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0년 전 불상의 화려함에 한 세계의 파국이 담겼을까
간절한 마음이 형태를 갖춰 천 년이 넘은 뒤까지 전한다는 건 참 놀라운 일입니다.
‘명작: 흙 속에서 찾은 불교문화’ 특별전이 열리고 있는 불교중앙박물관(서울 종로구)에 다녀왔습니다. 2015년 강원 양양 선림원지(禪林院址)에서 출토돼 오랜 보존처리를 마치고 공개된 9세기 금동보살입상을 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보살상에 입혀진 금박의 광채는 폐허에 그 오랜 시간 묻혀 있던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눈이 부셨습니다. 하나하나 따로 만들어진 광배와 보관(寶冠), 목걸이, 정병(淨甁) 등도 당대 문화의 찬란함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불상은 개인의 원불(願佛·개인이 일생 섬기는 부처)이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보살은 천 년 동안 땅속에서 매미처럼 꿈을 꾸고 있었을까요, 원소장자의 염원을 간직하고 있었을까요.
금빛에 넋을 잃다가 ‘금입택(金入宅)’이 떠올랐습니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말로 ‘금을 입힌 집’ 또는 ‘금이 들어간 집’이라는 뜻입니다. 신라의 전성시대 경주에는 금입택이 35채가 있었다고 합니다. 당시 진골 귀족들의 부유함과 사치스러움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헌강왕(재위 875∼886년) 때에는 성 안에 초가집이 하나도 없었으며 추녀가 맞붙고 담장이 이어져 노래와 풍류 소리가 길에 가득 차 밤낮 그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 불상이 만들어진 때가 대략 그즈음입니다. 하지만 풍요의 정점에 이른 신라는 속으로는 썩고 있었습니다. 진골 귀족이 부(富)와 권력을 독점한 탓입니다. 학자들은 제작기술의 뛰어남으로 보아 선림원지 보살상이 경주에서 제작돼 양양으로 보내졌을 가능성이 있다고 봅니다. 불상의 화려함 뒤에는 점차 말기로 다가가는 체제의 모순이 있었던 셈입니다.
달리 볼 수도 있습니다. 임영애 동국대 교수는 불상이 홍각선사(?∼880)의 원불이었을 가능성을 제기합니다. 대한불교조계종의 종조인 도의선사의 제자가 염거화상(?∼844)이고, 염거화상의 제자가 홍각선사입니다. 선림원지에서 나온 홍각선사탑비 비문에는 그가 말년에 설악산 억성사(億聖寺)로 돌아와 중창(重創)에 힘썼다고 나옵니다. 선림원지에 화엄종 사찰이었다가 선종의 요람이 된 억성사가 있었다고 추정하는 근거입니다. ‘왕이 곧 부처’라는 논리로 왕권을 뒷받침했던 교종과 달리, 참선과 깨달음을 강조하며 기존 권위를 부정한 당대 선종은 호족과 백성들의 지지를 받았습니다. 억성사 터에서 나온 이 불상을 선종이라는 새로운 사상의 확산과 떼어놓고 보기 어려운 것입니다.
정점에 이른 불상의 화려함은 한 세계의 파국을 내포한 것이 아닐지요. 불상은 10세기 초 동해안 해일과 홍수, 그에 따른 산사태에 휩쓸려 억성사와 함께 순식간에 파묻힌 것으로 보입니다. 신라도 천 년 역사를 다하고 935년 멸망했습니다. 다시 약 1100년이 흐른 오늘날 우리 사회는 단군 이래 최대의 풍요를 누리는 동시에 전쟁이 벌어지는 나라와 같은 수준인, 세계 최저의 출산율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달은 찼으니 기울까요, 아니면 새로운 사상에 힘입어 다시 차오를까요. 부처님오신날이 코앞입니다. 비록 불자는 아닙니다만 독자 여러분들의 가내 평안을 빕니다.
조종엽 문화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