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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역사스폐셜 177회 : 삼천궁녀에 가려진 의자왕의 진실 (2002.11.30.)
방송일: 20021130 조회수 : 40972번 읽음
동영상 : 줄거리:
-물가 부소산F.S5
-궁녀사에서 절하는F.S7 부여의 부소산 기슭에는 궁녀사란 작은 사당이 있다
-단체 절하는 소복 무녀들8 (보다가)
이곳 사람들은 매년 이 사당에서 제를 올린다
-단상 궁녀 모신 그림5 백제 삼천궁녀의 애절한 넋을 달래기 위해서다
-절하는 무녀들15 백제 최후의 날
백마강에 꽃처럼 떨어져 죽었다는 삼천궁녀-지금도 사람들의 가슴에 남아 백제의 비극을 전하고 있다
-절하고 궁녀 그림Z.I7 백제 멸망의 상징, 삼천궁녀의 애절한 죽음 -
그 뒤에는 의자왕의 숨겨진 진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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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녀사 궁녀 그림 삼천궁녀에 가려진 의자왕의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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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튜디오1
-삼천 궁녀 실루엣 흐르고
삼천궁녀 이야기 다들 들어 보셨죠
낙화암에서 삼천이나 되는 궁녀들이 꽃잎처럼 떨어져 죽었다는 것은 천년이 넘는 세월동안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오던 이야기인데요,
오늘은 그 이야기를 좀 해 볼까 합니다
어떻습니까
삼천궁녀하면 금방 떠오르는 인물이 있지 않습니까? 네. 바로 의자왕입니다
의자왕과 삼천궁녀는 백제 멸망의 상징입니다
술과 향락으로 백제를 멸망으로 몰아간 장본인으로 널리 알려진 의자왕과 삼천궁녀 -
과연 백제 멸망은 의자왕의 방탕함 때문이었을까요
여러분은 의자왕에 대해 얼마나 알고 계신가요?
삼천궁녀를 거느렸던 방탕한 왕,
백제를 멸망시켰던 왕 -그 외에 의자왕에 대해 아는 게 있으신가요
역사스페셜 오늘은 삼천궁녀에 가려져 있는 의자왕과 백제 멸망의 진실을 밝혀 보려고 합니다
먼저 의자왕과 삼천궁녀를 만나러 가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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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1 삼천궁녀로 인해 사치 타락 군주 인식되는 의자왕
-학교외경4 천삼백여년전의 백제 의자왕과 삼천궁녀는 우리에게 어떻게 다가와 있을까
-학생들2
-칠판백제 쓰는선생, 선생EFF7 중학생들에게 백제하면 떠오르는 것 한가지를 적게 해봤다
-웃는 학생들, 삼천궁녀 적는13 칠백여년 백제의 긴 역사 -
수많은 사건과 인물중 아이들은 무엇을 백제로 생각하고 있을까
-걷어서 선생님에게5
-의자왕과 삼천궁녀적은13 어느정도 예상은 했지만 학생들의 답변중 90%
이상이 의자왕과 삼천궁녀라는 놀라운 결과가 나왔다
-학생 인터뷰 "삼천궁녀가 다 떨어졌으니까 의자왕 때문에/
낙화암에서 삼천궁녀가 떨어지는 것 인상깊게 읽었다/백제 마지막왕의 궁녀들이니까/
궁녀들까지 왕을 믿고 따라 줬다는 점에서 삼천궁녀가 생각난다"
-삼국사기 책 열리면10 의자왕에 관한 이야기 중 대표적인 것은 삼천궁녀와 함께 술이다 삼국사기에는
이렇게 기록돼 있다
-음황 탐락13 '왕이 궁인과 함께 음황 탐락하여 술마시기를 그치지 않았다'
이것이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의자왕의 모습이다
-헬기 부여시내13 백제의 마지막 도읍지, 사비는 지금의 충청남도 부여군이다
-백마강물에서 낙화암보이고8 부여군을 감싸돌고 있는 백마강줄기를 따라 가다 보면 부여의 뒷산인 부소산에
다다른다
-정면서 본 낙화암5 부소산의 북쪽 절벽이 바로 낙화암이다
-정면서 본 낙화암 암벽으로Z.I9 이 삼천궁녀의 전설이 남아 있는 낙화암이 바로 이곳이다
-정자에서 돌들로 강보이는15 낙화암은 백마강으로 떨어지는 궁녀들이 마치 꽃이 떨어지는 것 같다고 해서
이름 지어졌다고 전한다 이곳에 서면 백마강이 수십길 아래 내려다 보인다
-백화정F.S5
-보는 사람들, 가는 사람들13 삼천 궁녀의 전설 때문에 낙화암은 지금도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잃어버린 옛날 노래 가는13 (노래 듣고 )
-강에서 PAN 고란사절13 낙화암 절벽 아래에 있는 고란사. 삼천궁녀를 기리기 위해 고려시대에 지어진 절이다
-처마아래그림쳐다보는3 여기에 눈길을 끄는 벽화가 한점이 있다
-적 쫓겨 궁녀 떨어지는 그림20 후세 누군가에 의해 그려진 이 벽화는 삼천궁녀의 전설을 사실적으로 전하고
있다
나당 연합군에 쫓겨 낙화암에서 최후를 맞는 궁녀들의 비극적인 모습이 잘 묘사돼 있다
-궁녀들타이트8 (보고)
-낙화암 정자 관장과 피디9 왜 당시 백제인들은 낙화암으로 몰렸을까
-내려다보며 얘기하고 아래물13 낙화암의 지형적인 특징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서오선 관장 인터뷰 "낙화암은 부소산의 가장 뒤편에 해당된다
백제 당시 사비도성이 적군에게 빼앗기게 되면 거기 사는 많은 주민들은 별수 없이 당시의 진성이었던 부소산
으로 도망갈 수 밖에 없다
또 밀리게 되면 부소산에서도 끝까지 가게 되는 가장 뒤편에 이곳에 몰린다 막다른 길목이 바로 낙화암이다"
-사비도성C.G11 백제는 지금의 부여 시가지에 사비도성을 만들었다.
