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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보네
<청명고등학교 3학년 11반>
#1
미친 듯이 붉은 사랑을 하고 싶다. 내 심장을 잃어도 좋을 만큼 충분한 사랑을.
그리고 어느 날 그런 사랑이 나에게 왔다.
청명고등학교 3학년 11반 이산해. 올해로 만 열여덟. 이제 수능을 앞둔 나이로 공부에 매진하고 있다(나를 제외한 모두가).
중학교 때부터 이어온 술과 담배는 나에겐 끊을 수 없는 벗이 되었다. 그렇지만 그들과 친구를 맺는 시간은 오로지 나
홀로 일 때뿐. 누군가와 함께 있다면 난 철저히 위장을 한다. 그러나 단 한 사람. 나의 그런 거짓됨이 필요 없는 사람.
그런 사람이 생겼다, 어느 날 문득, 바람처럼 나에게로 왔다.
“산해야! 이거 좀 먹어 봐.”
“고맙습니다.”
“응. 다 먹고 그릇은 나중에 줘도 돼.”
우리 옆집에 사는 여자. 깍듯이 존댓말 써줘야 좋아하고, 주는 음식 거절 안 해야 기뻐하는 여자.
이미 결혼은 했지만 또한 이미 이혼도 했다.
“오빠, 오빠네 학교 안 좋아? 자꾸 애들이 막 꾸졌대! 시설 좋지?”
“흣- 누가 그딴 소리해? 우리 학교 좋아. 왜, 오게?”
“몰라. 그래도 이 근체에선 신설이니까. 3년 뒤까지 새로 안생기면!”
그리고 옆집 그 여자의 딸. 이제 막 중1이 된 열네 살짜리다.
내가 사랑하는.. 아니, 그냥 단순한 호기심일지도 모르는 감정을 가지고 있는 여자의 딸.
그렇지만 그것은 아무 문제도 되지 않는다. 난 그냥 그 여자를 그 여자 그대로 바라보고 있는 것이니까.
그리고 또한 그것이 완전한 하나가 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다. 하나가 되기 전에 사그라들어 버릴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런 여자다. 그 사람은.
“잘 먹었습니다. 그릇 여기.”
“응, 그래. 맛있었으면 다음에 또 해줄게. 공부하느라 먹을 것도 잘 챙겨 먹지도 못하지?”
“괜찮아요.”
“사양 마. 먼 친척보다 가까운 이웃이 좋다는 말 몰라? 우리 별이하고도 잘 지내줘서 고맙지. 시간도 없는데 별이가 이것
저것 물어본다고 해도 싫은 소리 하나 안 하고 설명해주잖아. 고마워서 그러지..”
이 사람에게 난, 그저 옆집 아는 학생. 그 정도다. 더 보태자면, 자기 딸과 잘 지내는 오빠 동생사이.
이 사람에게 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단지 그 뿐이다.
후-
뿌연 담배연기를 가을바람 속으로 날리면 어김없이 익숙한 소리가 들려온다.
“또 피워?”
돌아보면 역시나 예상대로, 옆집 그 여자.
걸어오더니 내 옆에 앉는다. 그리곤 자기 주머니에 담배를 꺼내어 입에 문다. 익숙한 라이터 사용.
아마 이 여자도 한두 번은 아닐 거라고. 나 혼자 생각한다.
“좀 줄이지 그래? 나중엔 진짜 후회해.”
“자기도 피면서.”
“그러니까. 내가 아직까지 이걸 못 끊고 이러는 게 아마도.. 네 나이 때부터 펴서?”
“그보다 더 빨리 아니고?”
“얘가!”
극존칭을 쓰다 이럴 때, 나란히 앉아 똑같은 걸 하고 있을 때. 이 사람과 내 나이 차이를 잊어버릴 때, 우리의 경계는
무너져 내린다.
“고마워! 그래도.”
감자기 고맙다는 말을 하는 여자.
“그래도 우리 별이 앞에선 피고 싶어도 참아줘서. 별이, 아마 너 담배 피는 거 알면 충격 받을 걸? 걔, 내가 피는 것도
너무 싫어해서. 끊어야 되는데.. 어렵네?”
“그건 그쪽도 마찬가지잖아요. 걔 앞에선 절대 안 피면서 대신 나와서 피잖아요.”
“하긴, 그렇네. 나 좋은 엄만가?”
가을 하늘은 맑다. 꼭 소박한 웃음을 지어보이는 이 사람과 같이. 소박하지만, 뭔가 깊다.
“훅-”
“학생!”
담벼락에 기대 앉아 담배 한 대를 여유롭게 필 때였다. 아마도 올해 봄의 시작. 막 신입생 환영회를 끝마친 때가 아닌 가
싶다.
“학생이 무슨 담배를 피워요? 얼른 끄지 못해요?”
지그시 한 번 잔소리 쟁이 아줌마를 올려다봤다. 다시 담배를 피웠다.
“이 학생이! 부모님 연락처 뭐예요? 안되겠어! 어디 이 동네에서!”
“없어요.”
“뭐라고요?”
“없다고.”
“에?”
잠시 동안의 침묵이었다. 그 말을 진짜로 믿는 것인지. 바보 같았다. 나이 많이 먹었다고 별 거 아니구나했다.
“학생이, 이산해 맞아요?”
어떻게 내 이름을 알고 있을까.
“난 며칠 전에 302호로 이사 왔어요. 그리고 학생 얘기는 101호 아주머니한테 들었구요. 부모님, 두 분 다 안 계시다고.
잘 챙겨주라고. 맞죠?”
뭐라고 대답할까 잠시 고민했다. 아까 그건 그냥 거짓말이었다고? 아니면, 그게 뭔 상관인데 참견이냐고?
“....”
“음. 그러니까. 악의는 없고 단지 내 아들 같달까? 사실, 우리 딸이랑 나이 차이도 별로 안 나고. 그냥, 편안하게.
나를, 엄마처럼? 아니면 이모처럼. 생각해요.”
“이모? 엄마? 그딴 거 없이도 잘 살았으니까 신경 꺼요.”
담배를 지져 끄고는 일어나 지나쳐갔다.
“저기! 아까 담배 얘기 때문에 화난 거 같은데. 미안해요. 피워도 되고, 피면 안 되는 명확한 기준 선이란 없는 건데.
하긴, 나도 피면서, 주제넘었어요. 하지만, 담배는 몸에 안 좋아요! 그러니까 조금 줄이면 어때요? 나도 우리 딸
때문에 조금씩 줄이려고 하는데, 같이하면 어때요?”
잠깐 멈춰 섰다, 무시하고 다시 계단을 올랐다.
