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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털어놓고 하는 이야기 - ‘30세 서울시경국장’ 李健介 변호사(上)
“朴대통령께 출국인사 갔다 붙잡혀 청와대 파견”
吳東龍 月刊朝鮮 기자 ⊙ “朴대통령, 비서 통해 어머니에게 정기적으로 생활비 전달” ⊙ 부친 李龍文 장군은 육본 작전국장 지낸 군인… 불우한 시절의 朴正熙를 품어 ⊙ 朴대통령, “경제와 안보는 똑같이 중요… 경제공부 철저히 하라” 조언
5·16 군사쿠데타 일주일 후, 서울법대생이었던 나와 어머니(金靜子·1973년 작고)는 중앙청 옆에 위치한 국가재건최고회의 사무실로 박정희(朴正熙) 부의장을 찾아갔다. 5·16 쿠데타 이후 각계각층의 사람들을 체포하면서 나의 큰아버지인 이용운(李龍雲) 해군참모총장을 구속했기 때문이다. 큰아버지는 자유당 말기에 해군참모총장에 취임했으나, 4·19혁명 이후 민주당 정부에서도 계속 참모총장으로 있었다. 4·19 직후 큰아버지는 해병대 김모 사령관 등 해병대 장군 일부를 부정부패 혐의로 해임했고, 그때 해임당한 해병대 일부 장군들이 5·16쿠데타에 가담하면서 큰아버지의 체포를 주장했던 것이었다. 큰아버지는 구한말 무관 출신인 할아버지가 병사하자 생계를 위해 평양에서 신발가게를 운영하다 일본으로 가는 배를 탔다.
1934년 일본 도쿄고등상선학교(東京高等商船學校)를 졸업한 큰아버지는 아버지(李龍文·1916~1953)도 일본으로 불러 일본 육사에 진학하도록 했다. 태평양전쟁 막바지 때 큰아버지는 배가 미군기의 폭격으로 침몰하는 바람에, 무인도에서 생활하다 극적으로 생환했다.
살기 느껴지던 朴正熙 부의장의 모습
제4대 해군참모총장(1959.02.23~1960.09.28)을 지낸 이용운 중장. 나와 어머니는 큰아버지 문제를 호소하러 박정희 장군을 찾아갔다. 비서실에 잠시 대기하고 있었더니, 곧바로 부의장실로 안내해 주었다. 방에 들어섰을 때, 전투복 차림의 박정희 장군은 창가에 서서 밖을 주시하고 있었다. 당시 카터 매그루더 미8군사령관은 윤보선(尹潽善) 대통령을 찾아가 쿠데타 진압을 요구하는 등 5·16쿠데타를 인정할 수 없다는 강경한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쿠데타 성공 여부는 미지수인 상황이었다. 그래서인지 박정희 장군의 모습에서 긴장감이 역력하게 느껴졌다. 나는 박정희 부의장의 얼굴을 보고 깜짝 놀랐다. 얼굴뿐만 아니라 그의 온몸이 장풍(掌風)과 같은 독기(毒氣)와 살기(殺氣)로 가득차 있는 느낌이었다. 그 순간 나는 사람이 아주 강하게 마음을 먹으면 옛날 무협지에나 등장하는 장풍도 가능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박정희 부의장은 애써 웃는 얼굴을 지으며 우리 모자(母子)를 맞이했다. 30여 분간 대화를 나누는 도중에도 얼굴에 살기가 나타났다 사라졌다 했다. 박정희 장군은 우리 모자가 5·16쿠데타 직후 처음 만난 민간인이라선지 국민들의 반응을 계속해서 물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우리 이야기를 심각하게 들었다. 그리고 내게 “언제 대학을 졸업하느냐”고 물어보더니 “자주 들러서 얘기해 주게나”라고 했다. 그러면서 어머니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 군인들이 정치를 얼마나 알겠습니까. 단지 국가기강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생각에서 애국충정으로 목숨을 걸고 구국의 혁명을 단행한 것입니다.”그 말을 듣고 어머니는 “건개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 누차 강조했던 말씀입니다”라고 화답했다. ‘건개 아버지’라는 말에 살기가 감돌던 박정희 부의장이 파안대소를 했다. “이번 일을 주도한 젊은 장교들은 이용문 장군님을 존경하고 있습니다. 장군님 살아계실 때 여러 차례 구국의 방법에 대해 함께 논의했던 적이 있습니다.” 박 부의장의 살기 어린 얼굴이 아버지 이야기에 편안해지는 것을 보았다. 박 부의장이 민심에 대해 물었을 때, 나는 “새 역사를 창조하는 입장에서 우선 현실적인 문제점을 부각시켜 그에 대한 건설적인 대책을 역사적 청사진과 더불어 발표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며 “정책과 제도 개혁 없이 사람부터 정리한다면 큰 오류를 범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취지로 말씀드렸다. 박 부의장은 다소 장황한 답변을 듣고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자네, 이제 나이 어린 건개가 아니군! 언제 그렇게 국가운영에 대한 통찰력을 키웠는가. 공부하느라 바쁘겠지만 시간이 나는 대로 생각을 정리해서 건의해 주기 바라네”라고 말했다. 그리고 금일봉을 어머니에게 주면서 “건개 학비에 보태 쓰시라”고 했다.
묘지 이장위원장을 맡다
5·16 쿠데타 성공 후 서울시청 정문에 선 장도영 육군참모총장(왼쪽)과 박정희 2군 부사령관. 1962년 6월 국가재건최고회의는 민정 이양이냐 군정 연장이냐를 놓고 정치적 선택의 기로에 있었다. 그 와중에 평소 아버지와 가까이 지냈던 군 선후배들이 중심이 돼 ‘고 이용문 장군 묘지이장위원회’를 설치하고, 아버지 묘지를 칠곡에서 서울로 이장하는 문제를 추진했다. 이종찬(李鍾贊) 전 국방부장관, 김정렬(金貞烈) 전 국무총리, 김창규(金昌圭) 전 공군참모총장, 최경록(崔慶祿) 전 육군참모총장, 이근양(李根陽) 전 3사관학교장(예비역 육군 소장), 심흥선(沈興善) 전 합참의장, 김석원(金錫源) 원석학원(성남중) 이사장 등이 주도했고, 박정희 장군은 위원장을 맡았다. 민간단체의 성격이 짙은 기구에 박정희 장군이 자신의 이름을 올린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다. 어머니는 국립묘지 이장을 놓고 고민하다 “국립묘지보다 편히 쉴 수 있는 곳으로 정해 드리는 게 낫겠다”며 제3의 장소에 아버지를 모시기로 했다. 결국 수유리 2000평 부지에 이장하기로 결정을 보았다. 1962년 10월 경북 칠곡에서 아버지 묘를 발굴했다. 놀랍게도 옷을 포함해 시신 전체가 하나도 부패하지 않고 그대로 보존돼 있었다. 나는 좋은 징조로보았다.
