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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24일 연중 [제3주간 화요일]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복음: 마르코 3,31-35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보스톤 해변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매일 같은 시간이면 똑같은 일이 계속 되풀이되었습니다.
한 노인이 싱싱한 새우가 가득 담긴 통을 들고 어김없이 같은 시간에 나타나는 것이었습니다.
갈매기들이 금방 친구를 알아채고 그의 발아래 모여들었습니다.
일부 갈매기들은 용감하게도 그의 어깨 위에 앉기도 하였습니다.
새우를 갈매기들에게 나누어주는 동안 노인의 얼굴에서는 환한 웃음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갈매기들은 고급 요리를 그야말로 마음껏 먹었습니다.
사람들은 놀라서 매일의 이 광경을 바라보곤 하였습니다.
많은 이들이 화를 내며 “비싼 새우를 새들에게 낭비하다니 너무하다.”라고 투덜거렸습니다.
사실 그 노인은 제2차 세계 대전 때 미국군의 유명한 해군 장군이었습니다.
그런데 독일군이 어뢰를 발사하여 그의 배를 격침시켰습니다.
이에 그와 부하 일부만이 구명정에 간신히 올라탈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 구명정 위에서 뜨거운 태양과 폭풍과 식량의 어려움을 당하며 몇 날을 보내었습니다.
부하들은 한 명씩 죽어가기 시작하여 장군을 비롯한 몇 명만 살아남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장군도 정신이 희미해지면서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굶주림으로 죽기 일보 직전이었습니다.
그런데 누워 있는 순간 바로 옆에 작은 흰 물체가 안경을 통해 눈으로 들어왔습니다.
그것은 갈매기였습니다.
그런데 그 갈매기는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떨리는 힘없는 손을 천천히 뻗쳐 갈매기를 잡았습니다.
그 갈매기는 몇 시간 수명을 더 연장하도록 ‘하늘에서 내려온 만나’였고 그 몇 시간은 그가 섬을 발견하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 섬에서 안전을 찾고 생명을 부지할 수가 있었습니다.
이 사실을 알고 나자 사람들을 보스톤의 갈매기들에게 값비싼 식사를 대접하는 것에 대해서 그 장군을 비난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베타니아의 마리아 막달레나로 알려져 있는 한 여인이 2천만 원에 달하는 향유를 깨서 예수님께 발라드릴 때 유다는 그것이 아까워서 화를 냅니다.
그것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줄 수 있을 텐데 어떻게 그렇게 낭비하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태초에 루치펠이라는 대천사가 하느님께서 인간들을 너무나 사랑하시는 것에 화가 나서 하느님께 반란을 일으켜 사탄이 된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만약 누군가가 누군가에게 지나치게 잘 해 주는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어서일 것입니다.
보스톤에서 갈매기에게 비싼 새우를 주는 사람이 있다면 갈매기에게 귀한 것들을 줄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또 마리아 막달레나도 그리스도께 받은 것이 있기 때문에 그만한 감사의 표현을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오히려 받기만 하면서 그만한 보답을 하지 않는 것이 정의롭지 못한 것입니다.
제가 인터넷에 묵상을 올리기 시작한 것도 당시 아일랜드에 사셨던 몇 분들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분들이 저에게 해 주신 것들이 하나도 없었다면, 혹은 모르는 사람이 청한 것이었다면 공부하는 중에 인터넷에 매일같이 묵상글을 올릴 생각은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분들을 위해서 올리기 시작하였지만, 사실 그분들께 감사한 것이 있어서 올리기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수많은 기적까지 하시고 죽을 라자로까지도 살리십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기도하십니다.
“아버지, 제 청을 들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스도께서도 죽은 이를 살리는 권능을 아버지께 청해서 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저에게 죽은 사람을 살려달라고 청해도 저의 기도는 들어주시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제가 하느님을 원망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는 아버지의 뜻을 완전하게 따르신 분이고 저는 한 명의 죄인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제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는다고 해서 제가 그리스도를 시기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을 죽기까지 ‘아멘!’으로 따르셨기 때문에, 그만한 청을 해도 들어주시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요한복음 9장에서는 예수님께서 태생소경을 고쳐주시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눈을 뜨게 된 소경은 고위층 유다인들 앞에서 그리스도를 증거합니다.
물론 그는 진흙이 발라진채로 실로암으로 뛰어갔기 때문에 예수님을 보지 못했지만 예수님을 하느님으로부터 온 사람임을 굳게 믿습니다.
그러나 유다인들은 예수님이 죄인이라고 그를 설득시키려합니다.
그러나 눈을 뜨게 된 소경은 이렇게 말하며 끝까지 자신의 눈을 뜨게 해 준 분이 죄 없는 분임을 증거합니다.