-궁궐에서 돌면C.G4
-부소산이 북쪽C.G4 그리고, 왕성의 바로 뒤, 사비도성이 있는 부소산이 배후 산성의 역할을 했다
-적공격 사비도성 함락7 전쟁이 벌어지면 사비 도성을 둘러싼 나성과 백마강이 제일 방어선이 된다
-사비성 공격9 나성이 무너지고 사비 시가지를 통과하면 궁성인 사비성을 공격할 수 있다
-낙화암으로5 사비도성이 함락되면 도성의 배후산성인
부소산성으로 밀려 나고 여기서 밀리면 낙화암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낙화암 서있는 이미지7 660년 7월 백제의 마지막날 그들은 그렇게 낙화암으로 쫓겼던 것이다
-떨어지는7
-춤추는 교수F.S20 백제 마지막날 죽어간 수많은 백제 유민들-
그들의 애절한 죽음을 이곳 부여에서는 삼천궁녀제를 통해 기리고 있다
-그림자에서 교수로11
-춤추는 교수F.S17 삼천궁녀의 이야기는 천삼백여년이 지난 지금도 백제 멸망의 비극으로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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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튜디오2
-백마강 내려다 보는
저 백마강 아래에는 수많은 죽음이 묻혀 있을 텐데,
아무일 없었다는 듯 백마강은 참 무심히도 흐르고 있습니다 적들에게 쫓기고 쫓겨 온 막다른 길.
최후의 절벽, 낙화암에 섰을때 삼천 궁녀, 그들의 심정은 어떠했을까요
망국민으로서의 굴욕보다 죽음을 택한 궁녀들- 그들의 그 처절한 최후가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의자왕에 대해 다시 한번 짚어 봐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한자 의자왕 입체적으로 크게 나와 걸리고
왕의 칭호는 왕이 죽고 난 다음 후세 사가들에 의해 붙여지는 것인데요,
의자왕 - 의롭고 자혜로운 왕이라는 뜻입니다
뭔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아는 의자왕은 여자와 술에 빠진 그야말로 방탕한 왕인데 어떻게 의롭고 자혜로운 왕이라는 칭호를
얻었을까요
전혀 다른 모습의 의자왕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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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2 또다른 모습의 의자왕 (성군으로 기억되는 의자왕)
-의자왕 재연 이미지15 술과 여자에 빠져 방탕한 군주의 대명사로 기억되는 의자왕
비운의 백제 마지막왕, 의자왕 - 그는 과연 누구인가
-금강에서유왕산 보이는13 부여에서 백마강을 따라 한시간 정도 가다보면 금강에 이른다
금강이 넓어지는 어귀에 불쑥 솟아 있는 산하나를 만날 수 있다-
-산으로 올라가는11 이곳에는 의자왕의 마지막 모습이 특별하게 남아 있다.
-유왕정7 유왕산은 백제가 망하고 끌려가던 의자왕과 백제 유민들이 마지막 이별을 나눈 곳이라고 한다
왕이 머문곳이라해서 이름도 유왕산이라고 했다
-금강에서 서해 가는PAN13 유왕산 정상에서 보면 금강이 한눈에 들어온다
당으로 끌려가는 왕을 마지막으로 볼 수 있는 곳이다
-향토 사학자 인터뷰테 "의자왕이 끌려갈 당시 백제 유민들이 이산에 올라와 많이 울고 통곡하고 임금을 부르고
그러니까 엄청난 통곡의 현장이었죠 임금님이 백제 유민들한테 위로도 해 주고 잘 갔다 돌아 오겠다는 돌아
오겠다는 기약은 없지만 그런 슬픈 전설이 있는 산입니다"
-금강쳐다보는 일행들8 잡혀가는 왕과 망국의 백성들이 마지막으로 통한의 피눈물을 쏟았던 유왕산
-임금 배 떠나는C.G17 660년 8월 17일, 사비도성의 관문인 구드래 나루에서 의자왕은 태자 융을 비롯한
1만2천여명의 백성과 함께 포로의 신세가 되어 당으로 끌려간다
-구드레 나루터유왕산지도11 그날 백제유민들은 구드레 나루에서 금강을 따라 유왕산까지 쫓아오며 떠나는 왕을
슬퍼했다
-갈대 타이트16 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나는 왕에 대한 슬픔과 그리움은 유왕산의 전설 속에 쓸쓸히 전해진다
-산유화가 국악원F.S4 (보고)
-선생과 제자 얘기F.S7 당으로 끌려가는 의자왕에 대한 아픔이 ' 부여를 중심으로 한 충남 일원에는 또다른
단편으로 남아 있다
-선생 얼굴7 백제 노래로 구전되는 산유화가가 바로 그것이다.