수유리의 부친 이용문 장군 묘를 찾은 서울법대 시절의 이건개 변호사(오른쪽). 이용문 장군 묘비는 이장위원장인 박정희 대통령이 세웠다. 묘비 뒷면에 ‘박정희 건립’이라고 적혀 있다.시신은 대구역까지 자동차로, 대구역에서 서울역까지는 기차로 운구했다. 서울역에서 간단한 의식을 가졌는데, 우리 유가족과 소수 인원만 참석했다. 막내동생 이건종(李健鍾·64세, 법무법인 화우 변호사)은 태어난 지 6개월 만에 아버지가 돌아가셨기 때문에 아버지의 모습을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서울역에 대기하고 있을 때 눈물을 흘리는 아우의 모습이 내 마음을 아프게 했다. 시신을 다시 수유리 묘소까지 자동차로 운구해 1000여 명의 조문객이 참석한 가운데 안치했다. 이장식은 대한예수교 장로회(통합측) 총회장과 초대 군종감을 지낸 박치순(朴致淳) 목사가 집례했다. 군악대의 조악(弔樂)과 조총(弔銃) 발사에 이어 구상(具常) 시인이 추모시를 낭독했고, 김석원 장군의 추도사로 식을 마무리했다. 장남인 내가 “아버님이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치셨듯 저희들도 아버님의 못다 한 유업을 이루도록 노력하겠다”고 감사의 인사를 했다.
대통령에 생활비 요청
그 후 나는 고시공부에 매진했다. 1963년 2월 무렵, 어머니가 경제적 곤란을 겪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자초지종을 물었더니 모든 사실을 털어놓으셨다. 사업하는 친구에게 조금 남아 있던 돈을 투자했는데, 사업은 망하고 친구는 도주했다는 것이었다. 한 달 넘게 수입이 없어 집을 팔든지 어디서 돈을 빌리는 길밖에 없었다. 장남으로서 무책임하게 생계를 어머니에게만 맡겨 놓을 수 없었다. 잠시 고시공부를 뒤로 미루고 보름 이상 혼자 곰곰이 생각했다. 5·16 직후 박정희 장군이 학비에 보태 쓰라고 금일봉을 주시며 “어려운 일이 있으면 들르라”고 한 말이 떠올랐다. 당시 박정희 장군은 민정이양 결심을 하고 윤보선 대통령과 직접선거를 치러 15만 표라는 근소한 차이로 대통령에 당선, 제3공화국을 열었다. 이젠 박정희 장군이 아니라 대통령이었다. 나는 어머니께 박 대통령을 만나 도움을 요청해 보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조심스레 말씀드렸다. 어머니는 하릴없이 승낙했다. 박정희 대통령 외에는 청와대에 지인이 없었기에 나는 서울대 법과대학 학생증을 갖고 면회실을 찾았다. 창구 직원에게 면회신청 용지를 부탁했더니 “누구를 만나러 왔느냐”고 했다. “대통령 면회를 희망한다”고 하자, 그 직원은 웃으며 “사전에 대통령과 약속을 했느냐”고 물었다. 직원은 내 신분증을 다시 한 번 확인하고 면회신청 용지를 내밀었다. 나는 ‘피면회자’란에 ‘대통령 박정희’라고 적고 신청자란에 내 이름과 주소를 기입했다. 면회 용건은 ‘가사 문제’라고 표시했다. 면회신청을 하고 돌아오면서 일러야 한두 달 후에야 연락이 올 것이라고 짐작했다. 그런데 정확히 사흘 만에 청와대로 들어오라는 통보가 왔다. 그날 아침 11시, 청파동에서 버스를 타고 효자동 종점에서 내려 청와대 본관까지 걸어갔다. 본관에 있는 경호실 직원에게 “며칠 전 면회신청을 한 이건개 학생”이라고 말하고, 청와대 출입증을 발급받았다. 대통령 집무실 응접실에 앉아 5분 정도 기다리자 박정희 대통령이 근엄한 표정으로 나타났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대통령 당선을 진심으로 축하드려요”라고 했다. “고맙네. 자네도 수고 많았지.”
“대통령께서 근소한 차이로라도 당선되실 것으로 생각했으나, 민정이양 후 첫 선거라 마지막까지 초조했습니다.” “내가 국정을 운영하는 데 참고할 만한 사항이 있으면 구두로나 서면으로 보고해 주기 바라네. 아, 어머니는 안녕하신가? 집안에 급한 일이 있다고 했는데 무슨 일인가?” “하찮은 집안일을 말씀드려 정말 죄송합니다. 실은 형편이 너무 쪼들려 몇 달째 제대로 생활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제가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해 월급을 받을 때까지 매달 생활비를 보조해 주시면 어떨까요?” “그래? 그것이 뭐 어려운 일인가. 자네 아버지 성품으로 봐서 집안에 경제적 여유를 준비해 놓지 않으신 게 분명할 테니 어쩔 수 없는 일 아니겠는가. 아무 걱정 말고 공부만 열심히 하게. 가끔 생활비가 지급되도록 할 테니까 어머니께 그 뜻을 전하고 안심시켜 드리게. 자네도 열심히 공부해서 아버님 못지않은 큰 인물이 돼야지.” 나는 진심으로 감사의 마음을 담아 정중히 인사를 하고 그 자리를 물러났다.