그 때부터 지금까지 늘 한결같아서 좋다. 지금처럼 웃는 모습도, 때로는 화내는 모습도.
“담배.. 끊을 생각 없어요?”
“응?”
“없냐고.”
곤란한 듯 하늘을 한 번 보더니 머리를 쓸어 올리곤 다시 나를 본다.
“아예 끊는 건. 너무 고달픈데. 근데 그건 왜?”
“그 쪽이 끊는다면, 나도 한 번 그래 보려구요.”
“진짜? 와, 진짜로?”
놀란 듯 몇 번이나 되묻는다.
“싫음 말고.”
“잠깐! 나한테 시간을 좀 줘. 아무래도 난 너보다 훨씬 오랫동안 피워왔고. 줄인다고는 하지만. 겨우 한 두 개피 줄인
것뿐이니까. 응?”
“그럴까..?”
“이산해!”
담배를 저 멀리 물 고인 웅덩이에 던지고 일어나면 이 여자도 나를 따라 일어선다.
“오늘 저녁 먹으러 올래?”
“아니오.”
항상 이런 식이다. 이 여자가 마음 내키는 대로, 저녁 식사에 초대를 하고. 그러면 난 언제나 아니오,란 대답으로 끝을
맺는다.
“그러지 말고. 오늘만. 맛있는 거 많이 해놓고 기다릴 테니까. 8시 반에 별이 학원 끝나는 거 기다려 줬다가 같이 와.”
그럼에도 굴하지 않고 계속 말을 거는 여자.
“결국 목적은 딴 데 있으면서.”
“당연하지! 별이, 어두운 거 싫어하니까 같이 와줘. 수고한 만큼 배 터지게 먹게 해줄게. 이따 봐!”
이 여자에게 첫 번째는 그녀의 딸에게 있었고. 두 번째도, 세 번째도 그녀의 딸의 존재, 그 자체에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런 그녀의 딸과 연관된 한 사람일 뿐이며, 그 사람 자신도 자신을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고 여겼다.
그렇지만 왜인지. 그것 또한 기분이 좋다. 그녀의 소중한 딸을 부탁하는. 그로인해, 나 역시 그 여자에게 있어
소중한 사람 같다고 느꼈다.
“오빠! 오빠가 왜 여기 있어?”
“너 데리러.”
“나?”
열네 살. 뭐가 그리 즐거운지 모를 나이라고 했다, 사람들은. 그것은 이 아이에게도 마찬가지다.
누구에게나 똑같이 웃음만 가득한 열네 살이었다면. 하지만 그것은 나로 인해 깨어졌다. 열네 살, 난 최고의 슬픔을
맛보았다. 부모님의 죽음. 그 앞에서 한 없이 작아질 수밖에 없었던 나. 그래서 때때로 이 아이가 부럽다.
이 아이의 행복이 부럽다.
“엄마가 또 시켰지?”
“어.”
“엄만, 만날 그래. 귀찮지 않아? 안 나와도 되는데.”
“흣-”
그냥 살짝 웃어줬다.
“왜 웃어!”
나를 올려다보며 왜 웃느냐고 묻는 아이. 그 모습이 귀엽다. 동생삼고 싶다고나 할까.
“뭐가 안 나와도 되는 데야. 혼자는 무서워서 오지도 못하는 게”
“오빠!”
짧은 다리로 나를 따라 오는 모습이 꼭 그 여자의 딸이라서가 아니라, 귀여웠다. 그러면서도 그런 자연스런 웃음이 부럽다.
“별이야! 별이야!”
창문으로 밖을 내려다보니, 옆집 여자와 그녀의 딸. 무언가 큰 일이 일어난 듯 보였다.
분명 그녀의 딸은 울고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딸을 쫓아가는 그 여자 또한 울고 있었기 때문에.
걱정 반, 호기심 반으로 물었었다. 무슨 일 있느냐고.
“아무 일도.”
하다가 갑자기 울음을 터뜨리는 여자. 놀라고 말았다.
“이혼했어..”
가만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딱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기 때문에, 그냥 서 있었다.
“나.. 우리 별이한테 상처를 준 거야.”
그러면서 내 어깨에 기대어 울었다. 거기에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있었더라도 그랬을 것이다. 그것을 알면서도
난 받아주고만 있었다.
“그쪽 잘못이 아니잖아요.”
내가 해줄 수 있던 건, 고작 이런 작은 위로 뿐. 그 이상은 내가 할 수 있는 범위가 아니었다.
당장 그 여자를 껴안아 줄 수도 없었고, 더 이상의 말을 꺼낼 수도 없었다.
왜냐하면, 나 조차도 나약한 인간이었기에. 아마 그때쯤이었을 거다. 그 사람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버릇이 생긴 것이.
그 후로부터 5개월이나 흘렀다.
“나? 나, 스물아홉.”
“스물아홉이라구요?”
“응. 근데 그건 왜?”
“그럼, 애를 도대체 몇 살에 난 거예요?”
열네 살짜리 딸이 있는 여자가 스물아홉이라고 했다.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숫자 아닌가. 내가 그렇게 놀라서 되물었음에도
그 여자는 뭐가 그리 태연한지 느긋하게 대답했다.
“열다섯에?”
“진짜로?”
“하하.. 뭐야! 왜 그런 얼굴이야!”
거기다 대고 아무 말도 못했다. 내가 너무 순진했나, 아무리 그래도 열다섯에 애를 낳았다는 말을 믿은 내가 바보였나.
그치만 옆집 그 여자의 얼굴은 정말 사실을 말하는 듯한 얼굴이었다.
나중에야 들었지만 친 딸은 아니라고 했다. 전 남편의 자식이고, 그럼에도 그 남편과 이혼하면서 남편과 그의 전 부인
사이의 딸인 애를 기꺼이 자신이 키우기로 했다는 것이다.
“왜? 그럼 안 돼?”
여자는 오히려 나에게 되물었다.
“솔직히 이해가 안 돼요.”
“이해하려고 노력 안 해도 돼. 어쨌거나 별이는 내 딸이야.”
그 마음을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겉으론 이해하는 척 했다. 그리고 뭐든지 똑 부러진 그 여자의 선택이었기에 이해하지
않아도 스스로 이해 될 거라 생각했다.
“산해, 학교 가? 오늘 몇 시쯤에 와?”
아침 일찍, 등교하려 집을 나섰을 때다.
“빨라야 11시쯤?”
“그래? 그러면 끝나면 전화 좀 해줘. 너 공부 방해하는 건 알지만, 내가 가르쳐주고 싶어도 오랫동안 안 쓰던 머리가
어디 갈까나 몰라. 수학책 보는데 앞이 깜깜하더라고. 별이 좀 가르쳐줘.”