-전승자 인터뷰 "만날봉자 또 다시 있네 명년 8월16일에 연정 다시하세 이런 소리의 가사 있는걸 봐서
옛날 의자왕이나 그때 돌아가신 분들을 그리워하며 농민들이 집단으로 부르는 소리로 알고있다"
-노래하는F.S11 나라를 잃은 백제 유민들이 당나라로 끌려간 왕을 그리워 했던 노래 산유화가
-달뜬, 달뜬 F.S, 갈대18 (노래 듣고)
-석양에 강F.S6 술과 여자에 빠져 나라를 잃은 의자왕 그리고 그런 왕을 그리워하는 백제의 유민들
-트레킹 과연 의자왕은 어떤 왕일까
-대왕릉7 이곳에는 대왕릉으로 불리는 거대한 능이 있다
-대왕릉7 의자왕의 아버지인 무왕의 묘다
-소왕릉8 그리고 대왕릉곁엔 또다른 무덤이 있다 이 무덤은 무왕의 왕비인 선화공주의 능이라고 한다
-소왕릉5 고대사의 극적인 로맨스, 서동요로 유명한 백제 무왕과 선화공주의 아들이 바로 의자왕인 셈이다
-부여 박물관PAN9 부여 박물관 -
-전시장실내7 백제 문자 유물이 전시 중이다
-전시물에서 부여융지석PAN11 이곳에 의자왕에 대해 알 수 있는 한점의 유물이 있다
-지석 F.S5 의자왕의 아들 태자 융의 묘지석이다
-부여융 글자5 태자융은 백제가 망하던 660년에 의자왕과 함께 포로로 당에 끌려갔다
이 지석은 중국 낙양의 북망산에서 발견됐다
-지석스케치13 이 묘지석에서는 태자융의 연대기와 성격을 기록하고 있는데 의자왕의 나이를 추정해 볼수
있는 글귀가 있다
-68세 죽었다 자막17 태자융은 68세가 되던 영순 원년에 죽었다
영순 원년은 서기682년에 해당한다.
그렇다면 의자왕 아들 융은 615년생이 된다 이것으로 아버지인 의자왕의 나이를 추정해 볼 수 있다
-관장 인터뷰0318 "그렇다면 왕인 의자왕이 태자를 낳았을 나이 20살을 본다면 의자왕이 태어난 연도는 595년,
660년 백제가 망하게 되는데 그때쯤되면 의자왕의 나이는 육십을 훨씬 넘은 나이"
-삼국사기 즉위연도 20 그런데 삼국사기에 의하면 의자왕은 641년에 즉위 했다고 기록돼 있다
그렇다면 의자왕은 사십세 중반, 즉 장년의 나이에 왕위에 올랐다
-양교수 인터뷰테5/2737 "사십세라고 하면 불혹의 나이 인생의 완숙기이기 때문에 의자왕이 지니고 있던 평소의
태자로서 준비 기간을 거쳤던 몸소 쌓아 왔던 여러가지 역량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는 나이였기 때문에 자신이
정치를 적극적으로 펼칠 수 있었을 것이다"
-삼국사기책5 삼국사기에는 의자왕의 성격이 잘 묘사돼 있다
-삼국사기 책 용감 내용5 의자왕은 성격이 호방하고 결단력이 있었다
-부모효도형제우애기사5 그리고 의자왕의 품성을 잘 알 수 있는 기록들이 이어진다
-해동 증자 기사같이10 우애와 효성이 깊은 품성과 활동적이고 통이 큰 성격의 모습이 바로 의자왕이다
-관장 인터뷰 "이와 같이 여러 가지 사실을 비추어 볼 때 의자왕은 심성도 곧았고 과단성 있는 군주였다
아울러 효심도 깊었고 우애도 깊었고 아주 지혜로웠다 태자 기간 10년을 거치며 여러 가지 검증도 받아 왔다
어느왕 못지 않은 군주였다
그럼에도 불구 의자왕이 부정적인 시각 잘못알고 있는 건 아닐까 의자왕의 또다른 실체가 있지 않을까
이부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삼국 사기 순행내용17 삼국사기에는 의자왕의 적극적인 통치 내용도 이어지고 있다
-의자왕 이미지 재연27 술과 여자를 탐하는 방탕한 왕으로 인식되어 온 의자왕.
그러나 당시 사서는 또다른 의자왕을 보여 주고 있다 군주로서의 뛰어난 자질을 갖춘 왕 -
이것이 사서의 또다른 의자왕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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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튜디오3
-서재 컴퓨터 놓여 있고 MC 서서
용감하고 대담하며 결단성이 있었던 왕 -
효심과 우애가 깊어 해동 증자라 불렸던 왕 -
침착하고 사려가 깊어서 명성이 높았던 왕 -
어떻습니까 이것이 바로 의자왕의 모습입니다.
이런 왕이었기 때문에 지금도 의자왕을 기리는 놀이와 문화가 전승돼 오고 있는게 아닐까 싶은데요,
참 생소한 의자왕의 모습입니다
부패한 군주! 또 이와는 판이한 모습인 해동 증자! 과연 어떤게 의자왕의 본모습일까요
의자왕에 대해 좀더 자세히 살펴 보도록 하죠
-서재 컴퓨터 놓여 있는 의자에 앉으며 컴퓨터 검색 삼국 사기 의자왕조를 검색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컴퓨터 검색어 의자왕 치면 MC 관련 기사 뜨고 뒤 배경에 크게 화면 뜨는 다른 왕들에 비해 기록이 좀 많은
편입니다.