SOFA 체결 직후, 미군 하사 한국 법정 처음 세워 1967년 2월 20일 밤 경기도 평택군 송탄읍서 민가에 불을 지르고 주민을 폭행한 미군 하사 빌리 콕스가 한국법정에서 재판을 받고 있다. 서울법대 4학년 때 나는 고등고시에 응시해 1차 시험에 합격했으나 2차 시험에는 불합격했다. 그런 상태에서 졸업하고 그해 5월에 다시 2차 시험을 치를 때까지의 기간은 나에게 절망의 시간이었다. 더 비장한 마음으로 하루하루 책과 씨름했다. 드디어 시험날이 다가왔다. 나보다 어머니의 모습이 더 초췌했다. 어머니와 외할머니(趙善煌)는 나를 위해 밤늦도록 기도했다. 매시간 정성들여 답안을 작성했고, 좋은 성적으로 합격했다. 합격 후 서울대사법대학원(사법연수원의 전신)에 입학해 1년6개월간 공부했다. 나는 판사를 지망한 친구 임대화(任大和) 변호사(대전지법원장 역임)와 공동수석을 차지해 법무부장관상을 받았고, 영미법 과목은 최고득점으로 미국대사상을 받았다. 사법대학원을 졸업하고 수색에 있는 3사단에서 군법무관 훈련을 받고 육군중위로 임관했다. 군 복무를 마친 후에는 서울지검 검사로 발령받아 검사로서 첫 근무를 시작했다. 판・검사를 고민하다 당시 ‘검찰 우세’ 시절이라 검찰을 택했다. 잘한 선택이라 생각한다. 그때가 1966년 4월이었다.
초임검사 시절, 나는 스스로 정보를 입수해 수사하는 인지사건 수사를 담당했다. 정말 의욕적으로 일했다. 1967년 1월 천도제약, 풍강제약, 영진약품, 동아제약 등 5개 제약회사가 건강드링크의 납세필증을 재사용한 소위 ‘납세필증 재탕사건’을 수사해 제약회사 간부 5명을 구속했다. 그 사건이 계기가 돼 종이 납세필증 제도가 없어지고 병뚜껑에 직접 인쇄하는 방안으로 개선됐다. 1967년 3월 29일, 한미행정협정 체결 이후 첫 사건의 피의자였던 미군 하사 빌리 콕스(K55기지 6314수송중대 소속)를 기소해 처음으로 한국 법정에 세웠다. 당시 검사 중에는 영어를 하는 이가 많지 않아 내게 배당된 것이었다. 나는 콕스 하사에게 폭력행위 및 방화로 3년을 구형했고, 그해 6월 20일 서울형사지법 합의1부 유태흥(兪泰興) 부장판사는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 2조2항을 적용, 5만원의 벌금형을 선고했다. 방화혐의에 대해서는 무죄를 선고했다. 콕스 하사는 경기 평택군 송탄읍 신장리에 있는 그의 애인(엄경순) 집에 들렀다가 애인이 집을 비운 것에 불만을 품고 집에 불을 질러 20여만원 상당의 가구를 태웠고, 그 후 택시운전사(박광웅)와 요금시비 끝에 7주의 상해를 입힌 혐의로 1967년 3월 4일 입건돼 한미행정협정 발효 후 처음으로 국내 법정에서 재판을 받았던 것이다. 미국 측은 “재판은 정식으로 받을 테니 구속 현장만은 부대 내로 해 달라”고 우리 측에 양해를 구했다. 결국 콕스의 변호인은 항소를 포기해 한국의 첫 재판권 행사는 원만하게 끝났다. 교통부 산하 국영항공사인 대한항공공사(大韓航空公社) 수사도 기억에 남는다. 1962년 설립된 대한항공공사의 대표가 DC-9 항공기를 도입하면서 커미션으로 DC-10 1대를 받아 서울-강릉 노선의 민항회사를 만드는 등 부실경영을 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수사를 벌였던 것이다. 회사 간부들의 자백을 받아 박정희 대통령께 “부채와 누적 적자가 무려 27억원에 달하는 대한항공공사를 결국 민영화해야 한다”고 보고했다. 1969년 3월 1일 한진상사가 대한항공공사의 부채를 떠안는 조건으로 14억원에 인수해 현재의 대한항공(KAL)으로 발족했다. 육사 교장 정래혁(丁來赫) 중장, 길전식(吉典植) 공화당 사무총장 등은 박 대통령께 육사 생도들의 호연지기(浩然之氣)를 키우기 위해서 승마를 가르치자고 건의했었다. 말은 호주에서 수입해 오고 마장(馬場)도 짓고, 개장기념 행사로 마술대회를 열기로 했다. 대회 명칭을 실무자들이 ‘이용문장군배 쟁탈 승마대회’로 결정해 대통령에게 보고하니, 박 대통령은 직접 ‘이용문장군배(李龍文 將軍盃)’라고 휘호를 써 보내 주었다고 한다. 제1회 대회는 1966년 10월 21일 육사 군사대 승마장에서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陸英修) 여사가 지켜보는 가운데 거행했다. 그 대회는 ‘이용문장군배 전국승마대회’로 지금까지 46회째 이어지고 있다.
“남한에서는 무슨 말을 씁니까?”
1946년 1월 3일 당시 일곱 살짜리였던 나는 평양 대신리 집을 뒤로하고 어머니와 할머니의 손을 잡고 정든 집을 나섰다. 38선을 넘으려는 것이었다. 개성에 도착하자 외할머니는 돈을 주고 안내원 한 사람을 찾아냈다. 우리는 안내원을 따라 새벽 1시경 산과 들을 걷기 시작했다. 새벽 3시경 북한 경비병이 지키는 초소 가까이 도착해 깊은 웅덩이에 몸을 숨기고 기다렸다. 산 위에서 다섯 발의 총성이 울렸다. “산을 넘어 남하하는 사람들에게 쏘는 것”이라고 안내원이 설명하며 “아마도 붙잡혔을 것”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2시간쯤 지나자 보초병이 술주정을 하면서 비틀거렸다. 일행은 초소에서 100미터 떨어진 웅덩이에서 다른 웅덩이로 옮기며 살살 기어 산을 넘어 서울에 도착했다. 나는 전차 안에서 어머니 손을 꼭 잡고 물었다. “남한에서는 무슨 말을 씁니까.” 어머니는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같은 우리나라 말을 쓴단다.” 순간 궁금증이 일었다. “왜 같은 말을 쓰는데 이렇게 갈라져서 몰래 넘어와야 하지요?” 어머니는 주위를 살피며 목소리를 더 낮추었다. “세력이 달라서 그렇단다. 자세한 건 나중에 말해 주마.” 밤중에 불이 환한 전차를 타고 북아현동 친척집을 찾아갔다. 고갯길을 힘들게 넘어 내리막길에 있는 어떤 집 대문을 두드렸다. 한 소녀가 나와 우리가 찾는 집을 가르쳐주었다. 그 집은 친척집이 아니라 단편소설 〈용녀(龍女)〉로 《조선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한 소설가 김영수(金永壽)의 집이었다. 큰아버지, 큰어머니와 가족들이 우리를 반겨 주었고, 나는 북아현동 친척집 사랑채에서 서울에서의 첫 밤을 보냈다. 서울의 사랑채 생활, 어머니는 아버지를 기다리고, 나는 하루 종일 동네 아이들과 놀기 바빴다. 겨울이 지나 봄이 오고, 어느 화창한 봄날 아침 10시경 아버지가 찾아왔다. 네 살 때 보고 전쟁으로 떨어져 지내 아버지 얼굴이 기억에 없었다. 키가 크고 외모가 수려했다. 아버지는 나를 보자 “벌써 이렇게 컸구나”라고 하시며 덥석 안았다. 아버지는 친척들에게 인사를 하고 뒤뜰로 가서 냉수로 등목을 했다.
