만들어내는 '일러스트레이션', 어쨌거나 결과물은 같을수 있지만. 결국 게임의 결과물은 결과물대로, 원화가의 일러스트는 일러스트대로, 결국 게임은 게임대로, 원화가는 일러스트레이터로써 전혀 상반된 방향으로 나아가버리게 되는 문제를 우리는 너무나도 많이 봐 왔을 것이다.
●디자인은 소재를 중시하며 일러스트레이션은 표현을 중시한다.
예를들어, 의상디자이너들이 흔히 그리곤 하는 의상의 컨셉일러스트를 생각해 보자. 이런 그림을 보고 '정말 잘 그린 그림이다' 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단적으로 말해,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잘그린다' 의 평가점 대부분에서 이런 컨셉화는 대부분이 낙제점을 받을수밖에 없다.
인체뎃셍은 천편일률적인 포즈에 제 멋대로 그냥 길쭉길쭉한 모델을 그려놨을 뿐이고, 근육도, 손발도, 골격도, 모두가 하나도 공부하지 않아서 현실적이지도 그렇다고 멋지지도 않을 뿐더러, 색채도, 빛도, 명암도, 아무것도 뭐 하나 제대로 표현되어 있지 않은 그런 그림을 잘그린 그림이다라고 말해줄 이유는 아무데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그림으로써의 '표현' 적인 부분을 완전히 배제하고 본다면 어떨까. 맞다. 그림으로써의 표현을 제외한다면 이 컨셉화는 그냥 '의상의 아이디어 스케치' 인 것이고, 표현적인 측면에서가 아닌 순수히 '아이디어 컨셉' 으로 평가받아야 함이 마땅한 것이다.
소재와 표현이라는 두가지의 서로 다른 입장에서부터 디자인과 일러스트레이션은 그 평가점이 다르다. 다음의 여러 경우를 생각해 보자.
-사과를 그린 일러스트레이션 예를들어, 사과를 그린 일러스트레이션이 있다 손 쳐보자. 작가가 무려 일년육개월에 걸쳐 정말 사실적인 사과를 그려내었다. 이것은 수많은 인고의 노력으로 한 스트로크씩 쌓아나간 예술이라고 말할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디자인적 관점, 즉 소재적 관점에서 보자면 이건 단지 그냥 '사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다.
-팬아트 예를들어, 테라다 카츠야가 스트리트 파이터의 '춘리' 를 가지고 팬아트를 그렸다 손 쳐보자. 원래부터 뛰어난 표현력을 가진 작가이기에, 이 그림 또한 일러스트로써는 매우 높은 평가를 받을 것이다.
그러나, 디자인적 관점. 즉 소재적 관점에서 보자면 이건 그냥 '춘리' 를 그린 그림일 뿐이고, 더해서 그 '춘리' 라는 캐릭터를 직접 스스로 디자인한것도 아니기에 아예 평가 자체를 할수가 없는 것이다.
말하자면, 쇼윈도우에 내걸린 의상을 걍 멋진 모델에게 입히고 멋진 포즈를 취하게하는 것만으로 '의상 디자인' 이라고 말할수 없는 경우와 같다.
●순수한 디자인에 있어 필요한것과 불필요한것.
일러스트레이션에 있어 중시되는게 뭘까. 일단 기본은, 실사위주로 공부한 인체뎃셍력을 기반으로 스타일리쉬가 가미되어 과장시킨 인체라든가. 양감 및 질감표현을 중시한 명암의 묘사라든가. 과장된 공기원근이라든가, 치밀한 밀도라든가. 구도라든가. 거기에 더해 캐릭터 일러스트로 좁혀 보자면, 작자만의 특별한 그림체라든가의 화풍이 아닐까.
그러나, 순수히 디자인만으로 판단하자면 위에 열거한 대부분은 거의 필요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대부분은 '어떻게 그리는가' 에 관한 표현적인 문제일 뿐이며, 디자인에서 필요로 하고 가장 중시하는 것은 표현이 아니라 '무엇을 그리는가' 에 관한 '소재' 이기 때문이다.
단적으로 말해, 의상 디자인의 아이디어 컨셉 스케치 정도만의 표현력. 즉 자신이 생각하는 것을 그대로 그림으로 만들어 전달할수 있을 만큼의 기본적인 표현력만 있다면 소재의 제약이란 없는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소재적인 측면에서의 '디자인'에서는 특별한 소재. 새로운 소재, 더 적합한 소재를 가장 중시하고 우선시해야만 한다.
(주: 그러나, 게임에 한정해서 보았을때 현재 시점에서는 기술발전으로 인해 게임에 있어 표현해낼수 있는 한도가 점점 늘어나고 있는 추세이다. 이것은 디자이너에게도 마찬가지로써, 그만큼 더 특별한 소재를 생각해낼수 있는 장점이 있는데에 반해 디자인에 있어 요구되는 표현력이 더 필요해진다는 것을 뜻하기에, 실제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만의 '기본적인 실력' 으로써는 그런 소재조차도 표현하기 힘들어질수밖에 없을 것이다.