말하면서도 조금은 미안해진 걸까, 겸연쩍은 웃음을 보이는 여자.
“너무 밑지는 장산가? 그럼, 과외 아르바이트할래?”
“아르바이트요?”
“응.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우리 별이 공부, 특히 수학이랑 영어 봐주고 한 달에 30만원이면. 어때? 꽤 괜찮지?”
딱히 시원한 대답을 주진 못했다. 아무리 공부에 신경 쓰지 않는 나라고 해도, 앞으로 수능까지는 한 달 하고도
조금 남짓. 막상 대학을 가더라도 상상 못할 등록금 때문에 학교를 다닐 수 있을 진 모르지만, 그렇다고 공부를 아예
소홀히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조금 생각해 볼게요.”
“그래, 그럼. 미안, 늦었지? 어서 학교 가봐.”
어쩐지 조금 실망한 표정을 하는 여자. 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가 버린다. 잠시 동안 멍하니 서있다, 시간을 확인하곤
서둘러 학교로 향했다. 그러는 도중에도 머릿속엔 계속 그 여자만 떠올랐다.
교실의 칠판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앞에서 수업하는 선생도, 엎어져 자고 있는 놈들도.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오로지 나 혼자만의 세계에라도 갇힌 듯, 공상에 빠져든다. 몽롱한 담배 연기와, 그것들과 함께하는 그 여자의 웃음.
담배는 나쁜 것이라 말하지만, 그렇다고 끊을 용기는 나지 않는 다는 그 여자. 그런 모습이 마음에 든다.
인조인간 같지 않고 진짜 사람 같아 보여서 믿음이 간다.
중 고등학교를 모두 친척들 도움 아래 다녔던 나라도, 어마어마한 대학 등록금까지 거기에 기댈 수는 없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딱히 돈을 마련할 만한 구석도 없다. 나란 놈이, 장학금 받아가며 대학을 다닐 일을 아마도 없을 테고
친척들께 손을 벌리자니 미안해진다고나 할까. 난감한 상황이다.
딱히 꿈이 있는 것도 아니고, 목표나 의지가 있는 것은 더 더욱 아닌데, 맹목적으로 대학에 가야한다는 필요성도 못 느낄
뿐더러, 가봤자 4년을 낭비하는 식으로 살아갈게 뻔하기 때문에 망설여진다.
그러나 꼭 대학을 가지 않더라도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물음에 답을 할 수 없음에 답답함을 느낀다.
“이 문제 한 번 풀어봐.”
내 말에 문제 푸는 척 몇 번 끄적이더니 이내
“오빠, 쫌만 쉬었다 하자. 엄마 보러 먹을 거 좀 달라고 할게!”
아무래도 열네 살은 열네 살인가보다. 금방 실증내고, 지루해하는 나이.
“김별이! 산해 시간 없어! 얼른 하고 끝내야지 뭐하는 거야?”
“됐어요. 나도 막 지루하려던 참이었으니까.”
막 화를 내다 멈칫하는 여자.
“지루하려던 참?”
되묻더니 웃는 여자. 그러더니 넌 너무 배려가 많아, 지루하면 했지 하려던 참은 뭐야, 하고 묻는다.
“할래요.”
“응? 뭘?”
“지난번에 말했던 거요. 과외.”
“진짜? 기쁜데? 음. 잠깐 귀 대봐.”
무슨 얘길 하려는 지, 귀에 대고 속삭이는데,
“그럼, 나 담배 끊어 볼게. 너랑 나랑 같이 하는 거다?”
푸하하 크게 웃는 이 여자 앞에서 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사실, 말은 내가 먼저 꺼냈다고는 하지만 잘 해낼 자신은
없다. 담배. 근 3년간 나의 벗이었기 때문에 단번에 끊는다는 것은 어쩐지 조금 무섭달까.
“표정이 왜 그래?”
“자신이 없어서요.”
“괜찮아, 나도 사실은 자신 같은 거 없어. 응?”
내 어깨를 탁탁 치면서 말하는 여자.
“뭔데 뭔데, 나도 말해줘!”
“됐어, 공부나 해.”
“엄마!”
언제나 시끄러운 집이다. 식구는 단 둘뿐이지만, 항상 이 집엔 생기가 넘쳐흐른다. 엄마와 딸 사이라고 보기에는 조금 더
가까워보인다. 그 둘 속에서 나도 함께 웃으며 지금 이렇게 살고 있다.
떨어지는 빗물에 담배연기가 묻혀버리는 날이면, 어김없이 우울해진다. 이유엔 두 가지가 있는데, 첫 번째는 그런 날이면
평소와는 다르게 담배 맛이 아주 비리다는 거. 두 번째, 비릿 맛이 나는 데에는 빗길에 차가 미끄러져 목숨을 잃은 두
사람, 사랑했던 나의 부모가 있기 때문이다. 나의 이런 마음을 마치 다 알고 있다는 듯이, 그런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여자가 있다. 언제나 그렇듯 담배 한 대를 입에 물고서.
“가장 힘든 날, 끊을 수 있는 담배가 가장 성공한 거지?”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만 골라하는 이 여자. 못 알아듣겠다는 얼굴로 쳐다보면
“이런 날, 우리가 담배 안 피면 어떻겠냐구. 저번에 니가 말했던 거처럼. 끊어보자고.”
“후- 아마도 오늘은 어려울 거 같은데요.”
“아니야, 자.”
하며 먼저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빼 지져버리는데.
“너도 해.”
나도 가만있을 순 없었다. 나도 똑같이 담배를 지져 끄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자도 나를 따라 오면서 내게 어깨동무를
한다. 키도 작으면서 까치발을 든 거 다 안다.
“해냈다!!!”
크게 웃으면서 소리치는 이 여자, 약간 미친 거 같은데도, 입 같은 거 아리고 웃지 않는 모습이 너무 좋다.
“그쪽이 좋아요.”
“응? 나도 너 좋아해!”
“그게 아니고, 그쪽을 여자로서 좋아한다구요.”
그런가. 역시, 내 말에 대답이 없다. 내 어깨에 두르고 있던 어깨동무도 슬며시 내려놓는다.
“그렇다고 달라질 거 없어요, 어떻게 되는 것도 아니고. 그냥 그렇다는 거니까 다른 걱정은 안 해도 되요.”
언제나 이 여자가 나를 위로했는데 지금은 상황이 바뀌었다.
“엄마!”
뒤를 돌아보니 여자의 딸이 서 있었다. 내 얘기를 모두 듣고 있었던 건지,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하다.
“별이야, 오해 하지 마. 아무 것도 아니니까.”
여자는 딸을 달래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그 사이, 난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녀의 딸과 비교하면
한참 밑에 서 있는 나. 그런 사람이었다. 그렇지만 여전히 난 이 여자를 사랑한다.
