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4월 30일 부활 제4주일 성소주일>
당신은
‘현재’입니까? ‘과거’입니까?
‘성소’(거룩한 부르심)가 없는 사람이 있을까? 적어도 신앙의 눈으로 보면 ‘성소’가 없는 사람은 없다. 우리의 믿음으로 보면 모두가 하느님의 자녀요, 저마다 존재하는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이런 자신에 관한 사실을 얼마나 잘 알고 있느냐일 뿐이다. 똑같이 한세상을 살아가는데 어떤 이는 내적 확신을 하고 살고, 어떤 이는 ‘그냥 산다’라고 대답하기도 한다. 어떤 이는 자신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를 분명하게 말하는데, 어떤 이는 자신이 왜 태어났는지 이유를 찾아 평생 헤매기도 한다. 이 차이가 별것이 아닌 것처럼 보여도 한 생을 마칠 땐 건널 수 없는 깊은 심연이 가로놓여있을 정도로 크다. 그만큼 사는 것이 운명처럼 주어진 인간에게 왜 사는지 아는 것은 중요한 과업이다. 까닭 없이 존재하는 사람은 없다.
많은 성인이 우리에게 보여준 모습은 모두 각자 자신만의 삶이 있었고 ‘나는 그것을 살았다’라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만의 삶을 살 때, 그 길은 고독하고 외로웠으며 누구로부터 이해받거나 공감받지 못한 고난의 길이었음을 보여준다. 성인들의 삶이 위대한 것은 그 길을 살아간 성인을 통해 우리는 또 다른 세상의 보물을 얻고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는 것이다. 겉보기에 성인들은 자신의 영광을 위해 그 길을 가는 것처럼 보였고 실제 그런 비난을 받지만, 그의 삶은 우리에게 새로운 보물을 안겨주고 참된 인식으로 확장해주었다. 어쩌면 예수님은 그러한 삶의 정점에 서 계신 분이신지도 모른다. 그분 역시 밭의 보물을 찾아주시고,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를 알게 해주신 분으로 어쩌면 사람이 깨달아야 할 가장 궁극적인 진리를 보여주셨다. 그 진리란, 하느님은 사랑이시고, 죽음이 죽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흔들리는 갈대와 같은 인간에게 사랑은 세상에서 가장 귀한 선물이다. 아이에게 엄마의 사랑이 가장 귀한 선물이고, 처녀-총각이 서로에게 사랑을 느끼는 것이 서로에게 가장 귀한 선물이듯이,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힘들고 고통스러운 순간들을 이겨내게 하는 것도 가족에 대한 사랑이 아닐까? 우리의 사랑도 이렇게 위대한 힘을 지니고 있거늘 하물며 하느님의 사랑이야 그 권능 하심이 어떠할까? 게다가 인간의 궁극적인 불안 요인인 죽음이 죽음이 아니라니 도대체 인간이 이 세상에서 불안해야 할 까닭이 사라진 것이다. 문제는 역시 이에 대한 이해와 깨달음의 개인적인 차이가 있다는 것일 뿐 모두에게 열린 하늘나라다.
현대 심리학 개념으로 예수님께서 언제 ‘자기 인식’을 이루시고 ‘하늘의 뜻-성소’라고 할 수 있는 ‘자기 길’을 확신하였을까? 신학적 해석과는 별도로, 예수님께서 40일 동안 광야에서 단식하시며 기도하신 과정이 이러한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성서의 이야기는 역사적 서술을 위한 것이 아니기에 성서의 방식으로 본다면 이미 오래전부터 예수님의 자의식은 성숙해져 갔을 것이다. 독특한 어린 시절을 보내신 예수님, 그리고 제자라 불리는 또래 또는 더 나이가 많은 또는 다양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과의 교류 속에서 그분은 그들이 보기에도 색다른 가르침과 행동으로 ‘스승’이라는 위치에 오른다. 이런 과정이 40일이라는 시간 속에 성서적 의미로 함축되어 있다. 어쨌든 40일의 과정에서 예수님의 자의식은 무르익어간다. 자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신분임을 깨닫게 된다. 아버지와 아들의 신학적 관계는 여기에서 설명할 수 없지만 중요한 것은 그분의 자의식이다. 세상의 모든 유혹을 이겨낸 ‘자의식’이니 무얼 더 말하랴? 이 자의식이 중요한 까닭은 자의식 속에는 ‘하늘의 뜻’이 함께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자의식이라는 것이 단순히 자기 인식이 아니라 자기와 세상과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의식이기 때문에 ‘하늘의 뜻-소명’과 무관할 수 없다.
