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4:5-7 대제사장 가문의 사두개파 사람들은 공회를 소집하여 사도들을 공회에 세우고 무슨 권세로 가르치고 기적을 행하며 누구의 이름으로 이런 일들을 하는지 물었다.
이전 말씀에서는 베드로와 요한이 부활하신 예수께서 만물을 회복시킬 것을 전하고 있는 중에 사두개파 지도자들이 와서 베드로와 요한을 잡아 공회에 넘기려 했지만 날이 이미 저물어 가두어 두었다. 이어지는 말씀은 대제사장 가문의 사두개파를 중심으로 소집된 산헤드린 공회원들이 사도들을 공회에 세우고 심문하는 장면이다.
5절은 이튿날 그들의 통치자들과 장로들과 율법학자들이 예루살렘에 모였다고 했다. 관원이나 지도자로 번역한 말은 원어에서는 통치자들이라는 뜻이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서는 주로 유대인들의 통치자들을 가리키는 말로 썼다. 당시에는 로마가 통치를 했기에 이방인들이 다스렸지만 이스라엘은 종교가 백성들을 다스렸기에 로마인들은 종교적인 문제는 유대인 스스로 담당하도록 허용했다. 통치자라는 말은 대제사장의 가족이나 성전을 관리하는 제사장들을 뜻하는 말이다. 이들은 산헤드린 공회를 구성하는 대제사장 가문의 사람들일 것이다. 장로들이란 본래 각 지파의 대표인 원로들이다. 여기서도 역시 제사장 가문이 아닌 일반 백성들의 대표인 원로들이 모인 것이다. 또 율법학자들이란 하나님 말씀을 필사하고 관리하며 사람들을 가르치던 사람들이다. 이들은 대부분 바리새파들이었다. 이들은 모두 산헤드린 공회의 구성원들이다.
공회를 소집한 사람들은 대제사장들이 중심인 사두개파 사람들이다. 이들은 부활을 믿지 않았기에 제자들이 전한 부활의 복음은 심각한 위협이 되었다. 그래서 사두개파 사람들은 산헤드린 공회를 소집한 것이다. 갑자기 공회가 소집되자 이들은 모이면서 수군거렸을 것이다. 예수를 죽게 해서 끝이 난 줄 알았는데 그 이름을 믿는 사람들이 엄청나게 불어나자 이들은 큰 걱정과 두려움으로 모였다. 함께 모인 공회원들은 그 불안한 마음을 가지고 서로 수군거리며 대화를 했을 것이다.
6절은 지도자들이 어떤 사람들이었는지 소개한다. "대제사장 안나스와 그의 사위 가야바가 제일 먼저 나온다. 안나스가 본래 대제사장이었는데 로마정부에 의해 면직을 당했고 자기 사위 가야바를 대제사장으로 세워 뒤에서 영향력을 행사했었다. 로마정부에서는 면직시켰지만 본래 대제사장은 종신직이고 로마의 압력으로 그렇게 된 것을 알기에 백성들은 그를 여전히 대제사장으로 인정했던 것이다. 그래서 복음서에서는 대제사장들이라고 한 것이다. 요한과 알렉산더는 누구인지 알수 없다. 그러나 안나스와 가야바가 순서대로 기록된 것으로 보아 이들은 대제사장 가문에 속한 사람들로 그 다음 서열의 사람들일 것이다. 이들은 반원형으로 회의장에 앉아서 얼마 전 예수를 재판하던 때를 생각했을 것이다.
7절은 그들은 사도들을 가운데에 세워놓고서 물었다고 했다. 산헤드린 공회가 반원형으로 둘러 앉은 그 가운데에 세웠다는 뜻이다. 이런 경우 유다의 최고 지도자들이 다 모인 자리였기에 그 앞에 불려나온 것은 그 자체가 큰 두려움이다. 더구나 앞에서 언급한 대제사장 가문의 사람들은 그 이름 자체가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공회에 선 사람이 두려워해야 하고 앉아서 재판하는 공회원들은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이 경우에는 거꾸로 사도들은 두려움이 없고 오히려 재판하는 공회원들이 큰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던 공회원들은 두 사도에게 물었다. 물었다는 말은 어떤 사실을 알아내기 위해 묻거나 아니면 범죄사실을 조사하기 위해서 묻는다는 뜻이다. 이들이 알고 싶어하는 것은 두가지이다.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냐 누구의 이름으로 하느냐는 것이다. 언뜻 읽으면 나면서부터 앉은뱅이였던 사람을 일으킨 기적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처럼 볼 수 있다. 그러나 2절에서 이미 사도들이 가르치고 선포하는 것 때문에 죽도록 고통을 느꼈다고 했다. 또 4절에서는 사도들의 말을 듣고 5000명이나 믿었다고 했다. 따라서 이들의 질문의 초점은 기적에 있지 않고 그들의 가르침에 있다.
기적과 가르침은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기적은 가르치기 위해 행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회원들은 베드로와 요한이 기적을 행한 뒤에 가르친 것이 누구의 권세로 된 것이고 또 누구의 이름으로 된 것인지 인지 물은 것이다. 공회원들이 문제 삼은 것은 기적 자체가 아니다. 그 기적이 자기들이 죽인 예수 이름으로 된 것이라고 가르치기 때문이었다.
누가복음 20:1-4절에서도 예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시며 복음을 전할 때에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은 함께 와서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말하라고 했다. 이는 누가복음 19: 45-46절에서 성전을 청결하게 하시며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었다고 하셨기 때문이다. 저들은 예수가 자신들의 존재 기반인 성전을 파괴하려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저들은 예수께서 성전에서 기쁜 소식을 전하실 때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고 또 누구한테 가르치는 권한을 받았는지 예수께 물은 것이다.
그런 예수를 잡아 죽였는데 다시 그 제자들이 나타나서 능력을 행하며 다시 그 이름으로 복음을 선포하고 있었기에 이들은 소름 끼칠만큼 두려움에 사로잡혀서 같은 질문을 한 것이다. 본래 유대인들의 최고 통치기관인 산헤드린 공회 앞에서 심문을 받는다면 심문을 받는 사람이 엄청난 공포를 느낄 수 밖에 없다. 그러나 4:2절을 보면 공포를 느끼며 몸살이 날만큼 격분한 것은 사도들이 아니라 사두개파인 대제사장 가문 사람들이다. 다른 공회원들 역시 예수님께 질문하던 때와 똑 같은 상황이기에 엄청난 공포에 사로잡혔을 것이다. 다음에 이어지는 내용을 보면 두려워해야 할 사도들은 오히려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그리스도를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