여기에서도 디자이너와 일러스트레이터의 차이가 극명하게 나타나는 부분인데. 디자이너라면 표현력이 모자랄 경우 생각할수 있는 모든 방법-예를들어 CG라든가 합성이라든가-를 통해서 커버하려고 하는 반면, 일러스트레이터의 경우는 순수히 자신의 화력을 늘림으로써 커버하려 한다. 예를들어 말하자면 그냥 사진을 찍으면 될 것을 그것을 꼭 스스로의 능력을 통해 풍경화로 만들어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표현만을 중시하는 아마추어 시류.
지금 당장 주위를 둘러보자. 예를들어 웹서핑만을 잠깐 해도 좋다. 이 포스트에 쓰여진 글과는 다르게, 거의 모든 곳에서 디자인과 일러스트레이션의 구분을 하지 않으며, 또 디자인이든 일러스트이든 그 전부를 평가함에 있어 표현적 측면을 위주로 하고 있으며, 또한 아마추어들은 소재야 어쨌건 간에 일단 표현력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왜 그런 시류가 생겨났을까? 본인은 이에 대해 다음을 원인으로 진단한다.
○한국, 일본 특유의 '유명 일러스트 작가' 에 대한 열망 -이 세대의 그림쟁이치고, 중고등학생때 일본의 유명작가 일러스트집을 사 보지 않은 사람은 드물것이다. 책이라는 매체를 통해 많은 이에게 자신의 작품을 알리고 또 자신의 이름을 더욱 높인다. 이것은 우리들에게 있어 실로 작가가 갈수 있는 최고의 길이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그런 매력이 있다.
그러나 우리가 간과하지 않아야 할것은, 이 사람들이 단지 화집용 일러스트만을 그려왔기에 화집을 내는 유명작가가 된게 아니라는 사실이다.
○기술발전 이전의 원로작가군들이 중시하던 아티스트정신 CG와 인터넷이 발전되기 이전, 표현력을 커버할 수단이 없었던 시절에는 자신의 실력을 높이는 것만이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리고 이쪽 계열에 대한 사회적인 저평가와 맞물려, 마치 자신의 길을 꿋꿋이 걷는 예술가와도 비슷한 정신이 중시되었었다.
그러나 문제는, 그런 문제를 야기시켰던 원인이 대부분 사라진 현재 시점에 이르러서도 그 정신이 유일무이하다고 믿는 부분에 있다. 원로작가들의 정신이 틀린것은 아니다. 하지만 세대가 바뀌었다면 이을것은 이으고 버릴것은 버려야 하지 않을까. 수십년의 세월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인 바탕을 이루는 정신은 하나도 변한게 없다.
○기술적 표현에만 치중된 교육 언제나 나오곤 하는 이야기다. 이쪽 계열에는 딱히 왕도라 불릴만한 교육체계가 언제나 전무하다고 말하고, 아직도 전무하다. 사실, 게임이라든가 만화라든가에 대한 교육체계가 만들어지기 시작한것은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꽤나 많은 교육기관이 생겨나 그곳에서 많은 인력이 키워지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대부분의 교육기관에서 가르치고 있는 것은 잘해봐야 '학원 수준' 이라는 것에 있다. 예를들어 게임 그래픽을 배우러 학원에 가 보면 일단 냅다 포토샵, 페인터, 맥스를 가르칠 것이다. 포토샵, 페인터, 맥스를 배운다고 아티스트 또는 디자이너가 될수 있을까. 농담삼아 하는 이야기이지만 포토샵을 배우면 포토샵맨, 페인터를 배우면 페인터맨, 맥스를 배우면 맥스맨이고, 그걸 다 배우면 포토샵과 페인터와 맥스를 다 다룰줄 아는 그래픽맨이지, 아티스트 또는 디자이너라고 말할수는 없을거다.
사상적인 부분은 잘 해봐야 원로작가를 교수급으로 내세워 가르치고, 체계적인 이론교육은 전무하거나 기술을 위한 이론일 뿐이고, 결국 중시되는 것은 기술적 표현일 뿐인거다.
책만 봐도 뻔하지 않는가. 예를들어 우리가 캐릭터 디자인에 관한 참고서적을 찾아보고자 한다면, 시중에 나와 있는 것은 대부분 '어떻게 그리면 되는가' 에 촛점이 맞추어진 포토샵, 페인터 책일 뿐이지 '어떤 캐릭터를 만들어야 하는가' 라는 부분에 관한 이론서는 사실상 전무하거나 극히 비중이 낮다.
