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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 일족]] -下-
토벌 날짜는 4월 21일로 정해졌다.
그 전날 밤, 야마자키 저택 주변에는 경비병이 배치되었다. 밤이 깊은 시각에 저택 안에서 무사 한사람이 복면을 하고 담을 넘어 밖으로 나왔지만 순찰 담당 사부리 가자에몬의 병졸인 마루야마 산노조가 체포했다.
그 후 날이 밝을 때까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저택 인근에는 재차 지령이 내려졌다. 설령 숙직병이라 할지라도 숙소에서 불조심에 각별히 주의하라는 것이 첫번째 지령이었다.
또한 토벌대가 아닌 사람이 아베 저택에 들어가서 개입을 하면 엄벌에 처할 것이지만 도망자에 한해서는 누구든지 체포해도 좋다는 것이 두번째 지령이었다.
아베 일족은 토벌대가 공격할 날을 그 전날에 전해 듣고, 우선 저택 내부를 구석구석 청소하고 보기 흉한 물건은 모두 태웠다.
그리고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 모여 술자리를 벌였다.
주연(酒宴)이 끝나자 노인들과 여자들은 모두 자살했고 어린아이들도 제각각 칼로 찔러 목숨을 거두었다.
이들의 시신은 정원에 큰 구덩이를 파고 묻었다.
이제 살아남은 사람은 새파란 젊은이들뿐이었다.
야고베에, 이치다유, 고다유, 시치노조 네 사람이 주도하여 미닫이를 걷어낸 방에 부하들을 모았다.
그리고 꽹과리와 북을 치게 하고 큰 소리로 염불을 외우게 하면서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
죽은 노인이나 처자들의 명복을 빌기 위해 염불을 외우는 것이라고 했지만 사실은 부하들이 겁을 먹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아베 일족이 농성을 한 야마자키의 저택에는 훗날 사이토 간스케가 살았다.
그 맞은편에는 야마나카 마타자에몬, 좌우 양쪽 인근에는 쓰카모토 마타시치로와 히라야마 사부로의 저택이 있었다.
그중 쓰카모토 가문은 원래 아마쿠사군 지역을 3분해서 다스리던 쓰카모토, 아마쿠사, 시키 세 가문 중 하나이다.
고니시 유키나가 <註: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부하로 가토 기요마사 등과 같이 조선 정벌에 나선 무장. 후에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일본 통일을 놓고 세키가하라 싸움에서 패해 처형당했다>가 히고 지방의 절반을 통치할 때 아마쿠사 가문과 시키 가문은 죄를 지어 토벌되고, 쓰카모토 가문만이 살아남아 호소카와 가문에 충성을 바쳤다.
마타시치로는 평소 야이치에몬 일가와 스스럼없는 사이였다. 당사자들은 물론이고 부인들도 서로 왕래했다.
야이치에몬의 차남인 야고베에는 창을 잘 다루었는데 마타시치로 역시 창 쓰는 것을 좋아했다. 그래서 두 사람의 힘이 농담을 주고받곤 했다.
"네가 아무리 창을 잘써도 내게는 못 당할걸“
"아니 내가 왜 그대에게 진단 말인가?”
이런 식이었다.
그래서 선대 주군이 병환 중일 때 야이치에몬이 순사를 허락받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마타시치로는 야이치에몬의 마음을 이해하며 안타까워 했다.
그리고 야이치에몬의 할복, 상속인 곤베에가 고요원에서 한 행동, 이로 인한 사형, 야고베에를 비롯한 아베 일족의 농성이라는 순서로 아베 일족이 점점 불운으로 치닫는 것을 보고 마타시치로는 육친의 일인 양 마음 아파했다.
어느 날 마타시치로는 밤늦은 시각에 아베의 저택으로 아내를 위문 보냈다.
아베 일족은 지금 주군의 뜻에 반하여 농성을 벌이고 있기 때문에 남자들 사이의 왕래는 불가능했다.
그러나 처음부터 사태의 진행을 생각해보면 아베 일족을 악인으로 몰아붙여 미워할 수는 없었다.
하물며 지금까지 친하게 지낸 사이였다. 아녀자가 은밀히 방문한다면 설령 뒷날 알려진다 해도 해명하지 못할 것도 없었다.
아내는 남편의 말을 듣고 기뻐하면서 정성이 담긴 물건들을 챙겨서 밤늦게 아베 저택을 찾아갔다.
부인도 지혜로운 여인이었다. 만일 훗날 이런 일이 발각된다 해도 죄는 자신이 뒤집어쓰고 남편에게는 누가 되지 않도록 할 심산이었다.
