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아름다운 우리문화
① 베제클릭 석굴사원 벽화-베제클리크 석굴사원은 투루판 지역에서 가장 규모가 큰 석굴사원 유적이다. 80여기 이상 개착되었으나 현재는 58기가 남아 있다. 6세기부터 석굴이 개착되기 시작했으며, 위구르 지배기에 속하는 10-12세기에 가장 정교한 벽화가 그려졌다. 베제클리크 석굴사원이 가장 활발히 개착되던 시기를 대표하는 그림 유형으로는 서원화(誓願畵)가 있다. ‘서원誓願(pranidhi)’이란 바라는 바를 이루겠다고 맹세한다는 뜻으로, 불교에서는 부처나 보살이 깨달음을 얻은 자가 되겠다거나 중생(衆生)을 구하겠다는 등의 결심을 할 때 자주 언급된다. 석가모니의 경우에도 과거 전생에서 세운 서원에 의해 현세의 깨달은 자, 즉 부처가 되었다고 설해진다. 베제클리크 석굴사원의 서원화는 석가모니가 전생의 삶에서 부처가 되겠다는 서원을 세우고 당시의 부처를 공양하고, 그 부처로부터 훗날 깨달음을 얻을 것이라는 예언을 듣는 내용을 표현한 그림이다. 그림의 중앙에는 당시의 부처, 즉 현재의 시점에서 볼 때 과거불(過去佛)이 크게 그려지고, 그 옆에 석가모니의 전생 모습이 묘사된다. 각 서원화에 등장하는 석가모니의 전생 모습은 왕, 바라문, 상인 등으로 다양하다. 이 벽화 단편은 베제클리크 석굴사원의 제15굴에 그려진 ‘연등불수기(燃燈佛授記)’의 내용을 담은 서원화의 일부분이다. 1902년~1904년 오타니 탐험대가 약탈문화재를 1916년 조선총독부박물관이 소장하다가 해방되었다. 19세기말부터 20세기초까지 문화재 약탈은 스웨덴(스벤 헤딘)·영국(오렐 스타인)·독일(폰 르콕)·프랑스(폴 펠리오)·미국(랭던 워너)에 이어 일본(오타니)가 있다.
② 간다라 미술-기원전 4세기 알렉산더 대왕(재위 기원전 336~ 323년)은 페르시아와 이집트를 정복하고 인도까지 진출해 유럽과 아시아, 아프리카 3대륙에 걸친 대제국을 이뤘다. 이 광대한 영토에 그리스 문화를 전파하는 거점으로 70여 개나 되는 ‘알렉산드리아’라는 도시를 세웠는데, 알렉산드리아는 헬레니즘 문화 형성에 큰 구실을 했다. 알렉산드리아를 중심으로 동서 문화가 교류·융합하면서 헬레니즘 세계가 형성된 것이다. 알렉산더 대왕은 정복지의 관습과 제도를 인정하고 융화 정책을 폈기 때문에, 그리스 문화가 각 지역 문화와 융합해 새로운 문화로 다시 태어났다. 대제국의 동쪽 끝인 인더스강 유역에서도 그리스로 대표되는 서양 문화와 동양 문화가 만나 새로운 문화가 탄생했다. 알렉산더 대왕이 죽은 뒤, 박트리아 지역의 그리스인과 마케도니아인은 힌두쿠시를 가로질러 캘커타(Calcutta) 지역에 이르는 인도를 정복했는데, ‘간다라(Gandhara)’로 불리는 카이버 고개 지역에서 동서양이 절충된 새로운 예술양식, ‘간다라 미술’이 탄생한 것이다.
③ 청동기(靑銅器)-1928년 허난(河南)성 은허殷墟 유적에서 삼천 삼백여 년 전의 청동기가 대규모로 발굴되었다. 왕궁, 사원, 대형 무덤과 종교시설이 발굴되고 청동기와 갑골편 등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또한 상商나라 후기(기원전 13세기~11세기)에 만든 875kg에 달하는 초대형 청동 솥이 출토되어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안개 속에 싸여 있던 상나라의 실체가 처음으로 드러났으며, 황하문명을 세계에 처음 알린 순간이기도 하다. 이어진 발굴조사로 중국 청동기는 4천여 년 전 하夏나라 때부터 본격적으로 제작되었음이 확인되었다. 고대인들은 전쟁과 같은 생사生死를 가르는 중대사를 결정 할 때 왕이 직접 신에게 제사를 지냈다. 이 의식에 사용하는 청동 그릇에 들이는 정성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었다. 무서운 괴수 얼굴이 떠오르는 기괴한 무늬, 탄성을 자아내는 압도적인 크기와 형태는 신에게 바치기 위한 제례 도구의 특징을 보여준다. 이처럼 신을 위해 사용되던 청동기는 시간이 지나며 왕과 제후의 권력을 상징하는 수단으로 변화했다. 그리고 춘추전국시대에 철기가 사용되자 청동기는 일상용기로 쓰임새가 다시 한 번 바뀐다.
