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개토대왕 ( 375 - 413 )
고구려의 제19대 왕인 광개토대왕의 생존시의 칭호는 영락대왕이었다. 11세에태자로 책봉되고, 16세 때에 왕위에 올랐다. 391년에 처음으로 연호를 정하여
'영락'이라 함으로써 중국과 대등함을 보였다. 396년에 백제를 쳐서 한강 이북을
차지하고, 400년 이후 여러 차례 연나라와 싸워서 북으로 영토를 넓혔다.
또한, 5만의 군대를 파견하여 신라에 침입한 왜구를 무찔렀다. 이리하여 고구려
는 요동을 확보함으로써 만주 지방의 주인공이 되었으며, 남쪽으로는 그 세력
이 한강 상류에까지 이르렀다.
그는 이렇게 고구려의 땅을 넓혀 놓았을 뿐만 아니라, 나라
안의 정치에도 관심을 기울여 정치 제도의 정비에도 노력
하였다. 39세라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지만 후세 사람
들은 그를 고구려의 가장 위대한 왕으로 꼽는다. 그의 능
의 위치는 자세하지 않으나, 414년에 장수왕이 만주의
지안 현에 세운 광개토대왕의 비석에는 그의 생애와 업적
이 기록되어 있다.
2.을지문덕 ( ? - ? )
고구려 영양왕 때의 명장. 612년에 수나라의 장군 우중문·우문술이 30만 5천여 명
의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로 쳐들어와 압록강에 대치하고 있을 때 그는 거짓 항복
을 하고 혼자서 적진으로 들어가 수나라 군의 약점을 정탐하고 돌아왔다. 적군이
이 사실을 알고 추격하자, 평양성 30리 밖까지 유인하였다. 뒤늦게 속은 것을 깨달
은 수나라 군이 도망치려 하자, 미리 준비하고 있던 고구려군은 살수(지금의 청천
강)에서 맹공격을 가하였다.이에 수나라 군사는 겨우 3천여 명만 살아남아 달아나고, 고
구려가 크게 승리를 거두었다. 이 싸움이 바로 살수대첩이다.
을지문덕은 침착·대담하고 지략과 용맹이 뛰어났으며, 시와
문장에도 능하였다.
3.강감찬 (948 - 1031)
강감찬은 고려 제3대 정종 3년 11월 19일에 금주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엔 작고 못생겼으나 재주와 용맹이 뛰어났다. 983년에 문과에 장원급
제하여 예부시랑이라는 벼슬에 올랐고, 한림학사· 이부 상서 등을 지냈다. 강감찬
은 침착하고 의지가 강했으며, 학문과 지략에 뛰어났다. 1010년에 거란의
성종이 4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로 쳐들어오자 대부분의 신하들은 항복을 주장
하였으나 강감찬은 이에 끝까지 반대하고 하공진을 적진에 보내 설득시켜 물러
가게하였다. 그 뒤 서경유수 ·문하평장사를 역임하며 왕의총애를 받았다.
1018년에 소배압이 이끄는 거란의 10만 대군이 다시 쳐들어오자, 70세의 나이로 상원수가 되어 홍화진
에서 거란군을 물리쳤다. 이듬해 자기 나라로 되돌아가는 거란군을 귀주에서 크게 무찔러 이겼는데,
이것을 '귀주대첩'이라고 한다. 그 후 강감찬은 스스로 관직에서 물러나 자연과 글을 벗하며 조용히
살았다. 저서로는 <구선집> <낙도교거집> 등이 있으나 전하지 않는다.
서울시 관악구에 있는 낙성대는 그가 태어난 사적지이다.
4. 김유신 ( 595 - 673 )
김유신은 용맹과 지략이 뛰어난 신라의 명장으로 김수로왕의 12대 손이다.
15세 때 화랑이 되어 몸과 마음을 닦았다. 학문이 깊고 무예가 뛰어난 그는 신라
의 오랜 꿈인 삼국 통일을 위해 의지를 키워나갔다. 한 때 천관이라는 기생에게
마음을 빼앗겨 술집을 자주 드나들었다. 이 사실을 안 어머니로부터 크게 꾸지
람을 듣고 깊이 반성한 김유신은 자신을 태운 말이 술집 문앞에 가서 멈추자
말의 목을 베어 버렸다. 이와 같은 결단성은 훗날 신라의 삼국 통일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데 밑거름이 되었다.
654년 진덕 여왕이 왕위를 이을 자식 없이 죽자, 김춘추를 왕
으로 추대하고 자신은 상대등이라는 최고 관직에 올랐다.