아베 일족의 기쁨은 형언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세상은 꽃이 피고 새가 지저귀는 봄날인데 불행하게도 그들은 하느님과 부처님, 그리고 같은 사람들에게도 버림받아 이렇게 농성을 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자신들을 위로하라고 아내를 보낸 남편도 남편이지만, 그런 남편의 말에 따라 위문하러 온 부인도 부인이었다.
그 마음 씀씀이에 아베 일족은 진심으로 감격했다.
아베 일족의 여인들은 눈물을 흘리면서, 이런 상황에서 죽기 때문에 이 세상에 누구 하나 명복을 빌어줄 사람이 없으니 부디 생각이 나면 자신들의 극락왕생을 빌어달라고 부탁했다.
아이들은 문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갈 수 없었기 때문에 쓰카모토의 부인을 보자 양옆에서 붙들고 놓아주지 않아 쉽게 집에 돌아올 수가 없었다.
아베 저택에 토벌대가 진입하기 바로 전날 밤이었다.
쓰카모토 마타시치로는 곰곰이 생각했다. 아베 일가는 자신과 친한 사이이다.
그래서 훗날 문책을 받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도 아내를 위로차 보내기까지 했다.
그러나 마침내 내일 아침 주군의 토벌대가 아베 저택으로 쳐들어간다.
토벌대는 역적을 정벌하는 군대와도 같다.
불조심을 하라는 지령과 토벌대 이외에는 쓸데없이 관여하지 말라는 지시가 있었지만 이런 때에 무사라는 자가 주머니에 손을 넣고 지켜만 볼 수는 없다.
정(情)은 정이고, 의(義)는 의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세상에 나타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깊은 밤에 발소리를 죽이고 뒷문을 통해 어두운 정원으로 나갔다.
그리고 아베 저택과 이쪽을 경계 짓는 대나무 울타리로 가서 울타리를 엮은 끈들을 모두 잘라놓았다.
그런 다음 다시 들어와 몸을 정비하고 선반에 걸려 있던 작은 창을 내려서 매 날개 문장이 그려진 두겁을 벗겨놓고 날이 새기만을 기다렸다.
토벌대에서 아베 저택의 정문을 책임진 다케노우치 가즈마는 무도(武道)로 알려진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의 조상은 호소카와 다카쿠니의 부하 장수로 활쏘기로 이름을 날린 시마무라 단조 타카노리였고 교로루(亭祿) 4년(1531) 셋쓰 지방의 아마가사키에서 다카쿠니가 패했을 때 단조는 적 두 사람을 양쪽 겨드랑이에 끼고 바다에 뛰어들어 죽었다.
단조의 아들 이치베에는 가와우치의 야스미 가문을 위해 일하며 한때 야스미로 불린 적이 있었지만 다케노우치코에 지역을 영지로 차지하고부터는 다케노우치라고 개명했다.
다케노우치 이치베베의 아들인 기치베에는 고니시 유키나가를 위해 일했으며 고니시가 가이 지방의 오타 성을 수공(水攻)으로 공격할 때 공을 세워 도요토미 태합(太閣)<註: 당시 최고 국가기관이었던 태정관(政)의 우두머리인 태정대신을 높여 부르는 말> 으로부터 흰 비단에 붉은 해가 그려진, 갑옷 위에 입는 조끼를 선물로 받았다.
조선 정벌 때에는 고니시 가문의 인질로 조선 왕궁에 3년 동안 유폐당하기도 했다.
고니시 가문이 몰락하고 나서 가토 기요마사로부터 1000석의 녹봉을 받았으나 주군과 싸우고 대낮에 구마로토성에서 물러났다.
가토 가문의 토벌대를 막기 위해 철포에 실탄을 장전하고 점화선에 불을 붙이면서 물러났다.
이런 기치베에를 산사이가 부젠 영지에서 1000석의 녹봉을 주고 불러들였다.
기치베에에게는 다섯 명의 아들이 있었다. 장남은 아버지와 같이 기치베에라고 불리다가 출가한 후 야스미 겐잔이라고 했다. 차남은 시치로에몬, 삼남은 지로다유, 사남은 하치베에 그리고 오남이 바로 가즈마였다.
가즈마는 다다토시의 시동으로 있으면서 시마바라 정벌 때 주군 옆을 지켰다.
간에이 15년(1638) 2월 25일 호소카와군이 성을 공격할 때 가즈마는 주군에게
"부디 저를 선봉에 세워주십시오"
하고 요청했다.
다다토시는 가즈마의 요청을 들어주지 않았다.