아마도 백제 마지막왕이라 좀더 상세하게 기록한 것이 아닐까 싶은데요 내용을 보면, 유달리 신라를 공격하는
내용이 눈에 많이 띕니다
'왕이 직접 신라를 공격해서 40여성을 빼앗았다'
'일만군대가 신라의 대야성을 쳤다'
'신라의 당항성을 공격했다'
'신라의 일곱성을 빼앗았다'
의자왕 재위 20년동안, 신라를 공격한 것이 열차례나 됩니다
2년에 한번꼴로 신라를 공격했다는 것인데요, 그야말로 전쟁의 연속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의자왕은 방탕한 군주, 또 해동증자, 이번에는 정복 군주의 면모를 보이고 있습니다
참 모를 왕이라는 생각이 자꾸 드는데요,
그렇다면 의자왕은 왜 그토록 신라를 공격했던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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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3 의자왕은 신라를 위협하던 두려운 존재였다
(대신라 정복군주, 강력한 왕권 전제 군주 의자왕)
-합천가는 트레킹7 충남 부여에서 소백산맥을 넘으면 합천이 나온다 이곳에 의자왕때의 격렬한 흔적이 남아 있다
-황강에서 산13 바로 대야성이다
지금의 합천에 있었던 대야성은 의자왕 당시에 신라가 차지하고 있었다
-올라가는 일행4 취적산 중턱 -
-산에 돌성 쌓은F.S5 지금은 발굴 작업이 한창 진행 중이다
-성벽돌 타이트17 후삼국시대까지 최대 격전지였던 대야성
수백년 세월에 묻혀 있던 대야성의 성터가 최근에 발굴됐다 견고하게 쌓은 석성의 흔적이 드러나고 있다
-전체PAN11 대야성은 낙동강 서쪽 지역을 방어하던 신라의 최대 요충지였다 바로 이곳을 즉위한 이듬해
의자왕은 바로 전격적으로 공격해서 확보한다
-박사 인터뷰 "이 합천 대야성은 소백산맥을 넘어 신라로 가는 가장 빠른 접경지에 위치 북쪽으로는 거창
고령 남쪽으로 진주 창녕으로 이어지는 축선상에 있는 교통이 가장 편리한 지역에 있다
이 합천 대야성 입지 앞쪽 황강 이용하면 인접해 있는 창녕까지 낙동강을 거쳐 바로 경주 코앞에 까지 갈수 있는
전략적 요충이라는 곳이 바로 이곳이다"
-백제 대야성 공격C.G11 이것은 양국 관계에서 대단히 중요한 사건이었다
이로서 낙동강 서쪽의 영남 지역을 백제가 확보하게 된 것이다
-김주성 교수 인터뷰 "대야성이 함락되었다라고 하는 것은 신라 입장에서는 대단히 큰 손실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즉 백제의 입장에서는 거꾸로 신라의 수도인 경주를 이어갈 수 있었다는 것이 될 수 있을 것이고 신라의 입장
으로선 이제 백제군을 코 앞에 두었다는 얘기가 되게 됩니다."
-삼국사기 친정기록 F.S17 뿐만 아니라 그해 의자왕은 친히 군대를 이끌고 나가 신라의 사십여성을 일거에
함락시켰다 신라에 대한 백제의 총공세가 시작된 것이다
-이도학 교수 인터뷰 "왕이 몸소 전장에 나가서 작전을 지휘하고 그리고 전쟁을 치루게 되는 것인데 이것은
전쟁의 비중이 크다는 것을 알려주는 동시에 이 전쟁에서 승리하게 되면 국왕의 권위랄까 왕권이라고 하는것이
크게 강화되게 마련이다. 이러한 것을 노리고 의자왕은 몸소 대신라전쟁에 친정을 단행했다, 라고 볼수가 있고.
그리고 40여개 성을 일거에 장악을 함으로써 의자왕의 권위랄까,
왕권의 위상은 크게 증대됐다,이렇게 볼 수 있다"
-백제 신라 공격하는 이미지17 의자왕은 지속으로 신라와 전쟁을 벌였다
집권 20년동안 10여차례 신라와 전쟁을 벌였다 2년에 한번꼴로 전쟁을 했다는 것이다
의자왕의 끊임없는 신라 정벌 이면에는 백제의 오랜 아픔이 있다
-지도고구려가 한강 뺏는C.G5 백제의 첫도읍지인 서울 한강 유역을 고구려에 빼앗기고 한강 회복이 염원이었던
백제 -
-지도 백제 신라 한강다시C.G5 백제는 신라와 손을 잡고 고구려를 몰아내고 한강 유역을 회복한다
-지도 신라가 한강C.G5 그러나 곧바로 신라는 백제가 되찾은 한강 하류 지역을 급습한다
#이도학 교수 인터뷰 "한강유역은 백제의 발상지가 되겠습니다. 하안성
백제가 자리잡고 있었던 곳이고요, 76년만에 나제동맹을 적절히 활용하여 한강유역을 회복 하기까지 했던 곳
입니다. 그런데 신라의 배신 행위로 한강유역을 상실했기 때문에 이 곳을 회복해야되겠다는 그런 열망과 이상,
이것이 백제 사람들은 뜩겁게 가지고 있었고 그 염원을 이루기 위해서 의자왕은 한강유역탈환을 박차를 가하게
된 것입니다"
-의자왕이 회복한 땅C.G13 그렇기 때문에 의자왕의 제일의 목표는 빼앗긴 땅을 되찾는 것이었다.
의자왕은 낙동강 동쪽으로 신라를 몰아내고 소백산 넘어까지 영역을 넓혔다
-황교수 인터뷰 "고대 국가에서의 전쟁이라는 것은 왕의 통치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의자왕이 신라에 대한
공격을 지속적으로 할 수 있었다는 것은 결국 내부적으로 의자왕의 정치가 내부적으로 성공을 거두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고 그 기반으로 신라에 대한 공격이 가능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 된다"
-정림사지 멀리서 Z.I15 끊임없는 정복 전쟁이 가능했던 배경에는 안정적인 국정 운영을 기반으로 한 강한
국력이 있었다
의자왕때의 강성함은 정림사지 5층 석탑에서 확인된다
-탑아래에서T.U8 왕성의 중심 사찰인 정림사는 백제가 망할때 불에 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지금은 석탑만
남았다
-탑 전체 크레인PAN15 백제의 영광을 자랑하던 정림사지 5층 석탑 -
석탑엔 백제 멸망때의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다
-탑신아래 크레인PAN20 그런데 석탑의 일층 탑신에는 당의 소정방이 백제를 멸망시키고 전승 기념으로 새긴
글들이 사면 가득 채워져 있다
-대당평백제비글자 발생8 탑신 가장자리에는 대당평백제국란 글이 선명하다.
-탑신 글자 인구수17 여기에 의자왕 당시 백제의 강성함을 알수 있는 단서가 있다.
