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위 ‘인간적’ 이라는 것
한 동안은 인간적인 것이 제일 큰 가치인줄 알고 있었던 때가 있었다.
인간적이라는 것은 인간이 모든 것에 있어서 기준이 되고
인간이 우선시 되어야 한다는 말과 같으니까.
어찌 보면 당연히 그래야 하는 것 같은데 불법(佛法)을 접하다 보면
인간 관점도 떠나야 한다는 입장에 자주 서게 된다.
그래서 불법(佛法)에서는 인간이라는 말보다는 일체라는 말이 자주 사용되곤 한다.
세상이 물질주의로 흐르다 보니, 돈이 주인인 세상 자본주의가 팽배하고
그것을 어찌 보면 당연한 것으로 그럴 수 밖에 없지 않느냐라는 분위기가 당연시 된다.
돈이 주인인 세상에서 좀 더 나은 방법은 무엇일까 생각하다 보니
인본주의(人本主義)란 주의도 있었다.
그래 돈이 주인이라는 자본주의 보다는 인간이 중심인 세상인 인본주의가 더 나을꺼야 하면서
바로 이거야 하고 생각했던 적도 있었다.
인간적이라는 것은 인간 중심성에 강하게 쏠려 있는 현상이고,
우리는 서로가 인간이기에 그것을 당연시 여기곤 한다.
당연히 여길 뿐 아니라, 인간적 일수록 존경받고 타의 모범이라고
좋게 평가되곤 한다. 소위 손이 안으로 굽는다는 현상 일 것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인간적'이라는 말을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다.
이 세상에는 인간만 사는 게 아니고, 수 많은 동식물 크고 작은 생물 무생물
모두가 함께 연기하며 살아가는 건데, 인간 중심이어야 한다는 생각에 제동이 걸린거다.
당장 무생물이라는 하는 태양이 쉬고 싶어져서 잠시라도 빛을 비추지 않고
열기를 방출하지 않는다면, 지구에는 금방 대이변이 일어날 것이 분명하다.
우리가 무생물이라고 가볍게 바라 본 것들이, 내 생명 유지와 긴밀히 직결되어 있다.
생명이란 것도 알고 보니 우리 인간이 생각하는 유기 화학적인 신진대사를 하는 것들만
생명이 아니었다.
무생물이라던 길가의 돌맹이도 그 안에 원자와 소립자가 꿈틀거리고 변해간다는
자체가 생명의 꿈틀거림이었다.
어찌보면 무상(無常)이란 말이 생명력을 가리키는 다른 말 같기도 했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그렇게 배워왔다면 인간의 생명만 생명이 아니고
만물이 드러내는 작용과 기능이 서로 다른 필요성에 의해 다를 뿐,
다 같은 생명임을 알고 좀 더 포용적으로 생각해 볼 수도 있었는데,
그럴 기회조차 없었다,
특별한 의문점을 내세워보지 않는 이상, 평범하게 상식이란 명분하에
마음의 문을 더 이상 열지 않고 배운 대로 아는 대로 생각하게 마련이니까.
그게 소위 뇌과학에서 이야기 하는 정신활동의 효율성이라는 건지~
선현들의 가리킴은 늘 우리들이 너무나 당연한 듯해서 의문조차 품어보지 않는
그런 사실에 대해, 다시한번 생각하게 만든다는 점이 좋은 것 같다.
하마터면 그냥 내가 상식으로 알고 있던 사실을 당연하다 생각한 채
눈 감는 날을 맞이할 뻔 했구나 하는 그런 주제들이 선현들이 남긴 가리킴을
통해 알게 된다.
그런 점에서 자유채널의 강독들은 그러한 선현들의 가리킴들 중에서도
궁극적 핵심들을 모아 집중적으로 여러 버전으로 동안의 철썩 같이 믿어 왔던
엉터리 같은 뒤집힌 생각들을 하나씩 바로 잡아 원위치 시켜준다는 점에서
너무 좋다.
몇 년 전 까지만 해도 어디 감히 ‘인간적’이라는 말 앞에 이런저런 토를 달 수 있었을까?
욕이나 먹을 짓이지~
저는 뭐 인간 아니고 다른 특별한 무언가? 이런 비난의 말이 나올 법도 했다.