가즈마가 재차 보채듯 말하자 다다토시는 화를 내며
"어린놈, 마음대로 해라"
하고 소리쳤다. 가즈마는 당시 16세였다.
가즈마가
"옛!"
하고 뛰어나가는 것을 보고 다다토시는
"다치면 안 된다!"
라고 소리를 높였다.
가즈마에 이어 시마 도쿠에몬 등 병졸 세 명이 따라 나갔다.
주인과 부하가 모두 네 사람이었다. 성에서 쏘아대는 포탄이 너무 격렬해서 시마는 가즈마가 입은 진홍색 옷자락을 잡아 뒤로 당겼다.
가즈마는 뿌리치며 성벽을 타고 올랐다. 시마도 지지 않고 따라 올랐다.
마침내 성 안으로 잠입하여 적과 싸우던 중 가즈마가 부상을 입었다.
같은 장소에서 공격하던 야나가와 히다의 수령인 다치바나 무네시게<註: 처음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 아래에서 일하며 녹봉 13만 석의 영주가 되었다가 후에 도쿠가와 이에야스 밑으로 들어가 간에이 8년(1631) 히다의 수령에 임명되어 시마바라 반란 진압에 참여했다>는 72세의 노련한 무사로, 이때의 활약을 보고는 와타나베 신야와 나카미츠 나이젠 그리고 가즈마가 가장 훌륭했다고 세 사람에게 공을 인정하는 증서를 주었다.
성이 함락된 후 다다토시는 가즈마에게 세키 가네미쓰 도공의 칼을 선물로 내리고 <註: 옛 일본도에는 칼을 만든 도공의 이름을 새겨놓아 그 가치를 인정했다> 녹봉을 1150석으로 올려주었다.
이때 다다토시가 가즈마에게 준 호신용 짧은 칼은 약 한자 여덟치 길이에, 칼날의 무늬가 직선이며 제작자의 이름이 없었다.
칼날과 손잡이가 수평이며 손잡이에는 은으로 본을 떠 호소카와 가문의 문장 세개를 장식했고,
칼의 외장은 황금으로 장식하고 붉은 동으로 테두리를 둘렀다. 칼과 손잡이의 이음새는 두 개인데 그중 하나는 납으로 메워져 있다.
다다토시는 이 칼을 비장품으로 아끼고 있었는데 가즈마 에게 주고 나서부터는 가즈마가 성에 오면
"가즈마, 그 칼 좀 빌려주게“
라면서 빌려 차는 일이 종종 있었다.
미쓰히사에게 아베 일족을 토벌하라는 명령을 받은 가즈마가 마음으로 주군의 집무실에서 물러나오는데 동료 한 사람이 가즈마에게 속삭였다.
"간교한 사람도 쓸모가 있군. 자네에게 정문 공격을 지휘하게 하다니, 하야시 님으로서는 큰일을 한 셈이군."
그 말에 가즈마는 귀를 세웠다.
"뭐야. 이번 임무는 게키가 주선해서 내려진 것이란 말인가?"
"그렇다네. 게키 님이 주군께 말씀드렸다네. 가즈마는 선대 때 파격적으로 대우를 한 사람이니 이번에 은혜를 갚게 하라고 주청했다네. 뜻밖의 행운이 아닌가?"
"흠!“
대답하는 가즈마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새겨졌다.
"좋아 죽을 때까지 싸우는거지!"
이 말을 뱉으며 가즈마는 불쑥 일어나 자리를 떴다.
이때의 가즈마의 행동을 미쓰히사가 전해 듣고, 다케노우치 저택에 전령을 보내 “부상당하지 말고 무리없이 처리하고 돌아오라"는 말을 전했다.
가즈마는
"고마우신 말씀을 가슴에 새겼다고 말씀 드려주시게”
하고 말했다.
가즈마는 동료의 입에서 게키가 자신을 추천해 이번 임무를 맡게 되었다는 말을 듣자마자 이번 토벌에 나가서 죽겠다는 결심을 했다. 절대 바꿀 수 없는 굳은 결심이었다.
게키는 주군의 은혜에 보답해야 한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우연히 뜻밖에 듣게 된 말이지만 실은 들을 것까지도 없었다. 게키가 추천했다면 그렇게 말하며 추천했음이 틀림없었다.
이에 생각이 미치자 가즈마는 서 있어도, 앉아 있어도 마음이 불편했다.