○순수미술계열전공자들의 상업디자인업계 대거 유입 순수미술에 대해서 좋지 않은 평가나 감정을 가진것은 아니니 오해없길 바란다. 순수미술은 기본적으로 자신의 작품을 하나의 완성된 작품으로 만드는데에 그 목적이 있고, 또 그것을 위해서는 대체적으로 소재보다 표현적인 측면이 더 우선시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순수미술을 전공한 사람들이, 자신의 작품이 최종 결과물이 아닌 업계, 또 그것을 상업적으로 판매해야 하는 업계에 대거 유입되었으며 또 유입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대체적으로 이 문제에 관해, '상업적인 그림을 그려야 한다'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흔히 보고, 또 비상업이라고 생각하는 쪽에서는 이쪽을 상업이라고 씹는다거나 하는 경우를 흔히 봐 왔다.
그러나, 이것은 위처럼 흔히 회자되곤 하는 '상업적인 그림이냐 아니냐' 의 문제하고는 완전히 별개의 문제다. 왜냐하면 그림 자체를 사는것은 어디까지나 클라이언트고, 클라이언트는 그 그림 자체를 팔아먹는게 아니므로, 결론적으로 말해 그림 자체가 상업적이냐 아니냐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이다. 게임회사는 화방이 아니니까 말이다.)
●'입을수 있는 옷' 을 최종적으로 만들어낼수 있어야 의상디자이너라고 말할수 있다.
-의상디자이너가 하는 일이 무엇인가. 당연히 새로운 디자인의 옷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의상디자이너가 미싱은 다룰줄도 모르며 아이디어컨셉일러스트를 때깔나게 그려내는데에만 집중한다면. 이건 의상디자이너라고 도저히 불러줄수 없다고 누구라도 쉽게 생각할수 있을 것이다.
옷을 만들고 싶다면 의상디자이너가 되어야 하며, 의상디자이너는 옷을 만들줄 알아야 한다. 이건 당연한 사실이다.
그런데, 게임 또는 게임에 등장할 캐릭터를 만들 생각이 없거나, 또는 관심이 없거나, 만들줄 모르는 사람들이, 왜 만들어야 하는지도 모른 채 그 분야에 종사하며 자신의 그림만을 때깔나게 그려내는데에만 집중하고 있다면. 이건 당연히 불균형이 야기될수밖에 없는 것이고, 업계에도 개인에게도 불행이 일어날수밖에 없는 것이다.
●디자이너의 끝, 일러스트레이터의 끝은 어디인가.
일러스트레이터의 끝은 누구나 생각하는 것처럼 '화집을 내는 인기작가' 일런지도 모른다.
그러나, 단언하건데 게임업계는 이미 인기작가인 사람 에게는 관대하지만, 개인을 그런 인기작가로 키워주지는 않는다. 그래서 그런 불균형이 야기되고 결국 사람들은 이리저리 떠돌아다닌다. 아예 애초부터 만화가라든가의 홀로서기를 했어야 하는게 아닐까.
디자이너의 끝은 어디일까. 아트디렉터? 그래픽 수퍼바이저? 본인이 직접 가 본것도 아니며, 그곳까지 간 사람을 만나본적도 없기에 잘 모르겠다라고밖에 말할수 없다.
하지만 업계는 디자이너를 원한다. 스스로의 그림만을 잘 그려내기보다 최종 결과물을 잘 만들어내는 사람을 말이다.
(주: 업계에 요상하게 퍼진 인식 하나를 더 언급해보자면, 아트디렉터라는 포지션이 '메인 캐릭터를 디자인하고 또 흥보 일러스트를 그리는 사람' 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물론, 메인 캐릭터를 디자인하며 또 흥보 일러스트를 그려내면서 아트디렉터라는 직함을 붙이고 있는 사람이 분명 있다. 그러나 아트디렉터의 일이 단지 그것 뿐만일 거라고 생각한다면 이건 그야말로 전형적인 '인기작가 판타지' 일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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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헉 너무 길어요.. ㅠㅜ 어떻게 30자 이내로 요약해주실수 없을까요 ㅜㅡ
그림을 잘 그리는 것을 지상최대과제로 여기는 디자이너들에게 충고하는 말이군요. 예술을 목적으로 하는 화가가 되지말고 제품을 만드는 디자이너가 되어라. 당신이 게임을 만들고 싶으면 게임을 만드는데 힘을 써야한다. 당신이 좋아하는 작업으로 여기는 일러스트에만 공을 들이는 성향은 좋지 않으며 그래서는 좋은 게임이 개발되지 않는다. 좋은 게임을 만들기 위해서는 당신이 고집하는 방법뿐만 아니라 다양한 방법을 동원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말고 최종 결과물인 게임에 적합한 그래픽을 디자인하는 것이다. 이런 말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