그 후 소정방이 이끄는 당나라군과 연합하여 백제를 멸망시
키고, 668년 고구려도 멸망시켰다. 고구려 정복 후 당나라가
신라마저도 정복하려 하자, 김유신은 망한 고구려 백제군과
연합하여 이를 물리침으로써 삼국 통일의 위업을 이룩하였다.
5.김춘추 ( 604 - 661 )
신라 제29대 왕으로서 성은 김, 이름은 춘추이다.
인품과 외교 수완이 뛰어나 당나라와 일본과의 외교에서 큰 성과를 거두었다.
654년 진덕 여왕이 대를 이을 자식이 없이 세상을 떠나자 여러 신하들의 추대를
받아 왕위에 올랐다. 그는 법률을 제정하고, 관료 제도를 정비하였으며, 군사 조직
을 강화하는 등 본격적인 국가 체제를 확립하였다. 660년에는 당나라와 연합하
여 백제를 멸망시켜 신라가 삼국 통일을 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이듬해 고구려를 정벌하고자 군사를 일으켰으나 통일을 이루지 못하고 죽었다.
태종무열왕 김춘추는 어려서부터 용모가 범상치 않았고 영특
했다. 당나라 태종도 그를 보자마자 이렇게 감탄했다.
" 호오, 성인의 기개가 서려 있구나 ! "
어려서부터 세상을 바로잡을 원대한 뜻을 품었던 김춘추는
앞서가는 당나라의 문물을 받아들이는 데에 앞장섰다.
대륙의 문화를 받아들여 이 나라를 앞서가는 나라로 발전시
키고자 하는 뜻에서였다.
6.문무왕 ( ? - 681 )
신라 제30대 왕으로서 이름은 법민이고 태종 무열왕의 맏아들이다.
문무왕은 유난히 외모가 뛰어나고 머리가 총명하며 지략이 많은 사람이었는데
무예 또한 대단해 존경을 받았다. 문무왕은 왕위에 오르기 전 김유신과 힘을
합하여 5만의 군대를 이끌고 백제를 공격하였으며, 왕위에 오르고 나서는 고구
려와 당나라의 세력을 몰아내어, 677년에 마침내 삼국 통일의 대업을 완수했다.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으로 나뉘어져 있던 한반도가 이때부터
단일국가로 통일되었다. 문무왕은 당악을 수입하고, 신력을 제정하
여 사용했으며 당나라의 문화를 수입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681년 문무왕이 죽자 화장한 후 그의 유골을 통해 앞바다에 묻었는
데, 이것은 죽어서도 왜구의 침입을 막아 나라를 지키겠노라는 왕
의 유언에 따른 것이었다.
7. 장보고 ( ? - 846 )
신라 흥덕왕 때의 장수. 대상인. 본명은 궁복 또는 궁파로 '활 잘 쏘는 사람' 이라는 뜻이다. 중국 당나라로 건너가 무령군의 장교로 활약하던 중, 신라인이 당나라의
해적들에게 잡혀 중국의 노예로 팔려가는 것을 보고 이에 분노하여 귀국하였다.
그리고 왕에게 남해의 해상 교통의 요지인 완도에 해군 기지를 건설하여, 황해의
무역로를 보호하고 해적을 근절시킬 것을 주청, 승인을 받아 민군으로 조직된
1만여 명의 군대를 창설, 완도에 청해진을 건설하고 해적을 소탕한 뒤 해상권을
장악하였다. 837년 왕위 계승 분쟁에 패배한 김우징이 청해진으로 오자,
이듬해 우징과 함께 반란을 일으켜, 839년 민애왕을 죽이고 우
징을 왕위에 오르게 하였다. 그후, 장보고의 세력은 중앙 정부
를 위협할 정도가 되었으나, 이에 불안을 느낀 조정에서 염장
이라는 자객을 보내 장보고를 살해하였다. 그는 불의에 피살
되었으나, 8세기 후반 이래의 신라인의 해상 활동의 한 정점이
었으며, 신라 말기 각지에서 등장하는 호족 세력의 선구적 존
재였다.
8.세종대왕 ( 1397 - 1450 )
조선 제 4대왕 이름은 도. 태종의 셋째아들로 15세기 우리 나라에 가장 빛나는 업적
을 이룩한 임금이다. 안으로는 백성들에게 희망, 용기, 가능성을 심어 주었고, 밖
으로는 호국의 의지로 국경을 튼튼히 하고 국토를 확장 개발하여 조선왕조의
기틀을 튼튼히 하였다. 22세의 나이로 임금이 되어 첫 사업으로 집현전을 설치
하였다. 집현전은 학자들이 학문을 연구하는 연구소이다. 세종은 황희, 맹사성,
허조 등의 청백리를 등용하여 왕권과 신권의 조화에 노력하였고 성삼문, 신숙주,
박팽년 등을 등용하여 학문을 연구하게 하였다.