언젠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왜 남의 자식을 키워요, 다시 결혼해서 애기 낳고 그렇게 키우면 되잖아요.”
“산해야.. 나 불임이랬어.”
“...”
“아니, 꼭 그래서 별이를 키운다기보다는. 그 남자는 좋은 아빠가 못 돼. 분명 다시 재혼하고서도 또 이혼 할 거야.
별이한테는 엄마가 필요해. 상처 줄 수 없어.”
“아.. ”
“왜, 나 멋지지 않아? 방금 명언이었어! 크..”
“풉! 하하.”
“뭐야?”
맑은 하늘만큼이나 맑은 웃음으로 웃을 수 있었다. 다소, 무거운 얘기였지만 그 여자와 함께여선 언제나 즐겁기 때문에.
학교. 청명고. 3-11. 그 팻말 안에 내가 있다. 학교를 졸업하기까지는 아직 몇 달. 그 동안은 난 이 안에 있을 것이다.
수업시간이지만 반 이상이 자기 공부를 하거나 엎드려 자고 있다. 나 또한 그들 중 하나이지만 난 내 공부도, 엎드려 자는
것도 아니다. 창을 통해 들어오는 햇빛을 바라보고 있었을 뿐이다. 그리고 깊은 생각에 잠겨있었다.
수능은 일단 치루기로 했다. 점수는 아마 형편없이 나올 것이다. 2년제 전문대라도 들어는 가야겠지.
그리고 그 다음은 그 이후에 고민하기로 했다. 지금은 현재에 만족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오빠, 우리 엄마 좋아해?”
“어?”
“저번에 좋아한다며.”
앞에는 영어 책을 펴놓고서 지문을 읽고 해석해보라고 시켰건만 들리는 건, 꼬부랑 영어소리가 아닌 전혀 다른 소리.
“말해봐.”
다그치는 아이.
“너 들었잖아, 근데 왜 묻는데?”
“진짜로?”
가만히 고개만 끄덕였다. 이 애가 무슨 이유로 이런 것을 묻는지는 모르겠다.
“그럼, 내가 허락해줄게. 오빤 우리 엄마 좋아해도 돼.”
“..?”
“오빠도 알지? 엄마가 내 진짜 엄마가 아니라는 건. 그리고 엄마는 아직 많이 젊잖아, 내 엄마로만 살게 하는 건
공평하지 못해. 그렇지?”
겨우 열네 살짜리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 열네 살짜리 작은 꼬마 입에서 나온 말은 상상 이상이었다.
나의 열네 살과 비교하면 너무나도 달랐다.
“오빠는, 합격이야!”
“웃겨.”
“뭐가?”
“너한테 허락 맡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는데?”
“당연히 내 허락 있어야 되는 거 아냐? 뭐야!”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로 날 원망하는 듯 한 말을 한다.
“알았어.”
알았다는 말로 일단은 진정시켰다. 막 웃음이 났다.
“자, 공부하자!”
가을의 끄트머리, 이 근처 중학교 대부분이 이미 2학기 중간고사를 끝마친 때다.
“엄마! 오빠! 붙어 앉아 봐봐!”
“왜?”
“짜잔~ 나 중간고사 성적 디게 올랐다!”
거실 소파에 나란히 앉아 얘기를 나누던 나와 이 여자에게 다가와서는 한껏 들뜬 목소리로 성적표를 내민다.
“어머! 진짜 엄청 올랐네? 아이구, 잘했어, 산해야! 너무 고마워!”
정작 성적이 오른 자기 딸을 칭찬해 주는 것이 아니라 나를 칭찬해주는 여자. 다소 엉뚱한 면이 있는 사람이니까.
“엄마는! 내가 시험 본 거잖아!!”
“그래! 알았어, 너무 잘했어 우리 딸. 근데 왜, 그거 말하려구?”
“아니, 일단 앉아 봐봐~”
이유는 말해주지 않고 무조건 일단 앉아보라는 아이. 하도 보채대기에 옆 집 그 여자 옆에 앉았다.
“이거도 들고. 자, 찍는다! 찰칵!”
찍자마자 폴로라이드 카메라를 통해 나오는 사진 한 장. 얼떨떨했지만, 원가 즐거웠다. 엉뚱한 엄마와 그런 딸.
몰랐지만, 이제야 알겠다. 이 둘은 누가 봐도 모녀사이라는 것을. 서로가 서로를 너무나도 닮아있었기에.
“무슨 생각해?”
그 여자다.
“아무생각도요.”
“에이~ 거짓말하는 거 다 아는데?”
“음, 날씨가 참 좋아요. 그 생각이요.”
내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웃는 여자.
“나도야, 동지다. 히히.”
이 여자의 웃는 얼굴은 정말 예쁘다. 아마도, 내가 그런 모습에 마음이 기울어 진 것이겠지.
“웃는 얼굴이 예쁘다고 생각했어요.”
“응?”
“그래서 내가 좋아하나봐요.”
“하하..”
자리에서 일어나 그 여자의 얼굴을 똑바로 봤다. 의외로 높은 눈높이. 지금까지 난 이 여잘 너무 작게만 봐왔었나보다.
눈을 정확히 마주치고. 동공의 까만 그림자가 보인다. 검지만 탁하지 않다, 맑다.
“마음대로 해.”
먼저 말을 꺼내는 여자.
“날 좋아하건 말건, 그건 네가 결정하는 거지 내가 하는 건 아니니까. 근데 그 선까지야, 알지? 생각해봐, 네가
우리 별이 아빠가 된다는 건 어쩐지 말이 안 되잖아!”
듣고 보니 그랬다. 내가 아무리 이 여자를 좋아한다고 해도, 엄마로서의 이 여자 자체를 받아들이기에는 내가 아직 너무
어리다. 나는 크게 상관없지만, 보는 눈이라는 것도 있으니까 말이다.
“그렇지만 마음을 머리로 움직인다는 건, 너무 어려운 일이라는 걸 아니까. 강요하지 않아. 산해야, 나를 좋아해줘서
고마워.”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눈동자였다. 무슨 말을 꺼내야할까 잠시 망설여졌다.
“고마운 건 나야말로죠.”
멋쩍게 웃어넘기며, 뒤적뒤적 주머니에서 담배 한 갑(두 개피를 피다 만)과 라이터를 꺼냈다. 그리고 창문을 통해서
밖으로 던졌다. 라이터가 아스팔트 바닥에 추락하면서 깨지는 것이 보인다.
“뭐해?”
뿌연 담배 연기에 가려 어느 것이 구름인지, 담배 연기인지 구분조차 가지 않았던 지난날들과는 사뭇 다른 날임이 틀림없다.