④ 당삼채 도용(唐三彩 陶俑)-남북조시대는 국가적인 혼란으로 도용의 명맥만이 이어져 대부분 소략하게 만들던 시기입니다. 그러나 지금의 황허강을 중심으로 화북 지역에 위치한 북위는 무덤에 도용을 매장하는 풍속을 매우 중요하게 여긴 나라입니다. 따라서 이 채색말은 당시 중원 지역의 토종말 형태를 그대로 표현해 놓은 것입니다. 고개를 숙인 말의 표정과 애수에 찬 눈 등이 매우 현실감 있고 자세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특히 안장은 한대와 비교하여 허리 밑으로 길게 늘어져 있고, 목걸이 장식과 갈기를 묶어 표현한 뿔 모양 등이 잘 표현되어 있어 당시 의식용 말의 장식 형태를 연구할 수 있는 좋은 자료입니다.
당나라는 중국 대륙의 오랜 전쟁을 종식시키고 한족이 통일한 국가입니다. 오랜 전쟁으로 초기에는 국가가 보유한 말이 5천 필도 안 되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를 보충하고자 황실은 공납, 무역, 전쟁 등으로 외국에서 말을 대대적으로 수입하였는데 그 종류가 약 80여 종이었습니다. 북부 지역의 몽고와 시베리아 지역 일대에서 돌궐 말, 위구르 말, 말레이시아 말 등 28종이 수입되었고, 서부 지역에서는 토욕혼 말, 페르시아 말 등 30여 종이 수입되었다고 합니다. 동북 지역에서는 거란 말 등이 수입되고 서남 지역에서 인도 말, 투루판 말까지도 수입하였습니다.
이 중에 아라비아 계통의 말이 가장 주목할 만합니다. 『신당서(新唐書)』에 의하면, 당 현종(玄宗, 712년~756년) 때 대식국(大食國)에서 9차례나 말을 헌납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리고 무덤에서 출토되는 삼채말의 위치를 보면 북방의 작은 말과 서역의 의장용 말이 각각 따로 안치되어 있었습니다. 당대 초기에 제작된 채색말은 목과 다리가 짧은 토종말의 형상이며, 대부분 여성이 타고 있거나 짐을 운반하는 모습입니다. 이에 비해 삼채말은 눈이 크고 목과 사지가 긴 체형으로 신체가 균형 잡혀 있는 서역 말의 모습입니다. 이런 삼채말은 주로 묘실 입구 쪽에 배치되어 있어 당나라 때 의장용으로 이용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당삼채는 먼저 백색 점토로 기형을 만들어 1,100도의 고온에서 굽습니다. 그 다음 삼색 이상의 유약을 바른 후, 다시 저온인 900도로 굽습니다. 이때 발라 놓은 유약이 산화되면서 구리는 녹색, 철은 황갈색, 코발트는 남색을 띄게 되어 화려한 색채로 표현됩니다.