세종의 업적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으나 우리 민족 문화의 발전을 위해
가장 위대한 업적을 남긴 것은 바로 한글을 창제하고 훈민정음을 만든
일이다. 훈민정음이 만들어지기까지 우리 나라에는 우리의 글이 없었다.
신라 때 설총에 의해 '이두'라는 것이 만들어지기는 했으나 거의 중국
글자인 한자를 써 왔다. 세종은 우리 고유의 말과 글의 필요성을 느끼고
읽기 쉽고 배우기 쉬운 훈민정음 28자와 '용비어천가'라는 한글 책을 엮었
다. 세종은 백성을 가장 편안하게 하는 정치와 훌륭한 치적을 쌓은 어진
임금이었고 우리 민족의 문화를 창달하는데 가장 큰 공을 세운 대왕이다.
9.김구 ( 1876 - 1949 )
김구는 독립운동가이자 정치가로서 호는 백범이다.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다.
18세 때 동학에 입교하여 동학 혁명이 일어난 해에는 해주 동학군을 지휘하다가,
일본군에게 쫓겨 만주로 피신하였다. 1896년 귀국하여 명성 황후를 살해한 일본
에 복수하기 위해 일본군 중위를 죽이고 체포되었다. 그 후에도 일제에 항거하
여 투쟁을 계속하다가 여러 차례 옥살이를 하였다.
3·1운동 후에는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임시 정부의 주석을 지
내며 이봉창·윤봉길 등의 항일 의거를 지휘했으며, 장 제스의
국민 정부와 긴밀한 유대를 맺고, 광복군을 조직하여 항일 투
쟁에 온 힘을 기울였다. 1945년 8월 15일, 광복이 되자 귀국하
여 우리 나라에 대한 신탁 통치 반대 운동을 전개했으며, 통일
정부 수립을 위한 남북협상을 주장하고, 김규식과 함께 북한
에 가서 정치 회담을 갖기도 했으나 실패하였다. 그 후 민족
양심에 호소하며 분단된 조국을 통일하기 위하여 애쓰던 중,
육군 소위 안두희에게 암살 당하였다. 저서에는 <백범일지>
가 있다.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주어졌다
10.유관순 ( 1904 - 1920 )
3·1운동 때의 순국열사. '한국의 잔다르크' , '3·1운동의 꽃'. 충남 천안에서 태어
나, 미국인 선교사의 도움으로 이화 학당에 입학하였으며, 1919년 3월 1일 전국적인
만세 운동이 일어나자 학생들과 함께 거리로 뛰쳐나와 시위를 벌였다. 그 뒤 학교가
문을 닫자 고향으로 내려가 천안·연기·진천·청주 등지의 학교와 교회를 돌며 만세
운동에 동참할 것을 호소하였다.
그 해 아우내 장터에 모인 군중에게 태극기를 나눠주며 앞장
서서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고, 그
녀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일본 헌병에게 살해되었다. 유관순은
주모자로 지목되어 가혹한 고문을 받았으나 끝내 굴복하지 않
았으며, 3년형을 선고 받은 후 항소하여 다시 서울 검사에게
의자를 던져 법정 모독죄가 더해져 7년형을 선고 받았다. 서대
문 형무소에 수감되었으나, 옥중에서도 만세를 부르며 동지들
을 격려하다가 감옥에서 죽음을 맞았다. 1962년에 건국훈장
국민장이 주어졌다.
11.이순신: 1579년 무과에 급제, 함경도의 동구비보 권관에 보직되고, 이듬해에 발포수군만호를 거쳐 1583년 건원보권관, 훈련원참군, 1585년 사복시주부, 조산보만호, 1589년 선전관, 정읍현감을 역임하는 등 미관말직만을 지내다가 1591년 유성룡의 천거로 전라좌도 수군절도사에 승진, 좌수영에 부임하여 군비확충에 전력했다.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최초로 옥포에서 적 수군 선견부대 30여척을 격파, 이어 사천에서 거북선을 처음 사용하여 13척을 분쇄, 당포에서 20척, 당항포에서 100여척을 각각 격파하여 자헌대부에 승품되고, 7월 한산도에서 적선 70여 척을 무찔러 정헌대부에 올랐다. 다시 가토의 수군을 안골포에서 격파하고 9월 적군의 근거지인 부산에 쳐들어가 100여 척을 부수고, 1593년 다시 부산과 웅천의 적 수군을 궤멸, 남해안 일대의 적군을 완전히 소탕하고 한산도로 진을 옮겨 본영으로 삼고, 그후 최초의 삼도 수군통제사가 되었다.