이제 더 이상 담배는 필요하지 않을 것 같다. 담배가 없이도 충분히 숨쉴 수 있으니까 말이다.
“끊는다고 했잖아요.”
“하하..이산해, 넌 정말.. 하하”
이 여자의 웃음이 좋다. 그럴 수 있다고 믿고. 노력하니까. 난 지금 이 여자와 함께 살고 있다.
#2
내 뼛속까지 울리는 소리가 있다. 피아노..
중학교 1학년, 늦다면 늦은 나이에 시작했기에 남들보다 몇 배는 더 노력했다. 중학교 3년 내내 죽도록 노력했지만
지나온 시간의 무게에 치여 예고 입학에 실패했다. 그래서 오게 된 이 학교, 청명고등학교.
일반계에서 남들 다 하는 공부하랴, 피아노 연습하랴, 쉴 틈 없이 지냈다. 막바지 3학년을 남겨두고, 이제는 대학 입시에
치여, 실기 시험 연습에 치여 잠도 못자고 학교 수업엔 집중조차 하지 못하고.. 조금 힘이 든다.
그렇지만 내 선택에 후회는 없다. 피아노를 치고 있는 그 순간만큼은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이 되니까.
그 이유 하나만으로도 나를 일으키기엔 충분하다.
“문노엘!”
“어?”
“시끄럽다고! 저녁 시간 틈타서 공부하는 애들 있는 거 몰라?”
“아.. 미안.”
엄마아빠의 등살에 못 이겨 집에 하나씩 다 있다는 피아노도 두지 못했다. 엄마나 아빠는 오로지 내가 공부‘만’ 하길
원하니까 말이다. 덕분에, 학교 음악실이 빌 때면 몰래 들어가 피아노를 치곤하는데, 그것마저도 오늘은 허락되질
않는다. 난 절대음감이 아니다. 난 음악에 특별난 재능도 없다. 집안에서 음악의 길을 응원해주는 것도 아니다.
나한텐 아무것도 없다. 단지 피아노를 칠 수 있는 손. 이것이 내가 가진 전부다. 그렇기 때문에 난 노력해야만 한다.
올 여름. 그 날도 어김없이 야자를 몰래 빼먹고 나와 음악실로 향하던 중이었다. 고요한 복도를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누구지?”
매일 나 혼자 사용하던 음악실이었기에 놀랐다. 나 말고 다른 사람이 여기 드나든다면 그나마 있던 내 연습 공간이
사라지는 것이었다. 삐그덕 문을 열고 빼꼼히 안을 들여다보니 피아노 위에 걸터앉아서 노래를 부르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저..”
내 존재를 의식했던 건지 걸터앉았던 피아노에서 내려와 나에게로 다가왔다.
“저.. 여기서 계속 있을 거..”
가슴에 달린 명찰을 보니 나와 같은 학년이었다. 파란색. 그런데 전혀 처음 보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있는 남자 애.
이름은.. 명예당.
“풉-!”
“왜 웃어?”
나도 모르게 웃음부터 나왔다.
“하하.. 아니, 이름이. 왜..”
잠시 내 쪽을 건방지게 보더니, 듣기에도 거북한 말투로 말을 한다.
“그러는 니 이름은? 문노엘?”
“아.. 미안, 실례했어.”
나보다 조금 더 큰 키에 나를 내려다보는 눈빛하며, 어디하나 마음에 드는 구석이 없었다.
“용건이 뭔데?”
잠시 용건을 잊고 서 있던 내게 먼저 물었다.
“아! 이 음악실 지금까지 내가 써왔는데.. 좀 비켜줄래?”
“허락 맡고?”
“아..아니?”
“그럼 나보고 나가라고 할 자격 없는 거네?”
그러고 보니 나한텐 이런 말을 할 자격 따윈 없었다. 조금 당황해서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는데
“그러면 서로 방해하지 말고 각자 자기 할 거 하지 그래?”
그러면서 다시 피아노 위에 걸터앉는 그 놈. 순간 열이 확 받았다.
“내가 하고 싶은 건 피아노를 치는 거야. 비켜.”
“아, 그래? 잘 쳐? 그럼, 내 노래에 반주 한 번만 해봐.”
피아노위에서 내려오더니 교탁 쪽으로 뚜벅뚜벅 걸어가는데, 칠판에 등을 기대어 비스듬히 서서는 물백묵을 마치 마이크를
잡듯이 집어 들고는 시작해보라는 듯이 나를 내려다본다.
전혀 거기에 반주를 해주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그 녀석의 별 것도 아닌 노래에 맞장구를 쳐줄 마음은 절대 아니었다.
난 나대로 혼자 피아노를 친다고 쳤는데, 묘하게 박자가 딱딱 떨어지는 것이, 피아노를 치는 나도, 노래를 부르던
그 애도 놀랐다. 그 이후부터 쭉, 음악실에는 나와 그 애가 있다.
“내가 불러 볼 테니까, 듣고 반주 좀 해 봐.”
“또?”
“하라면 해.”
♪♬
“기상시간은 장장 한 시간. 일어나 하는 건 없이 반찬 투정만.
그럴 때마다 미안해하는 엄마. 대충 교복을 껴입고 학교에 가 또 수면을 취해.
선생도 눈에 안 뵈고..아, 그 다음..”
이 애가 부른 것은 일정한 템포의 RAP. 난 거기에 맞춰, 그냥 잔잔한 반주만을 깔아줬다.
“그런 거 말고, 이런 거 어때?”
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 다음 가사를 만들어 내려고 머리를 쥐어짜고 있는 너가 안쓰러워서.
경쾌하고 빠른 피아노 선율이 내 머릿속을 관통하고 지나간다. 이 느낌을 아마 너는 모를 거야.
“됐고, 다시 아까 그 반주보다 좀 더 무겁게 해봐.”
“됐어. 이번엔 니가 내거 들어주는 차례잖아. 친다?”
“그러든지.”
얄밉게 선생님용 자리에 다리를 꼬아 앉는 녀석. 그래놓고 내 쪽은 쳐다도보지 안는다.
“넌 듣는 자세가 글러먹었어. 명예당.”
그러면서 피아노를 쳤다. 음악실을 통째로 울리는 소리와, 내가 거기에 동화되어가는 느낌. 악보는 이미 내 머릿속에
있기 때문에 눈을 감고도 칠 수 있다. 향긋한 바람이 불어오는 것 같다.
“잠깐!”
무슨 이유인지 피아노 건반을 꽝 두드리는 놈.
“뭐야!”
그만 소리를 질러버렸다.
“틀린 거 같은데.”
“뭐?”
