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2년1월9일
세계에서 가장 큰 호화
여객선 영국의 퀸 엘리자베스호!
1938년에 진수되어 제2차 세계대전중에
는 군수송선으로도 활약했으며, 1946년
에 커나드해운회사의 정기 대서양 횡단 수송업무를 시작했다.길이는 314m, 너비
는 36m, 흘수는 11.6m, 총 8만 3,673t
이었다. 이 배는 1968년 폐기되어 대학의 실습용으로 개조되어 팔렸는데, 1972년 오늘.홍콩항에 머물던 중 갑자기 일어난 화재로 침몰위기에 놓인다.일본 선박구조 전문가들이 엄청난 양의 퀸 7엘리자베스호 연료를 뽑아낸다.다행히 불길은 잡혔지만 퀸 엘리자베스호는 바다로 침몰하고 말
았다
1938년에 진수되어 제2차 세계대전중에는 군수송선으로도 활약했으며, 1946년에 커나드해운회사의 정기 대서양 횡단 수송업무를 시작했다. 길이는 314m, 너비는 36m, 흘수는 11.6m, 총 8만 3,673t이었다. 이 배는 1968년 폐기되어 대학의 실습용으로 개조되어 팔렸는데, 1972년 1월 홍콩에서 수리중 화재로 침몰했다. 1967년 '퀸 엘리자베스 2호'가 진수되어 1969년 처녀항해를 했다.
▶2009년쌍용자동차 법정관리 신청
쌍용자동차 이사회의 법정관리신청 결정이 알려진
2009년 1월 9일 오후 경기도 평택시
쌍용자동차 공장에서 노조 대표들이 대의원회의를
마친 후 입장 표명을 위해 정문쪽으로 내려와 있다.
▶ 2007년 오늘,
애플 스티브 잡스, 아이폰 공개!
▶2003년 1월 9일 두산중공업 노조
전 대의원 배달호씨 분신 자살
두산중공업 노사대립 사태로 인해
분신 사망한 배달호씨.
▶2001년동화작가 정채봉 타계
▶1995년정부,부동산실명제를
7월1일부터 실시키로 확정 발표
▶1995년라오스의
초대 대통령 수파누봉 사망
▶1993년아동문학가 방기환 사망
▶1990년코메콘(동구경제상호원조회의)
45차 연차총회, 불가리아의 수도 소피아에서 개최
▶1989년서대문 독립공원 착공
▶1983년박순천 전 민중당 대표 사망
▶1982년일본 최고의 인쇄물인 백만다라니 발견
▶1980년한국, 덴마크와 해운협정 체결
▶1979년정부, 일본 마이니치(每日)신문의
국내 판매 금지령 발표
▶1972년세계최대 여객선 퀸 엘리자베스호 침몰
▶1969년문교부,
고등학생-대학생에 군사교련 실시 결정
▶1966년나이지리아 수도근방에서 정치적 폭동 발생
▶1962년해밀턴
미국 국제개발처 일행 내한
▶1959년스페인 댐 폭발. 100여명 사망
▶1957년이든 영국 수상, 수에즈전쟁 책임지고 사임
▶1954년국제대학 창설
▶1954년수단,
알 하즈하리 자치정부 수립
▶1953년여객선 창경호 다대포서 침몰. 229명 사망
1953년 1월 9일 오후2시 쌀 4백 가마를 싣고 여수항을 출발하여 부산항으로 가던 정기여객선 창경호가 이날 밤 10시20분경 부산서쪽 8km지점인 다대포 거북섬 근해에서 강풍을 만나 침몰, 승선인원 2백36명 중 2백29명이 사망하고, 겨우 7명 만이 살아남은 대참사가 발생했다. 사체는 15일간의 수주수색작업을 통해 모두 인양했다.
국회 특별조사단의 조사에 따르면 창경호는 선령이 20년 이상이나 되는 묵은 화물용 범선을 여객선으로 개조한 것으로 복원력이 취약할 뿐 아니라 정원표시도 실제보다 1백명 많게 되어있는 등 참사요인을 갖추고 있었다. 또 이 선박에는 구명보트 한 척과 구명복 70벌을 비치해야 하는데 모두 본사 창고에다 두고 다닌 것으로 드러났다.
이후 사고 책임에 따라 선장과 대동상선 사장에게 금고형이 구형되고, 선주사인 대동상선은 파산하고 유족들에게는 쌀 한가마 가격에 불과한 75만원씩이 지급되었다.
▶1950년콜롬보서영 국연방외무장관
회의 개최. 콜롬보 계획 결의
▶1947년독일의 사회학자 칼 만하임 사망
▶1945년미국군, 루손섬 상륙
▶1932년독일, 제1차세계대전
배상지불 불능 선언
▶1922년홍사용, 박종화 `백조` 창간
▶1913년미국 제37대 대통령 닉슨 출생
▶1911년미국,
영국 북대서양어업협정 성립
▶1908년프랑스 작가 시몬느
드 보부아르 출생
보부아르 [Beauvoir, Simone (Lucie-Ernestine-Marie-Bertrand) de, 1908.1.9~1986.4.14]
보부아르는 여성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프랑스의 작가이다. 사립학교를 졸업한 그녀는 소르본대학교에 들어갔고 이후 철학교수 자격시험에 합격했다. 1929년 실존주의를 주도한 장 폴 사르트르와 '계약 결혼'을 시작했으며, 1945년부터는 그와 함께 월간지 <탕 모데른 Les Temps Modernes>을 편집했다. 또한 그녀는 <제2의 성 Le Deuxieme Sexe>(2권, 1949)을 통해 '여성다움'을 강조한 전통적 관념에 반기를 들었다. 이 작품은 여성해방문학의 고전이 되었다. 주요 작품으로 <초대받은 여자 L'Invitee>(1943)와 공쿠르상 수상작인 <레 망다랭 Les Mandarins>(1954)이 있다. 현실을 냉철하게 바라본 다양한 철학서적과 평론을 썼으며, 프랑스 지식인들의 생활을 분명하게 드러낸 여러 편의 자서전을 출간했다.