백제 멸망 당시의 고을수와 가구 인구수가 새겨져 있는데 당시 백제의 인구는 620만명이다-
당시의 생산력에 비교한다면 놀라운 수이다
-이도학 교수 인터뷰 "상당히 많은 인구를 거느린 사회였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이것은 백제 멸망기에 기록이 된다. 그리고 중국기록에 보면 백제가 멸망할 때 인구가 76만호라고 되있다.
1호당 5명씩 잡는다면 400만정도가 되는 것이다. 400만에서 600만의 인구를 거느린 그런 나라가 백제였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고, 이것은 백제가 멸망할 때의 인구수를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백제가 망할 때까지
많은 인구를 거느리고 있는 안정적인 그런 부강한 나라였다는 것을 단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스튜디오 탑11 의자왕은 안정적인 내치를 기반으로 끊임없는 정복 활동을 벌여 온 강력한 정복 군주였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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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튜디오4
-텅빈 정림사지, 5층석탑만 남겨진 것 보며 탑이 참 아름답습니다
소박하면서도 우아한 정림사지 5층 석탑은 강성한 백제의 모습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백제가 멸망하는 의자왕때도 백제는 아주 강성한 나라였습니다
의자왕때 백제가 강성했다는 것은 그 당시 신라를 다스리고 있던 진덕 여왕과 김유신 장군의 대화를 통해 알수
있습니다
제가 당시 경주로 잠시 가 보겠습니다
-MC 신라 선덕여왕과 김유신의 대화 나누는 실루엣 쪽으로 가서 서서
진덕 여왕과 김유신 장군이 뭔가 중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것 같습니다. 들어 볼까요
-MC 신라 선덕여왕과 김유신의 대화 한쪽에서 지켜보고 있다
김유신:이대로 있을 수는 없습니다. 이제 지난날 백제에게 당한 대야성에서의 뼈아프고 치욕적인 패배를
의자왕에게 그대로 갚아줘야 합니다 대야성 전투의 보복을 할 수 있게 하여 주십시오
진덕여왕:장군, 우리가 어찌 그날의 쓰라린 참패를 잊을 수가 있겠소 그러나 작은 나라인 우리가 큰 나라인
백제를 건드렸다가 위험을 당하면 장차 어떻게 하겠소
-MC 대화 듣고 돌아서면 뒤 기본세트로
'이소촉대' 라 -
작은 나라인 신라가 큰나라인 백제를 건드리다가 위험을 당하지 않을까 걱정을 하고 있군요.
의자왕 당시 백제는 이렇게 신라가 대적할 수 없는 강국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또 한가지 짚어 봐야 할 점이 있습니다
시청자 여러분, 의자왕이 삼천궁녀와 술과 향락에 빠졌을 때 의자왕의 나이가 얼마였는지 아십니까
육십이 넘은 나이였습니다
육십 이전에는 의자왕이 술과 여자을 가까이 하거나 좋아했다는 내용은 그 어떤 기록에서도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좀 의외라는 생각이 들지 않으십니까
말년에 술과 여색에 빠졌다는 의자왕 -이런 의자왕의 모습에는 삼천궁녀에 가려진 놀라운 진실이 숨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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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4 삼천궁녀에 가려진 진실 - 의자왕의 왜곡
-운동장 학생F.S4 (보고)
-운동장줄선 육백명PAN17 먼저 삼천 궁녀의 실체를 알아야 의자왕의 진실에 다가 갈 수 있다
조회시간, 운동장을 꽉채운 학생수는 모두 육백명.
-줄서서 올라가는17 (보다가)
삼천 궁녀는 이보다 다섯배나 더 많다는 것이다 삼천 궁녀란 얼마나 많은 수인가
-주서 부여인구13 주서의 기록에 의하면 당시 백제 수도 사비의 인구수는 1만호라고 한다. 한호구당 다섯명씩
총 오만명이 백제의 수도 사비에 살았다는 것이다
-전체 오만 여자2만오천C.G13 궁녀의 숫자를 한번 보자 전체 인구 중 궁녀의 비율을 따져 보자
오만명중 여성이 2만 오천명 - 2만 5천명의 여성중
-2만5천서 만오천 3천명C.G14 아이와 노인을 빼고 젊은 여성을 만오천명이라고 가정하자 그렇다면 사비 도성의
젊은 여성 20%가 다 궁녀라는 얘기가 된다
-먹는 양C.G15 이번에는 먹는 식량을 따져 보자 성인 하루 먹는 양은 삼백그램.
삼천명이 하루에 먹는 양은 9백킬로그램이나 된다 50킬로그램을 한가마로 할때 삼천궁녀에게 드는 식량은
한달에 540가마나 된다
-부여시가지PAN15 지금의 부여와 백제 사비도성 시대때의 부여는 도시 규모로 볼 때 별 차이가 없다
-궁궐터 위치C.G표시4 당시 궁궐의 정확한 규모는 알 수 없지만 확인되는 유적을 통해 대략 파악이 된다
-현왕궁터 PAN15 발굴중인 백제 사비 시대의 왕궁터 -
그렇다면 삼천 궁녀도 이곳 어딘가에 거주했을 것이다
-궁궐터9 이곳에 삼천궁녀를 수용할 공간이 있을까 도대체 삼천 궁녀는 어디에 살았을까
-관장 인터뷰 "서 있는 이곳이 백제의 왕궁터라고 추정된다
이면적 뿐만 아니라 좀더 넓은 면적이 되겠지만
3천명이 머물수 있는, 더군다나 궁녀만 삼천명이 머물수 있는 그런 공간은 도저히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쉽게 생각해도 현재 부여 시가지 인구 몽땅 합쳐봤자 2만 7천밖에 되는 않는데 어떻게 3천명이 머물수 있는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궁궐터 서있는5 이 왕궁터에서는 삼천 궁녀를 수용할만한 공간이 없다
-이익 성호사설 기록13 조선시대의 기록을 통해 삼천궁녀를 알아 보자.
