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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찬양하라
시편 104:1-35 / 찬송가 79장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
79장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
1절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 내 마음 속에 그리어볼 때 하늘의 별 울려퍼지는 뇌성 주님의 권능 우주에 찼네 <후렴>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내 영혼이 찬양하네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내 영혼이 찬양하네
2절 숲속이나 험한 산골짝에서 지저귀는 저 새소리들과 고요하게 흐르는 시냇물은 주님의 솜씨 노래하도다
3절 주 하나님 독생자 아낌없이 우리를 위해 보내주셨네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신 주 내 모든 죄를 대속하셨네
4절 내 주 예수 세상에 다시올 때 저 천국으로 날 인도하리 나 겸손히 엎드려 경배하며 영원히 주를 찬양하리라
작시(作詩) / 원작자 카알 구스타프 보베르그(Borberg, Carl Gustaf. 1859-1940)는 스웨덴 뮌스터라스 출생. 선창에서 일하는 목수의 아들로 태어났고, 19세에 회심한 후 크리스턴함에 있는 성경학교에 다녔으며, 고향에서 2년간 목회를 시작했다. 감리교 목사로서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루마니아, 러시아 선교사로 사역하였다.
본 찬송은 보베르그 목사가 1889년 어느 여름날 스웨덴 남동 해안에 펼쳐진 작은 마을에서 아름다운 자연의 정취에 흠뻑 젖어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천둥과 함께 소나기가 세차게 쏟아졌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갑자기 무서울 정도로 번쩍번쩍 거리면서 내리는 뇌우와 뒤이어 활짝 갠 하늘에 태양이 찬란히 빛나고 숲속의 새들의 지저귐을 들었다. 그 경험은 그를 무릎 꿇어 위대하신 하나님을 겸손히 기쁨으로 찬양케 하였다. 하나님의 오묘하고도 놀라운 창조 솜씨에 온통 마음을 빼앗겼던 경험을 토대로 하여 지은 것인데, 시 19:1을 말씀을 상기시켜 준다. 그는 9절로 된 시를 써서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표현했다.
1886년 3월 13일에 뮌스트라스 티드닝겐(MonstrasTidningen)에서 출판했으나, 몇몇 정기 간행물에 잠시 실렸다가 잊혀지고 말았다고 한다. 여러 해가 지나 그는 후칼 보버그가 배름란트(Varmiand) 지방의 한 집회에 참석하였는데, 회중들이 스웨덴 옛 가락에 맞추어 자신의 시를 노래하는 것에 깜짝 놀랐다고 한다. 자신의 가사와 그 곡을 함께 출간하였다고 한다.
영국 태생의 감리교 선교사인 하이네 목사가 원가사의 줄거리를 손상시키지 않고 오늘날의 네 절 가사로 만들었다. 그는 러시아 선교사로 갔다가 거기서 3절로 된 이 러시아역 찬송에 감명을 받고 이를 영역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영국으로 돌아온 그가 1848년 4절을 덧붙여 야외예배 때에 애창되는 오늘의 찬송가가 되었다. 정작 이 찬송이 유명하게 되어 널리 알려진 것은 독일어로 번역되고, 또 다시 러시아로 번역되고 나서이다. 그가 이렇게 귀한 찬송시를 접할 수 있었던 것은 부패와 타락의 극치를 이루었으며 그로 인해 몰락하게 되는 러시아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로 파송되었기 때문이다.