李承晩 정권의 정치인 미행 지시 거부
육사에서 열린 이용문장군배 전국승마대회는 1966년 10월 박정희 대통령 내외가 참석한 이래 매년 개최되고 있다. 아버지는 일본 육사에 입학해 50기로 임관했다. 도쿄 제1기병연대에 근무했던 아버지는 1942년 대본영(합동참모본부에 해당)에 근무하게 된다. 대본영에 근무한 조선인은 아익(洪思翊) 중장(1947년 도쿄전범재판으로 사형당함) 두 사람뿐이었다. 1943년 남방전선인 사이공에서 전투 중 연합군에 포로가 돼 해방을 맞았다. 1943년 남방전선으로 전속돼 1944년에 남방군 교통사령부 참모(소좌)로 말레이시아, 수마트라, 버마 등지에서 근무했던 아버지는 신발을 신을 때마다 독벌레를 확인하는 버릇이 생겼다. 아버지의 그런 모습이 어린 내 눈에는 특이하게만 보였다. 북아현동에서 얼마를 지낸 후, 우리는 아버지가 갈월동에 마련한 집으로 이사를 갔고, 나는 삼광국민학교로 전학했다. 여러 가지 이유로 아버지는 다시 군에 들어가는 것을 망설였다. 그러나 이미 군에 들어가 있던 동문들과 일본 육사 선배인 채병덕(蔡秉德) 육군참모총장, 이종찬 장군, 김정렬 장군, 김창규 장군 등의 끈질긴 권유에 다시 군에 중령으로 입대했다. 해방 후인 1947년 군에 육사 7특으로 들어가 1948년 11월 육군 중령으로 임관해 기갑부대를 창설하고 초대 기갑연대장에 취임했다. 아버지가 창설한 기갑연대는 훗날 베트남전에서 맹활약한 수도기계화사단의 예하 연대로 활약했다. 아버지는 박정희 대통령을 육군 정보국장 시절 만났다. 당시 박정희 소령은 남로당 숙군 대상자로 분류돼 사형을 선고받았고, 백선엽 정보국장 등의 선처로 간신히 사형을 면한 처지였다. 후임 정보국장이었던 아버지는 박정희 소령의 인물됨을 아깝게 여겨 1950년 초 정보국을 떠나기까지 여러모로 그를 챙겼다고 한다. 1년 후 우리 가족은 갈월동에서 삼각지의 육군 관사로 이사했다. 찬송가를 자면서도 부를 정도로 교회에도 열심히 다녔다. 초등학교 4학년 때 6·25가 터졌다. 관사 단지 상공으로 북한군 전투기가 날아왔다. 관사를 관리하는 사병과 나는 카빈총을 들고 뒷동산에 올라가 전투기가 가까이 오면 사격하려고 웅크리고 있기도 했다. 1951년 6월 이종찬 총참모장은 아버지를 핵심보직인 육본 작전국장에 임명했다. 북한 남침정보 수집에 열을 올리던 아버지는 이승만 정권이 정치인들을 미행하라는 지시를 거부하는 바람에 전쟁 직전인 1950년 6월 옹진지구 전투사령관으로 옮겼다가 다시 육군참모학교 부교장으로 전출당한다. 정보국 차장을 지낸 민주사회당 고정훈(高貞勳) 당수는 그의 저서 《촛불처럼 비누처럼》에서 “신성모(申性模) 국방부장관이 이용문 국장과 나를 장관실로 호출해 제헌의원인 임영신(任英信) 여사의 대구와 부산방면 동정을 살펴서 보고하라고 지시했다”면서 “이용문 국장은 군이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정치인을 따라다니게 되면, 무시무시한 비극을 초래하게 될 것이라며 반대했다”고 했다.