이듬해 명나라 수군이 내원하자 죽도에 진을 옮기고 이어 장문포에서 왜군을 격파, 적군의 후방을 교란하고 서해안으로 진출하려는 적 수군의 전진을 막아 왜군의 작전에 큰 차질을 초래케 하였다. 전쟁이 소강상태에 들어가자 군사훈련, 군비확충, 피난민의 생업보장, 산업장려 등에 힘쓰다 1597년 원균의 모함으로 서울에 압송되어 사형을 받게 되었으나, 정탁의 변호로 권율의 막하에 백의종군했으나 정유재란으로 원균이 참패하자 삼도수군통제사에 재임, 12척의 함선과 빈약한 병력을 거느리고 명량에서 133척의 적군과 대결, 31척을 부수는 대전과를 거두었다. 다음해 고금도로 진을 옮기고 철수하는 적선 500척이 노량에 집결하자 명나라 제독 진인의 수군과 연합, 적군을 기습하다 혼전 중 유탄에 맞아 전사했다.
충성심이 강하고 전략에 뛰어난 용장으로서 임진왜란 중 싸움마다 승리했으며, 적 수군의 기세를 꺾어 제해권을 장악했고, 곡창지대 전라도를 방어함으로써 군량미 확보에 만전을 기하는 등 위기에 처한 국가를 지탱하는데 가장 큰 공을 세웠다. 글에도 능하여 [난중일기]와 시조 등 뛰어난 작품을 남겼다. 1604년 선무공신 1등이 되고, 풍덕부원군에 추봉, 좌의정에 추증, 1613년 영의정이 더해졌다. 장지는 아산의 어라산, 왕이 친히 지은 비문과 충신문이 건립되었다. 충무의 충렬사, 아산의 현충사등에 제향, 시호는 충무공이다.
12.이제마: 사상체질의학(四象體質醫學)을 창시함으로써 우리나라 의사학상(醫史學上) 불후(不朽)의 자취를 남긴 조선말기의 한의학자
이제마의 호는 동무(東武)이며, 全州李氏 安原大君의 19대 孫으로 함경남도 함주군(지금의 함흥) 평서면에서 진사(進士) 이반오(李攀五) 의 長男으로 태어났다.
선생은 심오한 철학관을 바탕으로 한 창의적인 연구로 명저 『동의수세보원(東醫壽世保元)』을 통해 사상체질의학을 체계화함으로써 한의학의 새로운 장을 개척하였으며, 오늘의 한의학계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있다.
불우한 운명을 타고나 국운이 쇠퇴한 어려운 시대를 살았으나, 타고난 총명성으로 일찍이 經書를 통독하고 어려서부터 무예(武藝)를 좋아했으며, 평소 특이한 지병으로 의학과 역학에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경향각지를 주유(周遊)하면서 견문을 넓히고 배움에 힘썼다.
1875년(39세) 武科에 등용되어 1876년 무위장(武衛將)에 제수되었으며, 1880년(44세)부터 1893년까지 선생의 철학적 세계관이 담긴 『격치고 (格致藁)』3편을 저술했다.
1886년(50세) 진해현감(鎭海縣監)에 임명되었으며, 1894년(58세) 불후의 명작 동의수세보원(東醫壽世保元)』을 저술했다.
1896년(60세) 최문환의 반란을 평정한 공으로 선유위원(宣諭委員)에 제수되고 이듬해 고원군수로 전임되었으나 1898년 모든 관직에서 사퇴한 후 保元局이라는 한의원을 개설하고, 축적된 임상경험을 바탕으로 1900년 일생을 마칠때까지 『동의수세보원』의 퇴고(推敲) 를 계속했다.
선생은 『동의수세보원』으로 천명된 사상체질의학(四象體質醫學)을 창시함으로써 한의학에 새 지평을 열어 놓았을 뿐만 아니라 의학에 대한 인식에 있어서 인간을 자연에 순응하는 수동적 자세에서 능동적 자세로 전환시켜 놓았다.
사상체질의학을 간략히 요약하면, 사람의 체질을 오장육부의 대소와 성정(性情)의 차이에 따라 太陽人, 太陰人, 少陽人, 少陰人의 4종류로 나누며, 같은 병이라도 병증보다는 환자의 체질에 따라 처방을 달리해야한다는 이론으로 임상학적 (臨床學的)인 방법에 따라 질병의 예방과 치료 및 양생(養生)의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그밖에 저서로는『천유초(闡幽抄)』,『제중신편(濟衆新編)』등이 있다.