이 찬송은 지난 근 40년 동안 많은 사람들에 의해 널리 불린 20세기의 훌륭한 찬송가이다. 이 찬송이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유명한 복음성가 가수들에 의해서였다. 특히 빌리 그래함 전도단의 두 가수가 런던 전도 대회에서 부른 이후,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 하루 종일 ‘하나님을 찬양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설교’를 하고 싶은 충동에서 인터넷으로 검색을 하는 중에 시편 104편을 접하면서 15절‘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포도주와 사람의 얼굴을 윤택하게 하는 기름과 사람의 마음을 힘있게 하는 양식을 주셨도다(현대어성경 : 포도를 거두게 하시어 흥겹게 하시며 올리브 기름을 거두게 하시어 얼굴을 윤기 내게 하시며 양식을 주시어 힘차게 하십니다.)’을 읽다가 요한복음 2:1-11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들어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흥겁게) 하시는 것을 묵상하며 이렇게까지 영생을 얻는 복음(요한복음 6장 생명의 양식)을 전하시기 위하여 배려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여 본 설교를 준비하게 된 것이다.
본 론
104편의 저자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으나 다윗으로 추측을 한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자연 만물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창조의 신비를 노래하고 있다. 한편의 그림같은 이 시를 한절 한절 따라가다보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이 세상이 얼마나 아름답고 조화로운지를 볼 수 있다. 또한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그 만물을 먹이시고 돌보시는 세밀한 손길을 느끼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우주만물을 생각하면서 ‘우주가 어떻게 생겨나게 되었는지? 진화론이냐? 창조론이냐?’를 가지고 논쟁을 한다. 그러나 시인은 자기가 보고 느끼고 경험하고 있는 이 만물은 논쟁이나 지식의 문제를 넘어 묵상의 내용이었고,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는 주제였다. 그가 바라보며, 누리고 있는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그에게 ‘심히 광대하며 존귀와 권위를 입은 하나님’이셨다. 그에게는 창조주 하나님은 찬양과 송축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아무것도 하지 않더라도 눈을 들어 우리가 보는 이 자연을 볼 때에 그분의 광대하심과 부요하심을 어찌 찬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오늘 말씀의 묵상 끝에 우리 또한 하나님의 광대하심과 부요하심을 깨닫고, 창조주 하나님을 송축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
바울은 로마서에 이렇게 말한다.
롬 1:20 / 세상이 창조된 이래 인간들은 땅과 하늘과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것을 보고 그분이 어떠한 분이며 또 얼마나 위대하고 능력이 영원한 분인가를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심판날에 하나님 앞에 설 때 인간은 변명할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하는 특별한 계시라면 자연은 우리에게 이땅을 창조하신 분이 계심을 분명하게 선포하여주는 일반 계시다. 자연은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하나님은 위대한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을 송축하라.’
바위에 새긴 정교한 조각물을 보면서, 그것이 바람과 비에 의해서 우연히 만들어졌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훌륭한 조각가의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흥미진진한 소설을 읽으면서, 그 소설이 우연히 글자가 종이에 날라와서 붙여져서 그 소설이 쓰여졌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이와같이 정확한 질서가운데 창조되고 그 질서가 유지되며 보존되는 자연과 그 속의 생명을 보면서 세상은 그것이 우연히 만들어졌다고 이야기하지 않는다. 우연히 그것이 생겨졌다고 믿는 것과 지혜의 근본이요 영원한 능력을 가지신 지혜자가 그것을 계획하고 설계하며 만들었다고 믿는 것 중 어떤 것이 지혜로운 것일까?
창조의 첫째 날에서 셋째 날 찬양(1-18절)
오늘 본문은 표제어가 없다. 시편 103편의 시작과 끝이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였는데, 본문 104편도 동일하게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로 시작하고,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로 끝난다. 다만 뒤에 ‘할렐루야’가 더해져 있다.
시편 103편이 하나님을 송축하는 이유가 하나님의 인자하심, 긍휼하심, 죄를 멀리하여 주심과 같은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것이었다면, 104편은 ‘하나님의 능력’을 송축하고 있다.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역사(행하심)은 언제나 우리의 송축과 찬양의 대상이자 이유, 목적이다.