영광의 상처’
1951년 6월 무렵 육본 작전국 재직 시절 이용문 국장(왼쪽)과 박정희 차장. 전쟁이 발발하자 채병덕 육군참모총장은 전투 경험이 있는 아버지에게 수도방위사령관을 맡겼다. 김종필(金鍾泌) 전 총리가 쓴 《내가 겪은 6·25》를 보면, “연락장교였던 내가 의정부 지구에 가 보니 이용문 장군이 외롭게 전선을 사수하고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아버지는 정릉, 미아리 일대에서 유격전을 전개했으나 북한군 전차대의 공격을 받고 부대가 와해 당했고, 한강철교 폭파 뒤에도 한강 도하를 수차례 시도했으나 성공하지 못하고 서울에 고립당하고 만다. 아버지는 잔류병력을 결집해 남산에서 5일간 게릴라전으로 전투를 지휘하다 병력이 크게 손실돼 하는 수 없이 가족이 숨어 있던 북아현동 친척집으로 야음을 틈타 피신했다. 그렇게 가족과 합류한 아버지는 9·28 서울수복까지 3개월 동안 적 치하에서 친척집을 다섯 군데나 전전하며 은둔생활을 했다. 북아현동 집에서 보름간 숨어 있다 거처를 장충동으로 옮겼다. 장충동에서 한 달간 숨어 있을 때 아버지는 방과 방 사이의 마루 밑 흙을 파내 그곳에 몸을 숨겼다. 내자동에서도 아버지는 온돌방 밑에 동굴을 만들어 몸을 숨겼고, 그 위에서 내가 잠을 잤다. 하루는 북한군이 한밤중에 집에 들어와 방이며 옷장이며 깡그리 뒤지기 시작했다. 그들은 내가 누워 있는 방으로 건너와 구둣발로 나의 오른손을 으스러지도록 밟았다. 그러나 내 밑에 있는 아버지를 자극할까 걱정돼 아프다는 소리도 못하고 20분 정도를 참았다. 그때 생긴 커다란 상처를 석 달 간 방치하다 악화됐고, 1·4후퇴 때 부산에서 장기려(張起呂) 박사(당시 군의관)에게 오른손 가운데 손가락의 중간뼈를 제거하는 수술을 받았다. 지금도 온전치 않은 손가락을 보면 그날 아버지의 목숨을 지킨 ‘영광의 상처’라는 생각이 든다. 9월 28일 서울 수복 20일 전, 우리는 내자동에서 다시 종로5가 친척집으로 옮겨 지하실에 숨어 있었다. 아버지는 “집 앞에 북한군 정보사무실이 있다”고 했다. 아버지와 나는 창을 통해 날마다 새벽이면 사람들이 엿장수나 지게꾼으로 위장해 나갔다가 밤늦게 돌아오는 것을 보았다. 아버지는 매일 밤 그들의 동향을 관찰하며 메모했다. 9월 28일, 아버지는 인천상륙작전으로 국군과 미군이 서울로 진입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동네 청년들과 지하 방공호에 숨어 상황을 점검하고 있었다. 그때 북한 괴뢰군 셋이 퇴각하다가 그중 하나가 따발총을 들고 방공호에 나타났다. 북한군은 아버지를 국군장교로 지목하고 방공호 앞마당으로 끌어내 벽에 세우고 총을 겨누었다. 내가 사격을 막으려고 뛰어가는 순간, 어머니가 “쏠 테면 나부터 쏴라”며 아버지 앞을 가로막았다. 북한군은 어머니를 쏘지 못하고 허공에 총을 쏘았다. 나는 어머니가 쓰러진 것으로 알고 울부짖었다. 북한군은 방공호 사람들을 한곳에 몰아 놓더니 사복 두 벌을 챙기고는 아버지의 손목시계를 빼앗아 달아났다. 사범학교를 졸업한 모친은 평양의 상수공립심상소학교(上需公立尋常小學校)에서 교사를 지냈고, 김동길(金東吉) 연세대 명예교수가 어머니의 제자다. 모친은 1953년 아버지가 전사하자 나와 동생들을 홀로 고생하며 키운 열녀 중 열녀였다. 아침 이른 시간, 창경원 담길을 따라 황망히 피신하던 어머니는 몹시 배가 고팠던지 참외 하나를 사 5분의 4는 나에게 먹이고 5분의 1만 드셨다. 어머니는 자식의 사법시험 합격을 위해 1년 동안 암에 걸린 것을 주변에 숨겼다가 합격 소식을 듣고서야 알렸다. 뒤늦게 수술을 했지만, 이미 때가 늦어 결국 세상을 떠났다. 박 대통령이 내게 “모친 안녕하시지?”라고 안부를 물을 때, “암 투병 중”이라고 했더니 대통령의 눈에선 금방 이슬이 맺혔던 기억이 난다.
北進 때 다시 가 본 평양
육본 작전국장 집무 중인 이용문 준장. 일본 육사 50기로 맹호사단의 전신인 기갑연대를 창설해 초대 연대장을 지냈다. 국군 입성 시간에 맞춰 나는 아버지의 손을 잡고 종로5가에서 광화문까지 걸어갔다. 총탄이 여기저기서 아찔하게 날아다녔다. 길 위에는 두 눈을 뜬 채 허공을 응시하는 시체, 팔다리가 없는 시체 등 대부분 북한군 시체였다. 목사가 꿈이었던 나는 그와 같은 비극적 상황을 종교적으로 어떻게 봐야 할지 마음의 동요가 심했다. 아버지는 국군에 합류했고, 그날 저녁 병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지프를 타고 우리가 머물던 곳으로 왔다. 며칠 후 청파동으로 이사를 하는 날, 트럭에 짐을 싣고 앉아 가는데, 그렇게 기분이 상쾌하고 좋을 수가 없었다. 청파동 이사 첫날, 우리 가족은 한 상에 모여 앉아 굴비를 반찬으로 밥을 먹었다. 자유로운 서울 하늘 아래서 먹는 굴비의 맛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아버지가 평양까지 진격해 들어간다는 말을 듣고 나는 아버지에게 “동행하게 해 달라”고 했다. 기억속의 평양을 다시 보고 싶었다. 아버지는 “호랑이한테 잡혀갈지도 모르는데 괜찮겠느냐”고 하셨다. 아버지는 나와 그 당시 우리집 운전기사 최형진씨(아버지는 최대위라고 부름)를 데리고 평양으로 떠났다. 나는 아버지와 함께 전투용 지프에 동승했는데, 사병이 뒷좌석에서 카빈총을 들고 있고, 나도 그 옆에서 아버지의 권총을 찼다. 고사리 손을 이끌려 사선을 넘었던 순간을 생각하니 어머니와 할머니 생각이 났다. 다시 찾은 평양은 기억속의 평양보다 어둡고 침울했다. 외할머니 댁을 갔다. 돌아가신 외할아버지 김귀선(金貴善) 선생은 과거에 급제한 선비로 평양에 일신학교(日新學校)를 설립했다. 친할머니 댁도 방문했다. 