자신이 선대 주군에게 중용되었던 건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성인이 되고부터 자신은, 말하자면 주군을 곁에서 모시는 많은 시종 중 한 사람이었을 뿐 특별 대우를 받지는 않았다. 그 정도의 은혜는 누구나 다 받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자신에 한해서만 주군의 은혜를 갚아야 한다는 말은 무슨 의미인가?
말할 필요조차 없이, 순사를 해야 할 사람인데 순사하지 않았으니 죽을 수 있는 장소를 주겠다는 것이다.
목숨이라면 어느 때라도 기꺼이 버릴 수 있지만 전에 순사하지 못했으니 대신 지금 죽어야 한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지금도 목숨이 아깝지 않은 자신이 왜 선대 주군의 중음 마지막 날에 목숨이 아까웠겠는가! 당연하지 않은가?
주군에게 얼마만큼의 은혜를 입은 사람이 순사하는지 확실한 기준은 없다.
같이 주군 곁에서 봉사해 온 젊은 무사들 중에 순사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자신도 그냥 살아 있었다.
그때 순사를 해야 했다면, 자신은 누구보다 먼저 순사를 했을 것이다.
그 정도는 누가 보아도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당연히 순사해야 하는데 순사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낙인이 찍혀 있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분했다. 씻을 수 없는 치욕을 받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사람에게 치욕을 주다니 게키란 자가 아니면 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주군은 왜 그런 자의 말을 받아들이셨는가? 게키에게 수모를 받는 것은 참을 수 있다. 그러나 주군에게 버림받은 것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다.
시마바라에서 적군의 성으로 뛰어들려고 할 때 선대 주군이 만류한 적이 있다.
그때는 기마장수를 호위해야 하는 자들이 공을 다투어 함부로 선봉에 나서려는 것을 막으려는 처사, 그러나 이번에 새 주군이 부상을 당하지 말라고 만류하시는 말씀은 그때와는 다르다. 아까운 목숨을 잘 지키라는 말씀이다.
그 말에 어떻게 고마움을 표할 수 있겠는가? 옛날의 묵은 상처 위에 다시 채찍을 가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한시라도 빨리 죽고 싶다. 죽어서 씻을 수 있는 치욕은 아니겠지만, 죽고 싶다. 개죽음이라도 좋으니까 죽고 싶다.
이런 생각을 하자 화살도 방패도 의미가 없었다.
아내와 자식들에게는 아베 일족의 토벌에 나서게 되었다고 간략하게 말해두고 오로지 혼자서 죽음을 맞을 준비를 했다.
순사자들은 모두 평온한 마음으로 죽음을 맞이했지만 가즈마는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죽음을 서둘렀다.
집사인 시마 도쿠에몬 정도가 주인의 마음을 알아채고 주인과 같은 결심을 했을 뿐 집안 가솔 중에 가즈마의 속마음을 헤아린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올해 21세(20세)인 <註: 작가는 역사적 자료로 사용했던 ‘아베 차사담’을 근거로 가즈마의 나이를 21세로 표기하면서 시마바라 반란 토벌에 참가했을 때 가즈마의 나이를 계산해서라고 부기했다> 가즈마의 집에는 작년에 막 시집 와서 아직 처녀티를 벗지 못한 가즈마의 부인이 올해 태어난 딸아이를 안고 어정버정하고 있을 뿐이었다.
아베 일족 토벌을 하루 앞둔 4월 20일 밤, 가즈마는 목욕재계한 뒤 상투 앞부분을 면도하고, 머리 위로 다다토시에게 받았던 향을 분향했다.
그리고 흰옷을 입고 양 어깨에 흰 띠를 조여 맸다. 머리에는 흰 띠를 두르고 어꺠에는 아군을 식별하는 종이를 붙였다.
허리에 찬 칼은 두자 네치 오부 길이인 마사모리 도공의 칼로, 선조인 시마무라 단조가 아마가사키에서 죽을 때 고향으로 보낸 유품이었다.
거기에다 첫 출전 때 다다토시에게 하사받은 가네미쓰 도공의 짧은 칼을 찼다.
대문 앞에서 말이 힘차게 소리를 냈다.
창을 들고 집 마당으로 내려선 가즈마는 짚신 끈을 몇 번이나 둘러 감아 풀기 어렵게 하고 남은 끈을 단도로 잘라버렸다.
아베 저택의 뒷문을 공격하기로 한 다카미 곤에몬은 원래 와다 가문 사람으로, 오우미의 와다 지역에 살던 와다 다지마 수령의 후예다.
처음에는 가모 가타히데에게 봉사하다가, 와다 쇼고로 대에 이르러 호소카와 가문을 섬겼다.