특히 시편 103편이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찬양했다면, 104편은 하나님의 창조와 관련하여 자연 질서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섭리와 권능을 찬양하였다. 그렇게 보면, 본문은 창세기 1장에 나타난 하나님의 장엄한 창조사역에 대한 피조물인 인간의 화답시라고도 할 수 있다. 그래서 본문은 구조적으로도 창세기 1장을 비슷하게 따라간다.
1-2a절은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송축과 첫째 날 창조하신 것에 대한 찬양이다.
시 104:1-2a /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주는 심히 위대하시며 존귀와 권위로 옷 입으셨나이다 주께서 옷을 입음 같이 빛을 입으시며
시인은 시편을 열며 하나님은 ‘심히 위대하신 분’이시며, 입으신 옷이 ‘존귀와 권위’라고 노래한다. ‘심히 위대하시다’는 그 지혜와 능력이 무한하다는 의미이다. 어떤 물건이든 그 물건보다 그것을 만든 사람이 더 크고 위대하다. 그래서 제품이나 작품은 그것을 만든 사람을 뛰어넘을 수 없다. 우주의 크기가 465광년이라고 하는데, 하나님은 그것보다 크신 분이시다. ‘존귀와 권위로 옷을 입으셨다’는 의미는 하나님은 그 존재와 능력에 있어서, 사람과는 무한히 질적으로 다른 분이심을 뜻한다.
그 하나님께서 사람이 옷을 입듯이, 빛을 입으셨다고 하였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하여 빛이 있게 하신 것을 뜻한다.
2b-4절은 하나님께서 둘째 날에 궁창을 만드심과 물을 궁창 위와 아래로 나누신 일을 찬양한다.
시 104:2b-4 / 하늘을 휘장 같이 치시며 물에 자기 누각의 들보를 얹으시며 구름으로 자기 수레를 삼으시고 바람 날개로 다니시며 바람을 자기 사신으로 삼으시고 불꽃으로 자기 사역자를 삼으시며
시인은 하나님께서 궁창을 만드신 것을 휘장을 펼치듯이 하셨다고 하였다. 당시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늘이 3개의 층으로 구성되었다고 생각하였다. 첫 번째 하늘은 눈에 보이는 하늘(대기권)이다. 그곳에는 구름이 떠 있고, 새들이 날아다는 공간이다. 두 번째 하늘은 해와 달과 별들이 있는 대기권 밖 천체이다. 세 번째 하늘은 하나님과 천사들이 있는 곳이다. 고린도후서 12장에 사도 바울은 자신이 14년 전의 일을 말하며, 셋째 하늘에 이끌리어 갔었다고 고백하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한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 휘장을 펼치듯이 궁창(우주공간)을 만드셨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큰지를 우리에게 그림 언어로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물에 누각의 들보를 얹었다는 것은 창조 때에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었던 것을 표현하는 것이다. 또한 구름으로 수레를 삼으심과 바람을 타고 다니심, 바람을 전령으로 삼으심, 불꽃을 사역자로 삼으심은 구름과 바람과 불과 같은 자연현상도 모두 하나님의 손 안에서 움직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5-18절은 창조의 셋째 날과 관련된 하나님에 대한 찬양이다.
셋째 날에 바다와 육지를 구분하시고, 육지에 식물 즉 풀과 채소, 각종 열매를 맺게 하셨다.
시 104:6-9 / 옷으로 덮음 같이 주께서 땅을 깊은 바다로 덮으시매 물이 산들 위로 솟아올랐으나 주께서 꾸짖으시니 물은 도망하며 주의 우렛소리로 말미암아 빨리 가며 주께서 그들을 위하여 정하여 주신 곳으로 흘러갔고 산은 오르고 골짜기는 내려갔나이다 주께서 물의 경계를 정하여 넘치지 못하게 하시며 다시 돌아와 땅을 덮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이 말씀은 바다와 골짜기와 산이 형성될 때의 모습을 노래하는 내용이다. 처음에는 물이 땅을 덮고 있었는데, 만유의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 명령하셔서 지금의 정해진 자리로 모여 바다는 바다가 되고, 산은 솟아올라 산이 되며, 골짜기는 내려가서 골짜기가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바닷물이 넘치지 않고 지금의 모습으로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경계를 정해주셨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만약 하나님께서 중력을 통해서 바다의 경계를 정해주시지 않으셨다면, 매일 쓰나미가 일어나서 이 땅에서 살 수가 없을 것이다.