할머니는 아버지가 군복을 입고 찍은 청년시절 사진을 보여주며 북한군에게 발각되지 않도록 초가집 창틀 속에 끼워 두었다고 했다. 아버지는 눈시울을 붉히면서 사진을 받았다. 폭파된 대동강 철교와 모란봉과 시내를 돌아보았다 며칠 후 아버지는 북으로 진격하느라 나와 헤어졌고, 우리는 외할머니와 친할머니 가족들을 모두 모시고 서울 청파동집으로 돌아왔다. 그때 두 할머니는 잠시 서울에 다니러 온 것인데, 1·4후퇴 때문에 다시는 평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말았다. 중공군 참전으로 국군이 평양에서 후퇴하자, 아버지는 연락병을 보내 서둘러 부산으로 이사하라고 했다. 우리는 간단히 짐을 꾸려 최형진씨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한강을 건넜다. 천안 국도변에서 트럭과 충돌하는 사고를 겪고 천신만고 끝에 부산 큰 아버지댁에 도착했다. 길거리를 헤매는 아이들에게 과자를 사 주고, 고아원으로 안내해 준 일도 있었다. 아버지는 육군본부 작전국장으로 발령을 받았고, 우리 가족은 육군본부가 있던 대구로 함께 떠났다. 1952년 이승만 대통령이 사실상 직선제 개헌안인 발췌개헌안을 관철시키려 했던 ‘부산정치파동’을 일으키자, 육본 작전국장이었던 아버지는 이종찬 장군과 함께 군의 중립을 지키면서 병력차출을 거부했다. 작전국장 시절, 아버지는 박정희 대령을 작전국 차장으로 임명했다. 아버지는 종종 어머니에게 “내가 참모총장을 한다면, 후임을 할 만한 사람은 박정희뿐이야”라고 말했다. 아버지의 부관과 사병들은 “다른 장군들은 부하 장병들에게 욕하고 반말을 예사로 하는데, 이용문 장군은 전혀 그렇지 않다”고 했다. 그 당시 김창룡(金昌龍)의 특무대는 위세가 대단했다. 특무대장의 계급이 대령임에도 불구하고 장군들이 김 대장을 보면 먼저 깍듯이 인사했다고 한다. 그러나 아버지만은 군의 위계질서를 지키기 위해 그렇게 하지 않았다. 고분고분하지 않는 아버지에게 김창룡 특무대장의 감시의 눈초리가 날카로웠다고 한다. 하루는 우리 집을 자주 찾는 분 가운데 장태화(張太和·서울신문 사장 역임)씨가 있었다. 그는 작전국 문관이었다. 아침 일찍 또는 저녁 무렵 찾아와 아버지에게 정보 상황을 보고하곤 했다. 하루는 특무대에서 장태화씨를 감금해 조사한다는 소식이 들렸다. 수도사단장이었던 아버지는 특무대장 승인도 없이 데리고 나와 버렸다. 아버지는 사냥을 좋아했다. 특히 배를 타고 오리나 꿩사냥을 즐겼다. 내게 카빈총을 주며 직접 사냥도 해 보라고 했다. 새벽녘에 집을 나서 갈대숲 속으로 노를 젓다가 물오리들이 사격권에 들어서면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켜 사격을 했다. 한번은 산으로 꿩사냥을 갔는데, 아버지와 병사는 반대편에서, 나는 차 있는 곳에서 꿩을 향해 사격했다. 사냥이 끝난 후 병사가 나를 나무랐다. 내가 쏜 총알이 몇 차례나 아버지를 스치고 지나갔다는 것이다. 아버지는 빙긋이 웃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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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려 박사는 1995년 12월, 86세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부산 복음병원 원장으로 40년,
복음간호대학 학장으로 20년을 근무했지만, 그에게는 서민 아파트 한 채,
죽은 후에 묻힐 공동묘지 10평조차 없었다. 6·25 전쟁 기간 중 그는 군의관으로
이건개소년의 다친 손을 수술했다.
초록색 트라우마
장기려 박사는 1995년 12월, 86세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부산 복음병원 원장으로 40년, 복음간호대학 학장으로 20년을 근무했지만, 그에게는 서민 아파트 한 채, 죽은 후에 묻힐 공동묘지 10평조차 없었다. 6·25 전쟁 기간 중 그는 군의관으로 이건개 소년의 다친 손을 수술했다.
아버지는 애주가였다. 부하 장병들이나 친구들과 집에서 취하도록 마셨다. 특히 박정희 장군과 술을 마시면 시국을 논하다가 취한 채로 잠자리에 누웠다. 그럴 때면 늘 소아마비인 동생 이건상(李健相·71세)을 안아 준 다음, 잠자리에 들었다. 아버지는 건상이가 명석해 더 안쓰러워하셨다(5·16 직후 박정희 의장은 청파동 집으로 주치의를 보내 “그집 둘째아들 몸이 불편하니 서울대병원에 입원시켜 현대의학으로 치료해 보라”고 했다는 것이다. 3개월 동안 건상이는 치료를 받았지만, 안타깝게도 정상으로 돌리지는 못했다).
경기중학교에 재학 중이던 1953년 6월 24일, 전남지구전투사령관으로 있던 아버지가 지리산 빨치산 소탕작전 후에 대구로 올라온다는 연락이 왔다. 당시 휴전이 임박한 상황이었다. 아버지는 악천후에도 불구하고 지리산 운봉지역 상공에서 경비행기 L-19를 타고 공비토벌을 지휘한 후 곧바로 남원을 떠나 대구로 향했다.
그날 아침, 나는 사랑니가 아파 치과에 가서 이를 뽑았다. 아버지를 마중하기 위해 지프로 육군비행장으로 갔다. 두 시간 넘게 기다렸는데도 아버지는 도착하지 않았다. 혹시 비행기 사고라도 당한 것 아닌가 하는 느낌, 그것이었다. 비행장에서 아무리 기다려도 비행기는 오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그냥 집으로 돌아왔다. 어머니는 남원지구전투사령부와 육군에 계속 연락하며 아버지 소재를 파악하느라 애쓰고 있었다. 도착 예정 시각이 오후 4시였으나, 벌써 저녁 7시를 넘고 있었다. 육군에도 비상이 걸렸다. 불길한 예감에 우리 식구는 저녁도 먹지 않고 군과 계속 연락을 시도했다.