“소경으로 태어난 사람의 눈을 뜨게 하여준 이가 있다는 말을 일찍이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하느님께서는 죄인의 청은 안 들어주시지만 하느님을 공경하고 그 뜻을 실행하는 사람의 청은 들어주신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요한 9,31.32)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무슨 청이나 다 들어주는 것입니다.
성녀 제르뚜르다에게 누가 와서 기도를 청했다고 합니다.
제르뚜르다는 수많은 기도들을 일일이 기억하지 못할 때도 있었는데 사람들은 성녀의 기도 때문에 은총을 받게 되었다고 감사를 드렸습니다.
성녀가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예수님, 제가 기도도 해 준 적이 없는데 어떻게 그런 일들이 일어났지요?”
예수님은 대답하셨습니다.
“네가 내 뜻을 따르기로 결심한 순간부터, 나도 네 뜻을 따르기로 결심했기 때문이다.”
누가 하느님의 뜻을 잘 따르고 있느냐고 묻는다면, 그 사람이 청하는 것을 들어주시느냐 안 들어주시느냐를 보면 됩니다.
그러면 성모님은 하느님의 뜻을 잘 따르는 분이셨을까요?
그분만큼 하느님의 뜻을 따른 사람은 없습니다.
그 증거가 바로 카나의 혼인잔치에서 그리스도의 첫 기적을 얻어낸 것입니다.
성모님 외에 누가 그 기적을 얻어낼 수 있었겠습니까?
성모님 외에 감히 ‘불필요한데도’ 남의 잔칫집에서 포도주가 없으니 기적으로 포도주를 만들어달라고 ‘당당하게’ 청할만한 믿음을 지닌 사람이 어디에 있었겠습니까?
성모님은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았다고 하는데도 ‘당당하게’ 하인들에게 그가 시키는 것은 무엇이든 하라고 하시며 기적을 ‘강요’하십니다.
당신에게 그 정도도 못 해주느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첫 기적을 얻어내셨습니다.
이것이 성모님께서 누구보다도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신 분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성모님을 비하하는 것 같은 발언을 하시고 일부 그리스도교 교파에서는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성모님을 보는 시각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만큼 확실히 성모님을 들어 높이는 복음도 드뭅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평가는 바로 하느님께 청한 것을 얼마나 받을 수 있느냐에 달려있음을 우리는 보았습니다.
성모님만큼 하느님께 청해서 다 받을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것이 성모님만큼 하느님의 뜻을 실행한 사람이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고, 이것이 성모님만이 온전히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라 합당하게 불릴 수 있는 분이라는 증거입니다.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이루어지소서.”라고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인 것 때문에 엘리사벳은 성모님께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당신은 모든 여인들 가운데서 ‘가장’ 복되십니다.”라고 말합니다.
그 믿음을 따라올 여인이 하나도 없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당신께서 청하는 것은 무엇이나 받을 수 있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만약 그리스도께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은 무엇이나 받을 수 있는 분이기에 그리스도를 통하여 기도한다면, 또한 그리스도께 청하는 것은 무엇이나 받을 수 있는 성모님을 통하여 그리스도께 청하는 것이 현명한 일이 아닐까요?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1월24일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마르코 3,31-35
보다 매력적인 존재, 사랑스런 존재, 세파에 지친 세상의 나그네들에게 기쁨과 행복을 선사하는 사목자!
오늘 우리는 참으로 특별한 성인 한 분을 기념하고 있습니다.
품위 있고 매력적인 사랑과 온유의 성인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 학자입니다.
사랑스럽고 매력적인 사목자이다 보니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님은 발길 닿는 곳마다
그분께 흠뻑 매료된 수많은 추종자들과 군중이 몰려와 떠날 줄을 몰랐습니다.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그분께 가까이 가려고 경쟁했습니다.
조금이라도 더 그분과 시간을 보내고 싶어 안달이었습니다.
그가 던지는 말씀 한마디 한마디에 박수를 치며 환호했고, 눈물까지 흘리며 행복해했습니다.
오늘 수많은 우리 사목자들 가운데 단 한 분이라도 그런 분이 계시는가? 자문해봅니다.
급격히 침몰해가는 우리 교회가 회생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비결은 우리 가운데 단 한 분이라도
그런 사목자가 탄생하는 것이 아닐까요?
우연히 한 유명 가수의 일상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을 봤습니다.
정말이지 깜짝 놀랐습니다.
그 가수가 주도하는 콘서트 장소에는 수천·수만의, 군중이 입추의 여지 없이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들 가운데 동원되어 오거나, 억지로 와 앉아있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그 멋진 가수는 멋진 노래들과 퍼포먼스로 콘서트장을 감동의 도가니요, 축제의 장으로 만들었습니다.
팬클럽 회원들은 한마음 한 몸이 되어 그 순간을 즐겼습니다.
가수의 일거수일투족을 바라보는 팬들의 눈은 마치 꿀이라도 뚝뚝 떨어지는 듯했고, 천국에라도 와 있는듯한 얼굴이었습니다.