당나라 삼채말은 서역에서 수입된 말을 모티프로 제작하여, 긴 목에 코가 길고 눈이 크며 신체가 균형 잡혀 있습니다. 발달된 근육과 살집이 잘 표현되어 있고 꼬리는 둥글게 말아 묶어 놓아 장식적인 요소를 가미하였는데, 당대의 전형적인 특징입니다. 아라비아 계통의 말이 삼채의 전형적인 기법으로 제작되었으며, 특히 유약의 갈색 빛깔과 갈기의 흰색이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민첩한 준마의 형상을 하고 있고 마구는 선명하며, 고삐와 녹색 안장, 밀치끈에는 화려한 꽃과 개구리 장식이 되어 있어 의장용으로 부장된 도용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일반 삼채말보다 체구가 작지만 삼채 중에 보기 힘든 코발트색입니다. 코발트 안료는 중앙아시아를 통하여 수입된 안료로 우윳빛 유약과 매우 조화롭게 어울려 일반적인 삼채와는 또 다른 느낌을 줍니다. 당삼채 도용 중에 가끔은 이렇게 엉뚱한 색을 사용한 것이 종종 발견됩니다. 갈색 말처럼 자연의 색과 어울리는 안료를 사용하여 자연스럽게 아름다운 문양의 효과를 낸 것도 있지만, 이렇게 원래의 것과 수입 안료를 이용하여 독특한 색을 만들어 낸 경우도 있습니다. 이것은 도공이 용의주도하게 유약의 결과 색을 미리 예측하고 시유한 것으로, 독특한 삼채말의 멋을 잘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⑤ 신안 해저유물-1976년 봄에 이 해역에서 조업 중이던 어선의 그물에 걸려 수점의 중국 도자기가 인양된 것이 계기가 되어 조사에 착수하게 되었다. 그 해 10∼11월에 걸쳐 실시된 제1·2차의 예비적인 조사에서 약 5,000점의 송·원대 도자기들이 발굴됨으로써 국내외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모으게 되었으며 본격적인 발굴계획이 추진되었다. 1977년 5월 문화공보부에 의해 발굴조사단이 조직되고, 해군으로부터 51전대 소속의 함정과 해저구조대요원들로 구성된 지원단이 참가해 합동으로 유물의 인양과 해저 유적에 대한 조사가 진행되었다. 매년 여름에 2개월 내지 4개월에 걸친 발굴이 연차적으로 계속되었다.1982년부터는 이 유물들을 적재해 온 운송선의 잔존 선체에 대한 해체인양이 병행되었다. 다음해 10월에 마지막으로 선저의 용골이 인양되었으며, 1984년 주변 해역에 대한 2차례의 추가 조사를 거쳐 9년간 11차에 걸친 발굴조사는 일단락을 보게 되었다.
⑥ 백제 와당-웅진시기(475년∼538년)의 연꽃무늬 수막새는 백제의 독특한 특징이 뚜렷해지고 제작기법에서도 새로운 모습이 나타난다. 이러한 변화는 중국 남조(南朝)인 양(梁)나라의 영향을 받은 공주 무령왕릉을 비롯한 벽돌무덤과 공주 송산리 6호무덤에서 출토된 벽돌에서 梁官瓦爲師矣[양나라 관의 기와를 모범으로 삼았다]라는 글귀가 새겨진 것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양나라의 선진 기와 제작기술이 영향을 주었음을 알 수 있다. 웅진시기에 만들어진 연꽃무늬 수막새의 특징은 꽃잎이 둥글고 부드러우며, 꽃잎 끝 단이 가볍게 반전된 형태이다. 또한 꽃잎 끝 단에 구슬무늬를 넣기도 한다.이 시기의 대표적인 기와는 공주의 대통사지(大通寺址), 서혈사지(西穴寺址), 정지산유적(艇止山遺蹟), 무령왕릉, 송산리 6호무덤 등에서 출토되었다. 이와 비슷한 형태의 연꽃무늬 수막새는 경주 안강면 육통리 가마와 경주 월성해자에서도 출토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 백제의 기와가 신라까지 영향을 끼친 것으로 여겨진다. 이 기와는 꽃잎과 씨방이 정연하게 배치되었고, 꽃잎의 부피감은 약하지만 끝단이 살짝 들어 올려져 있는 등 웅진시기 기와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⑦ 기마인물형토기-말과 인물의 형식이 매우 유사한 두 점의 토기로 경주 금령총(金鈴塚)에서 출토되었다. 말을 탄 인물이 넓은 밑받침에 서 있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속이 비어 있고, 컵 모양의 수구(受口)가 있는 동물형 토기이다. 말의 궁둥이 위에 안으로 구멍이 뚫린 수구의 가장자리에는 뾰족하게 솟은 장식이 붙어 있고, 가슴에 긴 주구(注口)가 있다. 수구로 물을 부으면 주구로 물이 나오도록 고안되어 있다. 여기에 보이는 인물들은 차림새나 크기 등에 차이가 있어 신분이 다를 것으로 추정된다. 즉 차림새가 호화스럽고 크기가 큰 인물이 주인(主人)이고, 차림새가 소략하고 크기가 작은 인물은 종자(從者)라고 여겨진다. 주인상을 보면 호화로운 관모(冠帽)를 쓰고, 갑옷을 입었다. 말에는 행엽(杏葉), 운주(雲珠), 장니(障泥), 안장(鞍裝), 혁구(革具) 등 마구류(馬具類)를 완전하게 갖추고 있다. 