“악보 확인해보든가. 여기선 파♯이 아니고 파♮아냐?”
“웃겨, 아니거든? 볼래?”
막 화가 났다. 네 까짓 게 뭔데 왜 참견이냐고, 소리쳐주고 싶었다. 일단은 가방에서 악보를 꺼내 책장 넘기는 소리가
들릴 만큼 신경질적으로 넘겼다.
“자, 여기....! 어?...뭐야?”
“내 말이 맞지?”
순간.. 난 내 눈을 의심했다. 네가 어떻게.
“너 어떻게 알았어? 이 곡 알아?”
“아니? 난 피아노에 피자도 모르는 놈이야. 그냥 듣기에 거슬렸을 뿐이지. 자, 들어봐. 미묘하게 차이 나잖아.”
그랬다. 파♯과 파♮ 사이에는 분명히 미묘한 차이가 있다. 그러나 어째서 나는 그 차이를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일까. 그런데 어째서 그걸 이 애가 먼저 알아차렸을까.
“왜 그렇게 보는데? 나 절대음감 같은 거 절대 아냐. 왜~ 화음 같은 건 절대 못 들어. 다행히도 그 부분이
왼손 반주랑도 어긋났었고 오른손 멜로디만 들렸으니까.”
“....”
잠시 얼떨떨해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가만히 서있었다.
“뭐해? 아까 그 반주 낮게 해보라고.”
“어? 으..응.”
“그보다 더 낮은 키로.”
그 일이 있기 전까지는 나도 모르게 이 애를 무시하는 마음이 있었던 거 같다. 하지만, 그 이후로는 그런 생각이
사라졌다.
“야! 뭐해? 왜 안 와?”
야자시간. 시험기간이라 선생님들의 감독도 심해진데다가 성적도 걱정되기에 그날은 음악실에 가지 않았었다.
그런데 이 애는 어떻게 빠져 나온 건지, 내 교실까지 와서는 나를 부른다.
“시험기간이잖아, 못 가. 가도 시끄러워서 금방 들켜.”
“됐고. 나와.”
“야!!”
내 손목을 잡고 나를 끌고 가기 시작했다. 난 안 끌려가려고 했지만, 남자 애 힘을 내가 어찌 당하리.
“어디 가?”
“나간다, 왜?”
“어딜?”
음악실에 있어봤자, 들킬게 뻔하다고 했다고 학교를 나가자니.. 그래서 나오게 된 밖. 내 등을 떠밀어 버스에 올랐다.
“앉아.”
버스의 뒤쪽 자리에 날 앉히더니 자기도 내 옆에 앉는다. 가방도 없이 학교를 나온 우리를 모두가 이상한 시선으로
쳐다보는 것 같아서 창피했다.
“친구들 보여줄게.”
“무슨 친구?”
“내 친구. 같이 노래하는 애들.”
한 20분쯤 달렸을까, 우리는 버스에서 내렸다. 내리고 보니, 주위는 온통 반짝이는 네온사인이 가득한 거리.
그 안에 자리 잡은 한 클럽으로(교복을 입은 채) 들어갔다. 매우 익숙한 듯 아무 거리낌이 없는 녀석.
“누구?”
그 애의 친구들이 나의 존재에 대해서 묻기 시작했고
“쓸만한 애.”
라고, 평소대로 재수 없는 말만 골라하는 명예당까지. 한 마디로 적응이 안 됐다. 이리저리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나에게
녀석이 먼저 말을 걸어왔다.
“여기서 노래하는 거야, 니가 반주하고.”
“뭐?”
웅성웅성, 방금 전 까지 만해도 사람 몇 명 없던 클럽 안이 조금씩 붐비기 시작했다.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제대로 연습도
안된 노래와 반주를 선보인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연습도 제대로 안 했잖아!”
“괜찮아, 여기선 자기 feel대로 가면 돼. 자연스러운 게 좋은 거야. 피아노 저기 있다, 가서 한 번 만져봐.
전자피아노라 니 손에 잘 안 맞을 수도 있으니까.”
그러면서 피아노가 있는 쪽으로 나를 밀어버리는 놈. 정말 대책 없는 놈이다. 나보러 어쩌라고 이런 곳엘 데려왔는지
도무지 모르겠다. 10분간의 준비 시간이 끝나고 나와 그 놈. 그리고 친구들이 무대에 올랐다. 강한 조명 탓에 무대 밑에
사람들이 보이진 않았지만, 함성소리만으론 꽤 있는 것 같았다. 다 같이 인사를 하고, 난 피아노 앞에 앉았다.
이런 무대 따위, 나한텐 아무것도 아닐 거라고, 지금까지 생각해왔다. 난, 세계가 모두 주목하는 그런 피아니스트가
될 거니까 이쯤은 문제없다고 생각했다. 피아노 위에 손을 올리고, 건반 무게감이 걱정되기는 하지만 그 정도는 커버할 수
있다고 속으로 안심했다. 녀석의 친구들의 랩과 동시에 정말, 연습 한 번 제대로 하지 않은 그야말로 즉흥적 연주.
내 능력을 시험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니가 뭔데 남일에 사사건건 시비야
너는 뭐가 잘나서 날무시해 새끼야
편견없이 똑바로 보자고?
모두가 평등한 세상이라고?
세상밑바닥까지 추락했다는 조롱과
반대로너는 이세상 꼭대기의 눈빛과
상하말고 수평관계 하자고
정정당당히 맞설자신없어?
같은 위치에서 시작하면 질까봐 불안하냐
그렇다면 넌 이미 K.O.난 SUPERHERO
편견 따위 집어치우고 이리나와! 지금 나와!
NANANANA
NANANANANA”
완벽한 드럼연주와 강력한 비트 박스. 그리고 그것들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내 피아노 연주가 하나가 되어
지금까지의 어떤 소리보다 더 정확히 내 머리를 내리꽂았다.
“감사합니다. 바로 다음 곡 들려드릴게요. 문노엘! 이번엔 니가 치가 싶은 만큼 맘대로 쳐. 우리가 너한테 맞출게.”
명예당. 처음 만난 날, 가슴에 달린 니 명찰을 보고 많이도 웃었었지. 어떤 부모가 애 이름을 이렇게 지었나 많이 비웃었어.
근데, 이름 한 번 정말 잘 지어주신 거 같아. 지금 너는 누구보다도 가장 빛나니까. 이름답게.
그 애 말대로, 내 마음대로 쳤다. 평소에 집에서 조금씩 만들었던 곡. 잘 기억나진 않지만, 틀려도 아무도 모를 테니까.
이번엔 내가 주인공이다.
“고등학교 3학년 그게 뭐길래. 학교 집 학원 어디서나 날 괴롭혀.