쇼고로는 기후에서 벌어진 세키가하라에서 공을 세운 사람으로, 원래 다다토시의 형인 요이치로 다다타카 아래 소속된 무사였다.
게이초(慶長) 5년(1600), 오사카에서 처가인 마에다 가문이 일찍이 항복하고 멀리 달아난 것 때문에 다다타카는 아버지의 꾸중을 듣고 수행자 신분으로 유랑했는데, 그때 쇼고로는 다다타카와 고야산과 교토까지 동행했다.
이런 그를 산사이가 고쿠라로 불러들였다.
산사이는 쇼고로에게 다카미라는 성(姓)을 내리고 잡무와 경비를 담당하는 책임자로 삼았다. 그의 녹봉은 500석이었다.
이 쇼고로의 아들이 곤에몬이다.
그는 시마바라 전투에서 공을 세우기는 했지만 군령을 어긴 이유로 직위에서 물러나 있었다.
그렇게 잠시 시간을 보낸 뒤 복귀해서 주군을 측근에서 모시는 책임자가 되었다.
곤에몬은 아베 가문 토벌에 나설 때, 검은 깃털이 두 개 달린예복을 입고, 애지중지하던 비젠오사후네 도공의 칼을 꺼내 허리에 찼다. 그리고 열십자 날로 된 창을 들고 나갔다.
다케노우치 가즈마 곁에 시마 도쿠에몬이 있는 것처럼, 다카미 곤에몬의 곁에는 항상 하인 하나가 따랐다.
아베 일족 사건이 일어나기 2.3년 전 어느 여름날, 그날 쉬는 날이었던 시동 하나가 방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
그때 임무를 마치고 돌아온 동료 시동이 옷을 벗고 물통을 가지고 우물가로 물 길으러 가다가 낮잠 자고 있는 시동을 보았다. 그는
"내가 일하고 돌아왔는데 물도 떠다 주지 않고 낮잠이나 자고 있단 말이냐?"
라고 말하면서 시동의 베개를 차버렸다. 시동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렇지. 내가 깨어 있었다면 물이야 떠다 주었겠지. 그렇다고 자고있는 사람의 베개를 차버릴 것까지야 없잖은가? 이대로 참고 있을 수는 없다."
그러고는 칼을 빼어 한쪽 어깨에서부터 다른 쪽 겨드랑까지 동료를 비스듬히 베어버렸다.
그는 조용히 동료의 가슴 위에 올라가서 마지막 숨을 끊어 고통들 없애주고 상관이 있는 방으로 달려가 전후 사정을 자세히 이야기 했다.
그리고 "저도 그 자리에서 죽으려고 했습니다만, 다른 의심을 받을지 몰라서 이렇게 찾아왔습니다"라고 말하며 옷을 벗고 할복하려고 했다.
"잠시 기다려라!"
그의 상관은 시동을 제지하고 곤에몬에게 사태의 전말을 보고했다.
곤에몬은 당시 공무를 마치고 돌아와 아직 옷을 갈아입지 않은 상태였다.
곤에몬은 그대로 다다토시의 처소로 가서 보고했다.
다다토시는
"있을 수도 있는 일이지. 할복할 것까지는 없다"
고 말했다.
이때부터 이 시동은 목숨을 바쳐 곤에몬을 따랐다. 시동은 화살통을 메고 활을 든 채 주인의 곁에 대기했다.
간에이 19년(1642) 4월 21일은 보리를 수확하기 좋은 계절에 흔히 볼 수 있는, 옅은 구름이 낀 초여름 날씨였다.
다케노우치 가즈마 일행은 아베 일족이 농성하고 있는 야마자키 저택으로 쳐들어가기 위해 새벽 무렵 정문 앞쪽으로 왔다.
밤새도록 꽹과리와 북을 울리고 있던 집안이 지금은 적막에 싸여 마치 빈집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대나무 울타리 위로 두세 척 정도 자란 협죽도 끝에서 밤이슬이 맺힌 거미줄이 마치 진주처럼 빛났다. 제비 한 마리가 어디선가 날아와 조용히 집 안으로 날아들어 갔다.
가즈마는 말에서 내려 한동안 상황을 살피다가
"문을 열어라!"
하고 소리쳤다.
병졸 두 사람이 담을 넘어 집 안으로 들어갔다.
문 주변에는 지키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자물쇠를 부수고 빗장을 빼내어 문을 열었다.
옆집에 있던 쓰카모토 마타시치로는 가즈마의 병사들이 아베 저택의 문을 여는 소리를 듣자 지난밤 미리 줄을 끊어놓았던 대나무 울타리를 발로 부수고 저택으로 뛰어들었다.
