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아들은 서른두 살에 결혼을 했다. 자녀는 딸 둘을 두었다. 내가 결혼할 당시에는 아들딸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는 사회적 캠페인이 있었다. 이후에는 하나만 낳자는 여론도 있었다. 나도 처음에는 한명만 낳아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첫 째를 낳은 후에 여러 가지 생각을 해보니, 무엇인가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정서적으로도 하나 보다는 둘은 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둘째를 뒤늦게 계획하다 보니, 첫째와 네 살 차이가 나는 것이다.
큰아들이 결혼할 즈음이 되자 자녀들 결혼이 큰일 이었다. 큰아들도 결혼을 쉽게 진행하지 못하는 분위기였다. 주변 지인들의 소개로 몇 차례 선을 보았으나, 한번 만나면 그것으로 끝이었다. 부모의 소개는 당사자들이 부담스러워 한다는 것을 눈치 채고는 선보는 것을 중단하였다. 대신 서른두 살까지는 결혼을 해야 한다고 엄명을 내렸다. 그리고 속절없이 기다렸다.
다행스럽게도 서른두살에 스스로 만난 아가씨와 결혼을 했다. 결혼 후 아들은 자녀를 천천히 가지자고 하고, 며느리는 보통의 순서대로 자녀를 가지고 싶다 하여, 며느리 뜻대로 결혼이듬해 가을에 손녀를 낳았다.
2014년도에 첫 손녀가 태어나니 집안에 엄청난 기쁨과 행복이 넘쳐나면서 내게는 첫 번째 큰 선물이 되었다. 생명탄생의 고귀함과 환희와 설레이는 순간을 맞이하게 되었다. 아주 조금은 사내아이였으면 하는 마음도 있었지만, 시대적 대세는 딸이라 아쉬운 마음은 바로 접었다.
자연이 하늘이 주는 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기본적인 도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산후조리원에서의 첫 만남의 설레임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수고한 며느리에게 고마운 마음을 장미백송이로 전하며 충분히 몸조리 잘하기를 응원하였다.
첫돌이 지난 즈음에 출산 후 처음으로 서울에서 창원시댁에 방문하는 날이었다. 어떻게 맞이할까 첫 손녀가 창원을 방문한다고 현수막이라도 내걸고 싶은 마음을 진정하고, 창원역에 마중을 나갔다. 드디어 아들부부와 유모차를 탄 손녀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아내는 반갑다고 앞으로 부리나케 다가갔다. 순간적으로 나는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손녀가 할아버지인 나를 알아 볼 것 인지를 시험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아내에게도 말하지 않고, 일부러 아내와 거리를 두고 그 자리에 멈춰 서 있었다. 긴장의 순간이었다. 혹시라도 나를 몰라보면 어떻게 하나 그렇더라도 실망은 말자고 다짐하면서,,,,,
이때 무표정하게 서 있던 나를 향해 다가오는 유모차에서 손녀가 오른손을 들어 나를 가리키며 아는 듯한 표정을 짓는다. 아 이 감격! 감동! 이것이 혈육의 정이던가 천륜이라고 하는 것인가 흥분과 기쁨으로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이렇게 또 두 번째의 큰 선물을 받는구나.
그사이 두 살 터울로 둘째손녀가 태어나서 큰 기쁨을 주더니, 3월이 되면 유치원을 졸업하고 초등학교 입학을 하게 된다, 큰 손녀는 초등학교 3학년이 되는 것이다. 지난 연말 연휴에 큰아들 네 집에 방문하였다. 방문 전에 큰손녀와 통화하면서 할아버지가 선물사주고 싶은데 무슨 선물을 사 줄까 하고 물으니, “할아버지 저는 선물 안주셔도 되요, 할아버지께서 안전하게 잘 오시는 것이 제게는 큰 선물입니다”라고 말한다. 아이쿠 이렇게 감동 스러울 수가 있나 내마음을 심쿵하게 때리는 구나 평소에 교육을 받았는지 모르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천사의 마음을 가졌구나. 이렇게 또 세 번째로 큰 선물을 받으면서, 아들부부가 손녀들을 잘 양육하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그동안 아들네 집에 갈 때마다 돌아올 때는 먼 길 운전이라 새벽같이 일어나서 창원으로 오다보니, 손녀들이 일어나면 갑자기 할아버지 할머니가 보이지 않으니 당황해하고 서운해 했다는 얘기를 듣고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아침에 일어나서 손녀들 얼굴보고 출발하기로 마음먹었다. 덕분에 손녀들과 좀 더 자연스러운, 마음에 준비된 작별을 할 수 있었다.
흔히들 인생의 숙제를 해야 한다고 얘기한다. 누구에게나 이룬 숙제도 있고 남은 숙제도 있을 것이다. 계묘년 새해가 밝았고 입춘과 정월 대보름도 지났다. 모든 가정에 대소사들이 물흐르듯이 잘 해결되고, 사랑과 행복이 넘쳐나기를 응원하며, 다가오는 새봄을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