그러나 이제는 인간만이 전부가 아니고, 개인적 몸과 자아만이 중요한 게 아님을
알았기에 이런 글도 써보게 되는 것 같다.
인간적이라는 말은 인간이 아닌 것들은 비인간적이니,
일단 옆에 비켜두고 나중에 생각하자 라는 우선순위에서 밀리는 인상을 왠지 주는 것 같다.
인간적이란 걸 떠날 수 있을 때, 인간을 포함한 전체를 껴안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잠겨본다.
인간적이라는 말 속에는 사실상 인간 인 나는 ‘몸과 자아다’라는 전제가 깔려있는 말이다.
결국 인간적이라는 아주 고상해 보이는 이 말도 실은 개인적 동기에서 나온 말임을
상기해 본다면 인간적이어야 한다는 말의 당위성은 더욱 무게감이 실리지 않게 된다.
단일한 의식을 자신의 정체성으로 선택하려면,
인간적이라는 말도 맥거핀으로 여겨야 할 것 같다.
단일의식은 인간하고는 무관하다는 강독의 말이 떠오른다.
단일의식은 인간을 짝사랑하지 않는다.
그런 게 뭔지도 모르고 조용히 인간을 통해서도,
다른 일체의 것을 통해서도 평등하게 드러낼 뿐.
오히려 인간이 단일의식을 짝사랑하는듯하다.
인간만 예쁘게 특별히 취급해 달라면서~
인간은 기능이 우월하니까~
그런 걸 사람들은 암암리에 인간적인 것이라 여긴다면서~
정말 인간의 기능이 우월하다고해서 그렇게 취급해 달라고 부탁해도 되는 것일까?
만일 AI 기술과 양자컴퓨터 기술이 좋아져서
지금의 인간보다 훨씬 스마트한 지능적 로봇이 나와 인간이상의 능력을 발휘한다면,
그때는 로봇은 기능이 훨씬 인간보다 우월하니까
당연히 단일의식이 로봇을 편애를 해도 괜챦다고 그냥 인정해 줄 건가?
그럴 때는 또 이유를 대며 저항 할 것만 같다.
AI 첨단 로봇이 잘나 봐야 인간의 머리에서 나온 거니 그래도 인간이 더 우수하니,
인간을 계속 특별한 존재로 취급해 주어야 한다고~
상상속의 생각이지만 그런 이유를 둘러대며 인간적이라는 말은 계속 될 것 같다.
결국 곰곰이 생각해 보면 자아의 책략이다 싶다.
자아는 자신이 늘 주인행세를 하고 싶어하니까~
인간적이라는 말을 사용하면서 인간을 모든 것의 우위에 놓고
쥐락펴락하고 싶은 자아의 속마음~
그러나 AI 첨단 로봇 자아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지 모르쟎아?
언젠가는 로봇의 자아에게도 개인적 동기를 멀리 두어야 한다고 해야 할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
그냥 재미로 미래공상 소설처럼 꿈꾸어 보았다.
지금 당장 급한 건 로봇이 아니고 나 자신이고 인간인 것을~
첫댓글 인간적이란 걸 떠날 수 있을 때, 인간을 포함한 전체를 껴안을 수 있을 것! 은하수님 정리도 잘하시고 참으로 명문이네요. 감사합니다_()_
삭제된 댓글 입니다.
긴 댓글 공감하며 감사합니다.
아무쪼록 건강한 밀알들로 깨어나 지혜의 빛이 훤히 두루 비치는 그날이 오기를 기대합니다.
@모자란의식 좋은 아이디어로 생각됩니다.
제가 올리는 글은 (은하수 |글올림) 메뉴에 다른 글들과 함께 섞여서 강독 텍스트 요약분이 올라가 있어
해당 내용을 바로 찾아보기가 불편할 수도 있다는 점 이해가 갑니다.
카페에 '강독 텍스트 요약'이라는 메뉴만 추가되면 해당 내용을 옮기면 되니까,
크게 어려운 점은 없어보입니다.
단지 카페의 '메뉴추가'는 밥통 스피커님이 직접해 주셔야 하는 내용이라, 현재 제 손을 떠나 있구요.
도마복음의 동영상 재생목록이 역순으로 되어 있으니 바로 잡아달라는 것 같은데,
그 부분도 밥통 스피커님이 직접 수고해 주셔야 하는 부분이라 제가 어찌 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닌 것 같습니다.
기다려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