당시 조선 영조때 쓴 이익의 성호사설에 궁녀의 수는 육백여든 네명이라는 기록이 있다
-조선왕조 고종 실록18 고종 실록에도 궁녀의 수를 적어 놓은 기록이있다.
대전 및 각전궁의 궁녀는 다합해서 사백여든명. 이들 기록을 통해 조선시대 궁녀는 오백명에서 육백명에 이르렀
음을 짐작할 수 있다
-교수 인터뷰 "역사적볼 때 궁녀의 수는 시대가 흐를수록 증가 추세라고 볼 수 있는데 조선왕조 26대 고종
대체로 19세기 후반 별궁까지 합치면 총합 6백명 이상 궁궐에 거주 확인된다 그런 것 비춰서 백제가 멸망할 때는
7세기 중엽인데 그때 관원의 숫자나 당시 인구 농업 생산력 왕실의 규모에 비춰 볼 때 삼천궁녀가 궁궐에 거주할
수 있다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삼국 사기 컴퓨터검색피디9 그렇다면 삼국사기에는 삼천궁녀를 어떻게 기록하고 있을까
당시의 기록 속에서 삼천궁녀를 찾아 보자
-검색어 삼천궁녀9 놀랍게도 삼천궁녀에 관한 기록은 없다
의자왕을 검색해도 삼천궁녀에 관한 기사는 그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는다
-의자왕조 검색내용15
말년에 궁인들과 음황탐락했다는 기사외에는 삼천 궁녀와 관련된 그 어떤 기록도 없다.
일본 서기나 구당서에도 의자왕의 주색에 관한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삼국유사 궁인기록15 다만 삼국유사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부여 북쪽에 큰바위가 있는데 궁인들이 떨어져 죽었다는 낙화암의 전설이 남아 있다
-장판간 가는 트레킹7 당시 기록에 전혀 없는 삼천궁녀가 어떻게
우리에게 전해지게 된 걸까 삼천궁녀의 실체는 뭘까
-마을 PAN6
-장판각7 이곳에는 아주 귀한 조선 시대 목판각이 전해져 오고 있다
-실내 목판PAN8 조선 중기 최고 시인이자 문인이었던 민제인의 선생의 문집 판각이다
-목판T.D11 문집 6권은 모두 탁월한 문장의 시다
-백마강부빼내는9 여기에 삼천궁녀에 관한 단서가
있다.
-목판PAN 백마강부글자7 문체가 화려하고 아름다워 조선시대에 널리 알려진 백마강부라는 시다
이때 처음으로 궁녀 수 삼천이란 말이 등장한다
-교수 EFF "망, 바라본다. 삼천사람이 그것이 마치 구름과 같이 보여가지고 궁녀, 후궁들의 분을 바르고
얼굴을 곱게 한 것에 현혹된다.누가 그랬냐하면 의자왕이 그렇게 됐다는 거죠."
-백마강부 내용C.G15
-구중회 교수 인터뷰 "의자왕하면 삼천궁녀. 삼천이라는 숫자는 조선 중기에 제기 사실 삼천이라는 것은 숫자
개념 보다는 문학적 상징 전통적으로 삼 많이 쓴다
문화적 상징 의자왕 후궁이라는 것도 여자라는 개념보다 부인들의 개념으로 이해하는 게 좋을 것 같다"
-강물+다른 시내용15 삼천궁녀는 문인들의 감성의 표현이며 망국의 비애를 담은 시어다.
조선시대때 문인들에 의해 쓰여진 문학적 상징어로 등장한 말이 바로 삼천궁녀인 것이다
-구중회 교수 인터뷰 "조선조는 유교 국가 성종때부터 완비된 상태인데 그런쪽 군주들이 어떻게 통치를 해야
하나 강조하다 보니까 패망 군주인 의자왕 얘기가 나오고 삼천궁녀 이야기가 나왔는데 이런 것은 조선조 사회의
특징에서 보여지는 것으로 이해를 해야 겠다"
-음반자료실PAN8 삼천궁녀가 마치 사실인 것처럼 받아들여진 결정적 계기는 바로 대중 가요다
-검색하는5 삼천궁녀를 노래한 가요를 검색해 보자
-노래 검색 나오는29 삼천 궁녀 이야기를 노래하는 가요는 놀랍게도 수십곡이나 된다.
일제시대부터 1960년대까지 주로 불리어졌다
패망한 나라에 대한 애틋함이 쉽게 대중들에게 다가간 것같다
-음반들PAN17 당대를 대표하던 유명가수들은 누구나 삼천궁녀를 소재로 노래를 불렀다
이를 통해서 삼천궁녀의 전설은 자연스럽게 우리의 귀에 익숙해 졌던 것이다
-음반 돌아가고 노래EFF
#강헌 인터뷰 "사람들은 딱딱한 역사책이나 역사물 영화보다도 그 짧은 노래를 통해서 본능적으로 어떤 역사를
사실 인식하는 것을 즐겨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역술적으로는 그런 어떤 역사인식이 교묘하게 담겨질 때 그
노래는 생명력을 크게 가지게 됩니다.