매일같이 드나들던 터라 구석구석까지 아는 집이었다.
창을 겨누면서 부엌문을 통해 재빠르게 들어갔다.
아베 일족은 객실 문을 모두 걸어 잠그고 토벌대가 들어오면 한 사람씩 처치하려고 준비하고 있었다.
뒷문에서 인기척이 있는 것을 제일 먼저 알아챈 사람은 야고베에였다.
야고베에 역시 창을 겨누면서 부엌 쪽을 살피러 나갔다.
두 사람은 창끝과 창끝이 서로 맞닿을 정도로 가까이 마주 보았다.
“여! 마타시치로가 아닌가?"
야고베에가 말을 건넸다.
"그래, 이전부터 호언장담했었지? 네 창 솜씨를 보러 왔다"
"잘 오셨다. 자아!"
두 사람은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고 창을 겨누었다.
창술은 마타시치로가 뛰어났기 때문에 한참 동안 서로 대적하다가 마타시치로의 창이 야고베에의 가슴을 세게 찔렀다.
야고베에는 창을 버리고 객실쪽으로 도망치려 했다.
"비겁하다. 물러서지 마라."
마타시치로가 외쳤다.
"아니다. 도망치지 않는다. 할복하려는 것이다."
야고베에는 이 말을 남기고 객실로 사라졌다.
그 순간
"아저씨! 제가 상대하지요!"
라고 외치며 아직 소년인 시치노조가 번개처럼 뛰쳐나와 마타시치로의 넓적다리를 찔렀다.
막역한 사이였던 야고베에에게 깊은 상처를 안기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긴장이 풀려 있었기 때문에, 노련한 마타시치로이지만 소년의 공격에 걸려들고 말았다.
마타시치로는 창을 놓치고 그 자리에 넘어졌다.
가즈마는 아베 저택에 들어온 후 병사들을 구석구석까지 배치했다. 그런 다음 현관으로 나아가니 나무로 된 문이 살짝 열려 있었다.
가즈마가 그 문으로 손을 내밀려고 하자 시마 도쿠에몬이 밀치면서 급하게 속삭였다.
"잠시 기다리시지요. 주군은 오늘 토벌대의 총대장입니다. 제가 먼저 살펴보지요"
도쿠에몬은 문을 열고 뛰어들었다.
매복하고 있던 이치다유의 창에 오른쪽 눈이 찔렸다.
도쿠에몬은 비틀거리며 가즈마 쪽으로 쓰러졌다.
"비켜라!"
가즈마는 도쿠에몬을 옆으로 밀치며 앞으로 나섰다.
이치다유, 고다유의 창이 좌우에서 가즈마의 옆구리를 찔렀다.
소에지마 구헤에, 노무라 쇼베에가 뛰어들었다.
도쿠에몬 역시 상처에도 굴하지 않고 반격에 나섰다.
같은 시각 뒷문을 부수고 들어간 다카미 곤에몬이 십자창을 휘두르며 아베의 병졸들을 몰아붙이고 마당으로 들어갔다.
치바 사쿠베에도 다카미의 뒤를 따라 들어갔다.
앞뒤 양쪽에서 고함을 지르면서 쳐들어갔다.
장지문을 모두 걷어내도 다다미 30장이 채 안 되는 공간이다.
시가전의 처참함이 야전(野戰)보다 훨씬 심하다. 접시에 수북이 담긴 벌레들이 서로 먹고 먹히는 광경과 비슷할까! 눈으로 차마 볼 수 없을 정도의 아비규환이었다.
이치다유와 고다유는 상대를 구별하지 않고 창을 휘둘렀다.
어느덧 두 사람의 몸은 셀 수 없을 정도로 상처를 입었다.
그럼에도 두 사람은 조금도 굴하지 않고, 이번에는 창을 버리고 칼을 들고 싸웠다.
시치노조는 이미 쓰러졌다.
넓적다리에 부상을 입은 쓰카모토 마타시치로가 부엌에 쓰러져 있는 것을 본 다카미의 부하가
"부상을 당했군요. 잘 싸우셨습니다. 빨리 물러나세요"
라고 하면서 집 안으로 들어갔다.
"끌고 갈 다리가 있다면 나도 안으로 들어가겠다만!"
마타시치로는 괴로운듯 말하면서 이를 악물었다.
이때 주인의 행적을 찾아 쫓아온 부하 하나가 뛰어가서 어깨를 부축해 데리고 나갔다.