그 순간 이런 생각이 제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습니다.
저 콘서트가 끝나고 나서 바로 그 자리에서, 그 분위기를 이어 미사를 봉헌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왜 우리 교회의 지상 최대의 잔치인 미사는 저렇게 되지 않는 건지...
공연이 시작되기 전 그 멋진 가수는 경호원, 안무팀, 연주팀, 무대팀 등 수많은 스탭들과 만나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더군요.
수정하고 보완하고, 동시에 그들에게 감사하고, 격려하고 고무하고...
우리 교회의 대잔치인 성체성사도 전례 차원에서, 성가 차원에서, 말씀 선포 차원에서 보다 세심하게 고민하고 준비하는 노력이 필요하겠습니다.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인은 얼마나 온유하고 친절한 사람이었는지는 다음의 일화를 통해서 잘 알 수 있습니다.
한번은 어떤 사람들이 제네바의 주교 시절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와 샹딸 수녀를 음해하기 시작했습니다.
틈만 나면 있지도 않은 추문을 만들어 사람들에게 퍼트렸습니다.
그러나 주교는 그 어떤 법적 대처도 하지 않고 침묵 속에 기도만 하셨습니다.
엄청난 모욕 앞에서도 분노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동정심을 지녔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우연히 길거리에서 장본인인 벨레라는 변호사를 만났습니다.
그러자 주교는 그에게 다가가서 손을 맞잡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변호사님은 저를 음해해서 명예를 실추시키려고 갖은 노력을 다하신다지요?
제가 그 일에 대해 소상히 알고 있으니 제게 변명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아셔야 합니다.
변호사님이 제 눈 하나를 멍들게 한다든지 뽑아 버린다 할지라도 저는 나머지 한쪽 눈을 가지고
여전히 선생을 기쁘게 바라볼 것입니다.”
매력적인 사목자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 학자 축일을 맞아 우리 사목자들이 좀 더 매력적인 존재, 사랑스런 존재, 세파에 지친 세상의 나그네들에게 기쁨과 행복을 선사하는 사목자로 거듭나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1월24일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복음: 마르 3,31-35: 예수님의 형제, 자매, 어머니인 사람들
“보십시오,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스승님을 찾고 계십니다.”(32절)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지 않는 사람은 당신 가족이 아니라고 말씀하셨다. 마리아는 아버지의 뜻을 따르셨기 때문에 예수님은 마리아를 당신의 가족에 분명히 포함하셨다. 사람들이 당신께 알려준 사적이고 개인적인 혈연관계로서의 어머니가 아니라 하느님 안에서 한 가족임을 분명히 하신 것이다.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33절) 이 말씀은 당신 어머니를 부끄럽게 여기신 것도 아니다. 부끄럽게 여기셨다면 그 태를 거쳐 나오지도 않으셨을 것이다. 마리아도 해야 할 바를 다하지 않았더라면 아무런 유익도 얻지 못했으리라는 것을 가르치신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35절) 우리는 당신 가족으로 우리를 불러주신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여야 한다.
예수님 말씀의 의미는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하느님의 가족이 되기 위한 요건을 말한다.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를 수 있다면 그는 예수님의 형제요, 자매가 되는 것이다. 또 어머니라는 것은 말씀을 다른 사람에게 낳아줄 수 있다면 그것은 가족에서 어머니의 역할을 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기 때문에 우선은 하느님의 말씀을 잘 듣는 태도와 그것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삶이 있어야 예수님의 가족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하느님의 가족이란 육적인 가족보다 영적인 가족을 앞세워야 한다고 가르치시는 것이다. 즉 마리아가 그리스도의 육신을 잉태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가졌다는 점에서 더욱 복되신 것이다.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루카 11,27) 하였을 때, 주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루카 11,28) 예수님의 혈육들은 그분을 믿지 않았다.(요한 7,5 참조)
혈연관계는 그들에게 아무런 득이 되지 않았다. 마리아는 그리스도를 잉태하신 것도 복되시다고 천사도 엘리사벳도 말하였다. 그러나 그보다 더 행복하게 그리스도를 마음에 모시지 않았더라면, 어머니라는 친족 관계조차 마리아에게 아무런 유익도 되지 못했을 것이다.(참조: 마태 3,8-10; 루카 11,27-28; 로마 9,1-8)
주님께서 마리아를 칭송하신 것은 혈연관계로 당신을 낳아주셨기 때문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실행했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루카 11,28) 이 말씀은 마리아 안에서 말씀이 사람이 되시고 우리 가운데 사셨기 때문이 아니라(요한 1,14 참조), 자신을 지어내시고 자신 안에서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말씀을 지켰기에 복되다는 것이다. 즉 마리아는 하느님의 말씀을 지키셨기 때문에 복되시다는 말씀이다. 말씀을 실천하는 삶으로 가족이 되어야 한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