시 104:14-18 / 그가 가축을 위한 풀과 사람을 위한 채소를 자라게 하시며 땅에서 먹을 것이 나게 하셔서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포도주와 사람의 얼굴을 윤택하게 하는 기름과 사람의 마음을 힘있게 하는 양식을 주셨도다 여호와의 나무에는 물이 흡족함이여 곧 그가 심으신 레바논 백향목들이로다 새들이 그 속에 깃들임이여 학은 잣나무로 집을 삼는도다 높은 산들은 산양을 위함이여 바위는 너구리의 피난처로다
땅 위에 생물들이 살아갈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해 주시고, 식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하나님께서 가축들을 위해서는 풀, 사람들을 위해서는 채소와 식물을 주셨다. 그 식물 중에는 사람들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포도주와 사람의 얼굴을 빛나게 하는 기름 그리고 살아갈 힘을 주는 양식들이 있다.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포도주를 주셨는데, 그 포도주는 포도에서 나는 것이요 그 포도나무는 물이 없으면 자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 포도주는 발효균에 의해 장시간 발효되면서 당분이 변해 알코올이 된다. 발효를 위한 누룩이 없다면 포도주는 존재할 수 없다. 고로 포도주는 기쁨을 상징하는 표현이 된다. 그 공기 중의 발효균은 하나님께서 창세 때부터 만드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포도주를 주신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쁨의 근원이 되신다는 의미라는 것이다.
또 사람의 얼굴을 윤택하게 하는 기름은 주로 감람나무에서 추출한 기름을 가리킨다. 이것은 상처를 보호하기도 하고 건조하고 더운 지방에서 피부의 수분 증발을 막아주는 보습제로도 이용되었다. 이 기름은 '풍부함' 흑은 '고귀함'을 상징하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시인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고귀하고 풍요롭게 하셨음을 노래하고 있다.
아프리카 초원 같은 곳에서는 초식동물들이 우기와 건기 때에 풀이 있는 곳으로 대이동을 한다. 그런데 무작정 이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앞장서는 것이 들소들이다. 들소들이 먼저 무성한 풀들을 먹고 지나가면 그 다음에는 얼룩말들이 지나가면서 남은 풀들을 먹는다. 그 다음에는 가젤들이 지나가며 마지막 남은 풀을 먹는다. 대이동을 하며 풀을 먹는 것만 봐도 참 신비롭게 여겨진다. 자연 속에는 사람이 잘 알지 못하는 정말 신비한 일들이 많다.
또한 나무들이 높이 자라서 그 위에 새들이 깃들고, 높은 산 바위에 산양과 너구리들이 산다. 그런 짐승들이 절벽과 같은 바위를 얼마나 잘 타고 다니는지 참 신비롭기만 하다.
시인이 풀과 식물이 자라는 땅과 나무 위, 바위로 가득한 험준한 곳들을 말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그 어떤 곳도 하나님의 섭리 밖에 있는 곳은 아무 데도 없음을 강조하는 것이다.
창조의 넷째 날에서 일곱째 날 찬양(19-35절)
19-24절은 창조의 넷째 날 해와 달과 별들을 지으심과 그것들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시 104:19 / 여호와께서 달로 절기를 정하심이여 해는 그 지는 때를 알도다
고대에는 태음력, 곧 달이 뜨고 지는 것으로 날짜를 만들어 사용했다. 그래서 절기들도 다 달과 관련이 있다. 그리고 해가 뜨고 지는 것을 보고서 하루 일을 시작하고 마쳤다.