말 이마에 코뿔소의 뿔과 같은 영수(纓穗)가 붙어 있는 점 등으로 보아 의식용(儀式用)으로 특별히 제작된 그릇으로 생각된다. 종자상을 보면 세부 형태는 조금씩 차이가 나지만, 기본적인 형태는 주인상과 같다. 상투 머리에 수건을 동여맸고, 상체는 벗고 있다. 오른손에 방울 같은 것을 들고 있다. 말의 장식도 주인상보다 허술한 편이다. 이 기마 인물형 토기는 인물이나 말을 투박하나마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러한 것은 당시의 공예 의장(工藝意匠)이나 기술의 뛰어남을 증명하는 것이다. 또 당시의 복식(服飾)과 마구류 연구에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⑧ 오리모양 토기-오리모양토기[鴨形土器]는 오리모양을 닮은 일종의 상형토기로써 넓은 의미에서 새모양토기[鳥形土器]라고 불리기도 한다. 상형토기는 인물이나 특정한 물건을 본떠 만든 토기를 말하는데 외형은 실물을 모방하였지만 내부는 그릇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제작되었다. 상형토기의 내부는 그릇의 기능을 할 수 있도록 속이 비어있고, 외부에 뿔잔이나 주출구(注出口) 등이 붙어있어 잔이나 주전자와 같은 역할을 할 수 있게 만들어졌다. 이러한 상형토기는 형태적인 특수성으로 인하여 일상생활에서 사용되었다기보다는 의례를 위한 특수한 목적으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죽은 사람의 안식과 영혼의 승천과 같이 사후세계에 대한 상징적 기원을 표현한 것으로 주로 장례와 같은 의례에서 술이나 물을 담아 따르는데 사용된 후 매장되었을 것입니다. 오리와 같은 새모양토기는 고대에 특수한 용도로 제작된 여러 모양의 상형토기 중에서 가장 많은 수량을 차지한다. 이것은 새의 형상이 당시 사람들의 인식 속에 특정한 상징성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고대인들은 새가 죽은 이의 영혼을 천상으로 인도하거나 봄에 곡식의 씨앗을 가져다 준다는 조령신앙을 믿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청동기시대부터 새를 형상화한 유물이 발견되고 있는데, 가장 대표적인 농경문청동기에는 사람이 농사를 짓는 모습과 더불어 나뭇가지 위에 새가 앉아 있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이 새의 그림은 『삼국지위서동이전(三國志魏書東夷傳)』에 등장하는 원삼국시대 소도와의 관계를 보여주고 있으며, 농경의례를 행하는 신성한 영역인 소도 안에 세워졌던 솟대의 모습을 표현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처럼 새는 예로부터 곡식을 물어다 주어 마을의 안녕과 풍요를 가져오고 하늘의 신과 땅의 주술자를 연결시켜주는 매개자로 인식되었다.
⑨ 황남대총금관-황남대총은 1973년부터 1975년까지 문화재관리국 문화재연구소(현재의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발굴하였다. 신라의 돌무지덧널무덤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큰 것에 속하며, 귀금속 장신구와 희귀한 수입품 그리고 엄청난 양의 철제품과 질그릇이 부장된 점에서 학자들은 이 무덤을 왕릉으로 판단하고 있다. 하지만 어느 왕의 능인지 정확히 알 수 없었으므로, 1976년에 문화재위원회는 이 무덤을 ‘경주시 황남동에 있는 큰 무덤’이란 뜻으로 ‘황남대총’이라 이름을 붙였습니다. 황남대총은 남북으로 두 개의 무덤을 잇댄 쌍무덤입니다. 먼저 만든 남쪽 무덤[南墳]은 왕의 능이었고, 북쪽 무덤[北墳]은 약간의 시차를 두고 나중에 잇댄 왕비의 능이었음이 발굴을 통해 밝혀졌다. 남쪽과 북쪽의 무덤 모두는 돌무지덧널무덤이란 점에서 같으나, 내부구조에서 남쪽 무덤은 시신을 모신 주곽(主槨)과 더불어 부장품을 가득 채운 부곽(副槨)을 따로 둔 점에서 차이를 보였다. 북쪽이 왕비의 능이었다는 결정적 증거는 은제 허리띠 꾸미개에 ‘夫人帶’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었기 때문인데, 이 ‘부인’이란 표현이 당시에 왕비를 말하는 것이다. 즉 ‘夫人帶’는 왕비의 허리띠라는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습니다. 황남대총 북분에 안장된 왕비는 금관과 금으로 꾸민 허리띠 이외에도 금팔찌, 금반지, 금목걸이, 가슴꾸미개 등으로 치장하였다. 비록 비단옷과 장신구에 덧댄 직물이 거의 모두 썩어 없어졌으나, 남아있는 귀한 장신구는 생전에 누렸던 가장 화려한 복장을 입혀 장례가 이루어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