자의식을 갖춘 사람은 마냥 흔들리는 갈대가 아니라 부러지지 않는 유연함으로 무장된 갈대다. 자의식 하나로 존재성이 달라진다. 바보와 천재는 종잇장 한 장 차이라고 했다. 종잇장 한 장의 차이는 깨달음의 차이이지만, 삶의 결과는 천 길 낭떠러지의 깊은 심연처럼 크다. 그럼 왜 우리는 이처럼 가벼운 종잇장 한 장 차이를 사이에 두고도 깨달음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걸까? 그것은 ‘현실’에 존재하지 못하는 우리의 ‘자아’ 때문이다. 살아있는 과거 때문에 과거를 반복하는 ‘자아’는 ‘현재’하지 못한다. 그때 그 당시 해결해야 했던 것들, 충족되거나 이해시켜야 했거나 공감해줘야 했던 그 어떤 것이 반복되는 현상이 우리의 ‘자의식’을 오염시키고 세상과의 관계 속으로 나아가는 것을 방해한다. 그래서 과거를 반복하는 ‘자아’의 특징은 세상과의 ‘단절’이다. 가까이는 가족과의 단절이요, 이웃과 친구들과의 단절 나아가 자신의 삶과 단절된다. 이는 궁극적으로 자신과의 단절을 초래하는데, 이를 내적분열이라 한다. 내적분열은 자기 내면에 안전지대를 형성하는 데 실패하여 외부에서 안전지대를 확보하려고 갖은 시도를 하는데, 대부분의 노력이 실패로 돌아가게 되어 믿음도 우정도 사랑도 잃게 되며 무엇보다 슬픈 일은 ‘자기’를 잃어버리는 것이다.
오늘은 ‘성소주일’이다. 교회의 사도직 성소를 위한 날이지만 넓게는 우리 모두의 날이다. 우리가 모두 하느님의 성소자이기 때문이다. 큰 성소, 작은 성소가 아니다. 더 귀한 성소, 별 볼 일 없는 성소가 아니다. 그런 것은 모두 세속에 젖은 영혼들의 이야기다. 아직도 계급적이며 권위적인 모습이 남아있지만 건전하고 건강한 사고를 할 줄 아는 지혜로운 사람들이 자신의 성소를 살아가는 모습이 많았으면 좋겠다. 자신의 성소를 가볍게 여기지 말자. 주위 사람들에게 활력을 불어 넣어주는 사람이 그립고, 묵묵히 자기 길을 가는 사람이 그립다. 주위 사람들이 뭐라 해도 흔들리지 않고 미소 짓는 그런 강인함이 그립고, 사람들의 장단에 춤추며 품바타령을 하면서도 선한 눈빛으로 자신의 존재를 분명히 인식하고 있는 그런 사람이 귀한 세상이다. 세속의 평가나 기준에 따르지 않으려 애쓰는 사람들, 모두가 세상에 나와 한판 어우러지는 인생을 꿈꾸는 것은 욕심일까?
어설픈 몸짓으로 엉덩이를 실룩거려도 좋고, 다리를 절룩거려도 좋다! 얼굴에 묻는 때도 좋고 진흙탕에 젖은 바지도 좋다. 콧물 흘리는 어린아이면 어떻고 떼쓰는 아이면 어떠냐! 우리도 그랬고 모두가 우리 아이인걸! 잘난 놈도 오고 못난 놈도 와라! 그게 그거지 도토리 키 재기라는 거다. 매일 매일 반복되는 일상이라고 우습게 보지 마라! 멈춰 서고 더는 반복되지 않았을 때 우리는 얼마나 그리워했던가? 어렸을 땐 서둘러 어른이 되고 싶었는데 지금은 더디 가도 좋으니 천천히 아주 천천히 갔으면 좋겠다. 소중함을 깨달았을 때 왜 우리는 항상 늦을까? 그리움에 잠 못 이룰 때야 비로소 떠오르는 얼굴들, 더는 볼 수 없는데 어찌 우리 마음은 ‘현재’에 있지 못했을까?
첫댓글 나의 길을 찾으며 살아왔고
남아있는 가야할 길을 알게 되었기에
이제는 그때 그 곳에서 만났던 이들을
찾는 시간들이 또 소중한 추억이 되는 것 같아요.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