시 104:20-23 / 주께서 흑암을 지어 밤이 되게 하시니 삼림의 모든 짐승이 기어나오나이다 젊은 사자들은 그들의 먹이를 쫓아 부르짖으며 그들의 먹이를 하나님께 구하다가 해가 돋으면 물러가서 그들의 굴 속에 눕고 사람은 나와서 일하며 저녁까지 수고하는도다
동물들 중에서 일반적으로 초원에 사는 초식동물들은 육식동물들보다 잠을 적게 잔다. 그리고 토막잠을 잔다. 경계를 많이 해야 하기 때문일 것이다. 동물의 왕국을 보면, 사자들이 낮에 사냥을 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 낮에는 잠을 잔다. 하루에 13시간 이상을 잔다고 한다. 그리고 저녁이 되면 사냥을 시작한다. 시인도 사자들이 야행성인 것을 잘 알고 있어서 해가 돋으면 굴속에 눕고, 사람들은 주행성이라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일한다고 한다.
그런데 사자들이 먹을 것을 잡으러 쫓아다니며, 하나님께 먹이를 구한다고 한다. 사자의 실제 사냥 성공률이 약 20%정도 된다고 한다. 사자가 하나님께 구한다고 하는 것은 사냥 성공률이 낮기 때문이 아니다. 백수의 제왕이라 불리는 사자도 하나님의 공급하심과 은혜 베푸심 아래에서 살아가고 있다고 하였다.
최근 과학자들이 하루살이를 연구했다. 그런데 하루살이는 꼭 하루만 사는 것이 아니라 약 삼일 이상도 산다고 한다. 그런데 입이 거의 퇴화되어 물을 약간 먹는 정도 외엔 아무 것도 먹지 않고 짝짓기를 하고 알을 낳은 후 죽는다고 한다. 물론 성충이 되기 전에는 1년 정도를 먹고 성장한다고 한다. 그간에 무려 20번 이상을 탈피를 한다. 하루에서 삼일 정도를 살아도 그들은 그 시간을 참으로 치열하고 성실하고 부지런히 사는지 모른다.
시 104:24 / 여호와여 주께서 하신 일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주께서 지혜로 그들을 다 지으셨으니 주께서 지으신 것들이 땅에 가득하니이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 너무 많다고 고백하였다. 믿음의 눈으로 가만히 세상을 들여다보니 하나님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도 세상은 오묘하고도 신묘막측하게 돌아가고 있다.
오늘 우리는 핑계치 못할 것이다. 그래서 마틴 루터는 이렇게 말했다. ‘자연은 제2의 성경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찬양케 하는 것은 단지 그가 창조주 하나님이시기 때문만은 아니다. 우리가 그분을 찬양해야 할 더 큰 이유가 있다.
25-26절은 창조의 다섯째 날과 관련하여 바다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시 104:25-26 / 아, 크고 한없이 드넓은 저 바다, 그 안에 수도 셀 수 없을 만큼 엄청난 크고 작은 피조물들이 살고 있습니다. 26) 저 바다 위에서는 배들이 이리저리 오가고 바다 속에는 또 주께서 손수 지어내신 리워야단이 노닐며
바다가 ‘크고 넓다’는 것은 ‘인간의 영역 밖에 있다’는 의미한다. 바다 가장 깊은 곳까지 가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리고 바다에 얼마의 생물이 사는지 아는 사람도 아무도 없다. ‘리워야단’은 바닷 속에 사는 미지의 생물을 가리키는 말로, 인간을 괴롭히고, 바다에서 재난을 일으키는 악한 세력을 뜻한다. 하지만 그 리워야단도 하나님의 다스림 속에 있다는 피조물에 불과하다.
27-30절은 창조의 여섯째 날에 지어진 지상의 생물들에 대해서 노래하였다.
