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란정사
월란정사(月瀾精舍)는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원천리에 있는 건축물이다. 2016년 11월 3일 안동시의 문화유산 제105호로 지정되었다.
이 정사가 있는 자리는 퇴계가 31세 때인 1531년부터 1566년까지 수시로 여러 제자들과 더불어 유거강학하고 특히 농암 이현보를 모시고 철쭉꽃이 만발한 음력 4월에 "월란척촉회"라는 문학동호회를 만들어 시문을 읊던 "월란암" 옛 터로 도학을 강론하던 도산학 발상지의 유서 깊은 곳이다.
월란정사의 현재 건물은 당시 퇴계의 제자 중에서 여기서 가장 오래도록 유거독서한 만취당 김사원의 후손들이 옛 월란암이 있던 곳에 1860년에 정사를 창건하였다.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1칸 반 규모의 一자형 집이다. 가운데에 1칸 대청을 놓고 그 좌우에 각 1칸씩의 온돌방을 두었다. 건물은 자연석 허튼 층 쌓기 한 기단 위에 막돌 초석을 놓고 정면 모두와 우측면 가운데 기둥만 원주를 세우고 나머지는 방주를 세운 5량 가 홑처마 팔작지붕 집이다.
퇴계와 관련된 역사적 의미를 지닌 장소성을 갖고 있으며, 건축양식도 온전히 보존되고 있어 중요한 역사문화환경요소로서의 가치가 있다고 판단되므로 안동시 문화유산(유형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천 원권 지폐에 숨은 이야기
대한경제신문 기사 입력일 : 2022-12-26
김병일 도산서원 원장, 前 기획예산처 장관
오늘은 남녀노소가 부담없이 자주 사용하는 기본 지폐인 천 원권에 담긴 숨은 이야기를 찾아보자. 앞면에는 퇴계(이황, 1501~1570)의 초상화가 그려져 있고, 뒷면에는 조선 후기 대표적인 선비화가 겸재(정선, 1676~1759)가 그린 진경산수화 〈계상정거도(溪上靜居圖)〉가 담겨 있다. 퇴계선생 초상화는 훗날 그려진 상상화이다. 그런데 어쩐지 어색하게 느껴진다. 이 초상화는 1970년 중반 이유태 화백이 화폐 도안을 위해 그린 것인데, 나름 고증은 했겠지만 퇴계의 제자들이 선생 살아계실 때 언행과 모습을 기록한 《퇴계선생언행록》의 내용과는 사뭇 차이가 있다. 먼저 지폐에서 쓰고 있는 복건(모자)은 퇴계선생이 승려가 쓰는 것과 유사하다며 생전에 잘 사용하지 않았다고 한다. 대신 만년에는 선비들이 즐겨 사용하던 정자관을 쓰고 제자에게 옛사람과 같아 보이느냐 하며 흐뭇해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얼굴 모습도 선생의 맏손자(이안도, 1541~1584)가 기록한 ‘이마가 넓고 모가 났다’, 제자 학봉(김성일, 1538~1593)이 적은 ‘멀리서 바라보면 위엄이 있고 가까이 다가가면 온화한 모습을 지녔다.’와 비교하면, 병색이 완연하게 느껴지는 지금의 초상화와는 많이 다르다. 이보다 몇 해 앞서 세워진 서울 남산의 도서관 앞 퇴계 선생의 동상 모습이 오히려 학봉의 기록에 더 가깝다. 그래서 여러 해 선비수련을 다녀간 기관이 감사의 뜻으로 도산서원선비문화수련원에 기증한 동상도 이것과 비슷한 모습이다.
뒷면의 〈계상정거도〉에는 도산서원 앞을 흐르는 낙동강과 주위 풍광이 실경으로 그려져 있다. 서울 사는 선비화가인 겸재가 왜 멀리 이곳까지 와서 그렸을까? 곡절이 있다. 겸재가 71세 되던 1746년에 퇴계선생의 대표저술 《주자서절요》의 친필 서문을 입수한 것을 기념하여 그린 것이다. 기이하게도 이 《주자서절요》 서문은 퇴계선생 이후 겸재까지 계속 외손 집안으로 전해졌다. 이것이 퇴계 집안을 처음 떠난 것은 선생의 맏손자 사후이다. 그의 처 안동권씨(퇴계의 맏손부)를 통해 외손자(홍유형)에게 전해졌고, 그 외손자가 자신의 사위(박자진)에게 다시 물려준 것이 또다시 그의 외손자인 겸재에게 전해진 것이다. 퇴계 손자의 외손자의 외손녀가 겸재의 어머니이다. 외가 쪽으로 7대를 거쳐 전해졌으니 겸재의 기쁨은 얼마나 컸겠는가! 겸재 외조부(박자진)의 부탁을 받고 발문을 쓰게 된 우암(송시열, 1607~1689)도 퇴계의 친필 서문을 마주하며 너무 감격한 나머지 종이가 헤질 정도로 수없이 만지작거렸다고 적었으니 소유한 당사자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이를 기념하여 겸재는 《퇴우이선생진적첩》을 만들었다. 여기에는 퇴계 친필 《주자서절요》 서문을 시작으로 두 차례 쓴 우암의 발문 그리고 겸재가 그린 〈계상정거도〉를 포함한 4장의 산수화 등이 담겼다. 이 첩은 그 후 여러 명사들의 손을 거쳐 16면으로 늘어났다. 보물(585호)로 지정되고 2012년 케이옥션에서 당시 최고가인 34억 원에 거래되었다.
그런데 〈계상정거도〉 그림 속 책상 앞에 선비가 홀로 앉아 있는 작은 건물이 도산서원 내에 있는 도산서당이냐, 산 너머 있던 계상서당이냐로 의견이 갈리고 있다. 이 판단은 의외로 간단하게 내릴 수 있다. 이 그림은 겸재가 《주자서절요》의 입수를 기념하여 퇴계선생이 서문을 쓰던 당시의 모습을 재현한 것이라는 점만 분명히 하면 되는 것이다.
이 서문은 1560년 도산서당이 건립되기 두 해 전(1558년) 계상서당에 거주할 때 쓰였다. 그래서 그림의 제목도 ‘도산정거도’라 하지 않고 ‘계상정거도’라 한 것이다. 도산서원이 워낙 널리 알려져 있고 그림의 풍경도 도산서원 입구에서 보는 장면과 얼추 비슷하기 때문에 도산이라고 오해할 여지가 생기지 않았나 여겨진다.
그러나 도산서원에서 낙동강을 건너 맞은편 상류 월란정사 쪽으로 올라가서 바라보면 그림 속 전경과 완벽하게 일치함을 알 수 있다. 다만 먼 거리에서 조그만 계상서당을 부각하려다 보니 겸재의 빼어난 그림 기법에 의해 줌업(Zoom up)이 되었을 뿐이다.
도산서원과 천 원권 지폐 사이에 얽힌 사연만 해도 이렇게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데, 천하를 다니며 관련된 책을 읽을 수 있다면 얼마나 즐거움이 많을까? 그런데 세월은 왜 이리 빨리도 지나가는가!
월란정사 위치도