밤 11시, 육군본부에서 연락이 왔다. 빨치산 부대가 있는 지리산 운봉고개에 미군으로 보이는 사람이 탑승한 비행기가 추락했다는 보고가 있었다는 것이다. 아버지가 탄 비행기가 아니기를 빌고 또 빌었다. 다음 날 새벽 3시, 수색작업 결과, 아버지가 탑승한 비행기로 확인됐다. 혼절 직전인 어머니와 나는 공비가 자주 출현하는 지리산 사고지역으로 지프를 타고 출발했다. 대구에서 남원으로 가는 5시간 동안, 나는 아버지가 불구가 되더라도 제발 살아만 있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
현장에 도착해 보니 아버지는 차가운 시신으로 변해 있었다. 1953년 6월 24일 전북 남원 운봉면 상공에서 L-19 정찰기와 함께 추락해 전사한 것이다. 항공기 추락에 의한 충격으로 아버지의 가슴과 얼굴엔 심한 상처를 입었다. 얼굴은 초록색 천으로 완전히 덮여 있었다. 그때부터 내게는 초록색에 대한 트라우마가 생겼다. 어머니의 통곡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끊이지 않았다. 큰아버지 이용운 제독이 사고현장에 도착했다. 큰아버지는 오히려 많은 분들을 위로했다. 큰아버지를 보자 더욱더 눈물이 나왔다. 아버지 시신은 대구 육군본부로 옮겨 박치순 목사(해방촌교회 목사)의 집례 아래 육군장으로 치렀다. 우리는 대구 시내를 거쳐 칠곡으로 가서 아버지를 안장했다.
이건개 변호사의 모친 김정자 여사가 집필한 《한국결혼풍속사》. 아버지의 사인(死因)은 공비들의 저격, 당시 특무부대의 사고조작 가능성 등 몇 가지 의문이 퍼져 있었다. 몇 년 후 큰아버지를 통해 알게 됐지만, 아버지에게 정부 전복에 대한 쿠데타 계획이 있다며 모처에서 내사한 기록이 있었다고 한다.
나는 아버지의 전사 원인을 규명하기 위해 검사 발령을 받자마자 수사요원 한 명을 대동하고 지리산 운봉(雲峰)에 가서 직접 현장을 살펴봤다. 지리산 운봉은 벌판이었고, 그 끝 지점에 절벽 같은 높은 산이 우뚝 솟아 있었다. 그 당시 운봉에는 50호 정도의 주민들이 살고 있었다. 주민들을 찾아가 수소문한 결과, 당일을 기억하는 주민을 찾을 수 있었다.
나는 주민들이 알려준 사고현장을 찾아 향을 피우고 묵념을 한 후 하산했다. 한편, 대구에서 장례식을 치르고 난 후, 어머니는 거의 매일 눈물로 시간을 보냈다.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대구에서 서울로 이사 왔다. 어머니는 서울에 올라온 후 매일 창경원 도서실에 출근하면서 1974년 《한국결혼풍속사(韓國結婚風俗史)》(민속원, 232쪽)라는 책을 집필했다. 이 책은 어머니가 20년 동안 도서관을 다니며 수집한 풍부한 사료들을 근거로 한 것이어서 훗날 학계의 높은 평가를 받았다.
이건개 변호사의 모친 김정자 여사가 집필한
《한국결혼풍속사》.
어머니는 날마다 밤 11시경이면 내게 밤참을 만들어 주면서 아버지에 대해 상세히 설명해 주셨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뜻을 펼치지 못하고 젊은 나이에 요절(夭折)하신 것이 마음 아프다고 했다. 아버지의 친구들과 선후배 장군 50명의 명단을 내게 주면서 “평소 자주 인사를 드리라”고 했다. 어느 해에는 신당동 박정희 장군 집에 세배하러 갔는데, 박정희 장군이 10여 명의 장병들과 안방에서 술을 마시고 있다가 반갑게 맞아 주었다. 세배 후 자리한 사람들에게 “이 학생이 우리가 가장 존경하는 이용문 장군의 장남이라고”라며 일일이 인사를 시켜 주었다.
한식날 성묘 때 民心 묻던 朴正熙
나는 경기중학 시절 아버지가 생각날 때면 방과 후 승마장에 가서 말을 타고 저녁이 되면 영어학원으로 갔다. 전국체육대회 승마 경기에서 3년 연속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경기고 조회 시간에 전교생이 모인 자리에서 1등 우승컵을 교장선생님께 드렸던 기억이 난다. 고3 때, 불운하게 가신 아버지의 뜻을 펴기 위해 육사 진학을 희망했으나, 어머니는 완강하게 법대로의 진학을 권하셨다. 서울대 법대를 지망해 이틀 동안 시험을 치렀고, 합격자 발표를 할 때 어머니는 뛸 듯이 기뻐하셨다. 대학 1학년 생활이 시작됐고, 1학년 1학기 과목부터 고등고시를 치르는 자세로 임했다. 법률과목을 공부해 보니 생각보다 딱딱하지 않았다. 10명의 학생을 불러 모아 고시 스터디그룹 ‘청파회’를 만들었다. 그러나 대학 1학년 때 4·19가 터졌다. 법학개론 강의시간에 선배들이 들어와 운동장으로 모이라고 했고, 우리들은 중앙청까지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를 벌였다. 시위대가 중앙청 입구에 도착하자 총성이 터졌고, 먼저 도착한 학생들이 총에 맞아 쓰러졌다. 총알이 귓전을 스치는데도 우리는 계속 구호를 외쳤다. 그날 시위로 이승만 대통령은 하야하고 혼란은 계속됐다. 이듬해 4월 한식날, 나는 어머니가 싸 주신 음식을 들고 나 혼자 기차를 타고 대구로 향했다. 칠곡의 아버지 묘소를 찾기 위해서였다. 나는 대구 친척집에 숙소를 정한 다음, 2군 부사령관인 박정희 장군 댁을 찾아갔다. 관사 문을 두드리자 부관 장교가 나와 인적사항과 용건을 묻더니 이용문 장군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고서야 비로소 그집이 박정희 장군 관사가 아니라 이주일(李周一· 국가재건최고회의 부의장 역임) 장군 집이라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인접한 박정희 장군 집을 찾아가 편지를 전하고 박 장군 면담을 요청했다. 병사는 박 장군이 숙소에 계시지 않으니 편지만 놓고 가라고 했다. 나는 편지와 대구의 숙소 연락처를 남겨 놓고 돌아왔다. 다음 날 아침, 박정희 장군 부관이 전화를 걸어 왔다. 오전에 시간 맞춰 자동차를 보내겠으니, “성묘를 마치면 박정희 장군이 식사를 함께 하자고 하신다”고 전했다. 아침 8시, 차가 도착했다. 운전병과 묘소 가는 길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요즘 박정희 장군의 생활이 이상하다는 말을 들었다. 