시 104:27-30 / 그 모든 것들이 주께서 때에 맞춰 먹을 것 주시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28) 주께서 먹을 것을 주시니 저들이 먹고 주께서 손을 펴시니 부족함이 없이 지냅니다. 29) 그러나 주께서 얼굴을 돌리시면 무서워 떨고 주께서 저들의 숨결을 거두어 가시면 저들은 죽어 본디 왔던 그곳으로 흙이 되어 되돌아갑니다. 30) 하오나 저들에게 숨결을 불어넣으시면 다시 창조됩니다. 온 땅이 새롭게 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땅 위에 사는 모든 생물들에 대해서 절대 주권을 갖고 계시며, 그 모든 것들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하시며, 생사를 주관하고 계심을 말한다. 인생이 모래시계와 같아서 마지막 모래가 언제 떨어질지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그래서 생명이 있는 동안에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목적으로 사는 것만이 영원히 가치가 있다. 하나님이 영원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 모든 것을 계획하시고, 위대하신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돌보신다는 것이다. 아니 이 모든 우주 만물의 창조가, 이 모든 것이 아담과 하와와 그의 후손들을 위해 창조되었다는 사실이다.
바로 104편 시인은 그런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이 모든 창조가 나를 위해 창조되었구나!!’
바로 이런 사실 - 창조주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이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우리를 돌보시는 분 - 이라는 사실을 통해 우리는 세상이 줄 수 없는 안식과 안전함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도 우리는 이 자연을 바라보며, 묵상하며 우리를 돌보시는 하나님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31-35절은 하나님의 영광을 기원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며 살 것을 결단하는 내용이다.
시 104:33-35 / 이 목숨 다 바쳐 여호와를 노래하리라. 나 살아 있는 동안 나의 하나님을 노래하리라. 34) 내 노래 들으시고 주께서 흐뭇해하셨으면 얼마나 좋을까! 여호와 생각만 해도 내 마음 이토록 기쁨에 설레네. 35) 하느니 못된 짓 하는 것들을 이 땅에서 쓸어 버리소서. 남 등쳐 먹고 짓누르며 착취하는 것들을 이 땅에서 아예 없이하소서. 나 여호와께 감사드리리라. 할렐루야.
시인은 평생 그리고 살아 있는 동안 하나님을 찬양할 것임을 다짐하였다. 시인은 하나님의 창조와 섭리를 생각하며, 늘 하나님을 묵상하는 삶을 살았다.
시편 104편은 그 규모가 거대하면서도 허황(虛荒)되지 않고, 한 폭의 그림을 보는 것처럼, 하나님의 창조와 하나님의 섭리를 섬세하게 잘 표현하였다. 그래서 이 시편은 하나님의 창조를 그린 시 중에서 백미(白眉)라 불린다.
시인이 온 우주의 창조를 이렇게 잘 묘사해 놓은 것은 그 속에 있는 우리가 하나님께 그만큼 소중한 존재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온 우주와 대자연을 축소하면 우리의 인생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시고, 우리를 인도해 가신다. 우주와 자연 속에 하나님이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는 것처럼 우리의 인생도 가만히 들여다보면 하나님이 손길이 닿지 않은 것이 없다.
복음성가 ‘하나님 한 번도 나를 실망시킨 적 없으시고’의 2절 가사 앞부분이 이렇다. ‘지나온 모든 세월들 돌아보아도 그 어느 것 하나 주의 손길 안 미친 것 전혀 없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하나님은 언제나 신실하셨고, 영원한 사마리아 사람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심어주신 곳에 찾아와 주셨기 때문이다.
온 우주를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 같이 작고 연약한 존재도 불가사의하게 그리고 신묘막측하게 인도해 주신다. 오늘도 마음과 정성을 다해 심어주신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과 동행함으로 말미암아, 또 다른 사람에게 그 하나님을 삶으로 알려주는 이웃으로 살아가는 복된 날이 되시기를 축복한다.
이렇게 끝을 맺으려 한다.
