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상 스님의 주련] 38. 서산 천장암 법당
태평가 부르는 콧구멍 없는 소
동학사 사미 아버지 ‘이 처사’가
사미 스승 학명 찾아 나눈 법담
얼굴 중앙에 난 콧구멍이 없다는
표현은 본분 깨닫지 못함을 의미
忽聞人語無鼻孔 頓覺三千是我家
홀문인어무비공 돈각삼천시아가
六月燕巖山下路 野人無事太平歌
육월연암산하로 야인무사태평가
(문득 콧구멍 없는 ‘소[牛]’라는 말을 듣고/ 몰록 깨닫고 보니 삼천대천세계가 나라는 것을 알았네./ 유월이라. 연암산(鷰巖山) 아랫길에서는/ 농부들은 한가롭게 태평가를 부르네.)
경허성우(鏡虛惺牛, 1846~1912) 선사의 오도가(悟道歌)는 제법 긴 시문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끝부분에 ‘송왈(頌曰)’이라고 하여 게송으로 덧붙인 것이 오도송(悟道頌)으로 널리 알려졌는데 이를 인용하여 주련으로 삼았다. 참고로 한암중원(漢巖重遠, 1876~1951) 선사가 필사한 ‘경허집(鏡虛集)’에는 이 기록이 없으며 수덕사(修德寺)에서 발행한 ‘경허집’에는 있다.
1879년 동학사에서 시중을 들던 사미승 동은(東隱)은 속성이 이씨(李氏)였다. 그의 아버지는 수선하여 깨달은 바가 있어서 사람들이 그를 이 처사(李 處士)라고 불렀다. 동은 사미의 스승 학명도일(學明道一) 스님이 이 처사의 집을 찾아가 법담을 나눴다.
이 처사가 스님에게 “승려는 마침내 소가 된다”고 말하자, 스님이 “사문이 되어 견성하지 못하고 시주물만 받아먹으면 반드시 소가 되어 시주자의 은혜를 갚게 된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처사가 힐난하며 말하기를 “사문이 되었음에도 어찌 그 대답이 도리에 맞지 아니한가”라고 하였다. 스님이 “나는 선지(禪旨)에 밝지 아니하니 한마디 일러 달라”고 말하자, 처사가 말하기를 “어찌 소가 되어도 콧구멍 뚫을 것이 없다고 말하지 않는가”라고 했다. 묵묵히 돌아온 스님이 사미에게 이 이야기를 하니 사미는 지금 주실(籌室) 선사께 이 도리를 물어보라고 했다.
스님은 경허(鏡虛) 선사를 찾아가 이 처사의 말을 전하는데 ‘소가 콧구멍이 없다’라는 말을 듣고 문득 선사는 공안의 오묘한 뜻이 곧바로 얼음 녹듯이 하고 기와가 깨지듯 화두를 타파하여 깨달음을 얻었다. 이때 선사의 나이가 31세였다.
이 게송의 주체는 무비공(無鼻孔)이다. 무비공이란 과연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콧구멍은 얼굴 중앙에 있기에 본분(本分)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그러므로 콧구멍이 없다는 표현은 본분을 깨닫지 못함을 말하는 것이다. ‘서장(書狀)’의 ‘답엄교수장자경(答嚴敎授狀子卿)’에 보면 “오늘날 도를 배우는 선비들은 다분히 한가하게 앉은 곳에 머물러 있나니, 요즘 총림에서는 본분의 일도 모르는[無鼻孔] 무리를 ‘묵조(黙照)’라고 부르는 수행이 바로 이것이다”라는 표현에 무비공이 나온다.
이외에도 ‘원오불과선사어록(圓悟佛果禪師語錄)’이나 ‘여정어록(如淨語錄)’, ‘선가귀감(禪家龜鑑)’ 등에도 나오는 표현이다. 그러므로 경허 스님은 ‘무비공’이라는 말을 듣고 몰록 깨달았다고 한다.
돈각(頓覺)은 단박에 진리를 깨달은 것을 말하기에 돈오(頓悟)와 같은 표현이다. 화엄종(華嚴宗)에서는 교판(敎判)을 오교십종(五敎十宗)으로 나눈다. 이 가운데 돈교(頓敎)가 돈각의 가르침에 해당한다. 오교는 다음과 같다. ①소승교(小乘敎): 부파불교 ②대승시교(大乘始敎): 삼론종(三論宗)의 공(空)사상과 법상종(法相宗)의 유식(唯識)사상 ③대승종교(大乘終敎):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능가경(楞伽經)의 교설 및 천태종(天台宗)의 사상 ④돈교(頓敎): 유마경(維摩經)의 교설 ⑤원교(圓敎) : 화엄경(華嚴經).
삼천(三千)은 온 세계를 말하는 삼천대천세계를 줄여서 표현하였다. 아가(我家)에서 가(家)는 접미사(接尾辭)로 쓰였기에 굳이 해석할 필요는 없다. 이 구절을 통하여 경허 스님은 심조만유(心造萬有)를 말하고 있음이다.
유월은 경허 스님이 돈각한 시기, 연암산(鷰巖山)은 그 장소를 말하기에 곧 충남 서산에 있는 천장암(天藏庵)이다. 산하로(山下路)는 천장암에서 바라본 먼 곳을 말하는 것으로 보이는 만물을 있는 그대로 읊어서 실상의 도리를 나타내고 있음이다.
야인(野人)은 농부를 말함이다. 농부가 밭을 갈고 김을 매듯 수행자도 마음 밭을 갈아야 한다. 김을 매는 것은 번뇌를 뽑아 버리는 것과 마찬가지이므로 태평가(太平歌)를 부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