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술떡, 사북 그리고 그녀에게
그리고 내 소설, ‘술떡’은 이문열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을 몹시 닮았다.
전혀 의식하고 쓴 글은 아닌데, 요즘 이문열이 방송에 나오는 것을 보고 문득 생각이 났다.
80년 사북사태 이후, 오랜만에 사북에 갔다.
나는 사북 사태에서 엉뚱한 짓을 하다가 軍에 끌려 갔다.
사북은 나에게 애증의 도시였다. 억울하게 군대에 끌려갔던 곳, 그리고 나의 소설 '술떡'.
10 년도 넘은 것 같다.
친구를 만나러 사북에 갔다가 그녀를 만났다.
“너 혹시 성열이 아니니?”
그녀는 아무리 봐도 모르는 사람이었다. 사북에는 친구이외에는 아는 사람이 없었다.
아! 그런데 문뜩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내 소설, ‘술떡’!
단서를 찾자면 거기서 부터였다.
20 년도 더 전에 썼던 소설이었다.
아버지가 산림청에 계셨을 때, 내가 열 살 정도의 나이에 사북에 전학을 갔었고, 그때 같은 반 광부 아이들에 대한 이야기 였다.
그런데, 내 소설 ‘술떡’에는 여자가 전혀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나를 알아보는 여자가 있다니,
“너, 어릴 때 얼굴이 조금 남아 있어”
그녀의 다음 말에, 화석 처럼 뭍혀 있던 것들이 순식간에 다가왔다.
그녀가 분명했다.
그녀가 아니라면, 사북에서 나를 알아 볼 여자는 없었다.
게다가, 나의 어릴 때 얼굴을 얘기한다면, 그녀가 틀림없다.
“누나”
“누나 맞지?”
“맞어, 미숙이야, 니 친구 현도 누나”
그제서야, 엉클어진 퍼즐들이 한꺼번에 풀린 기분이었다.
그때 학교 앞 냇물은 까만 색이었다.
아이들은 까만 물 속에서 수영을 하며 놀았다. 수영을 마치고도 수건으로 닦지도 않았다.
그래서 아이들의 옷 색깔은 전부 검은색이었다.
강물 색처럼, 그의 아버지 얼굴처럼.
산의 나무들처럼, 사북의 거리처럼.
우리 반에는 사북에서 제일 부잣집 아들이 있었다.
아버지가 탄광을 운영했고, 시내에 막걸리 공장도 운영을 했다.
현도는, 자기 집 막걸리 공장에서 술지게미를 가져와서 아이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것을 우리는 술떡이라 불렀다.
배고픈 아이들에게는 대단한 먹거리였다.
거의 매일 현도는 막걸리 공장에서 술떡을 가져왔다.
문제는 그것을 먹고 난 후였다. 아이들은 전부 취할 수 밖에 없었다.
산에 올라가 무덤 옆에서 잠이 들었다.
잠이 깨면 현도는 아이들에게 싸움을 시켰다.
비틀거리면서 술기운에 아이들은 아픈 줄도 모르고 서로를 때렸다. 웃으면서 서로 껴안기도 하고.
그런데 나는 예외였다. 현도 옆에 앉아서 아이들의 술김에 놀면서 싸우는 모습을 보기만 했다.
어느새 나는 반에서 반장 현도 바로 밑의 부반장이 되었다.
사북에 일 년 정도 있었고, 아버지를 따라 강릉에 왔다.
사실 나는 술떡을 쓰면서 다른 생각을 했다.
아이들 이야기가 아닌, 더 하고 싶었던 말이 있었다.
현도의 누나 ‘그녀의 이야기’ 였다.
그녀는 나 보다 네 살인가 많았다. 중학교에 갓 입학한 예쁜 여학생이었다.
그 당시 사북에서 중학교 교복을 입고 다닌 사람은 그녀가 유일했다.
현도 집에 놀러 가면, 그녀가 웃으면서 나를 맞았다. 무척이나 나를 귀여워했다.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항상 우리 성열이 우리 성열이 하고 불렀다.
나도 그녀가 좋았다. 나는 누나가 없었다. 철부지 여동생들은 귀찮기만 한 존재였다.
그녀에게는 비누 냄새가 났다. 그 냄새도 처음 맡아 본 냄새였다.
어느 날, 현도 없을 때, 그녀가 나를 불렀다. 아무도 없는 그녀의 방에서 그녀는 내 입술에 키스를 했다.
그녀 입 냄새는 설익은 사과 맛이었다.
아직도 그 맛을 잊지 못한다.
그날 밤 현도의 누나와 술을 마시다가 같이 밤을 보냈다.
결혼하고 두 번째 외도였다. 필리핀 두마게티에서 한번, 이 십년 지나 사북에서 그녀와.
“누나가 왜 아직 여기에 있어요?”
나는, 그녀가 사북에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너가 가고 우리집은 망했어. 막걸리 공장은 밀주단속으로 망하고, 몇 년 지나서 사북사태로 폐광 까지 갔다가, 석공에 겨우 팔고 몇 푼 안되는 돈을 가지고 강릉에 가서 살았어”
“......”
“너 생각이 나서, 물어보기도 했는데.......”
“그러다가 신랑이 죽고 먹고 살려고 고향에 다시 왔지.”
“나 너가 쓴 소설도 읽어 봤어. 내 얘기 나올 줄 알고 기대하고 봤는데......”
술떡을 쓸 때, 그녀를 생각하면서 썼다.
그러나, 술떡과 그녀는 어울리지 않았다. 소설 속 어딘가에 그녀를 집어넣으려고 했지만, 포기했다.
강물의 검은색과 술떡과 그녀의 존재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그녀를 소설 속에 포함 시키는 것은, 죄를 짓는 기분 이었다.
그녀만의 좀 더 아름다운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렇게 술떡에 이어진, 그녀만의 이야기는 소설이 되지 못했다.
단 한 번의 그녀와의 밤을 마지막으로.
그녀에게서는, 언젠가 먹어 본, 열대 과일 구아바 맛이 났다.
그 후, 다시는 설 익은 사과 맛은 보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