한편 쓰카모토 가문의 부하인 아마쿠사 헤이후로는 주인의 퇴로를 지키면서 보이는 적들을 향해 활을 쏘다가 그 자리에서 적의 공격을 받고 죽었다.
다케노우치 가즈마의 부하 중 시마 도쿠에몬이 먼저 죽었고 이어서 분대장 소에지마 구헤에가 죽었다.
다카미 곤에몬이 십자창을 휘둘러 싸우는 동안, 활을 든 시동 하나가 곁을 떠나지 않고 적을 향해 활을 쏘았다.
나중에는 칼을 뽑아들고 싸웠는데 문득 총으로 곤에몬을 노리는 자의 모습이 보였다.
"저 총알은 제가 받겠습니다."
시동은 곤에몬의 앞을 막아서며 말했다.
그 순간 탄알이 날아와서 시동이 맞고 즉사했다.
다케노우치 군영 쪽에서 다카미 군영 쪽으로 옮겨 간 치바 사쿠베에는 증상을 입고 부엌으로 왔다.
그는 수통의 물을 마시다가 기진하여 그대로 주저 앉았다.
아베 일족은 먼저 야고베에가 할복하고 이치다유, 고다유 그리고 시치노조는 모두 깊은 상처로 숨이 끊어졌다.
부하들 대부분도 전사했다.
다카미 곤에몬은 앞과 뒤에 있던 병력을 전부 집결시킨 후 아래 저택의 안쪽 창고를 무너뜨리고 불을 질렀다.
바람이 없는 날이라 엷은 구름이 있는 하늘로 똑바로 올라가는 연기가 멀리서도 보였다. 잠시후 불을 끈 뒤 물을 뿌리고 철수했다.
부엌에 있던 치바 사쿠베에 그리고 그 외에 중상을 입은 사람들은 부하나 동료들의 부축을 받아 철수했다.
시각은 정확히 미시(未時)였다.
미쓰히사는 때때로 부하들 중 눈에 들어오는 사람의 집에 놀러가곤 했다.
아베 일족을 토벌하는 날인 21일에는 마쓰노 사쿄의 저택에 새벽부터 가 있었다.
아베 일족이 농성하는 야마자키 저택은 미쓰히사의 거처인 하나바다케의 바로 건너편이었다.
미쓰히사가 집을 나옴 때 아베 저택 방향에서 사람들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진입했군!"
미쓰히사는 가마에 오르며 말했다.
미쓰히사를 태운 가마가 동네 하나를 지날 때 급보가 들어왔다.
미쓰히사는 다케노우치 가즈마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다카미 곤에몬은 토벌대 전 병력을 이끌고 미쓰히사가 있는 마쓰노 저택으로 철수했다.
그리고 아베 일좋을 한 사람도 남기지 않고 토벌 했다는 사실을 보고하려고 알현을 청했다.
미쓰히사는 즉시 만나겠다고 대답하고 곤에몬을 객실 마당 쪽으로 불렀다.
마침 댕강나무 꽃이 새하얗게 핀 울타리 사이로 작은 사립문이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간 곤에몬이 잔디 위에 예의를 갖춰 앉았다.
미쓰히사가 곤에몬을 보더니
"부상을 당했군. 수고했다. 전과를 올렸다"
하고 말했다.
두 개의 검은 깃털이 달리고 문장이 새겨진 곤에몬의 옷은 피투성이었다. 철수하면서 창고에 불을 지르고 발로 밟아 끄느라 날린 재와 먼지도 얼룩처럼 덮여 있었다.
"아닙니다. 대단치 않은 상처입니다."
곤에몬은 누군가에게 명치 끝을 심하게 찔렸는데 품속에 있던 거울 덕분에 창날이 비껴갔다. 상처는 화장지에 살짝 피가 스밀 정도였다.
곤에몬은 아베 저택으로 쳐들어간 당시의 정황을 자세히 보고했다.
그리고 이번 토벌의 일등 공을, 혼자 야고베에와 싸워 큰 부상을 입힌 아베 저택 옆집에 사는 쓰카모토 마타시치로에게 양보했다.
"가즈마는 어땠는가?
"한발 먼저 정문에서 진입했기 때문에 보지 못했습니다."
"그랬나? 모두 마당으로 들어오라고 일러라."
곤에몬이 모든 병사들을 불러들였다.
중상으로 들려 간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모두 잔디 위에 부복했다.
전투에 참가한 사람은 모두 피투성이였다. 창고를 불태울 때만 나선 사람은 재를 뒤집어썼다.
그렇게 재만 뒤집어쓴 사람 중에 하타 주다유가 있었다.
미쓰히사가 그에게 물었다.