보부아르와 사르트르의 계약 결혼
▶1908년청진 개항1901년유두포,
최초의 한국 상인으로 하와이에 건너감
▶1890년체코의 극작가 겸 소설가
카렐 차페크 출생
▶1885년한성(漢城)조약 체결
전권대신(全權大臣)이 되어 일본의 이노우에
가오루와 한성조약(漢城條約)을 체결한 김홍집.
외세의 힘을 빌어 조선을 개혁하려고 했던 갑신정변이 실패하자 1884년 12월 청군의 도움으로 갑신정변을 진압한 민씨 정권은 예조참판 서상우를 특차전권대신으로 일본에 보내 일본측이 정변에 관여한 사실을 따지며 주동자 김옥균의 소환을 요구했다.
그러나 일본은 갑신정변과 무관하다고 주장하며 도리어 공사관의 파괴와 일본인 살해를 구실로 조선의 책임을 추궁했다. 양측의 주장이 팽팽하게 맞서자 일본은 2개 대대와 군함 7척을 대동한 외무상 이노우에 가오루를 조선에 파견했다. 결국 두 나라는 조선의 일본에 대한 사의 표명, 배상금 10만원 지불, 일본 공사관 수축비 부담 등을 내용으로 하는 한성조약을 1885년 1월 9일(음력) 체결했다.
또한 일본은 같은해 4월 18일(음력) 청나라와 조선에서 청일 양국군 철수, 장래 조선에 변란이나 중대사건이 일어나 청일군 어느 한쪽이 파병할 경우 이 사실을 상대방에 알릴 것 등을 내용으로 하는 천진조약(텐진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은 일본에 청나라와 같이 조선에 대한 파병권을 주었고, 10년 뒤 일어난 동학농민운동 때 일본의 파병 구실이 됐다.
▶1873년나폴레옹 3세 사망
▶1867년메이지(明治) 일왕 즉위
▶1866년미국 최초의 흑인 고등교육기관인
피스크대학 개교
▶1593년왜병에 함락되었던 평양성 탈환
▶1590년프랑스의 화가 시몬 부에 출생
▶1570년노보그라드 대학살 시작
러시아 '노보그라드 대학살' 시작 (2월 12일까지 6만명 이상 학살)
1570년 1월9일 러시아 황제 이반4세(Ivan IV, 1530~1584)의 군대가 노보그라드(Novogorad) 주민들을 닥치는 대로 살해하기 시작했다. 황제는 노보그라드에 반역의 기운이 감돈다는 말을 듣고 1주일 전에 군대와 함께 이 도시에 도착했다.
군대는 도착 즉시 도시 주변에 나무벽을 쌓고 교회와 수도원을 모두 폐쇄했다. 사람들이 피신하지 못하도록 막기 위해서였다. 일부 성직자와 상인들은 황제에게 돈을 바치고 죽음을 면했다. 황제는 그 돈을 군인들에게 나눠 주었다. 곧 시작될 살인 작전에 대한 선금이었다.
살인 파티는 5주 동안 계속되었다. 군인들은 닥치는 대로 죽였다. 황제는 제 군인들이 제 신민을 찔러 죽이고 태워 죽이고 물에 빠뜨려 죽이는 것을 현장에서 지켜보았다.
1월9일부터 2월12일까지 6만 명이 넘는 노보그라드 주민이 학살당했다. 황제는 살아남은 주민들을 ‘사면’한 뒤, 이 학살의 책임은 주민들을 잘못 인도한 노보그라드의 대주교에게 있다고 선언하고 모스크바로 돌아갔다.
이반4세(1530~1584)는 3세에 즉위한 뒤 51년간 러시아를 다스렸다. 그는 치세 후기에 귀족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해 극단적인 공포 정치를 펼쳐 ‘무서운 이반(Ivan IV, the terrible)’ 또는 이반뇌제(雷帝)라고 불린다. 폭군들이 드물지 않게 그렇듯, 그도 젊은 시절에는 총명한 군주였다.
어린 시절 중앙 대귀족들의 전횡으로 어려움을 겪은 이반4세는 친정(親政)을 시작한 뒤 지방 귀족층의 도움으로 중앙 귀족을 제압하고 행정ㆍ사법ㆍ군사ㆍ교회제도의 중앙집권화에 힘썼다. 서시베리아를 정복해 동방 진출의 바탕을 마련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너무 많이 나갔다. 왕권신수설(王權神授說)을 굳게 신봉한 그는 귀족의 날개만을 꺾은 것이 아니라 신민 전체를 폭정으로 다스렸고, 만년에는 말다툼 끝에 자기 장남을 죽이기까지 했다.
▶1396년한양성 성곽 완성
1904년 남대문 일대
1904년 남대문 시장
1904년 전차와 행인들
1904년 한양성 성곽 (멀리 북한산과 인왕산)
https://youtu.be/dT5_XP9Ez34
출처 네이버지식백과,솦트리종려나무,반가운의hi스토리
편집 뜨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