13.허준: 29세 때 과거에 합격하고 의관이 되어 내의원(궁중에 설치된 병원)에 근무하면서 뛰어난 의술을 인정받아 년 뒤에 선조 임금의 어의(주치의)가 되었다.
임진왜란 때에는 어의로서 의주로 피난가는 선조 임금을 보살펴 그 공으로 호종공신이라는 칭호를 받기도 하였다.
1610년에 선조의 명을 받아 중국과 우리나라의 역대 의학서적을 종합하여 《동의보감》을 완성하였다.
《동의보감》은 우리나라뿐 아니라 동양 여러 나라에 알려졌고 의학이 발달된 오늘날까지도 최고의 한의학서로 평가되고 있다
14.안중근
안중근 : 한말의 독립운동가.
본관 : 순흥
별칭 : 아명 안응칠
활동분야 : 독립운동
출생지 : 황해도 해주
주요수상 : 건국훈장 대한민국장(1962)
주요저서 : 《동양평화론》
전기 : 본관은 순흥(順興)이며, 아명은 안응칠(安應七)이다. 황해도 해주(海州)에서 출생했다. 한학(漢學)을 수학했으나 오히려 무술에 더 열중했다. 1895년 아버지를 따라 가톨릭교에 입교하여 신식 학문에 접하고 가톨릭 신부에게 프랑스어를 배웠다. 1904년 홀로 평양에 나와 석탄상을 경영하고 이듬해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되는 것을 보자 상점을 팔아 1906년 그 돈으로 삼흥(三興)학교(후에 오학교(五學校)로 개칭)를 세우고, 이어 남포(南浦)의 돈의학교(敦義學校)를 인수, 인재양성에 힘쓰다가 국운(國運)이 극도로 기울자 합법적인 방법으로는 나라를 바로잡을 수 없다고 판단, 1907년 연해주(沿海州)로 망명하여 의병운동에 참가하였다. 이듬해 전제덕(全齊德)의 휘하에서 대한의군참모중장(大韓義軍參謀中將) 겸 특파독립대장(特派獨立大將) 및 아령지구(俄領地區) 사령관의 자격으로 엄인섭(嚴仁變)과 함께 100여 명의 부하를 이끌고 두만강을 건너 국내로 침투, 일군(日軍)과 격전을 벌였으나 실패, 노에프스키[烟秋]에서 망명투사들이 발간하는 《대동공보(大同公報)》의 탐방원(探訪員)으로 활약하는 한편 동료들에게 충군애국(忠君愛國) 사상을 고취하는 데 진력했다. 1909년 동지 11명과 죽음으로써 구국투쟁을 벌일 것을 손가락을 끊어 맹세, 그 해 10월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러시아 재무상(財務相) 코코프체프와 회담하기 위해 만주 하얼빈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사살하기로 결심하고, 동지 우덕순(禹德淳)과 상의하여 승낙을 얻고 동지 조도선(曺道先)과 통역 유동하(柳東河)와 함께 이강(李岡)의 후원을 받아 행동에 나섰다. 1909년 10월 26일 일본인으로 가장, 하얼빈역에 잠입하여 역전에서 러시아군의 군례를 받는 이토를 사살하고 하얼빈 총영사 가와카미 도시히코[川上俊彦], 궁내대신 비서관 모리 타이지로[森泰二郞], 만철이사(滿鐵理事) 다나카 세이타로[田中淸太郞] 등에게 중상을 입히고 현장에서 러시아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곧 일본 관헌에게 넘겨져 뤼순[旅順]의 일본 감옥에 수감되었고 이듬해 2월, 재판에서 사형이 선고되었으며, 3월 26일 형이 집행되었다. 글씨에도 뛰어나 많은 유필(遺筆)이 있으며 옥중에서 《동양평화론(東洋平和論)》을 집필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15.주몽
고구려를 세운 고구려의 시조,주몽.그는 동명성왕이라고도 부르며, 주몽은 중국식 발음으로 원래는 '추모'라고 해야 맞다.
주몽은 오이,마리,협보,소서노 등과 힘을 합쳐 부여의 왕자였던 대소의 여러가지 공격을 물리치고 부여를 망하게 하여 고구려 라는 옛 고조선의 영토를 되찾아 고구려 라는 새로운 나라를 세웠다.유화부인과 해모수 사이에서 태어난 주몽은 어렸을 적부터 매우 활솜씨가 뛰어나 주몽이라는 이름을 가졌는다.또한 주몽은,예씨부인(예소야)과 혼인하여 고구려 제 2대왕인 유리왕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
첫댓글 인터넷을 참고 하였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