3천 궁녀의 그 이야기조차가 즐겨 음악가들에게 채택되고 대중들이 그 속에서 어떤 자신의 역사를 읽게 된 것은
그 노래가 가지고 있는 그 전파력의 힘, 노래를 통한 집단적 교감의 어떤 힘이 상호작용하는 결과로,
어떻게 보면 꼭 들어맞지 않는 역사적인 사실 조차도 우리가 충분히 그렇겠구나, 라고 그런 개연성을 너무나
쉽게 인정해버리게 만드는 것도 어쩌면 그 노래가 가지고 있는 미약적인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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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튜디오5
-백마강 낙화암 보름달 떠 있고 배타고 MC 백마강 노래 한소절 읖조리며
백마강에 고요한 달밤아
고란사에 종소리가 들리어오면
구곡간장 찢어지는 백제 꿈이 그립구나
아 달빛 어린 낙화암의 그늘속에서
불러보자 삼천궁녀를
그랬군요, 세월이 흐르고 흘러 문학 작품으로 또 이렇게 유행가로 의자왕은 삼천이나 되는 어마어마한 궁녀를
거느린 방탕한 왕으로 왜곡 되었던 것입니다
삼천궁녀는 실제로 존재하지도 않았습니다
있지도 않던 삼천 궁녀 때문에 의자왕은 방탕한 왕으로 각인이 된 것이죠
그처럼 형편없는 왕이 백제를 다스렸는데, 나라인들 어떻게 성하겠는가 -
왕의 부패와 타락 때문에 백제는 저절로 망할 수 밖에 없었다는게 백제 멸망을 바라보는 일반적인 시각인데요
백제는 저절로 망할 수 밖에 없었다 - 이런 시각은 그 뿌리가 아주 깊습니다
여기 삼국유사의 기록들을 한번 보실까요
-삼국사기 이변 기사 걸리고
백제가 멸망하기 바로 직전입니다. 백제에는 각종 희한한 일들이 벌어집니다. 천재 이변의 기사가 가득한데요,
'여우떼가 궁중에 들어 왔는데 흰 여우 한 마리가 상좌평의 책상에 올라 앉았다'
'두꺼비 수만마리가 나무위에 모여 들었다'
'어떤 여자의 시신이 떠내려 왔는데 길이가 18척이었다'
'태자 궁의 암탉이 작은 참새와 교미를 하였다'
이런 이변들이 백제가 멸망한다는 징조였다는 겁니다
물론 이런 이상한 일들이 일어났다는 것은 백제 내부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은유적으로 말한 것일텐데요,
그렇더라도 백제 멸망의 징조로는 너무 황당스러운 이해가 안되는 것들입니다
마지막까지도 강성했던 백제는 왜 망할 수 밖에 없었을까요 백제 멸망의 진실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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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5 백제는 왜 망했는가
-부여 박물관5 이곳에는 백제 멸망의 날을 엿볼수 있는 유물이 있다
-국보 백제대향로10 백제 왕실의 상징 금동 대향로 -향로는 당시 백제 최고의 보물이었다
-향로T.U13 백제 최고의 걸작인 이 향로의 발견을 통해 백제 최후의 날을 볼 수 있다
-능산리 가는 트레킹8 백제 대향로가 발견된 곳은 부여시 외곽, 능산리 고분지다
-발굴지PAN11 이곳은 백제 왕릉을 관리하던 왕실의 사찰이 있던 곳이다
-웅덩이 비닐11 향로는 이곳에서 공사중에 우연히 발견되었다
그런데 눈길을 끄는 것은 이 향로가 누군가에 의해 일부러 묻혔다는 것이다
-웅덩이 향로 사진4 향로가 발굴될때의 모습이다
-웅덩이 향로 돌로Z.I 15 웅덩이의 안쪽 바닥에는 나무 판자를 깔고 그위에는 잘게 부순 토기 조각이 깔려 있다.
일부러 묻었다는 흔적이 엿보인다
-향로 있던 자리 기왓장13 백제의 최후의 날에 누군가가 이 향로를 황급히 묻었던 것이다
-관장 인터뷰 "백제 금동 대향로는 왕실의 최고의 물건이 됩니다. 그런 최고의 물건이 누군가에 의해서
땅속에 묻혀진 채로 발견이 됐습니다. 이런 위급한 상황, 제대로 잘 보관되지도 못하고 땅 속에 묻힐 정도로
그렇게 위급한 상황은 바로 백제가 마지막 망할 때 얼마나 다급했는지 그런 상황을 잘 말해준다고 하겠습니다."
-건릉으로 ZI13 다급했던 백제 멸망의 긴박한 상황을 알려면 당시 국제 정세를 살펴봐야 한다
-참배로 사신조각상18 당시 동북 아시아는 당을 중심으로 하는 국세 질서 속에 움직이고 있었다
백제도 무왕때부터 당과 조공 사신을 보내며 우호적인 외교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당태종 영정11 의자왕이 즉위 했을 때 당태종은 책봉 교서를 보내 의자왕의 전통성을 인정했다
-영정 자막11 '기사'
-양직공도 백제 사신5 의자왕은 즉위 이후 매년 조공사신을 보내 당과 우호 관계를 유지했다
자막11
(자막보고)
-백제 신라 공격13 반면 신라에 대한 공격은 계속됐다
백제의 지속적인 공격으로 궁지에 몰린 신라는 당과의 관계에 국운을 걸었다
-신라 복식 당의것 책3
-신라복식 당 내용17 당의 원조를 얻기 위해 신라는 제도와 복식, 연호를 당나라 것으로 바꾼다
-진덕 여왕 당태평송19 당시 최고 통치자였던 진덕 여왕이 직접 당을 찬양하는 시를 지어 바칠 정도로
신라는 당에 대한 사대 외교 정책을 전면에 내세운다
#이도학교수 인터뷰 "신라측에서 사생결단식으로 당나라와의 관계에서 돈독하게 맺기 위해서 노력을 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결국 의자왕이 당나라와의 우호적인 외교를 맺었음에도 불구하고 당나라 세력이 대동방제국 일환으로
당나라 편,
또하나는 당나라 입장에서 볼때는 고구려를 멸망시키는 것이 궁극적인 목적이었고, 이러한 전략적인 차원에서
효과적인 후방에 병참기지를 확보할 수 있었다고 봤던 것이다 백제를 소멸 시켜서 남북으로 협공해서 고구려를
멸망시킬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판단했기 때문에 신라의 편을 들어 줬다고 볼 수 있다"
-당 깃발+고종 명령13 당의 노골적인 신라의 편 들기는 의자왕으로서는 받아 들이기 어려운 요구였다
#양교수 인터뷰 "그동안 지속시켜왔던 신라로부터 빼앗긴 땅을 되찾는 작업을 계속해 나가느냐,
아니면 중국 당나라의 요구를 받아 들여서 신라로부터의 실지회복을 포기를 하고 동북아 질서에 편입되느냐
둘중 하나를 선택할 수 밖에 없었는데 결국 의자왕의 입장에서는 신라에게 빼앗긴 땅을 되찾는 문제가 중요한
것으로 받아졌기 때문에 결국 중국 중심의 질서로부터 벗어날 수 밖에 없었던 것으로 판단이 됩니다"
-일본 나라F.S5 결국 의자왕은 즉위 12년인 652년 당과의 관계를 청산하고 새로운 국제 관계를 모색한다
-정창원 PAN11 일본 왕실의 유물 창고인 정창원에는.9천여점의 진귀한 유물들이 소장돼 있다.