하루종일 죽자고 공부 공부만. 근데 것보다 하고싶은 게 있는데.
나는 노래고 너는 춤추고 넌 피아노에. 공부말고 잘할수있는게 많은데 제발 똑바로 봐.
성적은 빼고 나를 있는 그대로 보라고. 내 이름은 명예당, 너는 문노엘.”
틀림없다. 이 애에게는 자신도 모르는 음악에 대한 재능이 숨어있다. 전혀 처음 들어보는 곡에, 게다가 내가 실수하는
부분까지 커버할 수 있는 능력. 그 애로 인해서 내 미완성이었던 곡은 완성된 ‘음악’이 되었다.
사람들의 함성소리와 그리고 나. 난 이미 여기에 동화되어버렸다. 마치, 모두가 나를 인정한 것 같았다.
“다녀왔습니다.”
늦은 시각, 하교해 집으로 돌아왔을 때의 일이었다. 잔뜩 화가 난 건지, 현관 앞까지 나와 나를 노려보다 시피 하는
엄마. 처음엔 영문을 몰랐지만 이내 대강 알겠더라. 다름 아닌, 내 성적표. 안 봐도 비디오다. 이번 시험에선
정말 우리 부모님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점수를 받아왔기에 말이다. 그도 그럴 것이, 매일 같이 그 녀석과 음악실에
나란히 앉아 음악에 관한 이야기만 했지, 단 한번도 교과서를 들여다 본 적은 없었다.
“너 이걸 지금 성적이라고 갖고 와!”
엄마는 단단히 화가 나신듯했다. 어쩌면 제일 중요하다는 그 시기에, 고등학교 3학년의 마지막 시험을..
망쳐버린 나에게 엄마가 화를 내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이미 수시는 글러 먹었고, 무조건 수능에서 결판을
내야하는 상황에 왔다.
“엄만, 정말 실망했다...”
하고는 방으로 들어가 버리는 엄마. 아빠는 아예 내 얼굴을 보기도 싫은 건지, 방에서 나오지도 않았다.
닫혀 진 문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내 자신이 이렇게나 초라할 수가 없다.
나는 초라한 사람이 된다.
10월, 수학능력시험에 대한 긴장이 최고조에 이르고. 나 또한, 부모님이 반대하시는 음대에 들어가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해야했다. 시험이면 시험, 실기면 실기, 어느 것 하나 놓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날도 그 녀석은 나와 함께였다.
“기상시간은 장장 한 시간. 일어나 하는 건 없이 반찬 투정만.
그럴 때마다 미안해하는 엄마. 대충 교복을 껴입고 학교에 가 또 수면을 취해.
선생도 눈에 안 뵈고, 들락날락 교무실 출입만 잦아지는데.
기본은 새벽 3시. 밤새도록 노래 부르고 부르고 부르고.
공부하라는 말, 너 앞날 걱정 좀 하라는 말 하나도 듣고 싶지 않아.
그 대신 한숨만 푹푹 쉬는 우리 엄마.”
그 새, 녀석의 노래는 점점 형태를 갖추어 가고 있었다.
“엄마한테 하는 말인 거야?”
“응, 그런 셈이지.”
“멋지다!”
그랬더니, 환하게 웃어 보이는 명예당. 웃고는 있는데. 그런데도 별로 웃고 있는 것 같지가 않는다. 오히려
슬퍼 보인다고나 할까..
“반주, 이 다음부터는 좀 더 빠르게 해봐. 그냥 니 맘대로.”
“그 다음도 지어놨어?”
“아니, 그냥.. 맴돌기만.”
늘 밝은 아이인 줄 만 알았지, 이런 모습을 가지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 못했다.
이 녀석도 엄마에게 미안한 걸까.. 조금은 다르지만, 내가 엄마한테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는 것과 어쩌면 조금 비슷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해본다.
화려한 네온사인 거리 사이로 헤집고 들어가, 우리는 우리의 자리를 찾는다.
흥겨운 음악과, 빠른 비트. 사람들의 함성소리.. 그 모든 것들이 나와 이들을 깨우친다.
넌 초라한 사람이 아니라고. 충분히 가치 있다고.
나는 지금까지 잘 못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내가 진짜로 원하는 것은 피아니스트가 되는 것 이전에 피아노를 치는 것.
그 자체이다. 피아노를 치고 있다는 그 사실만으로도 나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되니까 남들이 나를 알아봐 주고
나를 칭찬해주는 것보다 내가 피아노를 치고 있다는 현실이 나를 기쁘게 한다. 아무도 내 연주를 들어주지 않아도 나는
행복해질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내가 한 걸음 양보하기로 했다. 부모님이 원하시는 대로 음대가 아닌 계열로 진학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혹시나, 나중에 되돌아가고 싶어질 수도 있다. 만약에 그렇더라면, 기꺼이 되돌아 갈 것이다.
그렇지만 그 동안 동안의 시간은 결코 아깝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 또한 피아노를 위한 시간일 테니까.
또 그동안은 나는 행복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지난 3년간을 함께 한 이 음악실과, 그리고 명예당, 이 녀석을
떠난다.
2월, 수능도 모두 끝나고 졸업만을 남겨둔 이 시점. 저마다 원하는 대학에 붙었느니 어쨌느니 하면서 여기 청명고의
강당은 북적인다. 예정대로라면 훨씬 일찍 모든 식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갔었어야 했을 시간이었다. 벌써 2시가 넘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왜 인지, 졸업식의 모든 순서가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선생님들이 학생들을 집에 못가도록 막는데.
그 순간, 강당의 단상위에 스포트라이트가 비춰졌다. 그리고 거기에는 명예당, 그 녀석이 서있었다.
그리고 클럽에서 같이 공연하던 그 친구들도 서서히 본인들의 악기와 함께 무대에 올랐다. 순간, 강당 내에 학생을 비롯한
학부모.. 선생님. 모두가 술렁였다.
그리고 일정한 드럼 소리와 함께 그 조명은 나를 가리켰다. 온 사람들의 시선이 나를 향했고,
“문노엘, 니 차례야.”
녀석이 마이크를 통해 말함과 동시에 내 눈엔 피아노가 보였다. 마치 나를 무대로 인도하려는 듯, 서서히 흘러가는 조명
과 예기치 못한 순간에 당황한 학생들과 학부모 및 내빈들. 그들의 주목을 한 몸에 받으며, 내가 천천히 계단을 올랐다.
올라서서 보니 저 멀리로 한 손엔 커피를 들고 조금은 마음에 안 드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엄마와 아빠가 보였다.
천천히 걸어가 피아노 앞에 앉았다. 나에겐 악보도 없고 감각도 없다. 한동안 피아노 근처에도 안가서 그랬는지, 갑자기
너무 떨렸다. 손이 굳어버린 듯 했다.