"주다유. 그대의 싸움은 어땠는가?"
"옛"
주다유는 대답한 채 잠자코 엎드려 있었다.
주다유는 몸집은 좋지만 겁쟁이여서 전투 때 아베 저택 밖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는 토벌대가 전투를 끝내고 저택의 창고를 불태울 때에야 겨우 주뼛주뼛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토벌대에 참가하라는 명령이 처음 주다유에게 내려졌을 때, 집무실에서 나오는 그를 본 검술사 신멘 무사시 <註: 어려서부터 여러 곳을 여행하며 검술을 익힌 결과 쌍검을 사용하는 검도인 니토류(二刀流)를 개발한 전설적인 검객. 후에 어머니의 성을 따라 미야모토 무사시라 칭했다. 호소카와 타다토시가 받아들여 500석의 녹봉을 주었다>가
“참으로 잘된 일이다. 열심히 해서 공을 세워라!"
하고 말하면서 주다유의 등을 두드려주었다.
주다유는 안색이 창백해지고 헐거워진 하의 끈을 잡아매려고 했으나 손이 떨려 고쳐 매지 못했다고 한다.
미쓰히사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모두 최선을 다했다. 돌아가 휴식을 취하도록 해라"
다케노우치 가즈마의 어린 딸에게는 양자를 맞아들여 집안을 상속 하도록 허락했다.
그러나 이 가문은 나중에 후사(後嗣)가 끊겼다.
다카미 곤에몬에게는 300석, 치바 사쿠베에와 노무라 쇼베에에게는 각 50석의 녹봉이 더해졌다.
쓰카모토 마타시치로에게는 가신을 총괄하는 직책을 맡기고 분대장인 다니 구라노스케를 보내 칭찬의 말을 전달했다.
친척이나 친구들이 찾아와 축하의 말을 건네면 마타시치로는 웃으면서
"겐키(元龜)나 덴쇼(大正) 때<註: 겐키(1570~1573), 덴쇼(1573~1591). 이 시대는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 등이 일본 통일을 위해 활약한 일본의 전국시대에 해당한다>에는 성을 공격하는 일이 아침저녁 밥을 먹는 일같이 다반사였지! 아베 일족 토벌 같은 건 그저 아침 먹기 전에 간식을 먹거나 차를 마시는 정도였어"
라고 말했다.
그 후 2년이 흐른 쇼호(正保) 원년(1644) 여름, 마타시치로는 상처가 완치되어 미쓰히사를 알현했다.
미쓰히사는 철포 10정을 내리면서
"상처가 완치되도록 온천욕을 해라. 또 야외에 별장을 지을 땅을 주려고 하니 장소를 알아보아라"
하고 말했다.
마타시치로는 주군에게서 마시키 고이케 마을에 저택용 땅을 하사받았다.
뒤편은 대나무가 우거진 산이었다.
미쓰히사가 마타시치로에게
"대나무 산도 가지겠느냐?"
하고 물었지만 마타시치로는 사양했다.
대나무는 평소에도 쓸모가 많은 나무이다. 전쟁이라도 일어나면 대나무가 많이 필요하다. 그런 것을 받는 건 조심스럽다고 말했다.
그래서 대나무 산은 영구히 주군의 소유가 되었다.
하타케 주다유는 추방되었다.
다케노우치 가즈마의 형 하치베에는 토벌에 참가하고도 동생이 전사한 장소를 지키지 못했기 때문에 가문을 없앴다.
또한 기마무사의 호위병으로 주군을 옆에서 섬기던 어떤 사람은 아베 저택 가까이에 살았기 때문에 "집에서 각별히 불조심을 하라"는 분부를 받고 당번에서 제외되었는데, 아베 저택이 불타자 아버지와 같이 지붕에 올라가서 날아오는 불씨를 잡았다.
후에, 모처럼 당번을 면해주신데 대한 배려를 저버렸다는 생각에 면직을 요청했지만 미쓰히사는
"그건 겁쟁이라서가 아니다. 앞으로는 좀 더 조심하는 것이 좋겠다"
고 말하고 변함없이 근무하게 했다.
이 무사는 나중에 미쓰히사가 죽자 순사했다.
아베 일족의 시신은 우물가로 끌고 가서 차근차근 조사했다.
시라카와 강에서 한 사람씩 시신의 상처를 물로 씻어냈을 때, 다른 사람들이 입힌 상처보다 쓰카모토 마타시치로의 창이 입힌 야고베에의 가슴 상처가 훨씬 깊었기 때문에 마타시치로는 더욱 체면을 세울 수 있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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