오늘 두려움과 걱정속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연약한 인생이다. 그렇기에 오늘 우리는 하나님을 묵상해야 한다. 이 모든 것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아시고, 돌보신다는 사실을 말이다.
시 121:1-7 / 나 눈을 들어 산을 본다.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오는가? 2) 하늘과 땅을 지어내신 여호와 주님만이 홀로 나를 도우시는구나. 3) 너를 쓰러지지 않게 하시려 주께서는 너를 지키시며 졸지도 아니하신다. 4)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는 졸지도 아니하신다. 주무시지도 아니하신다. 5) 여호와 너를 지켜 주신다. 여호와 너를 구해 주신다. 네 곁에서 너를 보호하신다. 6) 낮 동안 해가 이글거리며 내리친다 해도 너를 해치지 못하리라. 밤이 되어도 달이 너를 다치지 못하리라. 7) 어떤 위험 닥쳐와도 여호와 너를 지키시리라. 너를 보호하시리라.
예수님은 마태복음 6:25-32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마 6:25-32 / 그러므로 내가 전정으로 말한다. 먹고 마시고 입고 하는 것으로 염려하지 말라. 너희는 이미 생명과 몸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먹고 마시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하지 않느냐? 26) 공중의 새들을 보라. 새들은 씨를 뿌리거나 거두어들이거나 양식을 곳간에 모아들이지 않으나 먹을 것을 걱정하지 않는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기르시기 때문이다. 그런데 너희는 새들보다 훨씬 더 귀하지 않느냐? 27) 너희가 걱정한다고 해서 그 걱정이 너희 목숨을 한 순간이라도 연장시킬 수 있겠느냐? 28) 또 너희는 왜 의복 때문에 걱정하느냐? 들의 백합화를 보라! 백합화는 수고도 길쌈도 하지 않으나 입을 것을 걱정하지 않는다. 29) 그러나 온갖 영화를 누린 솔로몬왕도 그 꽃만큼 아름답게 옷을 입지는 못하였다. 30) 믿음이 적은 자들아! 오늘 피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질 꽃들도 하나님께서 이렇게 잘 돌보아주시는데 하물며 너희야 더 잘 돌보아주시지 않겠느냐? 31) 그러므로 음식과 의복을 쌓아 두려고 걱정하지 말라. 32) 왜 그런 것에 마음을 쏟고 자랑을 늘어놓는 이방인처럼 되려고 하느냐?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는 그것이 너희에게 필요하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계신다.
위대하신 창조주 하나님, 공중의 새들을 기르시는 하나님, 들의 백합화도 기르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어주시겠다고 하시매 우리는 이런 저런 염려를 하기보다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자. 그리하면 평생토록 후회함 없이 하나님과 동행한 에녹과 같은 삶을 살 것이다.
마 6:33-34 / 만일 너희가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이룰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른 일을 어떻게 실천할까 고민하면서 그분을 생활의 중심에 모시고 살면 그분은 너희에게 이 모든 것을 더불어 주실 것이다. 34) 그러므로 내일 일을 걱정하지 말라. 하나님께서 너희의 내일 일도 돌보아주실 것이다. 한 날의 괴로움은 그날의 것으로 족하다.
찬송가 478장 - 참 아름다워라 (가사)
➊ 참 아름다워라 주님의 세계는 저 솔로몬의 옷보다 더 고운 백합화 주 찬송하는 듯 저 맑은 새소리 내 아버지의 지으신 그 솜씨 깊도다
➋ 참 아름다워라 주님의 세계는 저 아침해와 저녁놀 밤하늘 빛난 별 망망한 바다와 늘 푸른 봉우리 다 주 하나님 영광을 잘 드러내도다
➌ 참 아름다워라 주님의 세계는 저 산에 부는 바람과 잔잔한 시냇물 그 소리 가운데 주 음성 들리니 주 하나님의 큰 뜻을 나 알듯 하도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