일절 외부 인사를 만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대구 근교에 있는 절에만 자주 갈 뿐 가족과 친척도 거의 만나지 않은 채 혼자 지내는 시간이 많다고 했다. 아버지 묘는 육군장으로 치렀기 때문에 묘소 주변을 포탄 탄피로 장식했었다. 그날 가보니 고물상들이 비싼 구리 포탄을 전부 집어가는 바람에 묘지 주변이 썰렁했다. 절을 하며 꼭 고시에 합격하겠다고 다짐했다. 다시 차량으로 박정희 장군 관사로 이동했다. 두 시간 정도 기다려도 박정희 장군은 나타날 줄 몰랐다. 당시 대학 2년생으로 고시공부를 막 시작한 시점이었기 때문에 시간이 별로 없었다. 부관에게 통화를 부탁했다.부관이 전화하자, 박정희 부사령관은 “장도영(張都暎) 육군참모총장과 중요한 회의 중”이라고 했다. 급히 통화를 해야겠다며 간곡하게 부탁했다. 간신히 박정희 장군과 통화할 수 있었다. “건개냐? 별일 없이 공부 잘하고 있지?” “예. 아버지 묘소에 가 보니 고물상들이 포탄 탄피를 모두 집어가 버려 몹시 썰렁했습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래, 내가 책임지고 잘 돌봐줄 테니 걱정 말거라. 저녁 같이 먹고 올라가지 않을래?” “서울 가는 기차시간이 저녁 8시30분이라 지금 가 봐야 해요. 내일 아침 중요한 강의가 있어 오늘 꼭 올라가야 해요.” 또다시 한참 침묵이 흘렀다. “요즘 서울의 민심 동향은 어떠냐?”“데모를 많이 하고 골치가 좀 아픕니다.” “알았다. 내가 서울로 올라가 다시 연락하마.” 나는 전화를 끊고 기차 시간에 대기 위해 대구역으로 향했다. 역에는 박정희 장군이 보낸 부관이 나와 장군의 인사를 전했다. 그는 “이용문 장군께서 국가적 난국에 계시지 않은 것을 청년장교들은 매우 안타까워한다”고 했다. 대구에서 올라와 공부를 하고 있던 5월 16일 새벽 1시경, 청파동 집 주변에서 야음을 찢는 여러 발의 총소리가 들렸다. 그 시간에 맞춰 당시 이태희(李太熙) 검찰총장 댁으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박정희 장군의 경력과 사상에 대해 물어보면서, 아버지가 박정희 장군과 친밀하지 않았느냐며, 현재 박 장군이 쿠데타를 주도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한식날 성묫길에서 박정희 2군부사령관이 민심 동향을 물었던 의미를 그제서야 알 것 같았다. 나는 부랴부랴 AFKN(주한미군방송) 라디오를 틀었다. 박정희 소장이 5·16 군사쿠데타를 이끌고 있다는 내용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튿날 모친이 걱정스런 마음으로 육영수(陸英修) 여사를 찾았을 때, 육 여사는 남편이 쿠데타를 한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고 한다.
6·25 전쟁 중 연락기 앞에서 부대원들과 함께한
이용문 장군(오른쪽서 네 번째)
“유학은 언제든 갈 수 있는 것 6·25 전쟁 중 연락기 앞에서 부대원들과 함께한 이용문 장군(오른쪽서 네 번째).
검사로서의 생활에 회의를 느낀 나는 미국 유학을 결심했다. 토플시험이 잘 나와 예일대학으로부터 장학금을 받았다. 나는 1969년 5월 법무부에 출국신고를 마치고 미국으로 떠날 준비를 했다. 출국신고를 한 날 오후에 석간신문을 보니 박정희 대통령이 유성온천에 있다는 것이었다. 대통령께 인사를 드리고 떠나는 것이 도리라는 생각이 들어 그날 저녁 유성으로 내려가 박 대통령을 만났다
. 박 대통령은 나의 도미(渡美) 소식을 듣더니 “유학은 언제든지 갈 수 있는 것 아니냐”며 “국내 상황이 바쁘게 돌아가니 청와대에 와서 날 좀 도와달라”고 했다. 그 당시 정국 상황은 어지러운 면이 많았다. 대화가 끝나자 채명신(蔡命新) 2군사령관이 들어왔다. 대통령은 “자네, 이용문 장군 알지?”라며 나를 소개했다. 나는 닷새 후 청와대 민정비서실에 파견검사로 출근하게 됐다. 박정희 대통령은 민정비서실을 통해 직접 국민의 어려움과 고충을 보고받아 해결했고, 특히 행정부의 시책이 일선에서 정확하게 집행되는지 정밀하게 체크했다. 청와대 근무를 시작한 후, 처음으로 박 대통령을 만났을 때,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목숨을 건, 생명을 같이하는 동지가 다섯 명만 있으면 국가도 잡을 수 있다. 자네도 그 점에 유의해 인생을 살기 바란다. 군에 있을 때 자네 부친과 나는 생명을 같이하는 관계였고, 자네 부친은 부하장병으로부터 많은 존경을 받았다. 이곳 비서실에서 근무하면서 중요한 사항이나 정보가 있으면 직접 와서 보고하고, 국민의 어려운 생활을 세세히 파악해서 보고하게.” 박정희 대통령은 약간 긴장되고 비장한 분위기로 이렇게 조언했다. “민심에서 나타나는 문제점을 항상 분석해서 보고하도록 하라. 나는 요즘 커다란 배의 항해를 맡아 거친 파도를 헤쳐 나가는 선장이 된 느낌이다. 큰 배의 항로를 정하고 항진할 때, 경제와 안보는 똑같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국가운영은 경제가 핵심이다. 따라서 소비적이고 낭비적인 정치싸움이나 정치인들의 파벌싸움, 대안 없는 비난 일변도의 자세는 곤란하다. 나는 생산적인 정치를 할 것이다. 자네는 법률 전문가지만 앞으로 국가운영을 위해 경제공부를 더 철저히 해 두어라.” 나는 “철저히 민심을 파악해 문제점과 시책을 시의적절하게 보고드리고, 대통령 각하의 역사의 항해에 미력하나마 도움이 되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대통령은 내 손을 꼭 잡아 주었다.⊙ <하편으로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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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유사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