-창고 문잠긴7 여기에 의자왕의 외교 정책을 알 게 하는 유물이 있다
-바둑판7 의자왕이 일본의 권력가에 보냈다는 선물인데 매우 섬세하고 아름다운 문양들이 조각된 바둑알이다
-바둑알17 당시 일본은 백제와 고구려 신라 삼국 모두 우호관계를 맺고 있었다
이러한 일본을 의자왕은 친백제 쪽으로 끌어 들인다
-지도 당 신라, 백제 고구려 백제와 고구려의 전통적인 우호관계에 일본이 가세하는 새로운 국제 질서가 성립한다
일본 십자외교 C.G11 당과 신라가 동맹하고 고구려와 백제 일본이 동맹하는 이른바 십자 외교 관계다
-북계 침공 기록13 이러한 국제 관계를 토대로 의자왕은 멸망 한해 전까지도 의자왕은 신라에 대한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양교수 인터뷰 "중국 뜻에 부합되지 않는 행위를 하고 있는 의자왕의 모습은 중국 입장에서는 국제적인
문제아로 비춰질 수 밖에 없던 상황이었습니다"
-소정방 당13선단출발 C.G10 악화 일로를 걷던 백제와 당나라 관계는 660년 마침내 당이 13만 대군을 이끌고
백제를 침공하면서 파국을 맞이한다
-당에서 덕물도C.G5
-뱃전 머리11 당군은 서해에서 덕물도를 거쳐서 백강으로 상륙하고 신라의 군대는 계백의 5천 결사대를 황산
에서 돌파하고 마침내 18만의 나당 연합군이 사비성으로 몰려 든다
-바다로 선단 들어오는C.G13 18만 대군의 기습적인 공격 앞에 7백여년 역사의 백제는 660년 7월 18일 역사에서
지워진다
-이도학 인터뷰 "당나라와 신라가 연합해서 백제를 공격, 결국 망하게 되는데 당나라는 세계 최강의 군대
대제국과의 충돌이라는 것은 백제의 멸망을 자초하는 상황이라고 봐야 한다 의자왕 아니라 걸출한 임금이 나왔다
하더라도 당나라와의 싸움 승산이없었다"
-항복식17 660년 8월2일
사비성에선 백제의 항복 의식이 치러진다 의자왕이 단아래에서 김춘추와 소정방에게 술을 따르자 울지 않은
백제인들이 없었다고 기록은 전하고 있다
-바다 석양 자막18 강성한 대백제를 이끌던 의자왕 그는 포로 당나라에 끌려간다
그리고 천삼백여년동안 돌아 올 수 없었다
-황교수 인터뷰 "의자왕 최고 통치자 분명 백제 멸망 책임 벗어 날 수 없다 의자왕 개인 자질 연결 평가하는
것은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장식 행렬13 (보고)
지난 2천년 부여에서는 의미 있는 행사가 열렸다.
중국 낙양 북망산에 묻혀 있었던 의자왕의 넋을 모시는 영토봉안식이 있었다
-이장식13
-하늘에서 무덤25 한때 해동증자로 불리며 강국 백제를 이끌던 의자왕
그는 천 삼백여년만에 돌아와 백제 왕실 묘역에 아들 융과 함께 다시 묻혔다.
멀리 옛 백제의 도성을 바라보며 삼천궁녀에 가리워진 그의 진실을 말없이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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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튜디오6
-비오는 능산리 의자왕 이장 묘 앞에서
지금까지 우리는 의자왕과 백제 멸망의 진실에 대해 알아봤습니다
만주 부여에서 출발하여 한강에 뿌리 내리고 국가의 터전을 잡았던 백제 - 칠백여년이라는 오랜 역사로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던 강성한 나라가 바로 백제였습니다.
그런 나라를 망국으로 이끈 의자왕 - 그는 어떤 이유로든 나라를 잃어버린 군주의 책임을 벗을 수 없습니다
강대국인 당나라와 아슬아슬한 줄타기 외교를 벌였던 의자왕 -결국 당의 실리에 따른 외교 정책에 따라 백제는
멸망했습니다
분명 백제 멸망은 의자왕에게 책임이 있습니다 당이라는 거대한 외세의 침입을 막지 못했다는 것 -
이것이 바로 군주로서 의자왕이 책임져야 할 부분입니다
의자왕은 당의 공격으로 멸망하기 전까지 백제를 아주 강성한 나라로 이끌었던 왕이었습니다.
백성들에게도 자혜로웠던 왕이었습니다
이런 의자왕의 면모는 간데없이 실제 존재하지 않았던 삼천궁녀로
인해 의자왕은 방탕한 군주의 대명사로 낙인 찍혀져 있습니다.
마치 백제의 멸망이 의자왕의 인간적인 결함 때문인 것처럼 폄하되어 평가 되어 있는 의자왕 -
이제 의자왕은 새롭게 인식되어져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백제 멸망의 진실 또한 재조명되어져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