“자, 시작한다.”
아무것도 준비되지 않은 순간이었다. 이 녀석이 지금 무슨 노래를 부를 것인지, 어떤 분위기인지, 난 또 어떻게 반주를
해줘야 할지 아무것도 모르는 상황이다. 혼란스러웠다. 이윽고, 드럼소리와, 기타, 베이스소리에 맞춰, 난 피아노를
쳤다. 모르겠다. 내가 지금 무슨 곡을 치고 있으며, 지금 어떤 형식으로 피아노를 치고 있는지 하나도 모르겠다.
이건 마치 내 손이 멋대로 움직이는 것 같았다.
“기상시간은 장장 한 시간. 일어나 하는 건 없이 반찬 투정만.
그럴 때마다 미안해하는 엄마. 대충 교복을 껴입고 학교에 가 또 수면을 취해.
선생도 눈에 안 뵈고, 들락날락 교무실 출입만 잦아지는데.
기본은 새벽 3시. 밤새도록 노래 부르고 부르고 부르고.
공부하라는 말, 너 앞날 걱정 좀 하라는 말 하나도 듣고 싶지 않아.
그 대신 한숨만 푹푹 쉬는 우리 엄마.
노래가 너무 좋아서 노래를 하고 싶은데 엄마가 원하는 거 안 해서 미안해.
맨날 학교 불려오게 해서 미안해. 미안하면서 짜증만내서 미안해.
한 번도 고맙다고 말 못해서 미안해. 한 번도 환하게 웃어주지 못해서 미안해.
미안한 일이 너무 많아서 미안해.
그런데 엄마, 난 노래가 너무 하고 싶어.
이 다음에, 내가 더 크면 그때 꼭 엄마를 위한 노래를 부를게. 그게 지금이 아니라 너무 미안해.”
순식간이었던 것 같다. 노래 한 곡이 끝났다. 녀석의 노래를 들으면서 나도 같은 생각을 했다. 미안해. 미안해.
예당이의 엄마도 어디선가 듣고 계시겠지. 그리고 우리 엄마처럼 눈시울을 붉히고 계시겠지. 엄마 미안해. 미안해.
“고마워, 명예당.”
“천만에.”
사람들의 박수와 환호를 받으면 우대에서 내려왔다. 그리곤 엄마에게로 달려가 엄마 품에 안겼다. 그리고 속으로 말했다.
엄마 미안해.
고개를 돌려보니, 녀석도 엄마와 함께 있었다. 어느새 녀석은 울고 계시는 어머니를 위로하는 착한 아들이 되어있었다.
그 때에, 나와 녀석의 눈은 마주쳤고, 전에는 한 번도 보여주지 않았던 웃음으로 녀석의 호의에 대한 보답을 했다.
그건 녀석 또한 마찬가지였다. 전에는 한 번도 보여주지 않았던 그런 미소로, 나를 바라봐주었다.
“문노엘, 멋지더라.”
“어? 어..”
같은 반 친구들에게 금방 둘러싸여버렸고, 그 후로 다시는 녀석을 볼 수 없었다.
“언니! 피아노 너무 잘 쳤어요, 나도 피아노 하고 싶은데 어떻게 해요?”
“별이야! 이리와, 미안해요, 우리 딸인데.. 실례했어요! 산해야, 가자. 오늘 맛있는 거 내가 쏠게.”
순식간에 다시 고요함이 찾아왔다.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 아빠와 엄마가 나란히 앞좌석에 앉았고 나는 뒷좌석에
있었다. 명예당, 뭐하고 있을까.
“노엘아, 엄마가 미안했다. 피아노 못하게 한 거..”
엄마의 말에 눈물이 나기 시작했다. 오늘로 나는 엄마에게 인정받은 사람이 되었다.
“괜찮아, 피아노 그래도 칠 수 있으니까.”
“산해야, 아까 그 여자애 너랑 친해?”
“왜요?”
“그냥. 피아노 잘하더라구, 진자 우리 별이도 시켜볼까?”
“됐어요.”
하하,하고 멋쩍은 웃음으로 분위기를 무마하는 여자. 열네 살짜리 딸을 키우는 여자가 맞긴 한건가.
“자! 밥 먹자!”
다소 엉뚱한 면이 있는 여자, 그래서 좋아한다고 말했던가. 그래서 더 좋아졌다고 해야 할까.
푹푹 찌는 한 여름의 오후.
혹시나 해서 다시 찾은 그때의 그 클럽, 명예당과 그의 친구들이 아직도 여기에 있을까, 반신반의하면 들어선 곳.
다행이다.
“찾았어..”
“여어~ 드디어 왔냐?”
그곳엔 여전히, 음악을 사랑하고, 즐길 줄 아는 녀석들이 있었다.
그리고 또한, 탁한 조명아래서 더욱 빛나는 우리들의 음악에 대한 ‘열정’이 있었다.
첫번째이야기는 작가모집때 썻던걸 기본 틀만 두고 다시 쓴겁니다.
두번째는 아예 처음쓴거구요. 실상, 제가 음악을 하고 싶어하는 마음이
들어있죠. 피아노나 다른 악기를 칠때의 그 평온감은 정말 기분좋은 것이예요.
그래서 그 느낌을 글로 표현해보고 싶었습니다.
다소, 오랜만에 인소닷에 와서 조금 새롭기도 해요.
어쨋든, 재밌게 봐주셨다면 좋겠고, 아니더라도 부족한 점이나..등등등
꼬릿말 부탁드립니다.
첫댓글 새벽 두시반이네요...늦은 시간 좋은 단편 읽고 잘 수 있어서 뿌듯합니다으다으다으.~~꺄오~~~저 이런 글 너무 좋아요...ㅠ.ㅠ저는 사실 악기연주 이런거 다룰줄 아는건 없어도 듣는건 참 좋아라 하는데요, 직접 연주할때의 평온감이라...궁금하기도 하구 부럽기도 하구 그러네요...다들 매력으로 똘똘 뭉친 캐릭터여서 정이 갑니다~잘 읽었구요, 앞으로도 자주자주 님 글 읽었으면 좋겠어요! 건필하세요!
와 너무 감사합니다. 다소 읽기 불편하셨을텐데 감사해요. 고등학생이라,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올린거지만, 앞으로 시간이 될떄마다 틈틈이 써보도록 해야겠습니다. 감사합니다.
14살이지만 어른같은 마음을 가진아이와 그 엄마 그리고 그 오빠 ..셋이 웃으며 언제나 행복하길...
곰돌이사랑님 저도 이들이 언제까지나 행복하길 바래요. 감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