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천사
-춘향(春香)의 말 · 1
서정주
향단(香丹)아, 그넷줄을 밀어라
머언 바다로
배를 내어 밀 듯이
향단아.
이 다수굿이 흔들리는 수양버들나무와
벼갯모에 뇌이듯 한 풀꽃데미로부터
자질한 나비새끼 꾀꼬리들로부터
아주 내어 밀 듯이, 향단아.
산호(珊瑚)도 섬도 없는 저 하늘로
나를 밀어 올려 다오
채색(彩色)한 구름같이 나를 밀어 올려 다오
이 울렁이는 가슴을 밀어 올려 다오!
서(西)으로 가는 달같이는
나는 아무래도 갈 수가 없다.
바람이 파도를 밀어 올리듯이
그렇게 나를 밀어 올려 다오
향단아.
(시집 『서정주 시선』, 1956)
[어휘풀이]
-추천 : 그네
-벼갯모 : 베갯모. 베개의 양쪽 마구리에 대는 꾸밈새. 조그마한 널조각에 수를 놓은
헝겊으로 덮어 끼우는데, 남자의 것은 네모지고 여자의 것은 둥글다.
[작품해설]
이 시는 ‘춘향(春香)의 말’이라는 부제가 붙은 3편의 연작시 중 첫 번째 작품이다. 이 시는 대수롭지 않은 소재를 이용하여 그것을 형이상학적(形而上學的)인 세계로 끌어 올려 차원 높은 이미지로 승화시키는 미당의 시작 능력(詩作能力)이 잘 발휘된 작품이다. 이 시의 시적 화자는 춘향으로 이 ‘춘향’은 시인에 의해 새로이 성격화된 인물이다.
이 시의 ‘춘향’은 낮은 신분에서 오는 현실적 제약으로 인해 답답한 심경으로 그네를 타면서 ‘향단’에게 자신의 괴로움을 고백·토로하는 고뇌의 여인이다. 이 시의 장면은 춘향과 이몽룡이 만나기 이전으로 소설에서는 그네를 타는 ‘춘향’의 내면세계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시인은 뛰어난 상상력을 발휘하여 춘향이 생각하는 바를 ‘그럴듯하게’ 보여 준다.
현실적 고뇌를 가진 ‘춘향’은 그네를 타는 행위를 단순한 유희가 아닌 땅 위의 현실적 인연을 끊어 버리고, 높은 하늘로 날아오르려는 상징적 행동으로 생각한다. 현실을 떠나고 싶은 욕망과 의지는 ‘머언 바다로 / 배를 내어 밀 듯이’ 그넷줄을 밀어 달라는 ‘춘향’의 말로 나타난다. 그러나 아주 내어 밀 듯 그네를 밀어 달라고 하지만, ‘수양버들’ · ‘풀곷데미’ · ‘나비’ · ‘꾀꼬리’들로 표상된 아름다운 현실 세계에 대한 강한 집착 때문에 쉽게 떠나지 못하는 번뇌가 있다. 현실이 아름다움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굳이 떠나려 하는 것은 자신의 소망을 이룰 수 없는 현실의 한계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춘향’은 좌초와 충돌, 곧 어떠한 제약도 없는 ‘산호도 섬도 없는 저 하늘’인 동경의 세계에 도달하고 싶어한다. ‘춘향’은 이 고뇌에 찬 세상을 ‘채색한 구름같이’ 벗어나 마음껏 자유를 누리는 초월적 세계 속의 존재가 되도록 ‘밀어 올려’ 달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춘향’은 인간의 한계에 대한 현실적 깨달음을 얻고는 이내 ‘서으로 가는 달같이는 / 나는 아무래도 갈 수가 없다’라고 독백을 한다. 그네가 아무리 하늘 높이 올라가더라도 다시 땅으로 떨어지게 마련인 것처럼 ‘춘향’은 자신의 소망도 결국은 이룰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러한 자각(自覺)은 바로 ‘춘향’의 간절한 초월의 의지와 그것의 필연적 좌절을 상징한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소망을 끝내 버릴 수 없어 ‘바람이 파도를 밀어 올리듯이’ 밀어 달라고 한다. 파도가 어쩔 수 없이 다시 떨어져 내려오듯이 자신도 그렇게 될 수밖에 없음을 분명히 깨닫고 있으면서도 화자는 이 현실적 괴로움에서 벗어나고 싶어하는 것이다. 이렇듯 이 시는 ‘춘향’이라는 인물을 통해 현실을 초극하려는 의지와 현실적 불가능 사이에 놓인 인간의 본질적 비극성을 그리고 있다.
[작가소개]
서정주(徐廷柱)
미당(未堂), 궁발(窮髮)
1915년 전라북도 고창 출생
1929년 중앙고보 입학
1931년 고창고보에 편입학, 자퇴
193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벽」이 당선되어 등단
시 전문 동인지 『시인부락』 창간
1946년 조선청년문학가협회 결성, 시분과 위원장직을 맡음
1950년 종군 위문단 결성
1954년 예술원 종신 위원으로 추천되어 문학분과 위원장 역임
1955년 자유문학상 수상
1977년 한국문인협회 이사장
2000년 사망
시집 : 『화사집』(1941), 『귀촉도』(1948), 『흑호반』(1953), 『서정주시선』(1956), 『신라초』 (1961), 『동천』(1969), 『서정주문학전집』(1972), 『국화옆에서』(1975), 『질마재 신화』 (1975), 『떠돌이의 시』(1976), 『학이 울고간 날들의 시』(1982), 『미당서정주시선집』 (1983), 『안 잊히는 일들』(1983), 『노래』(1984), 『시와 시인의 말』(1986), 『이런 나
라를 아시나요』(1987), 『팔할이 바람』(1988), 『연꽃 만나고 가는 사람아』(1989), 『피
는 꽃』(1991), 『산시(山詩)』(1991), 『늙은 떠돌이의 시』(1993), 『민들레꽃』(1994), 『미당시전집』(1994), 『견우의 노래』(1997), 『80소년 떠돌이의 시』(19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